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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다분히 의도적인(2권)

본문

쿵푸벳

2권

#01. 다분히 의도적인

* * *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제가 어떻게 호칭을 붙여야 할지 모르겠네요. 대표님이 좋을지, 감독님이 좋을지….”

오후 3시. 스튜디오K 미팅룸.

품이 넉넉한 그레이 컬러 니트와 베이직한 블랙 팬츠를 걸친 승재는 평소와 같은 편한 차림으로 기자를 맞이했다.

“거창한 건 체질에 안 맞아서, 그냥 강 작가라고 불러주세요.”

“아무리 그래도 초면인데….”

“괜찮습니다. 그게 편합니다 저는.”

오늘은 두 달 전 픽스된 잡지사와의 인터뷰가 예정된 날이었다.

사진 촬영이 포함되어 있다 들었으나 고작 몇 컷을 위해 옷을 사고 머리를 만지는 건 시간 낭비라 생각했다. 모델들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일일이 신경을 쓰면서 스스로에겐 초지일관 무심한 남자.

참 모순적인 포토그래퍼였다.

“듣던 대로 정말 겸손하시네요. 그럼 작가님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잡지에 실릴 때에는 존칭 없이 포토그래퍼 강승재라고 타이틀 달릴 거예요. 미리 양해 부탁드릴게요.”

“네. 사진만 잘 찍어주세요. 카메라 만지기는 좋아해도, 렌즈 마주하는 건 영 거북해서요.”

“영준 씨. 작가님 말씀 잘 들었죠?”

“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뒤에서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던 앳된 카메라맨이 승재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멋쩍게 웃었다.

“저 친구가 2년 차 신입인데요, 강 작가님이 평소 롤모델이었나 봐요. 오늘 인터뷰 촬영 때문에 우황청심환까지 먹고 왔답니다. 워낙 마스크가 좋으셔서 어떻게 찍어도 잘 나올 것 같긴 하지만, 저희가 최대한 멋있게 담아드릴게요.”

발그레한 미소와 함께 승재 쪽으로 의자를 한 뼘 더 당겨 앉은 기자는, 휴대 전화의 리코딩 버튼을 누른 후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다시 한번 자리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그럼 신속하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유명 에이전시에 5년이나 몸담고 계셨잖아요? 이쪽 업계에서는, 강 작가님이 황금 호박을 뻥 차버렸다는 둥, 무모하다는 둥, 말들이 참 많았거든요. 솔직히 수입도 어마어마하셨을 텐데… 지금과 비교해서 어떤지 여쭤본다면 실례일까요?”

“당연히 요즘 사정이 더 낫긴 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차린 회사다 보니… 하지만 미국에 있을 땐 시간 대비 고수익이었죠. 사진 촬영 이외엔 신경 쓸 게 없었고, 휴가도 넉넉하고, 딸린 직원들 걱정 안 해도 되고. 생각해보면 그때가 더 좋았던 거 같기도 하네요.”

“낯빛이 그새 어두워지셨어요. 제가 괜한 질문을… 미국 생활 그립다고 훌쩍 떠나실까 봐 겁나는데요?”

기자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스튜디오K를 설립하신 결정적 계기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JH그룹 류정혁 대표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맞나요?”

“네. 더 정확히는… 제가 사기를 당한 케이스죠. 류 대표한테.”

승재가 장난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류정혁 대표가 강승재 감독님을 상대로 사기를 쳤단 말씀이세요?”

“네. 한국 와서 스튜디오 차리면 본인이 평생 밥걱정 안 하게 해주겠다고 프러포즈를 하길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 프러포즈가, 혹시 다른 의미는 아니죠?”

“하하, 류 대표랑 저랑 자꾸 엮으시려는 기자 분들 계시던데, 이참에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 둘 다 여자 좋아합니다.”

“아….”

“기자님께서 왜 아쉬워하시는지 궁금해지는데, 이따가 저도 질문 시간 따로 주시는 겁니까?”

승재가 천연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의 미소에 기자의 양 볼이 뜨듯이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사심 섞인 인터뷰를. 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게요. 류 대표님께 구체적으로 어떤 사기를 당하셨는지….”

“뭐, 나열하자면 끝도 없죠. 전속 노예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밥 굶지 않게 해주겠다더니, 잠도 안 재우고 일을 시켜서 말입니다. 사생활 침해는 기본이고, 일주일 내내 강제 부림 당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술 먹자고 불러내서 일 얘기, 집에 불쑥 찾아와서 또 일 얘기….”

“알고 보니 노예 계약이었단 거네요?”

“그렇습니다.”

매스컴의 반복되는 인터뷰 요청이 지겨울 법한데도 승재는 프로답게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즐기는 부분도 있었다. 인터뷰 질문마다 강승재의 베프로 등장하는 단골 인물 류정혁. 한창 주가를 달리고 있는 JH그룹 대표를 공식적으로 씹을 수 있는 자리이니, 언제나 의욕이 솟구칠 수밖에.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요. 류 대표님과의 일화만 따서 특집으로 빼고 싶을 정도입니다 정말. 혹시 나중에 두 분 합동 인터뷰도 가능할까요?”

“반년 전쯤, 딱 한 번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의도치 않게 소문이 이상하게 퍼져서요. 그 후로는 정중히 거절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정말 결혼 못 하겠다 싶어서.”

독자적인 란제리 브랜드 론칭으로 연 매출 500억을 달성한 젊은 CEO 류정혁. 톱모델과 배우들이 그의 작업실에 직접 찾아와 촬영을 부탁할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포토그래퍼 강승재.

각각 놓고 봐도 매력이 넘치는 두 남자가 사실은 고등학교 동창에, 미국 유학까지 함께한 룸메이트였다니. 이 흥미로운 브로맨스를 지루해할 만한 대중은 없었다.

“아, 그럼 결혼 생각은 있으신 거네요? 만약 한다면 언제쯤?”

기자가 틈을 놓치지 않고 은근슬쩍 승재의 사생활을 떠보았다.

“글쎄요. 딱히 정해놓은 건 아닌… 근데 왠지 제가 기자님 페이스에 말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럴 리가요. 호호. 연애와 결혼관은 어떤 식으로든 여쭤볼 작정이었습니다. 강 작가님이랑 류 대표님 인기가 연예인 못지않은 건 알고 계시죠? 서운하게 들리실지 몰라도, 독자님들께서는 일 얘기보다 이런 사생활과 관련된 주제를 사실 더 궁금해하시거든요. 강 작가님 이상형은 무조건 블론드 헤어다, 이런 말도 들리더라고요.”

“네? 금시초문입니다. 제 취향이 금발이라고 하던가요? 저도 몰랐네요.”

“이사벨라 우드 양 인스타 보셨어요? 금발 모델들 사이에 푹 파묻힌 강 감독님 사진이 특히 눈에 띈다는 댓글들이….”

