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너를 버릴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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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너를 버릴 자격
* * *
“여긴 왜 또 왔어?”
“그냥… 크리스마스잖아. 팸플릿 전해주고 집에 가려는데… 혼자 있기 싫어서….”
청승맞게 온몸을 쪼그리고 있던 채원이 저린 다리를 힘겹게 일으키며 여느 때처럼 승재를 반겼다.
그놈의 크리스마스 타령. 그럴 바엔 미술관에 있다가 같이 왔으면 좋았잖아….
쇼핑백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지그시 힘이 실린다.
윤채원의 커다란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렀을 때 왜 심장이 펄떡거렸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녀가 알량한 자존심을 깡그리 버린 채 내가 뿌린 독설을 묵묵히 주워 담고 있었던 것이.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언제가 될지 모르는 나의 귀가를 몇 시간씩 기다려 준 것이.
좋았던 거다. 가슴 벅차도록 좋아서….
“나 오늘, 자고 가도 돼?”
“…….”
딱히 대답을 하진 않았다. 등을 돌린 승재는 느릿한 손동작으로 도어록을 풀었다. 열린 문 틈새로 달려든 보리를 채원이 담쏙 안았지만, 그 역시 제지하지 않았다.
들어와 자고 가라는, 무언의 허락인 셈이었다.
* * *
쿵. 현관문이 닫혔고, 채원이 조심스럽게 구두를 벗었다.
“최 대리가… 구두 예쁘다고 칭찬해줬어.”
“아.”
“고마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어차피 내 돈 주고 산 거 아니니까.”
가시 돋친 말조차 달콤하게 들린다. 채원은 시큰거리는 코끝을 괜스레 매만졌다. 크리스마스라 괜한 감성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했겠다 오늘.”
“다들 힘들었지 뭐.”
승재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들고 있던 짐들을 소파 위에 던지듯 올려놓았다. 슈트 재킷과 명품 로고가 박힌 쇼핑백, 그리고 카메라.
“…못 보던 거네.”
채원의 목소리가 혼잣말처럼 새어나왔다.
그녀는 낯선 카메라 스트랩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어둑한 복도에서부터 눈에 띈, 쨍한 오렌지 컬러였다. 하지만 별 뜻 없이 넘기려 했다. 명색이 포토그래퍼인데 부속품이나 액세서리쯤은 수두룩하겠거니 하고….
“아, 그거… 선물로 주더라. 정희서가.”
“누구?”
“서일그룹 정 회장 딸.”
“아… 그, 그랬구나. 예쁘네.”
채원은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벌컥거리는 심장 소리를 애써 억누른 채.
“일단 주니까 받긴 했는데, 워낙 고가 제품이라 함부로 받아도 되는 건지….”
“으응. 고민되겠다.”
“조그만 게 보통이 아니더라고. 스무 살짜리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따박따박 할 말 다 하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알아서 들려주는 친절함.
“내가 정희서 수발들면서 누굴 떠올렸는지 알아?”
“누구?”
“9년 전 윤채원.”
“…왜 하필 나를.”
“맹랑했잖아. 너도.”
승재는 정희서의 모습에서 아무렇지 않게 채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랬었나….”
채원은 하얗게 굳은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엷게 웃었다. 낯빛이 파리하게 변했지만, 안타깝게도 승재가 알아챌 만큼은 아니었다.
“저녁은 먹었어?”
부엌 선반에서 컵을 꺼내 생수를 따르던 승재가 채원을 향해 물었다.
“아직….”
예의상 던져본 질문에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팸플릿 때문에 타이밍을 놓쳐서….”
순간 울컥 부아가 치민 승재였다.
성냥팔이 소녀 행세에 재미라도 붙인 건가. 지금까지 밥도 안 챙겨 먹고 뭘 한 거야 대체.
“잠깐 있어 봐. 편의점이라도 갔다 올게. 냉장고엔 맥주뿐이라.”
승재가 눈썹 사이에 주름을 만들며 소파 위에 걸쳐놓았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끼니를 걱정하느라 정장의 불편함 따윈 잊은 지 오래였다.
“괜찮아. 별로 배 안 고파.”
“너 자꾸 그렇게 식사 거르면 위장병 생긴다고. 얼굴도 허옇게 떠서는….”
“괜찮다니까.”
“고집부리지 말고 보리랑 잠깐 놀고 있어. 십 분이면 돼.”
“승재 씨.”
