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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다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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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07. 다시, 우리

* * *

“채원아, 자니?”

저녁 9시. 카페와 과일가게를 나란히 마감하고 명섭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수경은 어두컴컴한 채원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벌써 누웠네. 약은 먹었어?”

“으음… 몇 신데 지금.”

“얘 좀 봐. 여태 시간도 모르고. 너 설마, 종일 잔 거야?”

“모르겠어….”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한 끼도 제대로 안 먹고, 움직이지도 않고, 복장 터지게 정말… 좀 일어나. 일어나서 과일이라도….”

“됐어요. 머리 아프다니까.”

엄마의 성화에 덮고 있던 이불을 얼굴 가까이 끌어당긴 채원은 미간을 찡그리며 겨우 목소리를 냈다.

“불 다 꺼 놓고 하루 온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는데, 머리가 안 아프고 배겨? 이런 꼴 보여주려고 청주까지 내려온 거야? 엄마 속 뒤집어 놓으려고?”

“수경 씨, 거 참… 누가 누구 속을 뒤집는다 그래… 채원이 방해 말고 이리 나와요, 나와. 밥보다 잠이 더 보약일 때도 있는 거야. 좀 쉬겠다고 엄마 집 내려온 딸내미를 왜 이렇게 매일 들들 볶아?”

“저러고 백수짓 한 지 벌써 열흘 가까이 됐잖아요. 연초부터 보름 휴가가 말이나 돼요? 그러다 정말 잘리기라도 하면….”

“요즘 어떤 회사가 본인 연차 쓴 걸 가지고 직원을 해고한답니까. 괜한 걱정 말고 얼른 나오래도 그러네.”

누에고치인 양 하얀 솜이불을 둘둘 말고 몇 날 며칠 꿈쩍도 하지 않는 채원. 그런 딸을 향해 언성을 높이는 수경과 모녀 사이에서 진땀을 빼고 있는 명섭.

근래 들어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는 청주시 분평동의 일상이다.

* * *

“명섭 씨가 나 대신 잔소리 좀 해줘요. 그쯤 점수 땄음 됐잖아 이제.”

화장대 앞에서 치덕치덕 크림을 바르던 수경이 볼멘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어디 점수 따려고 이러나. 채원이 나이를 생각해 봐요. 서른 넘은 딸내미를 무슨 수로 말려 글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거리던 명섭은 때아닌 불똥에 당황한 듯 시선을 회피했다.

“쟤 저렇게 내버려 뒀다간 큰일 나게 생겼으니 그렇죠. 어릴 적보다 고집이 더 세진 거 같아. 누가 데려갈지 정말….”

“그 사진사가 데려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수경 씨가 서울 가서 담판 짓고 왔다면서요.”

“모르겠어요 그것도. 채원이 저것이 뒤늦게라도 알면 길길이 날뛸 텐데, 내가 괜한 짓 벌였나 싶어….”

“무슨 일을 벌였는데? 사람 괜찮다며.”

“괜찮다 뿐이게요, 솔직히 분에 넘치지. 명섭 씨도 같이 갔으면 아마 깜짝 놀랐을 거야. 사진관이 아니라 아예 회사를 차렸더라고. 그런데도 어깨에 힘 들어간 거 하나 없이 겸손하고 예의는 또 얼마나 바른지.”

“허허, 그 청년 누군지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네. 수경 씨 마음 단시간에 얻어내기가 쉬운 게 아닌데…. 그럼 대체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예의는 바른데 채원이랑 다시 잘해보겠단 얘긴 안 해?”

“후우, 그게 아니라….”

수경은 남은 크림을 손등에 펴 바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스튜디오를 나서기 전 승재가 그녀에게 건넸던 말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제가 정윤호 회장을 직접 만나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 안 돼요, 절대 안 되지 그건. 섣불리 말 꺼냈다가 강승재 씨만 괜히 우스운 사람 될지 몰라. 말했잖아요. 채원이에 대해 안 좋은 오해를 할까 봐, 그게 억울해서 찾아온 것뿐이에요. 정씨 성 가진 사람들한테 지난 일 알리고 싶지도 않고, 정말이지 나랑 채원이는 서일그룹에 티끌만큼도 바라는 게 없는데 뭣 하러 그런 수고를….’

‘어머님과 채원이가 서일 쪽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한번 해보겠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창길 회장이 가족보다 더 김 비서를 믿고 의지했다는 사실을, 이제는 정윤호든 정윤진이든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김 비서 손바닥 위에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 했습니다.’

‘우리 채원이가… 그러던가요?’

‘네. 채원이 일거수일투족 감시하고 간섭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놈입니다. 지금이야 충견 노릇 한다 치더라도 앞으로는 모를 일이죠. 서일을 배신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징글징글한 놈. 정창길 그 노친네보다 아주 더하면 더했지….’

‘제가 김 비서 모르게 정 회장 만나보겠습니다. 작게나마 도움 보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눈빛이 하도 간곡하여 수경은 더 이상 승재를 막아서지 못했다. 평생 지고 가려 했던 이 무거운 짐을 선뜻 나누겠다 손을 내미니, 일부 약해지는 마음도 있었다. 수경 역시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정윤호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김 비서를 떼어 내달라 해볼까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행여 상황이 더 나빠질까 두려워 번번이 결심을 접곤 했던 것이다.

“수경 씨,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채원이 걱정돼서 그래요?”

말을 하다 말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었는지, 가까이 다가온 명섭이 수경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채원이 뭐라 할 거 없다니까. 당신도 나한테 통 입을 안 열잖아. 누굴 탓해? 모전여전이지 뭐.”

“내가 그랬나….”

머쓱하게 웃는 수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명섭이 넌지시 한마디를 보탰다.

“채원이한테 한번 가볼게요. 수경 씨까지 병날까 봐 걱정이야. 더는 안 되겠어.”

“정말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대신, 나 미움받으면 윤 사장이 책임져요. 이제 겨우 채원이랑 친해졌는데, 거 참….”

“이미 책임지고 있잖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수경은 명섭의 등을 침실 문밖으로 떠밀었다. 망설임이 길어져봤자 득이 될 게 없었으니까.

