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카지노 텐카지노 소닉카지노 판도라 히어로 코어카지노 라바카지노 보스 쿵푸벳 골든 네임드 볼트카지노 프라그카지 나루토카지노 아크

03. 교착

본문

쿵푸벳

#03. 교착

* * *

오른손에 묵직한 카메라를 쥔 승재는 등받이 없는 철제 의자에 멍하니 기대 있었다. 손등에 두어 번 감긴 스트랩. 9년의 시간을 버텨낸 가죽끈은 처음에 비해 색이 짙고 깊었다.

윤채원 때문이 아니다. 손에 감기는 가죽의 질감이 적당히 묵직하고 적당히 부드러워서, 해마다 조금씩 변하는 컬러가 마음에 들어 갖고 있던 것뿐이라고. 지겨운 자기합리화의 시작에 두통이 밀려온다.

‘이 상황에서 빚 얘기까지 떠벌리면 그건 정말 염치없는 짓이지. 콜라보 제안도 받아줬는데 더 이상 신세 지기 싫….’

‘새삼스럽게 선 긋지 마. 9년 만에 불쑥 얼굴 들이밀 때부터 이미 민폐였어 너.’

‘알아 나도. 멋대로 나타나서 물 흐린 거. 승재 씨 능력에 기대보려는 심보도 못된 건 맞지만, 돈 때문에… 돈이 급해서 찾아온 건 절대로 아냐. 믿어 줘. 누구한테 얼마를 갚든 어디까지나 내 문제이기도 하고….’

승재의 공격적인 물음에도, 그녀는 끝내 돈의 액수를 말해주지 않았다.

“저, 감독님….”

“…….”

“강 감독님!”

“어? 어… 그래. 무슨 일이야.”

코앞에서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에 승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나 씨 머플러 교체했는데요.”

“아, 그렇지 참. 미안… 내가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축 처진 팔을 힘겹게 올려 카메라를 드는 감독의 모습이 오늘따라 영 이상해 보인다.

슬금슬금 승재의 눈치를 살피는 스태프들. 작업 분위기가 부디 험악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저마다 눈짓을 주고받는 와중에.

“저 감독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포즈를 취하고 있던 모델이 쭈뼛쭈뼛 승재에게 다가와서는 얼토당토않은 질문을 던졌다.

“죄송하지만, 오늘 촬영 몇 시쯤 끝날까요?”

멀찌감치 서서 전화를 받던 조 실장마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릴 정도로, 이 당돌한 여배우는 승재의 심기를 천진난만하게 건드렸다.

“매니저한테 일정 전달 못 받았습니까?”

“아, 5시까지라고 듣긴 들었는데요, 감독님이랑 작업하면 한두 시간은 기본으로 오버된다고, 소속사 선배가….”

스튜디오K 촬영장은 일순간 얼음 상태가 되었다.

그 선배가 악감정을 품은 게 틀림없네. 강승재 감독이 어떤 말을 가장 싫어하는지 조금이라도 귀띔을 주었다면 저런 멍청한 질문은 던지지 않았을 거라며, 스태프 몇몇이 복화술로 수군댔다.

“예나 씨, 나랑 촬영 처음이죠?”

“네, 감독님.”

앳된 음성이 또랑또랑하게 울렸다. 어찌나 대답을 재깍 잘하는지 오히려 전의를 상실한 승재였다.

“정말 몰라서 물어본 것 같으니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앞으로 나랑 또 작업하고 싶으면, 내 스케줄 뒤에는 시간 넉넉히 비워 두는 게 좋을 겁니다. 내 방식이 좀 그래요. 타이트한 걸 워낙 싫어해서 말이지.”

타이트한 걸 싫어한다니. 가까이 다가오던 조 실장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냈다.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느슨한 사람인 줄 아나 보다.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지. 촬영이 끝날 때까지 스태프들이 어떤 표정으로 일을 하는지, 비하인드컷이라도 찍어두고 싶은 심정이랄까.

“죄, 죄송합니다. 감독님.”

예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입은 웃고 눈은 안 웃는 강 감독의 서늘한 경고는, 어찌 됐든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제가 촬영 일찍 끝내달라는 뜻으로 말씀드린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가, 강아지 밥을 줘야 해서요….”

“저기, 예나 양. 감독님께 설명드릴 시간에 차라리 촬영을 빨리 시작하는 게….”

보다 못한 조 실장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강아지 밥’ 소리를 지척에서 듣고도 멀뚱멀뚱 서 있을 여유는 없었다.

“강아지 밥? 예나 씨가 기르는?”

조 실장에게 괜히 끼어들지 말라 눈짓을 준 승재가, 예나의 말끝을 자연스레 받았다.

“네… 입양한 지 3개월쯤 됐는데, 그 전에 한 번 버려진 적이 있어서 분리불안이 심한 편이라… 부, 부모님이 여행 중이시라 집에 저랑 솜이랑 둘뿐이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감독님께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공사 구별도 못 하고….”

“예나 씨 말 오해 없이 들었으니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사실 나도….”

크흠, 한 차례 헛기침을 뱉은 승재가.

“…견주라서.”

슬쩍 집사의 대열에 합류했다.

“네에? 감독님도 강아지 기르신다구요? 어머, 이런 우연이! 몇 살인데요? 이름이 뭐예요?”

“보리. 내년이면 벌써 10살이라 걱정입니다.”

“요즘엔 10살이어도 건강하던데요. 나중에 저희 솜이랑 친구 해도 되겠어요. 솜이는 5살인데 소심한 편이라 그런지 어린 강아지들보단 연상을 좋아하더라구요.”

조 실장을 포함한 스태프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승재와 예나를 힐끔거렸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긴장이 한풀 꺾이긴 했으나, 강 감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키포인트가 다름 아닌 강아지였다니! 왠지 모를 허탈감이 밀려왔다.

“감독님 강아지 너무 부러워요. 예쁜 사진 엄청 많이 찍어 주셨을 거 같은데… 보리는 절대 모르겠죠? 감독님께서 얼마나 유명한 분이신지. 아, 혹시 강아지 사진 잘 찍는 법이 따로 있나요? 저희 솜이는 사진발이 너무 안 받아서….”

“예나 씨, 조만간 솜이 데리고 스튜디오 한번 나와요. 내가 인생 사진 한 장 만들어 줄 테니까. 물론 무료로.”

“네에? 그, 그게 정말이세요?”

“가, 감독님… 농담을 그렇게 진담처럼 하시면….”

예나보다 몇 배는 더 놀란 조 실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차 대화에 끼어들었다.

“농담 아니야. 조 실장, 내가 언제 카메라 들고 장난치는 거 봤나?”

저 감독이 제정신인가 지금. 점심때 혼자 나가 술과 커피를 섞어 마신 것이 분명하다 여길 때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예나 씨. 혹시 POA라는 동물보호단체 들어봤어요?”

스튜디오K 대표의 의뭉한 속내가 은근하게 드러났다.

* * *

“감독님, 방금 신가연 씨도 연락 왔습니다. 강아지 두 마리 키우는데 끼워주시면 안 되겠냐고, 직접 전화를….”

‘예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의 수다스러움 덕에 강승재 감독이 스타의 반려견을 무료로 촬영해준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조 실장은 귓바퀴가 델 정도로 며칠째 휴대폰을 달고 살았다. 사진 원본의 소유권은 스튜디오K 측에 있고, 연말 자선 사진전에 전시될 예정이라는 조건을 추가로 붙였음에도 문의는 여전히 빗발쳤다.

심지어 대다수의 연예인들은 전시회 참여를 반기는 눈치였다. 강승재 감독의 사진 속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는 자부심. 자선 행사와 맞물린 이미지 메이킹. 사진전을 찾는 사람들이 각자의 SNS에 태그까지 달아줄 테니, 이보다 더 좋은 홍보 기회가 또 있을까.

