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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귀여워서 주웠다

본문

쿵푸벳

소화는 몸통은 하얗고 꼬리는 까만 여우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형제들은 정확히 열한 명이었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짐승의 모습으로 수태한 ‘순종 잉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화의 부모는 열한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모두 보살필 순 없었다. 붉은 여우인 가족들과 달리, 작은 몸집과 이상한 털색을 가진 소화는 어릴 적 무리의 영역을 떠나야 했다.

왜 사랑하는 부모님과 짓궂은 형제들 곁을 떠나야 하는지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소화는 커 가면서 차차 깨달았다. 자신이 무리에서 버려졌다는 것을.

그렇게 여기저기 혼자 떠돌다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이황산이었다. 산자락 아래 멀리 위치한 인간 마을 하나가 있지만, 늙은 묘지기 한 명 빼고는 산에 오가는 발길이 드물어 아주 조용한 곳이었다.

나무 열매와 새알, 개구리 같은 먹이로 근근이 살아가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부터 맑은 하늘에 불길한 검은 매가 날아다녔다. 그날 소화는 초주검이 되어 죽어 가는 어떤 검은색 동물을 발견했다.

털에는 갈색이 살짝 섞여 있었고, 생긴 건 고양이보다는 조금 덜 귀여웠으며 맹수라 하기엔 무척 귀엽게 생긴 그런 동물이었다.

“이놈은 살쾡이야. 분명해.”

호랑이를 실제로 본 적도 없고 이황산에 호랑이가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소화는 녀석을 이마에 왕(王)자가 있는 살쾡이라고만 생각했다. 발이 신기할 정도로 컸지만 그보다는 색깔이 더 이상했다.

“근데 살쾡이도 검은색이 있나?”

아무렴 저처럼 희멀건 붉은 여우도 있는데, 검은색 살쾡이라고 없을까.

“너도 돌연변이인가 보구나. 불쌍한 녀석.”

인간들은 귀엽게 생긴 동물들을 데려다 키우곤 한다. 보아하니 이 녀석을 예쁘다고 어릴 때 몇 년쯤 키우다 다 컸다고 내버렸나 보다. 검은색은 불길하게 여겨지곤 하니까.

얻어맞았는지 눈도 뜨지 못하고, 온몸은 피범벅으로 푹 젖어 있는 게 영 안쓰러워 소화는 별 고민도 없이 녀석을 제집으로 데려왔다.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도 모른 척하기는 불쌍하니 몸이 나을 때까지만 키워 줄 셈이었다.

조심스레 피범벅인 몸을 씻겨 주자 배꼽 근처에 상처가 보였다. 크게 다쳤는지 살점인지 핏줄인지 알 수 없는 게 달랑거렸다.

다행히 며칠 뒤에 피딱지가 앉으며 자연히 떨어졌지만 그때까지도 녀석은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쿨쿨 잠만 잤다.

“크기로 봐선 성체 같은데….”

이상하게 여기며 며칠 돌봐 주자 녀석은 반짝 눈을 떴다.

“금색 눈동자네. 귀여워라.”

한 번도 어미가 되어 본 적 없고, 또 아기를 돌본 적도 없는 소화는 녀석이 갓 태어난 호랑이란 걸 모르고 그저 아픈 살쾡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먹는 것 중 가장 맛있고 부드러운 과일을 나눠 먹이자 녀석은 그것도 곧잘 받아먹었다.

그렇게 며칠을 돌보자 녀석은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와앙와앙, 꺙꺙하면서 귀여운 소리도 냈다.

무리에게 버림받고부터 줄곧 혼자 살던 소화는 저 말고 이 집에 작은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 점점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걸어 다니면서부터 집 안에서 소화를 졸졸 쫓아다녔다. 몸이 아픈 자신을 잘 돌봐 줘 고맙다는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산봉우리 아래 초여름 청포도가 주렁주렁이라는 소문을 듣고 산에 오르려던 소화는 평소처럼 녀석을 과일 소쿠리에 넣었다.

그런데 과일 소쿠리를 반이나 차지할까 싶었던 녀석의 몸이 소쿠리에 들어가질 않았다.

“으응? 이게 왜 작아졌지?”

한참이나 소쿠리를 들고 요리조리 살피던 소화는 이번엔 녀석을 돌아보았다.

검은색과 갈색 줄무늬가 반씩 섞인 녀석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이 귀염둥이가 커진 건가? 설마.

