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당신이 알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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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당신이 알지 못한
* * *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두 시간 후면 끝이라니… 시간 참 빠르네요.”
사진전 폐막을 앞둔 시점. 최 대리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성과가 좋을 줄은 몰랐거든요. 이게 다 강 감독님 덕분입니다 정말. 저희가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별말씀을요. 저도 이색 촬영이라 즐겁게 일했습니다. 보람도 있었고.”
승재는 최 대리와 대화를 나누며 티 나지 않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나 없다. 며칠째 눈에 띄지 않더니, 결국 마지막 날까지도 회사 근무를 택한 모양이었다.
“윤채원 대리는 또 내근인가 봅니다.”
“아, 윤 대리 보름 휴가 냈어요. 팀장님께 전해 들었는데 아픈 것 같다고….”
최 대리가 예상치 못한 채원의 상태를 불쑥 알렸다.
“몸이… 많이 안 좋습니까?”
뜻밖의 소식에 당황한 듯 승재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사나흘 휴가도 아닌 보름씩이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채원의 행동에 그의 염려와 불안이 한층 더 고조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단순 몸살은 아닌 듯해요. 윤 대리 성격상 전시회 마무리까진 웬만하면 본인이 한다고 했을 텐데…. 크리스마스 날 팸플릿 박스 들고 뛰느라 병났나 싶기도 하고… 혹시 입원한 건 아닌지 오늘 밤에 연락 한번 해보려고요.”
“아… 그렇군요.”
승재는 물어보고 싶은 추가 질문들을 눌러 삼킨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채원과의 이별 이후 승재 역시 일상생활이 불가할 만큼 괴롭고 우울했으나, 그럼에도 아등바등 스튜디오 일정을 소화하고 미술관에 매일 얼굴을 비친 그였다.
하기 싫어도, 의욕이 생기지 않아도 해야 했다. 공과 사의 경계를 지키지 못한다면 지금껏 애써 쌓아온 신뢰는 일순간 허물어지고 말 테니까. 밀물과 썰물의 타이밍이 확실한, 안타깝게도 강승재의 직업은 그랬다.
채원의 얼굴을 덤덤히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게 제일 걱정이었는데….
“제가 많이 늦었습니다, 강 감독.”
익숙한 남자의 음성에 뒤를 돌아본 승재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누군가 했네. 여긴 뭐하러 왔어? 바쁘신 분께서.”
“너 밤샘 작업시킨 장본인이 나라며. 욕 안 얻어먹으려면 그래도 얼굴 한 번쯤 비쳐야지.”
정장 차림을 한 정혁이 느슨히 입술을 늘이며 승재 곁으로 다가왔다. 차콜색 슈트와 블랙 롱코트를 교복 입듯 편히 걸친 모습이 새삼 신기했는지, 승재는 가까이 다가오는 정혁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뭐냐? 그 기분 나쁜 시선은.”
“안 불편해?”
“뭐가.”
“나는 넥타이 고작 5일에 녹다운됐거든.”
“익숙해지면 괜찮아. 매일 뭐 입을지 크게 고민 안 해도 되니 편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정혁이 힐끔 승재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래서 그래?”
“어?”
“정장 핑계 대기엔 얼굴이 너무 죽상이라. 그동안 꽤 무리했나 봐.”
“아… 뭐, 그냥, 요즘 수면 부족이라.”
“흠… 불면의 이유가 과도한 스케줄 때문이었다?”
“그렇다니까. 한 달 동안 하루 평균 4시간도 채 못 잤다고. 사진전 한번 여는 게 얼마나 에너지 소모가 큰데….”
정혁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이면서도 승재의 말에 딱히 토를 달진 않았다.
“그래 뭐, 본인이 그렇다면 믿어야지. 근데, 윤채원은 안 보이네.”
“휴가.”
“휴가? 전시회 끝나기도 전에 벌써?”
“아프대.”
“어디가?”
“몰라.”
“강승재가 모르면 누가 알아?”
계속되는 추궁에 승재의 미간이 심히 구겨진다.
“윤채원 사정을 왜 나한테 묻냐고 글쎄. 자꾸 엮지 마라. 사진전도 끝났고… 윤채원하고도… 더 이상 볼 일 없으니까.”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전시회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승재는 정혁을 향해 나지막이 목소리를 깔았다.
“웬 심각한 척이야. 진짜 무슨 일 있었구나?”
“아냐, 그런 거.”
“이유가 뭐든, 9년 동안 못 잊고 담아둔 것도 흔한 패턴은 아니라고. 그러니 이제 그만 기분 풀….”
“아 누가 누굴 담아뒀다는 건데! 풀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관계라니까!”
“알았어, 인마. 내가 오해했다. 윤채원 이름만 나와도 성질이야 왜…. 무서워서 말도 못 꺼내겠네.”
“성질을 부린 게 아니라….”
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윤채원 이름 석 자에 여전히 부아가 턱밑까지 치받는 자신의 감정쯤은. 아직 한 톨의 미련조차 떨쳐내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바쁘냐?”
뒤늦게 머쓱함이 올라왔는지 승재는 괜스레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 바빠도 오늘은 네놈 얼굴 오래 안 볼 거야. 욕받이 하긴 싫다.”
“술 살게.”
“술? 전시회 뒤풀이는 없어?”
“다음 주에 날 잡기로 했어. 짐 실을 것도 많고, 사진 내리려면 한참 걸려서… 마무리는 조 실장한테 맡기면 되니까.”
어지간히 혼자 있기 싫은가 보네.
“뭐, 양주 정도면 생각해 보고.”
“당연하지. 설마 맥주로 생색내겠어 내가.”
위스키를 내걸며 질척거리는 친구의 수작에 정혁이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겉으로는 귀찮은 듯 표정을 지었으나 실은 그도 일찍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9년 전, 윤채원이 사라진 뒤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던 강승재. 세상을 다 잃은 낯빛. 하필 오늘 저놈이 꼭 그때와 흡사해 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 * *
“저 왔어요.”
밤 10시가 가까워진 시간. 예고도 없이 현관문을 여는 인기척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수경과 명섭이 놀란 듯 몸을 일으켰다.
“아니 웬일이야? 이 시간에…. 너 무슨 사진전 때문에 바쁘다 하지 않았어?”
“몸이 좀 안 좋아서….”
“어디 많이 아픈 거야? 그 캐리어는 또 뭐고….”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난 하늘색 캐리어. 한쪽 팔 아래로 주르륵 떨어진 숄더백. 때 묻은 운동화를 질질 끌고 온 채원의 표정에는 피로가 역력했다.
“…휴가 냈어요.”
“며칠이나?”
“보름….”
“뭐어? 얘가 미쳤나 봐.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감사합니다 하고 챙겨야 할 판에, 그러다 잘리면 어쩌려고 그래!”
“수경 씨… 그만 좀 해요. 청주까지 오느라 고생한 사람한테. 채원아, 짐은 내일 풀고 얼른 옷부터 편하게 갈아입어. 배는 안 고파? 야식이라도 만들어 줄까?”
“괜찮아요, 아저씨. 감사합니다…. 신경 써주셔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채원은 명섭과 수경을 스쳐 자신의 방으로 느리게 발을 옮겼다. 캐리어 모서리마다 달린 네 바퀴가 드륵, 드르륵,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에 지저분한 흙 자국을 남겼다.
“얘, 바퀴는 닦고 들어가야지! 오늘 집 청소 깨끗이 해놨는데….”
수경의 팔을 쿡쿡 찌른 명섭이 서둘러 눈짓을 보냈다. 싫은 소리는 그쯤 해두라는 신호였다.