“아, 뉴욕 컬렉션 마치고 함께 술 한 잔씩 하다가 찍힌 사진입니다. 아마 그날 쇼 컨셉이 골드 앤 화이트였을 거예요. 저는 머리 색 따질 정도로 까다롭지 않습니다. 류정혁이라면 또 모를까.”

잊을 만하다 싶으면 어김없이 정혁을 물고 늘어지는 승재. 요 근래 쌓인 게 많았는지 오늘은 유난히 더 공격적인 모습이다.

“어머, 류 대표님은 꽤 까다로우신가 봐요?”

“상당히 그런 편이죠. 그 친구 결혼은 다음 생애나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 봅니다.”

“에이, 제가 또 익히 들어서 알거든요. 강 작가님도 일하실 때만큼은 엄청 집요하다던데.”

“대신 저는 스위치 오프 확실합니다. 류 대표는 스위치가 아예 없는 타입이고.”

인터뷰 내내 기자의 웃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과장된 소문은 아니었다. 듣던 대로 강승재는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며 적절한 유머까지 겸비한 호감형이었다.

시답지 않은 사생활부터 그의 사진 철학, 작업 방식, 기억에 남는 작품 설명 등, 다채로운 대화가 한 시간 넘도록 이어졌다. 지칠 법한데도 승재의 눈빛과 목소리 톤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기자는 진심 어린 그의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은 듯 보였다.

“분량 확보 톡톡히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강 작가님 인터뷰 간다니까 회사 동료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던데,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네요.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별말씀을요.”

녹음 버튼을 정지시키려던 기자가 손가락을 멈칫거리더니 슬며시 승재의 눈치를 살폈다. 추가 질문이 뒤늦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네, 편하게 물어보세요. 시간 여유 있습니다.”

“작가님 연말 계획으로 색다른 소식이 들리던데요. 스튜디오K 자선 전시회를 개최하신다는….”

“그걸 어떻게….”

일순간 승재의 입가가 굳어졌다.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던 상대가 갑작스럽게 뻣뻣해지니 오히려 당황한 것은 기자 쪽이었다.

“인터뷰 전에 조 실장님이랑 몇 마디 나누다가 우연히 알게 돼서…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직 확정된 게 아니시라면 이건 질문에서 빼도록 하겠….”

승재가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조 실장 입단속을 철저히 시키지 못한 본인 책임이었다.

“사진전은 현재 검토 중입니다. NGO 단체에서 콜라보 제의가 들어와서요. 이 일정은 저희 측에서 추후에 공지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네. 자선 사진전이라니 따뜻한 연말 행사가 될 것 같네요. 바쁘실 텐데 이런 기획까지… 여러모로 참 존경스럽습니다. 초대권 꼭 부탁드려요. 저희가 전시회 기사 빵빵하게 실어 드릴게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대권 잊지 않고 보내드리겠습니다.”

승재가 억지웃음을 띠며 답했다. 훈훈한 분위기 속 무사히 마무리된 인터뷰. 그를 향해 거듭 고개를 숙인 카메라맨과 기자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

기자가 떠난 지 한참 되었으나, 승재는 미팅룸에 여전히 남아 하얀 테이블 모서리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갈팡질팡하던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조 실장의 입방정에 기자의 설레발까지 더해져, 자선 전시회는 개최가 거의 확실시된 듯싶었다.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는 건가.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맞닥뜨려야 하나 보다.

고작 몇 개월뿐인 만남에 흘러간 세월만 자그마치 9년이다.

분명 괜찮을 줄 알았다.

너의 목소리, 커다란 눈망울, 새초롬한 미소, 익숙한 로션 냄새에도.

정말이지 나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고.

그런데.

“지겹다. 윤채원….”

발갛게 피가 맺힌 그녀의 뒤꿈치가 며칠째 머릿속을 부유하며 승재를 괴롭혔다. 앞코는 까이고 뒤축은 형편없이 눌린, 답지 않게 낡은 구두였다.

‘학교 찾아와도 소용없을 거다. 채원이 자퇴했더라. 나도 오늘 알았어.’

‘뭐? 하루아침에 자퇴? 지금 나더러 그 개소리를 믿으라는 거야?’

‘사정이 있었나 보지.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해 보든가.’

류정혁의 말처럼, 그녀는 나에게 이별을 고한 직후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때의 상황을 인이 박이도록 되짚어보아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 혹시 윤채원이 귀신은 아니었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범한 9년 전의 무례는, 귀신이건 사람이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식 이하의 짓이었다.

띠링.

[감독님, 인터뷰 잘 마치셨어요? POA 윤채원 대리한테서 몇 번이나 연락 왔습니다. 전시회 기획안 검토하셨냐고, 다음 미팅 날짜 물어보는데 어떻게 할까요?]

조 실장의 메시지가 승재의 상념을 깨웠다.

피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다.

만약 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내가 널 무례히 짓이겨주겠다,

수천 번 수만 번 다짐했으니.

[미팅 잡아. 내일 오후로.]

승재는 지체 없이 답신을 보냈다.

서늘한 냉기가 심장 가운데를 파고들자, 일렁이던 마음은 금세 고요해졌다.

그리고 자작한 분노만이 남았다.

* * *

“웬일이야? 당분간 못 온다더니.”

갑작스러운 딸의 방문이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는지, 현관 앞에 선 수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경 씨도 참… 딸내미가 엄마 보고 싶어 온 거지,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해?”

“제 말이요.”

구두를 벗던 채원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명섭의 말에 넌지시 맞장구를 친다.

“내일 회사 안 가?”

“하루 휴가 냈어요.”

“뭐 타고 왔는데?”

“당연히 버스 탔지.”

“터미널 내려서는?”

“그냥… 뭘 꼬치꼬치 물어.”

엄마의 질문에 어쩐지 말끝이 흐려지는 채원.

“너 택시 탔구나! 조금만 기다리면 시내버스 금방 올 텐데 허튼 데 돈 쓰고….”

딸의 속을 꿰뚫는 데 도가 튼 수경은 곱게 주름진 눈으로 채원을 한껏 흘겼다.

“발 아파서 그랬어. 얼마 전에 구두 신고 오래 걸었더니 뒤꿈치가 다 까졌단 말야.”

“그럼 택시를 탈 게 아니라 운동화를 신었어야지.”

“윤수경 씨, 거 참… 나머지 잔소린 나한테 해요. 서른 넘은 딸 별걸 다 간섭이네.”

한발 물러나 모녀의 옥신거림을 구경하던 명섭이 슬그머니 수경의 팔을 잡아끈다.

“서른 넘었으니 하는 소리죠. 쥐꼬리만 한 월급 어느 세월에 모아서 결혼하려고….”

“결혼 안 해. 엄마랑 살 거야 평생.”

“어머머, 얘 좀 봐.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누구 맘대로….”

“그래, 요즘은 결혼이 필수도 아닌데. 아저씨는 채원이랑 엄마랑 셋이 사는 거 대찬성이다.”

“김 사장님!”

“왜요, 윤 사장님!”

