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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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상처
* * *
“안 돼, 절대 안 돼!”
익숙한 고함 소리에 승재가 스르르 눈을 떴다.
“이게 네 허락이 필요한 문제야?”
“그럼 아냐? 강승재 들일 때도 내가 분명 너한테 먼저 물어본 걸로 아는데.”
“강승재는 사람이고!”
“짐승이나 사람이나! 개는 밥 안 먹어? 물 안 마셔? 아님 월세를 N분의 1로 내든가!”
또 아침이 밝았나 보다. 문밖에서 떽떽거리는 것을 보니. 당사자도 없는데 자꾸 남의 이름 언급하네 저것들이. 이번엔 싸움의 주제가 뭔지 대충 알 것 같았지만.
“야, 왜 그래 또….”
“강승재!”
채원과 정혁이 동시에 승재를 불렀다. 아군의 등장에 반색을 하는 윤채원과 쌍욕을 뱉기 직전의 류정혁.
끼잉.
그리고 코를 바닥에 킁킁 박은 채 천진난만하게 부엌을 탐험 중인 보리.
험난한 하루가 예상된다.
“나 화장실 좀….”
일단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게 낫겠다 싶어 슬슬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야! 어딜 가 지금 이 상황에! 당장 안 와?”
한껏 열이 오른 정혁의 성난 목소리가 승재의 뒤통수에 푹 꽂혔다.
“급하다고. 볼일 볼 자유도 없어?”
“넌 오늘부터 화장실도 내 허락 맡고 가 새끼야! 완전 나사 빠져서는, 윤채원 말릴 생각을 해야지 어디서 둘이 작당을….”
“작당을 한 게 아니라… 아 어쩌라고! 저 조그만 게 풀숲에서 울고 있는데 그냥 무시해? 너 같으면 그랬을 거 같아?”
“난 동물구조센터에 연락을 했겠지.”
“그….”
그런 방법이…. 그래, 너 잘났다 인마.
섣불리 대거리를 벌이기엔 논리가 너무 빈약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저놈 말이 다 옳다. 공공기관에 먼저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다. 윤채원에게 얼렁뚱땅 휩쓸릴 게 아니라.
“우선 전단지 붙이고 주인 찾아보긴 할 건데, 것도 쉽진 않을 거야. 차라리 현실적인 대책을 상의하는 게….”
“보증금 좀 박아놨다고 엄청 유세네. 보리 월세 내가 내면 되잖아!”
“야, 채원아….”
눈을 보름달처럼 둥글게 크게 뜨고 포르르 성질을 부리는 것조차 귀엽다 여겼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강승재 시선에 한정된 장면이었다. 승재는 채원의 팔을 지그시 잡아끌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언제나 류정혁의 기분을 먼저 헤아려야 했다. 가뜩이나 둘이 붙어 꽁냥질을 한다고 날이 서있는데, 활활 타고 있는 장작에 기름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내가 책임지고 보리 챙길게. 주변에 피해 가는 일 없게 할 테니까, 이번 한 번만 넘겨주면….”
다행히 승재의 신호를 알아챘는지, 채원이 한 톤 가라앉은 음색으로 협상을 시도했다.
“이번 한 번? 매번 내가 너희 둘 사정 봐주고 있는 거 같은데.”
“이게 진짜!”
“류정혁, 너도 그만 좀….”
낑. 끼잉.
온 부엌을 꼬물꼬물 훑고 다니던 보리가 때마침 정혁의 발가락을 야금 물며 낑낑거렸다.
눈치 빠른 녀석. 이 집 안의 실세를 본능적으로 파악했구나 네가.
“저리 안 가?”
여전히 목청만 돋울 뿐, 예상대로 정혁은 제 발에 붙어 있는 꼬물이를 쉽사리 내치지는 못했다. 꼬불꼬불 뭉쳐진 갈색 털 뭉치가 따뜻한 온기를 뿜으며 꼬무락거리는데 더 이상 뭘 어찌할 수 있겠나.
“후아, 정말….”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이는 정혁의 모습에, 채원과 승재가 티 나지 않게 눈을 맞추며 안도했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얘길 빼먹었네.
“참, 보리 말야. 성이 류씨야. 류보리.”
“뭐?”
“보증금 지분 가장 많은 사람 성 따르는 게 이치에 맞을 것 같아서, 우리가 특별히….”
“장난하냐? 누구 맘대로 내 성을 갖다 붙여!”
“왜, 잘 어울리잖아. 입에 착착 붙는 게.”
“나더러 저 개새끼 형 노릇 하란 거야 지금?”
