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날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본문
평소와 같이 거한 점심상을 차려 온 도휘가 조심스레 소화를 깨웠다.
“어서 일어나요, 소화. 밥 먹고 기운 차려야지.”
하지만 곤히 잠든 소화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어깨를 살살 흔들던 도휘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도 아픈가?”
새벽녘, 그가 입혀 놓은 속속곳 아래 말랑한 종아리가 만져졌다. 떡 주무르듯 종아리를 만지작거리던 도휘가 슬금슬금 허벅지를 지나 예쁜 엉덩이를 한 손에 쥐었다.
그때였다. 까무룩 잠든 소화가 볼기짝을 지분거리는 손길에 흠칫 경기하며 중얼거렸다.
“나는 못 한다. 나는 더 못 해….”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이를 비웃듯 도휘의 잘난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누가 들으면 밤새 그 짓만 한 줄 알겠군. 지난밤 이후 소화에게 손도 제대로 대지 못했는데 말이다.
저를 받은 구멍이 찢어지거나 다치진 않았는지, 허리를 너무 세게 붙들어 뼈가 부러지거나 멍이 들진 않았는지 온몸을 찬찬히 살펴보고 새벽 내내 후희를 즐기고 싶었지만 소화가 일절 거부했다.
만지기만 해도 아프다는 변명을 하면서 안채에서 아예 그를 내쫓았다.
이런 반응을 예상치 못한 것도 아니었다.
원래 여우가 엄살이 심한 편이지만 약한 개체라 그런지 소화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뒤에서 센 바람만 불어도 누가 저를 잡아먹으러 오는 줄 알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치는 게 바로 저 여우였다.
“도휘야, 난 별로 입맛이 없구나.”
끄응, 쉰 목소리로 앓는 소리를 하며 돌아눕는 소화를 도휘가 끈질기게 일으켜 앉혔다.
“그러지 말고 먹어요. 먹어야 기운이 나지, 응?”
“…….”
퀭하게 풀린 눈이 밥상을 응시했다. 대추, 밤, 마늘을 속에 실하게 넣은 흰 오리찜이었다. 한쪽에는 잣과 깨를 갈아서 만든 고소한 타락죽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임금님 수라 못지않은 정성 들인 밥상이었으나 소화에겐 저를 잡아먹으려는 못된 속셈으로밖에 읽히지 않았다.
시큼하게 무친 노각무침만 깨작거리고 있자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도휘가 답답하단 듯이 흰 오리찜을 앞으로 당겨 주었다.
“먹여 줄까요?”
“…아니다, 도휘야.”
소화는 통 수저질을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도휘의 눈앞에서 오줌을 갈긴 것도 창피했고, 목이 쉬도록 교성을 지른 것도 창피했다. 게다가 도휘의 얼굴 앞에 자꾸만 그 엄청난 방망이가 아른거려 영 눈을 마주치기가 민망했다.
‘호랑이가 아니라 말일지도 몰라.’
말이든 호랑이든, 아무리 봐도 이 관계는 정상이 아니다. 환영 속의 방망이가 꺼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도휘야, 내가 밤새 생각을 해 보았는데….”
그가 들은 척도 않고 타락죽을 곱게 떠서 후우 불곤 소화의 입술로 들이밀었다.
“자, 아….”
꿀꺽, 맛도 모르고 삼킨 그녀가 다시 죽을 뜨려는 도휘의 손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도휘야, 우리는… 안 되는 걸 알잖니.”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목각 인형처럼 굳어 버렸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는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단다. 평범했으면 좋겠어.”
“좋아했잖아요.”
금세 낯빛을 달리한 도휘가 무섭도록 선명한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내 밑에서 좋아 죽는다고 앙앙대고 울었잖아.”
“그, 그건.”
“당신이 나보다 더 많이 쌌어요. 이 손을 흠뻑 적시고도 남을 만큼 싸고, 제발 넣어 달라고 보지를 벌렁대면서 애걸복걸….”
“도휘야!”
에구머니. 밥상머리에서 저게 다 무슨 소리람!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진 소화가 두 손으로 양 볼을 감쌌다.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걸 처음 보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안 된다는 말을 내가 믿겠어요.”
다시 입술 끝을 올리며 자상한 미소를 머금은 도휘가 죽을 식히며 말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 발정에 가져오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요. 지금 여의주를 가져올게. 그건 먼 곳에 있지도 않으니까.”
“그, 그게 무슨 뜻이니?”
낮은 웃음을 터뜨린 그가 타락죽을 소화의 입술 사이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우리가 오늘 밤에 아기를 만들 거라는 뜻이에요.”
도휘는 그녀의 입술 끝에 흐른 것까지 꼼꼼히 엄지로 닦아 주었다.
“내 귀여운 여우.”
지난밤, 이 얼굴을 제 씨물로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자 아랫도리가 다시 묵직해졌다. 도휘가 요부처럼 눈을 접어 가며 웃었다.
“진작 그렇게 할 걸 그랬지. 그럼 어젯밤에 내 씨물을 배가 부르도록 먹여 주었을 텐데.”
여의주는 그것을 지니는 숙주의 원기 회복과 정양에도 좋았다. 한데 굳이 왜 미뤘는지 한심한 제 선택이 후회될 정도였다.
안색이 파래진 소화의 볼을 유려한 손길로 쓰다듬던 도휘가 삐져나온 귀밑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오늘 밤에는 꼭 보지에 싸 줄게요. 당신 가장 깊은 곳에.”
점심상은 먹고 싶을 때 먹으라고 일러둔 그가 소화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르륵, 문을 여는 손길이 사뭇 거세었다. 그가 안방을 나서는 모습을 눈으로 좇던 소화가 소리쳤다.
