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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집착남주가 이상해졌다-1화

본문

쿵푸벳

- 1 -

칠흑 같은 밤, 어둠에 의지해 다커스 제국으로 떠나기 위한 마차에 올라타려던 내게, 아버지가 다가오셨다.

“네 결혼식에 맞춰 다커스 제국으로 가마.”

나를 꽉 끌어안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잠겨 있었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나는 애써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아버지.”

옆에서 오빠인 루크가 재촉하자 언제까지고 나를 안고 있을 것 같던 아버지가 마침내 포옹을 푸셨다.

나는 루크에게도 내 결혼식 날짜에 맞춰서 다커스 제국으로 오라고 했지만, 그는 나를 지켜줘야 한다며 한사코 고집을 부려 기어이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결국 다커스 제국으로의 야반도주 마차에는 나를 포함하여 마부와 하녀 한명, 그리고 루크까지 4명이 올라탔다.

수심에 가득 찬 아버지를 뒤로하고 마침내 우리 일행을 태운 마차는 다커스 제국의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마차의 진동이 심해졌다.

수도 에버렌의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리던 마차가 어느새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와 비포장의 흙길 위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흙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워어어어!”

갑자기 마부가 말들을 세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마차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루크가 마부석으로 난 유리창을 통해 마부에게 물었다.

“앞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공자님.”

“뭐가 있다니 무슨….”

마부의 말에 미처 루크가 뭐라고 대답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덜컥!’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

문을 연 것은 완벽히 제복을 갖춰 입은 기사였다. 그리고 난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황태자 직속 기사단의 부단장, 라지프.

“무슨 짓이냐!”

루크가 소리쳤다.

그러나 곧이어 라지프의 뒤로 위압적인 인영이 그 모습을 드러내자 루크는 입을 닫고 말았다.

모습을 드러낸 이는 황태자 칼릭스였으니까.

그 순간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칼릭스의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였다.

“케일린, 어디 가는 거지? 이 어두운 밤에?”

“전하….”

어디 가긴, 너한테서 달아나고 있었지.

그런데 그 길은 이미 막혀버린 것 같네.

마차의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칼릭스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다커스 제국으로 달아나는 것은 실패했다는 것을.

나는 이미 그에게 잡힌 것이었다.

“브록버크 공작가의 공자와 공녀가 이 한 밤에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걸까?”

칼릭스가 냉소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정말 궁금하기라도 하다는 듯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니?

이미 다 알고, 이렇게 나를 잡으러 온 거잖아!

“제 누이의 결혼을 위해 다커스 제국으로 갑니다. 길을 열어주시지요.”

루크가 말했다. 겁도 없이.

그래, 루크로서는 못할 말도 아니지.

표면적으로 나는 정말 결혼을 위해 예정보다 일정을 조금 당겨 출발한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칼릭스가 내게 집착하다 나를 죽일 남주라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루크의 당당한 대답에 칼릭스가 어떻게 반응할지 신경이 곤두서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우려와 달리, 루크의 대답에도 칼릭스는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루크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결혼을 위해 다커스 제국으로 간다라…….”

그러나 똑같은 무표정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지금까지보다 확연히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그 냉랭함이 너무나 서늘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마치 저녁 메뉴를 선택하는 문제인 것처럼 가볍게 질문했다.

“루크포드 공, 선택을 하게. 지금 여기서 나와 칼을 맞대고 싸움을 벌인 뒤에 케일린을 넘길 텐가, 아니면 조용히, 평화롭게 케일린을 넘길 텐가.”

칼…

또다시 몸이 떨려왔다.

저게 무슨 선택지야, 협박이지.

어차피 그에게 잡힌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나 루크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왼손은 칼집을 오른손은 칼자루를 쥔 채 마차의 좌석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미친!

죽겠다는 거야, 뭐야!

결연한 루크와 경악한 나를 차례로 지켜보며 칼릭스는 나른함까지 느껴질 정도의 차분한 말투로 설득인지 조롱인지 모를 소리를 해댔다.

“지금 여기서 쓸데없이 칼을 빼 들었다가 여동생에게 오빠가 죽는 꼴이나 보여주기보다는 케일린을 곱게 넘기는 것이 더 나은 선택지일 텐데. 나도 케일린 앞에서 공을 죽이고 싶지는 않거든. 케일린이 놀라서 기절이라도 하면, 내 마음도 너무 아플 것 같은데.”

