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한 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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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한 번 하자
세정은 한 달 전 지훈과 학관 계단에서 맞부딪친 후, 교양 수업에서까지 그와 같은 조가 됐을 때부터 이번 학기가 무언가 순탄치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이렇게 그녀의 뒤통수를 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정은 카페에 앉아 뚫어져라 시간을 확인하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조용히 삭였다. 옛말에 참을 인 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그녀의 팀원들을 목 졸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일모레 발표를 앞두고 마지막 모임이었지만 나온 사람은 그녀를 포함해 딱 두 명뿐이었다. 연락을 위해 만들어 둔 휴대 전화 메신저 단체 대화 창에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내 보았지만 다른 두 명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기다릴 생각이야?”
지훈이 긴 다리를 꼰 채 얼음이 녹아 가는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소리 나게 휘적거렸다. 벌써 20분째,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마주 앉아 마시지도 않는 커피로 장난만 치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피피티 파일이라도 확인해야 해.”
파워포인트는 제게 맡겨 달라며 큰소리쳤던 복학생에게 파일이라도 받아야 했다. 그에게 자료를 모두 전송했지만 오늘까지 완성을 해서 오겠다던 그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세정은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팀 프로젝트의 팀장이자 발표자였다.
거석거석.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아까부터 계속 그녀의 귀에 거슬렸다. 세정은 눈만 들어 그를 쏘아보았다.
“커피를 마시려면 그냥 마셔, 장난치지 말고.”
“싸구려는 입에 안 맞아. 속이 뒤집히거든.”
세정은 기가 찬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시키기는 왜 시켰니?”
“자릿세는 내야 하니까. 무슨 거지도 아니고.”
“…말을 말자.”
그의 말버릇을 모르는 것도 아닐뿐더러 세정은 새삼 지훈에게 화를 낼 여유조차 없었다.
“하아… 진짜….”
세정은 다시금 잠잠한 휴대폰을 노려보며 입술을 씹었다.
지잉.
“어!”
진동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세정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야, 오겠대?”
지훈이 심드렁하게 묻자 세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파일 보냈대.”
복학생에게서 그녀에게 메일이 도착했다. 서둘러 첨부된 파일을 열어 본 세정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확 일그러졌다.
“왜?”
지훈이 그녀가 보고 있는 휴대폰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가 뿌린 향수 냄새가 그녀의 코에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지만 세정에게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이게… 하아….”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해 이를 갈았다.
“와아…. 씨발, 중학생이 만들어도 이것보다 낫겠네.”
지훈이 그녀와 머리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키득거리며 소리 내 웃었다. 세정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꽉 낮아진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렀다.
“넌 지금 이게 웃기니?”
“그러는 넌 이걸 보고도 안 웃겨?”
살짝 위로 올라간 입꼬리를 더욱 위로 올리며 웃는 지훈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에게서 레몬그라스와 머스크 향이 절묘하게 섞인 향이 났다.
세정은 휙 고개를 뒤로 뺐다. 문득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훈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귀띔해 준 태환의 말을 의식하지 않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모두가 잠수를 한 이 와중에 혼자 조별 모임에 나와 준 그가 의아하면서도 조금은 고맙기도 했고, 미소 짓는 그의 모습을 보니 왠지 첫인상과는 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안 웃기냐고.”
씩 웃으며 되묻는 지훈의 목소리에 세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여리고 기다란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였다. 그녀는 그의 체취를 털어 내듯 고개를 흔들고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훈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어디 가?”
“이딴 피피티로 발표할 수는 없잖아. 내가 만들어야지. 그 새끼들 이름 안 올리고 내 이름 혼자만 올릴 거야.”
씩씩거리는 그녀를 보며 지훈이 한가한 포즈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럼 안 될 텐데.”
