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본문
# 6.
요 며칠 이상하게 몸이 안 좋더니, 예정보다 빨리 생리가 터졌다. 첫날이라 양이 많은 건 아니지만 몸이 확 처진다.
“둘러보고 더 필요한 것 있으면 말해.”
소파에 털썩 앉은 남자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 집은 이종우가 구입한 집이라고 했다. 아파트가 아니라 정원이 있는 단독 주택으로 2층이다. 정원은 꽤 넓고 소나무까지 있다. 윤선오의 본가도 2층짜리 단독 주택이었는데 이렇게 넓고 좋지는 않았었다.
여긴 집이라기보다는 윤선오의 누나가 한다는 그 갤러리와 비슷한 느낌이다. 넓고 쾌적하다. 그리고 사람의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것이 처음 지어진 후로 아무도 살지 않은 그런 느낌을 풍긴다.
“여기서 살았어요?”
“아니. 여기서 살려는 거야. 이만한 집이 나오는 게 힘들다고 해서 오래 기다렸어. 마음에 들어?”
“좋네요.”
이 집은 좋다는 말로는 다 표현을 할 수 없는 그런 집이다. 아마 어지간히 돈이 많지 않고서야 이런 집을 사지는 못할 거다. 하긴, 적당히 돈이 많은 걸로는 윤선오가 그런 식으로 비굴하게 굴지 않았겠지. 몇 억을 맡긴 정도로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을 남자다.
“돈 많아요?”
“넌 궁금한 게 그거밖에 없냐? 몇 년째 그 질문이냐?”
“속 시원하게 말해 준 적 없잖아요. 내가 뭘 물었을 때 대답해 준 건 이름 하나, 그거 가르쳐 주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돈 많아.”
“얼마나 있어요?”
“안 세어 봐서 몰라.”
“대충.”
희영이 커다란 냉장고를 열어 봤다. 냉장고가 얼마나 큰지 열어 보기 전에는 냉장고인지도 모를 정도로 크다.
“백억 정도 되나?”
“네?”
그 말을 들은 희영이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백억?
“놀리지 말구요.”
“대충 그 정도 될 것 같은데, 나도 잘 몰라. 그런 거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고. 벌려 놓은 사업이 워낙 많아서 말이야.”
“무슨 사업하는데요?”
“몰라도 돼.”
“나쁜 짓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싫어?”
“싫다면 놓아줄 것도 아니잖아요.”
“경찰에 잡혀갈 짓은 이제 안 하니까 걱정 붙들어 매.”
“그때는 하고 다녔죠. 그때, 막 숨어 살 때.”
“그런 것 같아?”
“그래서 숨어 있었잖아요.”
“숨어 있었던 게 아니라 떠나려고 한 거지. 이 바닥이 지긋지긋해서. 그때 너처럼 말이야.”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려고 했다는 말에 희영이 정색을 했다.
“돈도 많이 벌면서 뭐가 지긋지긋해요? 정말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게 뭔지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매일 칼로 사람 배만 쑤시고 멱을 따면 어떤 기분인지 알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나중에는 내가 사람을 찌르는 건지 죽어 있는 고깃덩어리를 찌르는 건지 구분이 안 가. 그냥 푹푹 찌르다 보면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조금씩 미쳐 가는 기분이 들지.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살살 도는 게 어떤 건지 모르지? 그래서 그 미쳐 가는 기분을 덮어 보려고 약을 빨다가 맛이 가는 새끼들도 있어. 사람 찌르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지금도 그런 일 해요?”
“요즘은 직접 안 찔러. 딴 애들 시키지.”
“계속 할 거예요? 지긋지긋하다면서요.”
“그래서 손 씻고 살려고 했는데, 네가 안 도와줬잖아.”
“내, 내가 뭘요?”
뭐라는 걸까. 자신이 뭘 어떻게 안 도와줬다는 걸까.
“정말 손 씻고 잘 살고 싶었는데 어떤 년이 도망치는 바람에 그년 잡느라 다시 발들여놓았잖아. 내 인생을 말아먹은 거지, 네가.”
남자는 농담처럼 가볍게 던지는 척했지만 실은 농담이 아니라는 걸 희영도 안다.
“나 아니었으면 손 씻고 살았겠네요.”
“미안하면 잘해.”
“…….”
솔직히 미안하지는 않다. 돈을 가지고 도망친 것? 어차피 나쁜 짓으로 번 돈 아닌가. 자신 때문에 손 씻고 살 사람이 다시 나쁜 짓을 하게 되었다는 것? 그러게 누가 자신을 쫓아오라고 했나.
그건 다 핑계일 뿐이다. 그러니까 미안할 것도 없다. 다시 도망쳐도 이 남자에게는 미안하지 않을 거다. 이 남자가 제게 한 말을 아직 똑똑히 기억한다.
[살려면 더러운 짓도 하고 그런 거야.]
이 남자는 제게 그렇게 말했었다. 살려면 더러운 짓도 해야 한다고. 그것도 충고라면, 그 충고대로 했을 뿐이다. 살려고 더러운 짓을 한 거고, 살려고 돈을 가지고 도망친 거고, 살려고 또 도망칠 거다. 그러니까 미안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네가 그랬잖아. 밤마다 귀마개를 안 껴도 되고 술 취한 사람이 네 방문 열려고 애쓰지 않는 그런 집에 살고 싶다고. 여긴 그런 놈도 없고, 주위에 다른 집도 없어서 시끄럽지도 않아.”
