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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혼자인 것보단 나았으니까

본문

쿵푸벳

“하악, 하악….”

헐레벌떡 제집으로 도망친 소화는 대문을 넘고서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온 암여우 미호는 아직 만나 본 적 없는 호랑이보다도 더 무시무시했다.

‘설마 여기까지 찾아오는 건 아니겠지?’

힐끔 뒤를 돌아본 소화는 문득 자신이 아껴 마지않는 꽃당혜 한 짝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고 온 길을 되짚어 가며 되찾아 올 여력도 없었다.

‘냄새도 못 맡고, 사냥도 못 하고, 영역도 못 지키고!’

제 삶의 터전인 이황산을 떠나면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앞길이 막막했다. 해가 쨍쨍한 정오에 완전히 울상이 된 소화가 터덜터덜 안채로 들어서던 그때였다.

“…응?”

눈물을 닦아 내던 중 돌연히 사랑방 앞에 심어진 앵두나무로 시선이 옮겨 갔다. 이상하게 땅이 거뭇거뭇했다. 낙엽이 져서 그런가? 그보다는 불그스름했다.

‘그러고 보니 도휘가 뭔가를 저기다 묻었지, 참.’

소화는 뭔가에 홀린 듯이 앵두나무로 다가갔다.

언제나 편편하고 깨끗했던 흙바닥은 뭣 때문인지 불룩했다. 제가 덮어 놓은 자국은 아니었다.

그 흙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먹물 같기도 하고 죽은피가 흐른 것도 같았다. 그리고 익숙한 동물의 털도 보였다.

소화는 굳은 얼굴로 그 털을 살펴보았다.

잘 익은 볏단, 내지는 붉은 노을빛의 이 털은 필시 붉은 여우의 것이었다. 색은 다르지만 제 본신에도 있는 자랑스러운 이 보드라운 촉감을 결코 모를 수 없었다.

소화는 급히 땅을 파헤쳤다. 그것은 깊게 묻혀 있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털이 가장 먼저 만져졌고, 그 아래 딱딱하게 굳은 근육이 느껴졌다.

죽은 여우였다. 제집 마당에 흉악하게 물어뜯겨 죽은 붉은 여우가 묻혀 있었다. 회까닥 돌아간 여우의 눈동자는 어찌나 겁에 질렸는지 미처 감지도 못하고 부릅뜬 채였다. 혀는 길게 빼고 있었고 털이 죄 피범벅이었다.

식겁한 소화는 쿵 하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도휘가 사다 준 고운 치마저고리에 흙이 잔뜩 묻었지만 소화는 붉은 여우의 사체에 큰 충격을 받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얼핏 보아도 저보다 큰 맹수에게 온몸을 난도질당하고 죽은 게 틀림없었다. 고약한 장난질을 하듯, 먹지는 않고 몸만 갈가리 다 찢어 놓았다.

손이 달달 떨렸다. 다시 묻어 주려고 사체를 뒤집은 순간 매끈한 털 사이에 뭔가가 달랑거렸다.

끔찍하게도… 양물이었다. 반만 찢긴 양물이 달랑거리는 모습에 둔한 소화조차도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이 붉은 여우가 수컷이라는 것을.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왜 여기에 이런 게 있는 걸까. 그것도 꼭 저 보란 듯이 엊그제 파헤쳤던 앵두나무 아래!

대충 덮은 흙과 흩뿌려진 피, 뽑힌 털. 그 모든 게 어지러이 한데 뭉쳐 이 난장을 벌여 놓은 사람은 공들여 감출 마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화의 고운 눈썹이 팔자를 그렸다. 이 죽은 여우의 사체도 충격이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이 또 있었다.

‘나는… 나는 왜 아무런 냄새도 못 맡았지?’

흙이 이렇게 피범벅인데. 더군다나 발정기가 코앞에 다가온 제가 수여우의 냄새를 모를 리 없는데!

