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주가 돈으로 나를 조련한다 (1)화
본문
01.
탁.
툭.
척.
이 소리는 다름 아닌 각양각색으로 내 앞에 서류가 놓이는 효과음이었다.
“…….”
“손이 멈췄어, 로즈.”
이 미친 악덕 상사 같으니.
“꽤 한가로운가 봐?”
나는 미친 일감의 제공자를 지그시 노려보아 시위한 뒤, 얕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손이 온통 잉크투성이였다. 가운뎃손가락의 첫 마디는 지난 삶, 수험생일 때보다도 더 울퉁불퉁해져 있었고!
정말이지 전생에 욕하며 두들겼던 노트북 키보드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나는 속으로 불만을 수십 개쯤 내뱉었으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슥삭거리는 펜촉 소리에 집중하며 미친 양의 서류를 계속해서 처리해 나갔다.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분명 나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으로 빙의했을 텐데.
운명 살짝 좀 비틀었다고.
집안이 쫄딱 망하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요, 신이시여…!
*
로젤리타 살리체, 살리체 남작가의 소중한 외동딸.
그게 바로 내 두 번째 삶의 이름이며 신분이었다.
두 번째 삶이라니, 취미 삼아 읽던 소설 속에서 숱하게 봤으면서도 그게 내 일이 될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만약 이런 미래를 알았다면 이런 작품이 아니라 말랑말랑하게 힐링만 가득한 작품만 골라 읽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사랑 잔뜩 받는 막내나, 그 막내를 곁에서 모시는 시녀1쯤으로 태어났을 텐데.
하지만 지난 삶,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자 손에 들었던 소설은 너무도 많았으며 장르 또한 무척이나 다양했다.
그러니 그 다양한 책들 중 고르고 골라 하필 피폐물 속에 태어났을 때 나는 깨달았어야 했다.
‘운이 지지리도 없다는 걸.’
하지만 그러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장르가 피폐물이라고 해도 내가 빙의한 대상은 악역도, 한두 줄짜리 엑스트라도 아닌 주인공이었으니.
‘비록 일곱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나들고 툭하면 납치와 협박에 휘말리는 삶이었지만, 마지막은 확실한 해피 엔딩이고.’
그랬기에 피폐물 속 주인공으로 태어났단 걸 깨달았을 때 솔직히 운명을 바꾸고 싶긴 했다.
나는 이전 삶에서도 소설과 예능 프로그램으로 스트레스를 풀던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는 주인공이라니.
할 수 있을 리가.
‘신이시여, 왜 하필 저를 이런 삶에 들게 만드셨는지 모르겠으나 저는 합당치 않습니다.’
일곱 살 무렵, 나는 이 세계가 그 피폐물 소설 속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마음속으로나마 신께 나의 역량을 고해바쳤다.
그렇기에 어쩌면 이 세계에 나타났을지도 모를 의욕적인 악역이나 엑스트라 빙의자에게 내 역할을 기꺼이 양보하길 바랐다.
나는 거창한 작품 속 주인공이길 바란 적 없어.
그냥 평범하고 안온한 내 삶의 주인공이면 그걸로 만족해.
내가 태어난 살리체 남작가는 적당히 건실했고, 부모님 또한 다정한 데다가 허튼짓 안 하는 분들이었다.
작품 속에서 줄곧 여주인공을 걱정하고 응원했듯 내 부모님으로서도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내 운명을 조금 바꾸었을 뿐이었다.
어린 시절 남주를 구해 주는 것으로 엮이고 휘말리는 주인공 로젤리타의 삶을 그저 평범한 시골 귀족 영애의 삶으로.
그때까지 나는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자 한 게.
‘미안하구나, 로젤리타.’
‘사랑하는 우리 딸, 하필 데뷔탕트 무도회를 앞둔 해에….’
집안이 쫄딱 망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러야 할 줄은.
*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로젤리타가 작품에서 벌였던 사업을 나도 하는 건데.
값비싼 것들을 다 팔아치웠음에도 간신히 영지와 저택만 지켜 낼 수 있었던 집안을 보며 크게 후회했다.