* * *

“여기 보면, 과일별로 가격 태그 붙여놨거든. 모르는 거 있음 바로 물어보고, 흥정할 땐 무조건 깎아주면 안 돼. 그런 손님은 나한테 보내. 그럼 아저씨가 알아서 할게. 포스기 사용법은 차차 익히면 되고, 아 참, 돈 보관할 땐 열림 버튼이 이거, 거스름돈은….”

쨍한 햇빛을 등지고 선 게 얼마 만인지. 새하얀 피부가 그새 더 창백해진 채원은 머리를 단정히 내려 묶고선 명섭의 설명을 귀담아듣는 중이었다.

“엄마 말은 죽어도 안 듣더니, 아저씨 말 한마디에 쪼르르 기어 나온 것 좀 봐.”

팔짱을 낀 채 두어 걸음 뒤에서 채원과 명섭을 지켜보던 수경은 허탈한 미소를 엷게 지었다.

머리가 복잡할 땐 단순 노동이 최고라며, 과일 가게나 엄마 찻집에 나와 일손을 보태 달라 설득하는 명섭에게, 채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 침대에 누워 눈물을 짜내는 것보단 몸을 쓰는 편이 시간 때우기엔 더 나을 듯싶기도 했다.

물론 아저씨의 첫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지만.

“이왕 도와줄 거면 2층 올라와 설거지나 할 것이지, 생전 안 해보던 과일을 팔겠다고.”

“카페 일당은 얼만데?”

“뭐?”

“아저씨는 시급 챙겨주신다고 했거든….”

무표정한 얼굴로 조곤조곤 입술을 움직이는 채원.

“뭐? 시급? 어쩐지 저것이 순순히 말을 듣는다 했더니… 너, 엄마 집 얹혀산 지 벌써 열흘 넘은 건 알아 몰라?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돈을 받고 알바를 하려 드네.”

오랜만에 듣는 딸내미의 목소리가 반가웠으나 수경은 평소와 다름없이 채원을 대했다. 잠은 좀 잤니, 뭐라도 챙겨 먹어야 하지 않겠니, 못다 한 잔소리는 꾸욱 눌러 삼켰다. 억지로 추스르고 나온 애를 괜히 또 건드려 긁어 부스럼 만들 수는 없었다.

“명섭 씨도 참… 고심해서 꺼낸 카드가 겨우 돈이에요?”

“고급 인력 부리려면 시급이라도 넉넉히 챙겨줘야지. 수경 씨는 얼른 올라가서 오픈 준비해요. 여기 일 참견 말고.”

어젯밤 수경이 명섭을 떠다민 것처럼, 이번에는 명섭이 수경의 등을 장난스럽게 밀쳐냈다. 훠이훠이 과장된 손짓까지 곁들여가며.

“엄마 말 너무 신경 쓰지 마. 속으론 좋으면서 괜히 저러는 거야. 어제도 밤새 채원이 걱정하느라 잠도 못 잤다고.”

수경이 카페로 올라간 것을 확인한 명섭은 고개를 돌려 채원의 표정을 살폈다. 혹 상처라도 받진 않았을까 염려되었던 모양이다.

“걱정 마세요. 저도 다 알아요. 저 때문에 요즘 아저씨랑 엄마랑 고생하시는 거.”

“나야 뭐… 네 엄마가 안달을 해 그렇지.”

“아저씨 말씀처럼 나오길 잘한 거 같아요. 광합성 하니까 훨씬 낫네요. 바람도 좋고.”

사람이 제법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임에도, 숨이 턱턱 막혀오던 서울 한복판의 텁텁한 공기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동안의 일들이 한갓 꿈처럼 아득히 멀어진 기분. 이대로 청주에 눌러앉는 건 어떨까, 엉뚱하게 발동된 회피 기제가 채원을 갈등케 했다.

“아저씨, 저… 여기 일 도우면서 조금만 더 쉬다 갈게요. 귀찮더라도 며칠만 눈감아 주시면….”

“무슨 소리야, 귀찮다니. 너무 그렇게 예의 차리면 아저씨가 섭섭하지. 우리 상관 말고 오래 있다 가도 돼. 회사에 몇 달씩 병가는 못 내게 되어있나? 하다못해 종이에 벤 상처도 며칠씩 쓰라린데… 서두르다 덧나면 평생 고생이니까.”

“네…. 감사해요, 아저씨.”

아저씨라는 호칭이 미안해질 만큼, 명섭은 언제나 채원을 진심으로 염려해주었다. 체념하고 살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슬그머니 채워준 그에게 언젠가는 꼭 고맙단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채원은 생각했다. 어쩐지 쑥스러워 오늘은 입을 다물고 말았지만.

“어머, 못 보던 아가씨가 있네? 여기서 일하는 분 맞죠? 딸기 한 팩에 얼마예요?”

“딸기가… 자, 잠시만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이 딸기 가격을 묻자, 채원은 허둥지둥 포스기 앞에 붙은 태그를 확인하며 딸기 가격을 읊었다.

“왼쪽 박스는 한 팩에 9,900원이구요, 우측에 죽향이라고 적힌 딸기는 15,000원이에요.”

“죽향? 맛이 많이 다른가? 왜 이렇게 비싸 이건?”

“아, 그게….”

채원은 난감한 눈빛으로 손님의 얼굴과 명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엊그제 아저씨가 맛이 아주 좋다며 접시에 내어주던 딸기가 죽향이었던가… 넙죽넙죽 받아먹을 게 아니라 이름이라도 제대로 물어볼 것을 그랬나 보다.

“죽향 딸기는 향이 진하고 새콤달콤하게 맛있습니다. 왼편 딸기는 달달한 맛이 강하고요. 고객님들마다 취향이 다르셔서… 저렴하다고 맛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니까요, 믿고 사가셔도 됩니다.”

명섭은 막힘없는 설명으로 망설이던 손님을 자연스레 붙잡았다.

“음, 난 새콤한 것보단 단 게 좋더라. 이 왼쪽 딸기 한 팩 주세요. 다음에 비싼 거 먹어보지 뭐.”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개시 성공. 손님이 건넨 만 원짜리 지폐를 공손히 받아 든 채원은 기둥 옆에 달린 비닐봉투 한 장을 툭 떼어낸 뒤 딸기를 담았다.

