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본문
5.
나스룩의 새로운 영주가 된 젊은 백작이 이른 아침 말을 타고 성에서 나왔다.
그의 뒤로는 흰 갑옷을 입은 나스룩의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때아닌 이른 아침, 성을 나서는 젊은 백작의 행렬에 농터로 나가던 농노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서서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백작이 지나갈 때면 다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법이다.
영주인 백작이 지나갈 때까지 공손하게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인 채로 그를 올려다보지 말아야 했다.
고개를 숙인 농노들을 지나친 젊은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도착한 곳은 한스 랭햄의 오두막이었다.
어제 결혼한 탓에 결혼 파티로 잔뜩 어질러진 뜰에 들어선 젊은 백작이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아직 술이 덜 깬 한스 랭햄이 마침 볼일을 보러 나왔다가 제 마당을 꽉 채운 기사들과 제 앞에 서 있는 젊은 백작을 보며 기함을 했다.
“배, 배, 백작님!”
한스가 불한당에 가까운 성격이라고 해도 영지의 주인인 백작 앞에서 고개를 들고 있을 정도의 배짱은 아니었다.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약한, 그런 비굴한 성격의 한스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바로 어제 자신의 신부를 강탈해간 백작 앞에서도 한스는 비굴하게 웃었다.
초야를 빼앗긴 것은 아깝지만 백작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한스는 알고 있다.
한스는 어젯밤 혼자서 골똘하게 생각했었다.
왜 그동안 한 번도 없었던 초야권을 백작이 행사한 것일까.
그것도 언제 돌아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젊은 새 백작이.
한스가 내린 결론은 그만큼 엘레노어가 아름답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엘레노어는 농노로 살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미모를 가지고 있다.
아마 그런 그녀를 백작이 눈독 들인 것이다.
잘만 하면 이게 초야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계속 백작에게 불려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한스 자신에게도 뭔가 떨어지는 것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내를 내주는 대신 백작에게서 땅도 받을 수 있고 금은보화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막연하게 어젯밤 내내 생각했는데 지금 백작이 눈앞에 있다.
이렇게 이른 아침 자신의 집을 찾아온 것을 보면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이다.
‘뭘 달라고 하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미인 아내에게 푹 빠진 젊은 백작은 아마 달라는 대로 다 줄지도 모른다.
양 여섯 마리와 암소 두 마리로 아주 호박 넝쿨이 굴러들어왔다.
제대로 된 장사를 했다는 생각에 한스의 입술이 히죽히죽 웃었다.
값만 두둑하게 쳐주면 아내 따위는 충분히 팔 수 있다.
물론 백작에게 안기지 않을 때는 자신이 안으면 그만이니 손해는 조금도 없다.
열심히 머릿속으로 백작에게 받아낼 것을 계산하고 있을 때 그의 귀에 백작의 목소리가 울렸다.
“한스 랭햄.”
그의 이름을 부르는 젊은 백작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내 영지의 모든 농노들은 내 허락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다는 법을 몰랐던 것인가?”
“네?”
뜻밖의 말에 한스가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젊은 백작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영지 안의 모든 농노들은 결혼을 하기 전에 미리 내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이 법인데 너는 그 절차를 어겼다.”
“배, 백작님?”
“헤인스 경.”
젊은 백작이 기사를 불렀다.
그러나 나스룩 영지의 법 집행을 담당하는 기사 헤인스가 백작의 곁으로 다가왔다.
“농노가 영주의 허락 없이 결혼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왕국의 법에 의하면 각 영지에 속한 농노들은 영주님의 허락이 없이는 혼인할 수 없습니다.”
“허락 없는 결혼은 무효인가?”
“네, 백작님. 영주님의 허락이 없는 결혼은 무효입니다.”
“효력이 없다는 뜻이군.”
젊은 백작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한스 랭햄. 그대의 결혼은 무효다. 알아듣겠느냐?”
“하, 하지만 백작님. 저는 결혼 서약을 했고, 신부 아버지에게 암소와 양도…….”
“신부 아버지에게 준 암소와 양은 도로 돌려받으면 그만 아닌가. 나는 분명히 내 의사를 전했다. 한스 랭햄과 엘레노어 하인츠의 결혼은 인정하지 않겠다. 다른 신부를 찾아보는 것이 좋겠군. 암소 두 마리와 양 여섯 마리로 살 수 있는 신부 말이야.”