“나는 널 애모하는 마음도 없어!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부부가 되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겠니?”
“괜찮아요. 내가 당신 몫까지 사랑하고 있으니까.”
문을 닫기 전, 도휘가 돌아보지 않은 채로 말했다.
“오늘 무슨 소리가 나도 밖에 나가지 말아요.”
***
도휘가 당부했지만 소화는 그 길로 집을 뛰쳐나왔다.
‘하늘의 도리에 맞지 않으니 우리는 안 된다, 나는 여우고 너는 호랑이야’ 하는 괴발개발 급하게 적은 서찰 하나 남긴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황산을 내달렸다.
‘인간 마을로 가자. 설마 호랑이로 변해서 거기까지 쫓아오진 못하겠지.’
어찌나 오랜만에 가는지 아랫마을 길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소화는 무작정 인적이 난 오솔길로 향했다.
혼자가 되니 밥상 앞에서 도휘가 내뱉은 난잡한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소화는 떨쳐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그런 관계가 되어선 안 돼!’
모르긴 몰라도 자고로 남녀가 서방 색시 노릇을 하려면 지극히 서로를 애모하고 아껴 주어야 한다.
도휘를 제 몸만큼 아끼기는 하지만 애모는 아니잖은가?
‘애모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주워듣기로는 아무튼 그랬다. 그 녀석도 아마 발정이 가까워 사리 분별이 안 되는 게 분명했다. 호랑이와 여우가 맺어졌다는 소리는 지나가는 풍문으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난밤 도휘가 농탕질 치며 날뛰던 모습을 떠올리자 눈앞이 하얘졌다. 안 된다, 안 돼. 그 흉물스러운 몽둥이만 봐도…. 어이쿠, 못 한다, 못 해. 다시 생각해도 남사스럽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 흉기를 제가 이해한다 쳐도 도휘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백년가약을 맺을 순 없었다.
사랑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녀석을 향한 제 작고 소중한 애정 한 그릇이 남녀의 뜨거운 사랑을 담을 그릇은 아닌 게 확실했다. 간장 종지에 국밥을 말아 먹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 간장 종지. 그 녀석을 향한 제 마음은 딱 간장 종지만 하다.
도휘 생각에 혼란스러운 가운데, 소화는 해 지기 전에 저잣거리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인기척이 오늘은 어찌나 반가운지 몰랐다.
소화는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전부리라도 사 먹고 싶었지만 엽전이라곤 한 푼도 없었다.
‘도휘가 옆에 있었으면 맛있는 꿀떡을 사 줬을 텐데.’
갑작스레 치민 생각에 울컥했다. 그 녀석 없이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하나 정말이지 막막했다. 따지고 보면 도휘가 없이 혼자 살았던 세월이 더 긴데 말이다.
‘근근이 연명했었지….’
특히 겨울에는 뱃가죽이 들러붙을 정도로 곯은 날이 허다했다. 개울마저 얼어붙어 물배를 채우기도 여의치 않았다.
도휘가 하듯이 인간 마을을 들락거렸다면 창고를 채워서 굶지는 않았을 텐데, 소화는 엽전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몰라서 소용없었다.
‘너구리 녀석은 잘도 구하던데 말이야.’
가을이면 낙엽을 쓸어 모으는 게 호영의 일이었다. 그걸로 요술을 부리는 신묘한 방법이 있는 듯했지만 겨우 제 몸이나 건사하는 주제에 소화는 그런 재주까진 없었다.
그간 도휘가 삼시 세끼와 간식까지 착실히 차려다 바친 바람에 당장에 한 끼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난감했다.
그래도 산속을 헤매는 것보단 인간 마을에 숨어 있는 게 낫겠거니 싶었다. 일단 갈증이라도 해결하려 우물가를 찾던 그때였다.
“피풍의 사시오! 날도 추워지는데 피풍의 사시오!”
마치 저를 지목하는 듯이 커다란 목소리에 저절로 소화의 고개가 돌아갔다.
“소저! 예쁜 소저! 이리 와서 이것 좀 보시오!”
행랑이 줄지어 늘어선 장거리에 한 중년 사내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이건 개가죽으로 만든 구피, 이것은 보드라운 토끼 가죽으로 만든 토피요!”
사내는 소화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이 옷 저 옷을 들어 보였다. 소화는 사내가 보여 주는 모피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예쁜 소저에게 딱 어울릴 만한 것도 있소! 이건 초피요!”
다리가 빳빳이 굳어 자리에 멈춰 선 그녀를 보곤 사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이 초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멀리 대갓집에 들어가는 귀한 것인데 딱 한 벌 있소! 예쁜 소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한번 몸에 대어 보시오.”
사내가 들어 올린 길쭉한 검은 털가죽은 소화의 눈에도 퍽 익숙했다. 앞다리, 뒷다리 흔적까지 남은 그 가죽은 검은담비의 것이었다. 장가를 가서 요즘 안 보이나 했더니….
“배자에 덧대어 입으면 얼마나 예쁘겠소?”
빙긋이 미소를 머금은 사내는 손님을 놓칠까 급히 행랑을 뒤졌다. 그의 눈에는 비단 저고리를 입은 소화가 귀한 집 여식 같았던 것이다.
“내, 소저에게 딱 어울릴 만한 것도 있소. 이걸로 옷을 지어 입으면 이만큼 부드럽고 따스할 수가 없다오!”
사내가 자신 있게 꺼내 든 것은 바로 붉은 여우의 가죽이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온전한 형태의 가죽을 보자 역한 구역질이 일었다.
“우욱.”
“왜 그러시오? 그러지 말고 이 여우 털이 어찌나 부드러운지 한번 만져나 보시…. 소저! 소저!”
입을 틀어막은 소화는 뒷걸음질 치며 장거리에서 도망쳤다.