명섭이 알려준 대로 포스기를 누르고 금전함을 열어 백 원의 거스름돈을 꺼낸 게 전부인데도 벌써부터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단순 노동이든 뭐든, 안 해보던 일을 처음 시작하는 건 언제나 어려운 법이었다.

“저기, 아가씨! 이 사과 어떤지 맛볼 수 있어요?”

“네? 아, 잠시만요….”

“사장님, 내가 선물을 좀 하려고 하는데, 무슨 과일이 괜찮으려나. 가격은 5만 원 선이면 좋겠는데… 참, 보자기로 한번 싸줄 수 있죠?”

첫 손님 손에 무사히 딸기를 안겨주자마자, 다양한 고객들이 쉴 틈 없이 몰려들어 가지각색의 주문을 해왔다.

과일의 시식이나 포장을 요구하는 손님들은 일반적인 축에 속했다. 자신의 장바구니를 한가득 맡기고 사라진 아줌마, 단골이니 외상을 달아놓으라 명령하는 아저씨, 많이 샀으니 서비스 과일은 없는지 떼를 쓰는 할머니까지.

채원은 앉을 틈도 없이 허둥지둥 움직이며 손님의 비위를 맞추고 과일을 팔았다. 동네 장사라고 해서 절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저, 여기 귤은 얼만가요? 상자 말고 낱개로도 가능할까요?”

“네, 그럼요. 가격은 무게로 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바로 담아드릴게요.”

고작 몇 시간 흘렀을 뿐인데도 손님을 응대하는 기술이 제법 는 듯했다. 미소와 함께 상자에 든 귤을 능숙하게 꺼내던 채원은.

“한 스무 개 정도면 될까요? 몇 개나 필요하신지 말씀을….”

손님을 향한 문장을 끝맺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툭 풀려버린 손목.

후두둑, 바닥에 떨어진 귤이 또르륵 굴러 익숙한 로퍼 앞에 멈추었다.

“채원아, 뭐하고 섰어? 귤 떨어졌잖아.”

“…….”

“죄송합니다. 우리 딸이 도와주러 나온 건데 아직 좀 서툴러서….”

빈 박스를 정리하다 말고 황급히 뛰어나온 명섭이 멍하니 서있는 채원을 대신하여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이것도 같이 담아주세요.”

“네? 아닙니다. 그건….”

“대신, 계산은… 따님 분께 직접 해도 되겠습니까?”

마디가 단단한 남자의 손가락이 동그란 귤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따스한 햇살이 새하얀 손등을 적신다.

그리운 얼굴. 그리운 목소리. 그립고 그리웠던 너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늦깎이 장사를 시작한 지 벌써 10년, 늘어난 주름만큼 눈치도 늘었다.

훤칠한 남자 손님을 마주하자마자 얼음처럼 굳어버린 채원의 모습에, 명섭은 귤을 집어 든 저 청년이 ‘강승재’임을 직감했다.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채원아 아저씨 잠깐 엄마 카페 올라갔다 오마. 전구 갈아달라고 며칠 전부터 닦달하는 걸 깜박해서….”

작년 가을 큰맘 먹고 교체한 카페의 LED 등이 잘못됐을 리 만무하지만, 명섭은 대충 핑계를 대고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갔다. 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는 눈짓과 함께.

“…….”

붙잡을 새도 없이 저만치 멀어진 명섭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던 채원은 가지런히 진열된 과일들로 어정쩡 시선을 떨구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건지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지, 물어볼 말이 산처럼 쌓여갔지만, 차마 고개를 들진 못했다. 지금은 가뜩 차오르는 눈물을 최대한 눌러 삼키는 일이 먼저였으니까.

“이거… 계산 안 해줄 거야?”

듣기 좋은 중저음 톤의 음색이 어색한 공기를 잔잔히 갈랐다.

“채원아….”

그리고 또 한 번, 채원을 보채는 남자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들려왔을 때.

“총각, 손에 들고 있는 귤, 그건 얼마예요?”

“네?”

“동글동글 야무진 게 맛있어 보여서. 한 열 개만 담아줘 봐. 사우나를 오래 해서 그런가… 한겨울에 목이 타네, 목이 타.”

과일가게 앞을 지나던 아주머니 한 분이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하며 다짜고짜 귤을 달라 청했다. 사장이 누군지 모르는 것을 보아 이 동네 주민은 아닌 듯했다.

“아, 귤… 말씀이시죠? 잠시만요. 가격이….”

“…사, 삼천 원.”

승재의 난감한 눈빛을 알아챈 채원이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입술을 달싹였다.

열흘 만에 처음으로 주고받은 대화가 고작 귤 값이라니.

타들어 가는 속을 전할 겨를도 없이 승재와 채원은 곧바로 손님 응대를 시작했다.

“삼천 원 주시면 됩니다.”

“응, 근데 총각, 두 개만 더 넣어주면 안 될까? 여기 무른 거 보이네. 어차피 팔기엔 좀 그래 보이는데….”

아주머니의 넉살에 말려든 승재는 무른 귤 두 개를 얼떨결에 받아 들고는 재차 채원의 눈치를 살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멈칫대던 남자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자주 들를 테니까 다음에도 잘해줘, 총각.”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봉지에 귤을 꽉 채워 건네자마자.

“저… 방울토마토 사려고 왔는데, 어느 쪽에 있어요?”

“사장님 그새 어디 가셨나? 내가 아까 짐 맡기고 병원 좀 다녀오느라….”

줄줄이 이어지는 손님의 행렬.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초반의 떨림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분위기에 묻혀 조금씩 잦아들었다.

“휴우, 나 스튜디오 접고 여기 와서 장사 배울까? 꽤 소질 있어 보이지 않아?”

과일을 사러 온 사람들이 한바탕 떠나고 잠잠해지자, 승재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짧은 숨을 뱉으며 채원에게로 눈을 돌렸다.

“잘… 지냈어?”

“…….”

“그새 더 마른 것 같네…. 또 밥 제때 안 챙겨 먹은 거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엷은 미소로 안부를 묻는 강승재.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혼란으로 뒤엉킨 채원의 시선이 위태롭게 닿는다.

“윤채원 어디 숨었는지, 그거 하나 못 찾을까 봐.”