아무래도 채원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프다기보단 어딘가 지쳐 보인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축 처진 어깨에서는 어쩐지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수경 씨가 들어가 봐요. 무슨 일 생긴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보름씩 휴가 쓴 게 말이나 돼요? 서른 넘어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나 몰라.”
“잔소리할 거면 차라리 채원이 혼자 두는 게….”
“알았어요, 알았어. 잔소리 안 해. 누가 보면 내가 새엄만 줄 알겠네.”
명섭을 향해 곱게 눈을 흘긴 수경이 굳게 닫힌 채원의 방문에 똑똑 노크를 했다.
“엄만데, 잠깐 들어갈게.”
별 대꾸는 없었지만 수경은 시간을 끌지 않고 문고리를 돌렸다.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보단 무작정 밀어붙이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제 딸 성격은 제가 가장 잘 알았다.
* * *
“나 피곤해요. 일찍 잘 거야.”
품이 넉넉한 맨투맨티와 파자마 바지를 갈아입고 털썩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원은 멍하니 발끝을 응시한 채로 중얼거렸다. 질문거리를 한가득 안고 온 엄마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누가 뭐래니? 많이 아프면 진통제라도 찾아줄까 해서 온 거야.”
“됐어. 한숨 자면 괜찮아지겠지.”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
“그냥….”
“그냥 뭐? 두통? 감기몸살이야? 아님, 체했어?”
누굴 닮아서 저리도 입이 무거운지 독립투사를 했으면 아주 잘했겠다고, 수경은 터져 나오는 구시렁거림을 애써 삼켜냈다.
툭하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딸내미 곁을 지킬 때면 갑갑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물러설 윤수경이 아니었다. 그 언젠가처럼 속이 곪아 터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
“어디 좀 봐봐.”
“아, 됐어.”
“딱히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제발 나 좀 내버려 둬요! 피곤하다니까!”
“얘….”
“흐윽….”
지금 애먼 곳에 화풀이를 하는 거냐며 언성을 높이려던 수경은, 갑작스러운 채원의 울음에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왜, 왜 그래, 채원아… 엄마가 아무리 널 내 배 속으로 낳았어도 이해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거야. 사람이 말을 해야 알지.”
“윽… 으흑….”
“울지만 말고… 응? 누가 우리 딸 울렸는지, 무슨 이유길래 캐리어를 한 짐 싸 들고 왔는지… 내가 해결은 못 해줘도 들어 줄 수는 있잖아.”
여러 차례 반복되는 엄마의 구슬림에도 채원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숨죽일 뿐이었다.
수경은 가슴이 아려왔다. 모두 다 제 탓으로 느껴진다. 단단히 응어리진 마음을 쉬이 털어놓지 못하는, 울음조차도 크게 못 내지르는 저 가여운 딸아이의 모습이.
“입장 한번 바꿔 봐봐. 엄마가 입 꾹 다물고 내내 울기만 하는데, 넌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겠니? 안 그래? 채원아, 너 그러다 진짜 아프기라도 하면….”
“김 비서가… 아니, 승… 승재 씨가…….”
“뭐? 김 비서가 갑자기 왜 튀어나와? 그 자식이 또 너 힘들게 했어? 승재는 또 누구고?”
“강승재, 그놈이 더 나빠. 나쁜 자식, 진짜… 아무것도 모르면서… 으흑, 나도, 힘들었는데… 내가 말을… 윽, 흑, 엄마도 알잖아. 내가 어떻게 말을 해…. 김 비서 그 새끼랑… 무슨 관곈지…. 엄마… 난… 너무 속상해서… 흑, 정말 죽을 것 같고… 심장이… 흐윽,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고….”
채원이 커다란 소매 끝으로 얼굴을 온통 비비며 엉엉 목 놓아 울었다. 어릴 적에도 듣기 힘들었던 그녀의 통곡 소리가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으나, 그와 동시에 불끈 울화가 치민 수경이었다.
“김 비서는 그렇다 치고, 승재? 강승재는 또 누군데? 어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우리 딸을 이렇게 울려 울리기를! 말해 봐! 그깟 놈이 대체 너한테 뭐라고 했길래 이러나!”
“…나 그냥… 흐윽, 혼자 살 거야. 엄마랑… 아저씨랑… 셋이 평생 살래, 엄마. 그러니까… 자꾸 나한테… 결혼 얘기, 꺼내지 마요….”
멈추어지려나 싶던 울음이 또다시 서럽게 터졌다. 거실에 있던 명섭이 놀라 한걸음에 달려올 정도로, 채원은 새카맣게 타버린 심장의 잿더미를 게워 내고 또 게워 냈다.
파들거리는 여린 어깨를 토닥이는 수경의 속도 타들어 가긴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 일상에 치여 살다 보니 정작 제 딸에게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닌지, 새삼 후회가 밀려든다.
어떤 식으로는 조치가 필요했다.
* * *
“수경 씨,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이미 저지른 일에 자꾸 태클 걸 거예요? 잔말 말고 당신은 문에 바짝 붙어서 귀나 대고 있어요. 혹시 무슨 소리 들리면 얼른 알려주고. 알았죠?”
수경의 성화에 못 이긴 명섭은 엉거주춤 자세를 잡고 문 가까이 귀를 댔다. 물론 채원의 방문 앞이었다.
“알았으니까 빨리 찾기나 해요. 수경 씨는 엄마니까 그렇다 치고, 채원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심장 벌렁거려서 정말….”
새벽 2시. 본인들의 집에서 발뒤꿈치를 들고 목소리를 한껏 낮춘 부부. 수경과 명섭은 등줄기에 주르륵 식은땀을 흐르게 하는 첩보 영화 한 편을 찍고 있었다.
“생체 인식 대신 비밀번호 6자리 넣으라는데?”
“답답하긴…. 휴대폰은 포기해요. 어느 하세월에 번호를 다 맞추고 있어? 지문이든 홍채든 도저히 뚫을 방법이 없다고. 일단 가방부터…. 지갑, 다이어리, 뭐 이런 것들 먼저 뒤져 봐.”
“오케이. 알겠어요.”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그라미를 내보인 수경은 명섭의 조언대로 손에 쥔 휴대폰을 내려놓고 채원의 숄더백을 빠르게 들쑤셨다.
지갑, 파우치, 물티슈와 냅킨 몇 장, 볼펜 한 자루와 작은 포스트잇, 그리고 책 한 권. 안타깝게도 다이어리나 수첩류는 보이지 않았다.
“여긴 립스틱밖에 없고…. 얘는 무슨 지갑에 이렇게 들은 게 없어. 신용카드, 지폐 몇 장이 다예요. 커피 마신 영수증이랑….”
“정말 그게 전부라고? 직장인이면 명함 수두룩할 텐데….”
“달랑 본인 명함 세 장뿐이야. 매일 외근 나간다 바쁘다 하더니, 일이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따로 모아두는 곳이 있겠지. 어? 수경 씨, 거기, 가방 안쪽 주머니 확인해 봤어요?”
명섭의 예리함이 수포가 될 뻔한 작전을 가까스로 건져냈다. 수경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숄더백 이너포켓 안에는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던 명함지갑이 얌전히 들어있었다.
“어머, 정말이네! 호호, 나보다 몇 살 어려서 그런가 우리 김 사장님 시력이 아주….”
“수경 씨한테 처음 칭찬 듣는 것 같은데 어째 좀 기분이 그렇네요. 내세울 게 몸뚱이뿐인가 싶고.”
“모르는 소리.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몸 약하면 말짱 소용 없단 거 몰라요? 어디 보자, 글씨가 왜 이렇게 작아. 유지… 안… 이건 아니고, 서… 현우… 이 명함도 아닌데….”
