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 나루토카지노 보스 판도라 쿵푸벳 네임드 볼트카지노 라바카지노 업카지노 골든 소닉카지노 코어카지노 프라그카지 히어로 텐카지노

02. 모순

본문

쿵푸벳

#02. 모순

* * *

벌써 자정이었다.

승재는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 거실 쪽 화장실은 일부러 비워두었다. 굳이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어련히 알아서 사용하겠거니 했다.

타월은 충분했고 보디워시와 샴푸도 눈에 띄는 곳에 잘 두었다.

청담역과 한강을 끼고 있는 승재의 오피스텔은 전망과 위치가 좋아 모임의 장소로 자주 낙점되었다. 친구나 가까운 지인들을 위해 방 하나와 화장실을 손님용으로 꾸며 놓았으니, 윤채원이 수납장만 제대로 열었다면 새 칫솔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아예 칫솔에 치약까지 짜주지 그러냐.

자조 섞인 한숨이 적막한 침실 공기를 갈랐다. 자려고 누웠으나 도통 눈이 감기질 않는다. 윤채원이 씻고 가든 그냥 가든,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닌데도, 왜 이리 신경이 거슬리는지.

승재가 결국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리칼을 거칠게 흩트리며 맨발로 대리석을 디뎠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나질 않아 확인차 나가보는 것뿐이라고.

늘 그렇듯 자기합리화는 필수였다.

달칵.

조심스럽게 문손잡이를 돌린 승재는 거실로 몇 걸음 발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

말아 쥔 남자의 주먹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색색 고르는 숨소리.

거뭇거뭇 얼룩진 마스카라.

소파에 곤히 잠든 그녀가 보였다.

옷만 겨우 챙겨 입고서, 화장조차 지우지 않은 채로.

* * *

“으음….”

채원이 눈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몸살기가 도는지 머리가 무겁고 여기저기가 아팠다.

뭐지. 소파에서 잠이 든 건가.

비몽사몽간에 바라본 거실은 어쩐지 낯설었다.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과 그레이톤 벽지. 작업실을 연상케 하는 묵직한 원목 테이블. 한쪽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카메라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어제의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었다.

“미쳤어, 윤채원….”

거울을 보지 않아도 꼴이 어떤지 충분히 짐작 갔다. 눈물과 땀으로 뭉개진 파운데이션, 마스카라 따위가 딱딱하게 굳어져 피부를 옥죄었다. 칠칠치 못하게 그대로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강승재의 거실에서.

지잉, 지이잉.

숄더백 속 휴대 전화가 여러 번 진동했다. 가방 속을 뒤적거리며 무심결에 쳐다본 벽시계에 잠이 확 달아났다. 오전 11시 10분. 아침보다는 점심에 더 가까운 시간이었다.

“여보세요. 아, 팀장님…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죄송합니다. 연락을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채원은 목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회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어이구, 윤 대리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보네. 요즘 사진전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지? 앞으로 더 바빠질 텐데, 며칠 휴가 쓰고 미리 몸 관리 하는 것도 방법이야. 일정 임박해지면 아파도 못 쉬니까.」

잠긴 목소리 때문인지, 무단결근을 했는데도 그녀를 대하는 팀장의 음색은 나긋하기만 하다.

연말 모금액 규모에 따라 회사의 존망이 갈리게 생겼으니, 그 키를 쥐고 있는 채원을 함부로 부려먹을 수도 없는 노릇. 요즘 POA의 직원들은 그녀의 보고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스튜디오K와의 다음 미팅은 언제인지, 일 진행은 어찌 되어 가는지, 윤채원의 지인 찬스 효과를 막연히 믿고 있는 그들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가 따로 없었다.

“네, 감사합니다. 병원 진료 끝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후우.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채원은 휴대폰 종료 버튼이 제대로 눌렸는지 재차 확인한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라도 엉킨 과거를 풀어보려 강승재를 찾은 것인데 만남이 거듭될수록 왠지 모르게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어젯밤, 남자의 살덩이와 맞닿았던 여린 부위가 불에 지진 것처럼 뜨겁고 아렸다. 얼얼하게 부은 것 같기도 했다.

현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두 시간 가까이 그를 기다리던 어제의 기억. 발을 들이자마자 숨 돌릴 새 없이 그에게 매달리고, 눈물을 흘리며 신음하였으니… 그녀가 쓰러지듯 잠이 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리 그래도.