“왜 온 건데.”

“왜… 왔을 거 같아?”

“몰라, 말하지 마.”

“…….”

“듣기 싫다고. 아무것도.”

무서웠다. 애써 추스른 마음이 그의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버릴까 봐.

구차한 변명이나 눈물 따위로 괜스레 그의 발목을 잡고 싶진 않았다.

“윤채원, 너… 좋아하는 색이 뭐였지?”

“…뭐?”

“초록? 보라?”

뭔데 대체.

예상을 뒤엎는 생뚱한 질문에 채원은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님 노란색인가… 방금 말한 것들 중에 있어?”

목석처럼 서있던 채원이 마지못해 고개를 가로젓자, 승재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어렵네 역시…. 윤채원 알고 지낸 지 9년이나 됐는데,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승재 씨….”

“무채색 계열은 왠지 아닌 것 같고… 아, 혹시 하늘색?”

“…….”

“하늘색 맞지? 그래.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메고 다니던 백팩도 하늘색이었고, 후드도 유난히 블루 톤이 많았던 것 같은….”

“갑자기 그건 왜 묻냐고 글쎄!”

딱딱하게 굳은 음색이 승재의 문장을 뚝 끊었다. 오늘따라 그의 언행은 답지 않게 일방적이었다. 사람 감정을 무시한 채 찾아와 이딴 시시한 질문이나 던지고 있다니….

“승재 씨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난 이렇게 얼굴 마주 보면서 얘기 나누는 거… 상당히 불편해. 할 말 있어서 온 거면 용건만 간단히….”

“해보자.”

“뭐?”

“해보자고, 다시.”

“…….”

“취미가 뭔지, 어떤 색을 가장 좋아하는지… 못 먹는 음식, 잠잘 때 버릇, 발 사이즈는 몇인지… 처음부터 하나씩, 우리….”

미세하게 떨리는 남자의 음성.

“여전히 자신은 없는데, 9년 전보다 훨씬 더 비겁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이렇게 끝내자니 갑자기 억울해져서….”

한 걸음, 또 한 걸음. 가까워지는 거리.

“알짱거리던 애가 사라지니까 허전하고, 하루가 일 년처럼 길고 지루한 게, 습관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채원의 심장이 따라서 일렁인다.

“네가 그랬잖아. 제대로 시작한 게 대체 뭐가 있냐고.”

“…….”

“그래서 말인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

“해보자, 우리.”

커다란 손바닥의 온기가 여린 어깨를 살포시 감싸자, 겹겹이 쌓인 얼음벽이 일순간 녹아내렸다.

“김 비서랑… 그, 그런 관계… 절대로 아냐. 난… 승재 씨 못 믿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난 정말, 정말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흐윽.”

투명한 눈물이 새하얀 볼을 따라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렸다.

“알아. 말 안 해도 이제 다 아니까….”

승재의 다독임에도 채원의 눈물은 쉬이 그쳐지지 않았다.

아빠에 대한 미움과 원망, 한 톨의 그리움마저 꾹꾹 눌러 삼켜야 했던 어린 시절.

힘겹게 움켜쥔 커터칼로 하얀 살갗에 붉은 자국을 새기며 견뎌온 낮과 밤의 시간.

채원은 승재의 코트 깃 사이로 얼굴을 묻은 채 서럽도록 울음을 울었다. 가슴 속 응어리진 지난날의 멍울을 모조리 토해내려는 듯.

“하이구 총각, 아니 왜 대낮부터 색시를 울리고 그랴? 곡소리 듣고 놀라서 들어왔네. 과일 팔다가 부부싸움이라도 한 겨?”

길목까지 번진 여인의 흐느낌에, 할머니 한 분이 화들짝 놀라 가게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그, 그게 아니라요 어르신.”

“저렇게 곱고 이쁜 색시가 또 어디 있다고 속을 썩여! 총각 얼굴 보니까 여자깨나 후리게 생겼구먼. 그래도 그럼 못 쓰지 못 써.”

“죄, 죄송합니다. 다 제가 모자라서 그렇습니다.”

때아닌 호통에 승재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거듭했다. 왜 갑자기 죄인 모드가 되었는지 얼떨떨하였으나 말대꾸는 딱히 하지 않았다. 줄줄 흐르던 윤채원의 눈물이 쏙 들어간 것만으로도 현재로선 다행이라 여겼다.

“색시, 울지 마, 뚝. 그래도 착하게 장사는 하러 나온 모양이네. 심성이 저리 고우니 못난 서방 내치치도 못하고…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불알 두 짝 달고 나온 것들이 문제여. 지 아내 귀한 줄 알아야지. 사시사철 아껴줘도 모자랄 세월에….”

“며, 명심하겠습니다. 저, 어르신… 그만 고정하시고, 여기 귤이라도 하나….”

“내가 어디 귤 먹고 싶어 이러는가?”

성을 벌컥 내면서도 할머니는 승재가 내민 귤을 굳이 거절하진 않았다.

아무리 미워도 곁에 끼고 있는 게 나은 법이라며 채원의 등을 툭툭 두드린 호방한 손님은, 승재의 얼굴을 탐탁지 않게 흘겨본 후 길을 나섰다.

“…할머님 말씀 잘 들었지?”

“…….”

“사시사철 아껴주라고 하시잖아. 없는 것보단, 그래도 있는 게 낫다고.”

승재는 천연한 목소리로 채원을 향해 넌지시 한마디를 던졌다.

“윤채원.”

“…….”

“언제까지 입 꾹 다물고 있을래.”

“승재 씨 얼굴… 여자 속 썩일 상이라고, 그 얘기 들은 기억밖에 안 나는데.”

울음 뒤, 불규칙한 숨을 할딱거리면서도 오물오물 입술을 움직이는 여인.

“하하, 뭐? 그동안 내 속 새까맣게 태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승재가 발갛게 부은 콧방울을 장난스럽게 잡아챘다. 촉촉이 젖은 눈시울이, 파르르 떨리는 음색이 애잔하면서도 사랑스러워 더 이상의 책망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그저 보드라운 너의 손을 잡고,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내리고, 자그마한 너의 몸을 바스러지도록 안고 싶다는 철없는 욕심뿐.