생면부지인 암여우의 냄새도 본능이 먼저 알아챘듯이 소화의 코는 기민하게 수여우의 냄새를 쫓아다녔을 것이다.

사체를 만졌던 손을 애써 킁킁거리자 아니나 다를까 코를 찌르는 희미한 체취가 느껴졌다.

이미 죽은 수컷이란 걸 알면서도 아랫배가 찌르르 울리고 다리가 저절로 오므라드는 그런 야릇한 냄새였다.

“…미쳤나 봐. 내가 미쳤나 봐!”

제 행동에 스스로 놀란 소화가 얼른 죽은 여우를 다시 묻어 주고 안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재비꽃.’

미호가 말하길 그 아재비꽃이 문제라고 했다. 소화는 급히 제 허리춤의 향낭을 살폈다.

이게 정말 아재비꽃일까? 가지런히 바느질된 비단 향낭은 도휘의 솜씨였다. 입구를 뜯어내자 가득 들어찬 마른 풀잎이 온돌 바닥 위로 쏟아졌다.

그 순간 누가 주먹으로 코를 세게 때린 것처럼 아파 왔다.

“아이쿠!”

코를 움켜쥔 소화는 옆으로 쓰러진 채 신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방 익숙해져서 더는 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코를 누가 내리누르는 것 같은 둔통도 없었다.

손을 킁킁거리자 더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향이었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수여우의 체취도, 언제나 제 몸에 묻어 있는 도휘의 청량한 내음도, 제 방에 숨긴 고소한 육포의 냄새까지.

주위의 모든 냄새가 사라졌다.

그건 여우에게 세상이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완전히 겁에 질린 소화는 당장 목간으로 달려가 아재비꽃을 만진 손과 입과 코를 씻어 내고 또 씻어 냈다.

아재비꽃, 그것은 독초였다. 제 코를 멀게 만들고, 이 휘황찬란한 세상을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로 만들 흉악한 독초였다.

하얀 피부가 벌게질 정도로 얼굴을 씻어 내던 소화는 울컥했다. 냄새를 맡질 못하니 사냥은 번번이 실패하고, 누가 있어도 있는 줄 모르는 바보 천치가 되어 버리는 게 당연했다.

‘도휘가, 도휘가….’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가운 물에는 눈물이 같이 녹아내렸다. 울며 얼굴을 씻어 낸 소화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냉기 때문인지 믿었던 이를 향한 배신감 때문인지 몰랐다.

‘왜 나한테 이런 몹쓸 짓을 했을까?’

저는 다 죽어 가는 어린애를 거둬다 키워 준 죄밖에 없었다. 따스해서 안아 주었고 귀여워서 입을 맞췄고 외로워서 옆에 두었다. 오직 그뿐이었다.

격한 배신감에 구역질이 일었다. 동시에 물비린내가 물씬 올라왔다.

가만 킁킁거려 보니 제가 차고 다니던 저 작은 향낭 때문에 냄새를 못 맡았다 하기엔 기이하게도 이 집에서 맡아지는 냄새가 거의 없었다.

목간을 나온 소화는 휘영청 달이 뜬 밤에 가끔 도휘와 차를 마시곤 하던 대청으로 나갔다.

휘휘 주위를 둘러보니 아뿔싸, 대들보 밑에 숨겨진 향낭이 눈에 들어왔다. 옆을 보니 또 있었다. 사방에 제 코를 마비시킬 아재비꽃 향낭이 가득했다.

그리고 저 대들보에 거뜬히 손이 닿을 사람은 당연히 도휘뿐이었다.

녀석이 제게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이기에.

소화의 본신은 죽은 수여우의 반도 채 되지 않는 크기였다. 제 놈이 정말 호랑이라면 잠든 저를 한입에 꿀꺽 삼킬 수도 있었다.

한데 대체 제게 무엇을 원하기에 이토록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가!