현관 앞에서 구두를 신던 승재가 채원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먹고 싶은 메뉴라도 생긴 건가,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지만.
“우린… 뭐야?”
윤채원은 뜻밖의 질문으로 사람을 당황시켰다.
“내가 일방적으로 승재 씨 찾아와서 귀찮게 한다는 건 잘 아는데…. 그래도 언제부턴가 매번… 받아주고 있잖아. 밥 먹어라 잔소리도 해주고, 담요도 덮어주고, 구두도…. 불쌍해 보여? 예전이랑 너무 많이 달라져서?”
“갑자기 왜 이래 또. 오늘은 쓸데없이 언성 높이지 말자. 힘든 날이었잖아. 너나 나나. 그러니까 조용히 맥주나 한잔하고 돌아가.”
한숨을 푹 내쉰 승재가 아이를 어르는 투로 채원을 구슬렸지만, 그녀는 이 불편한 대화를 어물쩍 넘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답해 줘.”
“뭐를.”
“왜 날 받아주는지.”
“…….”
“동정심, 연민, 뭐 그런 거야?”
“아냐, 그런 거.”
“그럼 뭔데.”
“…….”
“혹시 나… 사랑해?”
승재의 눈이 무겁게 일렁거렸다. 일말의 망설임이나 흔들림 없이 너무나도 당당한 윤채원의 질문에, 가슴 깊숙이 차오르던 뜨거운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 낭랑한 음색은 강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황당한 이별을 통보받은 9년 전 그때에도. 예고도 없이 불쑥 파고든 옛 연인에게 마지못해 끌려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강승재는 언제나 윤채원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는, 안이한 확신.
“…뻔뻔함에 익숙해진 것뿐이야. 내가 뭐라고 지껄이든 들러붙잖아. 쉽잖아 너. 9년 전엔 그렇게 어렵더니.”
그녀가 나에 대해 조금 더 주저했으면 했다. 손을 뻗고 눈을 맞추기 전, 최소한 한 번쯤은 더 고민해주었으면 했다.
이토록 일방적인 너를, 나는 언제까지 인내하며 받아주고 또 받아주어야 할까.
“아직 화가 풀린 게 아니었구나.”
“…….”
“괜히 혼자 기대했나 봐. 승재 씨랑 나,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생각했거든. 조금의 가능성도 없는 거야? 1년이든, 2년이든… 시간이 더 흐르면 그땐 나를….”
“김 비서랑 무슨 관계인지, 그것부터 해명하는 게 순서 아닌가?”
몇 주를 묵혀두었던 치졸한 궁금증이 기어이 터져 나왔다. 예상치 못한 승재의 질문에 커다란 눈동자가 황망하게 흔들렸다.
“그 새끼는 너 오늘 미술관 온다는 거 알고 있던데.”
“그걸 어떻게….”
“윤채원 표정 변화가 굉장하네. 거울 보여주고 싶을 정도야. 뭐, 들키면 안 될 일이라도 저질렀나 봐?”
판도라의 상자는 애초부터 열어보는 게 아니었다고, 그녀의 표정을 보는 순간 승재는 뱉어낸 말을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돈 빌린 거 확실해?”
승재가 채원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이죽댔다.
“무슨 뜻이야 그게.”
“이상하잖아. 하필이면 정 회장 직속 라인이라니.”
티 나게 어두워진 채원의 낯빛에 화르륵 열이 끓었다. 아닌 척 싸늘하게 목소리를 깔았으나 그것은 명백한 질투의 감정이었다.
“어떤 루트로 소개받은 건진 모르겠지만 웬만하면 정리해라. 돈 몇 푼 때문에 발목 잡혀서 인생 망치지 말고.”
“무슨 오해를 하는 거냐고 대체!”
격양된 톤이 승재의 말을 매섭게 잘랐다.
“설마 내가 그 남자랑… 잤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채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강승재의 애매한 침묵은 그녀의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행위였다.
“어, 어떻게 그런 더러운 상상을 할 수가 있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여기 오피스텔만 찾아왔단 거, 승재 씨가 제일 잘 알 거 아냐. 회사 일로 녹초가 되고 몸살 때문에 열이 끓어도… 환영받지 못할 거 잘 알았지만, 그래도 얼굴 마주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 풀리겠지, 기대하면서… 매일 오고, 또 오고 그랬는데….”
“한지운하고도 잤잖아.”
“…뭐?”
