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님말고 어머님R-17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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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5화 〉 174화. 해결(3)
* * *
“그, 그럼 오늘부터 다시 성에서 지내도 될까…?”
….
“…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고개만 빼꼼 들이민 위니의 뒤로, 그녀의 배보다 훨씬 커다란 짐들이 보였다. 몸만 내보냈던 거 같은데, 언제 짐이 저렇게 많아졌대? 모니카는 순간적으로, 위니가 일부러 짐이 많다는 걸 강조해 그녀가 쉽게 쫓아내지 못하게 하려는 건지 고민했다.
“우선 들어와서 얘기해.”
“그, 그래도 될까…요?”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 쓰지 말고.”
“아, 하하….”
어색한 웃음을 한 번 흘린 위니가, 곧이어 끙끙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련하게 그 큰 짐을 전부 메고…. 어쩌면 정말 그녀의 친구가 그 사이에 영악해져서, 일부러 저렇게 불쌍해 보이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짓만 골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모니카는 생각했다.
“하….”
모니카가 방에 설치된 밧줄을 잡아당겼다. 이걸 잡아당기면, 야간 당직을 서고 있던 사용인에게 신호가 갈 테니. 금세 저 짐들을 정리하러 오겠지. 오늘이… 아마 다리야였나?
“그거 놓고 들어와.”
“으응….”
소심한 걸음을 옮긴 위니가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침대 옆 작은 간이 의자에 걸터앉았다. 아직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배가 나온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저건 그냥 쫄아서 저렇게 걷는 거겠지. 위니와 마주보고 이야기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모니카가, 이내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이불로 몸을 가렸다.
“왜, 왜 알몸이야?”
물론 이미 위니의 눈에 한 번 들어온 뒤였지만. 모니카는 부정하는 것과 당당히 나가는 것, 둘 중 어느 방향이 자위 중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당당하게 말했다.
“벗고 자면 얼마나 시원한데.”
“아니, 그래도 체통이라는 게….”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그 말을 들은 위니의 표정은, 마치 ‘나는 그 아무도가 아니냐’고 묻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잠시 코를 킁킁거리면서 방 안의 냄새를 맡는 게,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 같아 괜히 찔린 모니카가 서둘러 말했다.
“아무튼, 뭐 편한대로 해. 여기도 네 방 쓰라고 만들어둔 거니까….”
“…정말?”
“자꾸 물어보면 무른다? 흥.”
아까 다 정리해놓고 아직까지도 눈치를 보고 있어. 원래 이렇게 간단하게 봐줄 생각은 없었는데, 위니가 워낙 미안해 해서 넘어가주는 거다. 능글맞기만 한 누구와는 다르게. 좀 답답하긴 해도 반성도 많이 하는 것 같았고.
결정적으로, 그녀가 아까 그 약을 먹으면 용서해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안에 든 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녀를 믿기 때문에 마셔줄 수 있는 친구니까. 모니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녀에게 위니라는 친구가 사라지면 너무 힘들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모니카….. 흐읍.”
모니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니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펑펑 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도 눈이 빨갛게 부어 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감정이 잦아든 듯, 아까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지는 않고 조용히 훌쩍였다. 모니카가 조심스레 한쪽 팔을 벌리자, 위니가 그 품에 얼굴을 묻고 훌쩍였다.
“미안… 미안해…. 내가 진짜 잘할게. 흐윽.”
“…알면 됐어.”
이렇게 미안해하면서도 저지른 걸 보면, 결국 사랑의 힘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만큼 그 전통과 대를 잇는 게 중요하다는 건지. 위니에게 들은, 멜버른 자작가의 전통이 생각난 모니카가 답답하다는 듯 위니의 등짝을 한 대 때렸다.
“그런 이상한 전통이 있으면 말을 할 생각을 해야지. 혼자 이상하게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니야.”
“아, 아니 근데… 말하기에는 너무 황당한 내용이잖아. 훌쩍.”
…많이 이상한 내용이기는 하지. 만약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러이러한 연유로 네 남편을 하룻밤만 좀 빌리겠다, 위니가 그렇게 말했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상한 만우절 농담이나, 얘가 이상한 약을 주워먹고 정신이 돌아버렸나 했을 거 같기는 한데….
“그런 내용일수록 더 말할 생각을 해야지!”
“…안 걸릴 수도 있었던 건 맞잖아….”
실제로 아이가 생기고 한참 지날 때까지, 모니카는 위니가 아이가 생겼다는 것만 알 뿐, 그 아이가 에드워드의 아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위니가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걸 아는 모니카가 위니에게 말했다.
“위니. 도둑이 왜 항상 잡히는지 알아?”