톡 쏘는 수경을 능글맞게 받아주는 명섭의 너스레에 이번에는 채원의 웃음보가 터졌다.

“아저씨 땜에 제가 웃네요. 엄마, 나 씻고 와서 밥 먹을게.”

“그래. 계란프라이 해줄게. 반찬이 김이랑 김치뿐이라.”

“응, 다 좋아요. 나 엄청 배고프거든 지금.”

“채원아, 아저씨는 가게 다시 나갈 거니까 옷 편히 입고 엄마랑 수다 떨어.”

명섭이 소파에 걸쳐둔 점퍼를 집어 들었다. 모녀끼리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려는 듯했다.

“집에 계셔도 괜찮은데… 정말이에요. 저 때문에 괜히 나가지 마세요.”

“아냐, 원래도 잠깐 저녁만 먹고 나가보려던 참이었어. 네 엄마 혼자 먹으면 심심할까 봐. 가게 밤 10시까진 거 알잖아.”

“알바 뽑았다면서요.”

“응. 근데 아직은 어리바리해. 뒷정리 한번 맡겼더니 홍시 두 박스를 아주 뭉개놔서.”

“채원이 핑계 대고 박 사장이랑 술 마실 건 아니죠? 같이 있어도 괜찮다는데 오버야 괜히. 얼른 마감하고 와요.”

신발을 고쳐 신던 명섭이 씨익 웃으며 수경을 바라보았다.

“걱정 마요. 박 사장 가게 문 닫고 일찌감치 들어갔어.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나 뭐라나. 과일바구니 얼마냐 묻길래 서비스로 하나 해줬지 내가.”

“뭐? 그 비싼 걸 서비스로 줬다고? 어후 정말, 이 집에서 돈 아끼는 건 나밖에 없다니까.”

비록 한참 늦긴 했어도 신혼은 신혼인가 보다. 수경이 화를 내든 인상을 구기든 명섭의 눈에는 그저 곱게만 보일 뿐이니.

“대신 돈 많이 벌어올게. 채원아, 엄마 잘 부탁한다.”

“네, 다녀오세요.”

명섭은 채원과 수경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문을 나섰다.

1층 과일가게 사장님과 2층 카페 사장님. 같은 건물에 세를 얻어 장사를 하는 이웃으로 그들은 서로 안면을 텄다. 어쩌다 보니 정이 든 거라 수경은 말하지만, 명섭은 달랐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가슴이 벅찼다.

결혼을 한 적은 없으나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스물다섯에 아이를 낳아 기른 씩씩한 미혼모였다. 애 아빠에 대해 조심스레 물으니 이미 가정이 있던 남자라 일부러 피해 다녔단 말과 함께, 이젠 다른 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딱하고 짠했다.

수경은 장사가 처음이라 매사에 서툴렀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과일가게 문을 닫고 종일 그녀의 카페를 도운 날도 허다했다.

그녀의 나이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명섭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기에 깜짝 놀랐다. 워낙 앳되고 고와 전혀 오십 대로 보이지 않았으니.

명섭은 자신의 진심을 적극적으로 어필했지만 수경은 오래 갈등했다. 채원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망설였고, 뒤늦게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두려워 또 망설였다.

결국 명섭은 채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했다. 네 엄마를 사랑한다, 8년째 계속 같은 마음이다. 그 전까진 쭉 혼자였다고, 사업이 망해 빚을 갚느라 혼기를 놓쳤다고, 부채는 모두 정리했고, 과일을 팔아 한 달에 이 정도 벌고 있다, 통장까지 들고 나가 내어 보였다. 이 남자가 엄마에게 피해를 끼치진 않을까, 혹, 사기꾼이면 어쩌나 우려하는 딸의 속내를 충분히 알기에, 더 정직하고 싶었다.

‘우리 엄마 울리지 않을 자신… 있어요?’

채원이 명섭에게 건넨 유일한 질문이었다.

‘약속하마.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네 엄마 혼자 울며 버틴 세월, 아저씨가 최선을 다해 메꿔볼게.’

작년 겨울, 채원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 명섭과 수경은 살림을 합쳤다.

결혼식이나 혼인 신고는 따로 하지 않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계단을 오르면 무릎이 상한다며 수경은 농담처럼 말했다.

명섭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루아침에 예쁜 딸과 아내가 생겼고, 온기 가득한 집으로 귀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다.

채원을 상대로 어느 선까지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할지 그 부분이 가장 애매하고 어려웠지만, 명섭은 곧 조급함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하루하루 진심을 쌓다 보면 자연스레 가족이 되어 있겠지.

시간에 맡겨보는 방법도 때로는 필요했다.

* * *

“윤채원, 얼른 밥 먹어! 국 식으면 맛없다!”

“지금 가요.”

수경의 보챔에 머리를 말리던 채원이 물기를 뚝뚝 흘리며 뛰어나왔다.

“엄마, 드라이기 좀 바꿔요. 저거 나 초등학교 때부터 본 거 같은데….”

“바람만 잘 나오면 됐지, 뭐 하러 돈 써.”

“바람이 잘 안 나오니까 하는 얘기잖아.”

말해봤자 입만 아프지. 다음 달 집에 내려올 때 하나 사 오는 게 낫겠다 생각하며, 채원은 식탁 앞에 앉았다.

엄마는 9년 전에 비해 많이 변해 있었다. 소비 패턴, 음식 솜씨, 나를 대하는 태도도. 물론 대부분은 긍정적인 쪽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잔소리가 늘었다는 것만 빼면.

“아직도 김 비서 연락 오니? 지금은 정윤호 밑에서 충견 노릇 하지?”

“응.”

계란프라이를 밥 위에 올린 채원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없이 군다거나 귀찮게 안 해?”

“전혀. 그냥 달에 한 번씩, 짧게 통화하고 끊는 게 전부라.”

“거머리 같은 놈. 정창길 귀신이라도 씌었나. 왜 자꾸 남의 딸은 감시해, 지가 뭐라고. 엄마가 어떻게든 5억 5천 모아서 서일그룹 로비에 뿌려놓고 올 테니까….”

“참 나 어느 세월에 그 큰돈을 모아. 신경 쓰지 마요. 그 인간은 미국에 있을 때부터 나 무서워했대두. 정윤호, 정윤진 승승장구하는 거 보고 내가 꼭지 돌면 어쩌나… 감시가 아니라 비위 맞추는 거야. 요즘 뭐 하고 지내냐, 생활 어렵진 않냐, 도움 필요하면 꼭 자기 번호로 연락해라, 항상 같은 말 반복이야. 아니 그럼 내가 뭐, 서일 본사에 전화라도 할까 봐? 한결같이 의도가 뻔히 보여서 이젠 화도 안 나.”

채원은 김에 싼 계란밥을 오물오물 씹어 맛있게 삼켰다. 김치와 계란 노른자, 짭조름한 김의 조화란 역시…. 김 비서의 이야기를 꺼내는 중에도 다행히 밥맛은 떨어지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나 보다.