“형 싫으면 부모 노릇이라도 해주든가. 개 아버지.”
채원의 한마디에 승재가 어금니를 콱 물었다. 여기서 웃으면 진짜 안 되는 건데, 픽픽 새어 나오는 실소를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었다.
“어우, 내가 어쩌다가 네발 달린 짐승이랑 한집에….”
끼잉.
기특하게도, 보리는 정혁을 좋아했다. 싸한 담배 향이 맘에 들었는지 아님 저놈의 스킨 냄새가 취향이었는지, 류정혁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탓에 채원이 서운함을 느낄 정도였다.
“신기하네. 같은 성씨라는 걸 아나 봐.”
“우리 보리 천재 견인가? 이러다 TV쇼 나가고 막 그러는 거 아냐?”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커피를 내리는 정혁의 뒤에서 승재와 채원이 키득거렸다.
“…맘대로 지껄여라, 지껄여.”
그렇게들 좋을까.
피식, 정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랑 놀음도 매일 보고 들으니 눈꼴심이 많이 옅어졌다. 오히려 어떤 면으로는 잘됐다 싶었다. 무엇보다 항상 위태위태하던 윤채원이 부쩍 밝아진 것 같아 안심이었다. 강승재야 워낙 충만한 녀석이니 문제없고. 너무 차고 넘쳐서 그게 오히려 걱정이지.
“너흰 학교 안 가? 난 열 시에 시험이라….”
“아 맞다. 류, 오늘 전공시험 있댔지. 나랑 승재는 보리 데리고 일단 병원부터….”
띠링.
식탁에 앉아 종알종알 스케줄을 읊던 채원이 갑자기 말을 끊고 휴대 전화로 시선을 내렸다.
“…왜, 누군데?”
정적이 오래가는 것이 이상했다. 승재가 넌지시 물으며 채원의 휴대 전화를 힐끔거렸으나, 새하얀 손등만 보일 뿐, 메시지 창은 이미 가려진 상태였다.
“강승재, 미안하지만… 보리, 병원… 혼자 데려가 줄 수 있어?”
“뭔데 그래. 무슨 일 생긴 거야?”
“류…. 오늘 너 늦게까지 수업 있다고 했지? 일찍 오는 건 아니지?”
“어. 6시 넘어 끝나긴 하는데… 그건 왜.”
커피를 마시던 정혁도 의아한 듯 채원을 바라보았다.
“진짜 미안한데, 다들 집 좀 비워줘야겠다. 오후 5시 전까진 여기, 나 혼자 있을게.”
채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혁에겐 익숙한, 승재에게는 아직 낯선 그녀의 부탁. 집에 일찍 들어오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다.
“손님이… 오실 거 같아서.”
새하얀 얼굴 가득 위태로운 낯빛이 다시금 비쳐졌다.
* * *
“누구지….”
적색 신호에 맞추어 천천히 브레이크 페달을 밟은 승재가 혼잣말을 뱉었다.
“뭐가.”
“아니, 채원이 손님이란 작자 말야.”
얼떨결에 일찍 집을 나선 승재는 정혁을 학교 앞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다. 뒷좌석 담요 위에는 보리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차 타는 것을 무서워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성격이 무던한 강아지였다.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괜히 혼자 소설 쓰지 말고.”
“숨기고 싶어 하는 눈치니까. 넌 그동안 잘도 참았다. 손님 올 거다, 집 비워달라 그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나가준 거야?”
“어차피 대부분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 윤채원이 오히려 수업 빠져서 걱정이었지.”
“수업까지 빠졌다고?”
승재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상대방 시간 상관없이, 그렇게 막 아무 때나 들이닥치고 그래도 되는 거야?”
“왜 나한테 그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대체 뭘까? 가족? 친구? 아님, 전 남친?”
“강승재, 벌써 소설 쓰기 시작했네. 나 저기 갓길에 세워줘라.”
“아, 응….”
승재는 핸들을 꺾어 안전한 도로변으로 차를 이동시켰다. 흥분한 나머지 하마터면 목적지도 잊을 뻔했다. 류정혁 내려주고 그다음은 동물병원. 들를 장소가 몇 군데나 된다고 그걸 헷갈리는지, 요즘 들어 확실히 나사가 빠지긴 했다.
“손님이 아니라 손님들일 거야.”
가방을 둘러멘 정혁이 차 문을 열다 말고 중얼거렸다. 못다 한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 나도 알아 그건. 동양인 두 명이라고 하더라. 관리인 아저씨가 말해줬어. 주차 잠깐 하겠다고 부탁하면서 비싼 술 주고 갔다고….”