“가자.”

“응? 어딜….”

“어디든. 이제 혼자선 아무 데도 안 갈 거니까.”

두 번 다시 길을 잃고 헤매지 않도록, 승재는 채원의 손을 힘 있게 움켜쥐었다. 단단한 톱니처럼 맞물린 서로의 손가락에는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감돌았다.

9년 만의 시작이었다.

* * *

[엄마, 나 지금 서울 올라가는 중. 회사에서 급히 연락이 와서… 아저씨 일 많이 못 도와드려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수경은 기가 막히다는 눈빛으로 딸내미가 달랑 보내온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지금 서울 올라가는 중, 회사에서 급히 연락이 와? 하, 얘 좀 봐. 아주 거짓말을 술술….”

“응? 무슨 거짓말?”

수경의 중얼거림에 카페 테이블을 정리하던 명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다.

“회사에 급한 일 있어 간다잖아요. 참 나….”

“아, 그럼 아까 과일가게 청년이… 강승재가 아니라 회사 직원이었단 건가? 직장 동료치곤 분위기 묘하던데….”

“강승재 맞아요. 확실해.”

“수경 씨는 직접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마치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는 양 실소를 터뜨리는 수경의 아리송한 웃음이 명섭의 궁금증을 배로 증폭시켰다.

“크흠, 암튼 다 아는 수가 있다고요. 아니 그리고, 어떤 회사가 일개 직원 모셔가려고 청주까지 사람을 보내? 말도 안 되지.”

괜한 헛기침을 내뱉은 수경은 명섭을 등진 채로 휴대폰 메시지 창을 스크롤했다.

[안녕하세요. 강승재입니다, 어머님. 지금 채원이 데리러 청주 내려가는 길입니다. 전화 안 받으셔서 문자로 대신합니다. 어디로 가야 채원이 만날 수 있을지, 괜찮으시다면 주소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걱정만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정 회장과의 미팅은 무사히 마무리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곧 찾아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구구절절 어쩜 이렇게 예의가 바르고 올곧은지, 수경은 몇 시간 전 승재가 보낸 문자를 천천히 곱씹었다.

“암튼 딸자식 키워봤자 말짱 꽝이라니까. 남자 때문에 울고불고하더니 속도 없이 또 금방 쪼르르 따라가는 것 좀 봐.”

속으로는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으면서도 명섭의 앞에서는 괜히 더 큰 소리를 내는 수경. 모든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서일그룹과 관련된 일을 함부로 발설할 수 없었기에, 만만한 딸내미를 연신 씹어대며 두루뭉술 화제를 넘겼다.

“근데 수경 씨, 채원이 찾아온 그 청년 말이야. 참 잘생겼더라고. 키도 훤칠하니….”

“그렇죠? 내 뭐랬어요. 윤채원 저 답답이를 미국서부터 내내 좋아했단 것만 봐도 알지. 9년 동안 못 잊기가 어디 쉬워요? 사람이 여러모로 괜찮다니까….”

“코딱지만 한 사진관인 줄 알았는데 번듯한 건물이라 좋아진 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속물로 보여? 아니에요 그런 거.”

수경이 서늘하게 눈을 흘기자 명섭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하긴. 확실히 속물은 아니지. 나 같은 남자 데리고 살아주는 걸 보면.”

왜 또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고 불쌍한 척 이러실까.

십중팔구 의도된 장난임을 알았지만 마음이 약해져 그를 몰라라 할 수 없는 수경이었다.

“왜 또 약한 소리 해요? 돈도 잘 벌고 아픈 데 없이 건강하고 힘세고, 성실하고,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역시, 채원이가 엄마 닮아서 남자 보는 눈이 높은 거였나?”

섣부른 칭찬은 독이었다. 몇 마디 띄워줬다고 양어깨에 금세 불끈불끈 뽕이 솟아나니 원.

“말 길게 한 내 잘못이네요. 알겠으니까 얼른 거기 블라인드나 내려 줘요.”

“블라인드를 벌써?”

“손님도 없는데 오늘은 그냥 일찍 마감할까 봐. 이상하게 피곤하네.”

“채원이 걱정하느라 당신까지 잠 못 자서 그래. 거기 가만히 앉아 있어. 내가 후딱 정리할게요.”

뻐근한 뒷목을 연신 주무르고 있는 수경의 모습이 퍽 안쓰럽게 느껴졌는지, 명섭은 말장난을 미뤄두고 서둘러 카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흘러간 하루. 창가에는 어느새 캄캄한 어둠이 깔렸다.

* * *

“졸리면 눈 좀 붙여. 도착하면 깨워줄게.”

고요한 차 안. 가속페달을 부드럽게 밟던 승재가 채원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아냐, 조수석에서 어떻게 대놓고 잠을 자….”

“괜찮아. 거기 오른쪽에 버튼 있을 거야. 시트 뒤로 젖히고….”

“됐다니까. 안 졸려. 정말이야.”

따뜻한 히터의 기운이 몸을 노곤노곤하게 감싼 탓에 고속도로를 진입하던 무렵부터 졸음이 쏟아졌으나, 채원은 등받이 버튼을 가리키는 승재의 손길을 끝내 밀쳐냈다.

“고집은. 눈에 졸음이 한가득인데.”

“나 잠들면… 승재 씨도 졸릴 거 아냐.”

“…편하게 불러도 돼.”

“…어?”

“예전처럼, 이름 부르라고.”

“…….”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채원은 난감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색해지는 공기. 지금 당장 히터를 꺼도 될 만큼, 채원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왜 또 입이 꾹 닫혔어? 내가 난처한 얘기 꺼낸 거야?”

승재가 장난기 서린 톤으로 채원을 떠보며 씨익 웃었다.

“몰라. 이젠 승재 씨가 입에 붙어버린 걸 어떡해. 강승재보단 차라리 감독님이 더 낫겠다 싶고….”

“맘대로 해 그럼. 이참에 오빠 한번 해보든지.”

“으악. 미쳤어!”

“미쳤다니….”

구깃구깃 급속도로 미간이 좁혀지는 남자. 필요 이상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채원의 반응이 못내 서운한 승재였다.

“세 살 연하한테 오빠 소리 좀 들어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나 잘못된 일이야?”

