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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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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07. 그날 밤

* * *

“오늘 과외 있는 날이지?”

“으응….”

학교 앞 갓길에 잠시 차를 댄 승재가, 여느 날처럼 채원의 하루 일과를 물었다.

“10시에 데리러 갈게. 저번처럼 아이스크림집 앞에 서 있을 테니까, 끝나면 바로 전화….”

“근데 나 오늘 약속이 있어서.”

미리 잡힌 선약이 있었던 건가. 어쩐지. 대꾸가 영 시원치 않다 했더니.

“갑자기 무슨 약속. 그럼 과외는?”

“아니, 과외 끝나고….”

“밤 열 시에?”

승재가 자동차 기어를 P로 바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웠다.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듯했다.

“응…. 중학교 때 친구, 잠깐 보기로 했어. LA 여행 중이라는데 숙소가 마침 여기랑 가까운가 봐.”

“그렇구나….”

“오래 안 걸릴 거야. 걔 혼자 여행 온 게 아니라 같이 온 친구가 있어서, 시간 많이 못 낸대.”

어두워진 승재의 얼굴을 알아챈 그녀가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설명을 덧붙인다.

근데 그게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왜 자꾸 말이 길어지는데. 설마 그 친구 성별이….

“남자야?”

“아, 응….”

“남자라고?”

같은 말을 한 번 더 물었지만, 완전히 다른 뉘앙스였다. 밤 10시에 남자랑 단둘이 술이라도 한잔하겠다는 건가. 울컥 화가 치민다.

“걱정 마. 아이스크림만 먹고 금방 올 테니까. 걱정되면 데리러 와도 돼. 밤 11시쯤이면 대충 끝날 거 같아.”

술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아이스크림도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그 달콤하고 맛 좋은 걸, 야밤에, 남자랑 단둘이!

“차라리 건너편 타코집 가지그래?”

어쩐지 날이 선 어투. 윤채원 친구의 성별이 밝혀진 순간부터 승재의 목소리가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거기 문 빨리 닫잖아. 그리고 밤에 무슨 타코야. 배부르게.”

“아이스크림 집은 밤 11시까지 영업하는 거 확실해?”

“그럴 걸 아마…. 과외 끝나고 나올 때마다 항상 불 켜져 있었거든. 참, 그 가게 주인 요 앞 주택가 사는 거 알아? 아주머니는 한국인이고 아저씨는 미국인인데 아들이 혼혈이라 엄청 잘생겼어. 게다가 의대생이래. 너도 몇 번 본 적 있을걸? 가끔 나와서 아이스크림 퍼주고 청소도 도와주고 하는….”

눈치도 없이 신났다 아주. 오며 가며 아이스크림을 얼마나 퍼먹었길래 그 집 아들 전공이 뭔지 줄줄 다 꿰고 있냔 말이다.

“윤채원.”

“어?”

“하루에 한 놈씩만 듣자.”

땅 밑으로 가라앉은 남자의 음색을 감지하고서야 말꼬리를 돌리는 그녀.

“하하, 미안…. 그래도 강승재가 내 주변 남자들 중 제일 잘생기긴 했지.”

그리고 뒤늦게 이어지는 수습.

하지만 이미 빈정 상했다고.

“데리러 갈게. 열한 시에.”

“응….”

“아이스크림만 얌전히 먹어야 돼.”

“알겠습니다. 오빠.”

강승재, 강승재, 이름 찍찍 부르다가 아쉬울 때면 이따금 오빠 소리를 슬그머니 흘린다.

얄밉다 정말. 오물거리는 입술을 그냥 확.

“웁….”

…그래 봤자 뭘 할 수 있겠나. 양 볼을 꾸욱 움켜잡고선 진하게 입이나 맞추는 게 전부지.

“하아…. 뭐야 정말, 숨 막히게.”

그녀가 콜록거렸다. 숨이 턱턱 막히도록 키스를 하고 나서야 조금 기분이 풀린다.

“그렇게 걱정되면 일찍 와서 같이 아이스크림 먹든가. 아예 소개시켜 줄게.”

“굳이 만날 필요까지는.”

“뭐 어때? 둘이 성격 비슷해서 잘 맞을걸?”

