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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46화

본문

쿵푸벳

46화

“저도 그 사실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새겨듣겠습니다.”

그냥 염두에 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그 부분 때문에 계속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된 베리타가 그새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를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연애할 때는 서로 끌린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결혼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단지 마음이 통했다는 이유로 혼처를 정하기엔 따로 고려해야 할 현실적인 부분이 너무 많았다.

만약 베리타가 이민족 남자와 부부로 맺어지는 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그녀가 그리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가족이 그렇게 믿는다면.

본격적으로 신랑감을 물색해야 할 시기에 이민족 사내와의 불장난에 정신이 팔리는 건 어리석은 짓일 수도 있다는 걸, 베리타가 뒤늦게 깨달으면 어떡하지?

‘내가 당신 곁에 아예 머물 방법이 있을까.’

청혼, 청혼이라. 그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주군이 제시한 깔끔한 해결책을 두고서도 아사카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키르타는 아사카의 망설임을 이해했다. 그가 애정과 격려가 담긴 손길로 부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일단 살아 있기만 한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무사히 살아서 수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됐으니까, 앞으로 뭘 할지는 차차 생각해 봐.”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그래, 살아 있기만 하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미래로 나아갈 기회도, 과거를 만회할 기회도, 현재를 바꾸거나 만끽할 기회도.

키르타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직 만나지 못한 아이 곁에서 오래오래 그 기회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부디, 이제는 제 가족의 삶에 평안만 가득하기를.

그 가족과 재회하는 날을 키르타는 손꼽아 기다렸다.

* * *

폐황제의 죽음과 더불어 내전은 끝났다. 물론, 그 외에도 처리해야 할 자질구레한 뒷수습이 있었다.

키르타가 군대를 이끌고 폐황제의 잔당을 처리할 동안, 렌티아도 수도에서 반역자를 솎아 내느라 바빴다.

엘리제가 우연히 목격한 이벨라라는 하녀의 수상한 행동이 첫 단서가 되어 주었다.

이를 기점으로 황제의 유능한 시녀와 호위 기사는 부지런히 탐문에 나섰고, 갖은 회유와 협박과 추궁 끝에 필요한 정보를 얻어 냈다.

신록의 궁에 갇힌 귀족들 외에도 폐황제 측과 내통한 수도권의 유력가들과 황궁 사용인들이 줄줄이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개중에는 이벨라처럼 반쯤은 억울하게 휘말린 사람들도 있었으나, 아예 새 황제에게 구체적인 앙심을 품고 반역자와 손잡은 경우도 많았다.

렌티아는 그들을 가차 없이 정리했다.

폐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막판에 자수하는 사람이 속출한 덕에 숙청 과정은 무척 순조로웠다.

그렇게 내부의 적을 치우고 나자 예정된 산달이 도래했다.

렌티아는 꼬박 한나절의 산고 끝에 아이를 낳았다. 자그맣고 건강한 첫아들이었다.

적대 세력을 와해하고 출산도 문제없이 마친 후, 남은 일은 남편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렌티아는 갈급한 마음으로 키르타를 기다렸다.

그가 무사히 귀환 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의 무탈한 모습을 직접 눈에 담기 전까지 완전히 안도할 수 없었다.

어서 그에게 자신들의 아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의 눈에 자신이 아이를 볼 때마다 느끼는 지극한 행복감이 똑같이 들어차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와 품을 맞대고 체온을 느끼며 다디단 숨결을 나누고 싶었다. 그의 크고 뜨거운 손이 자신의 굴곡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쓰다듬는 걸 느끼고 싶었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느라 몸과 마음이 달았다.

기대감과 그리움으로 심장이 부풀어 더는 가슴속에 공간이 남지 않을 듯할 즈음, 키르타가 수도에 도착했다.

렌티아는 황제의 정복을 차려입고 황궁 입구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몇 주 전에 아이를 낳은 뒤로 기력이 다 회복되어 그녀의 자세는 꼿꼿했고 뺨에는 혈색이 돌았다.

작년의 한 봄날처럼 하늘은 놀랍도록 화창했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그 화창함이 조롱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당시 황후였던 렌티아는 군사적 충돌로 목숨을 잃은 제국 병사들과 국경 부근에서 살해당한 이민족 사절단을 애도하며 새카만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황제인 렌티아의 의복은 색색의 생명력으로 찬란하게 나부꼈다. 그녀의 눈에도 빛이 있었다. 사랑과 환희로 빚어진 광명이었다.

갑옷을 입은 키르타는 말에 올라 군대를 이끌며 천천히 시내를 가로질렀다. 이 또한 작년의 봄날과 같았으나, 그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키르타는 동족의 원한을 갚고자 쳐들어온 침략군의 수장이 아니었고, 렌티아는 그들을 달래고자 머리 숙인 얼음 같은 황후가 아니었다.

한때 국가적 원수지간이었던 그들은 이제 석 달 만에 재회하는 부부로 마주 섰다.

키르타는 개선장군답게 당당한 자태로 말에서 내렸고, 황제에게 다가와 겸손히 몸을 낮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유려한 제국어로 인사했다. 렌티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스스럼없이 맞잡고 손등에 키스했다.

