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가 돈으로 나를 조련한다 (7)화
본문
07.
“나를 바람 맞히고 즐거웠나, 로즈?”
황비의 궁에서 돌아온 나를 카시안은 미소로 맞이했다.
“덕분에 나는 쓸쓸히도 월 플라워가 되는 수밖에 없었는데.”
“춤 신청을 해 주길 바라는 아가씨들이 많았을 텐데요?”
“난 꽤 일편단심이라서.”
그냥 귀찮은 게 싫은 것뿐이면서.
온갖 귀족 영애들과 염문설을 뿌리고 다니는 1황자와 달리 카시안은 그쪽 방면으로 정말 깨끗했다.
내가 수도에 오기 전에도 무도회에서 춤을 절대 추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래서 당연히 오늘도 마찬가지일 줄 알았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와 첫 춤을 춰 버렸다.
“그래서, 연장 근무의 보너스가 필요해?”
카시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았다.
단맛을 줄였다고 했으면서 혀가 오그라들 정도로 달았던 그 맛을 지우고 싶었다.
*
나는 부드럽게 구워진 소고기를 큼직하게 잘라 입에 넣었다.
잘 구워진 아스파라거스의 향긋한 향과 깊고 진한 와인이 뒤이어 입 안을 씻어내 주었다.
그렇게 스테이크의 반을 먹어치울 때까지도 카시안은 묵묵히 와인만 마시며 날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로즈가 유혹에 넘어가도 원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약간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은 했다.
사람을 뭘로 보고!
“너무하시네요, 전하. 절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셨다니.”
나는 정정당당하게 버는 돈에만 쉽다고!
평소와 다름없는 내 말투에 카시안이 팔을 뻗었다.
짠 하고 그가 멋대로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친 소리가 울렸다.
“그거야말로 너무한데. 로즈는 무척 어려운 사람이야.”
그러기엔 날 움직이는 방법을 너무 잘 아는데.
나는 전투적으로 움직이던 식기를 내려놓고 카시안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황비 전하께서 저를 전하의 곁에서 치우고 싶으신 것 같았어요. 앞으로 3개월 동안 전하가 하는 일을 먼저 알려 주기만 하면 영지의 빚을 전부 다 갚아 주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차라리 카시안의 약점을 잡아 달라고 말했으면 좀 나았을 텐데.
그저 날 치우는 게 목적이라니, 어쩐지 더 찝찝하고 짜증이 났다.
“너무 그렇게 속상해하지 마, 로즈. 황비가 멍청이가 아니란 소리니까.”
“…네?”
“그대가 오고 난 뒤, 폐하께서 내게 넘기는 일이 더 많아졌으니까.”
나는 그 말에 잠시 생각했다.
실제로 카시안과 일하던 초기와 지금의 업무량 차이가 크게 나는 건 사실이었다.
“황비는 내게 줄곧 제대로 된 보좌관을 붙이지 않으려고 손을 썼어.”
“1황자 전하는 보좌관을 다섯씩이나 두시는데 말이에요.”
“그래, 그것도 모두 수도에서 똑똑하다고 소문난 자제들로 골라서.”
카시안이 음험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가 그대에게는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었지.”
그야 그렇겠지, 제국 구석에 처박힌 영지의 귀족 영애라니.
심지어 이력도 없으니 견제할 필요가 있나.
“그런데 그게 황비의 계산 밖이었던 것뿐이야. 그대가 일을 이렇게까지 잘해 줄지, 그것도 연장 근무까지 해 가면서 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어째서인지 카시안이 ‘나는 아니었지만.’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대가 온 뒤로 1황자에게 넘어가는 중요한 일이 많이 줄어들었어.”
카시안은 와인으로 목을 가볍게 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속이 좀 좁지만 아둔한 군주는 아니야.”
그렇군요, 라고 난 속으로만 맞장구쳤다.
입 밖으로 내면 난 황족모독죄다.
“그러니 황비는 그대를 치우고 싶은 거지. 내가 처리하는 업무량이 줄어들어야 1황자의 면을 세우면서 날 깎아내릴 수 있을 테니.”
카시안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내게 다시 질문했다.
“그래서 로즈는 왜 거절한 거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자신이 있었던 얼굴이면서.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이상한 것을 일부러 입에 담았다.
“성격 나쁘고 못생겼다고 소문난 이레놀 자작가의 차남을 남편으로 주겠다고 해서요.”
황비의 시녀였던 이레놀 자작 부인이 어찌나 손해 본다는 듯한 얼굴을 하던지.
그런 쓰레기는 내 쪽에서 사절이었다.
그런데 내 말에 분명 놀리듯 웃음을 터트릴 거라고 생각했던 카시안은.
“…그대에게 그딴 것을 들이댔단 말이지.”
어째서인지 섬뜩하게 깊은 눈을 했다.
*
황실 무도회가 모두 파하고, 대부분의 초대객들도 돌아가 조용한 밤.
카시안은 마차를 내어 나를 데려다주었다.
