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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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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04. 한계

* * *

12월 25일. VIP 행사 1시간 전.

“감독님 말씀대로 사진 위치 재조정했습니다. 정말 어제보다 흐름이 훨씬 자연스럽네요. 진작 이렇게 했더라면 좋았을걸….”

최 대리는 승재와 함께 미술관을 돌며 벽에 걸린 사진들을 꼼꼼히 점검하는 중이었다.

“전시 이틀째에 작품 배치 바뀌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여러 번 회의 거쳤다 해도 막상 걸어보면 느낌이 달라질 때가 많아서…. 그리고 사실, 오늘 밤 행사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어제야 임직원 가족 초청이었고… 오늘이 메인이니.”

어제 처음 공개된 스튜디오K 자선 사진전은 예상보다 더 반응이 뜨거웠다. 유명인의 반려동물을 소재로 한 사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강승재 감독의 미공개 작품에 대해서도 구입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첫날의 반응을 토대로 승재는 사진 위치를 과감히 바꾸어 보기로 결정했고, 그의 요청을 두말없이 수용해준 POA 측은 아침부터 현장에 나와 구슬땀을 흘렸다. VIP들의 지갑을 열 수만 있다면 이 정도 수고는 고생도 아니었다.

“높으신 분들 질문받을 생각에 아침부터 물 한 모금도 못 넘겼어요. 큰 실수 없어야 할 텐데.”

“너무 걱정 마세요. 어제 보니 미술관 직원보다 POA팀 손발이 더 잘 맞던데요.”

나긋한 어투로 최 대리의 불안을 한 겹 덜어낸 승재는 넌지시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윤 대리는… 오늘도 내근인 모양입니다.”

이틀 연속 채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라 나오기 싫다는 둥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더니, 결국 현장 근무를 마다한 모양이었다.

“아, 네. 내근 인원 2명 뽑으라는데 다들 미술관 가고 싶어 하는 눈치니까, 윤 대리가 총대 멘 거 같아요. 후배들 시켜도 되는데 굳이 본인이 회사에 남겠다면서…. 윤 대리 덕에 신입들만 신났죠, 뭐. 이런 디너파티 참석이 솔직히 흔한 기회도 아니고….”

승재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은 여전히 존재했다.

어차피 휴가도 아니면서, 본인이 실컷 공들인 사진전 오프닝을 외면한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최 대리의 말처럼 후배들에게 대신 기회를 주려 했던 것일까. NGO 직원이라 마음 씀씀이가 남다르기라도 한 건가. 윤채원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근데 강 감독님,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장 진짜 잘 어울리세요. 어제 저희 직원들 퇴근하면서 다들 감독님 슈트 어디 거냐고, 완전 모델이 따로 없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단체로 저를 다 띄워 주시고…. 일주일 동안 넥타이 맬 생각에 숨이 턱턱 막히던 차였는데, 좀 더 버텨봐야겠습니다.”

느닷없는 칭찬 세례에 승재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최 대리의 말이 괜한 과장은 아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눈길을 줄 만큼 강승재의 차림은 완벽했다.

화이트 셔츠와 매트한 네이비 색상의 타이, 반듯하게 각이 잡힌 정장의 어깨라인과 바지선, 가죽의 박음 장식 없이 선 하나만 덧대어진 클래식한 옥스퍼드화의 조합은 남성지 모델컷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했다.

최 대리가 주책을 떨며 승재의 슈트 가격을 물어보려던 찰나.

“저, POA 관계자 되시죠?”

미술관 직원이 조급한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 그런데요.”

“전시회 팸플릿 인쇄 상태 좀 다시 확인해주세요. 날짜가 12월이 아닌 2월로 찍혀 있어서요.”

“네에? 그럴 리가요. 어제는 분명 이상 없었는데… 감독님, 저 잠시만….”

당황한 최 대리는 승재를 향해 눈인사를 건네고는 급히 미술관 직원을 따라나섰다. 어제 챙겨온 팸플릿이 순식간에 동이 나 급히 수량을 추가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누군가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었다.

승재는 직원이 흘리고 간 팸플릿을 심각한 표정으로 살펴보았다. 숫자 12에서 1이 빠진 것만 제외하면 딱히 고칠 부분은 없었으나, 전시회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책자이니만큼 사소한 오탈자 하나에도 신경이 쓰이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오늘은 로열 패밀리들께서 대거 참석하신다고 하니, 어제보다 몇 배는 더 만전을 기울여도 모자란 상황이었다.

“강 감독, 여기 계셨구나! 한참 찾았네.”

“아, 관장님.”

“저 좀 잠깐 보실까요?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네. 그러시죠.”

승재는 팸플릿 고민을 잠시 접어두고, 미술관 관장을 따라 2층에 마련된 사무실로 향했다. 그가 도맡을 일은 따로 있었다.

* * *

“대리님… 어떡해요….”

입사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신입 하나가 울상이 된 채 최 대리 앞에 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슨 일이야? 멀쩡한 날짜가 갑자기 왜 바뀌어?”

“대리님 걱정하실까 봐 말씀 안 드렸는데, 실은 추가 주문한 팸플릿이 인쇄 상태 불량으로 와서 급히 리오더 넣었거든요. 어젯밤에 퀵으로 받아서 잘 보관해 놨는데, 하필이면 짐 나를 때 기존 박스랑….”

“바꿔 싣고 왔구나….”

“네….”

“아니 그걸 왜 같은 공간에 쌓아 놔? 불량 난 건 즉시 폐기처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바로 버린다는 게 정신이 없어서 그만….”

