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2.

농노의 결혼식은 소박하면서도 시끄럽게 치러졌다.

드레스를 입은 신부, 그리고 모자를 쓴 신랑을 사이에 두고 맥주와 분위기에 한껏 취한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고, 노래를 부르고, 그리고 성당의 수도사가 불려 와서 결혼 서약을 받는 것으로 결혼식은 끝이다.

짧은 결혼식과 긴 파티, 그리고 첫날밤으로 이어진다.

가끔은 너무 취한 신랑이 제대로 일을 치르지 못해서 다음 날이 되어서 초야를 치르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엘레노어는 조금 전에 결혼 서약을 끝냈다.

얼굴도 쳐다보기 싫은 남자와 마주 서서 신 앞에서 결혼 서약을 했다.

그리고 지금 한스는 마을 남자들과 어울려서 맥주에 빠져 있다.

“…….”

엘레노어가 분위기를 살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아직은 사람들이 덜 취한 느낌이다.

지금 섣부르게 도망쳤다가 잡히면 모든 것이 허사다.

그때였다.

자신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한스가 엘레노어의 눈에 들어왔다.

“아!”

술에 잔뜩 취한 한스가 제 손목을 잡자 엘레노어가 당황했다.

“신부가 여기서 혼자 있으면 쓰나. 초야를 치러야지, 안 그래?”

잔뜩 취한 한스가 히죽 웃었다.

“콧대 높은 엘레노어가 내 마누라가 되다니.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지. 네년을 얻느라고 아까운 양과 암소를 네년 아비에게 줘야 했으니까 오늘 밤은 양 여섯 마리와 암소 두 마리 값을 뽑아내고도 충분할 정도로 네년에게 박을 생각이야.”

한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엘레노어가 어깨를 떨었다.

“비싼 값을 치렀지만, 다 뽑아낼 거니까 각오하는 게 좋아.”

히죽히죽 웃으며 한스가 엘레노어의 손을 잡아끌고 오두막을 향해 걸었다.

‘아, 안 돼…….’

너무 빠르다.

조금 더 일찍 도망쳐야 했던 것일까.

한스의 손에 잡혀 끌려가며 엘레노어가 주위를 쳐다봤다.

아무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껄껄 웃으면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덜컹-!

오두막의 문을 거칠게 열고 한스가 엘레노어를 끌고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땅을 울리는 말굽 소리에 한스의 발이 멈췄다.

분위기와 술에 취해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움직임을 멈췄다.

결혼식이 열리던 뜰로 수십 마리의 말이 달려와 멈췄다.

그들이 누군지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렸다.

말 탄 기사들.

나스룩 영지의 기사들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기사들은 영주의 가드들이다.

더군다나 수십 명의 기사들이 함께 움직이는 경우는 영주의 명령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결혼하는 엘레노어 하인츠는 어디에 있나!”

말 위에서 뛰어내린 기사의 입에서 엘레노어의 이름이 나왔다.

“엘레노어 하인츠인가?”

오두막의 입구에 한스와 함께 서 있는 엘레노어를 발견한 기사가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이젠 엘레노어 랭햄입니다.”

한스가 기사를 불쾌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아무리 불쾌해도 기사들에게 함부로 대들 수는 없다.

한스는 농노이고 그들은 정식 서품을 받은 기사들이다.

“영주님의 명령이시다. 영주님께서 엘레노어 랭햄에게 법적으로 명시된 초야권을 행사하실 것이다.”

초야권.

그 순간 엘레노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래전에 사라진 관습이다.

아니, 정확히는 더 이상 시행되지 않던 법이다.

영지의 주인인 영주에게는 ‘초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가 있다.

나스룩 영지의 주인은 하츠펠트 백작이다.

그리고 이 나스룩 영지에 살고 있는 모든 농노들은 전부 하츠펠트 백작의 소유물이다.

소나 양처럼 백작의 소유물인 것이다.

그 소유물의 증거로 이 영지 안의 모든 농노들은, 농노의 딸들은 결혼하게 되면 그 초야를 신랑이 아닌 영주와 보내야 한다.

초야를 영주와 함께 보내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가지는 영주의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첫날밤 첫 관계를 영주와 가짐으로써 태어나는 아이가 영주의 자식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해서다.

물론 그 아이가 진짜 영주의 아이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렇게 인식됨으로써 이 영지의 모든 이들이 영주의 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비인간적인 법은 30년 전에 이미 사라지고 더는 시행되지 않았다.

그동안의 하츠펠트 백작들은 농노들에게 초야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기사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다들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30년 동안 사라졌던 초야권을 지금 부활시키겠다는 것에 다들 기가 막혔지만 누구도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의하는 사람은 없다.

초야권은 영주의 마땅한 권리라는 것을 모두 다 알기 때문이다.

“영주님의 명령을 거역할 생각인가?”

기사가 한스를 노려봤다.

투구를 쓴 사이로 드러나는 눈빛이 날카롭다.

“아닙니다.”

한스가 잡고 있던 엘레노어의 손을 놓아줬다.

“영주님의 명령이시니, 당연히 순종해야지요.”

한스는 영악한 사내다.

괜히 영주의 심기를 거슬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새로운 영주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것이 없다.

작위를 이어받은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아직 이곳 나스룩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초야권을 요구하는 것을 미루어보면 드디어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돌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얼마나 난폭한 성격인지 이 나스룩에서 그에 대해 모르는 농노들은 없다.

마음에 안 들면 잡아다가 때리고 짓밟던 그가 이제 영주가 되었으니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죄를 뒤집어씌우고 죽이는 짓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할 것이 분명하다.

‘이년의 처음을 빼앗기는 건 열 받지만…….’

한스가 머리를 굴렸다.

엘리노어의 처녀를 영주에게 빼앗기는 건 열 받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하룻밤만 주고 나면 엘레노어는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자신과 서약을 했으니 자신의 것이다.

언제든지 마음껏 범할 수 있다.

엘레노어의 가슴이 커지고 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 탐내 왔었다.

몇 번이나 강제로 가지려고 했었지만 전부 실패했고 결국 아까운 양과 소를 빌어먹을 외다리 하인츠에게 주고 나서야 겨우 가지게 되었는데 이제는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빼앗아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살아남으려면 개처럼 엎드리는 수밖에.

이게 끝은 아니니 말이다.

“데려가십시오. 부디 살살 다루고 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굴하게 웃으며 한스가 엘레노어를 기사에게로 떠밀었다.

한스의 손에 떠밀린 엘레노어의 얼굴이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루드비히 하츠펠트.

엘레노어의 기억 속에서는 한스만큼이나 최악인 남자였다.

항상 엘레노어 자신을 벌레 보듯 하고, 눈이 마주치면 침을 뱉었던 남자다.

성의 하녀들을 겁탈하다가 전 하츠펠트 백작에게 혼이 나고 도시로 보내졌던 남자가 이제 돌아온 것일까.

“꺄아악!”

기사가 엘레노어를 번쩍 들어 말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조금 전까지 흥겨운 축제로 시끄럽던 장소를 말굽을 울리며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