“…네 이름도 올려 줄게. 어차피 멀쩡한 자료 건네준 건 너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녀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이었다. 어떻게든 무임승차를 하려고 애쓰는 팀원들 사이에서 지훈이 필요한 자료를 세심하게 수집해 주지 않았더라면 세정은 진작 폭발했을 게 분명했다. 인심 쓰듯 입을 여는 세정을 보며 지훈이 혀를 찼다.
“팀플이 좆같은 건 교수가 팀워크도 본다는 점이야, 바보야. 너랑 나 두 명 이름만 올라가면 에이플 못 받아.”
지훈의 말에 세정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화가 나서 이름을 다 빼 버리겠다고 말은 그렇게 뱉었지만 어차피 밤새워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그녀일 테고 프레젠테이션 첫 화면에는 팀원들 모두의 이름이 함께 올라갈 것이다. 갑자기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인생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었다. 학점에 목맬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절박한 처지 탓에 그녀는 이미 약자였다.
“그래. 새삼 알려 줘서 고맙다, 도지훈.”
쓰게 내뱉으며 테이블을 지나치려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세정은 나갈 길이 막혔다.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한 달 전 일이 다시 생각났다. 계단에서 길을 비켜 주지 않던 그의 모습이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
세정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꾸만 그녀의 앞에 얼쩡거리는 지훈의 속내가 궁금했다. 정말로 그는 그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이렇게 서투르게 다가오는 걸까?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나서 세상 편하게 살았을 것 같은 지훈에게도 남이 생각하지 못할 스트레스가 많을지도 모른다. 태환이 한 말을 떠올려 보면 다른 이를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그의 태도가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세정 역시도 그와 틀은 다르지만 그리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는 가정사를 가지고 있었다. 막 살면서 엇나가 버리고 싶은 충동은 수백 번도 더 있었다.
눈앞의 지훈에게 다른 남자들보다 더 호기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와 연애를 할 여유까지는 없었다. 도지훈처럼 저 하고 싶은 것만 다 하고 살기에는 그녀의 삶이 너무 빠듯했다.
“비켜 줘.”
세정이 툭 내뱉었고, 지훈이 그녀의 말을 간단히 무시하며 바깥을 향해 턱짓했다.
“나가자.”
“네가 비켜야 나갈 거 아냐.”
어이가 없어 대꾸하는 세정을 보며 지훈이 대수롭지 않게 다시 말했다.
“나랑 같이 가자고.”
“어디를?”
세정은 여전히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선 지훈을 올려다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집에.”
지훈의 대답은 그녀를 다시금 뜨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눈을 크게 떴고 지훈은 그런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술을 올려 웃었다.
“콜?”
“…내가, 너희 집엘 왜 가는데?”
세정은 화를 내는 대신 마음을 가라앉히며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내가 따로 작업해 놨거든. 그 복학생 새끼, 딱 봐도 얼굴이 올드한데 참신한 파일이 나올 관상이 아니잖아?”
“뭐…?”
“내가 만들었다고.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
으스대듯 말하는 지훈의 표정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너. 그거, 진짜야?”
세정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던 지훈이 고개를 숙이자 그의 얼굴이 쑥, 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세정의 동공이 더욱 커다래졌다. 학교에서는 이미 유명인인 그의 등장에 안 그래도 조그마한 교내 카페에 있던 학생들의 이목이 그들에게로 집중된 상황이었다. 돌출 행동은 그만둬 줬으면 싶었다.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도지훈. 나 진짜 심각해.”
“파일은 집에 있는 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어. 우리 집에 가서 받아 갈래, 아니면 밤새도록 네가 작업할래? 나도 심각하게 물어보는 거야.”
세정은 그를 곁눈으로 응시하며 잠시 동안 심각하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너…. 거짓말이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세정이 또렷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고 지훈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파일 보고 퀄리티에 놀라지나 마라.”
그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으므로 세정은 짧은 망설임을 끝내고 결국 그를 따라나섰다. 이렇게 된 이상 모 아니면 도였다.