“네?”
“여기 살면 가로등이 고장 난 골목길에서 변태들 안 마주쳐도 되고, 창이 넓어서 햇볕도 잘 들고 비도 안 새. 이만하면 되는 거지?”
희영이 적잖게 당황했다. 전에 자신이 한 말을 이 남자가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만 도망쳐라. 어디로 가도 여기 눌러앉는 것보다 더 잘살 수는 없다.”
“도, 도망치지 않아요. 도망칠 곳도 없고 도망쳐도 쫓아올 거면서…….”
“잘 아네. 우리나라 땅덩어리 좁다. 여기서 도망쳐 봤자 내 손바닥 안이야.”
“알아요.”
“집 구경 다 했으면 여기 와서 앉아.”
담뱃재를 재떨이에 털며 남자가 소파의 옆을 툭툭 친다. 옆에 오라는 게 무슨 뜻인지 희영도 안다. 하루 종일 그 짓을 해도 부족한 것처럼 구는 남자다. 아니면 머릿속에 든 것이 온통 섹스뿐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안 돼요.”
소파에 앉은 희영이 정색을 했다.
“왜?”
“나 생리 터졌어요.”
“그래서?”
“생리 한다구요.”
“그러면 못 하나?”
“안 하는 게 좋아요.”
“언제까지 해? 그 생리라는 거.”
“일주일이요.”
“존나게 기네.”
남자는 입맛을 다시는 듯하다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생리라고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면 어쩌나 속으로 걱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빨아.”
“네?”
“박지 못하면 빨아. 빠는 법 알지? 전에도 빨아 봤잖아.”
빨라는 말에 희영이 잠깐 머뭇거렸다. 빨아 본 건 벌써 몇 년 전이다.
“왜? 못하겠어? 비위 상해?”
“아, 아니요. 빨게요.”
희영이 소파에서 내려와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지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자 지퍼 안에서 벌써 발기한 자지가 튀어나온다. 침을 꿀꺽 삼킨 희영이 두 손으로 그 살덩이를 붙잡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무게가 묵직하다.
입을 크게 벌리고 제 손바닥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살덩이를 절반 정도 삼키자 비누 냄새가 입 안에 가득 찬다. 씻은지 얼마 되지 않은 걸까.
“읍, 웁.”
절반 정도 삼켰는데 벌써 귀두가 목구멍에 닿는다. 여기서 더 삼킬 수는 없다.
“흡, 읍, 으읍…….”
입에 문 것을 빨 때마다 볼이 부풀었다 홀쭉해진다. 손에 쥔 것이 계속 꿈틀거려 자꾸만 손바닥이 미끄러진다. 위로 살짝 눈을 올리자 소파에 기댄 채로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열린 지퍼 사이로 드러난 덥수룩한 털이 시커멓다.
“읍, 흐읍, 읍.”
희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숨이 막히고 턱이 아프다. 좀처럼 사정을 하지 않는 남자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주무르며 불을 부풀렸다 오므려가며 쯔읍쯔읍 빨고 있을 때 입 안에 더운 기운이 왈칵 쏟아졌다.
“읍……!”
남자의 성기를 얼른 뱉은 희영이 깨끗한 대리석 바닥에다 입 안에 든 것을 토했다. 허연 것이 침과 섞여 바닥으로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잘하네?”
희영을 내려다보며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런데 이렇게 끝내기엔 아쉽지?”
“네?”
“나만 싸면 양심 없잖아? 너도 싸야지.”
“하, 하지만 난 지금…….”
희영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남자가 손목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긴 소파에 희영을 눕힌 남자가 다짜고짜 팬티를 끌어 내렸다. 한 쪽 다리는 소파 아래로 내리고 다른 쪽 다리는 소파의 등받이에 착 붙인 채로 다리를 벌린 희영이 숨을 헐떡였다. 치마는 허리까지 걷혀 올라갔다.
“하응! 아, 응!”
위로 몸을 겹친 남자의 손이 보지를 휘젓자 희영의 허리가 휜다. 벌린 보지 안으로 밀어 넣은 손가락을 쑤셔대며 남자가 희영의 블라우스 단추를 입으로 뜯어냈다. 단추가 뜯겨나간 블라우스가 벌어지자 남자가 젖무덤에 얼굴을 처박는다.
“응! 하으응! 아, 아흣!”
벌써부터 구멍이 젖기 시작했다. 구멍을 쑤시던 남자의 손이 클리토리스를 문질러 댄다. 머릿속이 흥분으로 들끓었다.
“응! 흐으응!”
미칠 것만 같다. 벌써부터 절정에 오를 것 같아 희영이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잔뜩 부푼 클리토리스에서 끓어오른 희열이 전신을 관통했다.
“아흐으응!”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희열이 정수리 끝까지 오르며 희영이 전신을 덜덜 떨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박혀 있는 구멍에서 물줄기가 왈칵 솟구친다. 젖무덤을 빨던 남자가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보지를 벌리더니 얼굴을 처박는다.
“아흐응! 흐응! 응!”
잔뜩 젖은 제 클리토리스를 빨고 씹으며 남자가 구멍을 혀로 쓸어 올렸다.