“픽스된 스케줄만 벌써 서른 명째입니다. 당분간 야간작업 괜찮으시겠어요?”

“보름 정도야 뭐. 신가연까지만 리스트 추가해. 이미 작품 수 초과한 거 같은데.”

“네. POA 측에서 알면 진짜 좋아하겠어요. 윤 대리님께 당장 연락드릴까요?”

“뭣 하러. 어차피 내일 미팅이잖아.”

“아 그렇죠 참. 입이 근질거려서…. 와 정말, 감독님 아이디어는 못 따라갑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기발한 발상을….”

승재가 엷게 웃으며 손에 든 커피를 마셨다. 동물 사진은커녕 새 작품 한 점도 내어줄 수 없다고, 그동안 윤채원 속앓이를 톡톡히 시켰던 그로서는 꽤나 선심을 쓴 결정이었다.

그녀가 빚이 있다는 사실에 어쭙잖은 동정심이라도 끓어올랐나. 윤채원이 짜놓은 판에 알아서 발을 담그다니.

어김없는 자책을 시작하려던 찰나, 지잉, 승재의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아, 웬일이세요? 직접 연락을 다 주시고.”

「강 감독님, 제가 좋은 소식 하나 들려드릴까 하는데, 잠깐 통화 어떠세요?」

SJ미술관 관장의 전화였다.

“네. 말씀하세요. 시간 괜찮습니다.”

「전시회 일정 말인데요, 혹시 이틀 앞당길 생각 있으신가 여쭤보려고. 기존 3일에 플러스 2일 해서 총 5일. 추가 비용 받지 않고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승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차라리 대관료 할인을 해준다면 모를까, 이틀씩이나 장소를 무료 제공해준다는 것은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이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24일과 25일은 연말 중 가장 대관료가 비싼 피크타임 아닌가.

「실은 저희 미술관에 크리스마스 디너파티가 잡혀 있거든요. 최대한 조용히 준비 중인데… 서일그룹 관련된 비공식 행사예요. 이브 날엔 각 계열사 임원진 가족 초청, 25일은 서일가 지인 분들. 로열패밀리 모임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렇군요. 감사한 제안이지만 조금 고민이 됩니다. 사실 저희 목적은 작품 홍보가 아닌 기부금이라서요. 높으신 분들 모아놓고 문 걸어 잠그는 것보단, 차라리 시민들 상대로 며칠 더 전시회를 여는 게….”

「감독님도 참. 설마 제가 ‘자선’ 뜻도 모르고 이렇게 호들갑 떨겠어요? 동물보호 목적으로 자유 기부받을 예정이라고, 이미 초대장에 찍혀 나갔어요. 제 생각에는 3일간 일반인들 입장료 합친 액수보다, 이 프라이빗 행사가 몇 배는 더 클 것 같은데.」

“아…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근데 아직 얼떨떨하긴 합니다. 저희가 딱히 부탁드린 것도 없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승재의 벅찬 음성에 신이 난 관장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설레발을 쳤다.

「호호, 이게 다 우리 강 감독님께서 잘나신 덕분이죠. 글쎄 정윤호 회장 자제분이 강 감독님 골수팬이라지 뭐예요? 첫째 따님이 올해 대학 합격했는데, 강 감독님 딱 한 번만 뵙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마련된 자리라는 소문이… 대신 25일에는 감독님 얼굴 꼭 비치셔야 돼요. 몇억이 모일지, 몇십억이 모일지 모르니까.」

“당연히 가야죠. 좋은 기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장님.”

승재는 흔쾌히 답했다. 모든 일이 예상외로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윤채원 백수 될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속도 없이 피식 미소가 지어진다.

* * *

“윤 대리, 윤 대리! 사진전 헤드라인 뜬 거 봤어요? 스튜디오K 옆에 POA 이름도 같이 실렸더라고! 지하철에서 소리 지를 뻔했잖아. 너무 좋아서!”

아침부터 POA 건물 전체가 들썩거렸다. 핸드백도 내려놓지 않고 채원의 자리로 아예 출근을 한 최 대리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아, 기사 봤어요 저도. 연예인들 참여한다고….”

“연예인뿐 아니라 운동선수도 있고 모델도 있고, 그 바이올리니스트 누구더라? 갑자기 이름 생각이… 암튼 난리도 아니던데! 전시회 티켓 어디서 구할 수 있냐고 댓글창 폭주에…. 윤 대리는 알고 있었어요? 강 감독님 프로젝트 말야. 저번 주까지만 해도 기존 작품만 걸겠다, 딱 자르시더니.”

“저도 몰랐어요. 오늘 가면 말해주겠죠.”

유명인과 그들의 반려동물을 컨셉으로 한 사진전이라니.

강승재의 고마운 아이디어에 감격이 밀려왔지만 최 대리가 어찌나 돌고래 소리를 내는지 채원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바퀴가 도르르 밀려날 정도로, 동갑내기 회사 동료의 호들갑 지수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아, 미팅이 오후라고 했지. 외근 갈 맛 나겠네요. 윤 대리 진짜 너무 부럽다. 강 감독님이랑 친해서.”

“친하다기보단….”

“미국에서도 완전 잘나갔다면서. 금발 모델만 골라 사귀었단 소문 돌던데…. 어찌 됐든 이게 다 윤 대리 덕이라고 팀장님이 조만간 소고기 쏘시겠대. 괜히 또 법카로 회식했다가 구설수 오르면 안 된다면서, 이번엔 팀장님 사비로 사주신다고….”

자신 없이 흐려지는 채원의 문장이 최 대리의 하이 톤에 금세 묻혔다.

“근데 윤 대리,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혼자서만 축 처져서.”

한참을 떠들던 최 대리가 힐끔, 채원의 얼굴을 살폈다. 마지못해 웃고는 있었으나, 어색하게 휘어진 눈꼬리가 영 석연찮았다.

“사실 조금 걱정이긴 해요. 전시회 전에 요란만 떨다가 막상 모금액 달성 못 할까 봐…. 3일 일정밖에 못 잡은 것도 계속 마음에 걸리고.”

“예산팀 허락 떨어져도 어차피 불가능하잖아요. 남는 날짜가 있어야지.”

“하긴, 그렇죠.”

“에이,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자구요. 유명인사 대거 참여한다고 기사까지 난 마당에 설마 텅 비겠어요? 광화문 쪽은 관광객들도 많고 항상 북적거리니까.”

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챙겨 갈 자료들을 최종 점검했다. 전시회 전, 스튜디오K와의 마지막 미팅이었다.

* * *

“윤채원 씨.”

1층 입구를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가 채원을 불렀다.

9년 전만 해도 ‘윤채원 양’, ‘채원 양’ 하며 예의를 갖추더니, 요즘은 서일그룹 아랫사람을 대하듯 사무적이다. 머지않아 반말을 지껄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김 비서님, 연락도 없이 웬일이세요? 제가 분명 근무 중에는 뵐 수 없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점심시간 맞춰 왔습니다. 급히 전할 말이 있어서.”

“저 지금 외근 나가봐야 해서요.”

“십 분이면 됩니다. 급한 일이라.”

웬일인지, 김 비서는 평소보다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채원을 감시하기 위해 찾아온 여느 날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채원은 눈동자의 독기를 반쯤 풀고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급한 용건이라 해도 사람 많은 회사 주변은 불편했다.

“저쪽 건물 안에서 얘기하죠 그럼.”

채원은 미용실과 화장품 가게가 몰려 있는 낡은 건물을 가리켰다. 김 비서는 별말 없이 그녀를 따랐다. 식당과 카페가 몰린 공간이 아니라 짧은 대화를 나누기엔 그럭저럭 괜찮았다.