그간 지훈이 메일로 보내왔던 자료 수집 능력으로 봤을 때, 그가 소문대로 단지 잔디를 깔아 주고 이 학교에 들어온 것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훈이 정말 따로 작업을 했다면, 그녀는 아르바이트에 피곤한 눈을 비벼 가며 밤을 새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세정은 특히나 파워포인트 작업에 약했다. 그의 파일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이 상황에 한 줄기 빛이었다.
세정은 만일 지훈이 작업한 파일이 만족스러울 정도라면, 발표 수업 리포트에 그의 이름을 제일 처음 올려 주는 인심을 베풀어 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카페를 나섰다.
“어디 가?”
삑.
지훈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큰길 옆에 떡하니 주차되어 있는 컨버터블의 오토 록을 풀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데도 지훈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였다. 세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빠르게 차로 다가갔다.
“Lady first.”
영국식 악센트가 그대로 묻어나는 발음으로 그가 고개를 까딱했다.
“됐어, 치워.”
세정은 그의 손을 탁 밀쳐 내고 차에 오른 후, 문을 쾅 소리가 나게 직접 닫았다. 지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을 삼키고 운전석으로 돌아온 후 시동을 걸었다.
“준비, 됐어?”
잘 빚어 놓은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 세정을 불안하게 만드는 특유의 미소가 떠올랐다. 세정의 눈동자가 슬쩍 가늘어졌다.
“…무슨 준비?”
“나랑 드라이브할 준비 됐냐고.”
지훈이 차 안의 버튼을 조작하자 컨버터블의 뚜껑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끄는 화려한 스포츠카였다.
길 가던 사람들이 안에 누가 탔는지를 확인하는 듯 거리에 멈춰 섰다. 세정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따위는 딱 질색이었다.
“그냥 얌전히 좀 가면 안 되겠… 아, 아악!”
그녀가 안전벨트를 착용한 것을 확인한 지훈이 기어를 바꿔 넣은 것이 시작이었다.
부웅, 하는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그의 컨버터블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대학 병원을 지나는 8차선 도로를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자 세정은 잡을 곳이 없어 그녀가 앉아 있는 가죽 시트를 애처롭게 그러쥐었다.
“야, 야! 도지훈! 속도 줄여!”
“뭐라고?”
“속도 줄이라고!”
“안 들리는데?”
“속도 줄이라고, 너무 빨라! 엄마아!”
엄마를 찾는 세정의 옆에서 지훈이 커다랗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바람이 얼굴을 거침없이 때려 고무줄로 꽉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사정없이 날렸다.
세정은 실눈을 뜨며 그저 전방을 주시했다. 서울 시내를 이렇게 빨리 달려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지훈이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기분 째지네, 씨발!”
“야, 이 싸이코가 진짜!”
“저 씨발 새끼가, 어딜 감히 내 앞에 끼어들어?!”
부웅!
지훈이 기어를 바꿔 넣자 차가 공격적인 엔진음을 내며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내가 저 새끼 추월하는 거 눈 똑바로 뜨고 봐라!”
“야아!”
결국 그의 차가 작은 승용차를 앞질렀고 두 차의 간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봤어? 봤지! 나 끝내주지?”
그녀를 바라보며 소리 내어 크게 웃는 지훈의 옆에서 세정은 얼떨떨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그와 그녀는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
매일 콩나물시루에 빽빽하게 담긴 콩나물처럼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맡기는 삶을 도지훈이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그녀 역시도 대낮에 고급 스포츠카를 타고 광란의 질주를 하며 미친 듯 즐거워하는 도지훈의 심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지훈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세정은 이미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슈퍼 카들이 즐비한 주차장에 단번에 차를 댄 후, 지훈이 그녀를 보고 입술을 씩 올려 웃었다. 그는 카페에서 처음으로 세정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어서 기분이 꽤 좋은 상태였다. 조 모임에 나오지 않은 다른 두 명의 조원들에게 돈이라도 챙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세정을 태우고 달리며 자신의 멋진 모습을 여러모로 보여 주었다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비죽 새어 나왔다.