***
간신히 우물가를 찾은 소화는 쓰러지듯 버드나무에 등을 기대고 급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방금 본 것이 어찌나 끔찍하던지 허기가 싹 가셨다. 도저히 인간 마을도 정붙이고 살 곳이 못 되었다. 이곳엔 한시도 더 못 있겠다.
‘천문산으로 가자.’
천하 명산인 그곳은 거대한 산맥과 수없이 많은 산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설마 그 광활한 영토에 저같이 작은 여우 한 마리 머물 곳 없을까. 포악한 호랑이 한 마리가 그 산을 제 앞마당처럼 노니며 신령 노릇을 한다는 소문을 청맹과니나 다름없는 저도 듣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이고, 여기나 저기나 호랑이구나.’
한탄만 나왔다. 그래도 그곳엔 싱싱한 먹잇감이 많을 테니 굳이 저처럼 비실비실한 여우를 잡아먹진 않을 것이다.
지친 소화가 조용히 제 차례를 기다리던 그때였다.
“소저, 물을 마시려는 것이오?”
작은 우물가에 사람이 많아 북적였다. 젊은 사내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얌전히 대꾸하자 사내가 두레박을 퍼 올리곤 한 바가지 가득 물을 떠 주었다.
“자, 먼저 드시오. 안색이 영 좋지 않구려.”
사내는 마을 사람인 듯했다. 감사 인사를 한 소화가 조심스레 바가지를 받아 들곤 물을 마셨다.
“보아하니 외지인인 것 같은데, 저 산에는 오늘 내일 절대 올라가지 마시구려.”
사내가 이황산을 가리켰다. 방금 그 산에서 뛰어 내려온 소화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사내가 큰 비밀을 말하듯 주위를 쓱 둘러보곤 속삭였다.
“저 산에 호랑이가 사는 건 알고 계시오?”
눈이 동그래진 소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떨떠름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내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저 산이 예부터 이무기가 있다, 300년 묵은 구렁이가 있다 별 해괴한 소문이 많고 워낙 산세가 험하여 마을 사람들은 발길도 안 하는 곳인데 글쎄, 묘지기가 호랑이를 봤다지 뭐요.”
야트막한 산자락에 머무는 묘지기는 나이가 많고 거동이 불편하여 노루며 염소를 집 근처에 풀어놓고 몇 마리 키우고 있었다. 한데 어느 날부터 한두 마리가 안 보이길 시작하더니 종국에는 남은 게 없었다.
화가 난 묘지기는 산기슭을 헤매다가 뜯어 먹고 남은 뼈만 낭자한 걸 보고 도망치다 호랑이를 마주쳤다.
“샛노란 안광이 부리부리하고 몸집이 저 집채만 한데 날래기가 보통이 아니라 하오. 살다 살다 그런 것은 처음 본다고 아흔 먹은 묘지기가 산에서부터 똥오줌을 지리면서 내려왔소.”
“그렇군요. 한데 왜 오늘 내일만 산행을 말라는 것입니까?”
소화가 구름 낀 이황산을 바라보며 묻자 사내가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관아에서 호랑이 사냥꾼을 보내 주셨소.”
순간 놀란 그녀의 눈이 번쩍 커졌다.
“…예?”
휙 돌아보며 멍청하게 되묻자 사내가 천만다행이라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고는 답했다.
“호랑이를 잡는 호랑이 전문 사냥꾼 말이오! 아침나절에 내 보았는데, 다들 풍채가 좋고 눈빛이 무시무시한 것이 어깨에는 기다란 총을 메고 있더이다.”
당황한 소화의 눈동자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손끝이 달달 떨려 들고 있던 바가지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한둘도 아니고 열댓이니 그만하면 호랑이도 잡을 수 있지 않겠소?”
껄껄 웃는 사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화가 냅다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소저, 어딜 가는 것이오? 아, 그 산은 위험하다니까! 잘못하면 총에 맞을지도 모르오! 소저!”
***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여우로 변한 소화는 거의 튀어 오르듯 산을 올랐다. 네발로 거친 수풀을 헤치고 이렇게 날쌔게 달려 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호랑이 사냥꾼이라니! 안 된다! 안 돼!’
토끼처럼 암벽을 마구 뛰어 올라가던 그때였다.
깨깽!
어디선가 목이 졸린 듯한 소름 끼치는 비명이 들려왔다. 번쩍 고개를 든 소화의 털이 비쭉 섰다.
암여우의 소리였다.
멈칫한 소화가 촉각을 곤두세운 그때, 암여우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캐갱캐갱! 도와줘! 제발 도와줘!”
가만 들어 보니 이 목소리는 전에 만났던 붉은 여우 미호의 것이었다. 그녀가 애타게 도움을 청하며 다른 여우를 부르고 있었다.
당황한 소화의 커다란 눈이 빠르게 좌우를 오갔다.
곤란에 빠진 저 불쌍한 여우를 도와줄 이가 있겠지? 있을 거다. 분명 그럴 거다! 나 말고도 이 안쓰러운 울부짖음을 누군가 듣고 도와주러 갔을 거다!
‘난 호랑이 사냥꾼을 먼저 찾아야 해.’
도휘가 위험에 처할지 모른다. 못 들은 척하려고 소화는 질끈 눈을 감았다.
“도와줘! 제발 누구든 와서 날 구해 줘! 제발 살려 줘!”
결국 소화는 간절한 미호의 목소리에 방향을 틀었다.
이윽고 깨갱거리는 소리를 쫓다가 어렵게 미호를 찾아냈다. 고소한 닭 냄새가 진동을 하는 우거진 수풀 속이었다.
“왜 이런 험한 곳에 닭 피가….”
