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본문
1.
말을 타고 언덕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뭔가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저건 무엇이지?”
남자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그의 종자가 유심히 쳐다봤다.
“농노들이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축제? 아직 가을 추수가 되려면 멀었는데 무슨 축제를 벌이는 것이지?”
“혼인 축제겠지요. 하인츠의 딸이 곧 혼인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인츠의 딸?”
“네, 백작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외다리 하인츠의 딸 엘레노어 하인츠 말입니다. 그 어미가 살아 있을 때 백작가의 허드렛일을 하러 자주 드나들었잖습니까. 어미가 일하러 올 때 어미의 앞치마를 붙잡고 졸졸 따라오던 그 엘레노어입니다.”
“엘레노어 하인츠는 좀 더 어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백작님께서 나스룩을 떠나신 지 벌써 6년이나 지나셨습니다. 하인츠의 열네 살짜리 딸이 스무 살의 처녀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백작님.”
종자의 설명에 말 위에 올라탄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6년이라니.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
“네, 백작님. 6년입니다.”
남자가 탄 말의 고삐를 쥔 종자가 잠시 언덕 아래를 쳐다봤다.
남자의 시선이 여전히 언덕 아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을 쫓아 언덕 아래를 바라보던 종자가 웃음과 함께 남아있던 말을 덧붙였다.
“나스룩으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백작님.”
6년 전 이 나스룩을 떠날 때는 쫓겨나는 서자에 지나지 않았던 남자는 이제 정식으로 이곳의 영주가 되어 돌아왔다.
이 남자의 이름은 아드리안 하츠펠트다.
* * *
헛간의 문이 열리며 주근깨가 얼굴에 가득한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건초더미로 가득한 헛간을 두리번거리던 여자가 건초더미 뒤에 앉아있던 갈색 머리의 처녀를 발견했다.
“새 신부가 여기서 뭘 하는 거니, 엘레노어?”
엘레노어라고 불린 처녀는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하늘색 눈동자는 무척이나 우울함을 머금고 있었다.
“나가서 춤추지 않을 거야?”
“별로.”
엘레노어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화가 난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니?”
“화 난 거 아니야.”
여자가 엘레노어의 곁에 앉았다.
“그러면 왜 그래? 너도 벌써 스무 살이야. 네 친구들은 벌써 다 아이 엄마가 됐어. 그런데 너만 지금까지 혼인을 못 하고 있잖아.”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엘레노어가 대답했다.
“나는 한스를 좋아하지 않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니?”
“좋아하지 않는데 혼인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잖아.”
“한스는 너를 좋아하잖아.”
“내가 한스를 좋아하지 않아.”
“그러면, 누굴 좋아하는데?”
“…….”
여자의 물음에 엘레노어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릎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엘레노어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여자가 중얼거렸다.
“살다 보면 좋아질 거야. 같이 자고, 애도 낳고 살다 보면. 모두 다 그렇게 사니까 말이야.”
여자가 나간 후 엘레노어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색 눈동자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엘레노어의 부친은 한쪽 다리를 잃고 그 잃은 다리 대신 나무를 끼우고 다녀서 외다리 하인츠라고 불렸다.
몸이 불편한 탓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2년 전에 돌아가신 모친이다.
엘레노어의 모친은 주로 백작가의 하녀로 일했다.
상주하는 하녀가 아니라 아침 일찍 백작가의 저택으로 가서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하녀였다.
백작가에서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하고 약간의 감자, 보리를 받았고 가끔은 백작가에서 먹고 남은 음식들을 싸 가지고 돌아와 엘레노어와 남편에게 먹이고는 했다.
그랬던 모친이 2년 전 죽었다.
이 지방을 휩쓸던 전염병에 걸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모친 대신 엘레노어가 백작가의 하녀로 일했다.
엘레노어도, 그녀의 부친도 농노의 신분이다.
농노는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할뿐더러 영주의 허락 없이는 이 지방을 떠날 수도 없다.
이 나스룩을 다스리는 영주는 하츠펠트 백작이다.
