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본문
# 7.
“하응, 응.”
희영이 숨을 헐떡이며 남자의 머리를 제 젖무덤으로 끌어당겼다. 커다란 침대가 출렁인다. 침대 아래에는 아무렇게나 브래지어와 팬티가 널브러져 있고 남자의 브리프도 그 위를 덮고 있다.
한껏 부푼 젖꼭지를 잡아 비틀던 손이 젖가슴을 주물럭거린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서 뭉그러지는 젖가슴이 짜릿하게 저린다. 덜덜 떨고 있는 허벅지 사이의 습지는 이미 한참 전에 젖었다.
“응, 으응, 흐으응.”
사정없이 비틀던 젖꼭지를 깨물어 삼키며 남자가 희영의 다리를 잡아 벌려 어깨 위에 걸치고 남자가 희영의 둔덕 위로 자지를 문질렀다. 금방이라도 쑤시고 들어올 것처럼 문질러대는 살덩이를 넣고 싶어 제 구멍이 벌름거리는 걸 희영도 느끼고 있다. 애액으로 범벅이 된 구멍이 쩍쩍 젖은 소리를 내며 안달을 한다.
“배란기야?”
젖무덤에서 얼굴을 든 남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웃는다.
“으, 응…… 응, 흐응.”
맞다는 말 대신에 희영이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지금, 배란기다. 그래서 평소보다 더 느끼는 거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제 구멍은 애액을 줄줄 흘리고 있다. 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벌써 두어 탕 뛴 것처럼 머릿속이 끓어오른다. 이러다가 오늘은 어디까지 갈지 모를 일이다.
지난번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섹스 중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오히려 종우는 더 좋아했었다. 그 일 이후로 툭하면 오줌 싸 보라고 하는 바람에 곤란해진 건 말할 것도 없다. 짓궂은 남자다. 평소에는 제 말을 전부 다 들어주면서도 꼭 떡 칠 때만 저를 곤란하게 만든다.
곤란하게 만들고 즐거워하고 더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더 짓궂은 짓을 생각해낸다. 그러고 나서 섹스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다정해진다.
그런 남자다. 밖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남자인지 그런 건 모른다. 분명히 무섭고 사납고 위험한 사람인데 그녀가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하게 애쓴다는 것을 안다. 왜 진즉 몰랐을까 싶다. 적어도 자신을 가지고 놀다가 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왜 몰랐을까. 제게 이토록 진심이라는 걸 빨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지금도 늦은 건 아니다.
자신이 도망치는 실력이 형편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 남자가 자신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해서 또 다행이다. 그냥 전부 다 다행이다.
“하으응!”
애간장을 태우던 살덩이가 제 구멍을 벌리고 푹 찔러 들어오자 희영의 허리가 뻣뻣하게 휘었다. 휜 허리와 함께 엉덩이가 들리며 종우의 어깨 위에 걸쳐진 다리의 끝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아랫배를 가득 채우는 뻐근함이 머릿속을 미치게 뒤흔든다.
“하응! 응! 흐으응!”
깊숙하게 찔러 들어온 살덩이가 사납게 들락거렸다.
찌걱, 찌걱.
아랫도리가 부딪칠 때마다 구멍이 벌어지는 소리가 쩍쩍 울린다. 아무리 배란기라도 잔뜩 정액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임신이 되는 건 아니다. 이 남자는 씨 없는 수박이라, 콘돔 없이 아무리 해 대도 애가 생기지 않는다.
[왜? 애 필요해? 그럼 다른 놈 씨라도 받아 볼래?]
아이 얘기를 살짝 비추자 남자는 농담처럼 그렇게 말했다. 희영은 딱히 아이를 바라는 게 아니다. 다만 혹시 이 남자가 아이를 바라지 않을까 싶어 운을 띄워 봤을 뿐이다. 그러나 이 남자 역시 아이는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도, 이 남자도 아이는 바라지 않는다. 둘이서 지내는 지금이 좋다. 자신에게 모성애 따위는 없다는 걸 희영도 안다. 엄마는 그렇게 모성애가 지극했었는데……. 자신에게 그 모성애는 단 한 줌도 유전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아흐응! 하응!”