수풀을 들추고 고개를 빼 든 소화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곳엔 저보다 몸집이 큰 붉은 여우가 올무에 한쪽 발이 걸린 채 뒤집혀 있었다.
“살려 줘! 어서 날 살려 줘!”
올무를 빼내려 얼마나 발을 버둥거렸는지 미호의 반지르르한 털이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끔찍한 몰골에 충격을 받은 소화는 그만 쿵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아플까. 세상에, 얼마나 아플까!
미호는 이미 진이 다 빠져서 모습을 바꿀 기력도 없어 보였다. 어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 안 그러면 저도 미호처럼 저런 올무에 발이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
다급히 인간으로 변한 소화는 또 올무가 있을까 사방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미호에게 다가갔다.
“어쩌다 이런 거니?”
“어쩌다 이랬기는, 약아빠진 인간들이 먹이를 두고 덫을 놔뒀으니 걸렸지!”
그 말대로였다. 주위에는 닭의 피가 수상할 만치 잔뜩 뿌려져 있었고 토막 난 닭이 보란 듯이 통나무에 놓여 있었다.
그 통나무에 구부러진 철사가 연결되어 있었다. 한데 어찌나 단단히 묶어 놓았는지 맨손으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철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얼른 풀어 봐! 아프단 말이야! 어서! 어서!”
올무란 사냥감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조여 오는 것이었다. 재촉하는 미호가 발을 휘두르는 바람에 더더욱 철사를 풀어내는 게 더디었다.
“가만 좀 있어!”
“얼른 풀라구! 빨리해! 빨리!”
“아얏!”
미호가 캐갱캐갱 울어 대며 탁탁 치는 바람에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소화의 손에도 상처가 났다. 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보다는 이 올무를 풀어 주는 게 먼저였다.
‘내가 여기 걸렸으면 진작 죽었을 거야.’
그나마 미호쯤 되는 건강한 붉은 여우이니 살아 있지, 저 같은 비실이가 뒷발이 묶인 채 나무에 걸려 있었다면 진작 저승길 떠났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하여 제 손의 상처도 모른 채 낑낑거리며 올무를 풀어내던 그때였다.
탕!
바위가 갈라지듯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옆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깨갱!
제가 열심히 올무를 풀고 있던 붉은 여우의 몸뚱이가 한번 크게 들썩이곤 축 늘어졌다.
“……!”
죽었다. 미호가, 죽었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소화는 뒷전에서 들리는 음험한 사내들의 목소리에 손을 달달 떨었다.
“하하! 명중이군! 명중이야!”
“착호군 최고의 명사수 나셨군그래!”
“하하하하! 그나마 여우라도 잡았으니 체면치레를 하겠어!”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산이 떠내려갈 듯했다. 소화는 차마 눈도 감지 못하고 죽은 미호의 얼굴을 보고 울컥 눈물이 솟았다.
“붉은 여우를 다섯 마리나 잡았으니 모피 옷을 만들면 되겠군.”
어느새 다가온 산적 같은 사내가 올무를 잘라 내곤 미호를 꺼내 들며 말했다. 길쭉한 주둥이 밖으로 혀가 늘어진 미호의 사체를 떡하니 어깨에 얹은 그가 힐끔 소화를 돌아보았다.
“소저께선 여기서 뭘 하고 계시었소? 이 여우는 내 사냥감이오만.”
고개를 떨구고 있던 소화는 얼른 눈물 자국을 닦아 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나다가 여우 우는 소리가 하도 불쌍하여 꺼내 주려던 참이었습니다.”
“이 산길에 길잡이도 없이 혼자 어딜 가는 중이었다는 거요?”
뒤에서 다른 사내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이 산은 보통 산이 아니오. 산세도 험하거니와 귀문(鬼門)이 열린 곳이라 사방에 음기가 가득하여 함부로 들어섰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지.”
이어서 그 옆의 사내가 맞장구를 쳤다.
“맞소. 저 아래 대갓집 하나 보시었소?”
소화가 소심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에 촉촉이 젖은 사슴 같은 눈망울, 붉은 입술과 길고 우아한 목선이 월궁항아가 이럴까 싶을 정도로 뛰어난 미색이었다. 사냥꾼은 눈이 휘둥그레져선 만담꾼처럼 손짓 발짓 해 가며 말을 이어 갔다.
“그, 그 집은 구미호가 사는지 마당도 깨끗한 데다 부엌간에도 아직 열기가 가득하더이다. 내 호랑이 잡는 착호갑사(捉虎甲士)라지만 무서워서 ‘누구 계십니까’ 하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냉큼 도망 나왔소!”
“소저도 얼른 내려가시오.”
돌아보니 열댓 명은 되는 사내들이었다. 저마다 뒤에는 기다란 화승총을 메고 거친 털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다들 도휘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키가 육 척이 넘어 보였다. 다만 우락부락한 수염과 다듬어지지 않은 외관 때문에 기방 도령 같은 도휘의 고운 얼굴과는 천지 차이였다. 백정처럼 살의가 감도는 저 눈빛도 그랬다.
착호갑사.
이들이 바로 관아에서 왔다는 그 호랑이 전문 사냥꾼이었다.
“…지금 호랑이를 잡는다 하시었습니까?”
“그렇소.”
죽은 미호의 충격이 가실 새도 없이 심장이 벌렁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들이다. 이들이야!’
어느새 치맛자락을 꾹 움켜쥔 소화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이 이황산에 포악한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얘기가 들리지 않겠소. 하여 관부에서 우리를 보냈소.”
“아랫마을에 사는 소저요?”
소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 사내가 알겠다는 듯 주먹을 탁 쳤다.
“그래서 이 산길을 헤매고 있었던 거구만! 자, 어서 내려가십시다. 마을로 가는 길을 좀 안내해 주시오.”