하츠펠트 백작은 지난여름에 낙마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백작의 작위와 나스룩의 영지는 그의 아들인 루드비히 하츠펠트가 물려받았다.
그리고 루드비히 하츠펠트 백작은 아직 수도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6년 전 공부를 하기 위해 수도로 떠났다.
공부를 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실은 쫓겨났다는 것을 이 영지의 모든 농노들도 알고 있다.
전 하츠펠트 백작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
정실부인이 낳은 아들 로웬과 루드비히. 그리고 사창가의 매춘부가 낳은 서자 아드리안.
적자인 로웬은 어렸을 때 말에 떨어진 이후 머리를 다쳐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고 루드비히와 아드리안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다른 소년이었다.
당연히 정실부인은 아드리안을 견제했다.
그래서 정실부인은 6년 전 기어이 아드리안을 수도로 보내버렸다.
물론 루드비히도 함께 수도로 갔지만 루드비히는 매년 여름과 겨울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루드비히는 일 년에 두 번 돌아왔지만 아드리안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건 일종의 추방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자라는 아들은 4년 전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고 그녀도 천연두에 전염이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하츠펠트 백작이 죽으며 이 나스룩 영지와 그 작위는 당연히 차자인 루드비히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엘레노어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루드비히 하츠펠트는 난폭하고 제멋대로였었다.
그는 항상 농노들을 무시하고 때리고는 했었다.
성에서 일하는 하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비하면 아드리안은 상냥한 소년이었다.
엘레노어는 6년 전 어머니를 따라 백작가를 드나들며 아드리안 하츠펠트를 몰래 훔쳐본 적이 있었다.
당시 열일곱 살의 소년이었던 아드리안 하츠펠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소년이었다.
물론 엘레노어는 그 소년에게 말 한마디 걸 수 없었다.
그녀는 천한 농노의 딸이었고 소년은 서자라 할지라도 백작의 아들이었으니까.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건 순전히 엘레노어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
열네 살 소녀가 열일곱 살의 소년을 짝사랑했었다.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백작의 성에 드나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 소년은 항상 엘레노어의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어디를 가던 그 소년이 눈에 들어왔었다.
2년, 어쩌면 3년을 그 소년만 훔쳐봤었다.
그리고 더는 그 성에 그 소년이 머물지 않게 되자 엘레노어도 더는 엄마를 따라 성에 가지 않았다.
엄마가 죽고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그 성의 하녀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짝사랑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차라리 행복했다.
불가능한 것은 알아도 꿈을 꿀 수 있을 때가 행복했었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소년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러나 이제 그 소년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루드비히 하츠펠트는 그의 이복동생을 미워했고 이제 그가 백작이 되었으니 아드리안은 이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돌아올 수 있든 아니든, 그것과 상관없이 이제 꿈은 끝날 시간이 되었다.
짝사랑이 끝나는 시간이다, 지금은.
한스와 결혼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마음으로라도 다른 남자를 짝사랑하는 것은 죄가 된다.
그러니까 이제 오랜 짝사랑을,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마음에 담아두는 짝사랑을 끝내야 한다.
내일이면 한스와 결혼하고 그의 아내가 된다.
한스와 결혼하는 것을 정한 것은 아버지다.
어차피 자신들은 농노다.
농노는 농노들끼리 결혼을 해야 한다.
이 영지를 벗어날 수도 없다.
한스는 꽤 오랫동안 구애를 해왔었다.
한스는 엘레노어보다 열 살 연상이었다.
엘레노어는 그를 싫어했다.
한스 랭햄을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다.
2년 전, 열여덟 살의 봄에 한스 랭햄에게 겁탈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백작가의 성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황무지를 지날 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스에게 강제로 겁탈당할 뻔한 적이 있었지만 발로 그를 마구 걷어차고 겨우 달아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한스는 몇 번이나 그런 일을 저질렀다.
그때마다 운 좋게 달아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달아나지 못한다.
한스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양 여섯 마리와 암소 두 마리를 선물했다.