“됐어.”

지금 누굴 누구랑 엮으려는 건가.

성격이 절대로 잘 맞을 리 없지. 내가 알지 못하는 중학생 윤채원의 기억을 품고 있는 놈.

승재는 바드득 어금니를 물었다. 머리끝까지 솟구친 반감은 이미 수습 불가 영역이었다.

* * *

탁, 탁, 타닥.

손가락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볼펜이 주기적으로 책상에 부딪히며 잡음을 냈다. 그런데도 채원은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멍하니 앉아 있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과외 학생이 답안지를 힐끔거렸으나,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오늘따라 그녀의 머릿속은 학생 못지않게 산만했다.

채원이 제 몸에 상처를 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실 한 명이 더 있었다.

중3 무렵,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체육 수업을 빠진 그녀가 텅 빈 교실에 남아 손목에 붉은 줄을 긋고 있을 때, 갑자기 드르륵, 교실 문이 열렸다.

‘윤채원. 뭐해, 거기서.’

당시 반장이던 같은 반 남학생, 한지운이었다.

‘아프다며. 양호실은 왜 안 갔어?’

‘그게….’

열여섯 소녀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다. 황급히 내린 체육복 소매를 꼬옥 붙잡고 있는 채원의 모습은 누가 봐도 어색했다. 채원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지운이 별안간 그녀의 팔을 채내어 옷소매를 확 걷어 올렸다.

‘읏, 뭐 하는 거야! 아프잖아!’

‘내가 뭘 했다고 아파…. 소매 걷은 게 전분데.’

새하얀 손목에 어지러이 난 상처를 응시하는 중에도 지운의 눈빛은 담담했다. 마치 예전부터 채원의 비밀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손목은… 왜 이래.’

‘다쳤어.’

‘왜?’

‘어쩌다 보니 다친 거지. 이유가 꼭 있어야 돼?’

‘네가 한 거잖아.’

‘아냐 그런 거.’

‘그래…. 본인이 아니라면 아닌 거지.’

한 발짝 물러난 대꾸였으나 심란하긴 마찬가지였다.

교실이 비었는지 여러 번 확인했는데, 어떻게, 아니 언제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황망하게 흔들리는 채원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지운이 제 자리로 돌아가 서랍 속 무언가를 꺼내었다. 체육복을 갈아입기 위해 끌러놓은 교복 타이였다.

‘손목 내밀어 봐.’

‘괜찮아. 보건실 가서 밴드 얻어오면….’

‘내밀어 보라니까 글쎄.’

차분한 그의 음색은 어쩐지 사람을 긴장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지혈할 정도는 아닌데….’

채원이 쭈뼛쭈뼛 손을 내밀자 그가 상처 난 손목에 자신의 타이를 단단히 감아 묶었다. 빠듯이 조여든 끈이 생채기를 압박했다. 피가 저릿하게 통하지 않는 느낌에 채원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내가 밴드랑 약 얻어올 테니까, 그때까지 가만히 있어.’

보건 교사에게 혹시라도 그녀가 손목의 상처를 들키게 될까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왜 대답이 없어?’

‘알겠어….’

‘넥타이 건드리지 말고.’

‘응.’

심장이 묘하게 뛰었다. 그는 나를 염려해준 게 전부였다. 내가 엉뚱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대신 제약을 걸어 준 것뿐인데.

이후 채원은 지운을 특별한 친구로 여겼다.

채원의 상처 자국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날의 해프닝 뒤에도 그녀를 별다를 것 없이 대해준 것이 그 두 번째였다.

사춘기 시절, 서로 이성의 감정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으나, 첫사랑이니 뭐니 심각한 속앓이는 아니었다. 그저 밋밋하게 흘려보낸 찰나의 떨림이었다.

[채원아, 잘 지내? 나 그저께 LA 왔거든. 친구랑 둘이 여행 온 거라 짬이 안 나서 연락 늦었다. 얼굴이나 잠깐 보고 갈까 하는데 이번 주 시간 어때? 웨스트우드 쪽에 산다고 했지?]

한지운으로부터 받은 오랜만의 메시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간간이 안부를 묻긴 했지만, 채원이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는 그마저도 뜸해져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열아홉에 미국을 왔으니, 근 3년 만의 해후다.