“그래도 엄만 그놈들한테서 받은 돈,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을 거야. 정 회장 죽기 전에도 같은 생각이었어. 너 다 키우면, 학교 졸업해서 직장 얻고,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것만 보면, 그땐 집을 팔든 빚을 지든 해서라도 갚아야지… 그랬어. 더럽고 치사하고 자존심 상해서.”

“갚아도 내가 갚을 테니까, 엄마는 그만 털어버려요. 카페도 곧잘 되고, 아저씨 만나서 행복하잖아. 근데 왜 자꾸 서일 때문에 이를 갈고 신경을 써? 화병 생기게.”

“쥐뿔도 없는 게 항상 큰소리는. 너야말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괜찮은 남자나 얼른 골라서 결혼해. 그게 나 도와주는 거야.”

딸내미의 숟가락에 김치를 올려주며 수경은 항상 하던 잔소리를 습관처럼 반복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채원의 짜증 섞인 대꾸가 들려오질 않는다. 무언가 할 말을 숨기고 있는 듯한 낯빛.

“너 무슨 일 있니?”

“아니….”

“그러고 보니 왜 오늘 내려왔어? 회사 바쁘다며.”

“그냥… 엄마 보고 싶어 왔다니까 안 믿네.”

채원이 젓가락을 깨작거렸다.

“뭔데 그래. 말해 봐.”

“…….”

“채원아.”

띠링.

수경의 부름과 거의 동시에, 식탁 위 채원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안녕하세요? 스튜디오K 조 실장입니다. 강 감독님께서 내일 시간 괜찮다고 하시는데, 혹시 오후 4시 미팅 가능하십니까?]

채원의 젓가락질이 멈추어졌다.

식욕이 갑작스레 떨어졌다. 김 비서 때문은 아니다. 강승재를 만날 생각에, 분명 긴장한 탓이었다.

* * *

“엄마, 나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회사 가봐야 할 것 같아.”

휴대폰 메시지 창을 한참 바라보던 채원이 작게 중얼거렸다.

“뭐? 휴가 냈다더니.”

“응… 근데 갑자기 중요한 미팅이 잡혀서….”

“너 말고 다른 직원은 없어?”

“내 담당이라, 암튼 내가 꼭 가야 돼.”

얼마나 대단한 업무이길래 휴가 중인 직원까지 호출을 할까, 갸웃거리던 수경이 식탁 앞의 채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얘.”

“어?”

“물 마셔가면서 먹어. 짜겠다. 김에 김치만 싸서 몇 번을 먹고 있네 계속.”

“아….”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의 말처럼 입안 전체가 짜고 매웠다. 뭘 먹는지도 모르고 삼켰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왜 갑자기 얼이 빠졌어? 무슨 문자길래.”

“방금 말했잖아. 내일 미팅 잡혔다고.”

“불편한 자리야?”

“아니 뭐 그냥….”

“엄마가 딱 보면 알지. 아니, 뭐, 그냥, 이 아니구만. 무슨 일인지 얼른 말해 봐. 답답하게 눈만 굴리고 있지 말고….”

수경은 채원을 적극적으로 닦달했다. 시원히 속을 터놓지 않는 딸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미팅 상대가 나랑 구면이라 어색해서 그래요. 미국에 있을 때 잠깐 알던 친군데, 우연히 다시 만나게 돼서….”

엄마의 보챔이 성가셨는지, 채원이 결국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의논 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청주행 버스에 무작정 몸을 실은 것도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기 위함이었으니.

“어머, 세상 참 좁다 정말. 아는 사이끼리 뭐가 어색해 어색하긴. 회의 진행도 훨씬 수월할 테고.”

“그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냐.”

채원이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좀 맺힌 게 많거든요.”

회사 일이 어그러질까 봐 걱정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배고프다며 계란을 쓱쓱 비벼 잘도 먹더니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질 않나. 아무래도 다른 감정이 섞인 듯했다.

“그 사람… 남자구나?”

채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경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박봉 견뎌 가며 무슨 동물을 구호한다고 저러나 속 터졌는데… 이직 안 하고 버틴 보람이 있다, 우리 딸.”

“엄마도 참, 여태 뭐 들었어? 사이 안 좋다니까 엉뚱한 소리를 해.”

“원래 앙숙끼리 정들면 더 무서운 법이야. 미국에서 만나고 한국에서 또 만나고, 그러긴 어디 쉽니? 이게 다 인연인 거지.”

채원으로부터 생전 처음 남자 이야기를 접하게 된 수경은 매우 들뜬 상태였다. 소개팅으로 만났든 업무상 엮였든, 사이가 좋든 나쁘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뭐 하는 남잔데? 나이는? 여자 친구 있는지 물어봤어?”

“휴, 됐어요. 엄마한테 말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직업이 뭐냐니까?”

“사진 찍어요.”

마지못해 흘린 채원의 한마디에 수경의 설레던 낯빛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뭐? 사진? 카메라 들고 다니는 사진사라고?”

“포토그래퍼.”

“영어나 한국어나 돈벌이는 다 똑같지. 다른 건 몰라도 예술 하는 놈들은 안 되는데… 네 월급도 병아리 눈곱만 하면서 남자까지 들쭉날쭉 벌어오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걸. 본인 사무실은 있는 거야? 월세 얼마에 있는지 그것부터 슬쩍 물어봐. 미리 정 붙기 전에.”

엄마의 고루한 발언에 채원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강승재의 회사를 동네 사진관 정도로 알고 있나 보다.

“지금 웃음이 나와? 실속 없는 놈한테 코 꿰는 순간 여자 인생 망하는 줄은 모르고….”

“그럴 일 없어요. 상대가 날 싫어한다니까.”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차라리 잘된 거야. 너도 괜히 친한 척하지 말고 할 말만 간단히 해. 알겠어?”

“엄마, 1분도 안 돼서 말 바뀐 거 알아요? 좀 전엔 인연이라며.”

“새겨들어 이것아. 공무원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월급 따박따박 받아오는 안정적인 남자 만나라고. 너보다 단돈 만 원이라도 더 버는 놈이랑 살아야 엄마가 덜 속상하지.”

채원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수경은 고리타분한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판에 박힌 소리였지만 채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강승재와의 역사를 읊기엔 그 깊이와 길이가 너무도 까마득하여, 입을 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스튜디오K 8층 미팅룸.

약속 시간 20분이 넘도록 모습을 비치지 않는 강승재가 오히려 고마웠다.

채원은 조 실장이 미리 내어준 커피를 한 모금 넘기며 정신없이 회의 자료를 훑고 있었다.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휴가까지 포기하고 회사에 들러 허둥지둥 준비를 하였으나, 완벽히 대비하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쉬웠다.

하지만 갑작스레 잡힌 미팅을 탓할 수는 없었다. 스튜디오K 측에서 콜라보 제안을 받아주기만 한다면 날짜와 장소쯤이야 얼마든지 맞출 수 있었다. 연말까지 어떻게든 모금액 기준을 달성해야 하는 POA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감독님께서 조금 늦으실 모양입니다. 다시 회사로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미팅 끝나면 바로 퇴근이라 급하지 않아요. 걱정 마세요.”