“봤냐?”
“…또, 뭘?”
“한 방에 집어넣는 거 봤냐고.”
지훈의 말에 세정이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주차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세정은 그를 무시하고 차 문을 열었다. 땅을 무사히 밟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너희 집이 어디야?”
세정은 빨리 용건을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훈이 그런 그녀의 옆에서 기분이 좋아져 키득 웃었다.
“보채기는.”
그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이더니 주차장에서 단지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고 선 채로 그가 그녀를 불렀다.
“안세정.”
“말해.”
세정이 몹시도 피곤한 어투로 대꾸하자 지훈이 잠시 망설이다가 툭, 말을 뱉었다.
“나 집에 여자 데려가는 거 처음이다.”
세정이 눈을 느리게 뜨며 그를 보았다.
“…누가 물어봤니?”
“알아 두라고.”
“안 궁금해.”
세정은 일부러 그를 밀어내듯 딱 잘라 말했다. 만에 하나 지훈이 그녀에게 진심이라면 다가올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쌀쌀맞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세정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사실 세정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아까의 미친 질주가 잊히지가 않았다.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정은 고개를 휙 돌려 지훈을 사납게 째려보았다.
“너는 서울 시내가 레이싱 트랙인 줄 알아?”
“저런 차를 타고 60킬로 밟는 건 내 애마에 대한 모독이야.”
“스피드를 즐기고 싶으면 너 혼자 해. 옆에 있는 사람 심장 떨어지게 하지 말고.”
지훈이 그녀를 바라보며 한 발짝 다가서서 물었다.
“왜. 무서웠어, 설마?”
“뭐?”
“무서웠냐고. 아까 엄마 찾으면서 앙앙거릴 때 말이야.”
세정이 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딱 다물었다. 지훈이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피식 웃었다.
“안세정이 무서워하는 것도 있네. 아무것도 겁 안 낼 것같이 굴면서.”
띵.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지훈이 앞장섰고 뒤따라 들어간 세정은 널찍하게 거리를 두고 섰다. 그가 꼭대기 층을 톡, 가볍게 터치한 후 엘리베이터 벽에 등을 기대고 삐딱하게 섰다.
얼굴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세정이 고개를 돌렸다. 지훈이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또 왜?”
세정이 그를 바라보며 시비를 걸듯 물었다.
“뭐가 왜야.”
“왜 보냐고.”
“네가 거기 있으니까 보지.”
지훈이 가까이 다가온 것도 아닌데 세정은 왠지 모르게 긴장하는 자신을 느끼고 헛기침을 했다.
“됐으니까 그렇게 좀 보지 마.”
“그럼 네가 내 눈앞에 띄지 마.”
가느다랗게 속삭이는 그의 말투에 신경이 잔뜩 곤두섰다. 세정은 그를 노려보며 탄식하듯 내뱉었다.
“넌 어쩌면 그렇게 말을 재수 없게 해?”
“재수 있게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그걸 가르쳐 줘야 아니?”
“어. 네가 좀 가르쳐 줘 봐. 너 가르치는 거 잘하잖아. 과외 많이 한다며.”
“너 같은 학생은 딱 사절이거든?”
지훈이 다시 피식거렸고 세정은 그에게서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꼭대기 층이 눌러진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바뀌는 속도가 왠지 느리게 느껴졌다.
“안세정.”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무시했다. 지훈이 다시 말을 길게 늘이며 그녀를 불렀다.
“안세저엉.”
“속 뒤집어 놓는 소리 할 거면 그냥 입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마.”
“너 머리카락 다 삐져나와서 엉망진창이다.”
세정은 그제야 아까의 질주 탓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다시 묶으며 퉁명스레 답했다.
“그러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야하니까.”
세정이 입에 문 머리 끈을 팔목에 끼워 머리카락을 돌리다 말고 그를 보았다.