내 마음을 헤아린 건지, 도수 높은 와인을 준비해 준 탓에 조금 의식이 몽롱했다.
그래도 상사 앞이라는 생각으로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지탱하고 있으려 했지만.
“괜찮아, 로즈. 자도. 그런 걸로 그대의 소중한 수당을 깎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카시안이 너무도 달콤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고작 마차로 10분 정도의 짧은 거리였음에도 나는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정말 별일이 다 일어난 밤이라 그랬을까, 나는 이상한 꿈을 꿨다.
아주 어린 시절의 카시안이 내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정말 생생히 울리는 꿈을.
‘그대는 여전히 내게 유일한 존재야.’
무슨 이런 개꿈이 다 있담.
어린 카시안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실은 원래 세계에서 꿈을 꾸고 있던 건가,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깨어 버렸다.
퍼뜩 눈을 뜬 나를 보고 카시안이 작게 웃었다.
“모처럼 그대에게 내어 준 와인이 쓸모없게 되었군?”
조금은 현실이길 바랐는데.
장난스럽고 익숙한 그 목소리에 오히려 안도감이 들어 스스로가 어이없어졌다.
*
비록 8시간가량 손해 보긴 했어도 정말 오랜만의 꿀 같은 휴식이었다.
두둑한 수당과 전리품이 나를 푸근하게 만들어 줬다는 것 또한 행복했고.
누군가와 만나지 않고 온전히 나 혼자만의 사흘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충만해졌다.
수도에 온 뒤로 이렇게 제대로 사흘을 쉬는 건 처음이라서.
점심시간을 좀 지나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대충 숄만 두른 후, 하녀가 미리 만들어 둔 식사로 배를 채우고 느긋하게 쌓인 편지들을 확인했다.
우선은 부모님의 편지부터였다.
모처럼이니 평소보다 공을 들여 답장을 쓰고 싶었다.
늘 졸음과 피로에 쫓겨 겨우 편지를 써 죄송하던 차였다.
‘엄청 걱정하고 계시는데.’
일하러 수도에 가겠다고 했을 때, 지금껏 내가 뭘 한다고 해도 어지간하면 응원해 주던 분들이 만류했었다.
‘우리가 더 일하면 된다, 네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아도 돼.’
‘그래, 로젤리타. 정 안 되면 작위와 영지를 팔고 왕국이라도 가면 된다.’
물론 내 고집에 끝내 굽혀 주신 것도 부모님이지만.
매달 내게 보내는 편지에는 늘 애정이 가득했다.
그리고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된다는 내용과,
내게 제발 돈을 보내지 말라는 내용을 꼬박꼬박 적어 두시곤 했다.
‘설마…. 내가 보낸 돈을 상환에 쓰지 않으신 건 아니겠지?’
애정 가득한 부모님이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에 나는 이번에도 꼭 빚을 갚으시라고 강조해 당부했다.
덧붙여 계속 염려했던 데뷔탕트 무도회도 카시안의 행동을 동화처럼 잘 포장해 적어 보냈다.
그가 그런 성격이란 걸 알면 마음 여린 두 분이 당장 수도에 날 데리러 올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만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께 당부와 안심하라는 내용을 더한 답장을 쓰고, 다른 편지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오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원래는 오늘 서점에 갈 생각이었는데.’
나는 소파에 드러누운 채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오늘 늦잠까지 잤는데도 이상하게 또 졸린 기분이었다.
‘그냥 내일 갈까.’
옷 갈아입고 나갔다가 또 씻고 잘 생각을 하니 다 귀찮아졌다.
그럼 어차피 오늘은 책을 읽을 시간도 없을 테고…. 하지만 오늘 사 오면 내일은 아예 안 나가고 하루 종일 책만 읽을 수 있는데.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런 시답잖은 생각으로 가득한 때였다.
오늘은 하녀도 없는데.
심지어 나는 잠옷 차림에 머리까지 산발이고.
그냥 없는 척하면 가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나는 서둘러 머리를 대강 묶고 잠옷을 가릴 만한 긴 가운을 찾았다.
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와 죄송합니다. 살리체 남작가의 로젤리타 님이시지요?”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들릴 무렵, 문을 연 나는 방문자가 내민 편지 속 인장을 보며 짜증을 눌러 참아야만 했다.
“내일 점심, 이레놀 자작가의 식사 모임에 참석하라는 자작 부인의 초대입니다.”
난 의사를 꽉꽉 눌러 거절했는데.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황비 전하. 저는 부모님께 신의를 함부로 저버리는 사람이 되지 말라 배웠습니다.’
그것도 황비 입장에서 건방지다고 느낄 만한 소리로.
“저희 둘째 도련님도 참석하시는 자리입니다. 아가씨를 위해 특별한 디저트도 준비할 테니 꼭 참석하시라는 당부의 말씀을 자작 부인께서 함께 전하셨습니다.”
응, 안 사요.
아무래도 내일은 자체 출근할 날인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