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나 도지훈이야
본문
01. 나 도지훈이야
블라인드가 쳐진 회의실을 나와 사색이 된 그녀와 박 부장이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직원들이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죽여 질문을 퍼부었다.
“어때요? 완전 꼰대 스타일? 역시나?”
“젊다고 하던데요? 김 대리님이 아까 외근 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는데, 처음에 못 알아보고 우리 촬영하는 모델인 줄 알았대요.”
“안 차장님이랑 같은 대학 동기라고 자기소개 했다던데, 그럼 학벌도 끝내주는 거 아냐?”
“제가 듣기로는 아이비리그 졸업했다고 하던데요? 헛소문이었나? 차장님. 진짜 그 이사랑 동기 맞아요?”
차마 대꾸도 하지 못하고 인상을 굳힌 채 자리에 서 있는 세정의 곁에서 박 부장이 목소리를 죽여 그들을 나무랐다.
“야, 야. 다들 자리로 돌아가서 일들 안 해? 피드백 받은 거 보고서 작성 끝났어? 이메일 발송했어? 오후에 있는 촬영 콘티 제작팀한테 받았고? 광고주한테 단단히 밉보이고 싶어서 작정한 거지 아주, 어?”
그의 분노 섞인 핀잔에 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뿔뿔이 제자리로 흩어졌다.
“안 차장도 스케줄 정리하고.”
박 부장이 무겁게 한숨을 쉬며 마치 격려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훈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 세정이 지훈과는 그저 대학 동창일 뿐이었다고 어렵게 입을 열자 박 부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그는 세정의 복잡한 얼굴을 보며 ‘너나 나나 월급쟁이니까 최대한 회사 내에서 문제는 없도록 노력해 보자.’라고 염려 섞인 한마디를 했을 뿐이다.
“오늘 촬영, 내가 갈 테니까 그냥 안 차장은 사무실에 남을래?”
광고의 촬영은 제작팀이 주관하는 것이었지만 N사에서의 첫 광고이니만큼 프로젝트를 주관한 차장급이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 부장 딴에는 혼란스러운 그녀를 배려한 한마디였지만 세정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겠습니다. 부장님은 다른 일도 많으신데요.”
개인사를 회사 일에 끌어들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지훈의 등장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그녀는 프로였다.
대학 졸업 후,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를 생각하면 회사 동료나 상사, 부하 직원에게 흠이 잡힐 일은 그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피하고 싶었다.
“그래. 그럼 이따가 바로 스튜디오로 출발하고 상황 보고하지.”
“네. 알겠습니다.”
대답을 마치고 잠시 화장실로 자리를 피한 세정은 화장실 변기에 주저앉아 머리를 꽉 붙잡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그와의 마지막 날을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흘러갔지만 세정은 그를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상대는 강렬했고, 첫 연애는 그들의 혈기만큼이나 뜨거웠다.
지훈과의 불같았던 연애가 그녀의 마음속을 까맣게 태우고 지나가 버린 탓에 지난 6년간 그 안에 다른 누구를 들일 수도 없었다.
주변의 성화에 남자를 만나 보려고 노력을 한 적도 있었지만 허사였다. 회사를 떠나 사적인 자리에서 누구와 마주 앉아만 있어도 지훈이 떠오르는 것은 그녀 스스로가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세정은 그를 잊기 위해서 더욱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매달렸고, 그 대상은 일이었다. 그녀는 쉴 틈 없이 달리고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었다. 결과는 그녀에게 확실한 보상을 주었다. 회사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았고 그 결과 그녀는 더욱 바빠졌다.
몸은 힘들었지만 오히려 과거를 돌아볼 틈이 없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느닷없이 지훈을 맞닥뜨리는 것은 그녀가 전혀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과거, 그녀는 그를 사랑했음에도 모진 말로 지훈을 떠나보내야 했다. 여러 사정 때문에 이별을 통보해야만 했던 그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세정은 똑같은 상대와 다시 사랑에 빠져 버릴까 두려웠다. 그 끝이 빤히 보이는 것 같아서 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서웠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안세정.’
화장실에서 나와 손을 오래도록 씻은 후, 세정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일단 눈앞에 있는 일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녀는 머릿속에서 지훈과 관련한 모든 것을 마치 쓰레기봉투에 집어넣듯 몽땅 집어넣고 입구를 꽉 묶어 버렸다.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손쓸 수 없이 복잡해질 것이 뻔했다.