최 대리는 시큰거리는 뒷목을 꾹꾹 누르며 대안을 모색했다. 남은 시간은 고작 40분. 언성을 높일 시간조차 부족했다.

“리오더 받은 건 지금 어디 있어?”

“회사에….”

“그걸 누가 몰라? 회사 어디에 뒀냐고.”

“아… 저희 팀 비품실 책상….”

“뭐? 그 중요한 걸 비품실에 던져두고 왔다는 거야?”

신입의 황당한 답변에 최 대리의 목소리가 재차 높아졌다.

“더, 던져둔 게 아니라요, 가위랑 멀티탭 챙기러 들어갔다가….”

“후우, 알겠어.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일단 팀장님께는 보고드리지 말고 팸플릿 조용히 회수해.”

“제가 지금이라도 회사 가서 얼른 가져올까요? 아직 시간 좀 남았으니까 지하철로 왕복하면….”

“어느 세월에. 오늘 크리스마슨 거 잊었어?”

“그럼 어쩌죠….”

“내근자 몇 명 있잖아. 그쪽에 부탁하는 게 차라리 빠를 텐데. 내가 연락해볼게.”

최 대리는 휴대 전화를 들어 채원의 번호를 눌렀다. 그나마 믿을 만한 사람이 회사를 지키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 * *

“난 편의점 김밥도 괜찮은데….”

채원이 미안한 눈빛으로 말끝을 흐렸다.

붙임성 좋은 팀 후배와 내근직을 맡게 되어 이래저래 편하긴 하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저녁 식사로 수제버거를 사 오겠다니… 이건 좀 너무 간 듯도 싶고.

“괜히 후배 셔틀 시키는 거 같아서 마음 불편하단 말야.”

“제가 대리님보다 다리 더 길어서 가는 거예요. 셔틀이 아니라.”

“참 나, 말이나 못 하면.”

살살 기어오르며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어도 이상하게 얄밉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만큼 싹싹하고 다정스러워 그런 거겠지.

“얼른 골라보세요. 어니언 치즈버거가 베스트구요, 칠리 버거도 꽤 맛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크리스마슨데 저녁까지 김밥으로 때우면 너무 비참하잖아요.”

“뭘 또 비참씩이나…. 그럼 난 치즈버거로 할게요.”

채원은 못 이기는 척 치즈버거를 골랐다. 후배가 보여준 패티 두툼한 버거 사진에 이틀 내내 사라졌던 입맛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음료는요?”

“음료는 됐어. 회사 냉장고에 마실 거 많잖아.”

“아, 그렇죠 참. 딱 30분만 계세요.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와요. 햄버거 들고 뛰어오다 넘어지면, 그건 정말 비참한 크리스마스니까.”

본인이 중학교 때까지 육상부 출신이었다며 시답지 않은 허세를 줄줄이 늘어놓은 후배는, 금세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여친 피곤하겠네.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아.”

채원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음성이 고마웠다.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수다스러운 상대가 누구보다 필요했는데, 오늘의 우울을 덮어쓰기엔 여러모로 안성맞춤인 파트너였다.

후배가 사라진 사무실은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왔다. 채원은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왼쪽 볼을 가만히 책상 위로 내렸다.

생각을 하지 말자 애쓸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머릿속.

형식적인 악수를 나누고 와인 잔을 부딪치며 짤막한 인사를 주고받겠지. 어쩌면 이야기가 더 길어질 수도. 하지만 그뿐이다. 더 친해질 일도, 내 이름이 중간에 끼어들 일 따윈 더더욱 없을 거야.

채원은 오늘 밤 벌어질 강승재와 정윤호 회장의 만남을 수차례 반복하여 떠올리는 중이었다. 이렇게라도 충격이 무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제 오늘만 더 버티면 돼. 그러니 제발….

“윤채원, 진정해….”

김 비서의 얼굴이 불쑥 채원을 스쳐 가며 그녀의 심장을 널뛰게 만들었다.

첫 번째 서랍에 넣어둔 커터칼이 채원의 손에 잡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사무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더라면 새하얀 살결에 진작 상처를 내었을지 모른다.

귀가 따갑도록 떠벌리는 말을 몇 시간이든 더 들어도 좋으니, 햄버거를 사러 나간 후배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커터칼을 드르륵 올리는 제 손을 힘겹게 제지하려는데.

지이잉.

경종을 울리듯 휴대폰이 진동했다.

“여보세요.”

「바로 받는구나. 하아, 다행이다, 윤 대리.」

“무슨 일 있어요?”

뭘까. 한창 바쁠 시간에 전화라니.

채원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최 대리의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도 매우 긴박했다.

「우리 신입께서 큰 사고를 치셨잖아.」

“사고라니….”

「윤 대리,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미술관 와줘야겠어.」

* * *

저녁 6시가 넘어가자 점점 사람이 몰렸다. 현악 4중주의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시작된 프라이빗 행사는 참석률이 80%에 달할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의자와 테이블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긴 했지만, 오늘 모임은 와인과 안주를 곁들이며 전시회를 즐길 수 있는 스탠딩 파티 성격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더 인기가 좋았다. 괜한 구설수에 오를까 평소 몸을 사리던 VIP들도 ‘자선 행사’라는 타이틀과 캐주얼한 분위기에 마음을 놓은 듯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윤호 회장과 그 일가가 미술관에 모습을 비쳤다. 요란한 등장은 아니었으나, 주최자의 모습에 저마다 집중을 하다 보니 웅성거림이 자연히 잦아들었다. 아이 두 명과 남편을 대동한 정윤진 부회장과는 달리, 정 회장의 가족은 단출했다.