“윤채원 주특기 아냐? 동시에 두 남자. 앞으로 내 기분 맞춰주고 싶으면 제발 그 입부터 다물어. 미안해, 사랑해, 이딴 양심도 없는 소리 함부로 지껄이지 말고, 조용히 옷이나 벗으라고.”
철썩.
별안간 승재의 턱이 돌아갔다. 조각조각 금이 가던 유리 심장은 산산이 깨어져 부서지고 말았다.
* * *
벌떡거리는 맥박의 울림. 뺨을 후려친 채원의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위태로운 정적 속, 얼룩덜룩 달아오른 남자의 왼쪽 볼과 턱 언저리가 채원의 눈에 들어왔다.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하, 정말….”
승재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그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승재 씨, 나는….”
“그만하자.”
“…….”
“그만하자고. 솔직히 여기까지 끌고 온 것도 무리였어. 너도 알잖아.”
구두를 마저 신은 승재가 침착하게 채원을 바라보았다. 덤덤히 가라앉은 눈빛에서는 그 어떤 적의도 찾을 수 없었다. 채원은 오히려 그것이 불안했다.
“목표한 모금액, 벌써 달성했다더라. 급한 불 껐으니 좀 쉬어도 되겠지. 그러니까 이제 그만….”
“뭘 자꾸 그만하자는 거야. 제대로 시작한 적도 없는데.”
“우리 서로 편히 웃은 적 몇 번이나 있었던 거 같아? 즐거울 때보다 괴로울 때가 더 많았잖아. 9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이대로 끝이라고?”
채원의 음색이 파르르 진동했다.
“승재 씨….”
“불장난 몇 개월에 지금까지 이를 갈고 살았던 거, 일종의 집착이 아니었나 싶어. 아무런 준비 없이 헤어져서 더 그랬던 거 같아. 지금 생각해보면 둘 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이젠 나도 더 이상 너 원망하지 않을 테니까, 너도 그만 털어버려. 할 만큼 했어 우리.”
“…….”
“가자. 바래다줄게. 집까지.”
“…….”
“채원아.”
나긋이 이름을 불러주는 남자의 목소리에 점점 더 마음이 조급해져 갔다. 차라리 아까처럼 모진 말이라도 뱉어주었으면 했다. 증오와 미움마저 사라진, 무감각한 강승재를 마주하는 것이 채원에게는 가장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뭔데.”
“뭐든, 다 들어준다고 약속해.”
“억지 부리지 마.”
“다신 찾아오는 일 없을 거야. 류정혁 통해 안부 묻는 일도, 보리 핑계 대고 전화하는 일도, 다시는… 승재 씨 귀찮게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약속해. 내 부탁… 들어주겠다고.”
“…….”
“승재 씨.”
애절한 색으로 짙어진 그녀의 눈동자를 승재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알겠어.”
결국 또 지고 만다.
병신처럼 윤채원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스스로가 욕 나오게 한심했지만, 모른 척 한 번만 더 그녀의 꼭두각시를 자청하기로 했다. 이번엔 정말 끝이었으니까.
“이제 말해 봐. 내가 뭘 해줬으면 좋겠는지.”
“…….”
“윤채원. 괜히 부탁할 것도 없는데 시간 끄느라 이러는 거면….”
말없이 한참을 서있던 채원이 소파 위에 널브러진 낡은 가죽 스트랩을 천천히 집어 승재에게 건넸다.
“무슨 뜻이야? 이걸 왜 주는데.”
“…해줘.”
“뭐?”
“아프게… 상처 내달라고.”
“미, 미쳤어? 이 상황에서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제가 선물로 준 스트랩을 불쑥 내밀길래 홧김에 버려 달라 하는 줄 알았다. 쓰레기통에 처박으라든지, 아님 가위로 뚝뚝 잘라 달라든지, 일말의 정마저 끊어내려 굳은 결심을 했나 싶었는데.
무엇이 되었든 언제나 나의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정말이지 윤채원은… 마지막까지도 버겁고, 어려웠다.
“분명 약속했잖아! 뭐든 들어주겠다고!”
“윤채원!”
“나는… 오래 간직하고 싶어…. 평생 지울 수 없는 흔적이라도 만들어서 강승재 떠올리고 싶다고. 그러니 제발….”
“정상 아니야. 그런 발상.”
“알아.”
“알면서 이래? 나까지 미친놈 만들어 놓고 끝내야 속이 시원하겠냐고!”