“…흐읅. 내가 해준 얘긴데, 당연히 알지.”
안 걸리면, 결국 걸릴 때까지 하는 게 사람이니까. 위니는 뭐… 자기가 남자한테 이렇게 빠질 줄 몰랐다고 하는 거 보면, 정말 계획은 아이만 가지는 거였을지도 모른다고, 모니카가 생각했다.
“흠, 그럼 이제는 언니라고 불러.”
“…아이는 내가 먼저 생겼는데…?”
“요게 진짜. 언니라고 안 하면 애아빠 얼굴도 못 볼 줄 알아.”
“미, 미안해 언니….”
이렇게 얘기하고 있으니 정말 다 풀리고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위니의 뱃속에 들은 아이가 조카 내지는 또 다른 아들 정도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밉지도 않다. 하긴 우리 순진한 위니한테 무슨 잘못이… 있긴 하지만, 그걸 꼬신 에드워드가 더 나쁜 거지.
“손은 또 왜 이렇게 차가워.”
“밖이 추워서….”
언니 소리에 만족한 모니카가 정말 언니 노릇이라도 하듯, 위니를 챙겼다. 아이도 있는데 몸을 따뜻하게 유지해야지. 생각해보니 오늘까지는 위니의 방을 아무도 안 쓴 터라, 청소는 커녕 난방 준비도 제대로 안 되어 있을 듯 했다. 잠시 고민하던 모니카가, 좋은 해결책을 찾았다는 듯 말했다.
“네 방이 아직 너무 준비가 안돼서 안 되겠다. 오늘은 오랜만에 같이 자자.”
“여, 여기서?”
“왜. 언니랑 자는 게 싫어?”
도리도리.
어렸을 때는 나름 자주 그러면서 놀지 않았던가. 모니카가 백작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달에 한 번씩은 꼭 있는 행사였는데. 오랜만에 모니카와 함께 잘 생각에 위니도 기분이 좋아졌다.
“잠옷은 있어?”
“잠옷 갖고 왔… 아, 짐이 밖에 있지.”
그 사이에 열심히 일을 해서 짐들을 전부 가져다 놓은 다리야 때문에, 모니카가 줄을 한 번 더 당겨 위니의 잠옷을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물론 그 전에 모니카는 벗어둔 잠옷을 다시 입었고 말이다. 모니카의 몸과 이불 안에서 나는 묘한 냄새와 습기를 위니가 수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짜 자위한 거 아니야?”
“아니야! 요새 속 터지게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
“흠, 흐흠.”
금세 잠옷을 가져다주는 다리야. 위니 역시 잠옷으로 갈아입고, 어렸을 적, 같이 잠옷을 입고 한 침대에서 잤던 것처럼. 모니카의 넓은 침대 위에 모니카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두 사람의 나이와 위니의 부풀어 오른 배 정도일까. 모니카는 위니의 배를 쓰다듬어 보며 그 감촉에 신기해했다. 그런 친구를 바라보며 위니가 물었다.
“아주머니랑은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에드워드의 또 다른 여자,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어머니인 베라를 떠올리자 모니카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머니랑 남자 문제로 이렇게 어색해질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의 남자 때문에 말이다.
모니카가 어머니를 정말 사랑하고, 잘 챙기면서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다고는 해도. 결국은 친구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그녀가 위니에게 한 것처럼 쫓아내겠다고 협박하거나, 어르고 달래고 온갖 짓을 다 할 생각은 차마 들지 않았다.
이미 위니도 용서해줬는데 어머니한테만 날카롭게 굴기도 애매하고. 이미 처음에 고백할 때부터 울면서 눈물을 보였던 어머니였기에. 그녀도 화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넘어가버린 바람에 이제 와서 감정적으로 나서기도 어색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전과가 있는 사람이 잘 알 거 같은데.”
“그, 그러게….”
“흠….”
친구처럼 막 대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어머니를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는 모니카 옆에서, 위니는 양심상 조용히 누워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위니는 되는데 왜 나는 안돼?”
“위니는 용서했지만 당신은 아직 못했거든.”
라고 하네요.
혼자서 쓸쓸하게 방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 날. 모니카가 위니랑 같이 잤다는 말을 듣고, 억울한 마음에 모니카에게 물었지만 냉혹한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베라 누나는….
“나도 자양강장제라도 한 병 마시면 용서해주려나….”
“…누나한테도 뭐라고 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우리 딸이 그렇게 모질지는 못해서. 그런데….”
예전에는 살갑게 대해주던 딸이, 어색하고 딱딱하게 베라 누나를 대하는 게 버릇없는 것보다 더욱 마음의 상처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도 크게 다른 취급을 받는 건 아니라서, 딱히 해줄 말도 없었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