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가 돈으로 나를 조련한다 (5)화
본문
05.
“나오지 마십시오, 보좌관님.”
카시안이 붙여 준 기사가 마차 바깥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물론 나도 나갈 생각 없었다.
애초에 ‘그’ 카시안이 붙인 기사들이고, 황실 기사가 어지간한 자들에게 질 리도 없을 테니까.
‘그보다 예식원장의 발목을 걸 생각을 해야지.’
나를 만만하게 보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다니, 감사하게 잘 써먹겠습니다. 예식원장님.
역시 인생의 연륜이 남다르시네요!
“되도록 무사하게 생포해 주세요.”
나는 그렇게 문 너머로 기사들에게 지시한 뒤.
탁.
늘 가지고 다니는 업무 거리를 꺼내 들었다.
‘야근을 해 두자.’
제압하는 사이 뭐라도 해 둬야 카시안에게 양심의 가책 없이 추가 수당을 요구하지.
“으억-! 컥!”
그렇게 바깥에선 근위 기사에게 제압당하는 허접한 납치범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슥, 스슥.
마차 안에서는 그 소리를 지우듯 정갈한 펜 소리만 이어졌다.
*
납치 시도까지 해 준 덕분에.
그간 저지른 죄까지 더해 예식원장의 자리가 날아가는 데는 고작 하루면 충분했다.
뭐, 예식원장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이렇게 명망 높은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알맹이 없는 억울함을 토해 냈지만 카시안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다.
그 외에도 압류한 자료를 통해 예식원 구성원들이 줄줄이 날아갔다.
덕분에 일주일 동안 집무실은 온갖 항의로 소란스러웠으나 감사를 한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나도 카시안도 적당히 무시할 건 무시하며 그 폭풍 같은 일주일을 견뎌 냈다.
그렇게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오늘도 6시까지 꼼짝도 못 하고 업무를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래도 행복해…!’
오늘만 힘내면 내겐 주말을 포함해 사흘의 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칼퇴한 뒤에 집에서 사흘 내내 집에서 뒹굴거릴 예정이었다.
토요일에는 서점에 들러 소설을 잔뜩 사 와 주말 내내 그걸 읽고, 그간 못 먹었던 파이를 종류별로 구매해 밥 대신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알람도 끄고, 가장 두꺼운 커튼을 친 후 늘어지게 늦잠까지 잘 생각이었다.
상상만 해도 너무도 행복해서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서류를 서둘러 처리했다.
입가가 행복하게 간지러워졌다.
그러나 그때.
“로즈.”
불길한 목소리가 들렸다.
*
“흐으으음….”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이.
어깨 아래를 내려다보자 실소가 피식피식 터졌다.
이렇게까지 제대로 갖춘 야회용 드레스 차림이 어찌나 낯설고 어색한지.
일하기 편한 옷만 찾아 입은 업보인가?
그래도 직장에 예쁜 옷 입고 출근해 봐야 슬프기만 하잖아.
그런 연유로 나는 지금 좀 슬펐다.
수도에서 유명한 의상실 드레스를 입고 연장 근무나 해야 한다는 사실이.
은은한 연보랏빛 원단 위, 레이스로 과하지 않게 어깨와 네크라인 부근을 장식한 드레스가 이렇게나 예쁜데.
현재 시각, 7시 28분.
불과 두어 시간 전만 해도 퇴근해서 노닥거릴 생각에 행복해하던 나는 또 추가 수당의 노예가 되었다.
카시안 아르테즈가.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도록 해.’
다짜고짜 이런 말을 내뱉은 탓이었다.
그것도.
‘물론 수당은 2배가 아니라 3배로.’
내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조건까지 걸어서.
그 확신에 찬 재수 없는 얼굴이라니!
안 갈래요. 라고 말해서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을 정말 보고 싶었는데….
그랬는데….
‘입을 건 이쪽에서 준비하지. 오늘 밤에 착용한 건 다 그대 거야.’
정말로 얄미운 상사는 내게서 긍정의 대답을 이끌어 내는 데 천재적이었다.
뭐….
‘사실은 돈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카시안이 말한 순간, 데뷔탕트 무도회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해 데뷔탕트 무도회를 놓친 귀족 자제들이 대신 첫선을 보이는 자리기도 했다.
물론.
‘연말 황실 무도회에 참석할 자격이 되는 고위 귀족 자제들만 해당되는 일이긴 해도.’
빈정거려 봤자 아무렴 어때, 데뷔탕트 무도회 무새 하나는 퇴치할 수 있는데.
고작 남작 영애 운운 하나만 남기는 게 낫지.
나는 드레스 자락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7시 30분. 카시안이 오겠다고 한 시간이었다.
상사를 기다리게 할 순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연 순간, 이미 그 근처에 서 있던 카시안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로즈, 그대는 정말 시간에 철저해. 이럴 때는 보통 기다리게 하는 법인데.”
그 말에 나는 오히려 의아해졌다.
얜 왜 미리 와 놓고 노크도 안 한 거지?