‘소쿠리가 작아진 게 아니라?’

녀석은 처음엔 과일 소쿠리에 딱 들어갈 정도의 앙증맞은 크기였다. 소화는 반신반의하며 귀염둥이를 들어 보았다.

“어휴, 무거워.”

얌전히 품에 들린 녀석은 묵직했다. 오래 들고 있으니 팔이 저릿할 정도였다. 소화는 순간 심각해졌다. 매일매일 보다 보니 녀석이 커지는지 무거워지는지 잘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녀석이 그럼 점점 커지는 건가? 여기서 더?’

가만 보니 녀석은 이미 소화의 본신 크기를 넘어섰다. 여우인 제 몸보다 커졌으니 무거운 게 당연했다.

“살쾡이가 원래 이만한 거야?”

여우보다 작지 않던가? 살쾡이를 하도 오래전에 보아서 정확한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다. 기실 매와 독수리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소화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너 왜 자꾸 커지는 거니? 이미 다 큰 게 아니었어?”

녀석은 와앙와앙하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소화의 말을 알아듣는 듯 못 알아듣는 듯 했다. 신기하게도 제게 불리한 말은 못 알아듣고, 주로 유리한 말만 알아들었다.

“아하, 어쩐지 많이 먹더라.”

고민하던 소화는 ‘많이 먹었으니 먹은 만큼 커진 거다’로 결론 내렸다.

“어쨌든 더는 무거워서 못 데리고 다니겠다. 넌 집에 있어. 난 청포도를 따러 가야 하니까. 얼른 가지 않으면 너구리 녀석이 다 먹어 버릴 거야.”

소화는 시큼하고 달달한 그 맛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황급히 채비를 마치고 홀로 집을 나가려 하자 녀석이 컁컁거리며 난리가 났다.

“안 돼. 무거워서 이제 널 못 데리고 다닌다구.”

문을 꼭 닫아 버렸더니 녀석이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문을 부술 듯 쿵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성질머리는 뭐지? 놀란 소화가 결국 문을 열어 주자 녀석이 그녀를 옆에서 따라나섰다.

“그 보송보송한 발로 어디까지 따라오려는 거니? 길이 험하단 말이야.”

한데 녀석은 지친 기색도 없이 산등성이를 잘만 올랐다. 심지어 지팡이를 짚으며 걷던 소화를 앞지르기도 했다.

‘살쾡이들이 원래 이렇게 체력이 좋았나?’

여우보다 더? 괜한 호승심에 힘들지 않은 척하느라 더 고생했다. 소화는 청포도를 따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에 돌아가선 며칠간 앓아누웠다.

그녀가 며칠간 이황산에 모습을 보이자 않자 너구리가 집에 찾아왔다.

“아프냐?”

너구리 호영은 같은 순종 수인인 여우 소화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황산은 야트막한 동산에 가까워 큰 맹수가 없었다. 둘은 가끔씩 들러 서로의 안부를 묻곤 했다.

호영은 너구리치고는 서글서글한 성격이었지만 원체 까칠하고 말본새가 곱지 못했다.

“하여튼 신경이 쓰인다니깐.”

소화를 위해 살구와 자두를 한 소쿠리 가득 갖고 온 그가 ‘녀석’을 발견하곤 소스라쳤다.

“으악! 뭐야, 이건?”

그저 순하기만 했던 녀석은 이상하게도 호영에겐 이를 세웠다. 소화는 그때 처음으로 녀석의 송곳니를 보았다.

“이 멍청이 같은 게! 어디서 호랑이를 주워 왔냐?”

호영이 핀잔을 줬지만 아파서 누워 있던 소화는 코웃음을 치며 손을 내저었다.

“호랑이? 얘는 살쾡이야, 이 바보야.”

“헛소리 말고 얼른 내다 버려!”

잔뜩 겁먹어 귀와 꼬리까지 삐져나온 호영은 기겁하며 줄행랑쳤다.

꼬리가 떨어져라 집을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소화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너구리들 호들갑이야 원래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흥, 이황산에 호랑이가 어디 있담.’

게다가 호랑이치고는 너무 작지 않은가? 듣기로 호랑이는 집채만 한 몸에 솥뚜껑만 한 발을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제 본신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너 설마 새끼 호랑이니?”

식겁한 소화는 불안한 마음에 녀석의 발을 살폈다. 만약 호랑이라면 발톱이 달려 있어야 했다.