“그중 한 명을 우연히 봤거든 내가.”
뜻밖의 정보에 승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정말? 언제? 어디서? 그 얘길 왜 지금 해! 새끼가 쓸데없이 입이 무겁다니까….”
“흥분 좀 하지 마. 멀리서 본 게 전부라 영양가 없는 단서라고.”
정혁이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학생증 놓고 가서 되돌아왔다가 웬 낯선 사람이 현관 앞에 서 있길래 그냥 다시 내려갔어. 그게 다야.”
“젊어?”
“꽤. 30대 초중반 정도.”
“왜 안 들어가고 문 앞에….”
“모르겠어. 한 명씩 번갈아 만나나….”
“뭐야 대체. 감방 면회하는 것도 아니고.”
승재가 갑갑한 듯 손톱 끝을 오독 씹었다.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겠으나, 왠지 내키지 않았다. 겨우 열리기 시작한 마음이 행여 닫혀버릴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기다려야지.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들려주겠지, 너의 이야기를.
자신 있었다.
사진학 전공생에게 기다림이란 딱히 버거운 과제가 아니었다.
하늘의 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열어놓고 여섯 시간이 넘도록 밤을 지새운 적도 허다했으니까.
* * *
“오셨어요?”
채원은 다소 굳은 표정으로 정 회장과 김 비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 그래.”
“주차는 어렵지 않으셨고요?”
“맨션 앞에 대놨다. 관리인한테 위스키 한 병 건네준 이후로는 태도가 싹 달라졌더구나. 남미 놈들 술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네. 다행이네요.”
광대가 아프도록 입꼬리를 올리며 예의 바르게 상대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지만, 채원의 얼굴에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창길과는 기껏 해봐야 일 년에 서너 번, 30분 남짓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채원이 다소곳이 꽃처럼 웃고 있다 해서 좁혀질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김 비서가 한 아름 안고 오는 고가의 선물들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는 나가서 대기하겠습니다, 회장님. 필요하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래.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차에 가 있어.”
“아닙니다. 복도에 있겠습니다.”
양손 가득한 쇼핑백을 현관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김 비서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곧 현관 밖으로 사라졌다. 뭐가 그리도 못 미더운지, 차에 가 있으라는 창길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김 비서는 맨션 5층 복도를 떠나지 않았다.
왜, 내가 정씨 성 내어 달라,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할까 봐?
자신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는 행동이 기분 나빴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심복처럼 정 회장을 따르고 있으니 그의 본심을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김 비서는 창길의 속내를 진작 파악한 듯했다. 그가 채원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지내고 있는 거냐? 학교는 별일 없고?”
정 회장의 첫 질문은 언제나 ‘잘 지내고 있는 거냐’ 였다. 토씨 하나의 틀림도 없이 항상.
채원의 귀에는 그 말이 삐딱하게 들렸다. 잘 지내지 못해야 정상일 텐데, 네가 용케도 아득바득 버티고 있구나, 신기해하는 사람처럼.
“별일 없어요. 리포트 내고, 시험 보고….”
“같이 사는 친구들이 남자라며. 지내기 불편하면 단독으로 집을 알아보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히 회장님 도움 받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리고 여기 유학생들은 남녀 구분 없이 플랫 메이트 구하는 게 일반적이라서… 웨스트우드 집값이 워낙 비싼 이유도 있구요.”
“하긴, 그렇다고들 하더라. 윤진이 대학 다닐 때도….”
정윤진. 당신 딸의 이름을 얼떨결에 언급한 창길은 아차 싶었던지 문장 끝을 흐렸다.
“괜찮아요. 말씀 편히 하세요.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채원은 늘 그렇듯, 예의 바르고 정갈한 거짓말로 창길을 안심시켰다.
‘난 괜찮아, 엄마.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해. 그러니 걱정하지 마요.’
습관처럼 해오던 말이라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가끔 물어오는 안부에 구구절절 신세 한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채원의 고통을 덜어줄 거란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진실을 말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서운하냐?”
갑자기, 뭐지….
그가 채원의 감정을 처음으로 궁금해했다. 생경한 질문에 당황한 듯 커다란 눈동자가 서글프게 흔들렸다.
“서운하긴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럼 됐다.”
창길은 채원의 답을 빠르게 받아쳤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저 작고 여린 아이는 부족함도 서운함도 없이, 정말로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당분간 미국 올 일은 없을 것 같구나. 한국에 벌여놓은 일이 많아서.”
“네.”
“또 기회 생기면 네 엄마 편에 연락하마. 김 비서 번호 알지?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
“회장님 저, 부탁이… 있어요.”