채원이 웃으며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미안합니다. 촬영이 늦어져서.”

짧은 사과와 함께 승재가 모습을 나타냈다.

심플한 블랙 니트에 워싱 처리된 블루진. 9년 전의 잔상이 겹쳐질 만큼, 오늘 그의 차림은 자유분방했다. 촬영 스케줄이 잡힌 날에는 활동성을 위해 그리 입는 듯했다.

“조 실장이 먼저 검토하고 있어도 되는데.”

“그래도 제가 전달하는 것보단 직접 들으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요. 윤 대리님도 시간 괜찮다 하시고.”

승재가 채원을 힐끔거리곤 곧 시선을 돌렸다. 눈이 잠깐 마주쳤으나 딱히 감정이 섞인 것은 아니었다.

“여기, 저희가 기획한 구체적인 일정입니다.”

채원은 준비해 온 자료 2부를 조 실장과 승재에게 각각 건넨 후 설명을 이어갔다.

“사진전은 일단 12월 말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현재 대관 가능한 전시실 리스트 작성 중입니다. 완료되면 보다 정확한 날짜를….”

“광화문 SJ나 코엑스 청송 전시관. 장소는 둘 중 하나였으면 합니다.”

채원의 말을 뚝 자른 승재는 전시회 장소를 두 곳으로 한정 지었다.

“가능합니까?”

“아… 그게… 무, 물론 접근성이 좋은 게 우선이 되어야겠지만….”

무리한 요구에 당황한 채원은 말끝을 흐리며 자료를 급히 넘겼다.

누가 모르겠나. 도심 한복판에 사진전을 개최하면 인구 유입도 끊이지 않을 테고, 그만큼 모금액도 늘어나겠지.

하지만 그녀가 후보지로 선정해온 전시회장 열 군데 중, 광화문과 코엑스 지역은 어디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값비싼 대관료가 문제였다. 적어도 3일은 사진전을 열어야 할 텐데, 턱없이 모자란 POA의 예산으로는 서울 변두리 건물을 알아보기에도 벅찼다.

“장소는 내부 회의 거쳐서 최대한 맞춰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채원이 억지웃음으로 난감한 상황을 무마시킬 무렵.

“그리고 여기, 동물을 컨셉으로 한 사진전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 부분은 수정 바랍니다. 새로운 작품을 내놓기엔 스튜디오 일정이 워낙 타이트해서.”

승재가 또 한 번 브레이크를 걸었다. 다분히 의도성 짙은 태클이었다.

* * *

두 시간이 넘도록 까이고 까인 채원의 기획안은 빼곡한 메모와 빨간 줄투성이였다. 2차 미팅 날짜를 일방적으로 픽스한 승재는 약속이 있어 먼저 나가겠다는 말과 함께 회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후우….”

콜라보 제안을 선뜻 수락한다기에 웬일인가 했더니, 아예 대놓고 괴롭힐 작정인가 보다. 기획안을 통째로 갈아엎어야 직성이 풀리려나.

“감독님께서 오늘 좀 날카로우셨죠?”

한숨을 쉬며 널브러진 자료들을 힘없이 챙기는 채원을 향해 조 실장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아까 촬영 중에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다음 주 미팅 땐 분위기 괜찮을 거예요. 저도 오늘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윤 대리님.”

강 감독이 POA 측에 요구한 수정 사항은 누가 들어도 무리한 구석이 있는, 한마디로 갑질 행위였다. 답답할 정도로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하던 회사 대표가 왜 유독 이 단체에게만 까다롭게 구는지, 수익이 1원도 발생하지 않아 괜스레 억울한 생각이 든 것인지, 오늘의 미팅은 조 실장 입장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았다.

“저희가 준비를 허술하게 해 온 탓이죠. 제가 강 감독님 의견 최대한 반영해서 기획안 수정해오도록 하겠습니다.”

채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 실장은 채원과 승재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온화롭기로 소문난 강승재가 왜 나만 보면 으르렁댈까, 당연히 이해가 안 되겠지.

오늘 일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사진전 준비가 시작되면 또 얼마나 어깃장을 놓고 까탈을 부릴지 벌써부터 막막함이 밀려왔으나, 그에게서 떨어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밀릴 때로 밀려나 절벽 끝에 간당간당 서 있는 건 POA만이 아니었다. 회사가 망하기 전에 스스로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아 그를 찾은 것이니, 온몸에 얼음 가시가 돋쳤다 해도 죽을힘을 다해 강승재를 끌어안을 거라고, 채원은 재차 다짐했다.

정혁을 통해, 몰래 들어간 개인 SNS를 통해 주기적으로 승재의 소식을 접했다. 매일이 제자리걸음인 본인의 삶과는 달리, 강승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갔다.

9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를 잊고 산 적은 없다. 처음에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다음엔 염치가 없어서,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덧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있어서, 연락을 하지 못했을 뿐.

정창길 회장을 마음에서 지운 후, 엄마와 뒤늦은 모정을 나누고 아저씨를 새 가족으로 받아들였지만, 채원의 결핍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심장 한가운데가 휑 뚫린 것처럼 공허했다. 왜일까. 나는 왜 계속 이 모양일까. 이유조차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래서 또다시 제 몸에 상처를 냈다. 살갗이 쓰리고 피부에 홧홧한 열이 돌면 그제야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피가 맺힌 자국을 볼 때마다 강승재를 떠올렸다.

연고를 발라주던 그의 손길. 나를 대신해 울던 착한 남자의 눈망울. 그런 너에게 나는 참 못된 말을 골라 하고, 못된 짓만 골라 시켰지.

지금이라면 달랐을까. 서른 넘어 널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었더라면, 그럼 조금은 더 솔직해질 수 있었을까, 너에게.

무거운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터덜터덜 거리를 걷던 채원이 걸음 속도를 늦추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무도 없는 원룸에 발을 들이기 싫었다. 우울이 파도처럼 밀려와 술 생각이 절실해졌다.

“여보세요. 류… 난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나랑 맥주 한잔할래? 내가 살게.”

강승재가 그리운 날엔 언제나 류정혁을 귀찮게 했다. 어떻게든 돌려 묻다 보면 자투리만 한 승재의 소식이라도 건질 수 있었으니까.

「아, 미안한데 내가 오늘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미안. 다음에 마시자.」

하지만 그마저도 오늘은 불가능할 듯싶다. 요즘 들어 부쩍 얼굴 보기 힘들어진 류정혁.

‘셋 중 대표님 아닌 건 나밖에 없네…. 9년 동안 뭐 하고 살았니, 윤채원.’

정혁의 거절에 어깨가 추욱 처진 채원은 엷은 조소를 흘리며 걷던 길을 걸었다.

겨울 해는 짧았다. 저녁 7시. 주변은 벌써 캄캄했다.