‘강 감독님, 제가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오늘 정 회장님은 큰딸 한 분만 데리고 오실 거예요. 사모님은 아들 학교 문제 때문에 잠시 출국하셨거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정 회장 따님이 강 감독 오랜 팬이랍니다. 이름은 정희서. 올해 예일대 붙었는데 합격 기념으로 감독님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게 떼를 썼나 봐. 그쪽 기사한테 슬쩍 들은 정보야.’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적당히 립서비스 해주면서 회장님 대신 희서 양 옆자리 좀 지켜줘요. 스무 살 비위 맞추는 건 식은 죽 먹기잖아. 선 지키는 거야 강 감독이 워낙 알아서 잘 하실 테고….’

승재는 관장이 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류정혁처럼 성격 모난 놈도 매일 이 짓을 하며 돈을 버는데, 그깟 몇 시간을 못 버티겠나 싶었다.

“여기,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미리 대기 중이던 직원 하나가 승재를 정 회장에게 안내했다. 어색하게 올라가 붙은 광대가 벌써부터 욱신거렸다.

“회장님, 강승재 감독님 오셨습니다.”

“어어, 그래. 안 그래도 어디 계신가 했더니.”

와인 한 모금을 넘기던 중년의 남성이 반색하며 승재에게 악수를 청했다.

“귀한 자리 마련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강승재입니다.”

정 회장과 손을 맞잡은 승재는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우리 딸아이가 내 얼굴 볼 때마다 강승재 감독 노래를 불러서 어떻게 자리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니 숙제 하나 끝낸 기분입니다, 하하.”

“아빠, 그런 얘길 대놓고 하시면 어떡해요.”

한 걸음 물러서 있던 앳된 여학생이 얼굴을 붉히며 정 회장의 팔을 잡아당겼다. 생각보단 평범한 부녀지간이었다. 젊은 나이에 회장직을 물려받아서인지, 정윤호 역시 고도의 사회성이 몸에 배어 있었다.

“이 녀석이 오늘따라 왜 이렇게 쭈뼛거려? 얼른 인사드려라. 이름 정도는 가르쳐드려야 예의지.”

정 회장은 짓궂은 말을 보태며 홍당무가 된 딸아이를 놀렸다. 그가 딱히 강승재를 경계할 이유는 없었다. 제 딸이 강승재에게 남다른 팬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 봤자 서일그룹 회장의 장녀를 감히 누가 넘보겠나 싶어서였다.

“안녕하세요, 정희서… 입니다. 작가님… 아니, 감독님… 뭐라고 칭해야 할지… 아무튼 완전 팬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셨을 때부터 팬이었어요.”

“감사합니다. 호칭은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아, 예일대 입학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어머, 제 대학까지 아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다. 관장이 흘려준 정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자녀분을 두어 뿌듯하시겠다고, 승재는 정 회장을 향해 말을 덧붙였다. 정 회장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꽤나 흡족한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우리 딸아이 좀 맡겨도 되겠습니까? 희서가 감독님한테 단독으로 사진 설명 듣고 싶다고 어찌나 조르던지, 거추장스러운 혹 떼어 붙이는 거 같아 미안한데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강 감독.”

몇 마디를 더 나누어 보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정 회장은 별 고민 없이 희서의 등을 툭 떠밀었다. 간단한 대화를 나눌 때에도 강승재는 저보다 한참 아래인 희서에 대한 존칭을 잊지 않았다. 정윤호는 그의 적절한 언행이 마음에 들었다.

“제 작품을 일일이 설명한다는 게 영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승재는 겸손한 멘트와 함께 정 회장의 딸을 에스코트했다. 무의식중에라도 그녀의 팔이나 허리에 손이 닿지 않도록, 승재는 적절한 간격을 유지한 채 걸었다. 사람이 북적여 다행이었지만, 어디든 보는 눈들은 많았으니.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희서 양.”

“아, 정말요? 뭐든지 다 여쭤봐도 돼요?”

“제가 아는 범위에 한해서는….”

“그럼 감독님 폰 번호도… 알려주시려나….”

부끄럼을 타는 낯빛과는 달리 맹랑한 어투였다.

“스튜디오K 인터넷 검색하시면 연락처와 주소 바로 나올 겁니다.”

승재는 서둘러 선을 그었다. 어리다고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저는 강승재 감독님 개인 번호 얘기한 건데… 일부러 말 돌리신 거죠 지금?”

“제 개인 연락처는 미술관 관장님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직접적인 번호 교환은 아무래도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어서 말입니다.”

“말 돌리시는 거 맞네요 뭐.”

바짝 맨 타이 사이로 목이 옥죄었다.

누가 스무 살 비위를 맞추는 것이 수월하다 했는가. 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당돌한 발언을 서슴없이 해대는 정희서 덕에 와인이 벌컥벌컥 물처럼 넘어갔다.

“저 나중에 친구들이랑 감독님 스튜디오 놀러 가도 돼요? 프로필 사진 찍고 싶어서요.”

그녀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와인 잔을 든 승재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일반 프로필 작업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는 주로 브랜드 광고나 화보….”

“제가 일반인은 아니잖아요.”

그럼 그렇지. 만 스물도 안 된 주제에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나 했더니.

“서일그룹 광고 찍는 셈 치고 해주시면 안 돼요? 제가 인스타에 몇 장만 올려도 상업적 가치는 충분히 있을 텐데.”

아직 속이 꽉 여물지 못한 전형적인 재벌 주니어였다. 모금액이고 뭐고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버릇을 고쳐놓고 싶었지만, 윤채원의 밥그릇을 위해 조금 더 참아보자 스스로를 다스렸다.

“전시회 끝나면, 그때 다시 시간 조율해보도록 하죠.”