채원이 내어준 커피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몸을 일으키던 창길이 느릿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꽤 놀란 표정이었다. 앵무새같이 네, 네, 대답만 할 줄 알았지, 지금껏 아쉬운 소리 한번을 하지 않고 지내던 아이였다. 제 어미가 그래도 교육 하나는 똑바로 잘 시켰구나,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해 신경 쓰이곤 했는데.
“그래. 뭐냐, 부탁이란 게.”
필요한 물건이 생겼나. 아니면 역시 집을 옮기고 싶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가. 돈이 얼마가 들든 기꺼이 들어줄 생각이었다. 알게 모르게 쌓여온 가슴 한구석의 빚도 청산할 겸.
“졸업하면… 서일그룹 취직하고 싶어요. 물론 특혜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제힘으로 노력해서 어떻게든 합격할 테니까, 한국 돌아가는 것만 허락해 주시면….”
“안 된다 그건.”
서일그룹 소리에 창길의 낯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절대로 안 돼.”
오랜 침묵이 흘렀다. 채원은 울컥 눈물이 차올랐지만 울지 않았다.
어금니를 콱 깨물고는 어제 먹은 아이스크림 생각을 했다. 사르르 혀끝에 스민 달콤한 그 맛. 그리고 강승재의 모습도 떠올렸다. 커다란 손바닥의 온기. 청량한 미소. 감미로운 목소리. 아, 효과가 있었다. 눈가에 찰방찰방 차오르던 눈물이 조금씩 말라가는 것 같았다.
“왜… 안 되는데요.”
울컥 치받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힌 채원은 창길의 눈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되물었다. 더 이상은 숨죽여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 왜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는지 도저히 이해 불가였다.
“남들은 떠나지 못해 안달인데, 너는 왜 다시 돌아가겠다는 거냐. 혹시 엄마 보고 싶어 그러는 거면 차라리 네 엄마를 미국으로 데려오는 방법도….”
“왜 저는… 안 되냐구요.”
“뭐?”
“저 공부 잘해요. 아시잖아요. 한국에서도, 미국 와서도 톱 자리 절대 놓쳐본 적 없구요, 동아리랑 학회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방학 땐 기업체 인턴도 신청해 놓은 상태예요. 그러니까….”
“누가 너 똑똑한 거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아? 큰물에서 지내란 뜻이야. 한국 와봤자 월급쟁이밖에 더 해? 대기업 직장인이 뭐가 부럽다고. 신입 월급 따져보면 여기 한 달 렌트비 겨우 메꾸는 정도인데, 취직을 해도 미국에서 하는 게 대우도 더 좋….”
“왜 정윤진은 되고, 저는….”
너무 오래 쌓아두었나 보다. 거친 물살을 이기지 못한 채 툭 터져버린 둑은 형체도 없이 휩쓸려 저만치로 떠밀려 갔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채원을 향한 창길의 음색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어째서 갑자기 윤진이 이름이 튀어나와!”
성난 목소리는 가래가 낀 듯 탁했다. 드디어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만 건가, 참담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어쩐지 그녀를 곡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제가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잖아요. 누가 임원 자리 달랬어요? 빽을 써달라는 것도 아니고 제힘으로 노력해서 입사하겠다는데, 월급 쥐꼬리만 해도 전혀 상관없구요. 어쩌다가 회장님 회사에서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갈 테니까….”
“무섭구나.”
“…….”
움켜쥔 채원의 손에서 선득한 식은땀이 배어났다.
아무리 데면데면한 관계라지만 제 피붙이한테 고작 한다는 말이, 무섭다니.
“자식이 아버지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는데… 그게 그렇게까지 겁에 질릴 일이에요? 보통은 기특하다 칭찬하는 게 정상 아닌가요?”
“의도가 순수하지 못하니까 문제지! 그 짧은 5분 동안 네 입에서 무슨 말들이 튀어나왔는지 쭉 한번 돌이켜 봐라! 정윤진은 되고 왜 너는 안 되냐고? 누가 임원 자리를 달라고 했냐고? 내 설마설마했다. 괜찮아요, 별일 없어요, 나만 보면 웃으면서, 속으로 칼을 갈고 있을 줄은…. 경영 승계 기사 보고 눈이 뒤집힌 거냐? 역시 그런 거지?”
“회장님….”
“진작 김 비서 조언을 들었어야 했어. 제 어미 맹랑한 구석을 딱 빼다 박아서는.”