“더, 더는…… 더는…… 아흐응!”
여기서 더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생리든 뭐든 자신이 먼저 덤벼들 수도 있다.
“아흐응!”
자지러지게 신음하는 희영의 가랑이에서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입술에 묻은 번들거리는 애액을 혀로 핥은 다음 소파로 올라와 앉는다. 희영은 여전히 누워서 헐떡였다.
“피 냄새가 나긴 하더라.”
그 말에 희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내가 또 피 냄새를 좋아하잖아?”
씨익 웃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희영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가끔씩 이 남자는 굉장히 다정하게 웃는데 그게 낯설어서 그런 웃음 앞에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희영은 그렇게 웃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시선을 피했다.
* * *
윤선오는 놀랍게도 문자 한 통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10일이나 지났는데도 아무런 전화도, 문자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이다. 오히려 희영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어 봤지만 신호음이 가자마자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걸었을 때는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라는 안내음만 나왔다.
희영은 어제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원이 넓은 단독주택이다. 정원이 넓으니까 가까이에 다른 집이 없다. 한밤중이 되면 주위가 그저 조용하다. 개 짖는 소리도, 그 흔한 오토바이 소리, 차의 클랙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이다.
낮에는 집안일을 해 주는 아주머니가 와서 몇 시간 내내 집을 깨끗하게 쓸고 닦고 빨래까지 전부 해 주고 간다고 했다. 이 집에서 희영은 할 일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마. 심심하면 쇼핑이나 해.]
이종우는 희영에게 카드 두 장을 주고 갔다. 한 장은 현금카드, 또 한 장은 신용카드다. 현금이 필요하면 현금카드로 뽑고 쇼핑을 할 때는 신용카드를 쓰라고 주고 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집에 희영의 물건은 옷 몇 벌이 전부다. 하지만 가지고 올 건 없었다.
어젯밤에 이 집에 들어와서 자정이 넘도록 섹스를 하던 끝에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오전 11시가 넘었다.
“회장님께서 꼭 식사 챙겨드리라고 했어요.”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차려 준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희영이 집 안부터 둘러봤다. 지난번에 왔을 때 대충 둘러보긴 했지만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금방 떠날 거지만 그래도 집 구경은 해도 되겠지.’
희영은 여기 오래 있을 마음이 없다. 그러나 섣부르게 도망쳤다가는 바로 잡힌다. 그래서 신중하게 도망을 칠 생각이다. 어디로 갈지, 어떻게 갈지, 어떻게 해야 그 남자의 추적을 피할지도 생각해 둬야 한다.
이종우는 제게 잘해 준다. 그 남자보다 제게 더 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할 때의 충격은 더 큰 법이다. 제가 겁쟁이라서 지레 겁을 먹는 걸 수도 있지만, 그 남자는 제 곁에 오래 있어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까 버려지느니 먼저 버리는 거다.
‘이건 뭐지?’
거실 구석에서 희영이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삼각형의 조각이었다.
‘이런 걸 왜 가져다 놨을까?’
언뜻 보면 피라미드 같기도 하고 그냥 삼각형 같기도 하다.
‘장식품인가?’
그냥 눈으로 훑고 지나가려던 희영이 그 조각품의 아래에 작게 새겨진 글귀를 발견했다.
[사랑과 존경을 담아 삼각 보육원 모두가.]
‘삼각 보육원?’
이 삼각형의 조각품은 그냥 조각품이 아니라 일종의 감사패라는 걸 희영이 그제야 깨달았다.
‘보육원에서 감사패를 다 주네? 거기 후원이라도 하나?’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종우 그 남자와 보육원 후원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네. 말해 주는 것이 없으니 뭘 알겠어.’
그 남자는 비밀이 많은 건지 아니면 알려 주기 싫은 건지 거의 모든 것을 꽁꽁 싸매고 있다. 어쩌면 저만 모르는 걸 수도 있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도망가면 다시는 안 볼 건데…….’
희영이 삼각형이 있는 곳을 지나쳐 정원으로 나갔다. 아직 7월이 되기 전의 장마 기간이라 정원의 공기는 후덥지근했다. 그런데도 녹음은 보기가 좋았다.
‘이런 곳에서 살면 참 좋겠다…….’
정원의 의자에 앉아 희영이 눈을 감았다. 이렇게 넓은 정원에 앉아서 바람을 맞으며 사는 건 부자들이나 누리는 삶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살던 그 좁은 여인숙의 마당에서는 바람 한 점 맞을 수 없었다.
장마가 있는 여름은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계절이었고 겨울은 더 끔찍했다. 그러나 이런 정원에서라면 장마철의 빗소리도 즐거울 거고, 겨울에 눈이 내리는 풍경까지도 아름다울 것이다.
문득, 서러워졌다. 좋은 것을 좋은 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행복을 마냥 행복으로 느끼지 못하고, 애정을 온전히 애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얼마나 꼬여서 이렇게 된 걸까.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 남자의 애정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나중에 버림 받을 것이 두려워서 호의와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자신만 이러는 걸지도 모른다.
‘이것도 병이야.’
자꾸만 도망치고 싶은 것도, 자꾸만 의심이 가는 것도, 자꾸만 불안한 이것도 병일 수도 있다. 병이라면, 고치고 싶다. 이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다.