손바닥 반만 한 초록색 가죽 케이스를 탈탈 털어 수십 장의 명함을 거실 바닥에 뿌려놓은 수경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명함에 새겨진 글씨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중이었다.
“이름이 뭐라 그랬죠?”
“분명 강승재라고….”
“딱 보이는구만. 여기. 스튜디오K 대표, 강승재.”
과일가게 사장님의 눈은 역시나 정확했다. 수경의 등 뒤에서 명함들을 스윽 한번 훑어보던 명섭은 손가락을 툭 내밀어 강승재 이름 석 자를 단번에 찾아냈다.
“맞네. 강승재! 명섭 씨 어쩜… 내가 연하랑 살림 차린 보람이 있네요.”
수경에게서 이토록 극찬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평소 가벼운 애정 표현조차 잘 해주지 않아 이 여자가 과연 날 사랑하긴 하는지, 오랜 시간 동안 애를 태웠더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경 씨 앞에서 진작 시력 검사부터 해볼 걸 그랬습니다. 그럼 밥값깨나 굳었을 텐데.”
그간의 서운함이 해소됨과 동시에 또 다른 의미의 서운함이 명섭의 허탈한 속에 슬금슬금 파고든다.
“지금 당신 투정 받아 줄 시간 없다고요. 상황 긴박하게 돌아가는 거 보고도 몰라? 명섭 씨는 거기 명함부터 얼른 정리해요. 채원이 일어나기 전에 가방 도로 갖다 놔야 한다고….”
“예예, 마님. 분부대로 해드리죠.”
8년을 이웃으로 지내고 같이 산 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여인. 명섭은 자포자기의 미소와 함께 흩어진 명함들을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고운 얼굴과 대비되는 당찬 성격 때문에 사실 더 수경에게 끌렸는지도 모른다.
지켜볼수록 비밀이 참 많은 모녀였지만, 명섭은 두 여자의 영역을 굳이 침범하려 들진 않았다. 때가 되면 자연히 알려주겠거니 했다. 아님 할 수 없는 거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모든 부분을 공유하기란 힘들겠지.
오십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깨달았다. 상대의 아픔을 억지로 캐내려는 시도는 서로에게 독이 될 뿐이라는 걸….
“근데 수경 씨, 나도 삼십 대였다면 분명 실수 많이 했을 거야. 수경 씨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을 거고. 그땐 그렇잖아요. 본인은 스무 살에 비해 훨씬 성숙한 줄 알아도, 사실 이십 대나 삼십 대나 열정만 넘쳤지, 여전히 어리고 서툴고… 뭐, 십 년쯤 뒤엔 지금 내 나이 돌이켜보며 그땐 한참 어렸다 또 혀를 차겠지만.”
“무슨 소리예요 그게?”
“채원이… 아무래도 남자 문제 같아서….”
“아, 으응…. 내 생각에도 그래요.”
수경이 그제야 명섭의 말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그런 얘기 슬쩍 한 적 있었거든요. 미국에서 잠깐 알던 사인데 이번에 회사 일로 다시 만나게 됐다고. 사진쟁이라길래 영 마음에 안 차서 귓등으로 흘려들었더니… 강승잰지 뭔지, 틀림없이 이놈이 그때 말한 그놈 같아.”
“거 남의 집 귀한 자식한테 놈놈 소리는…. 사진 찍는 게 뭐가 어때서 그래요? 명함 보니 그래도 본인 스튜디오 차린 모양인데… 그만하면 괜찮지.”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디 코딱지만 한 사진관 하나 가지고 명함 팠나 보죠. 요즘 개나 소나 다 사장이고 대푠 거 몰라요?”
“지금 그 말, 나 들으라고 하는 얘깁니까, 윤 사장?”
“아니 그게 아니라….”
수경이 머쓱하게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암튼, 난 별로예요. 제 놈만 귀한 집 자식인가? 어디 우리 무남독녀 외동딸을 울려 울리기를. 돈벌이도 그렇고… 예술가들은 안 돼. 성격이 들쭉날쭉해서 여자가 피곤하다고.”
“그러면서 왜 명함은 은근슬쩍 챙겨요? 윤수경 여사 눈빛 보아하니 내일이라도 당장 한바탕 하러 갈 기센데. 그놈 어떤 집 자식인지 밤길 조심해야겠네. 내가 문자라도 몰래 보내줘야 하나….”
“지금 농담이 나와요?”
“농담 아닙니다. 걱정되니까 그렇지. 무슨 상황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부모가 개입을 한다는 게 과연 옳은 방법인지… 초등학생도 아니고 말야.”
“싸우러 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수경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난 우리 채원이 저렇게 크게 우는 거 처음 봐요 오늘. 명섭 씨 말대로 서른 넘은 애가 어린애처럼 꺽꺽 울잖아. 못 믿겠지만, 쟤 초등학생 때도 내 앞에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애야. 끝낼 때 끝내더라도 오해는 풀어줘야지. 얼마나 속상하고 답답했으면 저러나 싶고….”
“스튜디오 서울이던데… 내가 같이 가줄까?”
“…마음은 고맙지만 혼자 갈 수 있어요. 두 명 다 쉬면 돈은 누가 벌어.”
“카페 매출 꾸준한 데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참 씩씩해, 우리 윤수경 씨.”
명섭이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수경의 정수리에 툭 손을 얹었다.
“대신 터미널 도착할 때쯤 전화해요. 데리러 갈 테니.”
“응… 그럴게요. 트럭이 좀 창피하긴 하지만….”
“뭐라고? 하하 참….”
낯 뜨거운 기분에 짓궂은 농을 던지고 말았으나, 수경은 커다란 고목처럼 든든히 그녀 곁을 지켜주고 있는 명섭이 참 고마웠다.
능력이나 재산을 떠나서, 제 딸도 최소한 마음 따뜻한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진 못할망정, 벌써부터 여자 가슴에 생채기나 내는 놈이라니 안 봐도 싹수가 훤하지….
명함을 움켜쥔 수경의 손바닥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 * *
「일어났냐?」
“아, 응. 지금 스튜디오 가는 중.”
승재는 정혁의 전화에 건성으로 대꾸하며 가속페달을 최대치로 밟았다.
「목소리 들으니 늦었나 보네. 그래도 일어난 게 용하다. 어제 집에 어떻게 들어갔는진 기억나? 내가 인마, 너 부축하느라 허리가 나갔다고.」
“좀 말리지 그랬어. 주중에 그렇게 술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눈에 독기 품고 술잔 채우는 놈을 무슨 수로 말려?」
“미안하게 됐다.”
반복된 알람 소리도, 열 통이 넘는 조 실장의 전화도 받지 못한 채 늦잠을 자고 말았다.
몇 주간 누적된 피로의 끝에 알코올까지 초과치로 들이부었으니, 류정혁 덕에 무사히 침대 위에서 눈을 뜬 것만으로도 어찌 보면 기적 같은 일이지.
프로답지 못한 본인의 행동에 짜증이 밀려온다.
「너 어제 나한테 지겹도록 했던 말이 뭔지 알아?」
그리고 또 하나의 짜증 유발인자.
“뭔데.”
「이 새끼 진짜 필름 뚝 끊겼나 보네.」
한창 바쁠 대낮에 어쩐 일로 전화도 끊지 않고선, 야금야금 신경을 건드리는 류정혁.
“아, 뭐냐니까 글쎄.”
「내가 그렇게 못 미덥냐.」
“…뭐?”
「내가 그렇게 부족해 보이냐.」
“뭔 소리야. 나 운전 중이니까 자세한 얘긴 나중에….”
「윤채원한테.」
“…….”
「정말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냐….」
심장이 욱신거린다.