급기야 엄마를 언급하는 정 회장의 발언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억울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돈 몇 푼 쥐여주면 단 줄 알아요?”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그동안 나랑 같이 밥 한 끼 먹어준 적도 없으면서. 뭐? 내가 무서워? 맹랑해? 뱃속에 칼을 품어?
“처음부터 내 의사는 묻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난 두말없이 따랐어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엄마 불쌍하고 가여워서! 나 때문에 당신 눈 밖에 나면, 그래서 또 내쳐지면 우리 엄만 더 이상 발붙일 곳도 없으니까. 미국이든 어디든 가라면 가야지. 대신 나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엄마 외롭지 않게, 가끔 안부 정도는 물어봐 줬음 좋겠다, 회장님한테 바라는 건 정말 그게 다였다구요.”
“입이 트이니 말이 끝도 없구나. 그동안 참고 사느라 아주 죽을 맛이었겠어. 너희 모녀 뒤치다꺼리에 나도 아주 신물 난다. 은행 거치지 않고 자금 융통하는 게 얼마나 골머리 썩는 일인 줄 알기나 해? 돈 걱정 없이 이것저것 누리고 사니 철이 덜 나서는, 어디 눈을 치켜뜨고 소리를 질러?”
“그럴 거면 왜 애는 싸질러 놨는데. 남의 나라 한복판에 가둬놓고 이렇게 먹이나 던져줄 거였으면, 아예 낳지를 말았어야지!”
“내가 낳으라고 한 적 없다.”
“뭐라구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채원을 무덤덤히 응시하며, 창길이 입을 열었다.
“윤수경이 멋대로 저지른 짓이야. 내 눈 피해 숨어있다가 막달 다 돼서 기어 나오더라. 일 크게 만들기 싫어 내가 먼저 너 거두겠다고 한 거다. 정씨 성은 못 줘도 돈은 줄 수 있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오케이 하더구나. 서일그룹 안방은 못 차지하더라도 평생 배고플 걱정은 없으니. 고 되바라진 게, 애초부터 그럴 목적이었던 거야. 신입 스튜어디스 주제에 어떻게 퍼스트 클래스를 꿰찼던 건지, 내 그때부터 네 어미 수작을 진작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그만….”
채원이 핏기 가신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만 가주세요 이제….”
“안 그래도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다.”
“저 쇼핑백에 담긴 것들도… 도로 가져가시고요.”
“갖기 싫으면 버려라. 친구들 나눠주든지.”
“다신 오지 마.”
멈칫거리는 창길을 향해, 채원이 강한 어조로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회장님 얼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윤채원의 우주 속에 아빠라는 존재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괜찮다.
괜찮을 거다.
당신 따위.
평생 지우고 살아도.
* * *
“팔자 좋다, 류보리. 지금 잠이 와? 형 팔 아픈 건 생각도 안 하고?”
양어깨와 팔 근육을 이렇게 빈틈없이 써먹긴 처음이다. 강아지 사료와 간식, 배변판, 카메라, 전공 서적이 꽉 들어찬 가방을 아슬아슬하게 짊어진 채, 승재는 5층 맨션 복도를 걸어가는 중이었다.
푹신한 담요 위에 포옥 감싸인 아기 강아지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으로 졸고 있었다.
동물병원 진료가 퍽이나 고단했던 모양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익숙한 맨션 건물 냄새에 스르륵 몸을 늘어뜨리는 보리.
아무래도 여기가 네 녀석 집이 되려나 보다.
승재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채원이 누나 보고 싶지? 나도 그래. 집에 가서 누나 만나면, 오늘 너 데리고 다니느라 형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어필 좀 해주라. 알겠냐?”
그리고 품에 안긴 보리에게 헛된 부탁을 건네 본다. 윤채원 앞에서 점수 좀 톡톡히 따게 해달라는.
딩동.
오랜만에 눌러보는 초인종이었다. 혹시라도 늦장을 부리고 있을 채원의 ‘손님’을 위한 배려였다.
「누구? 강승재?」
다행히 듣고 싶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님은 갔나 보군.
빠르게 가까워지는 스텝. 고작 반나절만인데도 그녀와 마주하는 것이 왜 이리 떨리는지, 병이 깊었다.
끼잉, 끼이잉.
채원의 기척을 느낀 보리가 눈을 뜨고 엄마를 찾듯 울었다.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준 승재와 채원이, 보리에게는 단순한 주인이 아닌 부모인 셈이었다.
철컥.
“보리야! 오구구, 고생 많았지? 의사 선생님한테 귀여움 많이 받고 왔어?”
나 참. 서러워서 원.
180이 훌쩍 넘는 남자보다 주먹만 한 강아지 새끼가 눈에 더 잘 들어온다 이거지?
