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은 다정한 원수와-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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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사냥 도중에 죽었다고 알려졌다가 뒤늦게 고향으로 돌아온 어느 족장의 첫째 남편.
마차째로 절벽에서 떨어져 한동안 실종되었다가 기어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끈질긴 황제.
둘 다 시체를 남기지 않은 채 망자로 공표되었고, 한참 뒤에 끝내 살아 돌아와 다른 이들의 삶을 혼란에 빠트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키르타는 제 모친의 첫째 남편에겐 악감정이 없었다. 그 사람이 몇 년 만에 살아 돌아와 제 친부를 밀어냈다고 해서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친부의 나약함을 생각하면 때때로 쓰디쓴 원망이 치밀었다.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사내를 마음에 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아내가 죽은 걸로 알려진 첫째 남편을 잊지 못했다는 걸 다 알고 감수했으면서, 왜 끝까지 버티지 못했을까.
정말로 사랑했다면, 상대방을 몸으로 유혹하고 다른 사내의 대용품이 되어서라도 곁에 있고 싶었던 거라면, 끝까지 버텼어야지. 절박한 만큼 견뎠어야지. 속이 문드러지더라도 웃었어야지.
하지만 키르타의 친부, 족장의 사랑받지 못한 둘째 남편은 결국 첫째 남편의 귀환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떠났다.
친아들을 두고 도망쳤다. 그토록 사랑했다던 여인과 피를 나눈 자식을.
친부를 향한 키르타의 감상은 그토록 냉담했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내의 자식인 제게도 친절하게 대해 준 모친의 첫째 남편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크 레케온의 경우는 달랐다.
키르타는 계속 망자로 남지 않고 뻔뻔하게 살아 돌아온 폐황제를 원망했다. 아니, 원망을 넘어 혐오했다. 싸늘한 경멸이자 진노였다.
‘렌티아를 위해 그놈은 죽어야 해.’
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그분이 사랑하는 이 나라를 위해.
외도와 사치를 일삼던 한심한 폐황제는 깔끔하게 사라지고 내전이 완전히 종식되는 게 제국의 미래에도 훨씬 나을 듯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폐황제를 찾아야 했다.
키르타는 서부 일대를 꼼꼼히 훑으며 반군 잔당을 처리하는 와중에도 곳곳에 수색대를 보내 루이크 레케온의 흔적을 쫓았다.
그러다 출정한 지 약 두 달째 되는 시점에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제보가 들어왔다.
“확실한가?”
“네, 확실합니다. 방금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다프네 멜레인, 폐황제의 정부인 그녀가 꼬리를 잡히면서 루이크 레케온도 함께 붙잡혔다는 제보였다.
자그만 밀항선을 타고 남부로 도망치려던 그들은 현재 항구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럼 당장 출발하지.”
폐황제의 행방을 알아낸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키르타는 제보를 듣자마자 소수 정예의 부하들을 데리고 신속하게 출발했다.
싸움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와 출생을 앞둔 아기에게 돌아가기 위해.
* * *
그동안 쥐새끼처럼 꼭꼭 잘만 숨어 다니던 루이크 레케온이 두 달 만에 발각된 이유는 의외로 허무했으나, 동시에 그와 같은 한심한 폭군의 말로에 썩 어울리기는 했다.
시작은 정부의 배신이었다.
다프네 멜레인은 자신이 야심 차게 유혹한 황제가 두 번이나 쫓기는 신세가 되자 자신의 선택을 뒤늦게 후회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았다.
‘황제를 버리고 혼자 도망치자. 평생 이딴 식으로 범죄자처럼 숨어 살 수는 없어. 고작 이런 걸 바라고 황제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고……!’
다프네가 꿈꾼 건 잘나가는 황제의 애첩, 나라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력한 남성의 총희로 호의호식하는 미래였다.
한동안 그런 미래는 실제로 그녀의 손아귀에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황후 자리마저 탐냈다.
야만족 군대의 침입으로 나라가 뒤집히지 않았더라면 황제와 황후의 사이는 그대로 계속 나빠졌을 테고, 기어이 이혼이 성사됐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야만인의 침략과 피난길에 일어난 마차 사고, 렌티아 레케온의 즉위는 다프네의 빛나는 꿈에 구정물을 들이붓고 잘근잘근 짓밟았다.
그래도 몇 달 전까지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었다.
모두가 죽었다고 믿는 루이크 레케온이 실은 아직 살아 있으니, 그를 다시 황제로 세우기만 한다면 제게는 황후의 미래가 보장되리라.
‘황후는 무슨, 얼어 죽을.’
이제는 헛된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였다. 영리한 다프네 멜레인은 현실을 직시했다.
‘이대로 가면 황후는커녕 반역자로 몰릴 거야.’
도망쳐야 했다. 호화로운 미래를 얻어 낼 수 없다면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했다.
그리고 자꾸 패배만 거듭하는 루이크 레케온 따위는 이제 짐 덩어리에 불과했다.
‘한심한 놈. 맨날 입만 살아서 황후를 욕하던 놈이 정작 그 황후한테 처참하게 깨졌잖아?’
다프네는 조용히 탄식했다. 어째서 루이크 레케온은 이렇게 무능할까? 왜 하필 자신이 잡은 동아줄은 이렇게나 썩어 있을까?