* * *

“아, 미안한데 내가 오늘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 마시자. 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목소리를 내리깔고 통화를 마친 정혁이, 테이블 맞은편 상대를 향해 욕지거리를 날리며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이젠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너랑 술 마셔야 되냐?”

“거짓말한 게 뭐가 있어? 나 정도면 중요한 선약이지.”

“닥치고, 빠르게 마셔라 오늘은. 나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한다고! 할 일이 산더민데 이 와중에 술이라니….”

혀를 끌끌 찬 정혁이 ‘중요한 선약 상대’에게 독한 위스키 한 잔을 대뜸 건넸다.

윤채원과 엮인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정혁을 찾는 강승재. 둘 사이에 애매하게 끼인 기분이라 요즘 내내 불편함을 안고 사는 정혁이었다.

“뭐가 그렇게 복잡한데? 좋으면 다시 만나든가, 아님 나 너 싫다, 딱 잘라 말하든가.”

“그딴 감정놀음 문제가 아니라고. 너 내가 윤채원 때문에 어땠는지 기억 안 나? 사람이 최소한 예의나 개념은 갖추고 살아야지. 대체 걘 무슨 생각으로 나를… 후우, 정말.”

문장 끝을 흐린 승재가 위스키를 넘겼다. 긴 한숨이 잔에 채워진다.

정혁은 별 대꾸 없이 술을 들이켰다. 섣부른 조언으로 또 다른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말을 아껴야 했다. 강승재가 윤채원을 얼마나 힘들게 떨쳐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9년 전, 채원이 예고도 없이 사라진 후, 승재는 한 학기 등록금을 고스란히 날렸다. 전 과목 F를 띄우고는 윤채원을 찾아 헤맸다. 전화도 수백 통 걸어보고, 이메일도 지겹도록 보냈다.

자퇴했다더라, 번호도 바뀐 것 같다, 몇 번을 말해주어도 정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함께 보리를 데려온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한창 생일 파티 계획을 짜던 그녀가 다짜고짜 한지운과 잤다며 이별을 통보했다. 그리고 바로 자퇴를 해?

“그때… 윤채원 자퇴한 거 정말이야?”

“또 시작이네. 9년째 같은 질문, 징글징글하다.”

“왜 자퇴했대?”

“…….”

“…물어본 적 있을 거 아냐.”

승재가 궁금했던 질문을 정혁에게 물었다.

“전공이 적성에 잘 안 맞았나 보더라고. 학비 아깝단 생각 들어서 그길로 한국 들어왔다던데.”

“그 말을 믿어?”

“복지학과 편입해서 결국 NGO 들어갔으니, 못 믿을 것도 없지 뭐.”

단순한 놈. 가끔은 류정혁의 이성적인 판단이 부러울 때가 있다.

“그니까 넌… 윤채원이 나랑 헤어진 시기, 학교를 자퇴한 시기, 한국 들어온 시기, 이게 우연히 겹쳤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지?”

“제삼자 생각이 뭐가 중요한데.”

“내 머릿속이 꽉 막혀서 사고가 불가능하니까 묻는 거 아냐 지금.”

“궁금하면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봐. 바쁜 사람 취하게 하지 말고.”

정혁이 남은 잔을 비우고 코트를 집어 들었다.

“야! 앉아, 인마! 아직 8시밖에 안 됐는데… 벌써 가게?”

“너 때문에 12시 퇴근할 거 새벽 2시로 미룬 줄이나 알아라. 나머진 혼자 마셔.”

“계산은 내가 할….”

“벌써 했어. 간다.”

툭툭 어깨를 두 번 치고 떨어지는 손. 쿨내 진동하는 친구 놈의 퇴장에 승재는 억지로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혼자 마시기엔 술이 너무 썼다.

* * *

찬 바람을 쐰 탓에 뒤늦은 취기가 올라왔다. 비틀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몽롱하고 적당히 나른한.

덕분에 촘촘히 날을 세웠던 신경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했다.

다행이었다.

15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느릿한 동작으로 누른 승재는 피로한 몸을 한쪽 벽에 가만히 기대었다.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오늘은 일찌감치 잠이나 자봐야지. 술이 더 깨기 전에.

술이 깨고 나면 또다시 윤채원의 얼굴이 떠오를 테고, 그럼 또 어김없이 부아가 치밀어 오를 테니.

딩.

하지만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승재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오늘도 편히 잠자기는 글러 먹었다는 것을.

신기하게도 관자놀이가 찌릿찌릿 울렸다. 생경한 편두통이 생겨나고, 미간에 욱신 힘이 들어가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뗄수록 심장이 왈칵 펌프질을 해대는… 다시금 곤두서버린 신경.

“강승재….”

“…….”

“약속 있다더니… 일찍 끝났네?”

윤채원 거부 반응이었군.

“왜 왔어 여긴.”

“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

빛을 잃은 에나멜 구두를 푹 꺾어 신은 그녀가 엉거주춤 무릎을 폈다. 현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 청승을 떤 모양이다. 다리에 쥐가 났는지 가느다란 발목이 자꾸만 휘청거렸다.

“미팅 끝나고 그렇게 빨리 가버릴 줄은 몰랐어. 같이 저녁 먹자 추근대려던 참이었는데….”

그래.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넌 그런 사람이었지.

자신의 감정이 먼저인,

떠날 때도, 돌아올 때도, 미안하다 사과를 할 때도,

언제나 멋대로 일방적인.

미안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냐.

너의 그런 성격은 날 더욱 미치게 만들 뿐이라는 걸.

너는 나를

아직도 한참 모르고 있다.

“타이밍 죽이네. 나도 지금 네 생각 중이었거든.”

“아… 정말?”

“한잔해서 그런가, 윤채원이 딱 떠오르잖아. 9년 만에 쑤셨는데도 와, 씨발… 좆 무는 기술이 보통 아니더라 너.”

“…….”

상기된 그녀의 두 볼이 처절하게 붉어졌다.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 없는 밤.

“들어와.”

현관문을 먼저 연 승재가 건조한 눈빛으로 채원을 불렀다.

“남자 집 앞에서 기다린 보람은 있어야지.”

원 없이 울게 해줄게 내가.

* * *

달칵.

승재가 샤워를 마치고 다시 모습을 비칠 때까지, 채원은 보리를 끌어안은 채로 소파 한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팔꿈치 중간쯤 걸쳐진 숄더백, 가지런히 붙인 두 다리, 단추가 채워진 코트와 목을 단단히 여민 체크무늬 머플러. 미동 없는 그녀의 품이 퍽 안정적이었는지, 보리는 세상모르고 숙면 중이었다.

“뭐하냐.”

젖은 타월을 세탁물 함으로 툭 던진 승재는 입꼬리 한쪽을 비죽 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어?”

“거기서 지금 뭐 하냐고.”

“아니 그냥, 너… 기다렸지.”

“너?”

이죽이던 웃음마저 사라진 남자의 입가.