참고 참았던 울화가 폭발했지만 채원은 고요한 시선으로 승재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다른 차원의 사람처럼.
“도와줘. 내가 잘 끝낼 수 있도록.”
내가 남긴 상처로 나를 떠올리고 추억하겠다 고집을 부리는 것.
지극히 그녀다운, 윤채원의 방식이었다.
“승재 씨….”
“…알겠어.”
승재는 포기한 듯 건조하게 답했다.
그녀의 내면을 이해해보려 10년 가까이 머리를 싸맸던 자신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짓거리였나. 뒤늦은 허탈감이 승재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만든다.
“코트 벗고 여기, 위에 앉아.”
승재가 묵직한 원목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채원은 그가 하라는 대로 코트를 벗고 까치발을 들어 책상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바닥을 딛던 두 다리가 곧 허공에 들렸다. 그녀는 양 손바닥으로 지그시 테이블을 지탱한 채 승재를 바라보았다. 이어질 그의 행동을 기다리며.
“스타킹은 그대로 신고 있어. 원피스는… 허리까지 올릴 거야.”
“응….”
그녀는 검정 스타킹에 제법 도톰한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승재는 종아리를 덮고 있던 원피스를 허리춤까지 침착하게 말아 올렸다. 치맛자락이 떨어져 방해가 되지 않도록 채원의 팔 사이로 니트를 고정시킨 그는 덤덤한 어조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다리 벌리고, 손은 뒤로.”
“어?”
“양손, 허리 뒤에 붙이라고.”
“아, 으응….”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리던 채원이 두 팔을 허리 뒤로 맞붙였다.
쥐고 있던 스트랩을 테이블 위에 툭 내려놓은 승재는, 무감하게 손을 뻗어 자신의 넥타이를 끌렀다.
“묶는다. 잘못 움직이면 다치니까.”
간단히 이유를 설명한 승재가 채원의 가느다란 손목을 타이로 묶었다. 빠듯이 조여드는 느낌에 놀란 채원이 저도 모르게 약한 신음을 터뜨렸다.
“밤 열 시 넘었어. 소리 내면….”
“알아. 참을 거야. 참을 수 있어. 그러니까 승재 씨도… 대충 할 생각 하지 마.”
바싹 마른 입술이 얄궂게 달싹거리며 번민에 찬 남자를 도발한다.
“후우… 넌 정말 끝까지 나를….”
한걸음 뒤로 물러선 승재는 가죽 스트랩을 손등에 서너 번 감은 후 팽팽히 말아 쥐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팔을 크게 휘둘렀다.
“흐읍….”
짜악, 울리는 마찰음과 함께 채원의 양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가 두 팔을 묶어준 것이 새삼 고마웠다. 타들어 가는 작열감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허벅지를 감싸려 했기 때문이다.
“무릎, 모으지 마.”
승재는 간격 없이 스트랩을 내리쳤다. 남자의 손등 위로 툭 불거진 핏줄. 두툼하고 질긴 가죽이 허벅지 안쪽의 여린 피부를 정확히 가격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머뭇거리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몇 대를 때렸는지 모른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휘두르던 팔이 뻐근해져 오는 걸 보니, 적어도 스무 대는 족히 넘은 듯했다.
제대로 해달라는 그녀의 요구대로 승재는 채원의 한쪽 허벅지만을 집요하게 내리쳤다.
평생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그 말이 얼마나 겉멋 든 발상인지, 마지막 순간조차 조금의 배려도 없는 너의 요구가 나를 또 얼마나 아프게 하고 있는지.
승재는 차오르는 눈물을 눌러 삼키려 어금니를 물었다.
독한 윤채원은 한차례의 비명도 흐느낌도 없이 차분하게 고통을 견뎠다. 발갛게 피가 맺힐 때까지 아랫입술을 계속 짓이기면서도, 그녀는 참고 또 참았다.
오기가 생긴 남자의 팔에는 무자비하게 힘이 가해졌다. 9년 치의 애증이 새하얀 살갗에 겹겹이 쌓여 붉고 푸른 자국을 만들었다. 그녀가 불투명한 스타킹을 신어주어 다행이라 여겼다. 엉망으로 물든 피부를 보았더라면 분명 동작을 멈추고 말았을 테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커다란 손에 감긴 스트랩이 헐겁게 빠져나가 바닥으로 툭 떨구어졌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것은 오히려 승재 쪽이었다.