“강승재 고생 많았지 오구구, 이건 왜 안 해주는데?”
쿨한 포지션은 오래전 포기했다. 윤채원 앞에서 자존심 세우다 속 터져 죽느니, 삐친 티라도 팍팍 내보는 것이 차라리 더 쓸모 있는 전략이었다.
“하하, 뭐? 보리야. 형이 심술 났나 보다. 누나가 너만 예뻐한다고….”
“이 녀석 오늘부터 거실에서 재워야겠어. 나도 함부로 못 하는 윤채원 방 출입을 아주 멋대로….”
“치사하긴. 알겠어. 해줄게, 해주면 되잖아. 오구오구 강승재, 고생 많았어요. 됐지?”
채원이 승재의 엉덩이를 장난스럽게 두드리며 혀 짧은 소리를 냈다.
“영혼 없는 거 봐라. 여기, 보리나 좀 받아줘. 짐이 너무 많아서….”
“응. 사료는 왜 이렇게 큰 걸로 샀어? 무겁게.”
“큰 거 사면 간식 하나 준다길래.”
채원에게 꼬물이와 담요를 넘기니 팔이 한결 가벼워졌다. 부엌 식탁 위에 짐을 내려놓은 승재는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뻐근함을 풀었다.
“병원에서는 별다른 말 없었어?”
“응. 건강하대. 사료 먹으면 며칠 설사 할 수도 있는데 곧 나아진대 그건. 퍼피용이라 말랑말랑해서 굳이 물에 불리지 않아도 된다고….”
“돈은? 얼마나 나왔는데?”
“됐어.”
“애초부터 내가 저지른 일이잖아. 한 달 생활비도 빠듯할 텐데 보리 비용까지 부담 주고 싶지 않아.”
“그럼… 반씩 하자. 나도 책임 있으니까. 이건 병원 영수증이고, 이건 마트….”
웬만하면 혼자 감당하려 했다. 보리를 누가 먼저 데려오자 말했든, 구겨진 영수증을 여자 친구 앞에서 주섬주섬 꺼낸다는 거 자체가 솔직히 너무 구차해 보였으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강아지 혈액 검사로만 300불이 청구될 줄은…. 한국과는 차원이 다른 진료비였다.
“200불만 주면 나머지는 내가….”
승재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달 치 식비를 보리에게 뜯긴지라, 내일부터 당장 굶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자, 여기 500불.”
채원이 지갑을 열어 100달러짜리 지폐 다섯 장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왜 이렇게 많이 줘? 300불은 다시 가져가.”
“그냥 대충 넘어가자. 솔직히 여유 있는 사람이 더 내는 게 맞잖아. 알바도 주말만 하면서… 얼마나 번다고.”
“야….”
“강승재. 난 이런 문제로 나이나 성별 따지는 거 우습다고 봐. 나중에 돈 더 많이 벌면, 그땐 내가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 마시고 그럴게. 응?”
그녀의 말은 구구절절 다 옳은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알겠어. 고맙다.”
승재는 짤막한 인사와 함께 채원이 건넨 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생활비 걱정 없이 학업과 커리어 쌓기에 집중하려면 부모의 재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승재와 같은 애매한 수저 색을 지닌 유학생들은 파트타임을 구하는 것이 필수였다. 채원 역시 과외 수업 하나를 맡고 있었지만 그것은 방학 동안의 여행 자금을 벌기 위함이었다. 혹시 비슷한 생활고를 겪는 것이 아닐까, 돈을 버는 목적에 대해 슬쩍 그녀를 떠보았던 승재는,
‘아, 영국 다녀오려고. 좋아하는 뮤지컬이 있는데 오리지널 버전으로 보고 싶어서.’
채원의 천진난만한 대답을 듣고는 바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애초부터 출발점 자체가 다른 삶이었다.
“기분 상한 건… 아니지?”
돈을 내주고도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기분이 왜 상해. 나 돈 없는 학생이라 윤채원이 시시하게 여기면 어쩌나, 불안해서 그렇지.”
이럴 땐 솔직함이 최선이었다.
“조금만 신세 더 질게. 나중에 성공하면 내가 너, 지갑 두고 다니게 해줄 테니까.”
“진짜? 벌써부터 든든하네. 보리야, 승재 형이 나중에 딴소리하면 니가 꼭 오늘 일 말해줘야 된다?”
채원이 엷게 웃으며 보리의 곱슬곱슬한 털에 볼을 비볐다.
“아얏!”
“왜 그래, 물렸어?”
“아, 으응…. 괜찮아.”
