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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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다프네는 다시 가련한 표정 연기를 펼쳤고, 루이크는 자신을 향한 염려와 경애로 가득한 여인의 청초한 시선 앞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네가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조심해서 다녀오렴.”
“네, 폐하.”
우스운 작태였다.
평소에는 계집이란 연약하고 겁이 많은 족속이라고 무시하면서 막상 위기 상황이 닥치자 계집 뒤에 숨으려 하다니. 다프네는 비웃음을 삼켰다.
‘사랑한다, 예쁘다, 너를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 온갖 빈말은 잘도 지껄였으면서.’
만약 폐황제가 정말로 애인을 소중하게 여겼다면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주변을 살필 동안 자기 혼자 숨는 데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이크가 어떤 놈인지 잘 알았기에 다프네는 이런 수를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정찰을 핑계로 루이크의 곁을 벗어나 후드로 얼굴을 가린 채 살금살금 움직였다.
‘좋았어, 이대로 치안대가 오기 전에 도망치기만 한다면……!’
그러나 그녀는 멀리 가지 못했다.
“폐황제 루이크 레케온과 반역자 다프네 멜레인은 황명을 받들라!”
“죄인은 무기를 내려놓고 제자리에서 멈춰라! 도주를 시도할 시 바로 공격하겠다.”
현장에 나타난 건 치안대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잔혹하고 강하기로 악명 높은 야만족 대공의 등장은 다프네의 출구를 막고 의지를 앗아 갔다.
부정한 연인들의 끝은 공평한 파멸이었다.
* * *
밀항하려던 폐황제와 그의 정부가 붙잡혔다.
다프네 멜레인은 모든 걸 체념한 듯 멍한 표정이었으나, 루이크 레케온은 끝까지 독이 올라 밧줄에 묶인 채로도 몸부림쳤다.
“이 비천한 것들, 감히 너희가 이 나라의 황제를 상대로, 읍!”
“말은 똑바로 해라, 폐황제. 이 나라의 황제 폐하는 따로 계시거든.”
발악하다가 기어이 재갈이 물린 초라한 포로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키르타는 경멸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의 음성은 그의 시선만큼이나 얼음장 같았다.
“그리고 그분은 네 더러운 입으로 감히 사칭할 만한 분이 아니지.”
“읍, 으읍!”
“지금 네놈에게 재갈을 물리는 건 핍박이 아닌 자비란다. 네놈이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면 참지 못하고 네 혀부터 잘랐을 텐데, 그러면 피차 좋을 게 없잖아. 나도 네놈 입에서 피가 질질 흐르는 흉한 장면은 굳이 보고 싶지 않거든.”
“읍, 끄읍…….”
“과거에 터무니없이 과분한 아내를 두었다는 사실에 감사해라. 내가 네놈을 추하게 조각내서 죽이지 않는 건 오직 그분의 명예를 위함이니까.”
키르타의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진지했다.
폐황제의 헛소리가 역겨웠으나 굳이 그의 혀를 자르고 싶지 않아서 재갈을 물리는 걸로 타협했고, 지저분하고 잔인하게 조각조각 찢어 죽이고 싶었으나 렌티아를 생각해서 참았다.
렌티아가 폐황제 때문에 겪어야 했던 5년간의 끔찍한 결혼 생활을 상상하면 그녀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 주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한때 그녀의 법적 가족이었던 자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치열한 갈등 끝에 두 번째 의견이 이겼다.
키르타가 방금 말했듯 렌티아의 명예를 위함이기도 했다.
만약 키르타가 폐황제를 잔인하게 죽인다면 분명 부정적인 여론이 생길 것이다. 그런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원래 죽은 자에겐 동정론이 쏠리기 쉽지.’
살아 있을 때는 방탕하고 무능한 황제라고 욕먹던 루이크 레케온이 잔인하게 곤죽이 된 시체로 나타난다면 오히려 연민을 얻기 쉬울 것이다.
과거는 미화되고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라, 사람들은 그래도 한때 나라에서 가장 고귀하던 사내가 유독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물러지리라.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냐? 그래도 한때 황제였는데. 역시 대공 전하가 야만족이긴 한가 봐.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죽이다니. 설마, 렌티아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신 일일까?
‘그런 식의 수군거림을 막으려면…….’
키르타는 싸늘한 시선으로 포박당한 폐황제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였던,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나 초라한 존재를.
‘모든 오명은 내가 가져가고.’
키르타가 검을 뽑았다. 다프네 멜레인은 흠칫 굳었고, 루이크 레케온은 덜덜 떨었다. 주변을 에워싼 키르타의 부하들은 무표정했다.
‘모든 명예는 당신께 바치면 돼.’
키르타의 칼끝이 루이크의 목을 향했다. 이제 루이크의 바짓가랑이는 오줌으로 축축했다.
“폐황제 루이크 레케온.”
“읍! 으읍!”
“미리 명복을 빈다.”
키르타는 폐황제를 단칼에 베었다. 깔끔하게 잘려 나간 머리가 흙바닥에 굴렀다. 곳곳에 짙붉은 피가 튀었다.
새하얗게 경직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켜본 다프네 멜레인은 사시나무처럼 떨다가 픽 혼절했다.