얼른 새 옷으로 갈아입고 안방을 치운 소화는 누가 볼세라 깨금발로 밖을 나섰다.

‘이 망할 호기심 때문에 언젠가 죽고 말 거야.’

머리로는 당장 이 집을 나가 도망쳐야 한단 걸 알면서도 소화의 정신 나간 두 다리는 도휘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랑방.

도휘가 사람의 모습만 고집하고부터 소화는 밤에 함께 자는 걸 그만두었다.

밥상도 제가 머무는 안방에 차려 오고, 부르면 오고, 부르기 전에도 필요할 때면 이미 제 방 문 앞에 도휘가 와 있었기에 소화가 사랑방에 들어간 지는 꽤 오랜만이었다. 10년이 넘었다.

주인이 없는 빈 공간에 들어서는 소화의 걸음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방은 제 주인의 성격을 닮아 단정했다. 비단 금침, 서책, 벼루, 먹, 면경. 모든 게 흐트러짐 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킁…. 킁킁.”

아무리 코를 벌렁거려도 호랑이 냄새는커녕 아무것도 맡아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이불보를 들춰 보니 향낭이 여기저기 가득했다. 구석에도, 천장에도.

순간 서안 아래 퍽 익숙한 무명천이 보였다. 홀린 듯 다가간 소화가 꺼내 들고 보니 제 다리속곳이었다.

지난번에 오줌을 지려서 나중에 빨아 입으려고 의걸이장 깊숙이 박아 둔 것이 왜 여기에…?

혹시 가져가 빨아 놓았나 했는데 제 속곳이 아직도 축축했다. 물이 덜 마른 건가 하고 봤더니 속곳 가운데 허옇고 찐득한 뭔가가 아주 진창으로 범벅이었다.

‘이게 뭐람?’

풍겨 오는 냄새가 코를 쏘는 것이 알싸하고 비릿했다. 가랑이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하지만 지린내하고는 달랐다.

‘밤꽃 향기 같기도 하고….’

색깔은 타락 비슷한데 훨씬 진하고 끈적였다. 이건 꼭 발정기에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오는 액 같았다. 물론 제 것은 이보다 훨씬 양이 적어서 속곳에 조금 묻어날까 말까 한 데다, 색도 투명했다.

‘이건 대체 뭐지?’

정확히 뭔지는 몰라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혹시 도휘도 발정기가 온 건가? 티가 안 나서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혼란에 빠진 그 순간 밖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내 방에 있어요?”

계곡물에 떨어진 것처럼 소화의 온몸이 싸늘히 얼어붙었다. 도휘였다. 놀란 소화는 얼른 제 속곳을 서안 아래 다시 놔두고 급히 방문을 열었다.

“와, 왔니?”

한 손에는 색색의 비단과 꽃당혜를, 다른 손에는 커다란 새장을 든 도휘가 평소와 같은 나른한 눈빛으로 저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뭘 하고 있었어요, 내 방에서.”

이미 다 안다는 듯한 고저 없는 물음이었다.

지레 찔려서인지 구순이 바싹 말라 왔다. 도휘가 제 대답을 기다리는 걸 알지만 목구멍에 꿀떡이 박혔는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도휘가 이내 픽 웃었다.

“평소엔 얼씬도 안 하더니.”

그러곤 맛있는 저녁상을 차려 주겠다며, 먼저 부엌으로 향하는 도휘의 떡 벌어진 등짝을 멍하니 쳐다보던 소화가 제 손톱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이제 어쩌면 좋지?’

저 바보 같은 녀석이 설마 제게 발정하는 걸까? 곁에 가까운 암컷이 저 혼자밖에 없었으니까?

“장에 씨암탉을 팔아서 한 마리 사 왔어요. 저번에 메추리를 잘 먹길래.”

아궁이에 불을 지피던 도휘가 고개만 쑥 내밀고 말했다.