1층 계단 난간에 묵직한 숄더백을 올려놓은 채원이 팔짱을 끼고 김 비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꺼지라는 의미였다.

김 비서는 40대치고 동안인 편이었으나, 날카롭게 쭉 찢어진 눈매와 얇은 입술은 어쩐지 잔인해 보여, 채원은 늘 그를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꼿꼿이 고개를 세웠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속내를 들킬까 봐, 그것이 더 두려웠으니까.

“바쁜 것 같으니 간단히 말할게요. 일단 지난번 미술관에서의 일은 사과드립니다. 윤채원 씨 말이 맞더군요. 저희 미술관에서 자선 전시회를 연다는.”

“늦게라도 아셨다니 다행이네요. 스튜디오K와 콜라보 진행한단 소식도 들으셨죠? 미술관은 그쪽 대표님이 정하신 거예요.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거길 골랐겠어요? 서일 두 글자 소리만 들어도 열이 뻗치고 숨이 턱턱 막히는데?”

“그래, 내가 잘 알죠. 윤채원 씨 심정.”

“함부로 지껄이지 마세요. 당신이 나에 대해 알긴 뭘 알아.”

“아무리 화가 나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나만큼 윤채원 씨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은데….”

목의 맥박이 미친 듯이 펄떡거렸다. 채원은 티 나지 않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무엇보다 이성의 끈을 바로잡는 게 우선이었다. 혹 정창길 이름이라도 뱉어냈다간 저 남자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고, 울거나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난 당신이 무섭다’라는 걸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본론이나 꺼내 놓으시죠. 설마 나 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닐 테고.”

“24, 25일은 윤채원 씨 미술관 출입 금지입니다.”

채원의 비아냥을 가볍게 무시해버린 김 비서는 기계적인 톤으로 다짜고짜 그녀의 미술관 출입을 제한했다.

채원은 한참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무슨 대꾸를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 언젠가 강승재가 이죽이던 것처럼, 본인의 이해력이 달리는 건 아닐까,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튀어나왔다.

“제가 왜 크리스마스 연휴에 그쪽 미술관을 가겠어요. 전시회는 26일부터 시작이고, 설치 작업도 당일 새벽에 할 건데.”

“아직 제대로 전달 못 받은 모양이네요. 24일부터 이틀간 미술관에서 서일그룹 VIP 모임이 열릴 겁니다. 행사 일환으로 자선 사진전 이틀 앞당겨 오픈하라는 회장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각 계열사 임원진 가족과 오너 일가, 가까운 지인 분들 참석하실 예정이고.”

“…….”

“내 말, 이제 이해하겠죠?”

저열하게 늘어지는 김 비서의 입매가 소름 끼치게 싫었다.

“오너 일가라 함은….”

“정윤호 회장님, 정윤진 부회장님 모두 참석하십니다. 가족 모임이니 당연히 자제분들도 함께하시겠죠.”

두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지만 상대의 면상을 휘갈길 수도, 애꿎은 나무 난간을 내리찍을 수도 없었다.

사실 그의 발언은 협박도 위협도 아니었다. 서로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말자는. 난처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경고. 어찌 보면 김 비서는 그녀를 도와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요. 얼굴 마주칠 일… 없도록 할게요.”

채원은 짧게 답했다. 위축된 음색은 최대한 눌러 삼켜야 했다.

* * *

“오셨어요, 윤 대리님!”

조 실장이 미리 준비한 커피와 쿠키를 내어주며 채원을 반겼다.

“마지막 미팅은 저랑 둘이 하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죠? 감독님 일정이 스트레이트로 잡히셔서.”

“아, 네. 어차피 오늘은 변경 사항만 체크하면 되니까….”

강 감독이 있을 때에도 어차피 회의 진행자는 조 실장님 아니었냐고 그를 띄워 주었지만, 막상 강승재가 오지 않는다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기운이 빠졌다.

미간을 한껏 찡그리고선 본체만체 그녀 곁을 스쳐 가는 남자여도, 온갖 저속한 표현들로 사람을 말려 죽인다 해도.

좋았다.

하루하루 끝을 모르고 마음이 깊어져 간다. 9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매일같이 그를 보고, 만지고, 갖고 싶었다.

“혹시 강 감독님… 사진전 추가 촬영 때문에 바쁘신 건가요? 연예인들 참여한다는 기사 봤거든요 오늘.”

기존 스케줄까지 어그러뜨릴 정도로 일을 한다는 건, 분명 시일이 촉박하단 의미겠지. 아니나 다를까, 조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윤 대리님도 보셨군요. 강 감독님께서 상의 한마디 없이 갑자기 일을 벌이셔서요. 저도 전화 응대하느라 며칠 동안 정신 쏙 뺐습니다 아주.”

“죄송해요. 괜히 제가 부담을 드린 것 같아서…. 그냥 구색용으로 최근작 한두 개 부탁드린 건데.”

“윤 대리님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강 감독님이 자청한 일이니까 본인이 책임을 지시겠죠, 하하. 그래도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윤 대리님 솔직히 그동안 맘고생 많이 하셨잖아요. 미팅 때마다 살얼음판 걷고. 예술가라 그런가 보다 해주세요. 원래 그렇게 까칠한 분 아닌데.”

“저 고생한 거 없어요. 감독님 덕에 오히려 한숨 돌렸는걸요. 저희 회사 요즘 축제 분위기라,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채원이 적극적으로 고마움을 표하자 조 실장은 한결 편해 보였다. 혹 그녀가 동료들에게 강 감독의 뒷담화를 늘어놓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었나 보다.

“감사는요. 아, 그리고 전시회 리허설 말입니다. 26일 새벽이 아니라 23일 저녁으로 변경 부탁드립니다. 미술관 측에서 무료로 이틀을 더 대관해주기로 했거든요.”

“무료로, 이틀을요?”

김 비서를 통해 들은 정보였으나 채원은 모른 척 되물었다. 조 실장에게 보다 자세한 전후 사정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 미술관 관장이 감독님께 직접 전화를 주셨더라고요. 24일부터 서일그룹에서 주최하는 디너파티가 있다고, 사진전 이틀 앞당겨 오픈해 달라 하셔서.”

“프라이빗 행사에 왜 굳이 저희를….”

“정윤호 회장 아시죠? 서일 오너. 첫째인지 둘째인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암튼 정 회장 따님분이 우리 강 감독님 팬이랍니다. 내로라하는 분들 다 모이신다니 기부금도 어마어마할 거예요. 우리나라가 체면치레로는 세계 제일 아니겠습니까? 싫든 좋든 지갑들 여시겠죠 아마. 하하, 거참, 일이 풀리려니 이렇게 또….”

“그러게요….”

일이 이렇게까지 얽히고설킬 수 있나.

채원은 광대가 아프도록 억지웃음을 지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이토록 완벽히 일치하긴 처음이었다.

‘…정 회장 따님분이 하필 우리 강 감독님 팬이랍니다.’

조 실장의 한마디가 그녀의 머릿속을 첨예하게 들쑤셨다.

정윤호의 딸이라면 이제 겨우 스물 언저리 나이. 그래 봤자 악수나 하고 사진 몇 장 찍어주는 게 전부겠지.

애써 마음을 다잡아 보아도 자꾸만 어금니가 물렸다. 마치 기부금과 강승재를 맞바꾸는 기분이었다.

“그날… 강 감독님도 참석하시나요?”

“강 감독님은 당연히 가실 거고, 저희 쪽 스태프도 대여섯 데려갈 예정입니다. 진행 요원 부족하면 큰일이니까. 윤 대리님 팀도 23일 밤부턴 쭉 시간 비워두셔야 할걸요?”

“네. 안 그래도 비상근무 공지 내려온 상태예요. 근데 저는….”