“잠은 집에 가서 잤어야지….”

강승재가 얼마나 나를 어이없게 봤을까.

고요한 주변은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 일찍 나가봐야 한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수면제를 지겹도록 달고 살았는데, 그가 나가는 것도 몰랐다. 강승재의 모진 언행이 숙면을 도와준 건가 혹시.

채원은 부스스한 머리를 하나로 묶고 바닥에 떨어진 머플러를 주워 목에 둘렀다. 세수라도 대충 하고 갈까 짧은 망설임 끝에, 그녀는 바로 코트를 챙겨 입었다.

빈집에서 마음대로 욕실을 사용할 만큼, 여유롭고 뻔뻔한 성격은 아니었다. 강승재 앞에서 죽을 힘을 다해 애쓰고 있을 뿐.

“…….”

신발장 앞에 벗어놓은 구두를 무심코 내려다보던 채원이 숄더백을 고쳐 메다 말고 멈칫거렸다.

‘방향이….’

푹 꺾인 뒤축의 모양새가 바르게 잡힌 구두는, 그녀가 신기 좋은 방향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절대 강승재의 배려일 리 없다. 내가 어제 돌려놓았겠지. 무의식중에, 습관처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헛된 희망은 위험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이벤트 기획팀, 최민주 대리입니다.”

스튜디오K 미팅룸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아, 윤 대리님은….”

“윤 대리 내일까지 휴가라 제가 대신 왔습니다. 수정된 기획안 오늘까지 꼭 컨펌 받아가야 해서요.”

“아, 그렇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강 감독님 곧 오실 겁니다.”

조 실장이 웃으며 미리 준비한 차를 최 대리에게 건넸다.

삭막한 미팅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윤 대리가 다른 직원을 보낸 줄만 알았던 조 실장은, 그녀가 휴가라는 얘기에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독님, POA랑 콜라보 진행하는 거, 영 별로신가 봐요?’

‘왜?’

‘아니, 미팅 때마다 날카로워지시길래.’

‘딱히 그런 건 없는데.’

‘맘에 안 드셔도 살살 좀 해주세요. 윤 대리님 표정 완전 굳어서, 제가 다 민망할 정도라고요.’

미팅 전 넌지시 조언을 건네 봐도, 어김없이 고압적인 언행을 쏟아내는 대표로 인해 진땀을 빼던 조 실장이었다. 강 감독의 이미지가 와전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막상 일해 보니 스튜디오K 대표 성격이 까다롭고 괴팍하다더라, 혹 소문이라도 난다면, 자선 전시회를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달칵. 회의실 문이 열리고 승재가 곧 모습을 비쳤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상대를 무심하게 지나치던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 감독님. 여기는 이벤트 기획팀 최민주 대리님…. 윤 대리님 휴가라 대신 오셨다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최민주 대리입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최 대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아, 네… 강승재입니다.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편히 앉으세요.”

예의 바른 미소를 보인 승재는 맞은편 자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바쁜 시기에 갑자기 휴가라니. 사전 통보도 없이.

“몸살이 심하게 났는지 갑자기 휴가를 내서, 윤 대리가 따로 말씀 안 드렸죠? 다음 주엔 아마 복귀할 겁니다. 오늘만 양해 부탁드릴게요.”

최 대리의 부연 설명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풀리긴 하였으나, 이번엔 애써 회피 중이던 죄책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소파에서 잠이 든 그녀에게 담요 한 장 덮어주지 않았던 며칠 전 일이 승재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지, 속도 없이 튀어나오려던 질문을 가까스로 눌러 삼켰다. 얄팍한 동정이든 죄책감이든 뭐든, 어쭙잖은 관심은 금물이었다.

“감독님께 먼저 상의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전시회장 위치를 광화문 SJ나 코엑스 청송으로 선정할 경우, 전시 기간이 많이 줄어들게 될 텐데 괜찮으실까요? 예약 가능한 날짜도 많지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 대관료가 턱없이 비싼 탓에, 일산과 광화문만 비교해 봐도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나서… 정말 죄송합니다. 예산팀과 여러 번 회의를 거쳤지만 3일 이상은 도저히 무리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니면, 장소를 조금 융통성 있게 잡는 대신 전시 기간을 1-2주로 늘리는 방법도….”

“지하철과 더 가까운 쪽이, 청송보단 SJ 아닙니까?”

“네? 아… 광화문 SJ미술관이 아무래도, 역 바로 앞이긴 합니다만….”