그는 그녀를 쥐고 흔드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아득해진 예전부터 늘 그러했다.
***
7년 전. 봄.
학교 앞 인쇄소에서 잔뜩 프린트한 종이 묶음은 꽤 무거웠다. 세정은 팔에 힘을 꽉 주며 강의실 건물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교양 수업이 있는 법학관 건물은 하필이면 캠퍼스 내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그녀의 동그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혀 주려는 듯 봄바람이 살랑 불었다. 끝도 없이 늘어진 계단 옆에 주르륵 심긴 벚나무에서 벚꽃이 바람을 타고 우수수 날렸다. 나무 사이를 비집은 햇살과 꽃잎이 마치 한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구르며 빛났다.
벚꽃이 만개하다 못해 떨어져 펄펄 날리는 4월 초였다. 세정이 열심히 걷고 있는 계단은 사진을 찍기에 최적의 장소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강의를 위해 이동하는 그녀에게는 그저 경사가 높아 고된 산행 길일 뿐이었다.
“아, 그으래? 엄마가 아프시다고?”
그 와중에 그녀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여고생 민정이 집안에 일이 생겼다며 과외를 미룰 수 있겠냐는 전화를 걸어왔다. 세정은 한 손으로는 200페이지가 넘는 프린트물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든 채 부지런히 계단을 올랐다.
“엄마한테 내가 전화 한 통 드려 봐야겠네. 병원에 가실 정도로 큰일이시면.”
혹시나 해서 던져 봤지만 역시나였다. 민정은 다급하게 ‘안 돼요, 선생님!’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정은 한숨 섞인 웃음을 숨기며 짐짓 엄한 목소리를 냈다.
“너희 어머니, 아버지랑 필드 가신다고 벌써 한 달 전쯤 이야기 들었거든? 친구랑 약속이 있으면 과외 시간 전까지 끝을 내든지 아니면 과외 끝나고 놀러를 …아!”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는 바람에 세정은 안고 있던 프린트물을 놓치고 말았다. 땅바닥에 구르는 벚꽃 잎들과 함께 빼곡하게 인쇄된 A4 용지들이 휘리릭 소리를 내며 바람에 날아갔다.
“아, 죄송합니다.”
세정은 서둘러 전화를 끊고 바닥에 주저앉아 계단 아래로 허망하게 날아가는 종이들을 애써 그러모았다.
페이지 순서대로 정리를 해서 나중에 필요한 단락만 따로 철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순서는 뒤죽박죽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등줄기에 땀이 솟았다.
“여기.”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충돌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계단 위쪽으로 날아간 종이 몇 장을 주워 들고 그녀에게 내밀고 있었다. 햇살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지만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세정은 잠시 굳은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필요 없나 봐?”
같은 과 동기인 도지훈이었다. 그가 한쪽 입술을 위로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는 웬일로 근처에 늘 함께 다니던 친구들은 보이지 않고 혼자였다. 그녀는 도지훈에게서 인쇄물을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그녀의 거친 손길에 지훈이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근데 너, 책 카피하는 거 저작권 위반인 거 모르냐?”
노란 파스텔 톤의 니트 위에 드러난 세정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교수가 강의 시간에 지나치듯 이야기한 서적이었다.
도서관에서 대출 신청은 이미 밀려 있었고 시험은 바로 다음 주였다. 그녀만큼이나 성적에 신경을 쓰는 친구에게 어렵게 부탁을 해서 몇 시간 동안 책을 빌렸지만 두꺼운 서적을 다 보기에는 시간이 한참이나 모자랐다.
“그건 내 사정이고, 넌 일단 사람한테 부딪쳤으면 사과부터 하는 게 먼저 아냐?”
세정이 눈을 똑바로 뜨며 그를 올려다보자 지훈이 계단 위에서 조소했다.
“네가 나한테 먼저 부딪쳤어. 운전할 때나 걸을 때나 전방을 보는 건 기본이야. 몰라?”
세정은 그와 직접 말을 섞는 것이 처음이었지만 그의 성격이 퍽이나 더럽다는 사실은 같은 과 내에서 이미 유명했다.