‘24, 25일은 윤채원 씨 미술관 출입 금지입니다.’

김 비서의 경고가 지겹도록 귓가를 울렸다. 원인 모를 이명 같기도, 징그러운 벌레의 날갯짓 같기도 했다.

“전 아마… 본사에 남아있을 거 같아요. 팀장님께서… 그러라고 하셔서.”

누구의 지시였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윤채원은 절대로 미술관에 발을 들여선 안 된다는 것. 그 약속만 지켜내면 되는 것이다.

* * *

미팅을 마친 후 엘리베이터에 오른 채원은 손가락을 겨우 뻗어 1층 버튼을 눌렀다.

발뒤꿈치가 아리다 못해 새끼발가락까지 욱신거렸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나. 갈수록 빳빳이 날을 세우는 구두가 꼭 강승재를 닮았다. 물론 이깟 싸구려와는 거리가 먼 남자였지만.

채원은 여느 날처럼 뒤축을 꺾어 신고 발을 반쯤 빼냈다. 엘리베이터 안의 서늘한 공기가 스타킹을 파고들었다. 딱히 냉한 바람이 아닌데도 발등이 시렸다.

“괜찮아. 잘되고 있잖아. 전시회 진행도 순조롭고, 매스컴도 타고, 기부금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시선을 멍하니 허공에 둔 채 중얼거렸다. 와르르 무너지지 않으려면 이렇듯 혼잣말이라도 열심히 지껄여야 했다. 그래야 또 하루를 버텨낼 수 있으니.

김 비서의 느닷없는 저격과 조 실장의 천진한 확인 사살로, 한껏 들떠 있던 가슴이 걸레짝처럼 너덜거렸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강승재가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 봤자 티끌만큼의 위로도 받지 못할 게 뻔한데, 대체 왜.

별개가 아니라 그런가.

걸레짝이 된 마음을 한 번 더 짓밟아 줄 사람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설픈 위로보다는 차라리 잘근잘근 밟아주는 편이 나았다. 우울에 우울을 겹쳐야 숨통이 트이고, 고통에 고통을 더해야 빛이 보였다. 취향도 별나지. 갈수록 미쳐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딩.

넋 놓고 있는 사이 벌써 1층에 도착했는지,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구겨 신은 신발을 허둥지둥 바로 하려는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아, 잠깐만, 나 아직 안 내렸….”

말을 내뱉고도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허공에 대고 부탁을 할 게 아니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간단한 것을.

이게 다 김 비서 그 인간 때문이다. 그 재수 없는 면상을 마주한 뒤로 머릿속이 엉망진창 꼬여 버렸다.

가느다란 한숨을 흘리며 열림 버튼을 누르려던 채원은 손가락을 멈칫거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1층 버튼은 여전히 주황색 불이 점등된 상태였고, 엘리베이터 문은 닫힐 기미 없이 열린 채 그대로였다. 혹시 고장이 난 것은 아닌가 갸웃거릴 때쯤.

“윤채원.”

익숙한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팅 지금 끝났어?”

네이비 컬러 셔츠 깃 사이로 불거진 목울대가 느른히 움직인다.

“조 실장한테 변경 사항 제대로 전달받았고?”

“…….”

“미팅 잘했냐고 묻잖아. 내 말 안 들려?”

평소보다 탁해진 음색에는 며칠의 피로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뭔데. 묻는 말엔 대답도 안 하고 사람을 뚫어져라….”

“보고 싶었어.”

“…….”

“오늘따라 승재 씨 너무 보고 싶어서….”

“한가한 소리 그만하고 전시회 준비나 철저히 해. 화장실도 못 가고 종일 셔터 눌러대는 중이니까.”

강승재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무심히 쓸어 넘기며 지하 2층 버튼을 눌렀다.

차에 두고 온 서브 카메라를 가지러 잠시 나온 것뿐이라고, 그는 선을 긋듯 말했다.

누가 뭐랬나.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을까 봐 겁이라도 나신 모양이다.

“왜, 무서워? 또 재워달라고 할까 봐?”

“적당히 해라.”

그래, 그럴 줄 알았어.

강승재의 미간에 어김없이 주름이 갔다. 언제부턴가 나만 보면 인상을 팍팍 써대는데도 가슴이 발랑거렸다. 날카로운 표정, 서늘한 눈빛까지도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었으면 했다.

“눈에 힘 좀 푸시죠, 감독님. 설마 촬영할 때도 이래? 스태프고 모델이고,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겠네.”

강승재는 입을 꾹 다물고 팔짱을 꼈다. 더 이상 말 섞기도 귀찮다, 뭐 이런 건가.

혼자 떠벌리던 원맨쇼가 슬슬 힘에 부쳐갈 때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정말로 1층이었다.

“나 간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거르지 마. 아니면 내가 뭐라도 사다 줄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

“회사로 가?”

“어? 아, 아니… 집으로… 오후 외근은 대부분 직퇴라서.”

갑작스러운 질문에 채원이 말을 버벅댔다.

“그럼 내 차 잠깐 들렀다 가.”

“지, 지금?”

“그럼 지금이지, 내일이겠어? 줄 거 있으니까.”

“으응…. 그러지 뭐. 나야 항상 남는 게 시간이라.”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한심해서 볼이 뜨끈거릴 정도였다.

대답을 정정하고 싶어졌다. ‘응’이라든가, ‘뭐?’라든가, 이런 흔하디흔한 한 글자로.

* * *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리모컨 키를 가볍게 누르자, 가까이에 주차된 매끈한 차량 한 대가 반짝 불빛을 냈다.

강승재의 차가 어디에 있는지 한참 두리번거리던 채원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9년 전 고물을 이곳에서 찾고 있다니.

“잠깐만, 트렁크에서 꺼내줄게.”

“응.”

채원은 뒷바퀴보다 두 걸음 물러선 위치에서 그를 기다렸다. 알짱거리다가 괜히 흠집이라도 낼까 조심스러웠다. 짙은 블루와 그레이의 중간쯤, 근사한 컬러를 덧입은 클래식한 SUV는 엄마가 사는 청주 집보다도 비싸 보였다.

“발 사이즈 몇이야?”

“어?”

“구두, 몇 신냐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채원이 머뭇거렸다. 갑자기 머릿속에 새하얘져 본인의 발 사이즈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 질문이 그렇게 어려웠나?”

“아, 그게….”

난이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이 안 나는데 어떡해 그럼.

바닥에 적힌 숫자라도 확인을 해야 하나, 주섬주섬 신발을 벗으려는데.

235! 막힌 사고 회로가 그제야 뚫렸다.

“보, 보통은 235 신어. 크게 나온 것만 아니면.”

“그럼 일단 신어보고, 둘 중 맞는 걸로 가져가.”

“…어?”

“알아들었으면서 왜 자꾸 되물어? 사이즈 맞는 걸로 가져가라니까.”

승재는 트렁크 한쪽 구석에서 230과 235가 적힌 두 개의 박스를 꺼내 채원에게 건넸다. 눈썹 사이를 여전히 구긴 채로.

“촬영 끝나고 몇 개 얻은 거야.”

그가 채원에게 안겨준 것은 다름 아닌 구두 상자였다.

“협찬이 아니라 선물로?”

“응. 자주들 그래. 스튜디오에 소품으로 써달라고.”

승재는 시답지 않게 답했다. 채원이 힐끔 트렁크 쪽을 살펴보니 정말 그의 말대로 두어 개의 박스가 더 보였다.

“고마워. 내 생각을 다 해주고.”

“네가 구두짝 질질 끌면서 알짱거렸잖아 계속. 그 소리 듣기 싫어 주는 거니까 오해하지 마라.”

말을 해도 꼭 뾰족한 가시처럼 한다, 강승재.