“응.”

“단호하네. 윤채원.”

“서열 꼬여서 안 돼. 류정혁 만날 땐 어떡해 그럼.”

“안 만나면 되지.”

누가 누구더러 단호하다는 건데.

15년지기 친구를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는 승재의 한마디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채원의 입꼬리가 피식 올라갔다.

“친구를 아무렇게나 버리시면 안 되죠, 감독님. 어쨌거나 류 덕분에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거잖아.”

“그런가. 그럼 다시 줍지 뭐.”

어쭙잖은 허세에 한 차례 더 웃음이 터졌다. 서먹한 분위기를 열심히 메꾸려는 그의 노력을 알아챈 이상, 채원 역시 뭐라도 해야만 했다. 어깨를 웅크린 채 침묵을 지키는 짓은 서로에게 좋을 게 없었으니.

“근데… 아까 과일가게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배는 고픈지, 내일 오전 일정은 뭐가 있는지, 일상 대화부터 나눌 것을 그랬나.

용기를 내어 건넨 첫 질문이 혹시라도 차 안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진 않을까, 반 박자 늦은 조바심이 밀려왔다.

“어머니께서 알려주셨어.”

잠시 고민하던 승재는 짤막하게 답했다. 채원에게는 비밀로 하고 왔다던 수경의 사정을 최대한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 누구 어머니, 설마… 우리 엄마 만났어?”

“응.”

“우리 엄마를 언제, 아니 어떻게 만나? 서로 번호도 모르고, 내가 승재 씨 얘기 딱히 꺼낸 적도 없는데….”

“우연히 내 명함을 발견하셔서….”

“승재 씨 명함을 대체 어디서 ‘우연히’ 찾아?”

“글쎄.”

“하, 정말…분명 엄마가 내 가방 뒤진 거야. 나 자는 사이에 들어와서 몰래… 그치? 내 말이 맞지? 아무리 답답해도 그렇지. 어떻게 서른 넘은 딸 소지품 검사를… 나 내려갈 때마다 매번 핸드백 탈탈 털렸던 건가.”

어물쩍 넘길 상황이 아니었다. 속사포처럼 터지는 질문 공세와 극으로 치닫는 억측을 막기 위해, 승재는 결국 수경의 대변인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얼마나 속이 타셨으면 그러셨겠어. 달랑 명함 한 장 들고, 버스 타고 택시 타고… 혼자 힘들게 오셨더라. 스튜디오 앞까지.”

“언제….”

“한 일주일 됐어.”

“엄마도 참. 말도 안 하고 그 먼 데를 혼자서….”

채원이 금세 물기 섞인 소리를 냈다. 논리적 오류든 뭐든, 감정에 호소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설득법은 없었다.

“강승재 나쁜 놈, 못된 놈, 내 이름 앞뒤로 갖은 욕은 다 붙여가면서 울었다며?”

“무, 무슨!”

“청주에 소문 다 났어. 윤채원이 남자 하나 때문에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아니라니까… 엄마가 오버한 거야.”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나?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할 정도로?”

“…….”

갑작스레 잦아든 음색이 마음에 걸렸는지, 야금야금 채원을 놀리던 승재가 말을 멈추고 힐끔 조수석 쪽을 비껴 보았다.

“윤채원.”

“…….”

울컥 목이 메어 채원은 곧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와 함께 하염없이 밤길을 달리고 있는 이 순간이 한갓 꿈일지 모른단 생각에, 불현듯 눈물이 핑 돌았기 때문이다.

“…울어?”

“아니….”

“그럼 왜….”

“엄마 앞에서 내가 얼마나 승재 씨 욕을 했었나, 떠올려 보던 중이었어.”

비교적 낭랑한 대답 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바짝 곤두섰던 신경이 한풀 꺾인다.

“놀랐잖아. 울렸을까 봐.”

“뭐야, 적응 안 돼. 그동안 온갖 독설 다 퍼붓던 사람이 새삼 걱정은.”

“그땐….”

먹먹하게 뭉개지는 문장 끝.

9년간이나 너를 알았음에도, 정작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던 지난 날들.

왜 그토록 스스로를 학대하며 살았는지,

왜 아무런 이야기도 나에게 털어놓지 못한 채 숨죽여 울었는지….

그때는 윤채원을 잘 몰라 그랬던 거라고.

그래서… 내가 너무 미안하다고.

“그땐, 뭐?”

“뭐긴 뭐야. 여친이 다른 놈이랑 잤다는데 눈 안 뒤집히게 생겼어? 그땐 나도 제정신 아니었다고. 한지운 찾아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묻어버려야 하나, 9년간 고민하며 살았다. 진짜야.”

승재는 턱 끝까지 차오른 가슴 속 말들을 억지로 눌러 삼켰다. 그녀의 짐을 온전히 덜어낼 수 있을 때까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치이, 9년 전이나 지금이나 본인 싸움 실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채원이 작게 하품을 하며 포르르 말대답을 했다.

“핸들 잡은 사람 괜히 신경 건드리지 말고, 얼른 자.”

“안 졸립대두.”

“하품 계속 하면서 고집부리지 또.”

“그럼… 딱 10분만… 대신 꼭 깨워줘. 정확히 10분 뒤에.”

“알겠어. 지금 8시 50분이니까, 9시에 깨워줄게.”

도착할 때까지 그녀를 깨우지 않을 작정이었지만, 승재는 뻔한 거짓말로 채원을 안심시켰다.

미련한 자존심을 털어내고 나니 금세 나른함이 밀려든다. 채원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이내 눈꺼풀을 내렸다.

몽롱히 흩어져가는 고속도로의 불빛. 가죽 시트에 밴 남자의 스킨 향. 잔잔한 음악 선율.

꿈결이라 하기엔 너무도 생생한, 오래도록 잊지 못할 밤이었다.

* * *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지 한참인데도, 승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물끄러미 조수석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기다란 눈꺼풀을 내리고 색색 숨을 고르며 천사처럼 잠이 든 윤채원.

덜컥 겁이 났다. 그리움이 사무쳐 헛것을 본 것은 아닐까, 문득 밀려드는 불안감에 승재는 손가락을 들어 채원의 하얀 볼을 조심스럽게 톡 찔러보았다.