제3자의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명치끝이 돌덩이가 든 것처럼 콱 막히고, 목 언저리 맥박이 펄떡거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마는 지긋지긋한 습성….
“나 잡지사 편집장한테 전화해야 돼. 촬영 30분이나 늦었다고 지금.”
「9년 동안 죽어라 노력해도 결국 못 떼어낸 거잖아. 시간 칼이던 강승재 지각하게 만드는 유일한 상대가 윤채원인데… 감정 소모 그쯤 했으면 충분하니까 이제….」
“넌 숙취도 없냐? 그렇게 한가하면 너희 회사 사원들이나 갈궈, 인마. 끊는다.”
도망치듯 정혁의 전화를 끊어버린 승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부스스한 머리칼을 쓸었다.
워낙 말수가 적어 무심하게 보였을 뿐, 사실 정혁은 누구보다도 채원과 승재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조언이 진심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더 듣기 힘들었다. 함부로 흘려버릴 수도, 그렇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으니까.
끼익!
스튜디오 건물 주차장으로 핸들을 꺾던 승재가 급브레이크를 강하게 밟았다.
“후아….”
큰일 날 뻔했네.
간밤의 술이 아직 덜 깨기라도 한 건가. 익숙한 길이라 무심결에 방향을 틀었나 보다. 사람이 서있는 줄도 모르고 하마터면….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차창 사이로 고개를 내민 승재는 사이드미러 가까이 서있는 여인의 상태를 황급히 물었다. 다행히 넘어지거나 다친 것 같진 않았다.
“괜찮아요. 제가 건물을 좀 찾느라 차를 미처 못 봤네요.”
“아닙니다. 제 부주의로… 속도를 줄였어야 했는데….”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승재의 말끝이 흐려졌다. 분명 초면이었음에도 승재와 마주한 중년 여인의 모습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실례지만 스튜디오K가 이 근처 맞나요? 주소에는 앨리스 타워라고….”
“아, 이 건물 맞습니다.”
“어머, 다행이네. 한참 헤맬 줄 알았더니. 스튜디오는 몇 층인가요? 간판이 통 안 보여서….”
승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4층부터 8층까지 총 다섯 개 층이 스튜디오K 상호명으로 운영 중이었기에 콕 집어 답을 하기 애매한 부분도 있었고, 무엇보다 개인 손님과의 미팅 일정은 전달받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여기 소속입니다만, 혹시 몇 시에 약속을 잡으셨는지….”
“시간 약속을 따로 하진 않았어요. 강승재 씨 잠깐 만나러 왔는데….”
“네?”
“스튜디오K 강승재 대표, 아시나요?”
여인은 반쯤 내려진 차창 너머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건넸다.
놀랍게도 그것은 승재 자신의 명함이었다.
* * *
“…표정 보니 금시초문인가 보네. 스튜디오 직원 분께서 대표님 성함을 모르진 않을 테고… 설마 가짜로 명함 파서 사기 치고 다니는 놈인가.”
“아, 그건 절대 아닙니다.”
강승재의 얼굴도 모르면서 강승재를 만나러 왔다니.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던 승재가 수경의 엉뚱한 추리에 화들짝 놀라 말문을 열었다.
“아니라고?”
“그니까 제 말은, 가짜 명함이 아니라는 뜻에서….”
“아, 그럼 총각네 회사 대표님이 강승재 맞다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냥 처음부터 고개 끄덕였으면 될걸, 참 어렵게도 말해주네요.”
생김새가 수려하니 쭈뼛거리는 음색마저도 귀엽게 여겨진다. 강승잰지 뭔지 하는 대표 밑에서 얼마나 힘겹게 월급을 받고 있으려나. 길 안내해준 보답으로 저 젊은 청년 크림빵이라도 사다 주고 갈까, 수경이 잠시 샛길로 빠진 사이.
“실은 제가….”
열린 차창 틈새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입니다.”
“응? 뭐라고요?”
“제가 스튜디오K 대표, 강승재입니다.”
“아….”
수경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승재를 바라보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왜 내 딸 울렸는지 궁금해서 왔으니, 해명이든 변명이든 해보라고.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준비해온 첫 멘트는 이미 물 건너간 듯싶다.
윤채원 이것이 왜 울고불고 안달이 났나 했더니….
열린 창 너머로 언뜻 비친 반듯한 이마와 눈, 코, 입. 신뢰를 주는 젠틀한 음성. 수경의 몸 상태를 물으며 예의 바르게 사과를 하는 모습에서, 이미 승재에 대한 적대감은 허무하리만큼 꺾여버리고 말았다.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명함, 어디서 받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분명 제 명함이 맞긴 한데 드린 기억이 없어서.”
“혹시 윤채원이라고 알아요?”
“…POA 윤채원 대리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윤 대리를 어떻게….”
“나, 채원이 엄마예요.”
“…….”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지만, 잠깐 시간 내 줄 수 있어요?”
끼익.
자신을 채원의 엄마라 소개하는 여인의 한마디에 반사적으로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운 승재는, 고민할 틈도 없이 운전석 문을 열고 수경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강승재입니다.”
“아… 뭐, 이름은 조금 전에도 들었고….”
“괜찮으시다면 1층 로비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가 금방 주차한 후에….”
승재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수경을 건물 입구까지 에스코트했다. 어제 들이부은 알코올의 잔재가 발끝 아래로 훅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주차장이 지하일 텐데 뭐하러 그런 수고를 해요. 몇 층인지 말해주면 미리 올라가 있을게요.”
“그래도….”
“차 저렇게 계속 세워 둘 건가? 얼른 가 봐요. 내가 엘리베이터 처음 타는 것도 아닌데.”
“아, 그럼… 8층에서 뵙겠습니다. 저희 직원이 안내해드릴 겁니다.”
수경이 자꾸만 손사래를 치는 통에, 승재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차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힘을 주고 걸었는지,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팔과 다리는 마치 제 것이 아닌 양 삐걱거렸다. 핸들을 잡은 커다란 손에 진득이 땀이 밴다.
“어, 조 실장, 난데… 지금 8층에 손님 한 분 가실 거야. 미팅룸… 아니지. 내 방으로 안내해드려. 응. 차랑 과일도… 아, 그리고 오늘 촬영 말인데, 시간을 좀 연기해야 할 것 같아서. 30분만, 한 시간이면 더 좋고… 알지. 이미 많이 늦은 거. 후우, 미치겠네.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편집장 6층에 와 있다고 했던가? 응. 내가 직접 전화할 테니까….”
조 실장에게 전화를 건 승재는 두서없이 말을 늘이며 시동을 껐다. 주차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선을 밟았든, 두 칸에 걸쳤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
상상조차 못 해 본 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뵙게 될 줄은…. 여긴 어떻게. 무슨 연유로 오신 걸까.
윤채원이 손수 명함을 건넸을 리 없는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추론이 쉽지 않다. 이럴 바엔 차라리 직접 부딪혀보는 수밖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 신속하게 8층 버튼을 누르는 것이, 지금 강승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차는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커피, 홍차, 허브티, 주스 있습니다.”
“아… 커피 주세요.”
“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수경에게 예의를 갖추어 인사한 직원은 강 감독님이 곧 오실 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개나 소는 아니었나 보네.”
수경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표실이라 안내받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유리 진열장 한쪽 구석에 다닥다닥 붙어선 각종 상패와 감사패. 일일이 전시해 놓기엔 개수가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맞은편 벽에는 연예인 화보부터 브랜드 광고, 강승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외국 모델들의 비하인드 컷이 인테리어처럼 멋스럽게 걸려 있었고, 각종 자료집과 전공 서적,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원목 책장을 가득 메웠다.