승재가 느릿하게 넥타이를 매만졌다. 몇 날 며칠 밤샘 촬영을 하던 지난날이 그리워질 줄이야. 영업직으로 입사했더라면 진작 사표를 던졌을 거라 자조하던 승재가, 문득 정희서의 뒤를 바라보았다. 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어? 당신….”

좋지 않았던 첫 기억 때문인지, 승재의 미간이 반사적으로 구겨졌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냐, 용건이 뭐냐, 캐물으려는데.

“김 비서님! 언제 오시나 했더니… 차 많이 막혔나 봐요?”

엉뚱하게도 정희서가 그를 ‘김 비서’라 칭하며 알은체했다.

“네. 크리스마스라 도로 사정이 좋질 못해서… 그래도 부탁하신 물건은 무사히 찾아왔습니다. 스크래치 없는지 꼼꼼히 확인도 했고요.”

“수고하셨어요. 그만 가보셔도 돼요. 아빠는 저기 맨 끝 테이블에 고모랑 같이 계실 거예요 아마.”

“네. 알겠습니다.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희서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인 남자는 승재에게도 가벼운 묵례를 건넨 후 등을 돌렸다. 분명 구면인데도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남자가 영 거슬렸다.

“희서 양 개인 비서입니까?”

“아, 굳이 따지자면 아빠 비서예요. 서일 소속이니까. 뭐, 제가 틈틈이 써먹긴 하지만요.”

사채업자가 아니라 서일그룹 직원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의문투성이였다. 윤채원과 채무 관계로 얽힌 상대가 하필이면 정 회장의 직속 비서라니.

무성한 추측이 승재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었다. 대부분은 나쁜 쪽이었다. 윤채원이 돈을 빌린 이유가 무엇이든, 대기업의 수하와 얽혀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저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지금요? 사실 이거, 강 감독님 드리려고 주문한 건데….”

상대의 초조함을 알 리 없는 희서는 손에 든 쇼핑백을 불쑥 내밀며 승재를 붙잡았다. 김 비서에게 부탁했던 물건이 실은 그를 위한 선물이었나 보다.

“아, 뭘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워낙 급한 용건이라….”

“치이, 알겠어요. 그럼 선물은 잠시 후에 드릴게요. 대신 금방 오셔야 돼요.”

“죄송합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한참 어린 풋내기에게 불필요한 사과까지 건네며 양해를 구한 승재는 미술관 복도로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김 비서’라 불렸던 남자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 * *

“잠깐만요.”

복도를 걷던 남자는 승재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저 찾으실 줄 알았습니다. 강승재 감독님.”

그동안 호구 조사라도 마친 듯, 김 비서는 여유로운 미소로 승재를 반겼다.

“일전엔 죄송했습니다. 유명한 분이신 줄도 모르고 결례를 범했네요.”

“당신… 뭡니까?”

“꽤나 호전적이십니다. 직접 보셨다시피, 저는 서일그룹 정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윤채원과 무슨 관계인지 묻는 겁니다.”

최대한 예의를 갖추려 해도 자꾸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마주한 이 남자가 사채업자든, 정 회장의 비서든 뭐든, 엿 같은 기분이 나아질 기미는 없었다. 윤채원과 엮여있단 사실만으로도 적의를 갖기엔 충분했으니까.

“이거 참, 돌려 묻질 않으시니 슬쩍 피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속 시원히 답해 드릴 수도 없는 입장이라….”

“말장난 그만하시죠. 서로 목소리 높여봤자 불리해지는 건 내가 아니니까.”

“윤채원 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저에 대해서.”

“분명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이렇게 열을 내는 데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뭔가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오신 모양인데….”

남자의 빈정거림이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움찔거리는 주먹을 억지로 내린 승재는 나지막이 목소리를 깔았다.

“특별히 들은 바 없습니다.”

자칫 불리해질 수도 있단 판단에, 빚을 졌다는 채원의 말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

“하하, 다행이네요. 입이 무겁다는 게 윤채원 씨의 가장 큰 장점이죠. 아무래도 강 감독님께서 윤채원 씨한테 각별한 감정이 있으신 모양인데… 너무 깊게 파고들진 말라고 조언해드리고 싶네요. 차라리 우리 희서 양하고 잘 한번 해보시는 게 감독님 앞날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능력만 있으면 그깟 나이 차쯤이야….”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윤채원에 대해 뭘 안다고.”

“적어도 감독님보단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뭐?”

무섭도록 짙어진 강승재의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남자는 일말의 위축감 없이 문장을 이어갔다.

“이를테면 지금, 윤채원 씨가 미술관으로 오고 있다든가… 하는 것들 말입니다.”

“그게 무슨….”

남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시장 입구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어머, 감독님! 여기서 뭐 하세요? 조 실장님이 아까부터 계속 찾으시던데.”

승재는 하려던 질문을 접고 어쩔 수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바삐 움직이던 최 대리와 몇몇 직원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급한 용무가 있어서, 이제 막 들어가려던 참입니다. 아, 팸플릿은 잘 해결됐습니까? 정신없어서 물어보지도 못했네요.”

“안 그래도 받으러 가는 길이에요. 방금 지하철역 올라왔다고 해서…. 팀장님 모르게 일 처리하느라 십년감수 했어요. 윤 대리가 여럿 살렸죠.”

“윤채원 대리… 말입니까?”

“네. 박스도 엄청 무거웠을 텐데 크리스마스 지옥철까지 뚫고… 어휴 그 생고생을, 나중에 비싼 밥이라도 사줘야지 정말….”

“…….”

