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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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귀환하고 나서 사흘 동안은 다들 그동안 밀린 잠을 보충하고 피로를 푸느라 바빴다.
그러다 사흘째 되는 날, 황제는 전사자들을 위한 추모식과 귀환한 이들을 위한 축하연을 열었다.
낮에는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의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그러다 저녁에는 즐겁고 발랄한 무도회가 열렸다. 생사와 희비가 공존하는 세상다웠다.
아사카는 승리하고 돌아온 전우들과 함께 연회의 주인공이 되어 먹고 마시고 춤추며 떠들썩한 관심을 즐겼다.
그를 비롯한 초원 출신 전사들이 모여 제국의 춤곡이 아닌 고향의 전통 음악에 따라 춤판을 벌이기도 했다.
황궁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색적인 춤마당을 보고도 제국 귀족들은 살짝 어색한 표정을 지을 뿐, 그중 누구도 감히 대놓고 비웃거나 언짢아하지 않았다.
황제와 혼인하고 나서도 한동안 황실에서 겉돌던 이민족 대공은 이제 반역자를 무찌른 개선장군으로서 입지가 훨씬 탄탄해졌고, 그의 부하들도 덩달아 평판이 높아졌다.
이제는 오히려 이민족의 낯선 문화에 긍정적인 호기심을 보이는 제국민이 늘어났다.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피차 적응해 갔다. 언젠가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을 갑갑하게 조이는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고 고향 사람들과 한차례 무도를 즐기고 나자 아사카는 갈증을 느꼈다. 시원한 음료가 필요했다.
‘너무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나? 생각보다 덥네.’
아사카는 황궁 시종이 나르는 쟁반에서 샴페인 잔을 집었다. 달고 서늘한 음료로 목을 축인 뒤 그는 빈 잔을 내려놓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밖에 나갔다 와야겠다.’
그는 연회장을 슬그머니 빠져나갔다. 어둑한 복도에 들어서자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아, 시원해.”
아사카는 창가에 나른하게 기대며 눈을 내리감고 모국어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조용히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번쩍 뜨며 휙 돌아보았다.
아직도 전시의 습관이 남아 하마터면 상대방을 반사적으로 바닥에 메다꽂을 뻔했다.
다행히도 상대방은 제때 날렵하게 물러섰고, 아사카는 막판에 정신을 차렸다.
“브, 브리넬 경?”
그에게 그림자처럼 조용히 접근한 사람은 베리타였다. 그녀는 살짝 토라진 표정이었다.
“네, 접니다. 알아보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녀가 쌀쌀맞게 빈정거렸다. 아사카는 자신이 방금 적군 대하듯 그녀를 패대기칠 뻔했다는 걸 깨닫고 얼굴을 확 붉혔다.
“죄송합니다. 석 달간 너무 거칠게 지냈더니 아직 적응이 덜 돼서요.”
“빨리 다시 적응하도록 하세요. 제가 다가올 때마다 그렇게 매번 멱을 따고 싶은 것처럼 달려들 게 아니라면.”
“저기, 방금도 멱을 딸 생각은 절대 없었습니다만.”
“그것참 위로가 되는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아사카가 잔뜩 풀이 죽어 거듭 사과하자 베리타는 그제야 꼬였던 표정을 풀고 퍽 상냥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는 아직 약간의 앙금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지난 사흘간 대체 어디서 뭘 했어요?”
“네? 저요?”
“그럼 당신이 아니면 누구겠어요. 여기 우리 둘 말고 아무도 없잖아요.”
“저야, 뭐, 밀린 잠도 자고……. 석 달 만에 목욕이라는 것도 해 보고…….”
“자고, 목욕하고. 정말 바빴겠어요. 지난 석 달간 당신을 목 빠지게 기다린 제게 인사 한번 하러 오지도 못할 만큼.”
베리타의 시선이 도로 싸늘해졌다. 아사카는 다시 죄인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죄송합니다.”
그는 곧바로 사과했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조차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입을 꾹 닫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당신이 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닙니다. 전장에서 내내 그리웠습니다. 다만…….”
“다만?”
“그, 저는… 혹시라도 당신은, 제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봐.”
“그사이 제 마음이 식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했나요?”
“예,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초원 사람들은 모두 용맹한 전사라더니 그것도 다 헛말인가 봅니다. 당신만 이렇게 겁쟁이인 건가요? 아니면 당신 동포가 전부 이런가요?”
“아마 저만 이렇게 멍청할 겁니다. 저 하나 때문에 제 동포 전체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베리타의 탄식 섞인 반문에 아사카는 겸허하게 뉘우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꿋꿋이 제 동족을 변호했다.
그 지극한 동포애에 베리타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감탄마저 느꼈다.
“아사카 리카르 경, 전장에서 제가 내내 그리우셨다고 했지요. 정말로 제가 그렇게 보고 싶으셨다면 진즉 찾아오셔야 했습니다. 제 마음이 식었을지도 모른다고 제멋대로 넘겨짚고 장장 사흘간 거리를 둘 게 아니라.”
“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당신, 원래 이런 성격 아니었잖아요? 이렇게 겁쟁이인 줄은 몰랐는데. 작년에 거의 초면인 제게 다짜고짜 시비를 걸던 배짱은 어디 갔어요?”