“그러는 넌 앞이 안 보였니?”
세정이 날카로운 말투로 받아치자 그의 눈썹이 찌릿하며 위로 휘었다.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웃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입꼬리를 위로 올렸을 뿐이었다. 길게 찢어진 그의 눈매에 박힌 시커먼 눈동자는 그녀를 잡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냐?”
다시 봐도 정말이지 재수 없는 태도였다.
국내 유수 재벌 기업의 막내아들이라는 그의 입지는 대학 내에서도 무성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학교에 잔디를 깔아 주고 입학했다는 고전적인 소문부터 용돈이 필요할 때는 집에 있는 도자기 안에 꽉 차 있는 현금을 뭉텅이로 빼 쓴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까지 다양했다.
그 근본 없는 소문들에 힘을 실어 주는 것은 개차반이라고 불리는 그의 인성이었다. 지훈은 누가 그에게 말을 걸어도 제 쪽에서 용건이 없으면 상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졸지에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해 불쾌해진 상대가 그를 붙잡고 화를 내면 입에 담기조차 험한 욕설을 지껄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 탓에 캠퍼스 안에서 주먹다짐이 일어난 경우도 몇 번 있었다. 지훈의 언어폭력을 견디지 못해 상대가 선제공격을 날리면 지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상대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호리호리하고 길쭉한 체격의 그였지만 영국 유학 시절에 운동을 꽤 오래 했다는 말을 뒷받침하듯 그의 주먹은 그의 입버릇만큼이나 세고 더러웠다.
경찰서까지 가서도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지훈이 아닌 상대방이었다. 먼저 그를 쳤다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변호사부터 부르며 상대를 암묵적으로 협박하는데 그에게 쉽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지훈의 주변에는 늘 그와 비슷한 수준의 부류들이 가득했다. 학교의 학생들은 도지훈과 그들의 패거리를 재수 없다고 욕하면서도 동시에 부러워했다.
그리고 세정은 대학교씩이나 와서 떼로 몰려다니며 암묵적인 권력 자랑을 하는 그들이 무척이나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전방 주시 운운하는 넌 앞이 안 보였냐고. 피차 쌍방 과실 아냐?”
세정은 그에게 주눅 들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더 험하게 인상을 썼다.
치고 싶으면 치라지. 처음부터 그녀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서울 것도 없었다. 아니, 사실 세정은 이전부터 도지훈이 거슬렸다.
처음에는 그녀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면 눈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가 있었다.
그들은 대학 입학 이후 1년이 넘은 지금까지 말 한마디 섞어 보지 않은 사이였다. 같은 학과라고 하지만 같은 연도에 입학한 동기들은 60명이 넘었다.
그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비롯한 모든 학과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지훈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도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딱히 도지훈이 그녀에게 볼일이 있을 사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안세정.”
“…왜?”
세정은 그의 입에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낯설었다. 지훈이 그녀를 보며 툭, 내뱉듯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뭐?”
세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되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냐고.”
이것은 확실한 시비였다. 자발적인 아웃사이더로 지낸 탓에 그녀는 그의 기분을 거스를 일을 할 만한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지훈은 그녀만 보면 꼭 기분 나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작년 겨울부터 그의 노려보는 시선을 의식했는데, 그것은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 더욱 심해졌다.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공격성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바보였다.
게다가 이번 학기부터 수업은 또 어찌나 겹치는지 몰랐다. 필수로 들어야 하는 전공뿐만이 아니었다. 교양 수업으로 들어간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제 친구들을 양옆에 끼고 앉은 도지훈을 발견했을 때, 세정의 이유 모를 불쾌함과 불안함은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오늘 그와 결국 이렇게 부딪힌 것이다. 그녀는 얼굴에 비웃음을 장착한 후 그에게 물었다.
“네가 누군지 알면, 뭐가 어떻게 바뀌기라도 해?”
“나 도지훈이야.”
자신의 이름 석 자가 명함이라도 되는 듯한 태도였다. 세정은 그를 보며 인상을 썼다.
“그래서?”
“난 껍데기만 완벽한 게 아니라 내구성도 좋아. 내 눈은 잘나게 생기기도 했지만 시력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소리야. 유전자가 톱클래스니까.”
세정의 눈동자가 뜨악해서 커졌다.
“하아….”