사내들은 그녀를 앞장세웠다. 잠시 갈피를 못 잡고 멈춰 있던 소화는 이내 결심한 것처럼 비장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곳 이황산에서만 20년 넘게 산 저도 처음 가 보는 길이었다. 그날 이후로는 말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내려가야겠소. 이 산에 한 시진이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아서 말이오.”
“저만 따라오시어요.”
그 무서운 호랑이 사냥꾼들이 왜 호랑이는 안 잡고 그냥 하산한다는지 모르지만 천만다행이었다.
‘절대 도휘를 마주치게 해선 안 돼.’
저 총에 맞았다간 도휘가 죽을지 모른다.
아무리 날쌔어도 한 명도 아니고, 열댓 명이나 되는 사냥꾼의 총알을 모두 피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신령님이라도 그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어험, 내 착호군 마패를 달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보았으나 이런 산은 또 처음이네그려.”
“…….”
저들이 착호군 나리입네 하고 떠들어 대자 저절로 호랑이 사냥이 상상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호랑이가 요리조리 몸을 피하다 열댓 명의 노련한 사냥꾼에게 둘러싸여 탕탕탕! 총을 맞는다. 그러곤 풀썩 쓰러진다. 호랑이의 피는 땅을 적시고, 앞발은 애꿎은 흙을 긁다 천천히 늘어진다.
이 산을 호령하던 호랑이의 황금색 안광은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축 늘어진 혀는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다. 사냥꾼들은 더없이 귀한 호피를 구했다며 껄껄껄 웃음을 터뜨린다….
이윽고 소화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였다. 미호의 죽음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눈앞의 상상이 더없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도휘가 죽으면 나도 못 산다! 나도 안 살아!’
주먹을 움켜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애써 용기를 가장하였으나 태생적으로 간이 코딱지만 한 소화는 결국 작게 훌쩍였다.
게다가 그 동굴에 정확히 뭐가 있는지 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처음 ‘그것’을 보곤 뒤집어질 듯 놀라 얼씬도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는 생전 발길도 않았던 곳. 동굴 위의 벼랑 끝으로, 사냥꾼들을 이끌고 있었다.
눈앞에선 자꾸만 호랑이가 피 흘리고 죽는 모습이 아른거려 뒤에 선 사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랐다.
얌전히 소화의 뒤를 따르던 사냥꾼들이 속닥거렸다.
“글쎄 저런 건 나도 정말 처음 보네. 내 착호군 생활 20년 만에 처음일세.”
“나도 저리 높은 데 있는 발톱 자국은 본 적이 없네.”
착호군은 호랑이를 쫓는 데 특화된 사냥꾼인 만큼 호랑이가 남긴 표식을 잘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이황산에는 그들의 눈길이 닿는 나무마다 저 높은 꼭대기에 귀신이 할퀸 것처럼 깊은 발톱 자국이 나 있었다.
저 발톱 자국은 호랑이가 뒷발로 일어서서 앞발을 휘둘러 나무를 긁은 자국이었다.
“대체 얼마나 거대하길래 나무 꼭대기에 발톱 자국을 내었단 말인가?”
“못해도 십이 척은 될 걸세.”
“허이구.”
호랑이는 제 영토에 다른 개체가 침범하는 걸 질색하기에 저 모든 표식은 한 마리의 것이었다.
발정기에 다다른 호랑이일수록 표식을 자주 남기는데, 저 정도면 사계절 내내 발정이 나서 매우 예민한 상태가 틀림없었다. 저런 것은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된다.
“보니까 저 위의 암자에서 치성을 올리던데, 저것은 필시 그냥 호랑이가 아니고 신령님일세.”
“맞네, 맞아. 잘못 건드렸다간 큰 재앙이 올 것이야. 관부에는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지.”
“얼른 하산하세. 이 산이 대낮에도 으스스한 것이 영 느낌이 좋지가 않네. 호랑이뿐만 아니라 요괴가 드글드글한 것 같단 말이지.”
“예끼, 이 사람아. 우리 머리 꼭대기에 부처님 계신 거 안 보이나?”
“한데 지금 이 길이 맞는 겐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절의 반대 방향 아니었나…?”
어느새 사방은 안개가 자욱하고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뻐꾸기만 속절없이 울어 댔다.
끄윽, 끅…. 안 된다, 안 돼…. 난 못 산다…. 난 못 살아…. 뭔가가 서글피 울며 한탄하는 것도 같았다.
“저 소저 말이야. 대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사내들의 시선이 열 발자국 앞에 있는 소화의 뒷모습을 향했다. 자수가 들어간 옥색 비단 저고리에 자색 치마, 꽃당혜를 신은 고운 자태가 여염집 아가씨 같진 않았다.
얼핏 듣기로 이 시골에는 양반집이라곤 없으니, 그것도 신기한 노릇이었다.
“잠깐, 혹시….”
사내들이 소화를 의심하고 멈춰 서는 동시에 안개에 반쯤 가려졌던 그녀의 모습이 귀신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언뜻 치켜든 손끝에는 날카로운 손톱이 삐죽 나와 있었다.
이를 똑똑히 지켜본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구… 구미호다! 구미호였어!”
“함부로 달려들지 말게!”
다급히 총을 꺼내 든 그들이 서로를 등지고 둥그렇게 대열을 만들었다.
“우리는 호랑이도 잡는 착호군이다! 네년 손에 쉽게 죽을 줄 아느냐!”
날카로운 눈으로 온 사방을 경계하였지만 산속은 그저 고요했다. 빈 가지만 남은 헐벗은 나무들이 바람결에 스산하게 흔들렸다.