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지훈이 그녀를 보며 정확히 내뱉었다.
“그렇게 사람 흘겨보지도 마. 존나 꼴리니까.”
“야, 도지훈!”
세정이 소리를 빽 지름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지훈이 엘리베이터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따라오지 않는 그녀를 인식하고 그가 몸을 돌려 선 후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해? 나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오지 않는 세정을 그가 재촉했다.
“거기서 평생 있을 거야?”
지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정은 그런 그를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설마 내가 겁나? 무서워?”
지훈이 삐딱하게 그녀를 보며 한쪽 입술을 올려 웃었다. 세정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웃기시네.”
세정은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열고 성큼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제 쪽으로 내밀어진 그의 손을 잡는 대신 커다란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나가는 건 내 맘이거든?”
“까다롭기는.”
세정은 피식거리며 웃는 지훈에게 지기가 싫었다. 세상이 제 발밑 아래 있는 듯이 구는 오만한 녀석에게 겁먹은 티를 내는 것은 아까 차 안에서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와서 돌아간다면 지훈이 커다랗게 소리 내어 그녀를 비웃을 것만 같았다.
삑. 삑. 삑. 삑.
“공, 삼, 공, 일.”
지훈이 비밀번호를 소리 내어 말하며 눌렀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잠금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지훈이 말한 숫자를 들은 세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3월 1일은 세정의 생일이었다. 설마 그냥 생각 없이 쓴 비밀번호겠지. 그가 좋아하는 여자의 생일로 집 비밀번호를 설정할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을 멈춘 후 그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파트 정문을 들어설 때 이미 짐작했지만 맨션의 내부는 고급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초호화였다. 일직선이 아니라 둥그렇게 벽면을 둘러싼 창문을 통해 탁 트인 한강과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였다.
넓은 거실 중앙에 가구라고는 커다란 침대와 그 옆에 깔끔히 정리된 책상이 다였다. 지훈은 거실을 제 방처럼 쓰고 있는 듯했다.
“뭐 마실래?”
“…물 있으면.”
아까 차를 타고 하도 소리를 질러 댄 탓에 세정은 목이 말랐다. 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꺼내 든 지훈이 장식장에서 컵을 꺼내 물을 따라 주었다.
“여기.”
“…고마워.”
물컵을 받아 드는데 그와 손가락이 스쳤다. 순간 지훈이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세정은 다시 이상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그의 시선을 피했다.
또다시 온몸에 달라붙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기분이 나빴지만 지훈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걸 전해 들은 지금은 이상하게 괜히 긴장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둘만 있는 상황은 확실히 불편했다. 그녀는 물을 반쯤 마시고 급한 갈증을 해소한 뒤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일단 파일부터 줘.”
“무슨 파일?”
지훈이 특유의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한쪽 입술을 위로 올렸다. 세정은 문득 불안한 예감을 느꼈다. 싫다. 이런 기분.
물잔을 꽉 쥔 그녀의 손이 조금 떨렸다.
“장난하지 말고. 피피티 파일 네 노트북에 저장돼 있다며.”
“그딴 게 있을 리가 없잖아.”
“뭐?”
세정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학점 2점짜리 교양 수업에 내가 미쳤냐. 그걸 준비하고 앉았게.”
“야!”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미처 생각할 새도 없이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세정은 들고 있던 컵에 남아 있던 차가운 물을 그의 얼굴에 끼얹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지훈의 미끈한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가 제 입술을 깨물며 키득거렸다.
“아까부터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은 거 어떻게 알고 식혀 주는 거야?”
“너, 뭐야? 너 대체 무슨 수작이야?”
세정이 분노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어깨가 분노에 들썩였다.
“말 그대로, 너한테 수작 부리는 중이야.”
“뭐, 뭐?”
“근데 넌 화내는 것도 사람 미치게 한다. 여러 가지로 돌겠네, 진짜.”