‘바람이 좋다…….’
후덥지근하고 눅눅한 바람인데 왜 이렇게 좋은 걸까. 아랫배에 올려 놓은 희영의 손가락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그 남자가 선물한 반지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싼,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
지금도 희영은 잘 모르겠다. 저를 향한 그 남자의 마음은 대체 뭘까. 그 진심은 대체 뭘까.
사랑? 그건 아닐 거다. 그런 곳에서 그렇게 잠깐 만나 돈을 들고 도망친 여자를 왜 사랑하겠는가.
집착? 집착이라면 왜 집착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그런 걸까? 그런 것 치고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에게 이런 다이아몬드 반지 같은 걸 사 줄 리가 없다. 어차피 그 남자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와도 절대로 못 믿을 것이다. 왜냐하면 희영의 세상에서 [사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걸 본 적이 없다. 희영이 아는 단 하나의 사랑은 엄마의 일기장에서 본 아빠와 엄마의 사랑이다. 그것 외에 다른 사랑은 알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런 나쁜 남자의 사랑이라니. 그런 건 없을 거다.
그냥 이건, 쾌락이 아닐까.
* * *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왜 아무도 없지?’
비가 세차게 내리는 창밖을 희영이 내다봤다. 이 집에는 항상 누군가 있다. 이종우가 집을 비울 때도 이 집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그 남자가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 집에 항상 감시하는 사람을 두고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 외출할 때면 운전하는 기사를 포함해서 또 한 명의 남자가 따라다니고, 집에 있을 때는 대문 밖에 두 명, 그리고 대문 안 현관 밖에 한 명이 지키고 서 있다. 누가 보면 죄인이라도 가둬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 남자는 항상 대여섯 명의 남자들을 끌고 다닌다.
적을 때가 대여섯 명이다. 많을 때면 열 명이 넘을 때도 있다. 그것만 봐도 거의 그가 조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조폭이지만 어떤 식의 일을 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사업]이라고 하지만 그게 무슨 사업일지 누가 알겠는가.
‘대문 밖에도 아무도 없나?’
희영이 우산을 쓰고 정원으로 나섰다. 정말 현관 밖에는 아무도 없다. 비가 쏟아지는 정원을 지나 대문까지 걸어간 희영이 대문을 열어 봤다. 역시 아무도 없다.
‘무슨 일이 있나?’
이런 날이 없었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오늘이 기회야.’
얼른 집 안으로 돌아간 희영이 옷장 안에 넣어 뒀던 가방을 꺼냈다. 가방 안에는 돈과 약간의 옷이 들어 있다. 무거운 가방은 짐만 될 뿐이다. 어깨에 멜 수 있는 작은 가방에 갈아입을 옷 서너 벌을 넣고 지갑을 넣었다. 이건 전부터 준비해 둔 것이다. 기회가 생겼을 때 바로 도망치려고 말이다.
반지는 빼서 화장대 위에 올려 놓았다. 도망칠 곳은 미리 알아봐 뒀다. 일단 지금 여기서 나가 공항 가까운 곳의 모텔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서 제주도 가는 비행기 표를 끊고 제주도로 갈 거다.
왜 제주도냐 하면, 바다를 건너가야 그 남자가 저를 찾지 못할 것 같아서다. 외국으로는 갈 수 없다. 여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상황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제주도로 가려는 거다. 돈은 그동안 조금씩 현금으로 찾아 모아 놓았다. 한꺼번에 큰돈을 찾으면 의심하겠지만 몇십만 원씩 수일에 걸쳐서 뽑는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게 몇백의 돈을 모아 놓았다.
제주도로 가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지애나 윤희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그곳에서는 또 다른 가명을 써야 할 수도 있다. 이번에는 정말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꼭꼭 숨어 있어야 한다. 누굴 만나지도 않고, 눈에 띄는 행동도 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조용히, 그렇게 말이다. 그러면 그 남자가 저를 어떻게 찾겠는가. 유령, 유령이 되어야 한다.
가방을 맨 희영이 우산을 쓰고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대문을 닫고 곧장 골목길을 내달려 큰길까지 나온 희영이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일단 공항 쪽으로 가 주세요. 김포 공항이요.”
달리는 택시 안에서 희영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눌렀다. 핸드폰도 두고 나왔다.
‘이번에는 기필코…….’
그 남자가 이 사실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낼 거라는 걸 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저를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로 제게 오만 정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냥……날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눈을 감고 희영이 흔들리는 택시에 몸을 맡겼다. 빗줄기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차가 많이 막히네요.”
택시 기사의 말에 희영이 감았던 눈을 떴다. 기사의 말처럼 도로가 막힌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니까…… 길이 쉽게 뚫리지 않을 것 같은데, 비행기 시간이 어떻게 되세요?”
“내일 비행기예요. 공항 근처에서 자려구요.”
“그러면 급하진 않네요. 차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니까 이거라도 마시고 있어요.”
기사가 희영에게 음료수 한 병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긴장했기 때문일까. 가뜩이나 목이 말랐던 참에 기사가 준 음료수의 뚜껑을 딴 희영이 꿀꺽꿀꺽 음료수를 마셨다. 시원한 것이 들어가자 조금 속이 풀린다.
“그런데 김포면, 제주도 가는 거예요?”
“네? 네.”
