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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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이제 그녀는 아주 생생하게 알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맞는 사내가 제게 선사할 수 있는 쾌락을, 서로 원하는 사이에서 나누는 강렬하고 달콤한 성감을.
그러니 3개월이라는 시간이 3년처럼 길게 느껴졌고, 곁에 아무도 없는 밤에 몸이 달아 화끈거리는 음부를 스스로 문지른 적도 있었다.
이제 그런 외로운 밤은 끝났다. 심지어 저 요망한 남자는 밤으로도 모자라 낮에마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단 우리 아이한테 인사부터 해요. 자꾸 곁길로 새지 말고.”
렌티아는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이어, 자신의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키르타에게 등을 돌렸다.
목덜미까지 전부 붉게 물든 탓에 어차피 부질없는 짓인 줄도 모르고.
키르타는 장밋빛으로 익은 아내의 매끈한 목덜미와 동그란 귓바퀴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면서 부디 꼿꼿하게 솟은 제 남성이 아기가 오기 전에 가라앉기를 간절히 빌었다.
렌티아는 황자의 유모를 호출했다.
황손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황제궁의 나이 지긋한 시녀는 포대기에 돌돌 말린 고귀한 아기씨를 소중히 안은 채 입장했다.
“황제 폐하와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이리 더 가까이 오게.”
렌티아가 지시하자 시녀는 공손히 다가왔다. 그사이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몸을 일으킨 키르타는 방을 천천히 가로질러 아이에게 향했다.
유모와 키르타는 중간에서 만났다. 키르타는 떨리는 시선으로 포대기 안쪽을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겹겹의 천에 보드랍게 싸인 희고 자그만 얼굴이 보였다. 잠든 아기의 섬세한 속눈썹은 밤하늘을 닮은 검은빛이었다.
솜털에 뒤덮인 살갗은 보기만 해도 빵 반죽처럼 부드러웠고, 몸의 부피는 아마 키르타의 팔뚝보다도 작았다.
키르타는 망설였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로 늘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정작 양손에 쏙 담길 듯한 아기를 보자 자신이 감히 이 존재를 만져도 되나 싶었다.
“안아 볼래요?”
남편의 심정을 눈치챈 렌티아가 부드럽게 물었다. 키르타는 다소 겁먹은 눈빛을 지었다.
전장에서는 잔혹한 사신으로 소문난 맹장이 기껏해야 꾹 움켜쥐면 부서질 듯한 존재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희귀한 장면이었다.
렌티아는 단단하고 거대한 남성이 무르고 자그마한 아기 앞에서 절절매는 모습을 보고 살짝 웃었다. 그녀가 온화한 얼굴로 격려했다.
“괜찮아요, 대공. 한번 안아 보세요.”
만약 키르타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감히 저 두꺼운 팔과 거친 손으로 아이를 만지겠다고 나섰다면 렌티아는 정색하며 극구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키르타라서 괜찮았다. 렌티아는 아기를 무한하게 사랑하듯 이 사내를 무한하게 신뢰했다.
그들은 하나의 울타리로 묶인 가족이었다. 남편에게 아들을 맡기는 데 두려움은 없었다.
“…그럼.”
키르타는 소심하게 중얼대며 팔을 내밀었다.
그는 능숙한 유모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어설프게 넘겨받았다. 아이는 깊이 잠들었는지 깨려는 기미조차 없었다.
온전히 본인의 두 팔과 손으로 아이를 받치게 된 키르타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숭배에 가까운 시선으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기가 깨어 있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러나 이렇게 천사처럼 새근새근 잠든 모습을 보니 이대로도 행복해서 여한이 없었다.
“아이의 이름은 뭡니까?”
여전히 아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키르타가 물었다. 부자의 그림 같은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렌티아가 대답했다.
“생각해 둔 이름은 있는데 아직 확정하지는 않았어요. 그대가 돌아오면 같이 정하고 싶었거든요. 이 아이는 그대의 아이기도 하니까요.”
“그럼 생각해 둔 이름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세르. 아세르라고 부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아세르…….”
“성서에 나오는 사슴이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축복하는 구절에도 많이 쓰이고요.”
“그렇군요. 완벽한 이름입니다.”
키르타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잠든 아기를 안은 채 순전한 미소를 그리는 그의 모습이 벅차도록 눈부셔서 렌티아는 심장 부근이 뻐근하게 조였다.
“그럼 이름은 그렇게 짓겠습니다. 이 아이는 아세르 에우론 레케온이 될 거예요.”
제국에서 이름을 지을 때는 보통 부친의 성을 따르며, 이름 다음에 오는 세례명과 마지막에 오는 성 중간에 모친의 혼전 성을 집어넣는다.
그러다 여자아이의 경우 나중에 커서 결혼하게 되면 세례명은 그대로 둔 채 모친의 혼전 성을 버리고 부친과 남편의 성을 나란히 사용한다.
그러니 만약 관습대로만 했다면 세례 전의 아이는 아세르 파올린 에우론이 됐을 것이다.
모친의 이름인 렌티아 크리스틴 파올린 레케온과, 부친의 성명인 키르타 에우론 레케온을 따라.
그러나 원래는 황족이 아니었다가 첫 번째 결혼을 통해 황족이 된 모친의 특수한 경우를 따라, 키르타가 제국에 귀화하면서 받은 성은 황자의 이름 끝이 아닌 중간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쨌거나 아기는 당당하게 황실의 성을 받았고, 황제의 적장자로서 순탄하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받을 것이다.