‘농사지을 때 쓰는 낫같이 생겼다고 했어.’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녀석에겐 그 무시무시한 발톱이 없었다. 앞발과 뒷발은 그저 보송보송하고 물렁거릴 뿐이었다. 기분이 좋아 한참 주물럭거리던 소화는 이번엔 주둥이를 살폈다.

“여기 아까 분명히 송곳니를 봤는데….”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송곳니가 사라졌다. 녀석은 그저 무구한 눈으로 소화의 손에 얌전히 주둥이를 맡겼다.

“그래, 호랑이라면 이렇게 순순하고 귀여울 리가 없지.”

예로부터 호랑이라면 산을 호령하는 맹수라 하여 인간들은 산군님이라고도 불렀다. 소화는 비굴하게 산군님이라고까지 불러 줄 마음은 없었다.

“만약 네가 정말 호랑이라면 그때 내다 버리면 되지, 뭐.”

그때 호영의 경고를 새겨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작은 존재의 귀여움과 온기에 익숙해진 소화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

호영이 다녀간 다음 날이었다. 소화는 자신을 깨우는 낯선 소년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주인님, 어서 일어나세요. 벌써 해가 중천이에요.”

“…으응?”

눈을 비비고 침상에서 일어서자 그곳엔 말간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어떤 소년이 서 있었다.

“넌 누구니?”

“누구냐니요, 저예요. 왜 몰라보세요?”

소년은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깎은 사과를 가져왔다. 소화는 예쁘게 깎인 사과를 집어 먹으며 추측했다.

‘듣기론 인간들이 오래도록 혼자 살면 운명처럼 찾아오는 우렁이 각시가 있다던데.’

혹시 집을 잘못 찾아온 우렁이 신부가 아닐까?

하지만 소화는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일단 소년은 남자였다. 새카만 머리칼과 옆으로 길고 서글하게 잘생긴 눈매. 오묘한 갈색 눈동자. 얼굴은 소녀처럼 곱상해도 목소리나 골격은 분명 소년이었다.

“너 설마….”

사과를 꿀떡 삼킨 소화가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흑묘니? 내가 주워 온?”

“맞아요, 주인님.”

소년은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깨끗이 씻은 앵두 바구니를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이를 건네받은 소화가 반가운 얼굴로 웃었다.

“세상에. 너도 수인 요괴였구나.”

말을 못 하길래 그냥 짐승인 줄로만 알았다. 소화는 앵두를 받아먹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주워 올 때 부모가 주위에 없었던 것으로 보아 녀석은 저처럼 도태당한 게 분명했다. 소화는 네 가족은 어디 있냐는 가슴 아픈 질문 대신 녀석의 종(種)을 물었다.

“넌 살쾡이니?”

아무리 봐도 호랑이가 이렇게 순순할 리는 없었다.

“그런 것 같아요.”

“흐음.”

대답이 미심쩍었지만 당장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뭐, 본신으로 변하면 알 수 있겠지.”

고양이류인 건 확실하니 지나가다 고양이 수인 묘진을 마주치면 물어볼 작정이었다.

“나이는 몇 살이니?”

“잘… 모르겠어요.”

소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사람의 모습으로는 적어도 1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넌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나 봐. 어려 보여.”

정확히 자신의 근본을 모르는 이 소년은 당연히 제 나이도 몰랐다. 소화의 경우는 청년기인 본신의 모습과 사람의 모습이 동일하지만 강력한 신력을 지닌 일부 수인들은 실제 나이가 어려도 사람의 모습을 성숙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소화는 대략, 소년의 본신의 크기가 꽤 컸으니 소년기에서 청년기쯤 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했다.

“다쳐서 기억을 잃은 거니?”

“그런가 봐요.”

아마 부모 형제에게 버림받고 산속을 헤매다가 공격받고 그렇게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나 보다.

‘배꼽에 그 상처는 다 나았지만….’

소화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자신의 근본조차 모르는 이 불쌍한 소년에게 뭘 더 물어본단 말인가.

“나는 붉은 여우야. 여기는 이황산이고. 천하 명산인 곤륜산이나 천문산에 비하면 작은 동산이나 다름없는 곳이지.”

소년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소화를 주시했다.

“네가 몸이 다 나을 때까지, 나와 함께 지낼래?”

소년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종이 다르니 서로에게 발정할 일도 없고, 너는 온순하고 착하니 함께 지내도 될 것 같아. 어떠니?”