“좋네. 제주도. 혼자서?”
“아, 네…….”
“여행 가요?”
기사의 질문이 부담스럽다.
“네, 여행이요.”
“왜 가족들은 같이 안 가고?”
“그냥 혼자서 가고 싶어서요.”
“하긴, 그러고 싶을 때가 있지. 나도 마누라에게 하도 시달려서 혼자 여행가고 싶긴 한데 혼자 갈 수가 있나.”
택시 기사는 주절주절 말이 많다.
“하암…….”
희영이 길게 하품을 했다. 일부러 기사의 말을 듣기 싫어서 졸린 척하는 것이 아니다.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지고 있다. 오늘 힘든 일을 한 것도 없고 오후에는 한 차례 낮잠도 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눈꺼풀이 내려가며 졸린 걸까.
“졸려요? 졸리면 한숨 자요.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까.”
“네…….”
희영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다.
‘제주도…… 가면 무슨 일을 할까…….’
졸린 와중에도 걱정이 밀려온다. 신분을 숨기고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식당이나 그런 일은 신분증 없이도 받아줄까?
‘모르겠다…… 지금은 한숨 자자…….’
희영이 길게 한숨을 쉬고 편하게 몸을 기댔다.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 * *
“으응…….”
희영이 눈을 떴다.
‘몸이 왜 이렇게 무겁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머리도 깨질 것 같이 아프다.
‘속이 울렁거려. 공항에는 아직인가?’
눈을 떠 보려고 하지만 눈꺼풀이 잘 열리지 않는다.
‘왜 이렇게 눈이 안 떠지지?’
힘겹게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시뻘건 불빛이다.
‘여기가……어디지?’
주위가 온통 붉다. 그런데 택시 안은 아니다.
‘난 분명 택시에서 잠이 들었는데…….’
눈을 뜬 희영이 고개를 들었다.
‘손이 묶였어…….’
그런데 제 손이 뒤로 묶여 있다. 묶여 있는 건 손만이 아니다. 두 발도 묶인 채로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내가 왜…….’
놀란 희영이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뒤로 손과 발이 묶여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런데 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다른 여자들도 있다. 전부 다 자신처럼 묶여 있다.
“도,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희영이 다급하게 애원했지만 여자들 중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없어 보인다. 간신히 일어나 앉은 희영이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어디지?’
좁고 어두운 공간에 붉은 빛을 내는 백열구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다.
‘컨테이너?’
벽을 보니 컨테이너처럼 보인다. 천장도 바닥도 마찬가지다.
‘나 지금 컨테이너에 갇혀 있는 거야? 어째서? 내가 왜…….’
그때 퍼뜩 택시 기사가 줬던 음료수가 떠올랐다.
‘그걸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설마 음료수에 약을 탄 걸까?’
“흑…… 흑…….”
옆에 있던 여자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하자 다른 여자들이 거의 동시에 울음을 터트렸다. 희영도 울고 싶지만 꾹 참았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약을 탄 음료수를 마시게 하고 재운 뒤에 이런 컨테이너에 가둬서 뭘 하려는 걸까.
‘가방도 없어졌어…….’
여기 옮겨 놓는 도중에 벗겨진 건지 구두도 사라졌다. 스타킹에는 구멍이 뻥뻥 뚫렸다. 옷이 젖은 걸 봐서는 차에서 여기로 옮기는 사이에 비를 맞은 것이리라.
‘어떡하지?’
별별 생각이 다 머릿속을 스친다. 어쩌면 자신에게, 그리고 여기 있는 여자들에게 약을 먹여 가둔 사람들은 인신매매범일지도 모른다. 주변에 보이는 여자들은 전부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여자들이다. 젊은 여자들을 납치해다 내다 파는 놈들이 있다는 소리를 언뜻 뉴스에서 들은 것도 같다. 이런 건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예전에 파란 철문의 여인숙에 살 때 어떤 이모는 젊었을 때 납치되어서 몇 년을 섬에 갇혀 나오지도 못하고 강제로 몸을 팔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겨우 풀려났지만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는 신세 한탄을 한 적이 있다.
‘나도 팔려 가는 걸까? 섬 같은 곳에?’
그 생각이 머릿속에 미치자 오싹하게 소름이 돋는다. 팔려 가는 건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도망쳐야 해…….’
하필이면 급하게 탄 택시가 그런 택시였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도망치지?’
손발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손발이 풀린다고 해도 컨테이너의 문은 잠겨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갈 때 도망칠 수 있을까?’
두려움에 질려 겁먹고 있을 때였다.
끼이익- 컨테이너가 열렸다. 열린 컨테이너 밖에 서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질질 짜지 마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 테니까.”
남자는 갇혀 있던 여자들 한 명 한 명을 쳐다봤다.
“외국 구경 시켜 주는 거야. 너네 일본 가 봤어? 공짜로 일본 데려가 주고 돈도 벌게 해 줄 거니까 질질 짜지 마. 일본 가면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아? 엔화 몰라? 엔화? 돈 벌면 다시 집에도 갈 수 있어.”
‘일본?’
일본이라는 말에 희영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디 시골 섬이 아니라 일본이라니. 거기까지 팔려 가면 한국에 돌아올 수나 있을까?