*
“잘 어울려.”
홀로 향하며 카시안이 툭 내뱉었다.
“전하도 오늘 정말 멋지시네요.”
그의 말에 답례하듯 이야기하자, 어째서인지 카시안이 또 낮게 웃었다.
과로 스트레스인가? 오늘따라 너무 즐거워하는데.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잘 어울려, 로즈.”
…좀 억울해졌다.
나도 예의상 한 빈말만은 아니었는데.
카시안 아르테즈는 알맹이는 어찌 되었건 간에 겉모습만큼은 정말로 훌륭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제대로 예식용 제복을 갖춰 입은 것이었다.
실용성이라곤 없다며 그가 몇 번인가 깎아내렸던 그 제복이었다.
그와 반비례하게 심미성만큼은 무척 넘치는 옷이 안 그래도 위협적이리만큼 잘난 그의 외모를 더욱 부각시켰다.
어이없다는 감정을 덜지 못한 채 바라보자, 그는 그 기색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팔을 들어 보였다.
“연장 근무는 해야지.”
“네, 그런데 정말 파트너로 참석만 하면 되는 건가요?”
나는 두어 시간 전 그에게 했던 말을 다시 물었다.
내가 그의 보좌관이 된 이후, 그는 어지간해선 사교계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꼭 참석해야 할 땐 혼자 잠깐 출석만 하고 말았는데.
카시안 아르테즈가 무언가 의도 없이 자신의 시간을 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 그대가 내게 두 번씩이나 질문하다니 드문 일이네.”
저녁때와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
“카시안 아르테즈 황자 전하와 로젤리타 살리체 양이 드십니다!”
알아서 추후 업무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둘 수밖에.
나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카시안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섰다.
*
처음 본 무도회의 광경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시선이 따가웠다.
“어쩜, 살리체 양이네요.”
“살리체? 이런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신분이던가요? 백작가 이하는 연말을 따뜻한 집 안에서 보내던 것 아닌가요?”
“황자 전하께 주제도 모르고 조른 모양이에요.”
“누가 아니래요, 감히 연말 황실 무도회에서 첫선을 보이려고 하다니. 그것도 황자 전하와!”
나는 헛웃음이 나오지 않도록 얼굴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대신.
“전하. 저쪽을 한 번만 봐 주시겠어요?”
“…어째서지?”
“전하를 좋아하는 분들께 보답을 하시면 좀 더 이미지가 나아질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카시안은 픽 웃으며 그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독 볼륨 조절을 못 해 다 들리게 떠들던 무리의 목소리가 훅 조용해졌다.
“그대는 참 효율적이야.”
“전하께 잘 배운 덕에요.”
내 말에 카시안이 조용히 미소만 짓고서 능숙한 에스코트로 황제 내외 앞으로 이끌었다.
이 연말 황실 무도회가 데뷔탕트 무도회 대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황제 내외가 꼭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보편적으로 귀족 자제들이 사교계 입성을 할 때 남성은 황제에게, 여성은 황후 또는 그에 준하는 황실 여성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관례였으니까.
그러니 나도 오늘 공석인 황후 대신 황비에게 인사를 드리면 드디어 데뷔탕트 무새들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다.
“왔느냐, 카시안. 이런 자리에서 널 보는 건 매우 오랜만인 것 같구나.”
“폐하께서 맡기신 일을 처리하다 보니 시간이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네게 일을 너무도 많이 맡긴다고 항의라도 하는 것이냐?”
황제는 카시안의 답이 탐탁잖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럴 리가요, 형님과 달리 제 능력치가 보잘것없어 그러는 것이지요.”
카시안은 그렇게 말하며 웃는 낯으로 황비와 잠시 눈을 마주했다.
황비의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저 말이 ‘맨날 노닥거리는 1황자와 달리 자기는 일이 넘쳐난다.’라는 의미라는 걸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닌 사람이었다.
심지어 1황자는 오자마자 황제에게 인사만 드리고 귀족 영애들에게 둘러싸여 노닥거리는 중이었으니.
황비는 소중한 제 아들에게 혹여라도 불똥이 튈까, 서둘러 입을 열었다.
“폐하, 그보다 레이디를 이렇게 세워 둬선 안 되지요. 카시안 황자, 그대도 그대예요. 이리 대화가 오래 이어지면 파트너가 무안하지 않겠어요?”
은근히 가당찮단 기색이 황비의 얼굴 위에 드리워지는 게 보였으나, 금방 미소에 가려졌다.
한편으로는 이러려고 카시안이 일부러 황제에게 아까 전과 같은 말을 내뱉었나 살짝 감사해지려던 차였는데.
“황제 폐하, 인사 올리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제 보좌관인 살리체 남작가의 로젤리타 양입니다.”
돌아 버린 내 상사는 인사받을 준비를 하던 황비 대신 당당히도 황제에게 나를 들이밀었다!
황비의 여유롭고 은은하며 기품 있던 미소에 금이 갔다.
이게 목적이었냐!
남주가 날 구실 삼아 당당히도 황비를 물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