“그럼 거기로 해주세요. 하루든 이틀이든, 기간은 상관없습니다.”

승재의 단호한 요구에 최 대리는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래도 하루는 너무 짧지 않을까요?”

“모금액 때문에 그러시죠?”

채원을 대할 때처럼 무례한 어투는 아니었으나 승재는 여전히 직설적이었다. 얼떨결에 정곡을 찔려버린 최 대리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습니다.”

왜 윤 대리가 병이 났는지 알 듯했다. 미국서 활동한 포토그래퍼라기에 자유분방한 영혼인 줄 알았더니.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띤 이 남자는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민망하지만 저희 단체 사정이 요즘 좋지 못해서. 목표로 잡아놓은 금액을 채우기 위해서는 최대한 날짜를 길게 뽑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장소가 서울 외곽이더라도….”

“그래서 도심으로 잡아 달라 말씀드렸던 겁니다.”

윤채원을 돕기 위함은 아니다. 시작한 일은 완벽히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빌어먹을 성격 때문이었다.

“네?”

“광화문 SJ미술관으로 무조건 픽스해 주십시오. 날짜는 주말이면 더 좋습니다.”

승재는 차분하고 단단한 톤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POA 모금액, 제가 달성시켜 드리겠습니다.”

상대가 윤채원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

* * *

“늦어서, 하아, 죄송… 합니다.”

채원이 숨을 헐떡이며 승재를 향해 뛰어왔다. 사과는 집어치우라는 경고를 귓등으로 흘려버렸는지, 미안하다 소리가 습관이 된 모양이다.

광화문역 1번 출구.

먼저 미술관에 가 있겠단 문자를 보내려던 승재는 짧은 한숨과 함께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며칠을 앓은 걸까. 티가 날 정도로 수척해진 상대에게 무어라 쏘아붙일 수도 없었다.

“조 실장님은….”

“혼자 왔어. 조 실장은 스튜디오에. 오래 비워둘 수 없어서.”

“아, 그렇구나….”

숨을 고르며 조 실장이 동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채원이, 그를 따라 어색한 반말로 문장 끝을 흐린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암묵적인 존대가 익숙해져 있었지만, 단둘이 마주한 자리까지 극존칭을 남발하는 것도 우습긴 했다.

“갈까?”

“응. 잠깐만, 역에서 2분 거리라고 했는데….”

“그쪽 아니야. 여기, 이 건물.”

눈짓으로 미술관 위치를 알린 승재가 채원보다 서너 걸음 앞서 걸었다. 수많은 행사와 공연 덕에 웬만한 도심 지역은 손바닥 보듯 빤했다. 특히 SJ미술관은 스튜디오K 단골 전시장으로 손꼽힐 만큼 익숙한 곳이었다.

“어머, 강 대표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미술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여직원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관장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큼성큼 메인 전시실로 향하는 승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채원이 허둥지둥 그의 뒤를 따랐다.

“여기 관장이랑 아는 사이야?”

“그럭저럭.”

“어떻게?”

“작업 몇 번 같이 했어.”

“아니 그럼 애초에….”

잘 아는 사이라고 말을 해주든가.

“애초에, 뭐?”

“아냐… 아무것도.”

건조한 남자의 눈빛에 채원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일부 야속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채원이 휴가를 낸 3일 동안, 직원 몇 명이 미술관을 직접 찾아가 구구절절 사정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윤 대리, 안 가길 잘했어. 팀장님이랑 나랑 얼마나 자존심 상했는지…. 우리 명함은 보지도 않고 예약 가능한 날짜 없다 문전박대하더니, 스튜디오K 이름 꺼내자마자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뀌더라니까? 웃기지도 않아 진짜.’

관장과 친분이 있다고 미리 말해줬더라면 그렇게 애를 먹진 않았을 텐데.

물론 전시회 진행은 전적으로 POA 주관이었기 때문에 강승재가 굳이 관여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쉬운 길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디 한번 굴러봐라, 팔짱을 낀 채 방관하는 건 너무 고약한 심보 아닌가.

“저기, 승재 씨….”

분풀이 대상은 나 하나면 충분하지 않냐, 왜 우리 팀 직원들까지 고생을 시키는 거냐, 소심하게 항의라도 해볼까 입술을 달싹이려는데.