“푹 고아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

밥상은 왜 저렇게 열심히 차려 주지?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이 몸에 살이 붙어 봤자 뭐 얼마나 뜯어 먹을 게 있다고! 홧김에 주먹을 움켜쥔 소화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 여우도 안 먹었어.’

죽은 여우도 몸을 찢어 놓긴 했지만 뜯어 먹힌 흔적은 없었다. 만약 먹이로 삼았다면 노루처럼 앙상한 뼈만 남았을 것이다.

‘그럼 내 코는 왜 마비시켰을까?’

그 향낭을 제게 쥐여 준 지도 꽤 되었다. 벌써 몇 년 전이었다. 인간 마을에 혼자 출입하고부터. 그래, 그때부터다. 엽전이 어디서 났는지 산호, 비취 온갖 물건을 사다 나르더니 몸에 걸치는 것은 귀찮아하자 어느 날은 비단보를 사 와선 제게 향낭을 만들어 주었다.

‘대체 왜…!’

발정이 왔으면 나가서 교미나 할 것이지. 애꿎은 붉은 여우는 왜 잡아다가 죽여서 나 보란 듯이 사체를 전시해 놓는단 말인가? 사냥도 못 가게 코는 왜 마비시키고!

도무지 이해 못 할 짓투성이라. 훤칠한 청년으로 기껏 잘 키워 놨더니 몹쓸 놈이나 저지를 망할 짓거리만 하는 도휘가 미워 죽겠다.

부엌을 째려보던 소화는 문득 아무렇게나 놓인 새장을 발견했다. 하필 제 안채 대청에 놓아두어 관심을 안 가질 수도 없었다.

가만 보니 죽대로 만든 새장이 아니었다. 차갑고 딱딱하고 미끌미끌한 이 감촉은….

“서역의 상인한테서 받아 온 물건이에요. 쇳물을 녹여서 가늘게 만든 거라 보기보다 무거워요.”

어느새 뒤에 다가온 도휘가 제 보물을 만지듯 아끼는 손길로 새장을 가리켰다.

“앙칼지고 예쁜 새를 넣어 둘 거라… 도망가면 큰일이니까.”

소화는 흡, 하고 숨을 멈췄다. 몸이 너무 가까웠다. 도휘의 단단하고 굵은 양 허벅지가 고스란히 제 엉덩이에 느껴졌다.

잔뜩 긴장한 소화를 모르는지 도휘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들어 볼래요?”

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새장을 들어 올린 그가 소화에게 권하듯 물었다.

하지만 완전히 굳어 버린 소화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청량한 내음이라고만 생각했던 도휘의 체취가 전혀 다르게 느껴진 까닭이었다.

이는 분명한 포식자의 냄새였다. 소화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할딱이는 밭은 숨만 내쉬고 있자 지긋이 하체를 붙여 오던 도휘가 이내 새장을 내려놓았다.

“싫으면 말고.”

둥근 어깨를 한번 매만지고 느긋하게 부엌으로 향하는 도휘의 뒷모습에 소화는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커다란 호랑이한테 날름 먹혔다가 겨우 다시 살아 나온 것처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배부른 맹수에게 유린당한 기분이었다.

‘내 명에 못 산다. 이러다 내 명에 못 살아!’

소화는 새장 안에 놓인 빨간색 비단 끈을 들어 올렸다. 뭔가 했더니 목줄이었다. 새를 키울 거라더니, 막상 목줄은 새끼 강아지한테나 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딱… 제 목에 채울 만한 크기.

오싹해진 소화는 치미는 번뇌에 넋을 놓았다.

‘설마… 설마… 아니다. 아닐 거야.’

목줄을 염주처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도휘가 밥상을 갖고 오는 기척이 들렸다.

또 안방에 갖고 들어갈 기세라 흠칫 놀란 소화는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다급히 손짓했다.

“도휘야, 여기서 먹자꾸나. 바람도 맞을 겸….”