우둘투둘하게 불거진 살덩이가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올 때마다 희영이 자지러진다. 이 남자의 성기는 불에 달군 인두 같다. 뜨거운데 아프지가 않다. 도리어 저를 미치게 만든다. 이 남자와 자신은 아랫도리가 잘 맞는다.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부터 잔뜩 느낄 정도로 자신은 밝히고 이 남자도 절륜하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응! 하으응! 으응!”
가랑이를 벌린 채로 종우의 어깨에 다리를 걸고 희영이 엉덩이와 허리를 정신없이 흔들었다.
“이렇게 박아 대는데 어떻게 생겨먹은 보지가 헐렁해지지 않냐? 이 정도로 매일 박아 주면 헐렁해질 만도 한데 나 몰래 뭐 좋은 거 먹어?”
“미, 미쳤나 봐…… 하응!”
“그거 알아? 너하고 처음 떡 칠 때는 보지가 복숭아색이었는데 지금은 거무죽죽해. 떡을 많이 치면 거무죽죽하게 물드는 거 알아?”
“마, 말도 안 돼…….”
“젖꼭지 색도 변했고 말이야. 벗겨 놓으면 떡만 치고 산다는 거 어떤 놈이 봐도 알 정도로 티가 나. 꼭지를 봐도 보지를 봐도 밤낮으로 떡만 치고 살았다는 게 보인다니까.”
“이, 이상한 말 하지 말아요.”
“좋잖아? 내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이거 내가 잘 빚은 몸이잖아. 내 거지. 쫀득한 보지도 탱탱한 꼭지도 내 건데, 불만 있어?”
“누, 누가 뭐래요?”
희영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만 헐떡였다.
“일 집어치우고 너하고 씹질만 하면서 살고 싶다, 씨발.”
“그러고 있잖아요. 이,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왜? 내가 일 안 하는 것처럼 보여?”
“오, 오늘도 안 나가고…….”
“비가 오니까 몸이 찌뿌둥해서 그렇지. 내가 좀 늙었잖아.”
“몇 살이나 먹었다고.”
“아저씨라고 부르는 주제에, 이럴 때만 안 늙었지?”
“아저씨 아니면, 뭐라고 불러요?”
“이름 불러. 종우야, 하고.”
“미, 미쳤어.”
“부르고 싶으면 그냥 불러. 종우야, 종우씨, 종우 오빠, 아니면 여보.”
“정말 미쳤나 봐.”
“미친놈 좆맛이 좋지?”
“하응! 아! 아!”
더 세게 처박는 살덩이에 희영의 다리가 흘러내렸다. 아예 희영의 몸을 뒤집은 남자가 엉덩이를 바짝 들어 올리며 번들거리는 자지를 쑤셔 박았다. 쑤걱쑤걱 박히는 살덩이가 뱃가죽을 뚫을 기세다.
“이거 끝내고 우리, 어디 좀 가자.”
“어, 어디요?”
“누구 만나러.”
“누, 누굴…….”
“가족?”
가족?
자신에게는 가족이 없다. 그러면 이 남자의 가족?
이 남자에게 가족이 있나?
당황했지만 지금은 당황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하으응!”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을 주지 않고 찔러 들어오는 자지에 희영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침대의 이불을 꽉 쥐고 희영이 더운 숨을 쏟아냈다. 잔뜩 벌어진 구멍이 불에 타는 것만 같다.
창밖의 계절은 어느새 여름을 지나 가을을 스쳐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 * *
“정말 가족이 있어요?”
“왜? 나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으로 보여?”
조수석에 앉은 희영이 의심의 눈빛을 감추지 못한다.