지훈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지그시 인상을 썼다. 짙은 눈썹이 미간에 모였다. 세정은 그를 향해 쓰게 중얼거렸다.
“…정신 나간 새끼.”
처음부터 그의 말을 믿은 그녀가 바보였다. 개차반인 그의 인성을 알고도 속은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멍청한 스스로에게 자괴감마저 들었다. 세정은 물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후 가방끈을 꽉 쥐고 현관으로 향했다.
“안세정.”
그가 슬리퍼를 끌고 걸어왔다. 세정은 다리가 긴 그에게 금방 따라잡혔다. 어느새 문 앞에 도달한 지훈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가로막았다.
“어디 가?”
“저리 안 꺼져?”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너 진짜 최악이다, 도지훈. 최악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야.”
그녀가 그를 노려보며 내뱉자 지훈의 얼굴에서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러니까 왜 날 거절해. 처음부터 네가 날 받아들였으면 편했잖아.”
날카롭게 내뱉는 그를 바라보는 세정의 동그란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헛소리니?”
그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아까 그녀가 끼얹은 알프스산 생수가 뚝뚝 흘러 남자치고 기다란 속눈썹을 타고 흘렀다. 지훈이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에 달려 있던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가 무섭게 인상을 썼다.
“같이 밥 먹자고 했는데 네가 쌩을 깠잖아, 날.”
“너, 너…. 설마, 그때 나한테 부딪쳤을 때 이야기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부딪친 거야. 난 똑바로 가고 있었어. 넌 어떤 새끼랑 전화하는지 정신 팔려 있었잖아.”
세정은 기가 막혀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참자. 그래, 참는 거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다.
여기서 그와 이러고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내일은 하루 종일 강의가 꽉 차 있었고 오후에는 두 시간짜리 과외까지 예약되어 있었다. 그녀가 모레 오전에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려면 오늘 밤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도지훈, 너 내 말 똑바로 들어.”
“해 봐.”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중얼거렸다. 세정은 그를 지지 않고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는 건데 나, 지금 너랑 이러고 있을 시간 없거든? 그러니까 말로 할 때 좀 비켜 줘.”
“누군 시간이 남아돌아서 이러는 줄 알아, 씨발?”
“무식하게 욕하지 마.”
험한 말을 내뱉는 그를 향해 세정이 싸늘하게 쏘아붙이자 지훈이 하, 하고 탁 풀린 한숨을 뱉어 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에 이글이글 위험한 빛이 돌았다. 세정은 그를 향해 달아오른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인생이 좀 너무 한가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르겠는데, 난 아니거든? 너한테는 학점 고작 2점짜리 교양 수업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냐.”
“장학금 놓칠까 봐서 그래?”
그녀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입학 이후 성적 우수 장학금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기보다 자랑스러운 일이 틀림없었다.
세정은 그러기 위해서 코피가 터질 정도로 공부를 하고 과제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는 조소에 가까웠다.
“돈이라면 내가 줄 수도 있어.”
“네가 왜?”
세정의 눈에 꾹꾹 눌러 참았던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도지훈은 그녀의 절박함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새삼 억울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형태로 실재한다면 산산조각이 나서 바닥에 부서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날카롭게 소리를 높였다.
“네가 왜 나한테 돈을 주는데? 넌 돈이 썩어 나니?”
가늘어진 목소리의 끝이 엉망으로 떨렸다.
“뭐, 그렇기도 하고, 내가 그러고 싶기도 해. 네가 비실비실한 몸으로 아등바등 사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녀를 바라보며 내뱉는 지훈의 말투는 지독하게 단조로웠다. 그녀의 자존심을 후려쳐 바닥에 깨뜨린 것도 모자라서 자근자근 짓밟는 그의 잔인함이 징그러울 정도였다.
“내가 힘들까 봐 걱정해 주는 거라고?”
세정은 그의 뺨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야 내 맘을 좀 알겠냐?”
“하하.”