그녀는 헛웃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의 태도는 둘째 치고, 소름 끼칠 정도로 부끄러운 말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뱉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세정은 빠른 순간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선 녀석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결론이었다.
시비를 걸면 받아 줄 생각이었지만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뿐이다. 그녀는 떨떠름한 얼굴을 감추며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도지훈. 너 나한테 사과할 생각 없지?”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응. 그럼 됐으니까 그냥 가던 길 가.”
세정이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다시 한번 속으로 되뇌며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지훈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세정은 인상을 찌푸리며 턱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밥 사 줄 테니까 따라와.”
“…미쳤니?”
너무나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세정은 진심으로 그의 머릿속 세계를 의심했다.
“그 사과라는 거, 한다고 내가. 대체 뭘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쁜 듯 중얼거리는 지훈을 앞에 두고 세정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말을 정리하자면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하는 대신 차라리 밥을 사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됐거든?”
세정은 그를 힐끗 노려보고 이미 책으로 꽉 찬 가방을 고쳐 멨다. 이제껏 그를 상대한 이들이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왜 그를 상종 못 할 종자라고 혀를 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지훈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안세정.”
재빨리 그의 옆을 지나치며 계단을 오르는데 뒤에서 심기가 불편한 듯 바짝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지금 내 말 안 끝났는데 어디 가냐?”
상전같이 구는 그의 태도가 진심으로 우스워져 세정이 하, 하고 소리 내어 그를 비웃었다. 그러고는 휙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계단의 폭이 좁았지만 그래도 두 칸이나 올라갔는데도 그와 키가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 분했다.
이마를 드러내고 바짝 당겨 정수리 위까지 높게 묶은 그녀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렸다.
“기본이 안 돼 있는 사람이랑 할 말 없으니까 내 시간 낭비 그만하고 너도 네 갈 길 가.”
도지훈이 무슨 이유 때문에 그녀에게 자꾸 시비를 거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세정은 그와 의미 없는 말다툼을 하며 길에서 쓸데없이 버릴 시간이 없었다.
“기본?”
지훈이 다시금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이 그녀를 한 대 칠 기세로 바라보았다. 세정은 두렵지 않았다. 여기는 대학 캠퍼스이고 이미 계단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그들의 충돌을 힐끔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직 그에게 맞았다는 여자는 들어 본 적 없지만 그 처음이 그녀가 되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만약 정말로 한 대 맞으면 난리를 피워 합의금으로 거하게 뜯어내면 될 것이다. 세정은 한심하다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설교하는 사람처럼 차분한 말투를 냈다.
“네가 모르는 것 같으니까 내가 가르쳐 줄게.”
“뭘.”
“사과의 기본은 미안합니다, 한마디야. 유치원에서 안 배웠니?”
다분히 조소가 섞인 그녀의 비웃음에 지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너 나한테 그딴 식으로 하면 나중에 후회 단단히 할 것 같은데.”
“후회?”
이번에는 세정이 되물었다. 지훈이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래. 눈물 콧물 질질 흘리면서 봐 달라고 싹싹 빌어도 소용없다.”
마치 어린아이가 협박하는 것 같은 말투에 세정은 헛웃음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미친놈.”
세정이 손에 들고 있는 휴대폰이 다시 울었다. 전화가 갑자기 끊겨서 당황했을 과외 학생이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걱정은 사서 안 해도 돼.”
세정은 그가 뭐라고 답할 새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응, 미안. 선생님이 개똥을 좀 밟아서.”
그리고 그를 지나쳐 빠르게 통통거리듯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지훈은 고개를 휙 돌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양옆으로 흔들리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마치 그를 놀리는 것처럼 발랄했다.
부시럭.
“도지훈이 순식간에 개똥 신세 됐네.”
“야, 이 씨발 새끼야.”
조금 떨어진 벤치 뒤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며 너스레를 떠는 김태환에게 지훈이 날카로운 욕설을 던졌다. 태환이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밥만 사겠다고 말하라고 했지, 쓸데없는 말 하라고 했냐?”
“내가 뭔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는데.”
지훈이 인상을 쓰며 으르렁거렸다.
“전공 서적 카피 이야기는 대체 거기서 왜 튀어나와?”
