나를 죽일 집착남주가 이상해졌다-2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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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빙의한 현실에 그럭저럭 잘 적응을 했다.
어쨌거나 내가 쓴 내 소설 속이었으니까.
그리고 빙의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당연히 내가 소설 초반에 썼던 연회였다.
나는 이 연회에서부터 지금까지의 전개를 바꾸고, 생존을 위한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칼릭스에게 ‘이제부터 내가 사랑할 사람은 리온이 아니라 칼릭스 너야’ 라는 내 감정의 극적인 반전을 보여줄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참여한 연회에서,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소를 지어줘야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나는 칼릭스를 보고는 그저 멍해지고 말았다.
칼릭스가, 너무….
완벽하잖아!!
짧게 자른 흑발, 영롱한 벽안, 섬세한 이목구비에 날카로운 턱선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뤄 상당히 단정한 느낌을 주는 조각상 같았다.
큰 키와 체격은 주변을 압도했다.
끝까지 단추를 채운 연회복으로 대부분이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이라는 캔버스는 오밀조밀한 잔 근육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것이 내 두 눈엔 잘도 보였다.
보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찬 두 눈의 시력이 옷을 투과해 버린 것인지, 전지적 작가의 투시도법인지는 모르겠으나.
피부는 또 왜 저렇게 투명할 듯 하얀 건지, 연회 홀의 모든 빛을 그의 피부가 빨아들인 다음 다시 반사하기라도 하는지,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저 얼굴을 만지면 어쩐지 뽀송뽀송할 것 같은 이 확신에 가까운 느낌.
그의 이목구비와 몸은 내 취향을 갈아 넣은 남주답게 완벽했고, 내가 쓴 설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런데…….
어딘가 좀 다르네?
아름답고 화려한 외면과 달리, 내면에는 어두움과 집착을 가득 품고, 흑막 같은 분위기를 풍길 거라 상상한 내 머릿속의 칼릭스와 실제로 본 칼릭스는 이상하게도 풍기는 분위기가 상당히 달랐다.
위험한 마성의 미남으로 설정했는데, 얜 왜 이렇게 반짝반짝 눈이 부시게 화사한 거지?
물론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느낌을 주는 외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외모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나저나 저렇게 생긴 애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집착하다 결국엔 그 여자를 죽여 버린다고?
작가가 진짜 정신 나갔네.
저런 외모가 집착해주면 감사할 일이지. 얘를 놔두고 딴 남자를 사랑한다고 쓰다니.
처음부터 개연성이라곤 없는 설정 오류였어.
나는 자석에 끌리듯 어느새 칼릭스가 속해 있는 무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행히도 그 무리엔 내 오빠인 루크가 있었다.
나는 황태자에게 예의를 갖춰 절을 했다.
“에버레티안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던 칼릭스는 내 인사에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반사적으로 말했다.
“오래…… 아…….”
뭔가 말을 하려던 칼릭스가 입을 다물어 버리고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내게 목례를 했다.
응?
뭐라고?
오래 뭐라고?
오랫동안 내가 다가오기만 기다렸다고 하려다 만 건가?
왜 말을 하다 말지?
내가 너무 반갑게 다가와서 말문이 막혀 버린 걸까?
그래, 그럴 수 있어.
지금까지의 케일린과 칼릭스의 관계를 고려하면 그가 말문이 막혀버렸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따금씩 자신의 손에 들린 와인을 한 모금씩 마셨다.
꿀렁.
나는 와인이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는 모습을 얼빠진 상태로 지켜보았다.
지나치게 섹시하네.
또다시 내가 말도 안 되는 외모의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내 남주인 칼릭스를 관찰하며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으나 그다지 집중할 수는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내가 만든 남주, 황태자 칼릭스는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사교활동을 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귀족들에게 두려움과 경외감을 줄지언정, 담소를 나누며 웃고 어울리는 것은 그의 성정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주로 듣는 편이긴 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단 말이지….
칼릭스를 보며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한 사내가 새로운 이름을 화제에 올리기 시작했다.