하지만 그 지랄맞은 앵두나무가 눈앞에 어른거려 입맛이 싹 달아났다. 떨떠름한 그녀의 앞에 도휘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온 밥상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또 잃어버렸네. 어쩌다 그랬어요.”

바닥에 한 짝만 덩그러니 놓인 꽃당혜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으응?”

혼란에 빠진 소화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대로 꽃당혜에 시선을 고정했던 도휘가 넋을 놓고 있는 그녀에게 차분히 눈을 맞추며 물었다.

“밖에, 나갔다 왔어요?”

깊은 동굴에서 들려오듯 낮은 목소리가 퍽 다정하고 조용했다. 하지만 서늘한 시선은 그녀를 뼛속까지 발라 먹을 것처럼 집요했다.

즉시 눈을 내리깐 소화는 젓가락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엄한 목소리가 질책처럼 떨어졌다.

“혼자?”

‘혼자 다니지 말라고 내가 신신당부를 했는데?’가 축약된 말이었다.

결국 입맛을 싹 잃은 소화는 수저를 내려놓고 어렵게 달싹이던 입술을 열었다.

“도휘야, 사실은 아까 산을 헤매다가 미호라는 붉은 여우를 만났단다.”

“친구를 만났구나.”

건조하게 짚어 낸 도휘가 계속하라는 듯 턱을 가볍게 까닥했다. 별로 놀라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여우가 글쎄 나한테 왜 코를 멀게 하는 독초를 갖고 다니냐지 뭐니. 아, 아재비꽃이라던가?”

아무렇지 않은 척 딴청을 부리며 얘기하는 내내 도휘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소화를 응시했다.

“그래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그 태연하고 뻔뻔한 태도에 겁먹은 건 소화였다.

“호, 혹시 네가 준 그 향낭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리자 도휘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씨암탉의 튼실한 다리를 그녀의 앞에 놔 주었다.

평소라면 기름이 흐르는 저 뽀얀 속살에 맛있겠다고 군침을 흘렸을 테지만 소화는 도휘의 입술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맞아요. 그건 후각을 둔하게 하는 독초였어요.”

담담하게 인정하는 그에게 소화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왜 그런 무시무시한 걸 제게 달아 놓았느냐 물어봐야 하는데, 당당한 태도에 충격받아 입술만 뻐끔댈 뿐이었다.

“왜… 왜.”

“여우들이 여기까지 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에요, 소화. 당신은 몰랐겠지만.”

소화의 생각과 달리 이황산은 다른 여우들이 살기에 지리적으로 썩 좋은 위치는 아니었다. 다른 맹수는 없지만 산 아래 인간 마을이 있는 게 큰 흠이었다.

여우에겐 호랑이 같은 맹수보다, 사냥꾼이 더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런데도 여우들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먹이 경쟁에 밀린 멍청한 수여우들이 몇 년 전부터 이 산을 들락거려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것들이 찾아오면 당신도 불쾌할 테니까.”

“그럼 내 냄새를 숨겨 주려고 그랬다는 게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던진 물음이었다. ‘네 냄새를 숨기려는 건 아니고?’ 하는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

도휘는 태연히 고개를 주억이곤 소화와 시선을 맞췄다. 동시에 그의 한쪽 입가가 치켜 올라가며 천천히 다시 입술이 열렸다.

“발정기가 끝나질 않는 것 같던데, 냄새가.”

선비처럼 점잖은 말투였지만 소화의 얼굴을 붉히기에는 충분했다. 수컷을 부르는 제 냄새가 풍겨 도휘한테까지 맡아진다는 소리였다.

“계속 몸이 달아오르고… 그런가요?”

나지막한 물음에 귀까지 뜨거워졌다. 사슬처럼 얽힌 시선도 피하지 못한 채, 소화가 맹수 앞의 어린 동물처럼 숨까지 멈추고 손만 달달 떨고 있자 도휘가 생긋 웃었다.

“식겠어요. 먹고 얘기해요. 응?”