“오해 안 해. 그리고 일부러 구두를 질질 끈 게 아니라 발이 아파서… 안 그래도 하나 사려던 참이었거든?”

채원은 구겨 신은 뒤축을 슬그머니 바로 하며 툴툴거렸다. 물론 상대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지만.

“알겠으니까, 얼른 신어보기나 해.”

촬영 중 잠시 자리를 비운 거란 그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멘 채로 손목시계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는 남자에게 더 이상 한가로운 불만을 터뜨릴 수 없었기에, 채원은 순순히 입을 다물고 구두 박스를 열었다.

“어머, 너무 예쁘다.”

본능적으로 새어 나온 탄성.

상자를 열자마자 질 좋은 가죽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6cm의 블랙 펌프스는 언뜻 보기엔 평범했으나 뒤축에 박힌 동그란 진주만큼은 특별했다. 피라미드 위에 영롱한 알사탕을 콕 박아놓은 듯한, 기하학적인 굽 디자인이었다.

“디자이너 브랜드잖아 이거. 꽤 비쌀 거 같은데…. 근데 진짜 편하다. 가죽도 부드럽고. 235 딱 맞는 거 같아.”

“잘됐네. 그거 신어 그럼.”

채원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얼마간 지켜보던 승재는 나머지 박스를 제자리에 집어넣고 트렁크를 닫았다. 입꼬리 한쪽을 느슨히 올리며.

“아, 쓰레기통은 엘리베이터 옆에 있어.”

“쓰레기통?”

“저거, 버리라고. 설마 가져가서 또 신을 건 아니지?”

승재가 턱을 까딱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헌 구두를 가리켰다. 망가진 뒤축과 지저분하게 색이 바랜 안창은 이미 그 수명을 다한 듯했다.

“버, 버릴 거야. 걱정 마.”

별걸 다 간섭이네. 어련히 버리고 갈까 봐….

채원은 주섬주섬 신발을 주워들었다. 붉어진 양 볼을 들키지 않으려 괜히 더 허리를 굽혔다.

“혹시 월급도 차압당했어?”

낡은 구두를 빈 박스에 담고 있던 채원의 두 팔이 멈칫거렸다.

“차압?”

“윤채원 구두가 한 개뿐이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명품백 쓰레기통에 처박던 애 맞나 싶어서.”

“그땐… 철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철나서 나 찾아온 거고?”

“…….”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그의 말이 정곡을 쿡 찔렀다. 9년 전 정창길에게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발을 디디지 못해 강승재를 붙들려는 건 아니냐고, 채원은 자문했다.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암튼 차압당한 건 아냐. 그냥 돈을 좀 타이트하게 모으느라….”

“아님 됐어. 무슨 사연인진 모르겠지만, 급하면 류정혁한테라도 의논해 봐. 정황상 1, 2 금융권 대출은 아닌 거 같은데, 이자 불어나면 그땐 더 감당하기 힘….”

“내 문제라고 했잖아! 알아서 한다고 내가!”

채원의 날 선 대답과 함께 주차장에는 어색한 정적이 깔렸다. 승재는 그녀가 차라리 언성을 높여주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녀 말이 맞다. 친구도 뭣도 아닌 상대의 사생활을 왜 그리 파헤치려 드는가.

생뚱맞게 구두는 왜 줬는데. 줄줄이 잡아놓은 촬영 스케줄은 또 뭐고.

윤채원 이름 석 자에도 치를 떨며 분개하던 지난날들이 무색해질 만큼, 또다시 그녀에게 자신의 영역을 내어주는 꼴이라니. 배알도 없이.

“아, 강승재 미안… 그러니까 내 말은….”

“됐어. 이번엔 내 실수야. 미안하다.”

승재는 채원의 말을 끊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이나 입을 옴직대던 채원은 결국 문장을 끝맺지 못한 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신속한 사과와 함께 바로 선을 그어버리는 그가 야속했다.

강승재의 말처럼, 번쩍번쩍 광이 나는 커다란 원형 쓰레기통이 엘리베이터 문 옆에 놓여 있었다. 손에 든 박스를 입구로 밀어 넣자 스테인리스 바닥에 텅, 부딪히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쓰레기통보다 제가 버린 구두가 더 낡고 더러우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마저 밀려들었다.

“1층에서 내릴 거지?”

“응.”

엘리베이터에 먼저 오른 승재는 1층 로비와 스튜디오가 위치한 6층 버튼을 차례로 눌렀다.

“미팅은 오늘이 마지막인 걸로 알고 있는데. 전시회 이틀 앞당겨졌단 소식은 들었을 거고.”

“응, 들었어.”

“23일 밤에 몇 시부터 설치 시작인지 한 번 더 공지 줘. 스태프들 데리고 시간 맞춰 갈 테니까.”

“응….”

“난 당분간 촬영 작업 때문에 바쁠 예정이니까 무슨 일 있으면 조 실장한테 연락해. 그편이 빠를 거야.”

“응….”

기운 빠진 목소리가 ‘응’ 소리를 너덧 번쯤 흘렸을 때, 1층 버튼이 회색으로 바뀌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채원은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안 내릴 거야? 1층인데.”

열림 버튼을 누른 승재가 의아한 듯 채원을 바라보았다. 미팅 룸에 지갑이라도 두고 왔나. 그녀는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그래? 뭐 잃어버렸어?”

“…….”

“윤채원, 나 시간 없다니까.”

“승재 씨도 가?”

한참을 망설이던 채원의 입술이 힘겹게 달싹거렸다.

“뭐? 어딜?”

승재가 질문의 의도를 몰라 되물었을 때, 채원이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마스 VIP 행사.”

“아, 난 또 뭐라고.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물어.”

“일반인 공개도 아니고, 프라이빗 모임이라며.”

“그러니까 더 가야지. 주최 측 참여는 필수이기도 하고, 게다가 돈 많으신 분들이 기부금까지 걷어 준다는데.”

“난 못 가, 그날.”

커다란 눈동자가 무겁게 일렁였다.

“승재 씨도… 안 갔으면 좋겠어.”

* * *

띠리링.

요란하게 울리는 집무실 벨 소리에 정혁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이 시간에.

늦은 밤 웬만해서는 울릴 일이 없는 대표실 전용 라인이었기 때문에 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네. 류정혁입니다.”

「대표님, 보안실입니다. 죄송하지만 잠깐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1층에 어떤 술 취한 여성분이 대표님을 뵙겠다고 난리를 쳐서….」

“그게 무슨 소립니까?”

「이름이 윤채원 씨라고….」

“…아는 사람 맞습니다. 10층까지만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뵙죠.”

정혁은 안경을 벗고 눈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후우, 기나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마 십중팔구는 온전한 정신이 아닐 것이다. 연락도 없이 쳐들어와 민폐를 끼칠 윤채원이 아니었으니.

불과 3시간 전, 다짜고짜 걸려온 강승재의 전화로 짜증 지수가 한껏 치솟은 정혁이었다.

‘내가 윤채원이랑 엮이기 싫다고 몇 번을 말했어! 막무가내로 구는 거 받아주느라 지긋지긋하다 아주. 전시회만 끝나면 다신 안 볼 거야. 그러니 너도 더 이상 윤채원 바람 넣지 마. 걔가 나한테 미련이 남았든, 아님 벗겨 먹을 게 더 남아있든, 마음 정리시키라고. 원인 제공을 한 놈이 책임을 져야지. 알겠냐?’

자꾸 원인 제공자라 칭하는 통에 불쑥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겨우 참아냈다.

9년 전 웨스트우드 맨션에 자기를 끌어들인 것, 9년 후 스튜디오K로 윤채원을 끌어들인 것 모두 류정혁의 탓이라는, 강승재의 억지 논리는 초지일관 엿 같았지만, 듣고 있다 보면 또 묘하게 맞는 말이라 강한 반박을 내어놓진 못했다.

