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본문
하악, 하악….
소화는 거친 산길을 거의 구르듯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발을 멈출 순 없었다.
가벼운 몸집을 가진 여우의 특성상 오르막길이 그녀에겐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뒤를 쫓아오는 잔인한 포식자는 제게 유리한 내리막길로만 소화를 내몰았다.
캐갱!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그녀가 데구르르 진흙탕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무에 퍽, 하고 받힌 그녀가 어느 굴 앞에 떨어졌다.
부딪힌 몸은 아프고, 항상 관리되어 매끄러운 털 가득 묻은 진흙에선 이상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소화는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극한의 두려움,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녀는 엉금엉금 남의 굴속으로 숨어들었다. 오소리가 파 놓은 굴인 듯싶었다.
‘여긴 좁아서 들어오지 못할 거야.’
굴의 끝까지 들어가 오들오들 몸을 떨고 있자 밖에서 철퍽이는 맹수의 발소리가 들렸다.
크르르르….
포효를 감춘 맹수의 그르렁대는 소리가 꼭 천둥소리 같았다. 그냥 숨을 쉬는 소리라고 했다. 하지만 어떤 괴물이 저런 포악한 소리를 내며 숨을 쉰단 말인가.
‘듣기 싫어.’
소화는 제 앞발 사이로 머리를 웅크렸다. 쫑긋 선 두 귀를 앞발로 꾹 내리누르곤 영겁 같은 이 악몽의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빌었다.
‘제발 나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헛된 꿈이었다. 저 맹수의 후각은 날카로웠다. 소화의 머리보다 커다란 주둥이를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녀석은 단 한 번도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소화가 번번이 사냥에 실패하던 참새를, 놈은 너무나 쉽게 매일 아침 그녀의 밥상머리에 올려 주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제가 키워 주던 저놈이 바로 그 흉포한 맹수, 호랑이였다는 걸.
“어서 이리 나와요, 소화.”
물론 이제 와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었다.
“도망치면 내가 못 잡을 줄 알았어요?”
굴속이 무너질 듯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작은 몸이 겨우 들어간 좁은 굴이라 놈은 앞발도 넣지 못할 거라고 안심한 게 바보 같았다.
흙이 파헤쳐지는 소리가 들렸다. 날벼락이었다. 겁먹은 그녀가 힐끔 눈을 들자 놈의 거대한 앞발이 보였다.
굴속으로 쑥 들어와선 뭔가를 낚아채려는 것처럼, 검은색 갈고리같이 생긴 거대한 발톱들이 그녀의 코앞에서 꿈틀거렸다.
“이리 나와, 어서. 날 책임져야지.”
잔뜩 긴장한 소화의 전신에서 땀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액체들이 줄줄 흘렀다. 도망치려 하염없이 뒷발을 꼼지락거렸지만 뒤는 나무뿌리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결국 성과 없이 빠져나간 맹수의 앞발은 대신 작정하고 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입구를 넓혀 그녀를 꺼낼 작정인 듯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소화의 온몸이 달달 떨렸다. 작은 머리가 탈출구를 찾으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맹수는 금방 다시 굴속으로 앞발을 들이밀었다.
갈고리 발톱은 이번엔 손쉽게 그녀의 몸을 덮쳤다. 놀란 소화는 반사적으로 저를 움켜쥔 놈의 앞발을 콱 물어 버렸다.
그러나 뾰족한 제 송곳니에 물린 녀석은 그마저도 즐거운 듯 그르렁거리며 웃기만 했다.
결국 밖으로 끌려 나온 소화는 놈의 앞발에 쥐인 채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목덜미를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제 꼴이 영 볼썽사나웠지만 지금은 체면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황금색. 웃음기가 어린 샛노란 호랑이의 안광이 그녀를 직시했다.
“아프잖아요. 날 물어 버리면 어떡해요?”
맹수의 시선을 정통으로 마주하자 소화의 온몸이 한겨울의 개울가처럼 바짝 얼어붙었다.
그녀의 밑으로 방울진 물이 토독토독 떨어졌다.
“이런… 또.”
질퍽하게 젖어 드는 흙바닥을 보곤 놈이 쯧쯧 혀를 찼다. 소화는 창피스럽고 두려운 마음에 캐갱거리며 네발을 마구 휘저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어서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응?”
그러면서 녀석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도망치지 못하게 앞발로 몸을 꾹 눌렀다.
“가만있어요.”
녀석은 진흙이 잔뜩 묻은 소화의 얼굴을 핥아 주었다. 커다랗고 까끌한 혀가 그녀의 주둥이와 예민한 귀를 지나가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얌전히 있었으면 좋았잖아요. 꼴이 이게 뭐야.”
놈은 뻔뻔하게도 그녀의 탓을 했다. 그러면서 그 무시무시한 앞발로 휙 굴려 냅다 몸을 뒤집었다.
