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2화. 청혼(2)

〈 3화 〉2화. 청혼(2)

“하하, 에드워드 경. 무슨 농담을 그렇게.”

“농담이 아닙니다. 저는 베라 율스타인 양에게 청혼합니다.”

“…농담에도 정도가 있죠. 빨리 그 반지를 저한테 돌려주세요. 지금 주시면 없던 일로 넘어갈게요.”

니 성격에 퍽이나 없던 일로 하겠다. 내가 청혼 반지를 베라에게 내밀자, 모니카가 격분했다. 모니카는 화를 낼 때 언성을 쉽게 높이지는 않는다. 차갑고 고요하게 상대를 몰아붙일 뿐. 눈치 빠른 시종들이 황급히 식당 밖으로 나갔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농담이 아닙니다.”

“뭔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미 이거 다 협의된 사안이에요. 자꾸 그러면 계약 위반이라고요.”

모니카가 씹어 뱉듯 말했다. 예상한 것보다는 고상한 말투로 반발하고 있다. 쌍욕이 안 나왔으니 많이참은 거지. 자기 어머니 앞이라 그런가?

“예. 물론 승리를 모니카 양에게 바치기로 했었죠.”

“근데요?”

모니카가 도끼눈을 뜨고 반문한다. 저 표정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괜찮은 척 대답을 했다.

“…하지만 저는 승리를 바치겠다고 했지, 저와 이 반지를 모니카 양에게 바치겠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상식적으로는, 레이디에게 기사가 승리를 바치겠다고 하는 건 꼬시는 작업 멘트나 마찬가지이다. 가문 간의 사전 협의로 내가데릴 사위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니, 자신과 결혼하게 될 것이라 여기고 있었겠지.

“에드워드 경,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될 것 같군요.”

“왜죠?”

“아까 모니카가 말한 것처럼, 이미 가문 간 협의로 율스타인 가문과 마운트베른 가문이 결혼을 통해 이어지기로 했어요. 에드워드 경과 제 딸 모니카는, 두 가문을 잇는 연결고리가 되는 거예요. 평민의 결혼도 아니고, 가문의 결정까지 반영된 중대사를, 단순히 마음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르거나 바꿀 수는 없어요.”

이 정도 반론은 예상했던 범위 내다.

“가문 간의 협의에 어긋나는 청혼이 아닙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거기까지만 하세요.”

“모니카. 예의를 갖춰 말하렴.”

모니카가 흥분하자, 베라가 주의를 준다. 아직 열아홉인만큼, 항상 차분하고 냉철하던 기억 속의 그녀보다는 감정 표현이 더 격하다.

“저와 모니카 양이 두 가문 간의 연결고리가 된다고 하셨었죠?”

“그렇죠.”

“저와 율스타인 부인이 결혼한다고 해서, 그 연결고리가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마운트베른의 일원과 율스타인의 일원이 결혼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 혹시 그거예요? 뭐라도 더 뜯어내려고?”

뭐? 뭘 뜯어내?

어이가 없어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모니카가 추가적으로 쏘아붙인다.

“이래서 남자들이란! 언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 여자를 벗겨 먹을 궁리만 하지! 당신도 똑같아!”

“모니카 율스타인!”

모니카는 원래부터 남자를 싫어했다. 전생에서도 내가 그나마 신체 접촉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남자 취급 받았었으니까. 저 정도의 발언에는 아무런 데미지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가만히 넘어갈 이유는 없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위압적이던 여백작 모니카 율스타인이 아니라, 젖살도 빠지지 않은 풋내나는 율스타인 영애다. 아무리 무시당하면서 살았다지만 지금은 참지 않아도-

“죄송합니다, 에드워드 경.”

“예?”

“엄마!”

“가만히 있으렴!”

베라가 나서서 먼저 사과를 하니, 내가 화를 내기가 애매해졌다.

“저희 딸이 충격적인 얘기를 들어서 잠시 흥분했던 것 같아요. 오늘 밤 안에 결론 지을 이야기는 아닌 것 같으니 우선 방에서 쉬고 계셔 주시겠어요?”

“음, 네. 알겠습니다.”

모니카의 불만스러운 눈초리를 뒤로 하고, 식당을 나섰다. 그 차가운 눈빛에 온 몸이 위축되는 느낌이었지만, 티내지 않고 빠르게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모니카와의 그 지옥 같은 생활은 피해갈 것이다.



“아유, 이게 무슨 일이람…”

“역시 꿍꿍이속이 있는 거였어. 그나마 봐줄 만하게 생겨서 참고 있었는데…”

베라 율스타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윗감이라고 옆 백작가에서 데려온 청년은 갑자기 자신에게 청혼을 하고, 딸아이는 갑자기 어린애처럼 떼를 쓰며 화를 내고 있다.

“모니카. 품위를 잊지 마렴.”

“엄마!”

모니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른 모습이다.

“이래서 결혼은 싫다고 했잖아! 눈빛도 음흉한 게 딱 봐도 수상해. 그런 남자가 우리 백작가에 장가를 온다니, 말도 안돼!”