심지어 여전히 갚아야 할 빚까지 남아 있었으니.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주인공의 몫에 손대면 내가 정말 주인공의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러나 이제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사업? 그것도 기반이 있어야 하지.
이미 떠나가 버린 기차에 손 흔들어 봐야 역주행해 줄 리가.
‘그래도 너무 염려 마렴, 로젤리타. 우리가 너 하나는 꼭 지켜 줄 테니.’
사람 좋고 다정한 부모님은 그렇게 말했으나, 그 말 하나만 믿고 가만히 있을 나도 아니었다.
전생에서도 나 하나를 건사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던 내가 아니던가.
사지 멀쩡하고 건강하게 큰 내가 부모님에게만 의지해 가만히 있다니, 그거야말로 어불성설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래 영애들과 달리 데뷔탕트 준비가 아니라 취직 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남작 영애라는 신분은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 온갖 곳을 뒤지고 수소문해야만 했다.
애초에 신분만 보고 퇴짜 놓는 곳이거나 불법적인 일을 하는 곳뿐이라.
천신만고 끝에 나는 겨우 정당하고 합법적이며 심지어 꽤 높은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제 2황자 집무실 보좌 구함>
비록 그게 남주의 보좌직이었지만….
남주라니, 내가 쟤랑 안 엮이려다가 이렇게 된 건데.
하지만 인간은 나약했고 결국 나는 지원서를 넣고 말았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책 속 운명이니 뭐니 따질 때인가? 사람은 밥 없이는 살 수 없는 법이다.
그토록 얽히지 않길 바랐던 남주였는데 지금은 이토록 간절하다니.
지원서를 넣고 채 2주가 지나기도 전에 내게는 면접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렇게 열아홉 살의 겨울.
나, 로젤리타 살리체는 가문을 어떻게든 지켜보겠다고 수도행을 택했다.
공교롭게도 원작 속 로젤리타가 남주와 수도에 입성하던 나이와 똑같았다.
*
생각해 보면 그 면접에서부터 적색경보는 아주 시끄럽게 울려 대고 있었다.
“들어가시지요, 살리체 양.”
어째서인지 면접 장소에 덜렁 도착한 게 나 혼자뿐이었다거나.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살리체 양. 살리체 영지가 조금만 더 가까웠어도 황실 마차를 보냈을 겁니다.”
원작 속에서 여주인공 외에는, 아니 심지어 가끔은 여주인공에게조차도 까칠하게 굴었던 그 남주가 너무도 친절하고 환한 태도로 날 맞이했다거나.
“가, 감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황자 전하.”
당황스러운 황자의 말과 내 상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수룩하게 답한 내 태도를 보며 그가 꽤 얄미운 미소-곁에서 쭉 일하다 보니 이제야 알아차린 거지만-를 지었단 것도.
“과찬이라니요, 살리체 양이 보낸 이력서와 함께 첨부한 문서가 너무도 인상 깊어서 놓치면 분명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오만하기 짝이 없던 황자가 그날은 어째서인지 시골 귀족 영애였던 내게 지나칠 만큼 정중했다는 것까지, 돌이켜 보면 의심스러운 부분투성이였다.
“면접은 형식상에 불과하고 살리체 양의 업무 조건을 협의하고자 부른 겁니다. 영지와 거리가 있으니, 곧바로 업무에 들어가기에도 이게 편할 테고요.”
남주는 정말이지, 아주 교활하게도 내가 절대 거부하지 못할 다디단 조건만을 내밀어 댔다.
“제가 살리체 양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업무 조건은 이 서류에 적힌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내밀었던 계약서는 전생, 노동법이 제정되어 있던 세계보다도 훨씬 더 파격적이고 공고보다도 훨씬 좋아서.
[월 기본급여 500골드, 연장 근무 시 시간당 2배 보수 계산.
*근무시간은 일 8시간, 휴게 시간 1시간 별도.
직장까지 마차 10분, 도보 30분 거리의 2층 주택 제공, 하녀 제공, 하루 3번의 식사 또는 식대 제공.
매달 50골드의 피복비 지원.
연 20일의 휴가 및 주 4일 근무.
추가 근무 시 대체 휴가 또는 2배의 수당으로 지급.
퇴직 시 퇴직 수당 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