작게 소리 내어 비웃는 그녀의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은 뜨끈뜨끈 김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심장에서 온몸으로 내뿜어지는 피가 분노를 실어 전달했다. 지훈은 그런 그녀의 불길에 기름을 부으려고 작정한 사람같이 굴었다.
“그냥 내 손 잡으면 모든 게 다 편해지는데, 뭘 그렇게 어렵게 살아.”
“…….”
“나한테 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준다잖아. 인생 편하게 사는 법 가르쳐 준다고. 내가.”
“지훈아.”
세정이 꽉 다문 잇새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너 올해 몇 살이지?”
세정의 물음에 지훈이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너보다 한 살 적은 게 신경 쓰여? 머리가 좋아서 학교를 좀 일찍 갔잖아, 내가. 신체 조건이 워낙에 탈대한민국이라 잘 믿기진 않겠지만.”
지훈이 양손을 옆으로 뻗으며 오만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나는 정말 네 나이를 믿을 수가 없다.”
“너만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냐. 다들 그래.”
세정은 자랑스럽게 내뱉는 그를 보며 간신히 입술을 끌어 올렸다.
“몸만 커다랗게 자라면 뭐 하니? 정신 연령이 유치원생인데.”
“뭐?”
세정은 그의 짙은 눈썹이 미간에 모여드는 것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분노를 입 밖으로 꺼내 뱉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죽겠으면, 그냥 데이트 신청을 해, 이 개자식아.”
지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졌다. 흠잡을 곳 없이 미끈한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세정은 그녀의 불안한 예감이 딱 맞아떨어졌음을 느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일부러 부딪치고, 되지도 않는 거짓말로 남 속여서 집까지 끌어들이고, 음침하게 아파트 비밀번호를 남의 생일로 설정하는 스토커 같은 짓 하지 말고, 남자답게 데이트 신청을 하라고. 난 차라리 솔직하게 들이대는 사람이 내 타입이니까.”
얼굴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한 지훈이 그녀를 보며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하아. 씨발…. 와, 너… 진짜….”
“왜? 정곡을 찔리니까 할 말이 없니?”
세정이 그를 비웃자 지훈이 커다란 손으로 젖은 얼굴을 한 번 쓸었다. 그러고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향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거 하면 될 거 아냐.”
“뭘?”
“…그, 데이트라는 거. 하자고, 씨발.”
마치 사약을 마시는 것 같은 얼굴로 말하는 지훈의 표정이 웃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그의 어깨를 툭, 가방으로 세게 쳤다.
“늦었어, 이 멍청아.”
힘이 빠진 그를 밀치고 현관문을 열려는 순간 그녀의 허리에 커다란 손이 휘감겼다.
“안세정.”
세정의 심장이 터질 듯 빠르게 쿵쿵거렸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지훈은 한 손으로는 세정의 몸을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꽉 붙들어 그를 보게 만들었다.
“당장 이거 못 놔?”
눈을 치켜뜨는 세정을 보며 지훈이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데이트하자고 했잖아.”
“그래. 난 싫다고 했고.”
“넌 모르겠지만 난 인생에서 거절당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어.”
세정이 코웃음 치며 되받았다.
“아, 그러니? 난 거절해 본 적 많아서 별 느낌이 없거든? 그러니까 빨리 놔.”
“누굴 붙잡아 본 적도 처음이야. 사람 짓밟지 말고 그냥 예스 해.”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를 궤변을 지껄이는 지훈의 시선이 세정을 꽉 붙들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아직도 솜털이 보송한 그녀의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 놔.”
“너, 솔직하게 말하는 남자가 타입이라고 했지.”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럴까.
“안세정.”
세정은 다시금 슬금슬금 몸을 잠식하는 불안한 예감에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사포에 잔뜩 긁힌 것 같은 목소리를 배 속에서부터 끌어 올리듯 끄집어냈다.
“데이트가 싫으면 나랑 섹스 한 번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