“여기 얌전히 있으면 요대로 배에 실어서 일본까지 모셔갈 거니까 얌전히들 있자? 알았지? 오늘 자정에 배에 실리면 내일이면 도착하니까 하루만 오줌도 참고 물도 참자. 이쁜이들. 참을 수 있지?”
남자의 말에 여자들이 더 심하게 울어댔다.
“어허. 울면 힘 빠진다. 가자마자 손님 받아야 하는데 힘 빠지면 쓰나. 뚝 그치고, 내일까지만 여기 있자.”
남자가 히죽거리며 컨테이너에서 나갔다.
“야, 닫아. 닫고 자물쇠 채워.”
그 말에 컨테이너의 문이 삐걱거리며 닫힌다. 닫히는 문을 보며 희영이 절망했다. 만약 여기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거라면 어떻게 기회를 봐서 도망칠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지만 이 컨테이너에 갇힌 채로 배에 실려 일본으로 가게 된다면 도망칠 틈도 주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난다.
‘이렇게 끝나고 싶지 않아.’
희영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너무 절망적이라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이종우, 그 남자에게서 도망쳤는데 고작 결말이 창녀로 팔려 가는 거라니. 이렇게 기가 막힐 수 있을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이 없다.
‘날 절대로 못 찾겠네.’
일본으로 팔려 가면 그 남자는 절대로 자신을 찾지 못할 것이다. 이 나라도 아닌데 무슨 수로 찾겠는가. 참 어이없게도 이런 식으로 그 남자 앞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야…….’
기가 막힌 나머지 희영이 작게 웃기 시작했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지면 웃음이 나온다는 걸 처음 알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도망치지 말 걸.
그 때, 그 파란 철문의 여인숙에 살 때 도망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같이 살림을 차리자던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러면 지금쯤 자신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어떤 결과라도 이보다는 나을 것이다. 결국 버려질 걸 두려워하던 제 불안이 이런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제는 버려지려야 버려질 수도 없다.
누가 절 버리겠는가. 차라리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나을 뻔했다.
‘결국 이 꼬라지네…….’
그렇게 잘살아 보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결국 이 모양이다. 한지애의 신분을 훔치고, 윤선오와 결혼해서 어떻게 해서든 남들처럼 멀쩡하게 살고 싶었는데 그런 삶을 자신이 욕심내면 안 되는 것이었나 보다. 감히, 탐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던 것인가 보다.
그때 컨테이너가 덜컹 거렸다.
“꺄악!”
“사, 살려주세요!”
“엄마아……!”
컨테이너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여자들이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드디어 컨테이너가 배에 실리는 것이다.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
“제발 도와주세요!”
“엄마! 엄마아!”
소리 지르며 우는 여자들 속에서 희영은 소리도 지르지 않고 울지도 않고 그저 고개만 푹 숙였다. 이젠 체념해 버렸다. 가끔은 포기가 빠른 것도 나쁘지 않다. 진즉에 이렇게 포기해 버렸다면 이보다는 나았을지도 모른다.
덜컹덜컹.
컨테이너가 심하게 흔들리자 여자들의 비명이 더 커졌다.
끼이이익-.
컨테이너가 소리를 내더니 쿵-! 하고 큰 소리가 울렸다. 허공에 떠 있던 컨테이너가 바닥에 내려온 것이다.
‘벌써 배에 실린 걸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왠지 모를 기대감에 희영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때 철컹, 철컹 소리와 함께 컨테이너의 문이 다시 열렸다. 컨테이너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은 조금 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뚜벅, 뚜벅.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서는 구두 소리에도 희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굳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괜한 희망 갖지 말자. 어차피 저는 팔려 간다. 저를 파는 자들의 얼굴까지 볼 이유는 없다. 구둣발 소리는 희영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참 손이 많이 가는 기집애야.”
아는 목소리에 희영의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저씨?”
희영이 얼른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이종우, 그 남자가 지금 제 앞에 서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종우를 올려다보는 희영의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터졌다.
“그새를 못 참고 도망을 쳐?”
지금 울면 얼마나 꼴사나울지 안다. 그래서 애써 울음을 참아 보려고 했지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참 이상하지? 떡 칠 때는 세상에서 날 제일 좋아하는 것처럼 구는 애가 눈만 떼면 도망쳐. 이게 벌써 두 번째야. 내가 말했잖아. 도망쳐봤자 소용없다고? 머리가 그렇게 나빠? 학습이 안 돼?”
쭈그리고 앉은 남자가 희영을 쳐다보며 픽 웃는다.
“왜 울어? 뭘 잘했다고 울어? 울면 누가 봐줄지 알고?”
“흑…… 으흑…….”
희영이 계속 울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으흑…… 흑, 흑, 으흑.”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오열이 되자 남자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담배를 입에 문다.
치익.
담배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나며 이내 짙은 담배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담배 냄새조차 이렇게 안도감을 준다.
“울면 확 따먹어 버린다. 뚝.”
울음을 그치려고 해도 그쳐지지가 않는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희영이 남자를 쳐다봤다.
“또 도망쳐. 괜찮아. 또 찾아 줄 테니까. 가끔 이것도 재밌네. 심심하면 또 도망쳐 봐. 내기해도 되겠다. 내가 널 얼마 만에 찾아내는지. 기록 세울 때마다 후장에 박는 건 어떨까? 뒷구멍도 뚫어 보고 싶을 때가 있거든.”