그들 중 대장 노릇 하는 한 사내가 총에 불을 붙인 뒤 몸을 낮추고 한 발자국씩 조심스레 내디뎠다.
열 발자국쯤 가던 그가 부스럭, 발밑의 낙엽을 밟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캬아앙!
앙칼지게 울부짖으며 무언가가 그의 안면에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날랜 것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눈앞을 가렸다.
사내가 그것을 떼어 내려 손을 휘적거리며 비틀댔다. 탕! 목표를 제대로 겨누지 못하고 허공에 총을 쏘자 사냥꾼들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순식간에 주위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으아악!”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바위 위로 자란 소나무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깊은 골짜기였다.
“아악! 살려 줘어!”
“이봐! 이봐!”
다른 사내들이 벼랑 끝으로 달려가선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그들은 비탈진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남은 사냥꾼은 예닐곱이었다.
“저… 저 아래 강이 있었나?”
벼랑 아래, 그곳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그 동굴에서 시작된 검은 물줄기가 넘실댔다. 안개에 가려 물소리는 일절 없으니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그 순간 물속에서 한 쌍의 눈알이 번쩍였다.
“으아아아아악!”
추락하는 사내들을 향해서 새까만 아가리가 벌어졌다. 벌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사람들을 잡아먹은 그것은 언제 존재했냐는 듯 태연히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저… 저것이 대체….”
그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몸통이 강물처럼 굵은 구렁이였다. 사냥꾼들은 일제히 넋을 잃었다. 전국 방방곡곡 온갖 산을 넘어 다녔지만 저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였다. 소중한 동료를 추락시킨 구미호가 바위를 딛고 타다닥 골짜기를 뛰어 올라왔다.
달빛에 반사된 몸통은 설눈처럼 새하얗고, 귀와 발, 꼬리만 거뭇한 것이 털에는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데 재빠르고 날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 자태를 본 사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급히 총에 불을 붙였다.
“이보게! 구미호를 잡을 생각인가?”
“당연하지! 그리고 저건 구미호가 아니야! 은여우라고, 은여우!”
“은여우 저 털을 좀 보게! 저것을 벗겨다 귀비마마께 진상하면 특진은 따 놓은 당상일세!”
“크기가 작아서 목도리나 겨우 하나 만들겠군.”
사내들은 일제히 총을 조준했다. 저런 새하얀 여우는 사신들의 진상품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꼬리는 뜯어다가 장갑을 만들면 되겠어.”
눈을 희번덕거린 사내가 먼저 은여우를 향해 조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알이 여우의 뒷발을 안타깝게 비껴가자 그가 급히 다시 불을 붙였다.
탕! 이번엔 다른 이가 쏜 총알이 여우가 이미 지나간 자리를 맞혔다. 탕! 탕! 탕! 고요한 산속에는 빗발치는 총소리만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하지만 아무도 여우를 쏘아 맞히지 못했다. 눈 깜빡할 새 골짜기를 올라온 여우는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요물이 어딜 갔지?”
불을 붙여 장전한 채 사내들은 혈안이 되어 그 여우를 찾았다.
“털이 상하지 않게 조심해야 하네! 호랑이 가죽보다 귀한 거니까!”
붉은 여우는 흔하다. 하지만 은여우는 매일 산을 오르는 심마니들도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할 만큼 희귀했다.
게다가 저것은 몸통이 설원처럼 새하얗고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광이 흐르는 것이 털이 얼마나 부드러울지 만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깄다!”
탕! 한 사내가 총을 쏘는 동시에 안면에 덮쳐 든 여우 때문에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여우는 재빨리 얼굴을 할퀴곤 사내의 몸을 내려와 다른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사이 여우가 있는 방향으로 누군가 총을 쏘았다.
“커억!”
동료의 총에 맞은 사내가 가슴팍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여우는 위험천만하게 사내들 사이를 오가며 눈을 할퀴었다. 어찌나 재빠른지 떼어 내려고 움켜쥐는 순간 여우가 먼저 뒷발로 안면을 강타하며 다른 사내의 얼굴에 가 붙었다.
“으흑! 내 눈…! 내 눈!”
순식간에 서넛이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개중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벼랑 끝으로 떨어졌다.
여우는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가 사내들에게 달려들길 반복했고 그 여우를 잡으려고 눈먼 사내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마침내 한 명이 남았다.
캬앙!
소화는 죽을힘을 다해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날카롭게 치켜든 발톱으로 그의 안면에 샤샥 앞발질을 하려는데, 사내가 먼저 개머리판으로 그녀를 내려쳤다.
깨갱!
몸통을 제대로 후려 맞은 소화가 나무에 퍽 하고 부딪혔다.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진이 다 빠진 소화는 다리가 후들거려 몸을 제때 일으키지 못했다.
“이 괘씸한 년!”
다가온 사내가 먼저 그녀의 목덜미를 짓밟았다.
캥! 새된 비명을 지른 소화는 가죽신 밑에 깔려 의미 없이 다리를 버둥댔다. 숨을 쉴 수조차 없어 눈앞이 흐릿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네 사지를 다 잘라 내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 고운 가죽을 쓰질 못하게 될 게 아니냐?”
사내는 봇짐을 뒤져 올무에 쓰던 철사를 꺼냈다. 그것으로 여우의 주둥이와 목을 묶을 생각이었다.
“너는 산 채로 박제해서 귀비마마께 올려 주마.”
악귀 나찰 같은 사내가 흉흉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우악스러운 손이 소화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반항하듯 발톱을 세워 버둥거렸지만 그뿐이었다.
‘그래도 한 명만 남았으니 도휘는 무사하겠지.’
철사를 쥔 손이 가까이 다가왔다. 숨이 막혀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도휘가… 도휘가 사냥꾼이 없는 곳으로 가서 잘 살아야 할 텐데….’