소화도 퍽 잘된 일인 것 같았다. 우선 살쾡이들은 사냥에 능했다. 수영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 있었다.

‘이제 고기도 먹고, 물고기도 실컷 먹을 수 있겠구나.’

소화는 어미에게 제대로 배우질 못했기에 사냥에 서툴렀다. 대체 고기를 먹은 게 언제쯤인지 가물가물했다. 그런 제게 날렵한 살쾡이 친구 한 명쯤 있으면 퍽 든든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아요. 주인님과 함께라면….”

“그 호칭부터 바꿔야겠어. 주인님이 뭐니? 소화라고 불러.”

“소화.”

“그래, 훨씬 듣기 좋아. 나는 그럼 너를… 으음.”

제 근본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데 이름이라고 알 리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도휘.”

아무것도 모른다던 소년은 똑똑히 제 이름을 말했다.

“도휘라고 불러 주세요.”

소화는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했지만 그와 동시에 피에 절어 거리에 내던져져 있던 소년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저보다 연약한 어린애. 오갈 데 없이 부모 형제에게 버려진 도태된 종자. 이런 녀석은 도와주어야 마땅했다.

“도휘? 그래, 알았어.”

종이야 나중에 본신으로 확인하면 될 것이고, 나이는 저보다 어릴 터였다.

머물 곳이 없는 저 가련한 신세.

‘내가 거둬 주자.’

갈 데가 생기면 보내 주면 그만이지.

***

그렇게 녀석과 함께한 지 20년이 흘렀다.

인간들은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하지만 몇백 년을 사는 수인들에게 십여 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었다.

20년간 소화는 도휘의 종도, 나이도 알 수 없었다.

“으휴, 바보. 수인이 어떻게 본신으로 돌아가는 법을 잊어버리니?”

그랬다. 도휘는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유로운 여우의 몸으로 돌아가 개울에서 한참 첨벙거리고 있던 소화는 멀찍이 바위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도휘가 한심해 보였다.

“이리 들어와서 몸이라도 씻으렴. 그렇게 있으면 덥지 않니? 이 늦여름에.”

“난 괜찮아요, 소화.”

도휘는 흐뭇하게 웃으며 물장구를 치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내 걱정은 말고 실컷 놀아요. 너무 깊이는 가지 말고.”

“…….”

소화는 종종 녀석이 저를 보는 시선이 어른이 아이를 보듯 한다는 걸 알았지만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어 참아야 했다.

‘흥, 저놈이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괜히 기분만 이상해져 보란 듯이 가장 깊은 곳으로 첨벙대며 들어섰다. 그러자 벌떡 일어선 도휘가 긴 다리를 휘적대며 다가와 소화를 건져 냈다.

“깊이 가지 말라니까.”

녀석의 허벅지 언저리까지 오는 물가였다.

어느새 도휘는 물에 푹 젖은 여우 한 마리쯤은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졌다.

머리가 처마에 닿을 만큼 키가 커졌고, 어깨는 과장을 조금 보태 식탁만큼 넓어졌으며 허벅지는 백 년 묵은 구렁이의 몸통보다 굵어졌다.

함께 인간 마을에 내려가면 누구나 오라버니와 여동생으로 볼 정도였다. 여전한 건 고운 얼굴뿐이었다. 소화는 이런 변화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벌써 어둑해졌어요. 물놀이는 이제 그만해요. 고뿔 들어.”

언제부터인가. 도휘는 그녀를 은인으로 존경하고 모시기는커녕 은근히 간섭하고 제 맘대로 통제하려 들었다.

“난 조금 더 놀다 가련다. 피곤하면 도휘야, 너 먼저 들어가겠니? 나는 은어 사냥 연습도 좀 할 겸….”

“안 돼요. 이만 집으로 가.”

녀석은 사사건건 잔소리가 많았고 소화가 거부하면 힘으로 제압했다.

지금처럼 도휘가 한 손으로 그녀의 푹신한 엉덩이를 받쳐서 꼭 안고 있으면 소화는 아무리 네발을 버둥거려도 그 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탈주 시도를 해 봤지만 손을 할퀴고 물어도 도휘는 꿈쩍을 안 했다. 아프지도 않은 건지.

소화는 금방 포기하고 그의 건장한 팔뚝에 주둥이를 푹 기댄 채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밖이 얼마나 험한데 혼자 있겠다는 거예요.”