이종우에게 가족이 있다고? 이 남자와 가족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세상에, 이 남자에게 가족이라니.
“어디에 살고 있어요? 아저씨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알고 있어요?”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당연히 궁금하죠. 아저씨 같은 사람한테도 가족이 있는데 그게 안 궁금해요?”
“나 같은 사람이 뭔데?”
“나쁜 사람이요.”
“나쁜 놈 좆 빨면서 눈이 뒤집히는 넌 뭐냐, 그럼?”
“어떤 분들이에요?”
“만나러 가는 길인데 그렇게 궁금해? 조금도 못 참겠어?”
“오늘 만나러 간다고 약속한 거예요? 나도 데려 간다고 했어요?”
“너 어째 신난 것 같다?”
“그, 그냥… 조금 흥분하긴 했지만…….”
자기 가족도 아니고 이 남자의 가족인데 제가 왜 더 흥분하는 건지 그건 희영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말은 오래 전에 자기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죽으면서 제게는 더 이상의 가족은 없었다.
‘아저씨의 가족이라면 나한테도 가족이 되나? 아닌가?’
괜히 김칫국을 마시는 걸 수도 있지만, 이 남자의 가족이라면 제게도 가족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라는 건 이상한 단어다. 이상하게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괜히 따뜻해지는 그런 단어가 가족이다. 엄마는 유일한 가족이었지만 엄마를 잃은 후로 가족은 생기지 않았다.
“가족이 있다는 건 좋은 건데, 아저씨는 좋겠네요.”
“너하고 나는 가족 아니냐?”
“네?”
“너하고 나는 남이냐?”
종우를 쳐다본 희영이 당황했다. 저를 쳐다보는 종우의 눈빛이 전에 없이 진지했기 때문이다.
“남이냐고, 우리가.”
“그건…….”
“남이었어?”
“우린 그냥 동거하는 거니까 가족이라기에는…….”
“동거?”
“결혼식도 안 올렸고 아직 호적에도…….”
“난 한지애 말고 윤희영과 혼인신고를 하고 싶다고 했잖아. 윤희영이라는 이름을 살리기 전에는 혼인신고 안 한다고.”
“네…….”
“그래서 그게 불만이야?”
“불만은 아니고…….”
“그러게 누가 신분증 훔치래? 그거 해결하려니까 힘든 거잖아. 하여간에 일은 저질러놓고 책임을 안 져.”
“…….”
“난 가족 아니면 같이 안 살아. 그러니까 어디 가서 니가 누구냐고 누가 물으면 나랑 가족이라고 해. 내 마누라라고.”
“그런 걸 누가 물어요. 아무도 안 물어봐요.”
“이제 누가 물어볼 거야. 그때 쫄지 말고 말해. 니가 누군지.”
“네…….”
희영은 이 남자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누가 그런 걸 묻는다는 걸까.
차는 어느새 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삼각 보육원]
‘그 삼각패의 보육원이다. 여긴 왜…….’
두 사람이 탄 차는 보육원의 마당에서 멈췄다.
‘설마 가족이라는 게 보육원 사람들인가? 가족 없이 보육원에서 자랐나?’
그래서 보육원을 후원하고 감사패도 받은 걸까.
그래. 가족 없이 보육원에서 자라다 나쁜 길로 빠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이 자란 보육원을 잊지 못할 정도로 정이 많은 남자다.
‘그랬구나……. 날 보육원 식구들에게 소개시켜주려고…….’
괜히 감동이 된다.
“내려.”
먼저 내린 종우가 차 문을 열어 주자 희영이 코트 깃을 여미며 차 밖으로 내렸다.
“보육원이 예쁘네요.”
“돈 처발랐으니까 예쁘겠지.”
“네?”
“이 건물에 돈을 얼마나 처발랐는지 몰라.”
차에서 내린 종우가 담배부터 입에 물었다.
“또 피워요? 여긴 애들 있는 곳이니까 나중에 펴요.”