유아기적인 발상이었으나 확인이 필요했다.

눈앞의 윤채원, 은은한 체향, 고른 너의 숨소리. 이 모든 것은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이라는.

“채원아, 다 왔는데….”

“…….”

“일어나. 들어가서 자자.”

“으음….”

살짝 찌푸려지는 미간에도 가슴이 뛰니, 안 예쁜 구석은 대체 어디인지.

“일어나 보라니까. 윤채원.”

“…졸려.”

“차에서 밤샐 수는 없잖아.”

“충분히 편한데…. 내 방 침대보다… 몇 배는 더.”

잠꼬대치고는 또렷한 발음이었으나 두 눈은 여전히 꼬옥 감긴 채였다.

등허리를 받쳐주는 가죽 시트와 목 언저리까지 포근히 덮인 승재의 롱코트. 마치 호텔 스위트룸 침대에라도 누운 양, 채원은 세상 아늑한 표정으로 귀여운 칭얼거림을 늘어놓았다.

“느긋한 소리 한다. 위험 자초하는 줄도 모르고.”

“…응?”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위험’이라는 단어에 눈꺼풀을 겨우 뜬 채원.

“설마 일부러 시간 끄는 건 아니지?”

“무, 무슨….”

“아님, 깨워주는 방법이 영 별로였나?”

다급한 도리질과 함께 새초롬한 입술이 옴짝거리려는 순간, 싸한 스킨 향이 훅 채원의 얼굴을 덮는다.

“잠깐만, 승….”

도톰히 내린 남자의 입술은 겹겹이 쌓인 나른함을 일순간 몰아냈다. 단단한 어깨를 힘겹게 밀쳐내며 승재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려던 채원은 뜨거운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손목의 힘을 풀었다.

커다란 손바닥으로 새하얀 볼을 감싼 승재는 엄지를 들어 채원의 아랫입술을 조금 더 벌렸다. 고른 치아 사이를 비집은 혀끝에서는 평소와 다른 초조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무리 여유를 가지려 해도 템포 조절이 쉽지 않다. 오롯이 가슴 벅찬 감정만으로 윤채원에게 키스를 퍼붓는 것은 자그마치 9년 만의 일이었으니까.

“하아… 잠, 깼어… 깼다고, 승재 씨….”

“깨지 마.”

말도 안 되는 명령과 함께 승재의 손이 채원의 니트 속을 파고들었다. 이너웨어와 브래지어를 한꺼번에 끌어 올린 손가락은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난 살결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흐읏….”

채원의 움찔거림은 남자의 행동에 탄력을 붙였다. 가슴을 가볍게 스치던 손가락이 봉긋 솟아난 산의 정점을 진하게 누르자 좁혀지는 미간과 함께 말랑거리던 유두가 곧 딱딱하게 뭉쳐졌다.

“그만해… 하아, 여기서는….”

“괜찮아.”

“괜찮긴 뭐가….”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그럼 아무도 모를 테니까.”

열띤 숨결을 빨아들이던 입술은 어느덧 여린 목선을 간질이고 있었다.

탁.

승재는 그녀의 우측 어깨 위로 한 손을 뻗어 채원의 상체를 고정시키고 있던 좌석 벨트를 더욱 단단히 내리눌렀다. 거센 악력에 의해, 그녀의 오른 어깨와 오른 가슴, 왼쪽 팔에 이르는 모든 움직임은 사선으로 조여진 꼴이 되어버렸다. 인위적으로 들추어낸 왼 가슴을 제외하곤.

탐스러운 젖가슴 밑으로 벨트가 빠듯이 눌린다. 낯선 감촉, 낯선 공기에 바짝 옴츠러든 꼭지가 사뭇 귀여웠는지, 승재는 머리를 숙여 발갛게 부푼 열매를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읏, 제발, 그만 좀….”

“색깔 봐. 먹기 딱 좋게 진해졌는데 어떡해 그럼.”

황당한 논리로 채원의 말문을 얼렁뚱땅 막아낸 승재는 손끝을 세워 타액이 묻은 유두를 지그시 한 방향으로 굴렸다.

“흐으….”

“오늘따라 왜 이렇게 민감하게 굴까. 겨우 이 정도로 가버리면 안 된다고.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젖꼭지를 살살 건드리거나 조금만 잡아채도 금세 파르르 몸을 떠는 그녀의 격한 반응에, 승재의 허벅지 사이로 빠르게 열이 끓어올랐다.

“뭣 땜에 이래.”

“읏, 뭐가….”

“왼쪽이 오른쪽보다 원래 더 예민한 건가? 아니면….”

움켜쥔 조수석 벨트를 팽팽히 잡아당긴 억센 손아귀.

“이렇게 가슴이 조여지는 게….”

“흐으….”

“온몸이 떨릴 만큼 좋아서 그래? 아예 숨도 못 쉬게 묶어줘?”

자연히 끄덕여지는 고개를 억지로 치켜든 채원은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더운 입김이 그저 젖꼭지를 스치는 것뿐인데도, 자꾸만 아랫배가 조여들어 미칠 지경이었다. 더 이상의 스킨십은 위험했다. 일찌감치 젖어 든 속옷을 행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최소 한 달간은 강승재를 피해 다녀야 할 것이다.

“여기선 싫다니까. 자꾸 왜 이래 정말….”

차 안의 공기를 후끈히 덥히는 승재의 언행에 화르륵 얼굴이 붉어진 채원은, 남자의 열띤 입술을 한 뼘 멀리 물리고선 서둘러 좌석 벨트 버클을 풀었다.

“일단 짐이나 얼른 빼 줘.”

“가슴 훌렁 내놓고 지금 짐 빼달란 말이 나와?”

“이, 이건 승재 씨가 일방적으로 그런 거잖아. 어휴 정말… 어쩐지 곱게 재운다 했더니….”

채원은 승재를 뾰족하게 흘기며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사실 채원 역시 감질나는 키스가 못내 아쉬운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여기서는 도저히 무리였다.

온종일 과일을 파느라 녹초가 된 것도 모자라 강승재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눈물 콧물까지 펑펑 쏟아낸 마당에, 예정에도 없던 카섹스라니! 안 되지 안 돼.