모습은 십 대 때와 비슷하겠지. 차나 술 대신 아이스크림은 어떤지 미리 안 물어봐도 괜찮으려나. 한 시간쯤 만나면 딱 좋을 듯했다. 전공은 무엇인지, 졸업 후 뭐가 하고 싶은지, 가벼운 근황 토크 정도면 충분하다. 중학교 시절 이야기는 왠지 꺼려졌다. 지긋지긋한 과거를 굳이 되새김질하고 싶지는 않았다.

승재에게 그러하듯 지운에게도, 채원은 자신의 가족사를 털어놓진 못했다.

아빠는 언제나 이 세상에 없는 존재였고,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나니 딱히 그립지도 않다고, 누가 물어보든 채원의 답은 일률적이었다.

십 년 넘게 거짓말을 묵히니, 이제는 스스로도 분간하기 힘들어진다.

그리운지, 그립지 않은지. 그녀의 우주 속에 아버지란 사람은 정말로 사라지고 없는지.

* * *

“쌤, 저 다 했어요.”

“어?”

“문제 내주신 거, 다 풀었다고요.”

과외 학생의 부름에 채원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깊이 생각에 잠겼었나 보다.

“그래, 잘했어. 채점해줄게. 이리 줘 봐.”

“채점만 다 하면 끝나요?”

“아직 십 분 더 남았잖아.”

“그럼 십 분 동안 아주 천천히 채점해주세요.”

천진난만한 꼬맹이의 요구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과외 학생의 문제집에 동그라미를 치던 채원은 책상 위에 놓인 휴대 전화를 문득 쳐다보았다.

[남친 있다고 꼭 말해. 애매하게 얼버무리지 말고.]

언제 보낸 거야 이건 또.

말재주가 없는 게 아니라, 구태여 돌려 말하지 않는 남자.

거리낌 없이 질투를 해주는 강승재.

고마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스스로의 감정에 언제나 솔직할 수 있다는 것이.

그건 일종의 자신감과도 같았으니까.

* * *

“망할 새 새끼….”

살다 살다 새한테 욕을 다 해본다. 그것도 낡아빠진 모형에 대고.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승재가 건조한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날렸다.

채원이 플리마켓에서 사 왔다던 구닥다리 벽시계는 칠이 벗겨진 뻐꾸기가 매 시각마다 튀어나와 요란한 소리를 냈다. 8시, 9시 때만 해도 그럭저럭 참을 만하더니, 밤 10시. 드디어 인내심이 바닥나버렸다.

11시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더 이상 기다릴 자신이 없다. 그녀 말대로 일찌감치 합석해서 아이스크림 한 컵씩 비우고 통성명이라도 해야 하나.

“싫은데 그건.”

마치 여자 친구가 미덥지 못해 감시하러 나온 거 같잖아. 그런 이미지로는 비치고 싶진 않다.

한숨 눈이나 붙이고 가면 딱 맞을 것 같았다. 승재는 알람을 맞춘 후 눈꺼풀을 부자연스럽게 내렸다.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려 애쓰는 중인 남자.

깊은 잠이 들어 시간을 놓칠까 걱정이 들었으나, 일찍 가서 어색한 상황을 만드는 것보단 차라리 늦장을 부리는 게 낫다 여겼다.

여친의 남사친이 뭐 대수라고. 하지만 초연해지는 게 쉽지 않다. 이러한 문제는 나이를 더 먹는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다. 윤채원을 곁에 두고 사는 한, 평생 느긋해질 여유 따윈 없겠지.

그날, 샌드위치만 덜 예쁘게 먹었어도.

공원에서의 첫 만남이 새삼 떠오른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상아색 운동화마저 눈부셨던 윤채원. 승재는 그녀를 떠올리며 선잠을 청했다. 달콤한 찰나의 꿈이라도 꾸길 바라며.

* * *

윌킨스 에비뉴.

라벤더 앤 로즈 아이스크림 가게.

“한지운!”

문을 열고 들어온 채원이 창가 쪽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남자를 향해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오래 기다렸어? 과외가 딱 열 시에 끝나서.”

“아냐, 나도 방금 왔어.”