담배 연기를 내뱉은 남자가 손을 들자 뒤따라 들어온 남자가 얼른 칼을 내민다.
“손 내밀어.”
희영이 뒤돌아 앉아 얼른 손을 내민다. 그러자 남자의 칼이 손을 묶은 밧줄을 싹둑 잘랐다.
“집에 가자, 희영아.”
발을 묶은 밧줄까지 자른 남자가 희영에게 등을 보인다.
“뭐 하냐? 업혀.”
“거, 걸을 수 있어요.”
“쯧.”
남자가 혀를 차자 희영이 얼른 그 등에 업힌다. 희영을 등에 업은 이종우가 컨테이너에서 나오며 주위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눈짓했다. “다들 풀어 주고 차비 줘서 돌려보내라. 이 짓 한 놈들은 적당히 손봐주고.”
“네, 알겠습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들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뒤로하고 남자가 희영을 등에 업고 꽤 멀리 주차해 놓은 차까지 걷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싫냐?”
“싫은 건 아니에요…….”
남자의 등에 업힌 건 처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등이 넓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걸까.
“싫은 게 아닌데 도망은 왜 쳐?”
“무서워서요.”
“내가 무서워? 너 죽일까 봐? 아니면 사람 죽였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 인내심 없는 놈이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나한테 질릴까 봐 그게 무서워요.”
“내가?”
“네…….”
“돌았냐?”
“나한테 질려서 날 버릴까 봐 그게 무서워서…….”
“혹시 무슨 병 있냐? 의부증 같은 거 있어?”
“잘 대해 주면 자꾸 기대게 되고, 의지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고, 그러다가 버려지면 그때는 절대로 헤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선수 치자? 선수 쳐서 도망치자? 병도 중증이네. 너 그거 정신병이야.”
“…….”
정신병이라는 이종우의 말에 희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남자의 말이 맞다. 자신의 이 두려움은 정신병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며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해하며 도망치는 여자는 세상에 자신밖에 없을 거다.
“그냥 치료받자.”
“정신병원에 넣으려구요?”
“미쳤냐? 정신병은 내가 또 잘 고쳐.”
“어떻게 고쳐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고쳐져.”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하자가 있는 걸 데리고 살아 주는 거니까 고맙게 생각해. 너 같이 까다로운 년 데리고 살 놈이 나 말고 또 있는 줄 알아?”
“그런데 어떻게 찾았어요?”
“이 바닥에서 내가 찾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찾는 게 없다.”
“아저씨, 깡패죠.”
“깡패 아니다. 가오 빠지게 깡패가 뭐냐, 깡패가.”
“그럼 뭐예요?”
“사업가.”
그 말에 희영이 그제야 웃었다.
“우습냐? 웃겨?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는 거 몰라? 털이 났나 안 났나 똥구멍부터 확인해 봐야겠다.”
“고마워요…….”
희영이 남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찾아내 줘서…….”
이건 진심이다. 진심으로 이 남자가 고맙다. 저를 몇 번이나 찾아내 줘서 고맙다. 제가 도망쳐도 기어이 저를 찾아내 줘서,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
세상에 이 남자밖에 없을 것이다. 제가 도망치면 쫓아와 줄 사람이 이 남자 외에 또 누가 있을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윤희영이라는 초라한 이름을 기억해 주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고 쫓아와 주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야.”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안 버려.”
업혀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죽어도 너보다 늦게 죽어. 너 두고 죽지도 않을 거고, 살아 있는데 너 버리는 짓은 절대 안 해.”
표정을 보고 싶다. 그런데 보지 않아도 표정을 알 것만 같다.
“난 내 여자 안 버려. 버리느니 같이 죽지. 알아들어?”
희영이 고개만 끄덕였다.
“버려질 것 같으면 차라리 날 죽이고 따라 죽어. 그게 더 낫겠다.”
“죽이면, 죽어 줄 거예요?”
“왜? 죽일 생각도 했었어?”
“야, 약 먹이고 재워서 죽일까 하고…….”
“이거 무서운 년이네.”
“이젠 그런 생각 안 해요.”
“사람 죽이는 거 그렇게 쉽지 않아.”
“미안해요…….”
“미안하면 앞으로 나한테 잘해.”
희영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냐?”
“뭘요?”
“너 귀여웠다고.”
“네?”
“너 그때 말이야. 스무 살 때. 괜히 내 방문 앞에 얼씬거리며 심부름 거리 있냐고 물어봤을 때 귀여웠다고.”
“네…….”
“그때, 집 알아보고 있었어. 네가 하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거기 나가고 싶다고 해서 집 하나 따로 구해 주려고 했는데 빤스부터 내리더라.”
“정말, 그랬어요?”
생각지도 못했다.
“왜요? 왜 그렇게 잘해 주려고 했어요?”
“토끼 같잖아. 눈 동그랗게 뜨고 살려 달라고 뛰어 들어오고, 매일 쳐다보고 있고, 매일 돈 많냐고 물어보는데 신경 안 쓰이겠냐? 어린 게 혼자서 살아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보이는데, 의지할 가족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해서든 거길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게 보이는데 어떻게 모른 척하냐.”
“다들 모르는 척하던데…….”