키르타는 검에서 핏방울을 털어 내며 무심한 눈으로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반역자 루이크 레케온은 저항을 시도하다가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되도록 생포해서 수도로 압송하려고 했으나, 이자의 저항이 너무 심해서 실패했을 뿐이야. 알아들었나?”
“네, 대공 전하.”
“시체를 수습해라. 그리고 저 여자를 챙겨. 다프네 멜레인은 수도에서 황실 재판을 받게 될 거야.”
“명 받들겠습니다.”
루이크 레케온은 이제 확실하게 죽었다.
원칙대로라면 생포되어 수도에서 정식 재판을 받았어야 했으나, 체포 과정에서 저항이 너무 심해 어쩔 수 없이 사살된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이로써 렌티아 레케온 황제는 한때 남편이었던 사내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한 피도 눈물도 없는 여인으로 비난받지 않을 것이며, 사살의 모든 책임은 오롯이 대공이 지게 될 것이다.
폐황제의 몸뚱이에서 분리된 볼품없는 머리통은 렌티아 레케온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 줄 것이다.
이제 레케온에 남은 황제는 단 한 명뿐이었고, 렌티아 레케온과 이민족 대공을 적대하던 이들은 구심점을 잃었다.
“다 됐으니 돌아가자.”
내란은 끝났다. 죽일 사람은 죽이고 잡을 사람은 잡았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이었다.
꿈에서도 그리던 귀향의 때였다.
【 남은 일 】
키르타가 출정한 게 초봄이었고, 폐황제가 죽은 건 늦봄이었다. 그리고 렌티아가 아들을 낳은 건 초여름이었다.
폐황제를 죽이고 그 정부를 생포한 뒤에도 반군의 마지막 잔당을 처리하고 이것저것 뒷수습을 하느라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결국 키르타의 귀환은 어느 여름날, 렌티아가 이미 황자를 출산한 뒤에야 이루어졌다.
키르타의 마음은 조급했다. 전후 뒷수습처럼 중요한 일을 차마 대충 해치울 수도 없어 미치는 줄 알았다.
일은 적당히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자기 혼자 먼저 수도로 달려가고 싶다는 충동이 불쑥불쑥 치밀었으나, 키르타는 매번 힘겹게 유혹을 뿌리쳤다.
‘당신을 위한 일인데 대충 처리할 수는 없지. 흠집 하나 남아서는 안 돼.’
결국 아내를 위한 강박증에 가까운 책임감으로 키르타는 끝까지 지휘권을 붙들고 서부에 남았다.
그러다 그사이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는 뒤늦게 지독하게 후회했다.
‘젠장, 그냥 무책임하게 굴걸.’
출산 시기에 아내 곁을 지키지 못하다니, 초원 출신의 사내로서 그렇게 부끄러운 일은 없었다.
가여운 그는 길보를 듣고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무룩해졌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고향에서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편이 아내의 출산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런 상황인 거죠,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네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구나. 네가 내 상황이었다면 지금쯤 땅을 치고 울며불며 난리가 났을 텐데.”
“하하, 그리 말씀하시니 반박은 못 하겠네요.”
위로를 시도했다가 반격만 당한 아사카는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키르타는 음침한 안색으로 다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일을 최대한 마무리하고 출발한다. 강행군을 감내해야겠어. 가는 길에 최소한만 쉬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
“저희야 괜찮습니다만, 다른 병사들은 별로 안 괜찮을 것 같은데요. 제국 사람들이 워낙 약골이잖아요?”
“상대적으로 약한 거지 약골은 아니야. 너, 다른 병사들 앞에서 그딴 식으로 말하고 다니지 마. 브리넬 경한테 그렇게 깨지고도 교훈을 못 얻었니?”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리고 저도 더는 그렇게 경거망동하지 않습니다.”
베리타가 언급되자 아사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노골적인 색채를 보고 키르타는 렌티아의 출산을 놓친 일로 우울해하던 것도 잊고 싱긋 웃었다.
“그래서, 수도로 돌아가면 청혼이라도 하게?”
“예, 예?”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매일 손수건이 닳도록 만지작거렸으면서.”
키르타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아사카의 얼굴은 더욱 달아올랐다. 그가 주군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그건 대체 언제 보셨습니까?”
“질문이 참 이상하네. 애초에 숨길 의향은 있었던 거야?”
“…뭐, 딱히 티 내고 다닐 생각도 없었습니다만.”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더라. 아마 다른 애들도 다 눈치챘을걸.”
“크흠! 그렇군요.”
베리타와 아사카는 자신들의 관계를 당분간 비밀로 두기로 했다.
내전을 앞두고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굳이 분홍빛 기류를 흘리고 다녀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황제 부부의 부하들끼리 연애를 하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평소에 가깝게 지내던 자들이라면, 관계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기엔 단서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 봐. 돌아가면 청혼할 거야?”
“몰라요, 모릅니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도 않았는걸요. 솔직히 중간에 싸우러 나오는 바람에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은데…….”
“그래, 아직 시간이 있긴 하지. 그래도 너무 미적거리진 마. 둘 다 결혼 적령기잖아.”
키르타는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진지하게 조언했다. 아사카도 덩달아 심각해져서 엄숙하게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