할 말을 마친 젊은 백작이 말 위에 뛰어올랐다.
그리고 돌아서기 전 한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엘레노어 하인츠는 암소 두 마리와 양 여섯 마리로 얻기에는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나?”
싱긋 웃은 젊은 백작이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되돌아가는 것을 한스 랭햄이 멍하니 쳐다봤다.
그는 아직 잠도 다 깨지 않았다.
하지만 잠이 다 깨지 않은 머리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알게 되었다.
엘레노어와 자신의 결혼이 깨졌다는 사실 하나만은 말이다.
* * *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른 아침에 생각지 않은 방문으로 깜짝 놀란 사람이 여기 한 명 더 있다.
딸을 암소 두 마리와 양 여섯 마리에 팔아넘긴 외다리 하인츠였다.
“이, 이게 대체…….”
아직 아침 안개도 다 걷히지 않은 이른 아침이었다.
그런데 하인츠의 마당에는 암소와 염소가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몇 개의 궤짝들을 기사들이 그의 마당에 내려놓았다.
궤짝 안에는 금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하인츠의 머리가 미처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외다리 하인츠. 그대의 딸을 얻는 대가로 이 정도면 되겠는가?”
말 위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젊은 백작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그대의 딸 엘레노어와 한스 랭햄의 결혼은 조금 전에 무효가 되었다. 그리고 그대의 딸을 내가 신부로 맞이하고 싶은데, 그대. 허락하겠는가?”
“네?”
이 무슨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누가 누구의 신부가 된다고?
“나스룩 영지를 다스리는 아드리안 하츠펠트 백작의 신부로 그대의 딸을 주겠는가? 가부만 대답하라.”
단호한 물음에 하인츠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일단 승낙하고 봐야 하는 일이다.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알지 못하지만 하츠펠트 백작의 신부라니, 이건 손해 볼 일이 없다.
게다가 마당에 쌓인 것들을 봐라.
평생 써도 다 쓰지 못할 재물이 아닌가.
“다, 당연히 허락하고 말구요.”
하인츠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 젊은 백작 아드리안이 시원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가 허락했으니 이제 내가 그대의 딸을 품는 것에 주저하지 않아도 되겠군.”
의미를 알지 못하는 말을 남기고 아드리안이 그의 기사들과 함께 돌아가자 그 뒤에 남은 것은 마당에서 음머 음머 울고 있는 암소와 양, 그리고 금화가 들어있는 궤짝들뿐이었다.
그리고 하인츠의 집에 아침부터 일어난 일에 몰려든 주위 사람들은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 가지는 하인츠가 이제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과 나스룩 영지를 다스릴 새 백작은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아니라 선대 백작의 서자인 아드리안 하츠펠트라는 사실이었다.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서자인 아드리안이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하인츠가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어쩌면 더 놀라운 사건이었다.
* * *
“이제 법적으로 걸리는 건 없는 것이냐?”
성안으로 되돌아온 아드리안이 말에서 내리며 백작가의 법적 자문을 맡고 있는 헤인스를 힐끗 쳐다봤다.
“네, 백작님. 더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일단 초야부터 치르고 난 후에 결혼식은 천천히 올려도 되는 거겠지? 내가 좀 급해서 말이야.”
젊은 백작의 말에 헤인스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새로 하츠펠트 백작가의 주인이 된 이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는 성미가 급하다.
아니, 원래는 성미가 급한 편이 아닌데 엘레노어 하인츠의 일에는 성미가 급해진다.
돌아오자마자 엘레노어 하인츠의 결혼 소식을 듣고 30년 동안 누구도 행사하지 않았던 초야권을 발동해서 신부를 빼앗아오더니 하루가 지나자마자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두 곳을 방문해서 결혼 무효와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정말 기가 막할 정도로 빠른 행동력이다.
이 남자의 행동력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른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그러면 내가 초야를 치를 사이에 그대가 결혼식 준비를 해주겠는가?”
“알겠습니다, 백작님.”
아드리안 하츠펠트가 새로운 백작이 된 것은 지난달의 일이다.
수도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아드리안에게 작위 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다.
원래는 그의 이복형인 루드비히에게 돌아갈 작위였다.
하지만 루드비히에게 생긴 비극이 아드리안에게 기회를 허락한 것이다.
루드비히에게 일어난 비극이란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하고 다른 귀족과 시비가 붙은 것이다.