“하아….”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없이 채원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서는 예상치 못한 눈물이 방울방울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독한 건지, 미련한 건지….”
“…….”
“아프면 아프다 말을 해야지. 그걸 왜 참고 있어.”
“흐윽….”
커다란 손바닥의 온기가 새하얀 볼에 닿자, 꾹꾹 담아두었던 9년 치의 회한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아버지가….”
“뭐?”
“흐윽… 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갑자기….”
“…….”
“미안해 승재 씨… 그땐… 내가… 경황이 없고, 죽을 것 같고… 세상이 너무, 흐흑, 윽… 한순간에, 한순간에 전부 다… 무너져버려서….”
묶여있던 실크 넥타이가 느슨히 풀린 후에도, 채원의 가느다란 양 손목은 승재가 바짝 옭아매었던 처음 상태 그대로 맞붙은 채였다.
지친 마음을 오롯이 내려놓기 위해서는 단단한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것이 강승재의 곁이라면 비좁은 철창 안이든 살갗을 파고드는 족쇄든, 기꺼이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니 제발….
어깨를 들썩이던 채원이 급기야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채원은 승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한참을 울어댔다.
먹먹한 밤.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적셨다. 슬픈 캐럴이었다.
* * *
‘데려다줄래? 새 구두라… 발이 아파서….’
서럽게 울음을 울던 그녀가 승재를 향해 겨우 입술을 달싹였고, 승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도저히 물어볼 수가 없었다. 슬프게 젖어 든 커다란 눈동자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기 때문에.
출발한 지 10분쯤 지났을 때, 조수석에 앉아 차창 밖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원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 했다. 이제 조금 진정이 되었으니 괜찮다고. 뭐가 괜찮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녀는 여전히 어깨를 들썩거리면서도 습관처럼 ‘괜찮다’를 반복하며 연한 미소를 보였다.
강변북로를 따라 달리던 승재는 용산 부근에서 한강 공원 쪽으로 핸들을 틀었다. 밝은 카페보다는 빛이 약한 강 주변이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기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밤 11시. 추운 날씨 때문인지 한강변은 고요하고 잔잔했다. 크리스마스의 끝자락을 즐기기 위한 차량들이 공회전을 돌리며 띄엄띄엄 주차장을 차지하고 있을 뿐.
“커피라도 마실래?”
“아니.”
“걷기에는 많이 추워 보이는데… 차에 있을까?”
“응….”
히터 온도를 높인 승재는 뒷좌석에 벗어둔 슈트 재킷을 집어 채원에게 건넸다.
“덮어.”
“아, 고마워….”
안감에 밴 스킨 향이 쌉싸래하게 번진다. 채원이 창백한 손으로 재킷을 받아 무릎을 감쌌다. 두툼한 패딩이 무색하리만큼 파들대는 여린 몸의 떨림은 승재가 앉은 운전석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울음 뒤 오한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
“너 태어나기 전에. 얼굴 뵌 적도 없다고 분명….”
기억에 오류라도 생긴 건가.
아버지의 죽음을 겨우 터뜨린 채원의 말을, 승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아버지 얼굴… 기억은 나?’
‘아니.’
‘나 태어나기 전에… 사라져버렸어. 아빠, 죽었어….’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로 덤덤히 가족의 부재를 알리던 채원이 애처로워, 그녀의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 결심했던 9년 전 다짐.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승재에게는 여전히 생생한 장면이었다.
“맞아…. 그땐 아빠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마음에서 완전히 지우고 살았지. 정말로… 죽어버릴 줄은 몰랐지만….”
“그게 무슨….”
“우리 엄마… 미혼모로 나 낳아서 길렀어.”
바싹 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두세 달에 한 번… 돈 봉투를 들고 엄마를 찾아오던 아저씨가, 사실은… 아빠였더라. 올 때마다 분에 넘치도록 선물을 주고 가길래, 난 뭣도 모르고 기다렸지. 날짜까지 세어가며…. 그깟 게 뭐라고 난 속도 없이….”
“그럼… 맨션에 주기적으로 방문했던 손님이….”
“응…. 아버지였어.”
“그랬구나….”