“어머나, 강 감독님! 어서 오세요. 감독님 자선 전시회 소식 듣고 어찌나 감동을 받았는지….”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중년 여성이 과한 제스처를 보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잘 지내셨죠? 연말이라 바쁘실 텐데 제가 또 귀찮게 해드리러 왔습니다.”

승재는 너스레를 떨며 관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유쾌한 미소에 심장이 간질거려, 채원은 그에게 건네려던 날 선 문장들을 이내 잊고 말았다.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SJ미술관 택해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영광이죠. 조 실장은 오늘 안 보이네요? 다른 직원이 대신 오셨나?”

“아, 안녕하십니까, POA 이벤트 기획팀, 윤채원 대리입니다.”

“POA? 처음 듣는 이름인데….”

“Protect our animal, 동물보호단체입니다. 저희가 강 감독님께 콜라보 제안을….”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가던 채원이 전시회장 하얀 벽으로 문득 시선을 돌렸다.

제1 전시장. ‘서일관’

“서일관… 이라고 적혀 있네요.”

“아, 작년에 서일그룹이 미술관 인수했잖아. 그때 리모델링하면서 명칭도 바뀌었어요. 원래는 꽃 이름이었는데… 뭐, 좀 촌스럽긴 했지. 수국, 매화… 전통적이라고 좋아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채원의 물음에도 관장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미 수차례 엇비슷한 질문을 받아본 사람처럼.

“저 잠깐 화장실 좀….”

“나가서 복도 끝 우측에 있어요.”

채원은 관장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걸음을 걸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감추려 어깨에 멘 숄더백을 양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하필이면 서일그룹 산하였다니.

이건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타격이었다.

심호흡을 할 장소가 절실했다. 단 1분이라도.

* * *

“후우….”

찬물로 한참 손을 씻은 채원은 페이퍼타월 두 장을 꺼내어 손등의 물기를 닦아냈다.

벗어난 지 오래라고 자부했는데.

강승재도, 서일그룹도, 빌어먹을 정창길마저도, 지금껏 떨쳐낸 건 아무것도 없다.

“꼴 우습게 이러지 말자. 제발.”

강승재 앞에서만 우스워지자고 다짐했다. 그건, 자청한 일이니 괜찮았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서일’이란 두 글자에 사색이 되어버린 스스로를 관대하게 넘길 수는 없었다. 왜 아직도 숨을 못 쉬는데. 무엇이 두렵고 또 무엇이 무섭길래.

‘생활비는 넉넉히 대줄 테니, 미국이든 유럽이든 큰물에서 놀아. 한국 들어올 생각 절대 말고.’

죽은 노인네의 망령이 채원의 머릿속을 무겁게 짓눌렀다.

일종의 노예근성인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한국에 자리를 잡은 것도 모자라 결국 서일그룹 영역에까지 발을 들였다. 그래서 벌벌 떠는 거야? 9년 전 골로 간 노인네 경고를 어겨서?

피식, 실소가 터졌다.

강한 척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을 뿐, 사실 채원은 생각처럼 모질지 못했다. 정 회장 앞이든 김 비서 앞이든, 언제나 거리낄 것 없는 그녀였으나, 바락바락 악을 쓰는 와중에도 손바닥에선 식은땀이 축축이 묻어나오곤 했다.

정 회장이 물을 뿌리고 뺨을 치면 눈 하나 깜짝이지 않고 맞아주겠다 이를 갈면서도, 그에게 영원히 버림받진 않을까 한편으론 조바심이 났다. 수경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이면이었다.

“윤채원 씨?”

익숙한 듯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천천히 복도를 걷던 채원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겨우 가라앉혔던 호흡이 다시금 가빠지기 시작했다. 어쩐지 묘하게 기분 나쁜 톤이다 싶더라니.

“김 비서님. 여긴 어떻게….”

칼 정장을 갖춰 입은 김 비서가 놀란 표정으로 채원을 쳐다보았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저희 미술관까진 웬일로 온 겁니까? 미쳤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따로 연락하라고 했잖아 내가.”

저희 미술관? 코웃음이 쳐진다. 정창길에 이어 정윤호 심복 노릇까지 하다 보니, 서일이 아주 제 것 같은가 보지.

“오해하지 마세요. 일 때문에 온 거니까. 정말이에요. 서일관 마크 찍힌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고.”

“일? NGO 직원이 미술관에 무슨 업무가 있으시길래?”