“됐어. 안 하던 짓 하면 죽어.”
“애들에게 안 좋은데.”
“괜찮아. 떡치는 거 보고 자랐어도 넌 잘 컸잖아.”
“잘 커서 이 지경이에요?”
“네가 어디가 어때서?”
“말을 말아야지.”
결국 대답을 포기하는 희영을 보며 남자가 웃는다. 참 짓궂은 웃음이다.
“들어가자. 다 왔겠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걸음을 옮기는 종우를 따라 희영도 보육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 *
보육원의 원장실 안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찮은 사람들이다.
“앉아.”
종우의 말에 희영이 긴장한 채로 소파에 앉았다.
“그동안 잘들 살았어?”
조금은 냉랭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시작한 건 종우다.
“왜 만나자고 한 거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안경을 쓴 눈매가 사납게 생긴 것이 이종우를 닮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보육원 관계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 이 원장실에 앉아 있는, 이종우와 저를 뺀 네 명의 남자들은 다들 종우와 닮았다.
특히 사나운 눈매가 닮았다. 형제인 것이 분명하다.
“사업 보고도 할 겸, 새 식구 소개도 할 겸.”
“새 식구?”
그 말에 남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게 쏠리는 걸 느낀 희영이 어깨를 움츠렸다.
“내 여자니까 이제 가족이지. 형님들. 인사해. 윤희영이야.”
“아, 안녕하세요. 윤희영입니다.”
역시 형님들이었다.
희영이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아, 걔야? 찾는다던 애?”
“찾았네? 찾아서 데리고 사는 거야?”
“제수씨. 제수씨가 우리 종우 속을 그렇게 썩였다며?”
“씨도 없는 새끼 뭐가 좋다고 같이 사나 몰라. 제수씨. 종우 저 새끼 좆만 크지 씨도 없는 거 알고는 있어요?”
네 명의 형님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모두 험악한 말투지만 내용 자체는 그리 험악하지 않다. 그런 부분까지 이종우를 닮았다.
“사업 보고는 이걸로 하고.”
종우가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툭 던졌다.
“흑자니까 알아서 분배 해.”
“종우, 사업 잘하네?”
“내가 그랬잖아. 종우 새끼가 사업 수완이 좋은데 안 하려고 해서 그렇다고.”
“이렇게 가족 사업을 같이 하니까 좋잖아?”
“얼굴도 보여 줬고 사업 보고도 끝났고, 이젠 일어나도 되지?”
“너 온 지 5분도 안 지났어.”
“5분이면 오래 있은 거야.”
종우가 일어나자 희영이 당황했다.
자신도 일어나야 하나? 하지만 지금 일어나면 어쩐지 실례 같다.
“가자. 오래 있었다.”
5분 있었다.
아니,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오래는 아니지만, 희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저, 나, 나중에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종우의 손에 끌려 나오는 희영의 귀에 [아가씨는 참하네]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점수는 잘 딴 모양이다. 다행이다, 다행.
시댁 식구들에게는 점수를 잘 따놔야 한다.
무조건.
* * *
“보육원은 위장이야.”
“네?”
보육원의 마당으로 나온 후 다시 담배를 문 종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위장이라고. 이런 거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 그럴듯하거든.”
“아…….”
“왜? 내가 보육원 출신인 줄 알았어?”
“네…….”
“별 그지같은 생각을 다 했네?”
“사업이라는 것이…….”
“가족 사업.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 형님들하고 같이 하는 거야. 종목만 다르고 수익은 정확하게 나눠가지는 거지.”
“네…….”
“아버지는 별별 것에 손을 다 댔지만 그런 식으로 하면 명줄도 짧아지고 오래 못 간다고 생각해서 형님들이 물려받고 나서는 종목을 좀 바꿨어. 원래는 여자 장사도 하고 뽕 장사도 좀 하고 그랬는데 뽕도 접고 여자 장사도 접었어. 지금은 건설 쪽하고 이권 사업 이것저것 맡아서 하고 있어.”
