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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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렌티아의 침착한 설득을 듣고도 키르타는 여전히 꺼림칙한 눈빛이었다. 렌티아는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아직도 그대 모친을 뵙는 게 거북한가요?”
처음에는 대부분 정략에 불과했으나 점점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공유했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가족 관계, 어린 시절의 추억과 아픔에 대하여.
그래서 렌티아도 알고 있었다.
키르타의 친부가 아내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도, 첫 번째 남편이 예상치 못하게 생환하자 친아들을 두고 떠났다는 것도.
키르타와 친모의 사이가 무척이나 서먹하며 반쪽짜리 손위 누이와 관계가 껄끄럽다는 것도, 전부 키르타 본인이 직접 말해 줘서 알고 있었다.
키르타의 고향에서는 보통 맏딸이 가주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러니 둘째이자 아들인 키르타가 차기 족장인 누이에게 위협이 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점점 무예에 두각을 드러내자 차기 족장의 측근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는 외모가 준수하고 두뇌도 명석해서 날이 갈수록 제 누이에게 위협이 되었다. 친부에게마저 버림받은 사내아이 주제에.
그가 다른 부족의 유력가 여식과 혼인해 그곳에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사람들은 그를 본격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키르타 본인은 족장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충성스러운 지휘관이 되어 일대의 부족을 죄 통일해 모친에게 바쳤는데도 의심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결국 그가 머나먼 이국의 황후와 결혼해 낯선 땅에 눌러앉기로 한 건, 고향에서 그에게 쏟아지는 온갖 견제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렌티아는 지명과 문화만 조금 다를 뿐 레케온의 권력 다툼과 참 비슷한 양상의 복잡한 가정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수긍하고야 말았다.
아, 인간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이해관계에 얽혀 사는 건 어디서나 다 똑같은 모양이라고.
“글쎄요.”
평소에는 제국 사람들이 당황할 정도로 솔직하고 직설적인 키르타가 지금은 확답을 피했다.
그가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걸 듣고 렌티아는 그의 진심을 유추했다.
“설령 여전히 거북하다 해도, 그대가 고향 자체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꼭 사람이 보고 싶어야만 향수를 느끼는 건 아니니까요.”
광활한 들판, 드높은 산. 이곳에는 없는 음식과 제국 사람들이 모르는 춤. 그런 것까지 그립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렌티아는 제국에 정착한 동북부 민족이 레케온 문화를 일방적으로 강요받지 않고 고향의 전통을 이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으나, 필연적인 한계가 있다는 걸 인정했다.
말 한 필과 검 한 자루만 있다면 어디든지 간다는 자유로운 유목민 출신답게 키르타는 레케온 문화에 빠르게 적응했고, 생소한 의식주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렌티아는 종종 그의 눈빛에 이국에서 해갈할 수 없는 아련한 열망이 언뜻 비치는 걸 보았다.
예컨대, 아까 고향에서 데려온 말을 타고 승마장을 가로지를 때처럼.
“설마 이런 비좁은 들판으로 평생 만족하며 살 건 아니죠? 그대 고향에 있는 초원과 비교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들었는데.”
렌티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황실 소유의 광대한 승마장이 비좁다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었으나, 원래 세상의 많은 건 상대적이었다.
그리움은 객관적인 수치보다 훨씬 강력한 법이었다.
“…아무리 저조차 이곳이 비좁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보는 눈은 있거든요.”
키르타가 마침내 마주 웃었다. 아까 어머니에 대한 대답을 회피할 때와 달리 다시 편안해진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확실히 실제로 보여 드리고 싶군요. 이곳이 비좁은 정도는 아니지만 제 고향에 있는 초원이 훨씬 넓은 건 사실입니다. 언젠가는 그곳을 당신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고 싶습니다.”
“말했잖아요, 굳이 미룰 필요도 없다고. 전국 순회 때 그곳에 들르면 꼭 함께 말을 타도록 해요.”
사이좋은 부부는 도란도란 미래를 계획하며 봄바람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폐하, 우리가 제 고향에 가게 되면 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데요?”
“그곳에서 또 한 번 결혼식을 올리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제 동포의 전통대로요.”
키르타의 제안에 렌티아는 재작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더듬었다.
키르타와 성혼을 앞두고 양국의 혼례 문화를 논의할 때, 모든 걸 제국식으로 진행하는 대신 그녀에게 고향의 풍습을 설명해 주던 그가 떠올랐다.
‘제 고향에서 혼례를 치를 때는 따로 장신구를 교환하지 않습니다.’
‘예복의 색이 정해져 있습니다. 혼롓날에 신부와 신랑은 각자 연푸른색 전통 의상을 입습니다. 연청색은 하늘을 뜻합니다. 끝을 모르고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처럼 언제나 번성하는 부부 생활을 하겠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두 사람 다 금실로 수놓은 하늘색 너울을 씁니다. 그리고 신부와 신랑은 결혼식 내내 붉은 비단으로 신부의 오른손과 신랑의 왼손을 묶어 연결합니다. 제 고향에서 붉은색은 끊기지 않는 인연을 뜻하거든요.’