오늘따라 번갈아 왜 이러는 거야. 출장 전까지 끝내야 할 일이 산더민데.

“우리 류 대표님…. 얼굴 보기 차암 힘들다, 힘들어….”

복도를 걸으며 강승재와 윤채원을 중얼중얼 씹어대고 있는데, 가까이에서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예상대로 채원은 상당히 취해 있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보안요원의 부축을 받은 상태였다.

“대표님 아시는 분이 정말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걱정 말고 내려가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할….”

“회사 대표님께서 바빠도 너어무 바쁘시니까. 이렇게 쳐들어와야 날 만나주지. 미안. 좀 취해서… 많이 취했거든 내가. 술이 들어가니까 강승재가 떠오르고… 강승재 다음으론 류보리가 떠오르고, 류씨 하니까 류정혁이… 근데 강승재랑 보리한텐 갈 수가 없고… 그래서….”

보안요원의 어깨에 축 늘어져 있던 채원이 휘청거리며 풀썩 정혁에게로 쓰러졌다.

“야, 채원아…. 정신 좀 차려 봐. 윤채원!”

“으음, 목말라. 물 줘… 무울.”

느릿느릿 이어지는 물 타령. 다행히 정신줄을 내려놓진 않은 모양이다.

“그… 그럼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도움 필요하시면 바로 연락 주십시오.”

“네, 수고하셨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보안요원을 돌려보낸 정혁은 어금니를 꽉 문 채 채원을 부축했다.

“너 술 취한 걸 다행으로 여겨. 맨정신이었으면 내가 무슨 소리 했을지 모른다.”

“냉정한 놈.”

“일어나. 데려다줄게.”

“강승재는… 원래 안 그랬는데… 따뜻하고 착하고… 그랬는데… 류정혁이랑 오래 붙어 있더니… 너보다 더한 놈으로 변했어. 이게 다 대표님 책임이시라고요. 알아?”

보자 보자 하니까 이놈들이. 쌍으로 책임 전가를.

“너 힘든 건 알겠는데 나도 정말 여유가 없어 요즘. 일단 일어나. 차 태워줄 테니까.”

정혁은 인상을 잔뜩 구기며 채원을 잡아끌었다.

“야, 똑바로 못 걸어?”

“음, 졸려….”

“차에서 자. 지금은 눈 똑바로 뜨고.”

그래. 답지 않게 오지랖 부린 내 잘못이다. 미국 노숙자가 되든, 대한한국 백수가 되든, 신경 끄고 살았어야 하는 건데.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면 자아 성찰이라도 해야 했다. 끊었던 담배 생각이 절실해졌다.

* * *

밤샘 작업을 마치고 침대에 털썩 쓰러진 승재는, 류정혁의 전화 한 통을 받은 이후 숙면을 포기해야 했다.

‘윤채원 그저께 회사 왔었어. 한밤중에 만취 상태로.’

덕분에 여자 친구의 오해를 사버렸으니 출장 다녀올 동안 교통정리 깔끔하게 해놓으라는, 부탁을 가장한 명령까지.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JH 류 대표는 현재 열애 중이었다. 몇 달 동안 감쪽같이 사람을 속이고 여자를 만나더니, 한차례 스캔들을 터뜨린 이후로는 보란 듯이 티를 내고 다닌다. 심지어 승재도 알고 있는 상대였다. JH 라헨느 브랜드 신인 모델. 촬영을 갈 때마다 대표한테 깨졌다며 훌쩍이길래, 아무리 회사 전속이라지만 저렇게까지 구박을 해도 되나 혀를 내둘렀는데, 사실 그녀에게 남다른 감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비뚤어진 놈. 좋으면 잘해줘야지 왜 성질을 부려.

[마포구 성미산로 5길, 일월맨션 203호. 윤채원 원룸 주소야.]

[이걸 왜 나한테 보내는데?]

[결자해지하라고. 기내 안이라 폰 끈다.]

[결자해지 같은 소리 하네. 그렇게 따지면 원인 제공자가 마무리하는 게 맞지. 안 그래?]

칼같이 휴대폰을 꺼놓았는지 류정혁은 더 이상 답이 없었다.

깨끗한 흰 천장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어도,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봐도, 복잡한 머릿속은 좀처럼 정리가 되질 않는다.

왜 그토록 과음을 한 걸까. 이틀 전이면… 분명 스튜디오 미팅 왔던 그날인데.

‘넌 왜 못 가는데?’

‘빨간 날이니까. 휴일.’

‘뭐?’

승재는 귀를 의심했다. 25일 VIP 행사를 무턱대고 가지 말라 조르기에 무슨 거창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미술관 사람들까지 합치면 어차피 진행 요원은 충분할 텐데… 조 실장님 대신 보내고 승재 씨는 나랑 있으면 안 돼?’

‘윤채원, 농담도 상황 봐 가면서 해라. 요즘 스튜디오 직원들 하루 일과가 어떤지 알아? 연예인들 비위 맞추는 것도 모자라서 고양이 간식 사다 바치고, 개똥 치우다 퇴근해. 아무리 자선 사진전이라지만 스태프들은 무슨 죄냐? 망할 오지랖 때문에 일 크게 벌인 건 내 탓 맞는데, 그래도 최소한 눈치는 있어야지.’

‘아니, 내 말은… 그동안 승재 씨 고생한 거 다들 알 테니까 그날은 쉬어도 누가 뭐라 안 하겠지 싶어서. 크리스마스 기분도 낼 겸, 오랜만에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도….’

‘섹스 몇 번 했다고 엉겨 붙지 좀 마.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만나서 영화 볼 사이는 아니잖아.’

말이 격하게 터진 감은 있었으나 비위 좋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요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황당했으니까.

‘가, 같이 일하는 파트너끼리 영화관도 못 가나, 뭘 또 그렇게….’

‘엘리베이터 너 때문에 계속 1층인 거 안 보여? 얼른 내려. 개념도 정도껏 없어야 받아주지.’

그녀를 상처 준 건 내 탓이 아니다. 촬영 중 잠깐 자리를 비운 터라 안 그래도 예민함이 극에 달해 있는데, 먼저 건드린 건 윤채원이라고.

“…주량도 약한 게, 뭘 잘했다고 술을 퍼마셔.”

일요일 아침부터 문 연 해장국 집이 있으려나. 술 마신 게 벌써 이틀 전인데 이제 와서 해장국이 무슨 소용일지. 아니 것보다, 내가 왜 윤채원 밥 걱정을…. 실컷 당하고도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려서는.

잡생각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자 눈을 감는 순간.

‘마포구 성미산로 5길, 일월맨션 203호.’

놀라울 정도의 암기력이 저도 모르게 발휘되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승재는 머리칼을 거칠게 흩트렸다. 류정혁이 대뜸 보내준 생소한 주소 한 줄은 이미 머릿속에 박혀버린 지 오래.

협탁 위에 얌전히 올려진 차 키마저 그의 신경을 줄기차게 건드리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려 해도 자꾸만 알짱거려 외면할 수가 없는. 발갛게 피가 맺힌 윤채원의 뒤꿈치처럼.

“후우, 성가시게 정말… 단 한 시간을 못 자게 하네.”

벌떡 몸을 일으킨 승재는 긴 한숨과 함께 차 키를 손에 쥐었다. 육중한 매트리스가 남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출렁인다. 그리고.

철컥.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현관을 나섰을 땐.

“아, 승재 씨….”

참 어처구니없게도, 제 발로 찾아온 윤채원이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 * *

“지, 집에 있었구나. 좀 더 기다렸다가 벨 누를까 했는데… 시간이 좀 이르기도 하고… 일요일이라 왠지 늦잠 잘 수도 있겠다 싶어서….”