“우선 좀 씻고… 그다음에….”

“다음에, 뭐?”

“그니까… 씻고 난 다음에… 다시….”

“다시, 뭐냐고 글쎄.”

“뭐야, 정말… 다 알면서 뭘 물어!”

딴에는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여지를 남긴 것인데, 그 꼬투리를 잡아 두 번 세 번 되물으니 안정을 찾아가던 얼굴색이 다시금 달아오른다.

또 말려들고 말았다. 거듭되는 짓궂음에 찡해지는 콧방울. 언제부턴가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되어버린 강승재를 어찌 감당해야 하는지.

뒤늦은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 채원은 승재를 쏘아보며 핏대를 올렸다.

“나 먼저 간다.”

“어딜 가?”

“어디긴 어디야! 승재 씨 집이지! 짐이나 잘 들고 따라와. 내가 아끼는 캐리어니까.”

시시한 분풀이 이후 채원은 등을 홱 돌려 걸었다. 장난기 가득 서린 남자의 눈동자가 얄미워, 비좁아도 잠은 내 방 침대에서 자야겠다, 잘 있어라, 으름장을 놓고 가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솔직히 혼자 잠들 자신까진 없었다. 강승재의 온기가, 포근한 그의 품이 절실했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같이 가.”

“싫어.”

“윤채원 성질부리는 거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씨익 입꼬리를 올린 승재는 성큼성큼 보폭을 넓혀, 앞서가던 채원을 금세 따라잡았다. 하늘색 캐리어를 가볍게 든 채로.

“먼저 가봤자 뭐해? 어차피 비밀번호도 모르면서.”

“…….”

“또 전처럼 다리 쥐 날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있게?”

“아니거든? 무릎 펴고 서 있을 거거든?”

“그래, 그러든지.”

“캐리어 땅에 끌지 마. 바퀴 상한다고!”

“이 캐리어 미국에서부터 갖고 다녔던 거잖아. 십 년 된 고물을 이제 와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면서도 남녀의 유치한 대화는 얼마간 더 이어졌다.

상처를 입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시를 달았던 남자의 냉기와 시종일관 상대의 눈치를 살피던 여자의 머뭇거림이 사라진 문장.

비로소 모든 게 바로잡힌 지금의 상황을 그들은 어느 정도 즐기는 듯 보였다.

* * *

“언제까지 그렇게 오리입 하고 있을 건데?”

툴툴거리며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는 채원의 뒷모습을 쭐레쭐레 따라가던 승재가 그녀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저리 비켜.”

“맘에도 없는 소리 계속 늘어놓네. 뒷감당 어찌 하려고.”

“…….”

“무슨 뒷감당인진 안 물어봐?”

“몰라.”

“뭘 몰라. 다 알면서.”

남자의 손길이 여인의 보드라운 머릿결을 장난스럽게 흩트린다. 수시로 얼굴을 붉히는 윤채원을 감상하는 일이 이토록 즐거울 줄이야. 본의 아니게 터득한 악동 짓은 당분간 끊어내기가 힘들 듯하다.

“비밀번호… 뭔데?”

“응?”

“이제는 알려줘도 괜찮잖아….”

“아….”

작게 오물대는 입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승재가 멋쩍은 듯 엷게 웃었다.

그렇지, 이젠. 더 이상 문밖에 너를 세워둘 필요가 없어졌으니.

“별 누르고, 1117.”

“뭐? 1117?”

“응.”

황당하리만큼 단순한 비밀번호에 채원이 풉 실소를 터뜨렸다.

“승재 씨,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있구나?”

“뭐가?”

“비번을 달랑 자기 생일로 해놓는 사람 흔치 않은데. 다른 숫자 조합도 없이.”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는 채원을 뒤로한 승재는 느릿한 동작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날짜…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쪼르르 튀어나오는 보리를 품에 안아 든 채원은 뿌듯한 음색으로 말을 보탰다.

“승재 씨 생일, 9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고.”

“생일로 설정해둔 거 아냐.”

“어? 무슨 소리야. 11월 17일이면 분명….”

“윤채원이랑 헤어진 날이라… 누를 때마다 기억해두려고.”

쿵, 닫히는 현관문과 함께 점등되는 천장의 센서.

“나한텐… 그 날짜가 그랬거든 매년.”

“…….”

“11월 17일. 9년간 단 한 번도, 생일인 적 없었어.”

아스라이 퍼지는 불빛 사이로 쓸쓸히 가라앉은 남자의 눈동자가 언뜻 스친다.

긴 정적이 찾아왔다.

어색해지지 않으려면 무슨 말이든 꺼내야 할 텐데.

심장이 아리고 저린 탓에 가벼운 빈말조차도 제대로 건넬 수가 없었다.

“뭐야.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 올라오는 내내 떽떽거리더니.”

길어지는 침묵이 부담스러웠는지, 거실 등을 환히 밝힌 승재가 재차 장난을 걸어왔다.

“자, 얼른 씻고 와. 우리 아직 못다 한 일이 남았….”

“미안해.”

“…….”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땐… 정말 그게 최선인 줄만 알고….”

승재의 소맷자락을 자신 없이 붙든 채원이 시선을 떨군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만큼 내가 너, 많이 괴롭혔잖아.”

“그래도….”

“미안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하지. 이제 됐으니까 그만….”

“정말 미안….”

“윤채원.”

길게 한숨을 뱉은 승재가 채원의 양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 올렸다.

“너 내가 뭐라고 했어.”

“…응?”

“그새 다 까먹은 거야?”

“뭘….”

“내 앞에서 다시는, 미안하단 말… 꺼내지 말라고.”

“아….”

눈물을 가득 담은 그렁그렁한 눈망울. 커다란 손바닥에 귀엽게 짓눌린 붉은 입술.

“오늘 벌써 몇 번이나 어겼는지 알아?”

“미, 미안….”

“또.”

서늘하게 내린 남자의 시선.

“아까부터 자꾸만 거슬리게 하네.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너.”

“아니, 나는….”

“그래서, 뒷감당할 준비는 됐고?”

그녀가 제발 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그녀를 지금 당장 울리고 싶다는 욕심. 그 미묘한 양가감정이 승재의 머릿속을 쉼 없이 혼란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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