혼란으로 가득 찬 승재의 얼굴을 힐끗 비껴 본 김 비서는, 입꼬리를 느슨히 올리며 중얼거렸다.

“안타깝게도, 제 말이 맞았나 봅니다. 저기 보이네요, 윤채원 씨.”

승재는 그가 가리키는 쪽을 끝까지 쳐다보지 않았다.

제발 그녀가 아니기를.

요 근래 윤채원의 등장은 단 한 번도 달가운 적이 없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랬다.

* * *

‘윤 대리, 미안하지만 지금 바로 미술관 와줘야겠어. 날짜가 잘못 찍힌 팸플릿을 들고 와서… 비품실 가보면 퀵 온 거 있을 거예요. 도로 사정 최악이라, 택시보단 아무래도 지하철 타는 게 나을 거 같아.’

최 대리는 상자가 무거워 혼자서는 무리일 거라고 했지만, 1km 밖에서 감자튀김과 버거를 주문 중인 후배를 독촉하느니 더디게라도 걸음을 걷는 편이 더 나을 듯싶었다. 회사와 미술관은 다행히 다섯 정거장 거리였다. 방향을 바꿔 타거나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는 엉뚱한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행사에 크게 늦는 일은 없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저녁,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응. 전화 받고 바로 지하철 타느라 연락 미리 못 했어. 최 대리님이 워낙 다급하게 부탁을 하셔서. 햄버거? 아… 맞다. 그건 또 까맣게 잊고 있었네….”

팸플릿이 든 묵직한 상자를 발밑에 겨우 내려놓은 채원은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그럼 제가 햄버거 포장해서 광화문역으로 갈까요?」

“아냐, 아냐. 가져와봤자 마땅히 먹을 곳도 없잖아. 가뜩이나 사람 바글바글할 텐데.”

「윤 대리님 배고프시잖아요.」

“이따 집에 가서 먹으면 돼. 괜한 수고 하지 말고 먼저 퇴근해요.”

저녁 식사 거리를 사러 나갔다가 얼떨결에 자유를 얻게 생겼으니, 이보다 더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또 있을까.

「알겠습니다. 도움 못 드려 죄송합니다.」

승천하는 광대 탓에 목소리가 자꾸만 달뜬다. 회사 선배의 퇴근 명령이란 이토록 달콤한 것이구나 느끼며, 그는 못 이기는 척 채원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후배와 통화를 마친 채원은 덜컹거리는 지하철 문에 툭 몸을 기대었다.

더워. 날이 풀린 게 아니라 체온이 높아진 거겠지.

어찌나 급하게 튀어나왔던지 이마와 목선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턱 끝까지 끌어 올렸던 패딩 지퍼를 반쯤 내리니 그나마 좀 숨이 트인다.

주변은 소란했다. 가족이나 친구 단위도 물론 있었으나, 지하철 칸을 점령한 부류는 대부분 커플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엔 뭐하다가 이제야 만나냐고. 아님 어제부터 오늘까지 쭈욱 붙어 있기로 아예 작정들을 하셨나….

유난을 떠는 주변의 행각을 곱지 않은 눈으로 흘기던 채원이 문득 시선을 내려 제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 승재에게서 받은 블랙 펌프스. 채원은 멋쩍은 듯 엷게 웃었다. 뒷굽의 진주 장식이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동안 어찌나 조마조마하던지.

굳이 이 구두를 신고 출근할 건 뭔가. 소품용으로 얻은 신발 하나 던져준 게 뭐 그리 좋다고…. 의미 없는 선물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온종일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고 있는 스스로가, 실은 이 지하철 칸에서 가장 유난한 사람일지도.

[어디쯤이에요?]

[두 정거장 남았어요. 10분 뒤 미술관….]

위치를 묻는 최 대리의 문자에 답장을 쓰던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크리스마스 연휴 이틀간 미술관 출입을 삼가 달라던 김 비서의 말이 불현듯 머릿속에 스쳤기 때문이다.

[10분 뒤 미술관 정문으로 나와 줄 수 있어요? 박스가 좀 무거워서.]

채원은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약속 장소를 건물 밖으로 정했다.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김 비서에게도 문자를 보내놓았다.

[저 윤채원이에요. 급히 전달할 물건이 있어서 지금 미술관 가고 있어요. 행사장 안으로는 들어갈 일 없으니 걱정 마시고요.]

내키지 않았지만 억지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박스만 건네주고 바로 돌아오면 돼. 어려운 일 아니잖아.’

채원은 습관처럼 해오던 자기 암시를 초조하게 되뇌었다. 난처한 상황 같은 건 일어나지 않을 거다. 미리 긴장할 필요도, 겁먹을 이유도 없어. 다 괜찮을 거라는.

정창길은 치를 떨며 채원을 향해 무섭다 했고, 수경은 그녀의 딸이 누구보다 강하고 독립적인 줄 알지만, 사실 아무도 진실을 바로 보진 못하였다.

바르르 떨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눈에 힘을 준 것뿐이고, 울음을 삼키려 목청을 돋운 것뿐이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밤이 무서워 수면제를 달고 살면서도, 잠 못 드는 이유가 잦은 야근 탓이라며 병원 의사에게조차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억센 윤채원과 약해 빠진 윤채원 중 무엇이 자신의 본모습인지, 이제는 제 스스로도 분간이 어려워 숨이 막힐 지경인데.

더군다나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잖아.

입을 꾹 다문 채로 강승재의 마음을 얻으려는 시도는 그야말로 지나친 욕심이었다.

광화문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채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바닥에 놓인 팸플릿 박스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비싼 구두도 아픈 건 똑같네….”