“위험한 건 아니죠?”
“안 위험하면 돈이 되겠어? 이 바닥은 그냥 위험한 거야. 가지고 있는 놈을 쳐야 그놈 지분을 빼앗으니까.”
종우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흰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어차피 가족 사업이라서 철들면서 발을 들여놓았지만 하다 보니 지긋지긋하더라. 돈도 싫고 그냥 다 싫어져서 그냥 잠수 탔지.”
“그래서 그때 숨어서…….”
“형님들이 날 찾잖아. 나라도 좀 다르게 살게 내버려 둘 것이지 왜 그렇게들 찾아대는지. 그래서 날 밀항시켜준다는 놈과 연락이 닿았는데 그놈이 토꼈잖아? 그래서 그놈 찾기 전까지 좀 숨어 있으려고 했는데 거기서 코가 뀄지.”
그때 찾는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수배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것이 우습다.
“너 찾으려고 내가 누구 도움받았겠어?”
“형님들 도움…….”
“다시는 안 본다고 뛰쳐나왔는데 내 발로 다시 걸어 들어가서 여자 하나만 찾아주면 앞으로 하라는 대로 다 한다고 했지. 알아? 내가 너 그렇게 찾았어.”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고, 뭐. 가업 물려받는 것이 운명이다 생각해야지.”
“그만둔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예요?”
“나보다 형님들이 먼저 그만둘 걸.”
“…….”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가장 많이 닮은 게 나라고 형님들에게 사업 잘 키워서 나한테 주라고 했는데, 받을 놈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멋대로 주고 죽어버리니, 그 놈 영감탱이 참…….”
“그래도 아저씨를 믿으니까…….”
“그 사업이라는 거 물려받으려고 내가 공부도 때려치웠어. 그게 아깝겠어, 안 아깝겠어?”
“공부요?”
“왜? 난 공부하고 안 어울려? 나 대학도 다녔어.”
“안 어울려요.”
“사람 무시하네?”
“그게 아니라 좀 안 어울려서...대학 어디 다니셨어요?”
“좋은 곳. 머리 좋은 놈들 가는 곳.”
“그게 어딘데요?”
“한강대 법대.”
“네?”
희영이 진심으로 놀랐다.
법대? 이 남자가 법대?
“내가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것이 나쁜 짓 하는 것 뿐이라서 이상한 방향으로 좀 튀게 되더라고. 괜히 반항심이 생기면서 법대 가서 검사나 되어서 그냥 아버지와 형님들 싹다 잡아들여야지 하는 오기가 샘솟더라고.”
미쳤나?
이 남자는 정말 미친 것 같다.
“아버지, 형님들 죄다 잡아들이고 큰집 보내서 콩밥 먹게 하고 그놈의 사업 전부 자근자근 밟아주려고 했는데 2학년 땐가, 그냥 시들해지더라고. 그래서 대학 때려치우고 가업 물려받았는데 하다 보니 또 내가 뭘 하고 있나 회의가 들어서 다 때려치우고 도망쳤지.”
“골 때렸네요…….”
“뭐?”
“어느 쪽으로 봐도 골 때렸다구요, 아저씨.”
“그래?”
“네.”
“그때는 그냥 다 싫었거든. 검사가 되어서 다 때려잡는 것도, 깡패 소리 들어가면서 사람 찌르고, 찌르라고 시키고, 남들 다 무서워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그냥 싫었는데.”
“그런데요?”
“이젠 이게 내 자린가 싶어.”
“왜요?”
“널 만나서 그런 거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핑계예요?”
“말 돼. 내가 뭘 하든 시들하고 지긋지긋했던 건 이루려는 목적이 없어서 그랬던 거니까. 뭘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까 그냥 다 귀찮았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으니까 다르겠지?”
“뭘 하고 싶은데요?”
“너 하나 지켜줄 수 있는 놈.”
“네?”