‘내게 한 약속도 전부 빈말이었지. 나를 황후로 만들어 주겠다고 호언장담했으면서, 본인 황제 자리도 지키지 못한 멍청한 놈.’
이제는 그런 놈을 이용할 생각은 버리고 스스로 살길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녀는 은밀히 밀항 배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황제 놈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요즘 밤마다 어디를 그렇게 몰래 다니는 거지?”
능력은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놈, 잔머리 하나만큼은 확실히 돌아가는 놈.
“다프네, 너, 혹시… 나를 배신하고 혼자 떠나려는 건 아니지? 설마 그런 건 아니지?”
두 사람의 초라한 은신처에서 루이크는 충혈된 눈으로 다프네를 쳐다보았다.
그의 거칠어진 얼굴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 섰다가 바닥으로 추락한 자의 몰골이었다.
다프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진의를 들켰다간 저 미친놈이 자신을 진심으로 죽이려 들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 루이크는 반쯤 돌아 있었다.
당연히 제 것이라 생각한 것들을 ‘한낱 계집’에게 전부 빼앗기고 진창을 구르게 되었으니, 으스러진 자존심은 더욱 뾰족해져 공격성만 짙어졌다.
여기까지 와서 저놈에게 맞아 죽는 건 사양이었다. 다프네는 루이크의 의심이 짙어지기 전에 가련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제가 폐하를 두고 떠날 리가 없잖아요. 저는 폐하 없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혼자 대체 뭘 할 수 있겠어요?”
다프네가 황제의 애첩 자리를 날로 먹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자존심만 드높고 자존감은 바닥인 저 열등감 덩어리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폐하, 제게는 폐하뿐이에요. 온 세상이 저를 외면하고 가족마저 저를 부정할 때 오직 폐하만이 제 편을 들어 주셨어요. 그런 폐하를 제가 떠날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어떻게…….”
그녀는 그를 꼬박꼬박 폐하라고 부르며 하염없이 자신을 낮추고 제 무능함과 연약함을 거듭 강조했다.
아름다운 여인이 가냘픈 눈물 연기를 펼치며 여린 자태로 파고들자 폐황제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래, 그렇지. 나 없이 너는 아무것도 못 하지. 그런 네가 나를 떠나서 어디를 가겠어.”
그러나 광기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폐황제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여인을 움켜잡았다.
다프네는 통증과 두려움을 참으며 그를 감내했다. 전부 본인의 생존을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왜, 밤마다 그렇게 몰래 돌아다닌 거지?”
“밀항선을 알아보고 있었어요. 우리 둘이 함께 타고 도망칠 배를요. 하지만 폐하께서 알아내신다면 언짢아하실 것 같았어요. 폐하는 정말로 용감하신 분이니까, 맞서 싸우는 대신 도망치자고 빌어도 들어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
다프네는 어설픈 거짓말로 상황을 악화하느니 부분적 진실을 털어놓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번에도 그녀의 영리함은 먹혀들었다.
“그러니까 미리 배부터 알아보고 나서 모든 게 확실해지면 내게 말하려고 했다는 거지?”
“맞아요, 폐하. 폐하께 비밀을 만들어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다프네. 네가 왜 그랬는지 이해해.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맙다.”
남자의 말투가 다정해졌는데도 다프네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그저 감격스러운 듯, 물기 어린 속눈썹 너머로 그를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저야말로 감사해요, 폐하. 끝까지 저를 버리지 않아 줘서.”
그래, 그는 다프네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상대방을 버릴 방법을 궁리하느라 머릿속이 시끄러운 쪽은 다프네였다.
며칠 뒤, 다프네는 별수 없이 루이크를 데리고 자신이 알아본 항구로 향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곳에서 황제를 떨쳐 낼 새로운 방법을 강구했다.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해.’
무모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다프네는 그만큼 절박했다.
이렇게 계속 폐황제에게 매여 있다간 제명에 죽지 못할 거라는 근거 있는 확신이 있었다.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하겠지만, 어차피 이미 목숨은 걸고 있잖아?’
만약 그녀가 익명으로 항구 치안대에 제보를 넣는다면? 모일 모시에 폐황제가 밀항을 시도할 거라고 몰래 정보를 흘린다면?
그렇다면 치안대는 반역자를 잡기 위해 출동할 것이고, 그들이 언제 나타날지 알고 있는 다프네는 미리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하면 된다.
물론 아슬아슬한 계획이었다. 치안대가 너무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고, 그녀가 어떤 핑계를 대든 폐황제에게 먹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다프네는 또다시 도박을 선택했다. 그녀가 처음 수도로 상경해서 황제의 정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처럼.
처음에는 모든 게 계획대로 되는 듯했다.
다프네와 루이크는 어두운 밤에 항구에 도착했고, 여자는 남자를 자신이 밀고한 장소로 안내했다.
‘곧 이곳에 치안대가 들이닥칠 거야.’
그녀가 익명으로 제보한 밀항 시간까지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이제 슬슬 도망쳐야 할 때였다. 다프네는 조용히 심호흡했다.
“폐하, 제가 주변을 살펴보고 올게요. 여기가 정말 폐하께 안전한 곳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주변을 살펴보다가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위험하지 않겠니? 그냥 여기 같이 있자.”
“아니에요, 폐하. 폐하의 안전을 위한 일인데 어떻게 마냥 몸을 사릴 수 있겠어요? 제가 조심스럽게 둘러보고 올게요. 믿어 주세요,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