“다들 모르는 척해서 난 이런 인간이 되었지만 넌 다른 인간이 되길 바랐지. 그래서 살림이나 차리자니까. 나도 손 씻었고 너 하나 멀쩡하게 살게 해 줄 수 있었는데. 그럭저럭 남들처럼 평범한 남편 구실 해 줄 수 있었는데.”
“이젠 늦었어요?”
“손 씻는 거? 좀 늦었어.”
“아니요. 남편이요.”
업혀 있는 등이 흔들렸다. 남자가 웃었기 때문이다.
“야, 그럼 내가 네 기둥서방이냐? 난 기둥서방 안 한다. 쪽팔리게 기둥서방이 뭐냐.”
“그런데 가방, 잃어버렸어요.”
“중요한 거 들었어?”
“아니요. 돈이 좀…….”
“됐어. 알잖아. 나 돈 많아.”
“알고 있어요.”
“배 안 고파?”
“고파요…….”
“그럼 가다가 뭐 좀 먹자.”
“네…….”
남자가 등에서 희영을 내려주었다. 차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타라.”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준 남자가 희영이 타기를 기다렸다가 운전석으로 갔다.
“기사는요?”
“됐어. 오늘은 내가 운전하면 돼.”
“그럼 저 옆에 앉으…….”
“뒤에 앉아. 옆에 앉으면 중간에 차 세우고 덮칠 거 같으니까.”
“네…….”
희영이 뒷좌석에 얌전히 앉아 운전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남자의 집에서 본 그 삼각형의 조각품이 떠오른다. 보육원에서 준 삼각형의 감사패.
삼각형. 어디에서 출발하더라도 결국에는 같은 점에서 만나게 되는 삼각형. 옆으로 돌려 눕혀도, 똑바로 세워 놓아도, 반대로 세워 놓아도 점은 결국 같은 점에서 만난다. 모든 면과 선은 꼭짓점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 자신이 어디로 가도, 어떤 식으로 살아도, 어떻게 도망을 쳐도 결국에는 이 남자와 만나 버리고 만다.
이 남자와 자신은 꼭짓점에서 만나고야 마는 운명이었다. 자신이 어디로 도망쳐도 결국에 마주치는 점은 이 남자다. 자신이 가는 길을 미리 알고 기다리는 것처럼 이 남자는 항상 자신이 가려는 그곳에 미리 와 있다. 그래서 안심이 된다.
이제 도망치지 않겠지만, 자신이 또 도망쳐도 이 남자는 여전히 거기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보다 이 남자의 말이 믿어진다. 버릴 것 같으면 같이 죽어 버리겠다는 말이, 절대로 안 버린다는 말이 믿어진다.
불안과 두려움이 눈 녹듯이 녹아내리며 희영이 비로소 안도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평온함이었다. 이렇게 안도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 마음이 놓였던 적이 있었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더는 긴장하며 힘주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자냐?”
뒷좌석에 기대어 고개를 끄덕이는 희영을 룸미러로 보며 종우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자네.”
종우가 피식 웃었다.
“자야지.”
운전대를 잡은 종우의 입에서 휘파람이 흘러나온다.
“하여간에, 사람 가지고 노는 년이라니까.”
그런데도 얼굴에는 전혀 기분 나쁜 표정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기분 좋은 웃음이 입술 끝에 머물러 있다.
* * *
“야. 오늘 고생했고. 연기 좋았다, 야.”
“술 처먹지 말고 곧장 집에 가.”
양복 입은 남자들이 컨테이너에서 나온 여자들에게 돈 봉투를 하나씩 건넸다.
“많이 넣었네?”
“이런 알바 있으면 종종 불러줘요.”
봉투 안의 돈 액수를 확인한 여자들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가라, 얼른 가.”
여자들을 돌려보낸 다음 남자들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비도 오는데 이게 뭔 지랄입니까?”
“시끄러워, 새끼야. 형님이 까라면 까야지.”
“그런데 형수는 왜 자꾸 도망친답니까?”
“난들 아냐?”
“형님 성격도 많이 죽었네요.”
“성격이 죽은 게 아니라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거지.”
“형님 무서운 분인데.”
“여자한테도 무섭겠냐? 아니, 형수한테도 무섭게 굴겠냐?”
“하긴.”
“슬슬 정리하고 우리도 가자.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자.”
“예. 다들 정리해라.”
컨테이너의 문을 닫고 남자들이 제각각 흩어져 차에 올라탔다. 그중에는 택시 기사도 끼어 있었다. 물론 진짜 택시 기사는 아니지만 오늘 밤만큼은 택시 기사의 역할을 잘 해낸 남자다. 오늘 저녁, 대문 밖과 현관 밖을 지키던 남자들이 자리를 비운 건 비가 많이 와서도 아니고, 무슨 큰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오늘 판 좀 짜 봐라.]
그건 그냥 이종우가 시켜서다.
[나 모르게 도망치게 해서 찾느라 고생하는 것보다 지금 도망치게 해서 버릇 잡아놓는 게 더 낫지.]
물론 그 여자는 절대 모르게 해야 하는 연극이다. 앞으로도 절대 들키지 말아야 하는 그런 연극 말이다.
“비가 그쳤네. 이제 장마가 끝나려나.”
차에 오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언제 비가 그쳤는지도 알지 못하게 비가 그쳤다.
이제 7월도 거의 다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