그의 나긋한 미소 한 번에 살얼음판처럼 아찔했던 분위기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대로 돌아왔다.

도휘가 제 팔뚝만치 크고 실한 닭 다리를 손에 쥐여 주었지만 소화는 이미 입맛이 뚝 떨어진 지 오래였다.

동장군이 오면 며칠간 발정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사절기 내내 제가 여기저기 암내를 뿌리고 다녔을 거란 생각에 한숨만 나왔다.

“…에구머니. 네가 고생이었겠구나.”

종이 다르니 제가 풍기는 그 냄새가 자극적이진 않았을 테지만 어쨌든 불쾌했을 것이다. 저 역시 동지 무렵 찾아오는 오소리들의 짧은 발정 시기에 그 찝찝한 냄새 때문에 기분이 더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물며 한 지붕 아래 사는 여우가 사계절 내내 발정이 났으니 오죽할까?

‘그래, 그래서 그랬을 거야.’

이해하지 못할 도휘의 행동은 전부 그래서 그랬을 거라고 소화는 애써 모른 척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도휘와 헤어지고 나면, 더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들이니까.

그의 여상한 대답을 들으니 드디어 소화는 확실하게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도휘야, 난 더 이상 널 보살펴 줄 수가 없단다.”

순간 퍽퍽한 가슴살을 발라 주던 도휘의 손길이 딱 멈췄다. 흘긋 시선만 움직여 그녀를 쳐다보는 눈길이 과녁을 찾는 화살처럼 정확하고 재빨랐다.

“넌 이제 앞가림을 하고 살기에 충분하지 않니? 이만 네 갈 길을 가렴.”

언제나 마음 한편에 생각했던 일이라 그런지 평소답지 않게 술술 말이 나왔다.

담담한 소화와 달리 이번에는 도휘의 낯빛이 맹렬한 기운을 띠었다.

“당신이 평생, 나를 책임지기로 했잖아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내뱉는 억센 말투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언제 그랬니? 네가 다 클 때까지만 함께하기로 했지. 그때는 네가 한참 연약하고 처지가 가련해 보여 선의를 베풀었을 뿐이란다.”

도휘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이제 너도 독립해서 단란한 가족을 꾸려야 하지 않겠니? 예쁜 짝지랑 맺어져 아기도 낳고. 물론 나도 그래야지만 말이다.”

잠잠히 듣고만 있던 그가 젖은 수건에 거칠게 손을 닦았다. 굵고 긴 손가락이 우악스럽게 움직이는 모양새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의 내면을 대변했다.

“날 버리겠다고.”

“버리기는? 나가서 잘 살라는 게지.”

청소도 빨래도 요리도 전부 도휘의 몫이지만 이 집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소화였다.

“내 몸 상태도 그렇고… 피차 불편할 것 같구나.”

“싫다면요.”

제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쏘아붙이는 도휘에게서 전에 없이 사나운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못 가겠다면.”

노기가 서린 갈색 투명한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반항적인 눈빛에 소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러다 정말 저 큰 손으로 제 목덜미를 낚아채선 입에 넣고 씹어 먹으면 어쩌나 하는 구체적인 상상까지 들기 시작했다.

“그, 그럼 내가….”

엉덩이를 들썩거린 순간 그가 명령하듯 낮은 어조로 말했다.

“앉아요.”

“아니다, 내가….”

‘내가 나가마’ 하고 일어서려는데 도휘가 억센 손길로 그녀를 붙잡았다.

“아얏!”

하필 그의 손이 닿은 곳이 미호에게 상처 난 팔뚝이었다. 소화의 예민한 반응에 도휘가 놀란 듯 별안간 그녀의 팔을 붙들곤 얼굴을 들이댔다.

피. 선명한 피 냄새.

“이거 뭐야.”

잘생긴 얼굴이 굳어졌다. 짙은 눈썹을 팍 찡그린 채 그가 신경질적으로 소화의 팔을 눈짓했다.