“이든 황태자는 늦는군요. 황실에서 환영 연회까지 열어줬는데 말입니다. 소문대로 제멋대로인 모양입니다.”
이든 황태자?
아… 그렇지. 오늘 파티가 이든 황태자를 위한 환영 파티였지.
이든은 에버레티안 제국과 국경을 마주한 다커스 제국의 황태자였다. 바로 여주 에스텔의 오빠이기도 했고.
<이든 - 여주의 오빠, 주변 강대국인 다커스 제국의 황태자, 잘생긴 바람둥이>
이렇게 설정했지.
남주와 여주가 이어지는 계기를 만드는 인물로, 꼭 필요하면서도 그리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내가 빙의한 케일린과의 접점도 딱히 없었고.
내가 이든의 캐릭터 설정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자마자, 사내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든 황태자의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소렐 왕국의 귀족가 영애를 유혹한 얘기 말입니다.”
소문을 들은 사람과 못 들은 사람이 섞여 있었기에 그 사내는 신이 난 듯 계속 설명을 했다.
“소렐 왕국으로 유람 여행을 가서는, 약혼자가 있는 귀족가의 영애를 유혹해, 연애 행각을 벌이다가 약혼자에게 결투 신청을 받았다더군요.”
다른 귀부인이 이어서 설명을 보탰다.
“막상 결투에서는 약혼자가 죽었다면서요. 그런데도 이든 황태자는 약혼자가 죽은 그 영애를 책임지지도 않고 다커스 제국으로 돌아가 버렸다던데요.”
사람들은 한참을 이든의 스캔들에 대해 수군거렸다.
맞다…. 내가 이런 걸 썼었다.
다른 의도는 없었고 오직 칼릭스의 정신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조금 있으면 그 질문을 누군가가 할 텐데….
이든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간 더 이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누군가가 내가 소설에서 썼던 질문을 던졌다.
“여기 계신 남성분들은 사랑하는 여인을 누가 가로채려고 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심지어 그 여인이 자신이 아닌 상대 남자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결투로 목숨까지 잃었다는 그 사내의 얘기를 들으니 새삼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나는 어느새 칼릭스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내가 쓴 대사가 언제 나오나 기다리며.
그는 아무 말 없이 와인 잔만 돌리고 있었다.
누군가 황태자를 지목해서 물어보는데, 누군지 모르겠네….
못 기다리겠다.
그냥 내가 물어봐 버리지 뭐.
“황태자 전하는 어쩌시겠어요?”
내가 그를 지목해서 물어보자 그의 눈썹이 약간 위로 올라가며 눈이 조금 커진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질문을 받아서 놀란 건가?
아니면, 역시 내가 자기에게 질문까지 해주니 황송해서 긴장한 건가?
그러나 금세 감정을 숨기듯,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대답했다.
“글쎄, 사랑이라는 감정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뭐라 할 말이 없군.”
‘철썩’
난 냉수로 뺨을 맞은 기분이었다.
뭐?
네 대사 이거 아니잖아!
사랑이라는 감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
거짓말!
넌 사교성 따위 없어서 말도 별로 없지만, 마음에 없는 말은 절대 못 하는 캐릭터잖아.
그런데 왜 마음에도 없는 얘길 하지?
‘내 여자를 뺏어간 사내, 가질 수 없는 여자라면… 난 다 죽여 버릴 것 같은데…….’
넌 이렇게 말하고 널 사랑하지 않는 케일린에게 끝까지 집착하다 결국엔 죽여 버리는 무시무시한 놈이었잖아!
왜 그렇게 평화롭고 태연하게 정상인처럼 말하니?
아……. 그건가?
더 음험해져서, 무심한 척 연기를 하는 건가?
하긴 저 밝아 보이는 표정과 사교적인 말투까지, 좀 더 발전해서 흑막 수준에 이른 건가?
이렇게 내가 쓴 거랑 다르면 더 불안한데.
그러지 마, 칼릭스!