강승재의 개인 사무실은 그나마 아담한 편이었다. 층별로 체계화된 부서와 오가는 직원 수만 대충 보더라도 스튜디오 규모는 동네 사진관이 아닌 거대한 기업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직업이 뭐냐니까?’
‘사진 찍어요.’
두어 달 전, 채원과 나누었던 짤막한 대화가 문득 수경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무리 제 딸이라지만 가끔씩 속이 터질 때가 있다. 애초부터 유명한 사람이다, 이러이러한 일을 맡고 있다,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면 그리 우습게 흘려듣진 않았을 텐데.
똑, 똑.
조금 전 나갔던 남자 직원이 커피와 비스킷, 과일이 담긴 접시를 우드트레이에 받쳐 들고 정중히 노크를 했다.
“뭘 이렇게 많이… 그냥 커피만 주셔도 되는데요.”
생각지도 못한 대우에 당황한 수경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는데.
“조 실장, 그거 이리 줘. 내가 가져갈게.”
뒤따라 모습을 드러낸 승재가 조 실장이 들고 있던 트레이를 가뿐히 건네받았다.
“아, 오셨네요, 감독님. 근데 저… 편집장님하고는 통화하셨어요? 모델 대기한 지 벌써 30분째라.”
“응. 양해 구했으니까 먼저 스튜디오로 내려가 있어. 의상 순서랑 조명 체크 한 번만 더 해주고.”
“감독님은 언제쯤….”
“그게….”
“걱정 말아요.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조 실장과 승재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수경이 차분한 목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미리 사정 설명을 했기 때문에….”
“모델 대기하고 있다면서요. 이렇게 바쁜 사람인 줄 알았으면 시간 약속이라도 잡고 올 걸… 미안해요. 멀리 살지만 않았어도 다음에 다시 오겠다 할 텐데, 나도 사정이 여유롭지 못해서.”
“정말 괜찮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 실장, 얼른 가서 일 봐.”
“아, 네. 그럼 말씀들 나누십시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승재의 눈짓을 알아챈 조 실장은 황급히 인사를 마친 후 문을 닫았다.
오늘따라 달라도 너무 다른 상사의 모습이 어리둥절하였으나, 업무 외적인 호기심은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지금은 6층 스튜디오를 빙빙 돌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잡지사 편집장을 어찌 달래주어야 할지, 그것이 더 시급했다.
* * *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테이블 위에 트레이를 조용히 내려놓은 승재는 수경을 향해 불필요한 사과를 거듭했다.
시시각각 수경의 눈치를 살피는 표정. 긴장 속에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제 딸과 단순한 업무 파트너로 엮인 놈은 아닌 듯하다.
“그쯤 고개 숙였으면 됐어요. 내가 연락도 없이 찾아온 거잖아요.”
커피 한 모금을 넘긴 수경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과한 예의가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용건만 간단히 할게요. 일단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는데.”
탁. 소서에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채원이한테 얼핏 듣기론, 미국에 있을 때 잠깐 알던 사이였다고….”
“네. 미국에서 6개월 정도 하우스메이트로 지낸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랬군요. 난 류정혁 군 이야기만 가끔 들어서.”
“정혁이와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그 친구 소개로 채원이도 알게 됐고….”
“그래서?”
“네?”
“그래서 우리 채원이랑도 류정혁 군처럼 친구로 지낸 거예요? 지금까지 쭈욱?”
“아, 그게….”
테이블 모서리로 시선을 내린 남자의 표정에는 난처함과 혼란이 가득했다. 윤채원과의 관계에 대한 해답은 9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승재가 찾지 못한 난제였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도, 그녀의 어머니와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 시뮬레이션을 수없이 돌리던 승재였다. 적지 않은 난관이 예상되었지만, 날씨나 교통 따위의 인사말로 경직된 분위기는 어느 정도 풀 수 있겠거니 했다. 시작부터 이토록 말문이 막히게 될 줄이야….
“강승재 씨도 우리 딸만큼 입이 무거운가 보네요. 아님, 내 질문이 그렇게 어려웠나….”
어색한 공백을 견디다 못한 수경이 넌지시 승재를 재촉하자, 굳게 닫혀있던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채원이… 많이 좋아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오랫동안.”
수경은 그의 솔직한 대답이 거슬렸다. 문법 실수를 할 만큼 한국어가 서툰 사람은 아니었다. 잘못 들은 것은 더더욱 아닌 듯하고.
“좋아합니다가 아니라, 과거형이네…. 생전 안 울던 애가 왜 그렇게 곡소리를 내나 했더니.”
“채원이가… 많이 울었습니까?”
혼잣말처럼 흘린 수경의 말에 예상대로 즉각 반응한 이 남자.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가라앉힌 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연하게 입을 열었다.
“밥도 안 먹고 물도 안 마시고, 수도꼭지 고장 난 것처럼 종일 울기만 해. 달랬다가 화도 냈다가… 별짓 다 해 봐도 어디 속 시원히 얘길 해줘야 말이지. 결국 딸 아이 몰래 핸드백 뒤져서 강승재 씨 명함 찾아낸 거예요. 회사도 보름씩이나 휴가를 냈다는데 그래도 되나 싶고….”
“실례지만 제 이름은 어떻게….”
“이 계집애가 대성통곡을 하면서도 강승재 나쁜 놈, 나쁜 놈… 소릴 빼먹지 않길래, 그래서 알았죠. 뭘 얼마나 모질게 했길래 얘가 식음을 전폐하고 이럴까… 사실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예요.”
“…죄송합니다.”
“사과 들으러 온 건 아니고.”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어머님.”
승재는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또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수경은 움찔거리는 팔을 겨우 참아냈다. 하마터면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일 뻔했다. 주눅 든 강아지 음성으로 수경을 ‘어머님’이라 칭하는 이 훈훈한 청년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다 큰 남녀끼리 얼마든지 만났다 헤어질 수 있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참견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채원이 그 미련한 것이 제 입으로 말도 못 하고 속 끓이는 것 같길래…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오해는 풀어줘야겠다 싶어서.”
“제가 오해를 했다고… 하던가요?”
“우리 채원이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그건….”
“혹시… 내가 그 아이 혼자 낳아 기른 사실은….”
망설이는 승재를 향해 수경이 먼저 과감하게 운을 뗐다. 그가 조금 더 긴장을 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최근에… 들었습니다.”
“그럼 아버지에 관한 얘기는요?”
“가끔 얼굴 뵌 게 전부라고 했습니다. 교통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유학 중단하고 귀국한 거라고….”
“우리 채원이가 강승재 씨한테 그런 얘기들을 시시콜콜 다 털어놨다는 게… 나는 더 놀랍네요. 본인 가정사 절대 입 밖으로 꺼내는 성격이 아닌데….”
수경은 잠시 말을 끊고 심호흡을 했다. 주책없이 목이 멘 탓에 감정을 진정시킬 틈이 필요했다.
강승재라는 남자를, 어찌 보면 제 딸이 몇 배는 더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비밀이 쌓이고 오해가 쌓여 등을 돌리려는 남자를 붙잡고 싶었던 게지. 얼마나 절박했으면….
“서일그룹 정 회장… 알죠?”
“아… 네. 정윤호 회장, 이번 전시회 때도 인사 나눈 적 있습니다만….”
승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작스럽게 바뀐 화제가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회? 채원이가 준비한다던 그 사진전에 정윤호가 왔었다고?”
“네. 전시회장이 서일그룹 산하였습니다. 그래서….”
“아, 그랬군요. 이제야 좀 퍼즐이 맞춰지네. 김 비서 그놈이 왜 또 난리를 부리나 했더니….”
“어머님께서 어떻게 김 비서를….”