어린 강아지를 껴안고선 까불까불 장난을 치더니만, 아마도 보리의 이빨에 긁힌 모양이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상체를 웅크리는 채원을 향해, 승재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많이 다쳤어? 손가락? 팔?”
“별거 아냐. 괜찮대두.”
“조심 좀 하지 그랬어. 어디 봐봐. 원래 성견들보다 강아지 유치가 더 날카로운….”
“글쎄 괜찮다니까!”
채원이 신경질적으로 승재의 손길을 쳐냈다.
“왜 그래….”
필요 이상으로 성을 내는 그녀. 이상했다.
“보리 떨어트릴 뻔했잖아. 갑자기 그렇게 잡아당기면….”
어색한 미소,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뭔데, 윤채원.”
“뭐가?”
“너 설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앗, 왜 이래!”
“가만히 좀 있어!”
보리를 거칠게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은 승재가, 채원의 왼손을 단단히 붙잡고는 카디건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너….”
새하얀 손목을 무질서하게 뒤덮은 붉은 칼자국.
“왜 그랬어….”
승재의 목울대가 위태롭게 진동했다.
“한동안… 괜찮았잖아.”
“…….”
“나한테 오겠다며.”
“…….”
“절대, 절대로 혼자서는, 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나랑….”
절망으로 젖어 든 남자의 음색이 적막한 공기를 처연히 갈랐다.
“넘어졌어.”
“뭐?”
“넘어져서… 손목이 다치는 바람에….”
“윤채원!”
중3 시절, 한지운을 맞닥뜨렸을 때의 기억처럼, 채원은 넋 나간 표정으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강승재의 두 눈이 너무나 슬퍼 보여서.
금방이라도 네가 후두둑 눈물을 떨굴 것 같아서.
그래서 무슨 말이든 뱉어내야만 했다.
* * *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역시 말 안 해줄 거지?”
“…미안.”
채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선 승재에게 사과했다.
사실 그녀가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서운했다. 나를 믿지 못해 말을 아끼는 것인지. 대체 뭐가 그리도 비밀이 많은지.
“따라와. 내 방으로.”
승재가 짤막하게 문장을 끊어 말했다.
“어?”
그녀는 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따라오라고.”
애처로움이 자작하게 깔려있던 남자의 눈동자는 어느덧 차갑게 굳어있었다.
끼잉.
영문도 모른 채 꼼틀거리는 보리를 뒤로한 채, 채원은 승재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 * *
쿵.
닫히는 문소리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문이 굳게 닫혔음에도 승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채원의 불안은 가중되었다.
이런 괴물 같은 나에게 질려버린 걸까. 그래서 결국 포기하려 하는 건가.
강승재는 속에 있는 말을 담아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강승….”
“더는, 한마디도 하지 마.”
“…….”
“엎드려.”
갑작스러운 명령에 채원의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하지만 선뜻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침대와 책상 중 그가 어느 곳을 칭하는지도 모르겠고, 이어지는 강승재의 행동이 무엇일지 몰라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내 말 안 들려? 엎드리라고!”
“읏….”
커다란 남자의 손이 그녀의 팔을 원목 책상 쪽으로 잡아챘다.
“상체 바싹 붙여, 책상에.”
“…….”
“손은 여기.”
채원은 그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책상 모서리를 양손으로 붙잡고 매끈한 원목 상판에 얼굴과 가슴을 내렸다.
승재의 말투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으나, 손바닥의 온기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애정 어린 체온이 그녀의 여린 등을 누르자 잔뜩 얼어있던 근육이 조금씩 풀려갔다. 자신을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는 존재가 다름 아닌 강승재라는 것이 그녀를 벅차게 했다. 이제는 어떠한 고통이 찾아오든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절대로 혼자선 안 돼. 네 몸에 상처 내는 짓, 오늘부턴 금지야.’
그와 나누었던 말들이 촘촘히 되새겨진다.
‘만약 그 룰을 거스르면….’
마른침이 꼴깍 목젖을 타고 흘렀다. 오늘따라 그의 행동은 더뎠다. 책상에 눌린 왼쪽 볼이 얼얼하여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싶었으나, 채원은 결국 움직이기를 포기했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 온몸이 꽁꽁 묶인 듯 말을 듣지 않았기에.
“견뎌.”
승재가 나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약속 어긴 벌이야.”
휘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채원의 둔부에 꽂혔다.
“흐읍….”
채원은 아랫입술을 콱 물었다. 아까부터 책상과 한 몸이 되어있던 탓에, 그녀는 승재의 손에 잡힌 물건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볼 수 없으니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흰 붕대가 그녀의 시선을 차단했던 날처럼.