여주인 에스텔이 나타날 때까지 나는 무조건 네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니까.
그냥 네 집착을 단순하게 드러내!
어차피 앞으로 2년쯤 후에는 여주가 나타날 거였다.
길어봐야 여주가 나타나기까지 2년인데 뭐든 해도 돼!
나는 자신 안의 어두움과 집착성을 갑자기 나타난 사회성으로 교묘히 감춘 채 미소까지 짓고 있는 칼릭스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저렇게 온화한 칼릭스의 태도가 다른 이들에겐 익숙해 보인다는 거였다.
아무 이유 없이 성격 설정이 바뀔 수가 있나?
아니, 아니지!
정신 바짝 차리자!
그게 이유 없이 왜 바뀌어!
쟤가 멀쩡한 척해도, 나는 쟤를 만들어낸 작가거든.
나는 못 속이지.
나는 매의 눈으로 그를 계속 관찰하며 좀 더 그를 예의주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들고 있는 와인잔을 돌리더니 와인 한 모금을 머금었다.
그런데 와인이 그의 목을 타고 넘어가나보다 하는 순간,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헙!’
그윽하기까지 한 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얼어버린 나를 보며, 그는 머금고 있던 와인을 꿀꺽하고 삼켰다.
나를 보며 와인을 마셔?
나를 향한 갈증을 와인으로 해소하는 건가?
그게 어디 되겠니?
그나저나 우리 이렇게 계속 눈 마주치고 있는 거야?
네 과도하게 아름다운 눈과 얼굴은, 정면으로 계속 마주보기엔 너무 부담스러운데.
그의 눈 속 심연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또 막상 눈을 뗄 수는 없었다.
그런 내게 칼릭스가 뭐라고 말을 했다.
“공녀……………있는지?”
네네. 잘 생기셨어요.
참 잘생기셨어요.
나는 세이렌의 목소리에 미혹된 선원마냥, 그의 얼굴에 얼이 빠져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케일린 브록버크 공녀?”
앗!
그가 다시 내 이름을 부르고서야 나는 마침내 미몽에서 깨어났다.
“뭐라고 하셨죠?”
으이그, 미쳤구나.
내 목숨 줄을 쥐고 있는 남주가 하는 말인데 목숨 걸고 잘 들어도 모자랄 판에….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물었는데.”
응? 할 말?
내가 너한테?
네가 나한테가 아니고?
내가 할 말이야,
‘저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그거 하나지만, 그런 걸 말할 수는 없고.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아하!
내가 네게 붙어 있고 친절하게 대해주니 희망은 생겼지만 네 마음을 표현하기 두려운 거구나?
그래서 자기를 향한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지 언질을 달라는 거지?
그래, 그럴 수 있지.
지금까지는 케일린이 너와 눈도 마주쳐 주지 않았을 테니….
그래, 갑자기 짝사랑하던 여자의 태도가 바뀌면 정말 바뀐 건지 긴가민가하기도 하겠지.
여자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나는 작가로서의 이해심과 케일린의 생존 본능을 잘 조화시켜,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로 작정했다.
“아, 황태자 전하! 저는 사랑에 목숨까지 걸 정도로 집요하고 집착하는 사랑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한테 칼 맞고 싶지 않아.
사회적인 동물인 것처럼 애쓰지 말고, 원작대로 어둡게 집착하던 네 모습 그대로 가도 돼.
네 사랑, 내가 다 받아 줄게.
그런데 그 순간 칼릭스가 왼손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왼손 주먹을 쥐는 것은 불안하거나 불쾌하거나 분노했을 때와 같이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올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갑자기 왜 저래?
내 앞이라 긴장해서 저러나?
워… 워… 진정, 진정해!
그러나 다행히도 그는 금세 주먹 쥔 왼손을 풀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브록버크 공녀는 취향이 특이하군. 꼭 그런 사랑을 하길 바라지.”
뭐?
내 취향이 특이하다고?
무슨 소리야?
네 취향에 맞추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