“응…. 너 샤워하는 것 같길래….”

뭐지. 내가 또 기분을 상하게 했나.

채원은 마른침을 겨우 넘겨 목을 적셨다.

“이해력 떨어지는 타입은 아닌 줄 알았는데…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이젠 아예 너, 너, 거리네.”

“아, 미안….”

서늘한 그림자가 얼굴을 가렸다. 채원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승재가 그녀의 품에서 보리를 빼앗아갔다.

“보리 함부로 만지지 마. 주웠다 버렸다 하는 물건 아니라고.”

“나 보리 물건 취급한 적 없….”

“옷이나 벗어.”

폭신한 담요가 깔린 울타리 안으로 보리를 안전하게 내려놓은 승재가 메마른 눈으로 채원을 내려다보았다.

“…뭐?”

“목적 있어서 온 거잖아.”

“…….”

“괜히 시간 끌지 말자. 나 내일 아침 일찍 나가봐야 돼.”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젖은 머리칼이 강승재의 반듯한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채원은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색 바랜 브라운 헤어가 짙은 암갈색 눈동자와 퍽 잘 어울렸다. 실내 촬영이 대부분인지 피부가 유독 하얘 보인다. 예전엔 그을린 콧등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는데. 날렵해진 턱선과 툭 불거진 목젖.

아… 살이 많이 빠졌구나. 어쩐지 묘하게 날카로워졌다 했더니….

“윤채원.”

“응?”

“하기 싫으면 가.”

“자, 잠깐만….”

채원은 벌떡 몸을 일으켜 무심히 등을 돌리려는 승재를 막아섰다. 조금 전 경고와는 달리, 그녀의 이름을 잘만 부르고 있는 강승재의 모순된 행위를 슬며시 지적해볼까 싶었으나, 곧 생각을 접었다.

무미하게 시선을 내린 저 남자는 9년 전의 강승재가 아니었고, 단추를 허둥지둥 끄르고 있는 나 또한 9년 전 윤채원이 아니었으니. 그저 지금은….

“할게, 할 거야. 하고 싶어, 너랑.”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드는 게 최선이었다.

바르르 떨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황급히 머플러를 풀고 코트 깃을 젖힌다. 네가 받은 상처가 조금이라도 덜어진다면 이깟 옷쯤이야 백번 천번 벗을 수 있다고.

채원은 모직코트와 머플러, 니트 원피스를 차례로 바닥에 떨구었다. 베이지색 슬립 안으로 비슷한 컬러의 브래지어가 얼핏 비쳤다. 흔한 디자인이었다.

“스타킹도… 벗을까?”

“다 벗어.”

“전부 다?”

승재가 입 열기도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나 샤워를 아직….”

“다음부턴 씻고 와. 속옷도 좀 신경 쓰고.”

불쑥 뻗친 남자의 손이 여린 어깨에 걸린 브래지어 끈을 짧게 튕겨냈다. 보풀이 일어난 얇은 스트랩이 맨살에 밀착되며 찰싹 소리를 냈다.

“다른 놈 집 갈 때도 이래? 너무 성의가 없잖아.”

울컥 목이 멨다. 뜨끈해진 눈두덩이를 들키지 않으려 채원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어디까지 사람을 몰아세울 작정인지, 강승재는 고요한 낯빛을 띤 채 맹독을 뿜었다.

“미안…. 기획안 자료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다음엔 내가 더 신경 써서 올 테니까….”

채원은 시선을 내린 채 쭈뼛쭈뼛 변명을 늘어놓았다. 자존심 따윈 진작 류보리에게 던져준 사람처럼.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를 악물고 모진 말을 쏟아부었는데도,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안하다 사과를 하고 있다. 멍청하게.

단단히 미쳤거나, 아프거나, 아니면 윤채원 가면을 쓴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당한 이별만큼이나 납득이 가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승재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서, 언제 벗을 건데?”

“아, 그게… 지, 지금….”

슬립을 발목으로 떨어트린 채원이 손을 뒤로 뻗어 브래지어 후크를 툭, 끌렀다. 처음 겪는 수치심에 얼굴이 온통 붉게 타올랐지만 동작을 멈추지는 않았다. 마지막 남은 속옷마저 끌어 내렸을 때, 승재는 눈앞의 여인이 윤채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밝은 불빛 아래 의연하게 옷을 벗으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넌 참….”

한 발자국 물러선 승재가 팔짱을 끼고 채원의 나신을 관찰하듯 훑었다.

“변한 게 없구나.”

탐스럽게 굴곡진 몸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당당해 매번.”

“무슨 소린지 모르겠… 읏….”

남자의 손바닥이 젖가슴 한쪽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부탁을 하려면 궁색한 표정이라도 지어야지 최소한.”

“강승재, 아파….”

“뭐? 다시 불러 봐.”

“하윽.”

풍성한 머리채가 억센 힘에 의해 뒤로 젖혀졌다.

“다시 불러 보라고.”

남자의 무감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녀린 척추 선을 따라 오스스 소름이 돋아났다.

“승재 씨….”

채원은 힘겹게 입을 달싹거렸다. 그녀는 강승재 앞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원래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잖아 너. 회사가 많이 힘들긴 한가 봐.”

“…….”

“9년 만에 갑자기 외로워져서, 남자가 궁해서, 날 찾아왔다고? 아, 또 뭐랬더라. 지난 일 사과하고 싶다 했던가? 씨발, 누굴 호구로 아나.”

“…그건 진심이었어. 정말이야. 진작 사과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입 다물어.”

승재의 오른손이 채원의 목선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너, 앞으로 다시는 나한테 미안하단 소리 하지 마. 비슷한 그 어떤 말도 지껄이지 마.”

탁하게 가라앉은 묵직한 음색에 심장 가운데가 칼로 벤 듯 아팠다.

9년 전 내가 그에게 준 상처가 조금도 아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애써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왜 우는데.”

“…….”

“왜 질질 짜냐고 짜증 나게!”

“미안….”

채원은 붉은 입술을 꼭꼭 씹으며 눈물을 삼켰다. 그녀의 미미한 음색이 승재에게 또 한 번의 사과를 건네었을 때, 쇄골과 목선을 투박하게 움켜잡은 남자의 손이 일순간 떨어졌다.

“그새 까먹은 거야?”

싸늘한 목소리가 온몸을 얼어붙게 한다.

“말해 봐. 방금 내가 뭐라 했는지.”

채원이 알몸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승재는 그녀를 환한 거실에 세워놓은 채 취조하듯 물었다.

“왜… 우는 거냐고….”

“그 전에.”

“미안하단 소리… 하지 말라고… 다시는….”

“다행히 청력 문제는 아닌가 보네. 근데 어쩌냐? 오늘은 너, 그냥 가야겠다. 윤채원 사과 한마디에 발딱 섰던 게 확 죽어버렸거든.”

황망하게 눈꺼풀을 깜박거리는 채원을 향해, 승재가 저급한 단어를 뱉어내며 차게 웃었다.