놀란 듯 문장 끝을 흐리는 승재에게.
“정윤호 애비는 그럼, 누군지 기억하려나?”
수경이 덤덤한 음색으로 되물었다.
“정창길 회장 말씀이십니까?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걸로 아는데….”
“그래요. 정창길. 그 회장님께서도 하필이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
“네? 그게 무슨….”
“채원이 아빠랑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가버렸다고. 허망하게….”
어찌 보면 수경은 이미 답을 내놓은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승재의 눈동자는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설마.
설마 그녀의 아버지가….
감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섣부른 판단을 내리기엔, 그 대상이 너무도 거대했다.
“이해해요. 누구든 비슷한 반응일 거야. 당사자인 나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인데. 바로 받아들이기엔 조금 벅찰지 모르지….”
“…….”
“채원이 아버지… 정창길이에요.”
수경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승재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거짓말 같겠지만 진실이야. 그러니까….”
“…….”
“김 비서와 우리 채원이 관계, 더 이상 오해 없었으면 해요.”
* * *
터미널까지 바래다주겠다는 승재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한 수경은 갓길에 정차 중인 택시를 서둘러 잡아탔다.
“혹시 더 궁금한 거 있음 전화해요. 채원이보단 나한테 물어보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테니.”
택시를 출발시키기 전, 수경은 청주 카페 주소와 번호가 적힌 명함 한 장을 차창 너머로 건넸다.
“그리고 나 여기 온 거,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미 끝난 남녀 사이 붙여보겠다고 털어놓은 얘긴 아니니까. 난 그저 강승재 씨가 우리 채원이를… 나쁜 쪽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게 속상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강승재 씨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원인 제공은 내가 했는데… 암튼 커피 잘 마셨어요. 다음에 기회 되면, 그땐 내가 한잔 대접할게요.”
승재가 적절한 인사말을 찾기 위해 머뭇거리는 사이, 수경을 태운 택시는 속도를 내며 점점 그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모범이라도 불러드릴 것을 그랬나.
한 시간 남짓한 첫 만남에 제대로 된 배웅조차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
수경이 떠난 지 한참 지났지만, 승재는 여전히 두 발을 굳게 디딘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채원의 아버지가 서일그룹 정창길이었다니….
수경과 나누었던 대화를 천천히 곱씹으며 생각을 정리해 보아도 이 엄청난 진실을 곧이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다행히 돈이 아주 많았거든. 나한텐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해야 하나….’
채원이 부친의 재력에 대해 비꼬듯 입을 열었을 때에도, 승재는 그녀의 아버지를 그저 돈 많은 사업가나 전문직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채원이 성은 윤씨… 아닌가요?’
‘양육비와 생활비를 지원받는 조건이었어요. 서일가에 혼외 자식 소문 돌게 하지 마라. 아빠가 누구냐 묻거든 죽었다 해라. 그래서 성도 외가 쪽 따른 거고.’
승재의 물음에 수경은 비교적 덤덤한 톤으로 답했지만, 잔주름 사이 쓸쓸하게 젖어 든 눈빛이 승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슬픈 기색을 감추기 위해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는 모습. 그것은 채원의 오래된 버릇이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VIP 행사… 난 못 가. 승재 씨도… 안 갔으면 좋겠어.’
가뜩이나 바쁜 시기에 왜 이런 어깃장을 놓는 건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행동이 이제야 납득 간다.
‘이 말 하려고 온 거야.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늦었단 거 아는데, 오늘보다 더 늦으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힘겹게 입을 떼던 그 사과도.
‘돈 때문에… 돈이 급해서 찾아온 건 절대로 아냐. 믿어 줘. 누구한테 얼마를 갚든 어디까지나 내 문제이기도 하고….’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믿어 달라 말하던 너의 호소도. 모두….
“진심… 이었구나.”
울컥 차오르는 눈물에 승재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일렁거렸다.
내가 너의 살갗에 짙은 멍을 새겼을 때, 이미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여겼는데.
‘대답해 줘.’
‘뭐를.’
‘왜 날 받아주는지….’
지겨운 메아리가 되어 밤낮없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는 윤채원의 목소리.
‘동정심, 연민, 뭐 그런 거야?’
‘아냐, 그런 거.’
‘그럼 뭔데.’
‘…….’
‘혹시 나… 사랑해?’
정말 몰라서 물었던 거냐고. 내 진심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냐고.
너를 향한 모든 것이 너무나 늦어버린 지금,
이제 와 나는 너에게… 어떤 답을 내주어야 할까.
지잉. 지이잉.
손에 쥔 휴대 전화가 여러 번 진동했다.
촬영이 한 시간 가까이 지체된 상황, 조 실장의 애타는 독촉을 더 이상 회피할 수는 없었다.
“어, 조 실장. 손님 배웅해드리고 지금 올라가는 길이야. 미안. 많이 난처했지?”
「아닙니다. 잡지사 직원들이랑 스태프들 식사 먼저 시켰어요. 감독님 큰일 터진 건 아니냐고 오히려 걱정하시더라고요. 평소에 한 번도 이런 적 없던 분이 갑자기 늦으시니까. 아 참 그리고 희서 양이 두 번이나 연락했었어요.」
“누구?”
「서일그룹 정희서 양이요.」
“아….”
하필 이 타이밍에 정희서까지 끼어들다니.
「감독님께서 일전에 프로필 사진 찍어주겠다고 약속한 적 있으십니까 혹시? 친구들하고 언제 가면 되겠냐고 자꾸 보채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일단 감독님 촬영 중이라고만 둘러댔거든요. 거 참, 거절하기도 애매하고….」
“…….”
「감독님? 제 말 듣고 계세요?」
“조 실장.”
굳게 다물어진 승재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약속… 잡아 줘.”
「네?」
“내일이든 모레든, 아니면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정희서 끼워 넣으라고.”
오랜 계획보다 충동적인 결정이, 때로는 더 효과가 있는 법이었다.
* * *
“감독님! 우와, 스트랩 진짜 볼수록 예뻐요! 제가 드렸다고 호들갑 떠는 건 절대 아니구요, 객관적으로 봐도… 야, 안 그래? 감독님 카메라 좀 자세히 봐봐, 저거 내가 직접 고른 거라니까?”
변함없이 해맑은 정희서는 승재의 카메라에 달린 오렌지색 스트랩을 마치 제 것인 양 자랑하는 중이었다. 함께 온 친구들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대며.
“응, 예쁘네. 정희서 안목 인정.”
“너무 영혼 없이 대꾸한다 너.”
“긴장되니까 그렇지. 우리 너무 눈치 없이 따라온 거 아닌가 몰라. 여기 원래 개인 프로필 안 찍는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나마 같이 온 친구들은 눈치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는지, 아까부터 자꾸만 승재를 힐끔거린다.
“괜찮습니다. 지난 사진전 때 정희서 양에게 과한 선물을 받아서 내내 빚진 기분이었거든요. 자연스럽게 대화하듯이 포즈 취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아, 감사합니다. 이래서 엄마가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고….”
“그 친구가 나야?”
“그래 너다 너. 정희서.”
친구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희서를 띄워주기에 바빴다. 앳된 여자 셋의 수다는 평범한 스무 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들 반짝반짝한 다이아몬드 수저를 양손에 쥐고 태어난 것만 빼면.
“저 맨 우측이 한경제약 둘째랍니다. 가운데 단발머리 학생은 아버지가 무슨 외국계 기업 오너라던데 발음을 너무 굴려서 어딘지 잘….”
카메라 앞으로 정희서 무리들을 안내한 조 실장은 승재 가까이 다가오며 은근슬쩍 정보를 흘렸다.