김 비서는 전처럼 채원을 예의 바르게 대하지 않았다. 수경이 걱정할까 자세한 말을 전하진 않았지만, 그는 가끔 전화를 하는 것 말고도 POA 건물 앞에 불쑥 나타나 채원을 감시했다. 정 회장의 생전 뜻이었다는 둥 개수작을 떨며 9년 내내 그녀를 옭아매는 통에 아주 넌더리가 나던 차였는데, 하필 이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윤채원 씨, 여긴 왜 왔냐고 묻잖습니까.”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돼요? 왜? 9년 전 죽은 사람 들먹거리며 협박이라도 할까 봐? 월요일 대낮부터 그런 미친 짓 할 만큼 애정 없어, 당신네들한테.”

“혹시 돈 필요해요? 윤수경 씨가 대신 가보라고 시켰습니까?”

“이봐요!”

“거기, 무슨 일입니까?”

묵직하게 깔린 남자의 목소리가 채원의 앙칼진 음색을 빠르게 덮었다.

승재였다. 강승재가….

꼭 말아 쥔 작은 주먹이 안도감에 축 처졌다. 채원은 승재의 가슴께로 시선을 내렸다. 울컥 목이 멘 탓에 그를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신경 끄고 갈 길 가시죠. 제가 윤채원 씨랑 사적으로 잠깐 할 말이 있어서 말입니다.”

김 비서가 그녀의 팔을 낚아채려는 순간.

“대표님!”

채원이 다급하게 승재를 불렀다.

채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어색한 호칭을 승재는 빈정거림 없이 그대로 받아쳤다.

“윤 대리.”

불안으로 가득 찬 여인의 눈동자.

지금은, 옛 감정에 치우칠 상황이 아니었다.

“윤 대리가 직접 말해 봐. 외근 중에 사적으로 약속 잡은 게 있었나?”

“아, 아뇨. 없습니다.”

“뭔가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우리 직원은 그쪽한테 볼일이 없어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 이봐요, 윤채원 씨. 어디 갑니까? 하던 얘긴 마저 하고….”

붙들린 손목을 황급히 빼내려는 채원을 김 비서가 한 번 더 잡아챘을 때.

“저희 직원 이름 그만 부르시죠. 그 손도….”

승재가 김 비서의 팔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좀 놓으시고.”

* * *

늘 그렇듯 채원은 입을 꾹 다물었고, 승재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둘은 그저 걷기만 했다. 미술관에서 광화문역까지는 정말 금방이었다. 여자 걸음에 보폭을 맞추어도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차는 스튜디오에 두고 온 거야?”

“응. 막힐까 봐.”

“지하철이 같은 방향이려나….”

“회사가 마포 쪽 아냐?”

“맞아.”

“난 학동이라.”

“아, 그렇지 참. 반대로 타야겠네.”

그의 사무실이 학동역 부근이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채원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사람처럼 과한 리액션을 취했다. 곧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알맹이가 빠진 대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까는… 고마웠어.”

계단을 느릿느릿 내려가던 채원이 용기를 내어 입술을 오물거렸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터놓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하고 싶었다.

“뭐가?”

“어?”

“뭐가 고마운데.”

“그… 난처한 상황 잘 무마시켜 줘서… 고맙다고.”

예상대로 에두른 답변이었다. 다짜고짜 손목을 잡아챈 그 정장 차림의 남자는 누구인지,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는지,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승재는 갑갑한 듯 채원을 비껴 보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 나간 사람이 오래도록 모습을 비치지 않아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미술관이 아무리 넓다 해도 길을 잃을 만큼의 규모는 아니었으니까. 관장과 미팅을 마친 후 전시장을 빠져나온 승재는, 너른 복도 한가운데에서 앙칼진 소리를 지르고 있는 채원을 발견했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달렸다. 9년 전, 미친 미국 놈에게 멱살을 잡혔던 장면이 오버랩되어 정신이 더욱 아찔해졌다.

윤채원은 상대 남성을 빳빳이 올려다보며 바락바락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목청만 돋우면 제일인 줄 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커다란 눈망울을 들킨 줄도 모르고.

서로 안면이 있는 듯했다. 남자는 40대 중반쯤… 경박한 목소리 톤은 그가 걸친 명품 양복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대화 내용을 제대로 듣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돈’이 더 필요한지를 묻는 남자의 문장만큼은 선명했다.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윤채원이 언젠가 남자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얽힌 금전적 관계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

“사진전 작품 파일은 조 실장이 메일로 보내줄 거야. 전시관별로 나눠서 정리했으니까 번호순으로 배치하면 돼. 궁금한 점 있으면 조 실장한테 연락하고.”