‘살면서 아름다운 장면을 적잖게 봐 왔지만, 그중에서 고향의 결혼식과 필적하는 건 없었습니다.’
그때 렌티아는 키르타의 정성스러운 설명을 듣고 다소 시큰둥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래 봤자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혼인하는 풍습이 있는 곳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예식을 올린다 한들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러나 키르타와 그런 예식을 치르는 걸 상상하자 간지러운 기대감이 차올랐다.
한 번은 자신의 방식대로, 또 한 번은 그의 방식대로 무려 두 번이나 겹겹이 맺어진다는 느낌이 좋았다.
렌티아는 머릿속에 잠시 조용히 그려 보았다.
하늘색 예복을 입고 금실로 수놓은 너울을 쓴 채 팔목에는 붉은 실을 두르고 저를 보며 사랑스럽게 웃는 신랑을.
“좋은 생각이네요.”
렌티아가 끄덕였다. 키르타의 얼굴이 한껏 밝아졌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간 눈이 멀 것처럼 찬란해서 렌티아는 괜히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키르타가 기쁘게 말했다. 그는 다시 아내의 손을 쥐고 누가 보든 말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냉엄한 황제는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따사로운 봄날, 더는 전쟁을 걱정하지 않는 시대에 한때 거래로만 이어졌던 두 남녀는 오순도순 추억을 쌓았다.
앞으로는 이런 나날이 훨씬 많을 것이다.
* * *
봄날에 추억을 쌓았듯이 봄밤에도 부부는 바빴다.
오직 해가 진 뒤에야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유희를 즐기기 위해 부부는 침실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물론 뻔뻔스러운 키르타는 해가 지기 전에도 상관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가 아내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그는 그녀의 싸늘함마저 짜릿해하며 싱글벙글 웃었고, 벌건 대낮에 본인의 욕망을 실천하는 대신 아내를 배려해 밤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밤이 오자 키르타는 전라 상태로 양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렌티아를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크읏.”
그는 사로잡힌 짐승처럼 신음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턱에 맺혔다가 거대한 흉부에 떨어졌고, 깊숙한 근육 골을 적시며 관능적인 하복부까지 내려갔다.
“하아, 읏.”
그가 헐떡였다. 양손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어 괴로웠다.
제 다리 사이를 노니는 저 자그만 금빛 머리를 붙잡고 뿌리를 목구멍까지 집어넣고 싶은 욕구가 자꾸 그를 들쑤셨다.
렌티아는 알몸으로 키르타의 허벅지 위에 엎드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채 그의 중심을 핥고 있었다.
최대한 치아로 긁지 않으려 애쓰며 입술로 쪽쪽 빨고 촉촉한 혀로 쓱 핥아 올리자 키르타는 근육을 부풀리며 신음했다.
턱이 아플 만큼 두툼한 살덩이를 입에 넣고 느릿하게 굴리던 렌티아는 땀을 뚝뚝 흘리며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속눈썹 너머로 비스듬히 쳐다보는 시선이 색정적이었다.
“흥분했나요?”
“하읏, 그걸, 말이라고…….”
“벌써 갈 것 같아요? 그러면 안 되는데.”
“하, 제발…….”
“제발, 뭐요?”
“좀 더 빨리…….”
키르타가 헐떡거렸다.
평소에 대부분 능글맞고 여유로운 그가 제 앞에서만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때마다 렌티아는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마음이 들썩였다.
“안 돼요, 키르타. 빨리 해 달라니, 밤이 이렇게 긴데 그렇게 조급해서야 되겠어요? 천천히, 느긋하게 즐겨야죠.”
“흐으, 렌티아, 제발.”
“네, 계속 애원하세요.”
렌티아가 싱글거렸다. 혹시 자신도 몰랐던 가학적 성향이 있었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 좋지? 너무 흥분돼. 이렇게까지 좋아하면 안 될 것 같은데.’
만약 그녀가 좀 더 이성적인 상태였다면 스스로 인격을 돌아보며 회의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쾌락에 취해 있었고, 이미 사람보다 짐승에 가까웠다.
‘사람을 묶어 놓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하다니…….’
아직 죽지 않은 그녀의 이성이 내면의 아주 구석진 곳에서 딱딱하게 나무랐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목소리 따위 손쉽게 무의식 저변으로 밀어 버렸다.
“손목은 아직 풀면 안 돼요. 얌전히 있어요.”
렌티아가 짐짓 엄격하게 명령했다.
자신이 묶은 저런 어설픈 매듭 따위 키르타가 단숨에 풀어 버릴 수 있다는 건 그녀도 이미 알았다. 알았기에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다.
온몸이 근육으로 이루어져 맨손으로 호랑이도 때려잡을 수 있을 듯한 초원의 용맹한 전사는 팔을 한 번 비트는 것만으로 저 얇디얇은 비단 끈을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키르타는 그러지 않았다. 애초에 본인이 제안한 유희였기에 그는 얌전히 묶여 있었다.
게다가 제 아내님이 저렇게나 좋아하시니, 배우자의 흥을 깨트릴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 키르타가 포박 놀이를 제안했을 때 영 떨떠름해하던 렌티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나서 남편을 자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