“별로 안 궁금해. 사진이나 얼른 찍어주고 보내야지.”
“감독님도 참, 그게 왜 안 궁금하실까… 저는 쟤네들 보자마자 호구 조사부터 하고 싶어지던데요.”
조 실장의 솔직한 대꾸에 피식 입꼬리를 올린 승재는 셔츠 손목을 반쯤 걷어붙이고 카메라를 점검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 대신 시간 체크나 잘 해줘. 집중하다 보면 금세 놓쳐서.”
“네. 제가 감독님이랑 하루 이틀 일합니까 어디. 그런 건 걱정 마십시오. 것보다, 괜히 소문 잘못 나면 골치 아파지지 않을까요? 재벌집 딸내미들 프로필 줄줄이 찍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쟤네들 입단속 단단히 시키셔야 할 거예요.”
“안 그래도 내가 한 번 더 주의 주려고 했어. 이따 촬영 끝나면 정희서 잠깐 따로 불러 줘. 5분이면 되니까.”
“저, 감독님!”
세트장에 준비된 벨벳 소파 중앙에 앉아 여유롭게 주인공 행세를 하던 정희서가 발랄하게 승재를 불렀다. 뒤늦게 아쉬운 점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혹시 중간에 헤어 체인지 가능할까요? 지금보다 살짝 더 웨이브 넣고 싶어서요.”
“야… 별걸 다. 숍 다녀왔다며. 그냥 대충 찍어….”
“정희서 진짜, 완전 민폐….”
친구들이 얼굴을 붉히며 만류할 정도로 정희서의 요구사항은 철이 없었지만, 승재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메이크업팀 대기하고 있으니까 아마 가능할 겁니다. 조 실장, 20분 후에 3명 되는지 한번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사실 그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생딸기 주스가 마시고 싶다 했더라면 당장 달려나가 착즙이라도 해왔을 거라고, 승재는 자조했다.
오늘 그의 절실함 지수는 정희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엉망으로 엉켜버린 9년 치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저 천진한 아가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 * *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남산에 위치한 블라워몬트 호텔, 1층 다이닝 라운지.
차콜색 정장을 반듯하게 갖춰 입은 승재는 테이블 너머 상대를 향해 깍듯이 인사했다.
“토요일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강 감독.”
“별말씀을요. 이렇게 바로 조찬 약속 잡아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 딸이 강 감독한테 좀 폐를 끼치고 다녀야 말이지. 엊그제도 친구들 끌고 가서 소란 피웠다면서요? 대신 사과드립니다. 딸아이가 아직 철이 좀 덜 나서….”
“제가 가능한 선에서 해드린 것뿐입니다. 편히 생각해 주십시오.”
승재가 예의 바른 미소로 답했다. 철부지 스무 살 무리의 시중을 드느라 모든 일정이 두세 시간씩 뒤로 밀려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김 비서를 거치지 않고 정윤호와 독대를 하는 것. 만만찮은 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정희서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으니까.
‘저희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란 말씀이신 거죠?’
‘네. VIP 행사 덕에 전시회 기부금이 상당히 모였거든요. 감사 인사 전하고 싶어서.’
‘아, 그런 거라면 비서실 통해서 약속 잡으시면 될 거예요. 아니면 제가 김 비서한테….’
‘혹시 사적으로 자리 마련할 방법은 없을까요? 실은 회장님과 희서 양 함께 보시라고 사진 한 점 선물로 드릴까 하는데, 회사로 직접 들고 가기엔 왠지 신경이 쓰여서요.’
‘우와, 감독님 작품을요? 전시회 때 걸렸던 사진인가요?’
‘아뇨.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제 개인작입니다.’
승재는 스트랩에 대한 답례로 미공개작을 준비했다며 정희서를 흔들었다. 몇 마디 더 보탤 필요도 없이 그녀는 익숙한 호텔 이름 하나를 냉큼 승재에게 알려주었다.
‘아빠가 여기 로얄 스포렉스 회원이세요. 주말에는 보통 아침 일찍 가시니까 아마 한 9시, 10시쯤 끝나시려나? 제가 한번 여쭤볼게요. 언제가 좋으신지.’
약속을 잡아준다면야 몇 주가 되었든 기다릴 작정이었다. 정 회장이 사적인 만남을 부담스러워할 경우 어떤 식으로 설득을 하는 게 좋을까, 플랜B를 고민하려던 찰나, 정윤호로부터 연락이 왔다. 뜻밖에도 사흘 뒤 조찬을 제안하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주말 여가 시간까지 할애해주시고.”
“아닙니다. 제가 원래 궁금한 건 오래 못 참는 성격이라 약속 날짜를 급하게 잡았습니다.”
“저한테 궁금한 점이 있으셨습니까?”
“강 감독이 날 찾은 이유 말입니다. 단순히 고맙단 인사나 하겠다고 여기까지 달려온 건 아니지 않나 싶어서.”
정 회장은 예상대로 눈치가 빨랐다. 그가 먼저 길을 터주어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앞에 놓인 블랙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넘긴 승재는, 장황한 서두를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을 내어놓았다.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제 지인이 회장님께 진 빚을 대신 돌려드리고자 왔습니다.”
섣부른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한 글자 한 글자를 꾹꾹 눌러 뱉었다. 윤채원의 본심이 흐려지지 않도록. 3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긴장되고 떨리는 일이었다.
“빚? 그러니까 내가 강 감독님 지인과 돈으로 얽혀 있다, 지금 이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허허 참….”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정윤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렵사리 꺼낸 승재의 발언을 딱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당사자가 모르는 채무 관계도 있나? 어찌 됐든 갚을 돈이 아니라 받을 게 있다니 기분은 좋습니다만. 근데 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내가 강 감독 직접 만나 인사 나눈 것도 불과 얼마 전 일인데 지인이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실례지만 그분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윤채원, 입니다.”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인데.”
“더 정확히는… 회장님의 선친께 진 빚입니다.”
“…….”
정윤호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언급하는 걸로 봐선 가볍게 넘길 만한 사안은 아닌 듯했지만, 상대의 맥락을 이해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지 올해로 10년째입니다만 개인에게 돈을 빌려주셨단 소린 처음 듣습니다. 액수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까?”
“5억 5천입니다.”
“5억 5천?”
생각보다 큰 액수에 정 회장은 꽤 놀란 눈치였다.
“강 감독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립니다. 억 단위 액수를 절대 사사로이 거래하실 양반이 아니거든.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주저하지 말고 속 시원히 얘기해봐요. 내가 스무고개나 수수께끼 쪽엔 영 소질이 없어서 말야….”
“회장님께서 제 말을 어디까지 믿어주실지 몰라, 망설여지는 건 사실입니다.”
“내가 강 감독 얘길 왜 믿지 못한다는 겁니까? 설마 우리 가족도 모르는 비자금 출처라도 알아낸 건가?”
“차라리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뭔데 이렇게 뜸을….”
“윤채원을 모르신다면, 혹 윤수경은… 아십니까?”
이어지는 승재의 질문에 정 회장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아꼈다.
“아실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부친께서 워낙 철저히 감추고 사셨던 이름들이라.”
“오래전에 딱 한 번….”
“방금 뭐라고….”
“…들어본 적 있습니다, 수경이란 이름.”
“…….”
“성이 윤씨인 줄은 몰랐지만.”
뜻밖의 답을 끝으로 테이블 사이에는 얼마간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패를 알 수 없으니 말을 아끼는 수밖에.
동일한 이름이 언급된 탓에 입술이 바싹 마르긴 했지만, 정윤호가 기억하는 ‘수경’이란 이름이 과연 채원의 어머니가 맞는지 승재는 그것조차 판단이 서질 않았다.