그렇게 눈빛이 음흉하지는 않았는데. 차라리 지쳐 보이는 눈동자 같은 느낌이었다고, 베라는 생각했다. 에드워드의 강렬한 눈빛이 베라의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잘생긴 청년이 그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 솔직히 말해 어머니이기 전에 여자로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처녀 시절로 돌아간 듯 가슴이 뛰었다. 모니카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모니카. 네가 결혼하는 게 이 어미의 소원이란다.대는 이어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보통 백작가 같았으면 5년 전에 시집을 갔을 거야. 네가 작위 계승권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일반적인 귀족 영애가 스무 살이 다 되어 가도록 시집을 가지 않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란다.”

베라의 말에 모니카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노처녀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파투낸 혼담만 몇 번이었던가?

“마운트베른 백작가의 차남 정도면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사윗감이야. 이번 혼담도 무산되면 남작가에서 사윗감을 찾아야 할텐데, 율스타인 남작가가 되면 이 어미는 정말 슬플 것 같구나.”

“알았어…”

모니카도 자신 때문에 가문의 작위가 내려가는 것은 싫었다. 남작가의 자제와 결혼하게 된다면 귀천상혼에 의해 자식들은 남작위밖에 승계받지 못한다. 율스타인 남작, 입 밖으로 꺼내기도 싫은 발음이다.

“나름 괜찮은 청년 같던데, 잘 좀 꼬셔 보렴. 자고로 여자는 결혼을 해야 행복해지는 법이란다.”

“거짓말. 엄마는 행복한 적 없었으면서.”

“…나는 우리 딸만 봐도 행복했어요.”

모니카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 베라가 아버지 때문에 웃었던 일은 거의 없었다. 대외활동도, 관심을 받는 일도 없이 백작가 안에서만 갇혀 있는 삶. 모니카 자신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듯,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어버리기 전까지 어머니의 삶은, 서서히 시들어가는 꽃 같았다.

‘그래, 결혼은 해야지 뭐.’

평생 자신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다.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원하시는데, 그까짓 결혼 한 번 하는 게 뭐 어렵나. 모니카 자신이 시집가는 것도 아니고, 데릴사위 하나 들이는 것이니 크게 거슬릴 것도 없다. 명예직처럼 ‘부군’이라는직함 하나 달아주고 팔다리를 다 잘라 버리면 되니까.

‘뭐, 눈요깃거리 정도는 되겠지.’

그나마 에드워드의 외모가 모니카의 마음에 들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어지간한 남성들에게는 생리적인 혐오감을 느끼는 그녀에게, 이성적인 호기심이 균형을 맞출 정도로 크게 느껴지는 상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다시 청혼을 하면 받아줄게.”

그렇게 모니카는 베라에게 당부를 듣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아, 좆됐다.’

다음 날, 잠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어젯밤의 기억에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제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우승했다는 기쁨에, 기억보다 상냥한 모니카의 태도에 막 나가듯 질러 버렸다. 뭔가에 취했던 건가? 와인은 마시지도 않았는데. 장모님에게 청혼이라니, 모니카가 석달 열흘을 갈구고도 우려먹을 소재였다.

‘아냐, 정신차려. 벌써부터 쫄면 안되지.’

내가 미래를 살다 온 건지 미래에 대한 꿈을 꾼 건지 과거로 돌아온건지는 모른다. 그 중 뭐가 됐든, 중요한 건 지금 내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다는 것이다. 인생의 처참한 오답에 대한 기억을 가진 채로 말이다.

그런 점에서 베라에게 청혼한 것은 어떻게 보면 괜찮은 선택이었다. 어젯밤에는 가시밭길을 피하기 위해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옆길로 뛰어든 느낌이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길 같달까.베라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설사 이 길 역시 가시밭길이라 해도, 기껏해야 내가 기억하는 삶 정도겠지. 내 결혼생활의 시작점부터 비틀어버린 이상, 확실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지금 내게 단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면,

“에드워드 경, 기침하셨습니까.”

이번에는 기억처럼 비참하게 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식당에는 베라 혼자 앉아 차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니카는 먼저 식사를 마친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아침부터 지랄하는 걸 들을 필요는 없겠네. 개운한 심정으로 베라에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율스타인 부인.”

“좋은 아침이에요. 원래라면 아침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드렸겠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식당으로 불렀어요. 괜찮죠?”

“물론입니다. 모니카 양은…?”

“따로 먹는다고 하더군요.오히려 잘 됐어요.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모니카가 들어서 좋을 게 없으니까요. 우선 식기 전에 드세요.”

베라가 손짓하자, 메이드가 따뜻한 빵과 수프를 내놓는다. 역시 아침에는 든든-하고 뜨끈-한 수프지.

“흐흠.”

아침을 거의 다 먹어가자, 차를 다 마신 베라가 헛기침을 했다. 내가 수프의 마지막 한 숟갈을 떠먹으며 쳐다보자, 어젯밤의 이야기를 꺼낸다.

“에드워드 경. 어젯밤에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