승재는 충격을 받은 듯 낮게 읊조렸다. 채원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철이 들고 나서부턴 그 남자가 죽도록 미웠지만… 참았어 무작정. 엄마 때문에. 엄만 내가… 아버지 앞에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길 원했고, 난 어쩔 수 없이 따랐지. 내 유학비며 생활비까지 모두… 그 남자가 좌지우지했으니까. 다행히 돈이 아주 많았거든. 나한텐 그나마 행운이었다고 해야 하나… 공주님 역할도 결국… 오래가진 못했지만.”
“…….”
“할머니 아프시다고 갑자기 짐 쌌던 날, 그때였어. 실은 할머니가 아니라 아버지 사고 소식 듣고…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에 한국 들어갔던 거야. 돈도 돈이었지만, 엄마 두고 미국에 있을 수가 없어서… 자퇴하겠다 마음먹게 된 거고….”
승재의 눈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한없이 딱하고 가여웠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원인 모를 화가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승재 씨… 미안해…. 그땐 정말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도망치고 싶었어. 무책임했단 거 잘 아는데… 달리 방법을… 승재 씨한테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작정 기다려 달라 하기엔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 같….”
“그래서 던지고 간 게 한지운이야?”
결국 참다못한 승재가 채원의 말을 끊었다.
“다른 놈이랑 잤단 소리를 그렇게 태연하게….”
나지막이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격양된 감정을 억지로 누른 탓이었다.
“미안… 승재 씨 말처럼, 너무 어려서 그랬어. 미련 남길 바에야 깨끗이 지워낼 수 있도록 차라리 상처를 주는 게 낫겠다고… 그게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그럼 지금은?”
“…응?”
“그땐… 후우… 뭐, 이것도 납득하긴 힘들지만, 그래, 그땐 어려서 그랬다고 치자. 그럼 9년이 지난 지금은….”
채원이 머뭇거리자 승재는 제 스스로 답을 내어놓았다.
“말했어야지. 니가 다시 나 찾아왔을 때… 스튜디오에서든, 오피스텔 앞에서든, 내 얼굴 보자마자 털어놨어야지.”
“그건….”
“콜라보 제의하기 전에, 보고 싶다, 미안하다 감성 팔기 전에! 9년 전 왜 그렇게 황망하게 떠날 수밖에 없었나, 왜 한지운까지 들먹여가며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나….”
“승재 씨….”
“최소한… 내가… 내가 너한테 그런… 못된 말… 못된 짓 하기 전에….”
승재가 깊은 한숨과 함께 핸들 가까이 고개를 떨구었다.
“지옥 같았어. 너 그렇게 사라진 후로… 하루하루가… 죽을 것 같이 힘들었다고.”
채원은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절망에 찬 남자의 음성에 심장이 잘게 찢기는 것처럼 아파 왔다.
“고작 몇 개월 만난 여자 하나 때문에… 폐인 노릇 그만하라고. 류정혁조차도 이해 못 했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해결이 나질 않아서… 결국 미뤄놓고 살았어.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윤채원이 치밀어 오르길래, 온갖 발악을 해도 지울 수 없는 거라면… 차라리 미워해 보자, 안주 삼아 널 씹어대고 이를 갈면… 그래도 조금은 후련해지겠지. 류정혁이 가끔 네 이름 흘릴 때에도 애써 무시해 가면서, 정신없이 바쁘게 스케줄 돌려가면서, 그렇게 윤채원 묻고… 잊고… 조금씩 괜찮아지려나 싶었더니.”
“…….”
“다시 나타났잖아.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런 척한 거야. 왜 그렇게 내 맘을 몰라!”
“넌 얼마나 아는데?”
조각난 심장이 하얗게 굳어 간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너 하나 잊어보겠다고 내가….”
불면증은 일상이 되었다. 술에 매일 찌들다 못해, 입에 맞지도 않는 담배까지 몇 갑씩 피워댔다.
닥치는 대로 여자를 만났고 너무나 쉽게 사랑을 고백했다. 별것 아닌 그 한마디에 상대가 눈물 그렁한 얼굴로 마음을 열면, 입을 맞추고 옷을 벗기고 질릴 만큼 섹스를 하다 무책임하게 헤어졌다. 한 번에 두 명, 세 명을 걸친 적도 많았다. 윤채원에 대한 증오심을 엉뚱한 곳에 풀고 다녔다.
미국서부터 물든 방탕한 습관은 한국의 바쁜 일상 속에 자연히 묻혔지만, 정상적인 연애는 여전히 불가능했다. 누구를 만나든 의심이 앞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잠깐 머리 좀 식히고 올게. 추우니까 넌… 여기 있어.”