“18살… 아마 여름쯤이었을 겁니다. 늦은 밤까지 비가 제법 왔었으니까.”
고맙게도 정 회장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때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참이었거든. 어머니는 해외에 나가계신 상태라, 아버지가 기사 퇴근시키고 직접 운전대를 잡으셨어요. 간만에 외식이나 하자시면서. 차를 타고 한 300m쯤 갔으려나… 비를 흠뻑 맞은 어떤 여자가 헤드라이트 앞에 번쩍하고 나타난 거야. 아버지랑 나랑 귀신 본 듯 소리를 질렀지 뭡니까. 주택가라 속력 줄였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사람 하나 칠 뻔했다고.”
승재는 놀란 감정을 숨긴 채 차분히 귀를 기울였다. 섣부른 추임새는 생략했다. 지금은 어렵게 입을 연 정 회장의 흐름을 끊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니.
“차를 가로막고 줄줄 우는 여자한테 아버지가 ‘수경아’라고 부르더군요. 아차 싶었던지 조수석에 앉은 제 표정을 살피시길래 눈치껏 집으로 돌아갔지 나는. 그날 내가 보고 들은 모든 일은 당연히 함구했고… 집안 들썩이는 건 원치 않았거든. 그런데 그 여자….”
느릿하게 이어지는 목소리.
“만삭… 이었어요. 캄캄한 밤에 비가 쏟아지는데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말이지.”
정 회장의 낮게 깔린 톤에서는 당시의 충격과 혼란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설마 했습니다. 아버지와 관련된 여자는 절대로 아닐 거라고, 혼자 결론을 내렸던 거 같아. 내가 많이 존경했어요 우리 아버지를. 대기업을 이끌어가면서도 가정에 충실하려 애쓰셨고 어머니와도 사이가 좋으셨으니까.”
“…….”
“그래서 더 물어보지 못했나 봅니다. 웃긴 건 아버지도 당시 상황에 대해 짤막한 해명조차 없으셨단 거야.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태연하게 잘 지냈어요. 황망하게 아버지 보내드린 후로는… 완전히 머릿속에서 지우고 살았지. 아니 그런 줄만 알았지. 오늘 강 감독한테 윤수경이란 이름 듣기 전까지는….”
30년도 더 된 기억을 잊지 않고 떠올려주어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당시에 충격이 꽤 크셨겠다 위로를 전해야 하나.
정 회장의 뜻하지 않은 고백에 승재는 어찌할 바를 몰라 머뭇거렸다.
“내 예상이 맞는 겁니까?”
“…….”
“강 감독이 말한 윤채원은 아무래도 내가 봤던… 그 배 속의 아이인 듯한데, 내 아버지께 갚을 빚이 있단 뜻은 그럼….”
“정씨 성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양육비와 생활비를 대주신 모양입니다.”
“…….”
“당시 받은 전세 보증금이 5억 5천이라 들었습니다. 언제든 갚아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는데 그리 사고를 당하실 줄 몰랐다고.”
정윤호의 눈동자가 참담하게 가라앉았다. 몇십 년째 묻어둔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생각보다 더 힘에 부쳐 보였다.
“그랬군요….”
“아이를 낳자마자 부친께서 친자 확인을 비밀리에 행하셨다 합니다만, 그 서류가 아직 남아있는진 저도 잘…. 어차피 돈을 돌려드리러 온 목적이기 때문에 증빙될 만한 것들을 따로 챙겨오진 않았습니다.”
“왜… 이제 와서 보증금을 돌려주겠다 하는 겁니까? 한 여자의 인생을 망친 것 치곤 너무나 적은 액수인데.”
승재의 말을 거짓으로 몰아간다든가, 제 가족의 편에 서서 얼마든지 목청을 돋울 수 있는 위치에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정 회장은 중심을 잘 잡아주는 편이었다.
그렇다면… 좀 더 편히 이야기해도 되는 것일까.
승재는 짧은 숨 한 번으로 뻣뻣이 굳은 어깨를 이완시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평생 감시를 받고 산다 했습니다. 부친께서 매사 철저하고 빈틈없는 분이셨나 봅니다. 정 회장님과 정윤진 부회장님께 행여 피해가 가진 않을까, 걱정이 지나쳐 그리하셨을 수도 있고…. 아무튼 윤수경 씨나 윤채원 씨 모두 서일그룹과의 끈이 남아 있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하는 상태입니다. 지금껏 받은 양육비나 생활비를 일일이 계산할 수는 없더라도, 보증금이나마 돌려주고 싶다면서… 조용히,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고.”
“잠깐만, 지금 서일그룹의 끈이라 했습니까? 감시라니, 아버지 돌아가신 지도 한참 됐는데 대체 누가….”
“이름은 모릅니다. 다들 ‘김 비서’라고만 칭하길래 저도 그리 외워두긴 했는데… 제가 회장님을 사석에서 뵙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설마….”
승재는 차분한 음색으로 김 비서와 윤채원 사이에 얽히고설킨 그동안의 일들을 세세히 풀어나갔다. 놀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정윤호는 기가 막히다는 듯 실소했다.
“하, 정말… 일개 비서를 당신 아들보다 더 가까이 두고 사셨을 줄이야….”
선친의 치부를 3자에 의해 듣게 된 것도 모자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수행비서보다도 더 제 가족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니.
믿었던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이 뒤늦게 밀려왔기 때문인지, 정 회장이 받은 충격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아무리 처세술에 능한 기업가라 해도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강 감독.”
오랜 정적 끝, 정 회장이 낮은 톤으로 승재를 불렀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강 감독의 돈을 덥석 받는다는 건 절차상으로도 그렇고, 말이 안 되는 일이야. 마음의 빚을 털겠다고, 연결고리를 끊고 싶다고, 그걸 돈으로 갚겠다니… 너무 주관적인 명목 아닙니까? 솔직히 지금 난 그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머릿속이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다고 해야 하나. 설마, 아니겠지 했어요. 그 비 오던 날 밤 차 앞에 뛰어든 만삭의 여인을 목격하지만 않았더라도, 강 감독이 오늘 나한테 한 말… 절대로 믿지 못했을 겁니다.”
“네. 회장님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돈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을 해봅시다. 그리고 내가 윤채원 씨를 한번 만나 봤으면 하는데….”
“죄송하지만 그건….”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 그럽니다. 어찌 됐든 하루아침에 여동생이 생겼는데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뜻밖의 요청에 승재가 난감한 눈빛으로 답을 망설였다. 정 회장과의 자리를 만들기 이전에, 일단 본인과 채원의 문제부터 해결을 하는 게 순서였으니.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닌 것 같고….”
“네?”
“윤채원 양과 강 감독 말입니다.”
재벌 총수의 눈썰미는 남달랐다.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고 이야기를 전달하려 애쓴 보람도 없이, 정 회장은 이미 처음부터 승재와 채원의 사이를 대충 짐작한 듯했다.
“강 감독이 키다리 아저씨… 뭐 그런 역할입니까? 당사자 몰래 몇억씩 되는 돈을 갚아주겠다 나서는 게 신기해서 그러지. 아님 내 배포가 좁은 건가.”
“아….”
“포커페이스에 능한 분인 줄 알았더니, 강 감독 당황하는 모습 한 시간 만에 처음 봅니다. 곤란하면 굳이 말 안 해도….”
“윤채원…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큰 숨을 들이켠 승재가 정 회장을 향해 선명히 답했다. 다소 충동적인 발언이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채원을 사랑하고 있다 인정하는 순간, 승재의 가슴 속에 단단히 응어리진 번민은 거짓말처럼 묽어져 스르륵 흘러내렸다.
오랜 체증이 비로소 가신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