“쓸데없는 짓 하고 있길래 저녁 먹으면서 선물로 전공책을 주려고 했어. 그러면 내 배려심에 감동을 받아서 눈물을 흘려야 정상 아닌가?”
태환이 심각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지훈아. 나는 매번 생각하지만 그냥 네가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내 옆에 붙어 있는 너도 비정상이란 소리야?”
지훈의 날카로운 대꾸에 할 말이 없어진 태환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내가 첫 만남에 가장 좋은 장소까지 딱 섭외해 줬으면 그 기회를 잡았어야지 어떻게 그렇게 날려 버리냐. 아아, 진짜 답답하다. 천하의 도지훈이 개똥 취급이나 당하고.”
“씨발, 널 믿은 내가 등신이지.”
“와, 진짜 억울하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태환이 그를 위해 준비한 각본은 실로 완벽했다.
여자와 우연히 부딪힌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워 건넨다. 쏟아지는 벚꽃 비를 맞으며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이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는 로맨틱한 영화 같은 만남이었지만 태환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아무리 감독과 각본이 좋으면 무얼 할까. 연기하는 배우가 도지훈인데.
지훈은 제 잘못도 모르고 잔뜩 열이 받은 표정으로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계단을 뛰듯이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태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런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내가 대체 뭘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투야말로 뭔데, 대체?”
태환이 이죽거리며 그를 흉내 내자 지훈이 가로로 길게 찢어진 눈을 부릅떴다.
“사실이야. 내가 뭘 사과해야 해? 먼저 날 신경 쓰이게 한 건 안세정이야.”
오히려 화를 내는 지훈을 보며 태환이 혀를 쯧쯧 찼다.
“진짜 몇 번이나 튀어 나가서 네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내가 얼마나 간신히 참았는지 아냐? 넌 무슨 자기소개를 그따위로 하냐고.”
태환은 세정이 느꼈을 뜨악함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나 도지훈이야’, ‘난 껍데기만 완벽한 게 아니라 내구성도 좋아. 내 눈은 잘나게 생기기도 했지만 시력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소리야. 유전자가 톱클래스니까.’라니. 대사 하나하나가 너무나 주옥같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이 들었다.
“잘난 남자 거부할 여자 없다고 말한 건 너야.”
태환은 배신감에 치를 떠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지훈을 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매력 어필을 하라고 조언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지훈이 그 정도로 서툴게 굴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밥 사 줄 테니까 따라와’라니 그건 또 뭐고. 그때 네 표정 어땠는지 알아? 안 따라오면 죽이겠다는 얼굴이었거든?”
지훈이 그를 휙 돌아보며 욕설을 지껄였다.
“그럼 뭐라고 했어야 했는지 네가 한번 말해 봐, 이 개새끼야.”
태환은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아래로 깔렸다.
“세정아.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혹시 저녁에 시간 있어? 같이 식사라도 할래? 이렇게 좀 젠틀하게 말할 수는 없었냐?”
그가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지훈이 들을 것도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토 쏠리니까 닥쳐. 내가 미쳤지. 너같이 덜떨어진 새끼를 믿고 하라는 대로 한 것부터가 실수야.”
임직원이 사용하는 주차장 한가운데에 떡하니 주차되어 있는 고급 컨버터블의 문이 열렸다. 태환이 잽싸게 조수석에 타며 그를 불렀다.
“도지훈.”
“왜.”
“안세정 정도 생긴 애라면 내가 한 스무 명 정도 쫙 대기하고 있는 곳 아는데. 갈래?”
“아가리 찢어 버린다. 몸 파는 년들이랑 걔를 어디다 비교해, 씨발.”
그가 진심으로 눈을 부라리는 것을 보며 태환은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었다. 엔진 소리를 내며 파란색 스포츠카가 캠퍼스 안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지훈은 단단히 화가 난 듯했다. 벼르고 별러 왔던 첫 만남이 이런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해를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여자라면 학을 떼는 도지훈이 어쩌다 청승맞기 그지없는 안세정에게 빠진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외모와 조건이 완벽한 지훈이 손만 뻗으면 모델급으로 생긴 절세미인들이 아마 줄을 설 것이다. 성격이 많이 더러운 것이 흠이었지만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훈아.”
“왜.”
그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태환은 진심으로 궁금했다.
“너 안세정이 왜 좋냐?”
“내가 언제 걜 좋아한다고 했어?”