“너 하나 지켜줄 수 있는 놈이 되고 싶다고. 귀 먹었어?”
희영의 말문이 막혔다.
남자가 거의 다 타들어간 담배를 땅에 내던지고 구두로 비벼 끈다. 그리고 희영의 코트 깃을 여며준다.
“찬 바람 들어간다.”
코트 깃을 여며주고 남자가 픽 웃는다.
“너 찾으려고 형님들에게 비굴하게 숙이고 들어가 보니까 알겠더라.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겠다는 거. 그래서 내가 사업 뛰어 들어서 내 연줄 좀 만들었지.”
“무슨 연줄이요?”
“국회의원도, 시의원도, 검사도, 경찰도 내 돈 안 먹은 놈이 없어. 그리고 내 돈 앞에서 굽실거리지 않는 놈이 없고. 윤선오 봤지? 어떤 놈이든 내 앞에서는 다 그래. 그래서 이제 네가 어디로 가도 금방 찾아. 내가 너 찾고 싶다고 하면 그냥 모든 네트워크가 널 찾는 거야. 검사도, 경찰도 다 널 찾아 다닐 거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전부 다 난리가 나는 거야. 그게 내 방식이야.”
“나 그렇게까지 중요한 사람 아닌데.”
“니 가치는 내가 정해. 네가 아니라.”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희영이 괜히 딴청을 부렸다.
“추, 춥네요.”
“겨울이잖아.”
“어, 얼른 가요. 여기 너무 추워서…….”
“너 얼굴 빨개졌다. 왜? 감격했냐?”
“누, 누가요.”
“감격했으면 오빠라고 불러 봐.”
“아저씨가 뭐래.”
“참 고집도 세.”
“따뜻한 거 먹으러 가요. 배고프니까.”
“그럴까? 에이 썅. 오빠 소리도 못 듣고.”
투덜거리며 종우가 차 문을 열자 희영이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조수석 문이 닫히기 직전 얼른 입을 열었다.
“눈 내려요, 종우 씨.”
“응?”
남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얼른 희영이 차 문을 닫았다.
“지금 뭐라고 했어?”
종우가 차 유리창을 두드렸지만 희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괜히 손으로 귀를 가렸다.
“아, 귀 시려.”
종우가 운전석에 앉았다. 앉자마자 희영을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조금 전에 뭐라고 했어?”
“내가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헛것도 들어요? 나이가 들었나? 아니면 떡을 너무 쳐서 기력이 다했나? 보약 먹어야겠어요, 종우 씨.”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지.”
“뭘요?”
“니가 언젠가는 날 잡아 먹을 거라는 걸.”
“내가요?”
“그래. 날 잡아 먹을 줄 알았지.”
종우의 손이 제 뺨을 툭툭 치자 희영이 작게 웃는다. 생각보다 쉬웠다. 종우 씨라고 부르는 거. 그리고 생각보다 별것 아니었다.
사랑하는 것. 무엇보다 별것이 아니었다. 버려질 거라는 두려움 따위는.
“따뜻한 거 먹으러 가자.”
“그런데 공부 계속할 생각은 없어요?”
움직이는 차 안에서 희영이 넌지시 물었다.
“왜? 깡패 마누라보다 검사 마누라 되고 싶어?”
“공부해도 검사 못 되잖아요. 죄 지은 게 많아서.”
“나 법적으로 걸린 거 하나도 없어. 그냥 깨끗해. 깨끗한 시민이야.”
“법망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나쁜 사람이네요.”
“그래도 좆이 쓸만하잖아?”
종우의 말에 희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희영은 아직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러나 많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아는 만큼 사랑하니까, 앞으로 더 사랑할 일만 남았다.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 자신에 대해서 이 남자에게 하나하나 알려 주고, 이 남자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시간이 즐겁다.
그런 것이 즐겁다.
이게 바라던 행복이었다.
그걸 드디어, 얻었다.
마침내,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