가슴이 콕콕 아렸다. 발끝의 통증이 심장 한가운데까지 번진 모양이었다.

* * *

“죄송합니다, 윤 대리님. 저 때문에….”

최 대리와 함께 채원을 마중 나온 신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쩔쩔맸다.

“괜찮아. 사람이 바쁘면 실수할 수도 있지.”

“윤 대리, 많이 무거웠죠? 구두까지 신고 힘들었을 텐데….”

“정말 괜찮다니까. 자, 다들 얼굴 펴고 이거나 받아요. 우선 200장 세팅해 놓고 나머지는 필요한 분들에 한해서….”

팸플릿이 든 박스를 최 대리에게 건네며 씩씩하게 웃던 채원이, 당황한 눈빛과 함께 말끝을 흐렸다.

동료들의 등 뒤로 다가오는 강승재가 보였다. 입구 쪽에서 자신을 감시하듯 쳐다보고 있는 김 비서의 모습도.

“최 대리님, 박스 이리 주세요. 제가 들어 드릴게요.”

“어머, 아니에요 감독님. 그냥 저희끼리 조용히 처리할게요. 팀장님 모르게 살짝 가져가야 하거든요.”

근사한 슈트에 먼지라도 묻을까 걱정된다며 최 대리는 승재를 멀찌감치 밀어냈다.

“윤 대리, 정말 그냥 갈 거야? 내가 주스라도 한 잔 갖다 줄까?”

“됐어요. 팀장님 마주치면 뭐라 그래. 괜히 상황만 난처해지게.”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전시장 구경이라도 잠깐….”

“아냐. 서두르느라 노트북도 열어둔 채로 나와서…. 암튼 무슨 일 있음 바로 연락해요. 회사에서 여기까지 30분도 안 걸리는 거 알잖아. 내근직 맡겼으면 미안해하지 말고 써먹어요. 알았죠?”

“알았어. 고마워, 윤 대리. 아, 그리고 갈 땐 저기 우측 입구로 돌아서 내려가요. 그쪽엔 에스컬레이터 있더라. 예쁜 구두 스크래치 나면 속상하잖아.”

“으응. 그럴게요.”

해맑게 웃으며 채원을 배웅한 최 대리는 신입과 함께 팸플릿 박스를 들고 사라졌다. 민망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지척에 서있는 강승재에게 ‘예쁜 구두’ 소리가 비껴갔을 리 없겠지. 티 낼 작정으로 신은 것은 아니었는데.

미술관 정문까지는 열 개 남짓한 계단이 연결되어 있었다. 채원은 슬쩍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서너 계단 위쯤에 여전히 강승재가 서 있었다.

“안 온다더니.”

낮은 보이스가 잔잔히 공기를 가르자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팸플릿 때문에….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창 너머 로비에서 바깥을 지켜보고 있는 김 비서의 눈초리가 신경이 쓰여, 더 이상 그의 가까이로 다가가진 못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새 구두에 이어 쿵쿵 요동치는 심장 소리까지 들켜버린다면, 그땐 정말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을 테니.

정장을 갖춰 입은 강승재를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미처 몰랐던 취향을 간파당한 기분이다.

평소 내추럴한 반곱슬의 헤어스타일이 그와 매우 잘 어울린다 생각했었는데. 흩날리는 머리칼 하나 없이 단정한 구레나룻, 손이 베일 듯한 셔츠 깃에, 이토록 맥박이 빨라질 줄은 몰랐다.

“저녁은?”

“아직… 회사 들어가는 길에 간단히 먹으려고.”

“내근직 두 명이라며, 왜 혼자 왔어?”

“후배 잠깐 나간 사이에 연락받았거든.”

“아, 그랬구나.”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혼란이 잔뜩 서린 강승재의 눈빛 때문에.

“윤채원. 너 혹시….”

“응?”

느리게 움직이는 입술. 그는 아직 못다 한 말이 좀 더 남은 듯했다.

“전에 미술관에서 만났던 그 남자랑 주기적으로 연락해?”

두근거리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가, 갑자기 그걸… 왜 묻는데.”

구두가 잘 어울린다든가, 행사 끝나고 잠깐 얼굴이라도 보자든가 하는 태평한 작업 멘트를 기대했던 채원은, 놀란 가슴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한 채 말을 버벅댔다.

“행사장에서 만났어 우연히.”

“아….”

“서일그룹 비서라던데.”

“…….”

“알고 있었어?”

“그, 그게….”

김 비서와 독대했다는 건가. 아님 여럿이 소개받는 자리에서 가볍게 스쳐 가기만 한 걸까.

구체적인 정황도 알지 못하면서 섣불리 먼저 답을 할 수는 없었다. 김 비서가 함부로 입을 놀리진 않았을 테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돈만 빌렸다 둘러대는 편이 나으려나, 머리를 쥐어 짜내는데.

“희서 양, 무슨 일 있으십니까? 코트도 없이 밖으로 나가시면….”

김 비서의 난처한 목소리가 미술관 입구 쪽에서 새어나왔다.

“아니, 한참 기다려도 감독님이 안 보이셔서요. 무슨 통화를 이렇게 길게….”

“그럼 여기 잠깐 계십시오. 제가 감독님께 희서 양이 찾으신다 전해드리겠습니다.”

“어? 저기 문 앞에 서있는 분 맞죠?”

“잠시만요! 희서 양!”

“감독님!”

길을 막는 김 비서를 가뿐히 제치고 막무가내로 회전문을 통과한 정희서가 하이톤으로 승재를 부르며 쪼르르 달려 나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설마 저 까먹으신 건 아니죠?”

“아, 그럴 리가요. 생각보다 통화가 길어져서….”