“귀환을 환영해요, 대공.”

렌티아가 화답했다. 그녀는 우아한 자태로 키르타의 입맞춤을 받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남편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뜨거웠다. 그녀의 파란 눈에는 다정한 온기를 넘어 활활 타는 열이 있었다.

“그리웠습니다.”

키르타는 그 열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가 솔직하게 고백하며 렌티아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새파란 불꽃에 풍덩 잠겨 영영 타오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요, 대공. 나도 무척 그리웠어요.”

차마 남들이 다 보고 듣는 앞에서 전부 표현하지 못할 만큼.

부부의 진정한 재회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약 석 달 만에 황궁의 방으로 돌아온 키르타는 가장 먼저 군장을 풀고 더운물로 목욕했다.

그동안 전장에서 구르며 거칠어진 몸을 깨끗하게 씻고 머리카락을 꼼꼼히 말린 뒤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그는 다시 아내에게 향했다.

렌티아는 키르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녀가 대공의 등장을 알리자 렌티아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

사실 황제는 대공보다 윗사람이기에 상대방이 입장했다고 해서 굳이 몸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건 대공뿐 아니라 황궁의 그 누구를 상대로도 마찬가지였다.

“키르타.”

그러나 렌티아는 개의치 않았다.

황상 황족의 품위와 예절을 목숨처럼 지켜 온 냉엄한 그녀가 지금은 황제나 황후가 아닌 오직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리운 이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렌티아가 기꺼이 양팔을 벌렸다. 시녀도 호위도 전부 물리고 오직 부부만 남은 공간에서 키르타는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팔이 등을 감싸고 가슴이 눌리며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키르타는 렌티아의 부드러운 금발에 얼굴을 묻고 갈급한 숨을 들이켰다. 렌티아는 키르타의 단단한 어깨에 뺨을 비볐다.

“렌티아. 렌티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요.”

키르타가 렌티아를 살짝 밀어냈다. 간격을 벌리기 위함이 아닌, 오히려 더 가까이 파고들기 위한 동작이었다.

“흡.”

키르타가 렌티아의 턱을 쥐고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이 열리고 다디단 숨이 쏟아지자 렌티아는 곧 헐떡이기 시작했다. 키르타의 호흡도 거칠어졌다.

혀가 질척하게 뒤엉켰다. 굶주린 짐승처럼 파고든 뜨거운 살덩이가 혀뿌리를 자극하며 입천장을 비볐다.

여린 점막끼리 마찰하며 단내가 짙어졌다. 온몸이 열에 잠식된 느낌이었다.

“흐응…….”

“하아.”

렌티아의 신음과 키르타의 탄식이 음란한 화음을 쌓았다. 아주 긴긴 순간 끝에 부부는 천천히 멀어졌다.

둘 다 입술이 발갛게 부어 있었고, 방금 달리기를 마친 듯 가슴이 들썩였다.

“아이는…….”

“네?”

“렌티아, 우리의 아이를 보고 싶습니다.”

키르타는 아내를 향한 욕망에 물든 눈빛으로 다른 존재를 향한 열망을 이야기했다.

지금 당장 렌티아를 끌어안고 더 끈적하게 삼키고 싶다는 갈망과 별개로, 그는 자신들의 아이를 보고 싶었다.

“앉아 있어요. 유모를 부를게요.”

렌티아는 불긋하게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선선히 수긍했다.

키르타는 푹신한 소파에 앉았다. 그의 하반신을 무심코 내려다본 렌티아가 짓궂게 웃었다.

“이런, 아버지로서 아이 앞에서 좀 더 건전하게 있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노골적인 정염을 드러내면서 순수한 갓난아기를 만나 보겠다는 건가요?”

“제가 짐승 같은 놈이라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책임이 없지는 않으니 너무 책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확실히 내 잘못도 있네요. 자극해서 미안해요. 이따 밤에 실컷 풀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밤이요? 정말 밤까지 기다리실 수 있습니까?”

“그건 또 무슨…….”

“저는 못 기다릴 것 같습니다, 렌티아. 이날을 위해 석 달을 넘게 참았거든요.”

정욕을 머금은 눅눅한 저음이 렌티아를 진득하게 휘감았다. 렌티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 사이가 어렴풋이 저릿저릿했다.

“지금은 우리의 아이에게 인사하고 싶으니 참겠습니다. 하지만 좀 이따가…….”

“아직 대낮이에요, 키르타.”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나는 상관있어요.”

렌티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항의했다.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가, 렌티아는 키르타의 남사스러운 화법이 유독 버거웠다.

동시에 그녀는 그를 이해했다. 이미 한번 열이 오른 이상, 순식간에 가라앉히기는 어려웠다.

무려 석 달간 삭이고 되삼키며 억제해 온 욕망이기에, 더더욱.

참 신기한 일이었다. 전남편과 함께한 무려 5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렌티아는 한 번도 이렇게 갈증을 느껴 본 적 없었다.

모르는 것,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갈구할 수는 없으므로.

좋은 음식도 맛보지 않으면 모르고 훌륭한 음악도 듣지 않으면 모르듯이, 전남편과 있을 때 렌티아는 자신이 무얼 놓치고 있는지 몰라서 아쉬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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