언제부터 문 앞을 지키고 있었던 걸까.

하도 기가 막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더니 무안했나 보다. 채원이 슬쩍 승재의 시선을 피한다. 지루한 말들을 길게 늘이며.

“무슨 일이야?”

채원이 이곳을 찾은 이유야 특별할 게 없겠지만, 승재는 일부러 난처한 질문을 던졌다.

“어? 아니 그냥… 우연히 근처 지나다가, 갑자기… 보리 생각이….”

참 단조로운 핑계였다. 이제 겨우 오전 9시. 마포 주민이 한강 너머 동네를 우연히 지나쳤다 하기에는 시간과 요일이 영 맞지 않았다.

“들어와.”

승재는 무심히 대답하곤 등을 돌렸다. 그녀를 더 마주하다가는 버럭 성질을 낼 것 같았다. 이틀 동안 내리 굶었는지 얼굴이 티 나게 핼쑥했다.

술을 처마셨으면 하다못해 라면에 햇반이라도 말아먹어야 할 거 아냐. 원룸 꼴이 어떨지 안 봐도 빤하다. 있는 거라곤 샌드위치와 주스, 커피 따위가 전부겠지.

“보리야, 아유 예뻐. 누나가 그렇게 좋아? 꼬리 살랑살랑 흔드는 것 좀 봐.”

채원이 현관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보리가 꼬리를 치며 달려 나왔다. 하지만 웬일인지 집주인이 잠잠했다. 보리를 품에 안고 어르고 난리를 치는데도, 귓가가 허전할 정도로 그는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실에 채원을 남겨두고 침실 쪽으로 성큼성큼 방향을 튼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한 강승재.

“어디 가?”

“침실.”

“침실? 더 자게?”

“나 어제 한숨도 못 잤어. 스튜디오에서 밤새느라.”

“아….”

“보리랑 얌전히 놀다 가라. 오늘은 너랑 말씨름할 기운 없으니까.”

할 말을 마친 승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몇 줄씩 선을 긋다 못해 아예 두꺼운 벽 하나를 사이에 세우려 하나 보다.

“보리야, 너랑 둘이 있을 때도 형 저렇게 차갑니? 누가 싸우러 왔댔나, 그냥 잠이 안 와서 온 건데….”

채원이 시무룩하게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래도 당장 쫓아내지 않은 게 어디냐며, 보리의 얼굴에 오른 볼을 비볐다. 보드라운 솜뭉치가 피부에 닿자, 이틀간 그녀를 괴롭히던 두통과 불면이 발아래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꺼풀. 비로소 졸음이 쏟아졌다.

* * *

손에 쥐고 있던 차 키를 침대 위에 던진 승재는 리클라이너에 털썩 몸을 기댔다. 눈썹 사이가 깊게 팼다. 자야겠다며 일단 문을 닫고 들어오긴 하였으나, 윤채원이 거실을 차지한 상황에서 편히 두 다리를 뻗을 수는 없었다.

평소처럼 보리를 낚아채며, 주말에 웬 민폐냐, 돌아가라 하면 그만인 것을.

“후우, 병신같이 거절을 못 해. 왜….”

가죽 등받이에서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뒤척이기를 10분째. 승재는 결심한 듯 두 발을 딛고 문손잡이를 내렸다.

지금이라도 그녀를 내보내는 게 최선이었다. 가까이 두고 중심 잡을 자신이 없으면 멀찌감치 떼어 놓기라도 해야지. 이런 애매한 줄타기는 서로의 살을 갉아먹을 뿐이라고, 흔들리는 중심축을 애써 다잡으려는데.

“…….”

거실 전경을 바라보는 순간 승재의 말아 쥔 주먹이 허탈하게 풀렸다.

품 안에 보리를 꼬옥 끌어안은 채로 고른 숨을 뱉는 윤채원. 거실 소파가 제집 침대인 양, 쌕쌕 잘도 자고 있다.

요즘 그녀만 보면 울컥 부아가 치밀어 큰일이다.

밥은 제때 챙겨 먹고 다니는지, 회사에서 건강검진은 꼬박꼬박 해주는 건지, 원룸 보일러는 제대로 작동되는지, 시시콜콜한 질문들이 혀끝에 맴돌아 죽을 맛이고.

한참을 망설이던 승재는 침실로 들어가 담요를 들고 나왔다. 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워 내칠 만큼 모질진 못했다. 채원의 자그마한 몸 위로 몽실몽실한 양털 담요를 덮어주었을 때, 양팔에 갇힌 보리가 답답한 듯 꼼틀거렸다. 손을 뻗어 슬쩍 빼내 볼까 하였으나 괜한 오해를 살까 봐 그만두었다.

풍성하고 기다란 눈꺼풀. 안 그래도 흰 피부가 유난히 창백하게 느껴진다.

꼿꼿한 자존심은 죄다 어디에 버려두었는지 아무리 몰아세워도 생글생글 천연하게 웃기만 하니. 이 구제불능을 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린 승재는 성가신 기척에 발을 떼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추욱 늘어난 니트 자락이 그의 걸음을 붙잡았다.

“승재 씨….”

나른하게 이어지는 윤채원의 음성.

“나, 안아 줘….”

보란 듯이 콧소리를 섞으며 엉기는 칭얼거림에 다시금 불뚝 화가 솟구쳤지만, 치받는 감정과는 별개로 뜨거운 열이 끓었다.

“윤채원.”

보리의 바르작거림에 잠이 깬 것인지, 아님 처음부터 자는 척을 했던 것인지, 그딴 사실 파악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해.”

그녀를 질책하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나긋하게만 들려, 채원은 하마터면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나 때문에… 힘들어?”

“응.”

“나 많이 밉지. 막 꼴도 보기 싫고….”

“잘 아네.”

“그럼 나… 돌아갈까?”

“…….”

굳게 다물린 남자의 입술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래. 가.’ 세 글자면 종료될 상황을 무엇이 아쉬워 이토록 망설이는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해 이성이 흐려진 게 틀림없었다.

하필 류정혁의 전화를 받은 직후라 빌어먹을 옛 감정이 일시적으로 올라왔을 뿐. 심각한 의미 부여는 금물이라고 수차례 마음을 다잡아도.

잘 되지 않는다. 윤채원을 매몰차게 내치는 것이. 그녀를 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일이.

“내가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왔나 보다. 승재 씨 밤샘 작업 한 줄도 모르고… 얼른 눈 좀 붙여. 보리랑 많이 놀았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는 게….”

승재가 채원의 손목을 슬쩍 잡아끌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승재 씨….”

“네 멋대로 왔다 갔다….”

“미, 미안.”

“또, 그 소리.”

“아, 맞다. 내가 깜박했어. 미….”

연거푸 새어 나오던 사과가 남자의 입술 새로 스며들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조금 더 치켜들어 각도를 틀었다. 촉촉한 혀가 부드럽게 밀려들자, 채원은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내렸다.

지나친 달콤함에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눈을 뜨면 강승재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까 봐. 비좁은 원룸 안에 갇힌 스스로의 모습이 서러워 또다시 줄줄 눈물을 흘리고 싶진 않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 아프잖아.”

비딱한 어투에 스르륵 눈이 떠진다.

“키스는 그동안 주력이 아니었나 봐?”

“하아, 무슨 말을 그렇게.”

“혀에 힘 빼. 입 더 벌리고. 별걸 다 가르치게 만들어.”

채원은 양 볼을 붉히며 입술을 열었다.

다행이었다. 까칠한 남자의 음성, 주름 잡힌 미간, 언뜻 스치는 콧등의 감촉까지. 눈을 떠도 여전히 그대로인 강승재.