놀란 듯 뒤를 돌아본 승재는 곧 차분하게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채원은 평정심을 되찾는 것이 잘되지 않았다.

“감독님.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잠깐만, 윤….”

“누구예요?”

“아, 업체 직원입니다. 전시회 같이 준비하는….”

“통화도 끝나셨고 저 직원도 내일 뵙자는데, 이제 볼일 다 마치신 거 아니에요? 어우 추워. 저 감기 걸리면 강승재 감독님 때문이라고 막 소문낼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가 야심차게 준비한 선물, 아직 오픈 안 했잖아요…. 궁금하지도 않나 봐. 몇 주 전부터 엄청 고민한 건데….”

정희서의 반말 섞인 칭얼거림이 줄줄이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선물은 들어가서 풀어볼게요. 희서 양 말대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멀어져가는 채원의 뒷모습을 얼마간 바라보던 승재는 접대용 미소를 억지로 입에 걸었다. 우선은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치는 일이 더 급선무였다.

“한마디 해줄 걸 그랬나….”

구두가 참 잘 어울린다고.

“네?”

“아, 아닙니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시죠.”

가느다란 발목을 또각또각 내딛는 윤채원의 뒤태가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눈길을 주고 말았다.

낡아빠진 에나멜 구두가 조금이라도 더 안전했을지 모른다. 시시각각으로 허물어지는 남자의 마음을 바로잡기에는.

* * *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는데….”

H 로고가 박힌 명품 쇼핑백을 넌지시 건넨 정희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승재의 반응을 살폈다. 케이스를 열기 전부터 부담이 밀려왔다. 아무리 하찮은 액세서리라 해도 예상 가격만큼은 절대로 하찮은 게 아니었다. 게다가….

“스트랩… 이네요.”

하필 정희서의 선물은 비비드한 오렌지색-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카메라 스트랩이었다.

“감독님은 왠지 컬러풀한 게 잘 어울리실 거 같았거든요!”

“…이렇게 비싼 선물을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강 감독님 드리려고 일부러 산 건데 거절하시면 안 되죠. 대신 소문만 내지 말아주세요. 특히 아빠한테는… 돈 함부로 쓰고 다니지 마라, 명품 살 땐 허락 맡아라, 워낙 잔소리가 심하셔서.”

딱히 놀랄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카메라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이 포토그래퍼에게 줄 수 있는 아이템은 몇 가지로 한정되기 마련이니.

그중에서도 스트랩은 가장 흔해 빠진 소재였다. 다양한 재질과 컬러의 선택이 가능할뿐더러 소모품 성격이 짙기 때문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 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는 선물이랄까. 물론 명품 로고가 떡하니 박혀 있다면 사정은 좀 달라지겠지만.

“어떠세요? 별로예요? 반응이 너무 덤덤하니까 서운해지려고 한다구요. 혹시 다른 제품으로 교환 원하시면….”

“아닙니다. 맘에 듭니다.”

“정말요?”

“네. 잘 쓸게요. 고마워요.”

승재는 정중한 미소로 답했다. 고가의 선물을 받은 것이 영 거북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정희서 앞에서 대놓고 불편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친구들과 프로필 사진을 찍으러 오겠다던 그녀의 막무가내 부탁을 들어줘야 하나, 오늘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려면…. 두통이 밀려온다.

“감독님! 여기 계셨네요.”

명품 스트랩을 만지작거리며 난감하게 서있던 승재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 실장의 목소리였다.

“한참 찾았습니다. 전화도 안 받으시고.”

“무음으로 해놨었나… 몰랐네. 근데 그거, 내 카메라 아냐?”

조 실장 어깨에 걸쳐진 카메라를 승재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딱히 사용할 일이 없겠지 싶어 차 조수석에 두고 내린 걸로 기억하는데.

“발레파킹 직원한테 사정 설명하고 잠깐 키 빌렸어요. 허락도 없이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아, 그게….”

“실은 제가 여쭤봤거든요. 오늘 혹시 강 감독님 카메라 가져오셨냐고.”

승재와 조 실장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정희서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애먼 사람이 덤터기 쓰지 않도록 자진신고를 택한 모양이다.

“스트랩 어울릴지 궁금해서요. 오렌지 컬러가 좀 튀어 보일까 봐 망설였는데 매장 직원이 그러더라구요. 카메라에 연결하면 느낌이 확 달라진다고.”

“바디가 블랙이라 웬만하면 잘 어울릴 겁니다.”

“그냥 지금 달아주심 안 돼요? 사진도 한 장 찍고 싶은데. 카메라 들고 포즈 한 번만 취해주시면… SNS 절대 안 올리고 혼자서만 간직할게요. 네? 감독니임….”

정희서가 콧소리를 섞으며 승재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대신, 스트랩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 지금 바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조 실장, 카메라 이리 줘 봐.”

“아, 네. 여기 있습니다.”

“…….”

잠시 멈칫거리던 남자의 손가락이 기존의 것을 제거하고 오렌지색 스트랩을 연결했다. 허탈할 만큼 간단한 작업이었다.

“어머, 예뻐라! 진짜 잘 어울린다. 완전 대만족! 역시 잘 고른 거 같아요. 그쵸? 그쵸?”

“네. 잘 어울리네요.”

“혹시 그럼, 카메라랑 스트랩은 사진 찍어도 돼요?”

“물론입니다.”

승재가 카메라를 사이드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정희서는 휴대폰을 이리저리로 옮기며 찰칵거렸다. 스무 살짜리 재벌 아가씨 수발을 드느라 녹초가 된 승재를 잠자코 지켜보던 조 실장이 안쓰러운 듯 입을 열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류정혁이 새삼 존경스러울 뿐이야. 돈 쉽게 번단 소리, 다신 하지 말아야지.”