“다쳤어요?”

그렇게 물어봐 놓고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 사람처럼 도휘는 소화의 저고리를 거의 찢듯이 벗겨 냈다.

“뭐야, 이거. 누구야. 누가 그랬어?”

소화에게 하는 물음이 아니었다. 하얗고 말랑한 팔뚝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상처를 적극적으로 훑어본 도휘는 금방 손톱 모양을 알아챘다.

이미 상대를 직감한 그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빌어먹을 여우 년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고 도휘가 으르렁거리는 순간이었다. 공기를 찢는 듯한 낮은 진동이 화살처럼 소화의 귀를 파고들었다. 저절로 온몸이 달달 떨리고 솜털이 바짝 섰다. 질겁한 소화가 귀를 틀어막았다.

“이, 이이이, 이게 무슨 소리니?”

“그냥 숨 쉬는 소리예요.”

말 못 할 큰 충격을 받은 소화는 주춤 붙잡힌 팔을 빼냈다. 아니, 빼내려는 순간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더 강한 힘이 실려 상체가 거의 그에게 끌려갔다.

“얼마나 아팠을까.”

“괜, 괜찮단다.”

그런 그녀의 대답은 무시하곤 도휘는 팔에 얼굴을 바싹 붙여 혀를 내밀고 정성스레 상처 부근을 핥았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감촉이 퍽 낯설었다.

타인이 저를 핥아 준 건 처음이었다. 커다란 상체를 수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상처를 핥는 데 열심인 도휘를 내려다보던 소화의 아랫배가 지끈거렸다.

오로지 제게 집중한 강인한 눈매와 혀를 움직일 때마다 울렁거리는 목울대. 툭 불거진 쇄골과 길고 굵직한 목까지 그의 모든 게 야릇하게 느껴졌다.

날것 같은 혀의 감촉보다도 도휘가 건장한 사내로 느껴지는 게 더 당혹스러웠다. 그새 두려움은 어딜 갔는지 다른 이상한 열기로 심장이 펄떡거렸다.

“그만, 그만하렴.”

애써 도휘를 저지하고, 밀어 내려 하자 그가 더 가깝게 달라붙었다. 그러면서 시선만 움직여 소화와 눈을 맞췄다.

갈색, 옅은 그 색깔이 예쁘다 생각했던 그의 눈동자가 점점 더 진하게 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부드럽고 따듯하기만 하던 혀의 감촉이 별안간 까끌까끌하게 느껴졌다.

마치 도휘의 혀에 자잘한 가시가 돋은 것처럼.

그 혀에 쓸린 피부가 살짝 따갑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했다.

“도휘야, 도휘야. 그만….”

온몸이 간질간질한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 소화가 몸을 비틀던 그때였다.

문밖,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캐갱거리는 여우의 우짖음이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예민해진 두 사람의 귀에 모두 들어왔다.

동시에 행동을 멈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다시 부딪쳤다.

캐갱 캐갱!

소화의 것보다 한결 묵직하고 울림이 있는 이 목소리는 수여우였다. 암여우를 찾느라 구애하는 수여우의 우짖음이 분명했다. 필시 발정기가 다가오는 소화를 쫓아온 것이리라.

대문을 돌아보는 도휘의 눈빛이 금세 날카롭게 변했다. 제 것을 채 가려는 문밖의 존재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기세가 사뭇 사나웠다.

캐개갱!

도휘가 맹렬한 기세로 벌떡 일어섰다. 재빠른 행동에 소화가 온몸으로 그의 다리를 덥석 붙들었다.

“도휘야, 안 된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던 그가 제 다리를 붙든 소화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포악한 기운은 어느새 싹 사라진 뒤였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돌아가지 않겠니?”

간절한 소화의 애원에 도휘는 그녀의 속을 파헤치듯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눈을 맞췄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숙였다. 보물을 쥐듯 양손으로 소화의 얼굴을 붙든 도휘는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내 귀여운 여우.”