“이 첩첩산중이 뭐가 위험하니?”

“그러다 덫에 걸려 잡혀가지. 삿된 것들이 많아요.”

요즘, 아랫마을 인간들이 산에 오르는 발길이 잦아졌다.

한번은 도휘가 무시무시하게 생긴 올가미를 가져와 보여 준 적 있었다. 겁먹은 소화는 그 이후로 여우로 변신하여 산에서 뛰노는 걸 자제하고는 있지만 한 번도 사냥꾼을 마주친 적 없었다.

이번에도 소화는 매번 하는 잔소리라 여겨 도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그보다는 젖은 털 때문에 몸이 달달 떨렸다.

“이거 봐. 추울 거라고 했는데.”

“그리 춥지 않단다.”

오기로 응수하자 도휘가 그녀의 젖은 등을 쓸어 주었다. 거북이 등짝만 한 손바닥이 몇 번을 그리해 주자 금세 몸이 곤해졌다.

“이렇게 부드러운 털을 가진 예쁜 여우는 혼자 다니다간 사람들에게 잡혀가요. 알았어요?”

“…….”

점점 눈이 감겼다. 소화는 평소처럼 널찍하고 따뜻한 녀석의 품에서 스르르 잠이 들었다.

***

꿈속이었다.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소화를 쫓아왔다. 다리를 물고, 몸통까지 물어 버리며 도통 놓아주지 않았다. 비단 금침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소화는 비명을 지르며 번쩍 눈을 떴다.

“꺄아악!”

닭죽 냄새가 났다. 따뜻한 죽을 갖고 온 도휘가 심각한 얼굴로 소화의 곁에 앉았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하얀 얼굴이 평소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도휘는 식은땀이 범벅인 소화의 이마와 콧등을 제 소매로 다정하게 눌러 닦아 주었다.

“또 악몽을 꿨어요?”

“…….”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소화는 헐떡이는 밭은 숨만 내쉬었다. 동공이 탁 풀려선 꿈인지 생시인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호, 호랑이… 호랑이가 날 쫓아왔어.”

도휘는 못내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살폈다. 땀에 젖은 갈색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고 한참 동안 그녀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잡아먹을 듯이 나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어. 이빨이 이만해선….”

“왜 자꾸만 그런 악몽을 꾸는 걸까.”

도휘는 안쓰러운 손길로 그녀의 작은 등을 쓸어 주었다.

“잊어버려라, 잊어버려라.”

주문을 외우듯 부드럽게 소화를 달래 주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마당에 들어앉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흉몽을 꾼 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그러고 눈을 뜨면 기력이 쭉 빨린 듯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 온종일 호랑이 생각만 가득했다.

“정말 이 산에 호랑이가 사는 건 아닐까?”

휙 고개를 돌린 소화가 도휘의 그윽한 갈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피식 비웃듯 되물었다.

“이런 동산에요?”

그 말대로 이황산은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호랑이의 먹잇감이 될 만한 짐승도 별로 없었다. 굳이 있다면….

‘나?’

아냐, 그럴 리 없어. 소화는 부르르 고개를 흔들었다.

몸서리치는 그녀를 도휘가 아기처럼 안아 들어 제 무릎 위에 올리곤 달래 주듯 볼을 지분거렸다.

“여긴 호랑이가 살지 않는 곳이에요.”

안정감이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에 소화는 평정심을 되찾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그래, 맞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깊은 산맥을 누빈다는 그 무시무시한 맹수가 이런 작은 산에 있을 리 없지.”

“그럼요.”

“하지만 마을 인간들이 그랬잖니. 호랑이를 봤다고.”

잠깐 안도했던 소화의 얼굴에 순식간에 그늘이 졌다.

“한두 명이 아니었어.”

그녀의 손을 잘근잘근 물어 대던 도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곤 속삭였다.

“인간들은 원래 허풍이 심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호영도 떠났고, 묘진도 떠났다. 한때는 이 산의 주인 행세를 하던 노루들도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냥꾼 때문이라곤 했지만, 이황산에 남은 호랑이의 먹잇감이 될 만한 짐승은 정말 저 혼자뿐이었다.

“안 되겠다. 스님한테 가 봐야겠어.”

“…그 땡중한테요?”

다정하게 굴던 도휘가 단번에 불쾌한 기색을 내보였다. 그러나 결심한 소화가 벌떡 일어서 꽃신을 신고 나서는 걸 막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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