“같이 여행 온 친구는?”

“숙소에. 맥주 한 캔 따면서 미드 보고 있겠대. 영화랑 이것저것 엄청 다운받아 왔더라고.”

“다행이네.”

마치 어제 본 친구와 일상을 주고받는 것처럼, 3년 만에 만났음에도 한지운과의 대화는 딱히 어색할 게 없었다. 약속 장소를 제 동네로 잡았으니 대신 디저트라도 사게 해달라며, 채원이 먼저 지갑을 꺼내 들었다.

“여긴 라벤더 맛이 베스트거든. 한번 먹어 봐.”

“오, 맛있겠다. 잘 먹을게.”

연보랏빛 아이스크림이 동그랗게 담긴 컵을 받아 든 지운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숟가락을 푹 찍었다. 달콤하고도 오묘한 맛이 혀끝에 녹아내린다.

“윤채원이랑 잘 어울리는 맛이다. 완전 독특해.”

지운은 빙긋 미소를 지었지만 채원은 어쩐지 풀이 죽은 표정이었다.

“별로구나?”

“맛있단 뜻이었어.”

“독특하다며.”

“그건 칭찬이고. 소심병 아직도 못 고친 모양이네….”

이따금씩 채원은 상대의 말에 과민반응을 보일 때가 있었다. 특이하다거나, 남들과 다르다거나, 하는 평가를 받는 것이 그녀에게는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항상 부러웠으나 가질 수 없는. 평범한 가족, 평범한 고민, 평범한 연애…. 지극히 평범한 일상.

“괜찮아?”

“아, 응. 미안해. 내가 또 오버했나 봐.”

“독특하단 건 나쁜 게 아냐.”

“알지, 나도…. 사춘기 티를 아직 못 벗어서 그래. 감정이 들쭉날쭉…. 이해해 줘.”

“뭘 또 이해씩이나. 중학교 때로 돌아간 기분이라 좋은데 뭐.”

“그런가…. 참, 넌 제대하고 복학 바로 한 거야?”

대화의 흐름이 십 대 시절로 넘어가지 않도록, 채원은 황급히 주제를 바꾸었다.

“내년 복학이야. 한국 돌아가면 슬슬 로스쿨 준비하려고.”

“드디어 시작이네. 목표가 한결같은 게 신기해.”

“아버지 때문에 무조건 해야 돼. 내가 못하면 판검사 며느리라도 구해 와야 한다고 아주 난리라.”

부장판사 출신인 지운의 아버지는 현재 대형 로펌에 근무 중인, 한마디로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그 영향 때문인지 중학교 때부터 장래희망란에 항상 법조인을 적곤 했던 지운은, 역시 오랜 바람대로 로스쿨 진학 계획을 차근차근 이루어가고 있었다.

“너 엄청 부담되겠다. 조건 까다로워서 어디 맘 편히 연애나 할 수 있겠어?”

“내 고충 잘 아는구나. 그래서 말인데….”

아이스크림 스푼을 조용히 내려놓은 지운이 한 템포 뜸을 들인 후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너 로스쿨 준비할 생각 없냐? 아버지 비위 맞추려면 차라리 법조인 와이프 고르는 게 수월할 거 같아서.”

어?

예상치 못하게 진지해진 분위기.

1초, 2초… 정적이 이어질수록 채원은 그의 질문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점점 더 난감해질 뿐이었다.

“하하, 돈 없어. 로스쿨 학비 어마어마하다며.”

결국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농담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에는 농담으로 답을 하는 것이 맞겠지.

“웨스트우드에 사는 유학생이 무슨 학비 걱정을.”

“엄마 등골 그만 빼먹어야지.”

“역시 거절?”

“거절하고 말고가 뭐 있어. 그 정도로 무거운 얘기 아니었잖아.”

“아, 뉘앙스가 진지하지 못해서 전달이 제대로 안 된 건가. 제대한 지 얼마 안 돼서 영 감이 안 잡힌다니까. 설마 내가 이 밤중에 윤채원이랑 아이스크림이나 먹겠다고 여기까지 왔겠어?”

한층 묵직해진 지운의 눈빛에 채원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정말 뭔데. 갑자기.