말랑말랑한 빵처럼 생긴 주먹만 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키르타는 경건하게 다짐했다.
반드시 이 아이에게 허락된 찬란한 미래를 지켜 주겠노라고.
“이제 아세르는 유모에게 돌려주세요, 대공. 계속 이렇게 안고 있다가 깨면 곤란하답니다.”
렌티아가 현명하게 조언했다.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굳이 갓난쟁이의 징징거리는 울음소리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키르타는 렌티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는 혹시라도 아이를 떨어트릴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유모에게 아이를 넘겼다.
다행히도 아세르는 무사히 시녀의 품에 폭 안겼고, 아기가 여전히 깨지 않고 새근새근 천사처럼 잘만 자자 세 명의 어른 모두 안도로 한숨지었다.
“수고했네. 이제 나가 보게.”
“네, 황제 폐하.”
유모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아이를 안고 퇴장했다. 방에는 다시 부부만 남았다.
“어때요? 우리의 아이를 처음으로 본 소감은.”
“아름답습니다. 기분이 정말 벅찹니다. 제 부족한 어휘력으로는 전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네, 나도 지금 그대가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렌티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끔찍한 산통 끝에 아이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 세상 모든 언어를 샅샅이 뒤져도 도저히 온전히 묘사할 길이 없는, 아마 죽는 날까지 기억에 남을, 어쩌면 죽어서도 잊지 못할 그 찬연한 순간을.
진통의 여파로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피 냄새로 코가 따갑고 당장 눈감고 싶을 만큼 지친 와중에도 아기의 울음이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도 평생 잊지 못하리라.
출산을 도운 시녀들이 울먹이며 축하하는 소리와 황제의 상태를 살피는 의사의 말도 그때는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그 아기가, 그녀의 아기가,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창조한 그 작은 존재만이 그 순간에 유일한 의미를 지녔다.
“우리 아세르는 사랑스러운 아이가 될 거예요.”
“분명 그럴 겁니다.”
“아이가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어릴 때부터 잘 가르칠 거고요.”
“아이가 엇나가지 않고 행복할 수 있도록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어야죠.”
“그리고 나는 좋은 어머니가 됐으면 좋겠어요.”
자신을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의 마음이 새삼스레 이해되면서 친정 식구가 더욱 그리워지는 나날이었다.
또한, 렌티아는 자신의 첫아이가 전남편이 아닌 키르타의 핏줄이라서 눈물겹게 감사했다.
만약 아세르가 루이크의 핏줄이었다면 저렇게나 사랑스러운 아이가 조금은 덜 사랑스러웠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슬펐다.
그래서 더욱 기뻤다. 아들과의 만남에 조금의 거리낌도 없어서, 걸리는 점이 하나도 없어서, 그저 마음껏 사랑할 수 있어서.
렌티아는 그토록 기쁜 마음을 담뿍 담아 키르타와 입을 맞췄다.
자신과 함께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 낼 남편에게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했다.
그러다 보니 분위기가 어느새 다시 고조되었다.
혀의 질척한 움직임과 입술의 끈적한 맞물림, 헐떡이는 호흡과 옷 너머로 비비는 가슴의 홧홧한 체온이 두 사람을 차근차근 가열했다.
아내의 입술을 머금고 정신없이 숨을 탐하던 키르타는 끝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치맛자락을 헤집었다.
석 달 만에 잡히는 말캉한 허벅지의 감촉이 음란한 열기로 그의 배를 휘저었다.
“흐읏, 키르타, 여기서는, 으응.”
미약하게 장소에 대해 불평하려던 렌티아는 키르타가 이를 세워 그녀의 목을 깨물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지며 신음만 흘렸다.
키르타는 렌티아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에 입술을 묻고 혀를 놀리며 그녀의 비밀스러운 속치마 안쪽을 은근하게 문질렀다.
가터벨트가 말랑한 속살을 압박하는 부분을 쓰다듬다가 더 위로 올라가 속옷 밑으로 파고들었다.
달착지근한 습기가 고인 곳을 손끝으로 건드리자 파르르 떨리는 속살이 느껴졌다.
“하응, 키르타, 우선, 읏, 침실로…….”
렌티아가 간신히 헐떡거렸다.
사과색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키르타는 이런 상황에조차 적절한 장소를 고집하는 그녀를 조금은 원망했다.
하지만 남편의 최우선 순위는 아내의 만족이라는 고향의 신념을 그는 잊지 않았다.
키르타는 당장 부드러운 여체에 파묻히고 싶어서 안달이 난 남성을 겨우 억제하며 렌티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
몸이 불쑥 들리는 감각에 렌티아는 흠칫 놀라며 키르타의 목을 껴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이 그를 꾹 누르며 이미 불붙은 욕정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이제 흥분은 통증에 가까웠다. 온몸의 세포가 이렇게 날뛰는데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 참아야 한다니, 여간 괴로운 게 아니었다.
그래 봤자 침실은 벽 하나만 사이에 두고 바로 옆에 붙어 있었으나, 고통당하는 키르타에겐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여닫는 시간조차 너무 길게 느껴졌다.
그는 겨우겨우 한 줄의 이성을 붙들고 렌티아를 침실까지 데려가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은 그가 조급한 마음으로 허리띠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