“아, 응… 그럴게. 바쁠 텐데 얼른 가 봐.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

“윤채원.”

발끝만 바라보며 상투적인 끝인사를 띄엄띄엄 이어가던 채원이, 승재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너, 돈 필요해?”

날카롭다거나 비아냥의 어투는 아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섞여 괜한 착각을 했는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그녀를 어르는 것 같기도 했다.

“돈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그 남자가 너한테 돈 필요하냐고 묻던데. 아냐?”

잘못 들은 거라고 태연한 척 발뺌을 하기엔 그의 음성이 너무도 강고했다. 짐작이 아닌 확신이었다.

채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김 비서와 나눈 이야기가 일부 새어나간 모양이다. 정창길 이름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는지, 그녀는 30분 전 상황을 빠르게 되짚었다. 행여 그가 눈치챈 건 아닐까 심장이 벌렁거렸다.

“누군지 정도는 알려줘야지. 미술관에서 마주친 것도 수상하고. 혹시 전시회 기간 중에 행패라도 부리면….”

행패. 그는 김 비서를 질 나쁜 건달이나 불한당 중 하나로 오해하는 듯했다. 충성심 높은 서일의 개쯤으로 소개할 걸 그랬나.

“불미스러운 일 생기지 않도록 조심할게. 아깐 나도 모르게 욱해서 그만.”

“사채업자, 뭐 그런 거야?”

“하하, 사채… 듣고 보니 비슷하네.”

김 비서가 아닌 정씨 일가의 돈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채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강승재의 엉뚱한 추리는 예상치 못하게 계속 정곡을 찔러댔다.

“웃을 일 아니잖아. 여기까지 너 찾아온 거 보면 회사나 집 주소도 당연히 알고 있다는 건데. 혼자 해결 못 하겠으면 차라리 경찰에 신고라도….”

“사진전… 잘 좀 부탁할게. 나랑 일하는 게 탐탁지 않겠지만 우리 회사 운명이 승재 씨 손에 달려있거든.”

“말 돌리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래.”

“뭐?”

다시금 발끝으로 떨어진 시선. 그래도 채원은 용케 말을 이어갔다.

“월급이라도 꼬박꼬박 받아야 돈을 갚지. 나 백수 되면 스튜디오K에 취직시켜 달라고 승재 씨 더 귀찮게 할지도 몰라. 그건 싫을 거 아냐. 일주일에 한두 번 내 얼굴 보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치를 떠는 남자가.”

“…….”

“그러니까 내 진상짓 조금이라도 덜 보고 싶으면 이번 전시회 신경 좀 써줘. 무리한 요구란 거 아는데, 미공개 작품도 몇 점 걸어줬음 좋겠어. 이왕이면 동물 소재로….”

“너 지금 나 협박하냐? 말했잖아. 스케줄상 추가 촬영은 어렵다고.”

“협박이 아니라 부탁하는 거야.”

윤채원은 여전히 거슬렸다.

대놓고 사람을 이용하려 들면서도 전혀 주눅 든 기색 없이. 언제나 당당하고, 혼자 잘나셨고….

“암튼, 사적인 문제로 여러 사람 피해 보게 하지 마라. 낌새 이상하면 우리 측은 즉시 발 뺄 거니까.”

“냉정하긴.”

“먼저 간다.”

승재는 을지로 방향이 표시된 지하철 게이트로 발을 틀었다. 그녀가 축 처진 음색으로 불만을 토로했지만, 못 들은 척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삑.

신용카드를 찍고 계단을 내려와 플랫폼 앞에 설 때까지, 승재는 머릿속에 가득 찬 채원의 잔상을 지우려 노력했다. 이번 주에 잡힌 촬영 일정도 떠올려 보고, 빠른 환승을 위해 몇 번째 칸에 탑승을 해야 하는지, 내일 날씨는 어떤지, 별 시답잖은 정보들을 휴대폰으로 검색하면서.

“후우, 돌겠네….”

하지만 지워지기는커녕 시간이 갈수록 더욱 또렷해질 뿐이다. 애써 괜찮은 척 힘을 주던 목소리. 조급하게 깜박거리는 눈꺼풀. 광대에 힘을 주어 웃는 어색한 미소.