시비 끝에 결투까지 이어져 결국 그 결투에서 루드비히가 목숨을 잃음으로써 하츠펠트 백작가의 후계자 자리는 서자인 아드리안에게 돌아왔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실은 루드비히에게 일어난 비극은 전부 아드리안이 꾸민 일이다.
일부러 루드비히가 그 귀족과 시비가 붙을 만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루드비히의 불같은 성격과 오만한 자존심을 이용한 함정이었다.
그와 결투한 귀족은 수도에서도 유명한 남자로 단 한 번의 결투에서도 진 적이 없는 남자다.
그런 남자와 결투한 이상 루드비히가 무사할 리는 없었다.
결국 그 오만함이 루드비히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백작가 특유의 오만함.
아드리안은 그 오만함에 오랫동안 짓밟혀 왔다.
같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백작가 내에서 백작의 아들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고 결국은 수도로 쫓겨났다.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다.
자신을 내쫓은 이상 이곳 나스룩으로 되돌아오게 하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드리안에게는 기어이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엘레노어 하인츠. 그녀가 바로 그 이유였다.
어려서부터 제 어미의 옷자락을 잡고 백작가를 들락거리던 소녀.
그때는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녀에 불과했지만 항상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것이 유난히 눈에 밟혔던 소녀였다.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항상 그곳에 엘레노어가 있었다.
나무 뒤에서, 돌담 뒤에서 항상 자신을 훔쳐보던 소녀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는 백작의 성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호의를 보내던 소녀다.
자신을 훔쳐보는 눈동자 안에 깃든 애정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을 눈으로 좇는 그 소녀를, 어느샌가 자신 역시 눈으로 좇고 있었다.
소녀가 보이지 않으면 찾게 되고, 이삼 일 이어서 보이지 않으면 병이라도 든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백작가의 한적한 뜰 나무 아래에서 잠이 든 소녀의 가슴 위에 엉성하게 엮은 화관을 얹어주고 달아나듯 그 자리를 뜬 것은 설렘의 표현이었다.
나중에 그 소녀가 머리에 그 화관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며 가슴이 얼마나 뛰었던가.
6년 전, 강제로 이 성에서 쫓겨나 수도로 가게 되었을 때 가장 슬펐던 것은 이 성을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엘레노어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떠나 있는 사이에 다른 남자가 그녀를 아내로 삼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그것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그녀는 농노이기 때문에 이 영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6년은 힘든 시간이었다.
매일 엘레노어를 그리워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다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좌절했었다.
그리고 절망하고 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로웬의 죽음. 그리고 부친인 하츠펠트 백작의 죽음.
그때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루드비히만 죽으면.
그래, 루드비히만 죽으면 자신은 원하던 것을 가질 수 있다.
만약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다면 그 다른 남자를 죽여서라도 그녀를 빼앗을 작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결혼 전날 나스룩에 도착한 것은 한스 랭햄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한스 랭햄을 사고로 위장해 죽여서 그녀를 빼앗았을 테니 말이다.
한스 랭햄은 그도 모르는 사이에 목숨이 구해진 것이다.
이제 걸리적거리는 건 없다.
한스 랭햄과의 결혼은 무효가 되었고 하인츠에게는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것이다.
정식으로 자신의 신부로 확정되기 전에 그녀에게 삽입하지 않을 거리는 각오를 했다.
그래서 어젯밤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만지면서 삽입을 못 하다니. 그보다 더 힘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껏 그녀를 안고 삽입할 수 있다.
그녀의 안에 제 씨를 얼마든지 뿌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제 자신의 아내이니 말이다.
“루드비히 하츠펠트 백작님.”
어제 그녀가 자신을 루드비히로 착각했을 때는 조금 심술이 났었다.
아니, 왜 자신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었을까, 하고 화가 났지만 다시 생각하니 그녀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훔쳐보고 자신은 그녀를 훔쳐봤으니, 서로가 대화를 나눈 적은 없다.
하지만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지만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은 그녀를 좋아했다.
이렇게 몇 년이나 지났다.
자신은 그녀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라는 법은 없었다.
그래서 잠시 후에 확인을 해볼 생각이다.
어제는 조명을 어둡게 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밝은 빛 아래에서 자신을 보고 반응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직까지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그 마음이 이미 사라졌는지.
물론, 확신하고 있다.
오만할 정도로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