“도저히 할 맛이 안 나서.”

“안 돼. 승재 씨, 잠깐만….”

채원이 다급하게 승재를 불러 세웠다.

“내가 해줄게.”

“뭐?”

“내가… 다시 하고 싶게 만들어 줄 테니까….”

윤채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잇따라 벌어졌다. 그녀가 승재의 팬츠를 끌어 내림과 동시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너 이게 무슨… 읏.”

예상치 못한 자극에 남자의 문장 끝이 흐려졌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이 불뚝 튀어나온 드로어즈 앞부분을 한껏 머금었다.

성을 낼 겨를도 없이, 단단한 허벅지가 주춤 밀려나 테이블에 쿵 닿았다. 모서리 끝을 겨우 지탱한 남자의 손바닥엔 눅진한 땀이 배어 나왔다.

어쭙잖은 허세가 드러난 것 같아 귓불이 뜨끈해졌다. 채원의 노력이 필요 없을 만큼, 강승재의 본능은 이미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상태였다.

구석구석 타액을 적셔가며 채원이 정성스레 속옷을 핥자, 안에 갇힌 물건이 비좁은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대리석 바닥에 눌린 동그란 양 무릎이 무지근히 아파 왔지만, 아무래도 괜찮았다.

채원은 마음이 조급했다. 자세를 바꾼다거나 장소를 옮긴다거나 하는, 조금의 변화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손을 내치고 등을 돌릴까 무서웠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한 번 더 거절을 당한다면 그땐 정말로 옷가지를 챙겨 입고 여길 나가야만 했으니까. 두 번 들이댈 뻔뻔함까진 없었다.

포근한 섬유유연제와 청량한 보디워시, 남자의 투박한 체향이 묘하게 뒤섞여 코끝을 자극한다. 축축해진 앞섶을 한참 어르던 채원이 갑갑해 보이는 그의 남성을 해방시켜주기 위해 드로어즈 끄트머리를 잡았을 때.

“하아, 그만.”

뜨겁게 달아오른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더 할 수 있어.”

“그만해.”

“하게 해줘.”

“야!”

버럭 소리를 지른 승재가 가느다란 왼팔을 세차게 잡아당겨 몸을 일으켰다. 채원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폈다. 억센 손아귀에 잡힌 새하얀 팔뚝은 금세 홧홧한 열이 일었다.

“대체 왜 이래!”

“…….”

“술 마셨냐? 취했어? 아님 정신이 돈 거야? 이쯤 망신 줬으면 알아서 꺼져야 정상 아니냐고!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지만 당장 접어라. 아랫도리 지겹게 빨아줘도 바뀌는 건 없으니까.”

“필요해….”

말라붙은 입술이 자신 없이 달싹거린다.

“승재 씨가 필요해서….”

“필요? 하, 정말….”

승재가 기가 찬 듯 조소를 머금었다.

“단어 선택 참 좆같이 하네. 미국서 알던 지질한 놈이 아니라 다시 줍기로 하셨나? 오랜만에 만나니 꽤 쓸모 있어 보였나 봐?”

“그게 아니라… 나는….”

채원은 어금니를 물고 말을 삼켰다. 이상하게도 한마디를 보탤수록 그와의 간격이 한 뼘씩 밀려난다.

혼자 메말라가는 게 무서워서. 9년의 낮과 밤 동안 너를 그리며 울던 비정상적인 후유증, 이젠 그만 앓고 싶어서… 그래서 네가 필요하다 말하려던 건데.

답답한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차올랐다. 섣불리 입을 여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승재는 그녀의 모든 면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허리 숙여.”

“윽.”

승재는 채원의 몸을 월넛 테이블 위로 엎어뜨렸다.

“줄줄 우는 거 보니까 갑자기 또 꼴려서 말야. 앞으로 계속 질질 짜는 전략으로 가면 되겠다 너. 대신 입은 절대 열지 말고.”

“흑….”

“그래, 더 울어. 소리 내서 울어 봐 어디.”

반쯤 내린 드로어즈 틈으로 검붉게 열이 오른 성기가 한껏 고개를 쳐들었다.

승재는 꽉 다물린 엉덩이골을 양옆으로 벌리고 페니스 선단을 음부에 비볐다. 미끄덩한 액이 여린 살 주변에 엉성히 묻어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손에 쥔 콘돔 포장지를 어금니로 쭉 찢어냈다.

일련의 과정들은 빠르고 능숙했다. 감정 없는 섹스. 강승재는 몸소 그것을 보이려는 듯했다.

두꺼운 성기가 빠듯한 입구에 끼여 속살을 무자비하게 짓이겼다. 다리 사이로 지잉, 쓰라린 통증이 퍼진다. 그녀는 아직 충분히 젖은 상태가 아니었다.

“흐으….”

울음 섞인 신음에 잠시 멈칫거리던 승재가, 채원의 등을 억세게 누른 채 곧 허리를 쳐올렸다. 골반 전체가 흔들리며 거대한 불덩이가 들어와 박혔다. 승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아찔해졌다.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막아냈다.

“하아, 씨발….”

그녀를 몰아붙이기 위한 욕설이 아니었다.

병신 새끼.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려서는.

승재는 스스로에게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윤채원에게 촘촘히 반응하는 제 몸에, 그녀의 고운 피부와 톡 불거진 날개뼈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태평한 본능에.

열이 솟구쳤다. 게다가 그녀는.

“윽… 흐윽….”

정말 쉼 없이 흐느꼈다. 어디 한번 계속 울어보라는 비아냥을 곧이곧대로 따르려는 것인지, 끈질기게, 서럽도록 울어댔다.

듣기 싫었다. 윤채원의 그 어떤 소리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힘에 부쳤다. 9년 전이든 지금이든 그녀를 감당하는 일은 언제나 버거웠다.

“우는 건 좋은데 소리 좀 낮추라고. 누가 들으면 억지로 하는 줄 알겠어.”

“흐읍.”

커다란 손바닥이 채원의 입을 틀어막았다.

“훨씬 낫네.”

채원의 울음을 억지로 누른 승재는 잠시 멈추었던 허릿짓을 이어갔다. 날이 선 빈정거림과 함께 덜컹덜컹 테이블이 흔들렸다. 채원의 등허리 위로 육중한 남자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불친절한 손길은 여린 입술을 짓이기고 코를 막고 턱을 눌렀다. 딱딱한 나뭇결이 자꾸만 늑골을 쳤다. 숨이 막혔다.

채원은 바르작거리며 불규칙한 호흡을 간신히 뱉어냈다. 고개를 가누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쪽 뺨을 책상에 대려는 순간 남자의 힘에 의해 또다시 턱이 들렸다. 얼굴의 반을 감싼 억센 손바닥에서는 쌉싸래한 스킨 향이 번졌다.

눈물과 타액 범벅으로 온통 엉망이 되어갈 때쯤.

어처구니없게도, 바싹 말라있던 내부가 흥건히 젖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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