얼마든지 몰아세워도 좋았다. 키스를 못 한다는 구박을 받았을 땐 제법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9년 전부터 지금까지 쭈욱, 나는 너 하나만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다고. 다른 남자는 마음에 담을 여유도, 그럴 의지조차 없었다고.

비록 지금은 말해줄 수 없지만, 언젠가는 털어놓을 수 있기를. 오늘처럼 꿈이 아닌, 너를 마주한 현실에서.

툭. 채원의 스웨터와 팬츠가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속옷에 좀 더 신경을 쓰라던 일전의 가시 돋친 말 때문인지, 채원은 황급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브래지어를 살폈다.

쓰레기통 속에 처박은 낡은 에나멜 구두만큼은 아니어도, 바랜 색상과 늘어난 컵 디자인은 누가 봐도 사용감이 있어 보였다. JH 대표를 친구로 두고도 여태 속옷 한 벌을 못 얻었다니, 실소가 터진다. 사이즈 알리는 게 어쩐지 민망하여, 원하는 디자인을 골라보라는 류정혁 말을 흘려들은 게 잘못이었다.

사실 그녀의 서랍 속 란제리들은 대부분 상태가 비슷했다. 서일그룹의 돈으로 편히 살아온 세월을 한시라도 빨리 갚기 위해, 눈에 독기를 품고 달린 탓이었다.

“여긴 왜 이래?”

잘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강승재의 시선은 오래된 속옷이 아닌, 그녀의 물집 잡힌 오른팔에 꽂혀 있었다.

“너 설마, 또….”

“아, 아냐, 그런 거. 포트에 데었어. 김 나오는 줄 모르고 팔 스쳤다가….”

서늘해지는 눈동자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채원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지어낸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술에 취한 채로 물을 끓이다 벌어진 작은 사고였다.

“나이가 몇인데 물 하나를 제대로 못 끓여?”

“실수였다고…. 그저께 술을 좀 많이 마셨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자랑이다.”

“언제까지 잔소리만 할 건데… 속옷만 달랑 남겨 놓고… 악취미야 진짜.”

채원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남자의 능숙한 손놀림에 어느샌가 톡 풀려버린 브래지어는 자꾸만 흘러내려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강승재는 니트와 슬랙스 중 그 어느 쪽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가리지 마. 상대 취향은 존중해줘야지.”

“그럼 승재 씨도 벗어.”

“안 되겠는데. 그건 취향이 아니라.”

“못됐어.”

“윤채원만 할까.”

승재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채원의 양팔을 잡아 내렸다.

“가슴 예쁜 걸 다행으로 여겨. 안 그랬으면 너, 지금쯤 지하철 탔을 거야.”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중얼거림을 낮게 흘린 승재는, 고개를 내려 탐스러운 가슴을 깊게 빨았다.

“읏….”

채원은 제 속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꼭 물었으나, 민망한 신음은 예외 없이 터져 나왔다. 타액으로 반지르르해진 연분홍빛 유두는 남자의 혀가 닿았다 떨어질수록 그 색이 더욱 짙어졌다.

불규칙하게 들썩이는 맥박의 떨림을 오롯이 전해 받은 승재는, 채원을 몇 걸음 뒤로 밀어 소파에 앉힌 후 매끄러운 실크 속옷을 발목 아래까지 끌어 내렸다.

“다리 더 벌려.”

“흐으, 싫어….”

“힘 빼게 하지 말고, 얼른.”

마지못해 두 다리가 적나라하게 벌어졌다. 사실 크게 저항을 할 생각은 없었다. 강승재의 입술이 닿은 가슴 부위만 예민해진 건 아니었으니. 주체할 수 없이 번지는 자극으로 채원의 내부는 이미 축축이 젖어 있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여린 살을 쓸어내리자 새하얀 허벅지가 파들거렸다.

“젖었네. 뭘 했다고.”

“아냐… 읏, 승재 씨가 잘 못 본….”

“아니기는. 들려줘? 윤채원 얼마나 음란한지?”

하지 말라고 두 팔을 뻗어 밀어내 봐도 단단한 남자의 손목은 여유롭게 제자리를 버티며 채원의 속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으, 읏….”

강승재의 얄궂은 손가락은 그녀의 곳곳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조금씩 방향을 틀며 내벽을 샅샅이 훑던 손끝이 깊숙한 지점을 진하게 문질렀다. 두 번, 세 번, 마찰이 겹칠 때마다 찌르르 전율이 인다.

그가 말한 음란함은 간간이 터지는 채원의 신음이 아니었다. 소파 가죽이 흥건해질 정도로 액이 흘렀다. 손목이 앞뒤로 피스톤질을 할 때마다 질척대는 소리가 채원의 새하얀 피부를 화르륵 달아오르게 했다.

“하아, 그만, 제발 좀….”

“정말 그만해?”

“더는, 못 견딜 것 같… 흐읏….”

그녀가 문장을 끝맺기도 전에 승재의 동작이 먼저 뚝 끊겼다.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가 당황스러웠는지, 거친 숨을 토해내던 채원이 얼굴을 겨우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아, 왜….”

“그만하라며.”

“뭐? 아니, 나는….”

온통 붉어진 얼굴로 채원이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그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수치심이 치솟는 와중에도 허벅지 사이는 여전히 뜨겁다는 게 또 억울해서.

“툭 하면 짜는구나 윤채원. 성격 많이 변했네.”

“제발….”

“제발, 뭐?”

“왜 자꾸 나한테… 그런 거 시키고….”

이젠 강승재에게 욕을 날릴 수도, 성질을 부릴 수도 없는 입장이니, 울 수밖에. 울기라도 해야 민망함이 그나마 덜어질 테니까.

“승재 씨….”

초조하게 뛰는 맥박. 입술이 마를 정도로 갈증이 났다.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일 초라도 빨리 그의 손길이 절실했다. 터질 듯 부푼 음핵과 액으로 범벅된 입구는 절정을 목전에 둔 채 발름거렸다.

“원하는 게 있으면 똑바로 말을 해. 그래야 내가 알아듣지.”

“제발, 조금만 더, 만져… 하윽!”

드로어즈를 반쯤 내려 발기된 페니스를 끄집어낸 승재는 잘록한 채원의 허리를 커다란 손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두꺼운 기둥이 비좁은 입구 사이에 맞물려 열을 뿜었다.

“먹는 법 그새 잊었어? 위든 아래든, 읏, 힘을 빼야… 들어갈 거 아냐.”

승재가 질책하듯 채원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자 경직되어 있던 하반신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붉은 살을 짓이기며 밀려든 성기는 아랫배가 빠듯할 정도로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손가락보단 이게 더 낫지 않겠냐고, 승재는 허리를 쳐올리며 빈정댔지만, 전혀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그만큼, 강승재의 목소리는 감미롭고 근사했다.

엉거주춤 소파에 걸쳐진 채원의 몸이 주르륵 카펫 위로 미끄러졌다. 핏줄이 툭 불거진 손등으로 매끈한 두 다리를 활짝 젖힌 승재는 두꺼운 성기를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가 허릿짓을 거듭할수록 강한 압박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러면서도 제 몸을 짓누르는 남자의 무게감이 싫지 않아, 강승재가 영원히 내 안에 들어와 있었으면 하는 엉뚱한 욕심이 머릿속 가득 피어올랐다.

“윤채원….”

섹스의 끝자락쯤, 강승재는 느리고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글픈 여운에 초조함을 느끼며 채원은 이어질 뒷말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문 채 파정했다.

질문을 하려던 걸까? 아님 그저 의미 없는 혼잣말이었을까.

알고 싶기도,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듣고 싶은 말이 아닐 바엔, 차라리 모른 척 넘기는 편이 나았다.

윤채원의 그릇은 딱 그 정도 크기였다.

붐플러스

관련자료

널 버릴 자격 03. 교착
  
그누보드5



Copyright © FUNB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