정희서의 귀에 혹시라도 새어들지 않도록 승재와 조 실장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도 성과가 좋으니 다행이죠. 최 대리한테 슬쩍 들은 정본데요, 이틀 만에 모금액 이미 달성했답니다.”

“벌써?”

“네. 재벌들 힘이 대단하긴 하네요. 희서 양이 톡톡히 한몫해준 거나 다름없어요. 정 회장한테 감독님 만나게 해달라고 몇 날 며칠을 조른 모양이던데.”

승재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조 실장이 한층 더 작아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러니 좀 귀찮게 해도 꾹 참고 비위 맞춰주세요. 혹시 또 압니까? 저희 스튜디오 어마어마하게 밀어줄지?”

“조 실장, 주말 출근 하지 못해 안달인가 보네. 내가 스케줄 몇 개 더 만들어줘?”

“그런 뜻 아니란 거 잘 아시면서.”

“난 기분 좋게 작업하고 싶어. 윗대가리들 비위 맞출 일 늘어나면 카메라 잡기 싫어진다고.”

승재가 단호한 어조로 조 실장의 헛된 욕심을 잘라냈다. 그냥 한번 해본 소리라고, 조 실장은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승재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해맑게 다가오는 정희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희서 양, 카메라 이리 주십시오. 감독님 짐도… 걸리적거리니까 차에 미리 실어 놓겠습니다.”

“아, 그래 주면 고맙고.”

승재는 들고 있던 쇼핑백과 선물 케이스, 그리고 카메라에서 떼어낸 낡은 스트랩을 조 실장에게 넘겼다.

“이 스트랩, 카메라 없이 단독으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유독 아끼시더니.”

“…….”

“그래도 이 정도면 오래 쓰신 거예요. 가죽 질이 워낙 좋아서… 미국서부터 가져오신 거죠?”

“응.”

“혹시 버리실 거면….”

“아냐. 내가 알아서 할게.”

승재가 조 실장의 말을 빠르게 끊었다.

단지 손에 익어서, 귀찮아서 떼어내지 않았던 거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품고 다녔던 스트랩. 한쪽 귀퉁이에 새겨진 알파벳 K가 눈에 비친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것은 정말 소름 끼치도록 윤채원과 닮은꼴이었다.

요즘 그의 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윤채원이 알짱거렸다.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행동이었다면 그녀의 계략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악에 받치던 분노가 조금씩 무뎌지니 그 사이로 자꾸만 연민이 움튼다.

참 속도 없지. 죽을 만큼 괴로웠던 9년 전의 기억을 새하얗게 잊은 것처럼, 또다시 입을 맞추며 그녀를 품고 있다니.

그 언젠가 격한 독설을 버티지 못한 윤채원이 줄줄 눈물을 흘렸을 때 미친놈처럼 심장이 펄떡거려 아주 애를 먹었다. 왜 그랬을까. 그녀를 울려서? 잠재된 사디스트 성향이 뒤늦게 발현되기라도 한 건가.

“감독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전시장을 휘휘 돌던 정희서가 지루함을 느꼈는지 승재를 보챘다.

“우리도 저쪽 테이블 가서 와인 한 잔씩 해요. 계속 서있었더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아, 제가 너무 배려가 없었네요. 그런데 와인 마시기엔 희서 양 나이가….”

“저 스무 살이에요. 합법적으로 음주 가능한 나이.”

“그래도 저랑 있을 땐 안 됩니다. 무알코올 샴페인으로 갖다 줄 테니 먼저 앉아 있어요.”

희서는 연신 입을 삐죽거렸지만 승재는 그녀에게 끝까지 와인 잔을 넘겨주지 않았다. 뒤치다꺼리는 윤채원 한 명이면 충분했다.

* * *

“고생은…. 조 실장이 더 수고 많았지. 내일부터 미술관은 저녁 한두 시간 정도만 얼굴 비치기로 했으니까 일단 스튜디오에서 보자고. 느긋이 출근해도 돼. 응, 그래. 점심 지나서 ”

통화를 마친 승재는 주차를 마친 대리기사에게 오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넨 뒤 느린 걸음을 걸었다.

긴장이 풀리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의 손에는 슈트 재킷과 카메라, 기타 자질구레한 짐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뒷목이 뻐근해질 만했다.

“후우, 옷이 사람 하나 죽이는구나.”

셔츠 깃을 꽉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내리니 그나마 좀 숨이 트인다. 확실히 정장 체질은 아니었다. 겨우 이틀 입었을 뿐인데 성격이 몇 배는 더 예민해진 것 같다.

애초부터 펜 대신 카메라 잡길 잘했다며 피식 입꼬리를 올리던 승재는, 쇼핑백 사이로 반쯤 튀어나온 낡은 스트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깟 게 뭐라고 구태여 들고 와. 버리면 그만인 것을.

눈 딱 감고 조 실장에게 처리를 맡길까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승재는 과거의 윤채원을 잘라내지 못한 채 돌아왔다. 오래된 가죽끈보다 더 질긴 여자였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떨쳐낼 수가 없으니.

“며칠만 더 버티면….”

당분간 자주 볼 일은 없겠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절실하다. 단 며칠이라도. 알짱거리는 그녀를 눈앞에 둔 채로는 이성적 사고가 도저히 불가능했다.

“승재 씨….”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좁혀지는 미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터벅터벅 지친 발을 옮기던 승재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쿵쿵 맥박이 울리기 시작한다. 윤채원을 향한 양가감정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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