“보통 그런 건 배짱이 아니라 뻔뻔함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이 가장 잘 아실 텐데요. 그리고 그때 얘기는 부끄러우니까 꺼내지 마십시오. 아직도 종종 떠올리며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당신이 반성을 모르는 인간이었으면 애초에 상종하지 않았을 테니까.”
“앞으로도 열심히 반성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죽는 날까지 저와 상종해 주세요.”
아사카의 입가에는 어느새 장난스러운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베리타의 살짝 화난 얼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브리넬 경, 정말 죄송합니다. 당신이 계속 보고 싶었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제가 의외로 겁쟁이인 것도 사실이고요. 제 형편없는 성격으로 속앓이시켜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뭐, 그리 형편없지는 않아요.”
베리타는 다시 누그러졌다. 그녀가 아사카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오며 그의 손을 천천히 감쌌다.
그 조심스러운 접촉에 아사카는 몸이 뜨겁게 굳는 걸 느꼈다.
“저도 걱정했어요. 당신 때문에. 당신이 그새 마음이 바뀌었을까 봐. 아니면, 아예 돌아오지 못할까 봐.”
그동안 아사카의 유일한 걱정거리는 연인의 마음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어딘가의 격언에 따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향한 베리타의 호감이 시큰둥하게 식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베리타는 달랐다. 그녀는 무려 두 가지를 한꺼번에 염려해야 했다.
아사카의 마음이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웠고, 마음은 멀쩡한데 그의 몸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설령 그의 몸이 돌아오더라도 혼백이 떠난 싸늘한 시신에 불과할까 봐 어찌나 두려웠는지.
그래서 그가 무사히 대공과 함께 귀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안개에 잠긴 듯 흐릿하던 세상이 돌연 아름답게 보였다. 그녀를 둘러싼 햇빛과 공기가 찬연하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토록 환희하며 고대하던 재회이거늘, 사지 멀쩡하게 돌아온 연인이 무려 사흘간 감감소식이자 새로운 염려가 시작되던 참이었다.
“당신이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서 저를 피할 시간에 진즉 용기를 내서 제게 찾아왔다면 제가 걱정하는 시간도 줄어들었겠죠. 어떻게 저한테 그럴 수 있어요? 본인 두려움만 생각하느라 제 불안감은 안중에도 없었죠?”
베리타는 아사카를 노려보았다. 건강하게 귀환한 그가 눈물겹게 반가운 것과 별개로 서운함이 곪아 분노가 되었다.
정말, 정말 그리웠던 얼굴이 지금은 퍽 얄밉게 보였다.
“…제가 썩을 놈이라 죄송합니다. 원하신다면 때려도 돼요. 따귀라도 한 대 날리실래요?”
아사카는 나름대로 최선의 속죄를 시도했다. 그러나 베리타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따귀는 됐고, 입술이나 내주세요.”
그녀가 단연하게 속삭이며 거리를 좁혔다. 아사카의 눈빛이 바뀌었다.
“당신을 용서할지 말지, 입맞춤에 따라 결정할게요.”
연인의 당돌한 선언에 아사카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더는 잘못을 저지르고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비슷한 갯과 짐승이되, 오히려 굶주린 늑대를 닮았다.
“아주 현명한 생각입니다.”
그가 기쁘게 싱글거렸다. 지금까지는 베리타가 다가왔다면, 이제는 아사카가 적극적으로 간격을 좁혔다.
아사카의 보폭이 훨씬 컸기에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베리타의 두 걸음만큼이나 간격이 줄어들었다.
이제 숨을 삼키면 상대방의 체취가 느껴지는 거리였다. 가슴끼리 부드럽게 마찰하며 체온을 전할 만큼 가까웠다.
사내의 다리가 여인의 치마폭을 파고들었고, 공기가 빽빽해질수록 양쪽의 호흡이 가빠졌다.
“저야 뭐, 입맞춤보다 더한 것도 드릴 수 있는데…….”
초원에서 온 저돌적인 사내는 제국의 신사라면 마땅히 삼가야 할 노골적인 발언을 속닥이며 베리타의 턱을 감쌌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일단 시키시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그의 반대쪽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아랫배가 맞닿는 감각에 베리타가 흠칫할 틈도 없이, 입술이 포개지며 혀가 파고들었다.
무려 석 달간 금욕하며 굶주림이 쌓인 탓일까. 이 순간의 키스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입맞춤보다 훨씬 달고 뜨거웠다.
약간 무서울 정도로 거칠었다. 그래서 더욱 짜릿했다.
아사카가 대공과 함께 출전하기 전, 이제 겨우 서로 마음을 확인한 사이라 미래를 약속하지도 못하고 각자 소심하게 현재에만 집중하던 때보다 훨씬 즐거웠다.
물론, 지금도 그들은 온전히 현재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과 다른 입맞춤에는 새로운 것들도 녹아 있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 더 깊은 관계를 향한 열망, 그런 것들.
내전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나라에서 두 사람은 이제야 조금씩 앞으로도 함께하는 나날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이제는 망설임보다 희망을 담아.
베리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녀와 굶주린 숨을 나누던 아사카가 문득 방향을 휙 틀었다.
어느새 베리타의 등이 벽을 눌렀고, 아사카는 열이 들끓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