작은 머리를 아프게 틀어쥔 그가 주둥이부터 철사로 꽁꽁 묶기 시작했다. 차갑고 예리한 그 감각에 소화의 몸이 얼어붙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 싶구나.’
도휘가 여의주를 가지러 떠난 게 마지막 만남이란 걸 알았다면, 떠나기 전에 듣기 좋은 말이라도 한번 해 줄 것을 그랬다.
사실은 네가 호랑이인 걸 나도 알고 있었단다. 그런데도 네게는 먹혀도 괜찮겠구나 싶을 만큼 귀엽고 가여워서 주워 온 거야.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혼자 그렇게 떨어져서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니?’
도휘가 커 갈수록 어디든 멀리 보내야 한단 걸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게 늦어 있었다. 둘이라는 든든한 담장 안에서 그가 주는 따스한 온기에 젖어 도휘 없이는 제가 살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차라리 멍청한 바보 소리를 들어도 눈치 없는 여우가 되어 그를 옆에 두는 게 훨씬 나았다.
나중에 내가 죽은 것을 알고 너무 슬퍼하진 말아야 할 텐데.
그래도 너를 만나서 충분한 삶이었다.
‘내게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오직 너였단다….’
한 번이라도 진심을 보여 줄 걸 그랬다. 언젠가 그가 먼저 제 곁을 훌쩍 떠나 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별이 이토록 쉽게 다가오는지 진작 알았더라면 간장 종지만 한 마음이라도 아끼지 않고 퍼 줄 것을.
‘너를 귀애한단다. 도휘야….’
소화가 사냥꾼의 손에 죽어 가던 그때였다.
크르르르….
공기를 찢는 낮은 울림이 들려왔다. 세상 어떤 동물과도 다른 그 울음소리는 귀를 통해서 온몸으로 전달되어 본능적으로 사냥꾼의 손을 멎게 했다.
곧이어 천지가 개벽하는 것처럼 거대한 포효가 이어졌다. 그 울부짖음에 놀란 사내가 손을 떨다 소화를 떨어뜨렸다.
“으아아악!”
도망가려는 순간 사내는 휘둘러진 앞발에 후려 맞았다. 주걱에 맞은 두부처럼 머리통이 퍽 하고 깨져 죽었다.
쓰러진 시체를 밟고 어슬렁거리던 도휘는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이 엇갈렸다. 소화의 냄새를 쫓아 마을까지 내려갔다 오는 바람에 더 늦어졌다. 초조한 나머지 마음만 앞섰다.
어디 있지?
순간 도휘는 수풀에 떨어진 작은 털 뭉치를 발견했다. 희고 검은 그 털 뭉치는 움직임도 없고 숨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쿵. 심장이 내려앉은 도휘가 다가가 여우를 깨우듯 살살 굴려 보았다. 그러다 주둥이를 꽁꽁 묶은 철사를 보고는 싸늘히 피가 식었다.
“안 돼, 안 돼….”
다급히 인간으로 변한 그가 떨리는 손으로 철사를 풀었다. 짧은 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죽으면 어떡하지? 내 여우가 죽으면….
너무도 소중하여 제 옆에서 사라진다는 상상조차 감히 해 본 적이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모조리 증발하는 기분이었다. 소화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대로 고백도 하지 못했는데. 거둬 주어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했는데. 저를 받아 주지 않는다고 내내 심술만 부렸는데! 이 작은 겁쟁이 여우가 무슨 일로 사냥꾼한테 덤벼선…!
다행히 옅은 맥박이 아직 있지만 소화는 캑캑거리기만 할 뿐 숨을 쉬지 못했다. 여전히 눈도 뜨지 못했다. 이러다 곧 죽을 게 분명했다.
이럴 때 쓰려던 건 아니지만….
도휘는 여우의 목덜미를 쥐고 일으켜 다른 손으로는 주둥이를 열었다. 그러곤 숨을 불어 넣듯 제 입을 벌렸다. 그 입술 사이에서 다홍색 영롱한 구슬이 나왔다.
이무기에게 강탈한 여의주였다.
그것은 스르르 소화의 주둥이 안으로 들어갔다. 도휘는 곧장 주둥이를 닫아 붙들고 목덜미와 배를 쓸어 주었다. 그러자 소화가 어렵게도 꿀떡하고 여의주를 삼켰다.
이제는 하늘에 달린 일이었다. 다시 호랑이로 변한 도휘가 조심스레 소화를 입에 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소중한 그들의 보금자리.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고되었다.
***
소화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무려 열흘을 꼬박 앓아누웠다. 자면서도 심한 헛소리를 해선 도휘를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으응…. 안 된다…. 난 못 산다…. 안 돼…. 죽으면… 난 못 살아….”
대체 누가 죽는다는 건지. 소화가 누굴 저렇게 걱정하는지 궁금하고, 짜증이 일었다.
누린내 나는 너구리 자식인가? 아니면 제가 물어 죽인 수여우? 속이 시커먼 이무기?
그것도 열받는데 자꾸 ‘난 못 산다’ 같은 소리만 반복해서 하니 옆에서 듣는 도휘는 초조하기만 했다.
여의주의 효능이 있긴 한지, 그 이무기에게 속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고작 300년밖에 안 된 어린놈의 여의주라 효험이 부족한지도 몰랐다.
소화가 눈을 뜨길 기다리는 열흘이 만년처럼 길기만 했다. 그동안 도휘는 찬물에 담가졌다가 끓는 물에 담가지길 반복했다.
낮에는 소화의 옆에서 손을 꼭 붙들고 제발 살아만 달라고 애원하다가, 밤에는 그녀가 당한 일을 떠올리곤 화가 나서 인간 마을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포악한 호랑이의 습격에 사람들은 결국 모든 걸 버리고 마을을 떠났다. 남은 건 흉흉한 소문뿐이었다.