잔혹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번뜩였다. 차가운 숨결이 그녀의 볼을 스쳤다.

“나도 저녁을 먹어야겠어요. 배가 고파서.”

귓전에 닿은 도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소중한 것을 만지는 조심스러운 손길은 언제나처럼 다정했다.

하지만 사냥을 앞둔 맹수의 눈빛은 더 이상 그렇지 않았다.

“당신이 끔찍하게 생각할까 봐 여우는 먹어 본 적 없지만… 저놈은 꽤 입맛에 맞을 것 같거든.”

그는 더 이상 제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샛노란 눈동자가 소화의 얼굴 곳곳을 핥듯 샅샅이 움직였다.

“여기서 얌전히 날 기다려요. 저 새끼가 무슨 맛인지 다녀와서 낱낱이 다 말해 줄 테니까.”

***

소화는 거의 졸도 직전이었다. 도휘가 대문을 나갈 때까지 무슨 생각으로 대청에 앉아 있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얼른 떠나자. 여길 떠나야 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켰지만 기실 도망칠 엄두도 나질 않았다.

도휘가 저를 쫓아와 붙잡는 게 일이겠는가. 사람의 몸이지만 말만큼 튼튼한 그 두 다리가 얼마나 빠른지 그녀가 제일 잘 안다.

하물며 호랑이의 네발로 그녀를 못 쫓아올까?

여우로 변해서 밤새 달려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는 호랑이의 사정권을 벗어나긴 무리였다.

‘그래도 도망치는 수밖에 없어.’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도휘가 찢어발겨 마지막 한 점까지 씹어 먹겠다며 쫓아간 저 수여우 다음은 분명히 제 차례였다. 한번 맛을 봤는데 두 번이 어려울까.

여우로 변한 소화는 평생을 지냈던 제 유일한 집 대문을 애달프게 쳐다보다 도망 나왔다.

저처럼 도태되어 길거리에 내버려진 게 가엽고, 또 생긴 게 퍽 귀여워서 주워 온 어린 흑묘. 그가 제게 이런 끔찍한 결말을 안겨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미 이황산을 떠난 묘진과 호영, 스님을 비롯하여 모두가 경고해 왔건만 왜 귀담아듣지 않았을까. 제 앞에선 한없이 다정다감하여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오만했던 게 죄일까.

순진했던 그녀를 비웃듯, 대문부터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잔인하게도 커다란 발자국이 나 있었다. 제 것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크기가 압도적으로 컸다.

특히 발톱 부분은 누가 보면 곡괭이질을 한 것처럼 깊숙이 파여 있었다. 저 발톱이 얼마나 날카롭고 거대할지 안 봐도 훤했다.

그 발자국의 시작점이 바로 제집의 대문이었다. 마지막 배려인지 제 앞에서 변모하진 않았지만… 이는 분명히 도휘가 호랑이라는 증거였다.

더는 부정할 수 없는 그 뚜렷한 증거 앞에서 도리어 소화는 초연해졌다. 내내 쥐고만 있던 무거운 활시위를 마침내 당긴 것처럼 차라리 속이 시원했다.

톡, 톡 땅이 한 방울씩 젖어 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기세였다.

‘그래, 난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지.’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아니다, 아닐 거다 열심히도 부정해 왔다. 하지만 그녀의 깊은 속마음은 훗날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 예상하고 수없이 떠날 준비를 해 왔다.

‘언젠가 날 잡아먹을 호랑이라 한들, 혼자인 것보단 나았으니까.’

하나 이제는 정말 홀로 서야 할 순간이 왔다. 하늘에서 혼자 떨어져 땅에 스며드는 저 빗방울처럼 혼자이되 외로울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떠나야 했다.

땅을 박차고 떠나 버린 소화의 뒤에 남은 호랑이 발자국에 빗물이 차올랐다.

붐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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