놈의 앞발에 가슴이 짓눌린 소화가 숨이 막혀 캑캑거렸지만 상대는 태연히 그녀가 지린 오줌까지 싹싹 핥았다.
살뜰히 몸 정리를 마친 놈은 그녀를 입으로 물었다. 상처가 날 정도로 강하게 문 건 아니었다. 몸부림을 치면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쇠꼬챙이처럼 날카로운 이빨들이 제 뒷덜미에 닿자 소화는 그럴 의지가 싹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맹수는 여우를 입에 문 채로 어슬렁어슬렁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마치 그녀의 처지를 깨닫게 해 주려는 듯 그네 태우듯 슬슬 주둥이를 흔들며 여유롭게 거닐었다.
어느덧 둘은 처음으로 옥신각신 몸싸움을 했던 산기슭에 다다랐다. 놈은 준비해 놨던 새장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인간 마을까지 가서 서역의 상인에게 부탁해 특별히 구한 물건이라고 했다. 그 치밀함에 바르르 몸이 떨렸다.
“이러려고… 처음부터 이러려고 새장을 사 온 거지?”
“그럴 리가요.”
철컹하고 새장의 고리를 닫은 놈은 변모하기 시작했다.
온몸을 뒤덮었던 털은 사라지고 주둥이는 짧아졌다. 흉한 발톱을 숨겼던 앞발은 희고 길쭉한 남성의 단단한 손가락으로 바뀌었다. 땅을 딛던 네발은 길고 튼튼한 두 다리와 두 팔로 변했다.
순종 수인답게, 녀석은 금세 검은 머리칼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갖췄다.
시원하게 트인 이마와 새카맣고 진한 눈썹은 호전적인 사내다워 보였고, 곧게 뻗은 콧날과 턱선은 양반집 도련님이라 해도 믿어질 만큼 귀태가 흘렀다. 살짝 치켜 올라간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선 오만하고 포악한 성정이 엿보였다.
어릴 때부터 봐 왔지만 참으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더는 나 버리고 도망칠 생각 말아요. 괜한 수고 해 봤자 당신만 손해라는 거, 이제 알겠죠?”
녀석은 긴 손가락으로 그녀가 갇힌 철창을 툭툭 쳤다. 소화는 그 꼴이 얄미워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녀석은 그런 그녀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씩 웃으며 새장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당신은 날 데리고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
그가 퍽이나 즐거운 어조로 말했다.
“이무기한테 신령한 보주가 있어요. 그 보주만 있으면 우리처럼 종이 다른 요괴들도 아기를 가질 수가 있대요.”
도휘가 비밀을 말하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가서 구해 올게. 당신 소원이 아기 갖는 거잖아. 그렇죠?”
“…….”
소화는 못 들은 척 웅크리고만 있었다. 하지만 귀는 저절로 들썩였다. 발정기가 다가오는 그녀의 최근 바람은 아기를 갖는 게 맞긴 했다.
‘하지만 너랑은 아냐.’
올해 100살이 된 창창한 아가씨 소화는 저와 같은 붉은 여우와 아기를 갖고 싶었다. 인두겁을 쓴 저런 맹수가 아니라.
“관심은 있나 보네. 나 설레게.”
도휘가 한쪽 입가를 올리며 무시무시하게 웃었다.
“넌 눈이 삐었니? 난 암컷 호랑이가 아니야!”
“암컷 맞잖아요.”
“…….”
“내 암컷.”
그냥 말을 말자. 녀석은 대화가 통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보주만 있으면 돼요. 그럼 평범한 가족처럼 보일 테니까.”
평범한 가족? 자신을 새장에 가둔 녀석이 할 말인지. 어이가 없어 소화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의 삐뚤어진 태도에 화가 났는지 녀석이 별안간 멈춰 섰다.
“소화.”
새장을 들어 올린 그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시선을 맞췄다. 정확히 동등한 높이에서 마주친 시퍼런 안광에 소화는 움찔하며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약속은 지켜야죠. 날 데리고 살기로 했잖아요, 평생.”
“내, 내가 언제….”
용기 내 항변하자 녀석의 짙은 눈썹이 팍 찡그러졌다. 그가 짜증스레 새장을 한번 흔들었다. 놀란 소화의 몸이 펄쩍 뛰어올랐다.
“갓 태어난 나를 마음대로 데려와서 키웠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제 와서 내버리겠다는 거야.”
그녀가 이를 드러내며 바르작거렸다.
“너, 넌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그러니까 은혜를 갚겠다잖아.”
녀석이 성난 눈으로 새장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신 소원도 들어주고, 여태껏 해 온 것처럼 수발도 들어 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크르르르…. 그르렁대는 맹수의 포효가 환청처럼 들렸다. 소화는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또 아래가 축축했다. 조르르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은 녀석이 기분 나쁘게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자꾸 지리잖아.”