“도휘…. 도휘야.”
가끔 이렇게 제 이름을 부르기도 했는데 그 목소리가 어찌나 애절한지, 도휘는 할 수만 있다면 잠든 그녀의 꿈속에 들어가 저 여기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소화와 함께 있고 싶었다.
“도휘야….”
기적처럼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천지신명께 절을 했다. 잘난 건 저밖에 없다고 여기던 포악한 호랑이의 개과천선이었다.
“있으면 대답 좀 해 주겠니….”
눈앞은 가물가물하지만 소화는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제 손을 붙든 이 뜨거운 손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나 여기 있어요, 소화. 계속 옆에 있었어요.”
도휘는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 주며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그러자 하얗게 일어난 버석한 입술이 움찔대다 조심스레 다시 열렸다.
“너를 귀애한단다.”
도휘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그가 몸을 바짝 숙여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다시, 말해 볼래요?”
때마침 소화가 힘겹게 눈을 떴다. 제 눈앞에 들이밀어진 새카만 머리통을 보고 그녀가 달달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제 것만큼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머리칼이었다.
한동안 도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소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소중한 호랑이야.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러하단다.”
열띤 고백에 도휘는 울컥했다. 그렇다면 소화의 은애를 받은 지도 어언 20년이었다.
이렇게나 착하고 귀엽고 순진한 여우를 잡아먹을 생각이나 했던 과거의 자신이 참으로 못나고 부족한 호랑이 같아 부끄러웠다.
반성하듯 그녀의 보들보들한 손을 만지작대던 도휘가 벅찬 감정을 감추려 탓하듯 말했다.
“사냥꾼한테 덤비면 어떡해요, 소화. 그 몸으로 뭘 어쩌겠다고.”
“내가 십칠 대 일로 용맹하게 싸워 이긴 것을… 네가 보지 못하였구나.”
그가 본 사냥꾼은 예닐곱 정도였다. 그 와중에 허세를 부리는 것이 참으로 이 여우답고 깜찍해서 도휘는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랬어요. 총을 갖고 있는 걸 못 봤어요?”
“봤단다….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뻔했지 뭐니.”
“도망가지 그랬어요. 도망질은 잘하면서.”
“그자들이 호랑이 잡는 사냥꾼이라고 스스로 유세를 떨기에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하더구나.”
놀란 도휘는 숨을 멈췄다. 이 작은 여우가 웬일로 겁도 없이 사람한테 덤볐나 했더니.
“이 내가 살아 있는 이상 호랑이 얼굴도 못 볼 것이다 하고… 확 덤벼 버렸지.”
“날 위해서요?”
입술이 닿을 정도로 몸을 숙인 도휘가 순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잠시간 말이 없던 소화가 이내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목숨을 내던진 사투였다. 그마저도 각오했던 건….
“널 위해서.”
대체 제 안에 어디에 그런 용맹함이 숨어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웠다. 소화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있었던 일을 돌아보았다.
벼랑으로 뛰어들자 동굴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검은 구렁이가 나타나 쩌억, 하고 아가리를 벌린 일, 그 안에서 겨우 살아 나와 골짜기를 뛰어오른 일, 총을 든 수많은 사냥꾼과 싸워 이긴 일.
‘대체 내가 어떻게….’
이 무용담을 누구한테 자랑한대도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겁쟁이 여우 소화가 그렇게 용맹하다고? 말도 안 돼.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지난 일 그 모든 게 꿈만 같았다.
“날 위해 그렇게까지 했다는 건 당신이 나를 무척이나 깊이 사랑한다는 의미예요.”
“내가…?”
네게 서찰만 달랑 남기고 떠났던 내가 말이니?
다시 돌아와서 사냥꾼과 맞선 건 그저 녀석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20년이나 같이 살았으니까, 정이 붙어서 애틋한 거라고. 아무리 징그러운 녀석이라도 그쯤 같이 살면 없던 정도 생길 테니까.
‘간장 종지.’
딱 그만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한데 도휘를 무척이나 깊이 사랑해서, 내가 목숨을 내던졌던 거라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듣고 보니 맞는 말도 같다. 너구리를 위해서 그리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래, 어차피 사냥꾼에게 잡혀 죽을 뻔한 목숨. 그렇다면 제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호랑이와 같이 좀 살면 뭐 어떤가? 그 호랑이에게 먹혀 죽는다 해도 말이다.
결국은 원점이었다. 소화는 20년 전 도휘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갔다.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 누구든 좋으니 옆에 둘 수만 있었으면…. 그럼 잔인한 겨울이 그렇게 춥고 외롭지만은 않을 텐데.
소화는 덥석 길가에 버려진 호랑이를 주워 들었다.
“…정말 그런 거니? 내가 널 사랑한다고?”
긴가민가한 척 고개를 갸웃하는 소화에게 도휘가 쐐기를 박았다.
“이제 당신은 나 없이 살 수 없어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숨을 쉬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을 거야.”
“에구머니. 그것 큰일이구나.”
짐짓 소화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도휘는 이 작은 여우가 어떤 식으로 꾀를 내고 앙탈을 부리는지 잘 알고 있어서 그저 귀엽기만 했다.
“그럼 난 어떡하면 좋으니.”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소화가 입술을 삐죽였다. 제가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런 식으로 귀염을 떠는 게 이 작은 여우의 특기였다.
“어떡하긴, 평생 같이 살아야지.”
“그래, 그렇게 해야겠구나.”
냉큼 고개를 끄덕이는 소화를 보고 도휘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숭마저 사랑스럽기만 하니 저 역시 콩깍지가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