지훈이 큰길에 진입하자마자 차의 속도를 빠르게 올렸다. 동요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태환은 분노의 질주를 하기 시작한 지훈에게 되물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뭔데, 그게?”
지훈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가지고 싶은 거다, 씹새끼야!”
그다운 대답이었다. 태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안세정은 지훈과는 상극이었다.
안세정은 신입생 때부터 예쁘장한 얼굴로 학과 남자들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녀 본인은 그 사실을 귀찮아하거나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태환이 사랑에 빠진 그의 친구 덕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살펴본 결과 안세정은 남자가 다가갈라치면 철벽을 치며 쌩하게 도망쳐 버렸다.
그 와중에 세정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학점으로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매 학기마다 성적 우수자에게 돌아가는 장학금이었다.
“지훈아!”
“왜, 씨발!”
“그냥 안세정한테 고백을 해라.”
“대가리에 총 맞았냐, 내가 그딴 걸 하게?”
부웅.
지훈이 분노한 얼굴로 추월을 하는 바람에 차체가 한쪽으로 잔뜩 쏠렸다. 아무리 봐도 지훈이 세정과 이루어지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지훈은 태생부터가 잔뜩 꼬인 놈이었고 안세정은 휘어지기보다는 차라리 뚝 부러질 대나무같이 굴었다.
태환은 도지훈이 어떻게 하면 그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했다.
질주하는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지훈의 곁에서 태환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지훈에게 잔소리를 해 봤자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안세정은 도지훈이라는 녀석을 확실히 알기도 전에 치를 떨며 최대한 멀리 도망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지훈이 알면 분명히 그의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화를 낼 것이 당연했지만 친구의 첫사랑을 위해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태환은 운전에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지훈의 옆에서 슬며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용건이 뭔데 보자고 한 거야?”
세정은 나타나자마자 태환을 향해 물었다. 과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태환은 30분이면 된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아, 일단 앉아.”
도서관 뒤쪽 공과대 운동장이 보이는 벤치였다. 태환이 휙휙 주위를 훑어보더니 그녀를 향해 신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을 것 같다. 미안.”
세정이 눈썹을 올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끝내라는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이었다. 태환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지훈이 알지? 우리 동기. 내 친구기도 하고.”
그의 이름이 나오자 세정의 동그란 이마에 슬쩍 주름이 잡혔다. 대체 어제부터 도지훈의 이름을 몇 번이나 들어야 하는 걸까.
“모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못마땅한 기색이 완연한 그녀의 대답에 태환이 길게 한숨을 쉬며 입을 뗐다.
“사실 지훈이가 너 좋아해. 어제 학관 계단에서 너한테 말 건 것도 그래서 그런 거야. 그 자식이 워낙 사람 대하는 게 서툴러서 그런데 사실은….”
“잠깐만.”
세정이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그 이야기 하자고 나 보자고 한 거니?”
세정은 지훈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태환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왜 그 입장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하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걸 왜 네가 말하고 있는 건데?”
“지훈이가 좀 거친 면이 있는 건 나도 인정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라고… 미리 좀 알려 주고 싶었어. 왜 감기도 예방 주사 맞으면 좀 나은 것처럼….”
태환은 똘똘한 눈매로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똑바로 바라보는 세정을 향해 변명하듯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지훈이 왜 그녀 앞에서 당황하는지 조금은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안세정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당찬 스타일이었다.
“도지훈이 시킨 거니, 설마?”
세정의 뾰족한 물음에 태환은 아니라고 즉각 부인했다.
“아니야. 그 자식은 내가 너 만나서 이러고 있는 거 알면 진짜 화낼 거야. 아마 나랑 연 끊으려고 할걸.”
“그럼 넌 왜 친구 사이 끊길 각오까지 하면서 나한테 이런 이야길 하는 건데?”
세정이 눈을 똑바로 뜨고 되물었다.
“그 자식 성격 보면 대충 각이 나오겠지만 연애 경험도 한 번도 없고 이제까지 좋아한 여자도 없었어.”
태환의 말은 세정에게 조금 의외였지만 도지훈의 재수 없는 언행들을 생각해 보면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세정은 묵묵히 태환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근데 어제 너한테 말 걸기까지 1년 넘게 기다린 거야. 그 자식.”