내가 기절이라도 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나를 칼로 찔러 죽일 놈이 어지간히도!

그러나 분명한 건, 어처구니없게도 칼릭스가 하는 모든 말이 진심일 거라는 거였다.

내 오빠인 루크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는 것도, 내가 기절하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는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크를 죽여 버릴 수 있다는 것까지.

그러나 루크는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칼릭스가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한다 해서, 동생을 지키려는 의지가 약해지는 오빠가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황태자 전하! 케일린은 자기가 원하는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떠나려는 것뿐입니다. 전하께서 그걸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길을 열어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칼로 길을 열 수밖에 없습니다!”

루크, 지금 그런 말 따위를 할 때가 아니잖아!

쟤는 진짜 다 죽일 수 있다고!

죽일 능력과 의지를 모두 가진 인간 앞에서는 동생을 위한 가상한 용기도 그저 목숨을 내놓은 만용일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루크의 말에 칼릭스의 눈이 사납고 위험한 빛을 뿜어냈다.

“케일린이 원하는 남자?”

분노를 억누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눈은 본능적으로 칼릭스의 왼손을 향했다.

역시나 불끈 쥐어진 그의 왼손 주먹엔 힘줄들이 사납게 솟아올라 있었다.

안 돼!

그를 화나게 해선 안 돼!

어차피 다커스 제국으로 가는 건 이미 실패야.

“루크!”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오빠를 불렀다.

그러나 루크는 여전히 칼릭스를 노려보며 꿈쩍도 하지 않으려 했다.

“오빠, 제발 그러지 마.”

나는 칼집에 닿아있는 루크의 손을 붙잡고 끌어당기며 사정하듯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루크는 조금도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오빠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으로 옮겨갔다.

그의 시선에 나는 이상한 섬뜩함을 느꼈다. 나는 슬그머니 잡고 있던 루크의 손을 놓았다.

그제야 칼릭스의 시선은 루크의 얼굴로 옮겨갔다.

그는 짧게 뇌까렸다.

“내가 원하는 건 케일린이지, 네 목숨이 아니야. 무모하게 굴지 마라, 루크.”

“!!!!”

루크?

그 순간 나는 놀람으로 눈이 커졌다.

칼릭스가 내뱉은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내 오빠를 부른 호칭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히 내 오빠를 지금까지처럼 루크포드 공이 아니라 ‘루크’라고 불렀다.

마치 소년 시절, 루크와 어울려 놀던 때처럼.

루크 역시, 칼릭스가 자신을 부른 호칭 때문에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것 같았다.

여동생을 위해 목숨을 건 칼싸움도 불사하려던 그의 마음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끼어들며 루크의 적개심이 그 순간 약간은 누그러뜨려 진 것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칼릭스가 왜 내 오빠를 ‘루크’라고 부른 것인지, 루크의 심리 변화를 노리고 그런 것인지, 어쩌다 무의식중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칼릭스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 순간 루크의 마음이 흔들린 것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루크, 난 정말 괜찮아. 오빠가 전하와 싸우지 않으면 좋겠어. 제발. 응?”

이미 칼릭스가 자신을 부른 호칭인 ‘루크’에 약간 흔들린 모습을 보였던 루크는 내 애원하는 것 같은 말과 행동에 마침내 칼릭스를 향해 달려들 것만 같던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루크가 무모하게 칼릭스에게 달려드는 일촉즉발의 상황은 넘긴 것 같았다.

나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칼릭스를 향해 말했다.

“다커스 행은 포기하겠습니다. 공작저로 돌아갈 테니 전하도 이만 돌아가시지요. 못 미더우시면 제가 마차를 돌려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켜보셔도 됩니다.”

내 말에 칼릭스가 잠시 고민을 하는 것인지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 루크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더 이상 뭐라고 말은 하지 않고 있었다.

닫혔던 칼릭스의 입이 마침내 다시 열렸다.

시선은 내게 고정한 채, 그는 그의 기사단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케일린 브록버크 공녀가 탄 마차는 브록버크 공작저로 돌아간다. 공녀는 에버레티안 제국의 황태자비가 될 것이니 지금 이 순간부터 황태자 직속 기사단의 호위를 받는다!”