승재가 달칵, 차 문을 열고 자리를 피했다.
스물다섯에서 서른넷이 된 남자는
줄어든 용기만큼 자기 방어력만 늘어 있었다.
* * *
“승재 씨… 잠깐만.”
12월, 한강의 바람은 차고 매서웠다. 승재의 뒤를 따라나선 채원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남자의 팔을 초조하게 낚아챘다.
“말하려고 했어. 몇 번이나… 정말이야. 승재 씨 한국 왔단 소식 접한 후부터, 매일 머릿속으로 수백 번, 수천 번 상상했다고. 첫마디를 어떻게 꺼내면 좋을까… 문자 먼저 보내볼까, 아니면 전화를 하는 게 나을까, 근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났어. 내 생활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고, 난 너무 많이 변해버렸는데, 하루가 다르게 유명해지는 승재 씨 보면 또 위축이 되고… 그래서….”
언제부턴가 흩날리기 시작한 진눈깨비가 파리한 볼을 스쳤다.
채원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축축한 물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쉼 없이 문장을 이어갔다. 말을 멈추고 정적이 찾아오면 그가 금세 떠나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무슨 말이든 쏟아내야 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강승재를 붙들어야 했다.
“이해해. 힘든 가족사니까. 아무리 시간 지난 과거라 해도, 털어놓는 게 쉽진 않았겠지. 무엇보다 내가 널… 믿어주지 못한 게… 그 정도 역할밖에 해주지 못한 게… 가장 미안하다.”
“그런 말 듣자고 얘기 꺼낸 거 아니야. 승재 씨가 미안해할 필요 전혀 없다고. 이건 어디까지나 내 문제….”
“채원아.”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없어.”
“…….”
승재의 시선에서 비켜선 채원은 위태로운 눈동자로 한강 변을 멍하니 응시했다.
귀를 막으며 도리질을 치고 싶었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숨결의 여운만으로도 강승재가 무슨 말을 꺼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래서 더 듣기 싫었다.
“너랑 밥 먹고… 손잡고… 그런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나눌 자신이…. 너한테 퍼부었던 욕지거리, 개새끼처럼 굴었던 행동 하나도 절대 지워낼 수가 없는데, 어떻게 내가 널 다시 만나. 방금만 해도 그래. 거창한 의식처럼 스트랩 손에 쥐여준 너도, 그거 들고 네 허벅지 미친놈처럼 멍들게 한 나도… 확실히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라고.”
“내가 괜찮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게! 오늘 일도 내 의지로 그랬던 거고. 지금까지 승재 씨가 나한테 했던 행동들은… 몰랐으니까, 내 과거, 오해하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상처받았잖아, 나 때문에. 아냐?”
“…금방 아물 거야. 그리고 상처받은 건 승재 씨도 마찬가지잖아. 난 정말 괜찮….”
“괜찮다 소리 제발 그만 좀 해! 왜 매번 너 혼자서만… 삭이고, 담아두고, 괜찮다 넘기고… 윤채원 나는….”
“…….”
“난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
승재의 목소리가 세찬 강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도와줘.”
“뭘….”
“내가 너… 놓을 수 있게.”
눈비가 뒤섞여 뭉개진 알갱이가 채원의 패딩 사이를 세차게 파고들었다. 축축해진 목선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지만 딱히 춥지는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모든 감각은 빠르게 무감해져 갔다.
“부탁한다.”
수차례 거듭되던 내 부탁을 마지못해 들어주던 강승재도,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까?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부탁’이란 것을 건넸을 때, 반짝거리던 한강의 조명이 일순간 암전되었다.
동작대교를 가로지르는 전철의 불빛만이 채원의 시선을 아스라이 붙잡고 있었다. 그마저도 곧 사라지자 주위는 온통 캄캄해졌다.
“…그만 가자. 바래다줄게.”
“됐어. 난….”
“혼자 가겠단 말 하지 마. 너 불편해도 오늘은… 내 말대로 해. 마지막 한 번 정도는….”
“…….”
“그렇게 해줄 수 있잖아….”
힘겹게 말을 마친 강승재는 두어 걸음 앞서 발을 옮겼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얼음처럼 차가운지. 혹시 숨죽여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그의 모습은 전혀 확인할 길이 없었다.
물기 번진 음색으로 그저 짐작했을 뿐이다. 강승재도 분명 나처럼 아파하고 있을 거라고.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