매년 추수 때에 밀과 보리를 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결국 엘레노어는 양 여섯 마리와 암소 두 마리, 그리고 보리와 밀에 팔려 한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식은 내일이다.
지금 밖에서는 결혼을 축하하는 축제가 한창이지만 그곳에 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달아나고 싶어…….’
달아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달아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영지에서 달아나게 되면 사냥꾼들이 반드시 추격해서 다시 잡아 온다.
농노 사냥꾼들 말이다.
백작가에 속해서 농지에서 달아나는 농노들을 잡아 오는 자들이다.
그들에게서 달아날 수는 없다.
“흑…….”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엘레노어가 어깨를 떨며 흐느꼈다.
서러움이 흐느낌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드레스는 엄마의 것을 약간 수선해서 입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이렇게 한다.
할머니의 드레스를 수선해서 어머니가 입고, 또 그 드레스를 조금 수선해서 그 딸이 입는다.
그리고 그 딸이 결혼식에서 입었던 드레스는 나중에 그녀의 딸이 또 물려받아 입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3대, 길면 6대까지도 드레스를 물려 입는다.
“좀 웃어, 새 신부가 웃지 않으면 다들 흉을 볼 거야.”
엘레노어의 친구인 바네사가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주며 툴툴거렸다.
바네사는 2년 전에 결혼해서 아이가 두 명이다.
이곳에서는 보통 열여덟 살이면 결혼을 해서 누군가의 아내가 된다.
엘레노어는 그런 편에서 늦은 것이다.
“웨딩가터는 어때? 너무 조이지 않지?”
드레스를 들어 올린 바네사가 엘레노어의 허벅지에 묶인 웨딩가터를 확인했다.
웨딩가터는 첫날밤 신랑이 입으로 풀어주는 것이 관습이다.
“표정 좀 풀어. 잡아 먹히는 거 아니잖아.”
“도망치면 안 되는 거지?”
“그렇게 결혼하는 게 싫어?”
“한스 랭햄은 날 겁탈하려고 하던 남자야.”
“널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좋아하면 더더욱 그러지 말아야지.”
엘레노어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 같았다.
“엘레노어.”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바네사가 한숨을 쉬었다.
“정말, 도망치고 싶어?”
“응.”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치다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
“알고 있어.”
“어쩔 수가 없네. 알았어. 그러면 일단 결혼부터 해.”
“그러고 나서?”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남자들이 맥주 파티를 벌이는 건 알고 있지?”
“알고 있어.”
“한스도 분명 잔뜩 취할 테니까, 남자들이 취해 있을 때 도망쳐. 내가 말을 준비해놓을게. 말 타는 법은 알고 있지?”
“말은 잘 타.”
“말을 타고 동쪽으로 가. 도중에 순찰자들을 만나게 되면 사라 부인의 집으로 심부름을 간다고 둘러 대.”
“사라 부인?”
“응. 사라 부인이 지금 병으로 위독해서 그 댁으로 백작가의 심부름을 가는 중이라고 해. 순찰자들이 네 얼굴을 알잖아. 네가 백작가에서 하녀로 일하는 것도 아니까 넘어갈 거야.”
“알겠어.”
바네사가 나간 후 엘레노어가 화관을 머리에 얹었다.
신부의 화관이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다.
화관.
예전에 화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누가 준 것인지는 모르지만 ‘화관’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 성에 따라갔다가 엄마를 기다리던 중에 나무 아래에서 낮잠이 든 적이 있었다.
낮잠에서 깨어나 보니 가슴 위에 화관이 얹어진 채였다.
누가 만든 것인지도 모르고, 누가 주고 간 것인지도 모르지만 무척이나 예쁜 화관이었고 그 화관은 말라서 망가질 때까지 침대 머리맡에 걸어놓았었다.
그때의 화관에 비하면 이 화관은 조금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
‘그래, 도망쳐서…….’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 알지 못하지만 이곳보다는 나을 것이다.
도시로 가면 무슨 일이든 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