세정이 조용히 눈만 깜빡였다. 태환이 작게 중얼거리며 진지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결국 망쳐 버리긴 했지만….”
“나는 걔한테 관심 없어.”
“어. 그건 나도 알고 있긴 한데….”
딱 잘라 말하는 그녀를 보며 태환이 말을 더듬었다. 어쩌면 세정과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몰랐다. 이왕이면 그녀를 설득할 수 있는 모든 수를 다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도지훈에 관해서 좀 말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내가 왜 걔에 관해서 알아야 하는지 난 잘 모르겠거든.”
“너, 어제 지훈이 보고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나, 생각했었지?”
태환의 물음에 세정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입을 다물고 그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태환이 설명을 시작했다.
“걔가 왜 인간관계가 그렇게 서툰지, 그 이유를 좀 설명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정은 여전히 이 상황이 못마땅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태환이 과연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지훈이, 열두 살 때부터 열여덟 살 때까지 런던에 있는 사립 학교를 다녔어. 나도 거기서 만났고.”
그가 유학 생활을 꽤 오래 했지만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은 것도 같았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실에 세정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런데?”
“돈 꽤나 있고 영국에서도 수준 있다는 집안 애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좀 있었어. 심하게.”
세정의 가지런한 눈썹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보며 태환은 말을 이었다.
“지훈이가 그랬어. 밟히지 않으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권력에 무릎을 꿇거나 아니면 그 권력의 꼭대기에 군림하거나.”
지훈이 어느 쪽이었을지는 세정 역시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지훈은 누구에게 짓밟히는 것보다 짓밟는 쪽이 훨씬 더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지훈이네 가족들 보면 걔가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가 더 쉬워.”
“걔네 집 잘살잖아. 오냐오냐 자라서 하늘 아래 저 혼자 잘난 것처럼 행동하는 거 아니었니?”
세정이 여전히 가시 돋친 말투로 태환에게 물었다. 태환은 그래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것에 속으로 안도하며 서둘러 설명을 이어 나갔다.
“너도 알겠지만 지훈이네는 삼대가 재벌이잖아. 그 권력 유지하려고 집안에서도 기 싸움이 대단해. 정말로 어릴 때부터 자기 밥그릇 싸움이 엄청 치열했어.”
세정이 반듯한 미간에 주름을 잡고 눈을 깜빡였다.
“지훈이가 가족이랑 통화하는 거 들으면 정말 살벌해. 그 녀석 집에서는 가족끼리 작은 일 하나도 다 협상이고, 거래로 취급하거든. 예를 들어 대학 입시에 합격하면 회사 주식 몇만 주, 부동산 투기 성공하면 덤으로 골프장, 실패하면 회사 주식에서 일정 지분 상속 포기, 뭐 이런 식이야. 거래에 실패하면 서로를 바보 취급하고 머저리라고 비웃는 건 일도 아니야.”
“…그래서 결론이 뭔데?”
마침내 세정이 그에게 묻자 태환은 길게 한숨을 쉰 후,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지훈이가 널 좋아하는 건 확실한데,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아서.”
“…….”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안타까워서 너한테 그 자식에 대한 거 좀 알려 주고 싶었어.”
태환이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걸로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세정이 뭘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건 끝났으면 그만 갈게. 아르바이트 시간이 다 돼서.”
“어, 그래. 미안. 얼른 가 봐.”
세정은 휙, 몸을 돌려 캠퍼스를 가로질렀다. 버스 정류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그녀는 지훈에 대한 이야기를 곱씹었다.
결국, 그의 친구 말에 따르면 지훈이 그녀에게 재수 없게 구는 것은 그의 배경과 성장 환경 때문이며 사실은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데 그것을 서툴게 표현한다는 말이었다.
끼익.
때마침 도착한 마을버스에 오른 뒤, 세정은 맨 뒷좌석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말도 안 돼.”
그녀의 입에서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의 친구가 애써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한들 그녀가 지훈의 거친 말버릇이나 정제되지 않은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세정의 머릿속에서 단순히 그냥 미친놈이었던 그가 이유 있는 미친놈으로 카테고리의 색을 달리했을 뿐이었다.
지훈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도 솔직히 믿기지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세정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고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꺼내어 과외 수업의 진도 부분을 신중히 훑어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