부끄러운 실수를 한 건 소화인데 제게 겁먹었단 사실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거친 손길이 철창의 고리를 열었다. 인간의 몸이라도 녀석은 순종답게 체구가 커다랬다. 솥뚜껑만 한 손이 구석으로 요리조리 피신하는 소화를 잡아챘다.
캐갱캐갱 죽는 소리를 냈지만 가차 없었다. 소화를 꺼낸 녀석이 새장을 멀리 던져 버렸다.
콰드득. 철창이 부서지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들렸다. 자연스레 소화의 꼬리가 뒤로 잔뜩 말렸다. 녀석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제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사람으로 돌아와요.”
얼른 인간의 육신으로 변모하라 그가 명령했다.
소화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싫어. 싫다구. 인간의 몸은 생활에는 편리하지만 급한 상황에선 불리했다. 우선 재빨리 달리기가 불편했고 따라서, 도망치기도 어려워진다.
“내 말 들어요.”
녀석이 엄한 얼굴로 경고했다.
“싫어!”
소화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그럼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꼬리를 잡고 몸을 뒤집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믿을 수 없이 무례한 행동에 앞발로 그의 손을 할퀴며 캥캥거렸지만 녀석은 태연했다. 그녀를 좌우로 슬슬 흔들기까지 했다.
소화는 어지러움과 더불어 탐스러운 제 꼬리가 빠질 듯 아파 와 결국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방금 녀석이 그랬듯, 소화의 긴 주둥이가 짧아지고 몸통을 뒤덮었던 옅은 은빛 털이 싹 사라졌다. 검은색 앞발은 부드러운 여자의 손이 되었고 뒷발은 다리가 되었다.
가벼운 저고리 차림의 소녀가 씩씩거리며 녀석을 노려보았다.
“이제 됐니? 됐어?!”
“응. 정말 고마워요. 내 말 들어줘서.”
녀석은 진심으로 기쁜 듯 해사하게 웃으며 소화의 손목을 붙들었다.
철컥하고 뭔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운 감촉에 소화는 소스라쳤다.
이게 뭐람? 놀란 그녀가 손목을 들어 보았다. 제 손목에는 두꺼운 팔찌가 채워져 있었고 녀석이 팔찌에 이어진 줄을 쥐고 있었다.
“목에 해 주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인간미가 없죠? 내가 꼭 사냥꾼 같잖아. 억지로 잡아 둔 것 같고.”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떡 벌린 소화를 보며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우리 사이는 그런 게 아닌데.”
그런 게 아니면 뭔데?
역시 대화가 안 통한다. 이 녀석이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예전엔 내 말이라면 철석같이 들었는데….’
키가 천장에 닿을 만큼 커지고부터인가? 아니면 손발이 제 머리통보다 더 커졌을 때부터?
“우리 집으로 가요, 소화. 다음번 발정기가 오기 전에 내가 꼭 보주를 구해 올게요. 약속해요.”
녀석이 제 어깨를 다정스레 껴안고는 바라지도 않은 보주를 들먹이며 걸음을 옮겼다.
“자두, 살구, 앵두, 개구리, 참새…. 앞으론 나도 당신이 좋아하는 것만 먹을게요. 청소도 빨래도 전부 내가 하고. 뭐,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 내가 정말 잘할 거야. 그러니까 버릴 생각 말고 데리고 살아야 해요?”
“…….”
“이거 봐. 또 대답이 없네. 자꾸 그러면 집에 묶어 둘 거예요.”
“네가 뭔데 나를….”
“아무 걱정 말아요. 내가 꼭 행복하게 해 줄 테니까. 반드시.”
말을 막은 녀석이 결심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 별안간 흙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한텐 당신밖에 없어요, 소화. 알잖아요.”
그녀의 두 손을 제 얼굴에 갖다 댄 녀석이 짐승이 하듯 그녀의 아랫배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제발 버리지 마요… 잘할게. 내가 잘할게요. 응? 데리고 살아 줘요.”
불쌍할 정도로 간절하게 애원하던 녀석은 소화가 끝내 답이 없자 이내 사납게 눈빛을 바꿨다.
갈색 눈동자가 점차 금색으로 변했다.
“안 떠날 거죠?”
“…….”
호랑이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런 야밤에는 특히 더 무시무시했다.
소화는 끝내 그의 협박에 못 이겨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환하게 웃은 그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또 버리고 가면 나 정말 죽어 버릴 거야.”
그게 꼭 ‘널 잡아먹고 나도 죽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소화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기도 낳고,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평생.”
“…….”
제게 지독한 업보가 들러붙었다는 땡중의 말이 예언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