짜악!
이어지는 작열감은 첫 번의 느낌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흑….”
콧등 넘어 비스듬히 흘러내린 짭조름한 액체가 툭, 책상을 적셨다. 의지와 상관없이 새어 나온 눈물이었다.
오랜 버릇을 고쳐주겠다 아예 작정한 모양이다. 온온함이 사라진 오늘의 강승재는 한겨울 바닷바람처럼 매섭기만 했다.
그래도 아직은 버틸 만하다 여길 때쯤.
휘익. 베일 듯한 무채색음이 귓가를 울렸다.
“아흐윽….”
두 무릎이 털썩 바닥에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통증에 채원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책상 끝을 만지작거리며 흐느꼈다.
“아직 열 대도 안 채웠어. 일어나.”
“자, 잠깐만….”
“엄살 부리지 말라니까!”
“엄살이 아니라… 흑… 강승재….”
“책상에서 손 떼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다.”
“미안….”
꺾인 무릎을 바로 세운 그녀가 코를 훌쩍거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풀숲에 옹크리고 있던 보리처럼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한숨이 나왔다. 겨우 열 대도 못 버틸 거면서 칼등으로 손목을 긋다니.
승재의 손이 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더 겁을 주고 몰아붙여야 하는데, 코맹맹이 소리로 ‘강승재’를 부르는 그 음색에 이를 악문 결심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렸다.
‘왜 이렇게 옷을 얇게 입은 거야, 저 녀석은.’
하필 채원의 차림은 단출했다. 카디건 안에는 얇아빠진 롱 티와 반바지를 입은 게 전부였다. 몇 겹의 천이 완충 작용을 해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책상 모서리를 붙잡은 새하얀 손바닥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축축이 땀이 밴 탓이겠지.
그녀가 많이 아파하는 데에는 사실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승재의 손에는 나일론 재질의 카메라 스트랩이 감겨 있었다. 선박용 끈처럼 몇 개의 줄이 탄탄히 꼬인 형태였지만, 그래 봤자 손가락 정도의 두께였다. 로모카메라에 딸린 부품이었기에 만만히 보고 고른 것인데… 공기를 가르는 스트랩 소리를 듣는 순간 직감했다. 채찍과 별반 차이 없는 도구를 집어 들었음을.
경험 부족으로 인한 실수였다. 그러나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녀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무엇보다 더 급했으니까.
열 대는 채워보자 마음먹었다. 그녀가 소리를 내어 엉엉 울든, 온몸을 떨든, 개의치 말자 다짐했다.
승재는 눈을 질끈 감고 멈추었던 팔을 다시금 휘둘렀다.
과한 긴장은 좋을 게 없는데.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각도가 살짝 비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악!”
그리고 결국, 채원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또다시 무릎을 꺾었다.
“괘, 괜찮아?”
“흐윽… 아파.”
“손 치워 봐. 내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반바지 밑으로 스트랩이 휘감겼나 보다.
새하얀 허벅지 위에 빨간 줄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맞은 자국은 금세 부풀어 올랐다. 상처가 쓰라릴 것 같아 함부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후우, 기다려. 내가 약 가져올 테니까….”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나 때문에, 내가 좀 더 신중히 했어야 하는 건데….”
바닥에 주저앉은 승재가 괴로운 듯 제 이마를 양손으로 감쌌다. 소중히 아껴주어도 모자랄 판에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강승재, 왜 그래…. 다 내가 자초한 일이잖아. 약속 어긴 것도 나고, 멋대로 상처 내달라 요구한 것도 난데, 왜 니가 괴로워해? 나 아까보다 두통도 훨씬 덜해졌고, 숨 쉬는 것도 편해졌….”
“채원아.”
절망 섞인 남자의 음성이 그녀를 붙잡았다.
“나 더 이상은… 못 하겠어.”
“…….”
“너한테 상처 입히는 거, 너 아프게 하는 거….”
“…….”
“…이제 안 하면 안 돼?”
남자의 부탁이 너무도 간곡해서 불현듯 죄책감이 밀려왔다.
“강승재, 미안해….”
스스로도 감당 못 하는 짐을 무책임하게 떠넘기려 했어 내가.
그 무리한 요구들이 지금껏 너를 얼마나 버겁게 했을지.
“정말 미안….”
채원이 거듭 사과를 하며 그의 목을 꼬옥 끌어안았을 때.
“윽… 흑….”
승재가 참았던 눈물을 후두둑 쏟아냈다.
어른인 척 부단히 애를 쓰던 스물다섯의 노력은 수포가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