온통 윤채원으로 가득 채워진 심장.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래.’

알아먹기 쉽게 말이나 해주든가.

독백처럼 흘려낸 그녀의 문장은 몇 번을 떠올려도 난해하기만 했다.

방심한 사이 느슨하게 풀려버린 틈새를 필사적으로 비집으려는 그녀가 미웠다. 하지만 더욱 한심한 건, 속이 빤히 보이는 상대의 수작에 놀아나고 있는 제 자신이었다.

승재는 반곱슬 진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흩트렸다.

9년간,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 * *

「출입문 닫습니다. 출입문 닫습니다.」

익숙한 알림 방송과 함께 지하철 문이 닫혔다.

벌써 세 대째다. 플랫폼 구석 벤치에 앉아 스크린도어를 멍하니 응시하던 채원은, 팔을 뻗어 살갗이 쓸린 오른쪽 뒤꿈치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따가워….”

싸구려 재질이 문제인지 오래 신어도 항상 말썽이다. 뒤축을 구기고 접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올겨울엔 제대로 된 신발 하나 장만해야지.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할 정도로, 궁상을 떠는 레벨이 윤수경 여사 못지않았다.

POA에 입사한 그 달부터 채원은 끈질기게 돈을 모았다. 쥐꼬리만 한 NGO 월급이었지만 하루하루 억척을 떠니 그래도 어느 정도 목돈이 쌓여갔다.

5년에 걸쳐 1억을 만들었다. 물론 결혼 자금이니 여행 적금이니 하는, 시절 좋은 여윳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채원에게는 그 이상으로 의미가 큰 1억이었다. 정창길이 채운 족쇄를 5분의 1쯤 끌러냈다는 뿌듯함과 후련함.

이제 4억 5천만 더 모으면 된다. 월급도 미미하게나마 오를 테니, 앞으로 10년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 모자란 금액은 대출로 메꾸면 되는 거고.

만약 김 비서가 거절한다면 엄마 말처럼 서일그룹 로비에라도 흩뿌리고 오리라 다짐하며, 채원은 그렇게 매일을 버티는 중이었다.

경멸에 찬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김 비서의 표정이 새삼 떠올라, 바드득 이가 갈렸다.

애초부터 돈이 목적은 아니었어. 엄마는 아이를 혼자 키울 자신이 없어 당신네들을 찾아갔던 것뿐이야. 정씨 집안에 슬쩍 발 끼워 넣을 생각 추호도 없으니, 이제 그만 나 좀 놔 달라고.

아무도 강요한 적 없으나 보증금 명목으로 받은 돈은 꼭 갚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본인의 의지를 내보이고 싶었다.

“구두가 그것밖에 없어?”

발을 주무르던 채원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승재 씨….”

목이 먹먹하게 잠겼다.

언제부터 뒤따른 걸까. 분명 반대 방향으로 가버린 줄 알았는데.

채원은 긴장한 듯 몸을 움찔거렸다. 서로의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그가 산처럼 서 있었다.

“하나만 묻자.”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승재는 한참을 망설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내 모습이 지금의 내가 아니었어도, 같은 상황이었을까?”

“뭐?”

“서른 중반 되도록 자리도 못 잡고, 집도, 차도, 돈 한 푼 모은 것도 없이 떠돌고 있다 해도….”

“…….”

“윤채원이 과연 나를 찾아왔을지… 문득 궁금해져서.”

칠흑 같은 남자의 눈동자가 붉어진 눈시울을 고요히 내려다보았다.

“그건….”

채원은 끝내 아무런 답도 건네지 못했다.

목이 메어, 코끝이 시큰거려 말문이 막힌 거라 둘러대고 싶었지만, 구차한 변명조차 내뱉기 버거웠다.

9년 전 어리숙하던 대학생이 아닌, 바위처럼 단단하게 성장한 남자의 모습에 심장이 뛴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네.”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승재가 찬웃음을 머금었다.

“얄팍하게 머리 굴리는 부류는 딱 질색이라. 최악은 면했어, 윤채원.”

“승재 씨, 나는….”

“빚이 정확히 얼만데?”

“어?”

“아까 그 새끼한테 갚을 돈, 얼마냐고.”

기다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답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쉽사리 입을 열 수 없는.

연달아 이어진 강승재의 질문들은,

하나같이 모두 그랬다.

붐플러스

관련자료

널 버릴 자격 02. 모순
  
그누보드5



Copyright © FUNB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