‘!!!!!!’

에버레티안 제국의 황태자비?

하아…….

기어이 이렇게 되는 건가!

결국엔 내게 집착하는구나.

나한테 집착하랄 때는 그렇게 안 하더니.

왜 이제야 이러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돌변에 새삼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 내게 집착하는 저 황태자 놈의 칼에 내가 죽을 날이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나는 처음부터 다시, 죽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

내가 에버레티안 제국의 공녀, 케일린으로 빙의한 것은 약 1년쯤 전이었다.

에버레티안 제국의 황위 계승 후보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전 황후의 아들인 황태자 칼릭스, 또 다른 한 명은 현 황후의 아들인 리온 대공.

두 사람 중 한 명은 황제가 될 것이고, 나머지 한 명은 황제가 된 형제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해야만 하는 사이였다.

로판 소설 속 전형적인 설정의 이복형제.

비록 현재, 황태자의 지위에 있는 것은 칼릭스였지만 현 황후가 황후가 된 지 10년이 훨씬 지나버린 지금, 황제는 철저히 중립적인 입장이었다.

황태자 칼릭스가 가진 것은 실력이었다.

그에 비해 리온 대공은 현 황후의 가문과 황후가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인 귀족 가문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리온 대공은 결정적인 하나를 더 가지고 있었다.

에버레티안 제국의 재상이자 실세인 루크타인 브록버크 공작의 하나뿐인 딸로 부와 권력, 거기에 미모까지 가진 공작가의 공녀가 대공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녀의 이름은 케일린 브록버크.

바로 내가 빙의한 인물이었다.

황태자와 대공, 두 사람에게 동시에 사랑을 받은 그녀는 안타깝게도 남주인 황태자가 아닌 리온 대공을 사랑한다.

그리고 사랑에 목숨을 건 케일린은 리온 대공을 위해 칼릭스에 대한 반역 모의에 동참한다.

그런데 애초에 남주는 칼릭스거든.

당연히 반역 세력을 다 죽여 버리고 황제가 되는 건 칼릭스라는 말이다.

케일린은 모반에 실패한 후 칼릭스에게 잡히자 이렇게 외친다.

“칼릭스, 네 황후가 될 바에야 차라리 죽겠어. 나를 죽여!”

나를 죽여?

우와, 패기 좀 보소.

뭔 독립운동하니?

도대체 작가가 누구니?

그래….

나지….

내가 저렇게 썼다.

어처구니없게도 죽기 직전에 쓴 장면이 저거다.

남주가 케일린을 칼로 찔러 죽이는 장면을 쓰고 카페를 나서다 차에 치였는데, 하필 내가 그 케일린에 빙의를 했단 말이다!

왜 하필 남주한테 칼 맞아 죽는 케일린이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는 그거 하나였다.

이름이 같다.

케일린, 김 린.

케일린의 애칭은 린. 내 이름은 그냥 린.

똑같다.

종종 현실에 있는 이름을 바꿔서 소설 속 인물들 작명을 하던 내 습관대로, 내가 저따위로 작명을 해 놨다.

아니, 내가 얘로 빙의할 줄 상상이나 했겠냐고! 빙의는커녕 차에 치여 급사할 줄도 몰랐다고!

현생에서 스물넷에 죽었는데, 케일린도 스물넷에 칼에 맞는다.

평행이론이야 뭐야

빙의한 나이는 스물둘.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더니, 아직 내가 쓴 대로 죽기까지는 2년이라는 여유가 있었다.

죽지 않으려면 그 2년 안에 내가 죽어버리는 소설의 전개를 바꿔야 했다.

10년 동안 소꿉놀이처럼 키워온 케일린과 리온 대공의 사랑 따위는 하루아침에 날려버리고 남주인 칼릭스를 사랑하(는 척 하)고 칼릭스를 지지하는 것으로.

그렇게만 하면, 역모에 관련되어 칼릭스의 칼에 맞는 일도 없을 것이었고, 외사랑에 절망한 칼릭스의 칼에 맞는 일도 없을 터였다.

복잡할 것 하나 없는 그야말로 단순하지만 확실한 생존 계획이었다.

남주가 이상해지지만 않았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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