“우리 그렇게 엮이진 말자. 3년 만에 나타나서는, 사람 난처하게….”

“내내 마음 있었다고. 너도 솔직히 알고 있었잖아.”

“몰랐어.”

“모르긴…. 모른 척 넘긴 거지. 내가 너 중학교 때부터….”

“나 만나는 사람 있어.”

다급하게 새어 나오는 채원의 목소리.

“아…. 정말?”

지운은 그녀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분명 남친 없다고.”

“최근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렇구나.”

“미안.”

“아, 아냐. 내가 미안하지 오히려. 누구 깊게 만나는 거, 부담스러워하는 줄 알았어 그동안.”

갑작스러운 그녀의 연애 소식에, 지운은 꽤 당황한 듯 어색하게 입가를 굳혔다.

이따금씩 남자 친구의 유무를 물으면, 채원은 한숨을 쉬며 본인은 연애 체질이 아니라 했다. 지운은 그 푸념이 은근히 듣기 좋았다. 생판 모르는 남자가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공을 들이는 것보단, 오랫동안 알고 지낸 남사친의 입장이 여러모로 유리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수많은 여행지 중 하필 미국을 택한 것도, 동부 대신 서부 지역으로 루트를 정한 것 모두.

“숙소까지 꽤 걸린다며… 친구 기다리겠다.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채원이 숄더백을 집어 들며 지운의 눈치를 살폈다. 펍이 아니라 아이스크림 가게를 장소로 고른 것은 탁월했다. 술을 마셨더라면 이야기가 훨씬 더 길어졌을지 모른다.

“너랑 어색해지는 건 싫은데.”

한숨 섞인 남자의 음성이 채원의 왼쪽 귓가를 파고들었다. 빈 컵을 버리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지운을 바라보았다. 풀 죽어있는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타이밍은 이미 늦은 듯했다. 들은 얘길 못 들었다 할 수도 없고.

“한동안은 어색하겠지. 근데 또 시간 많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차인 상대한테 위로나 받고 있다니 참….”

위이이잉.

가게 마감 시간이 가까워졌나 보다. 청소기의 시끄러운 잡음이 때마침 들렸다. 이제 그만 자리를 정리해달라는 무언의 압박.

“여기 사장님도 윤채원 니 편인가 봐. 말할 틈을 안 주시네.”

지운이 머쓱한 표정으로 그만 나가자, 눈짓을 보냈다. 차가운 디저트를 먹어서인지 속이 헛헛하고 아렸다.

“늦었으니 택시 타고 가.”

해어짐을 서두르는 그녀가 야속했다.

“집까지 바래다줄게.”

“아냐, 아냐. 난 걸어서 금방이라….”

“채원아, 그러지 말고 우리 근처에서 가볍게 맥주나 한 잔 더….”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해 조금만 더 질척거리려는데.

“윤채원!”

채원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뜻밖의 음성. 키가 큰, 어쩐지 얼굴에 잔뜩 힘이 들어가 보이는 남자가 건널목을 성큼성큼 건너오고 있었다.

“누구… 아는 사람?”

“아, 남자 친구.”

채원이 야무지게 답했다.

“과외 끝나면 항상 데리러 오거든.”

“그렇구나. 오늘 나 만난다는 건 알아?”

“응. 굳이 숨길 이유 없잖아.”

지운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걸 채원도 알고 있었다. 일부러 작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강승재에게 오해를 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이렇게 둘을 동시에 맞닥뜨리니 비로소 명확해진다. 긴가민가했던 감정이. 누구를 향해 제 심장이 뛰고 있는지.

“같이 아이스크림 먹자니까, 왜 지금 왔어?”

승재의 손을 슬며시 잡은 채원이 새초롬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친구 만난다는데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

“아, 여긴 한지운, 중학교 동창.”

채원의 소개에 승재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강승재입니다.”

“네. 한지운입니다.”

서로 형식적인 악수를 나누는 중에도 지운은 웃지 않았다. 티 나게 굳어진 남자의 입매를 승재가 모르고 지나칠 리 없었다.

승재는 채원과 지운을 번갈아 살폈다. 그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의견 충돌이 있었든, 사소한 문제로 다투었든, 아니면….

“한국분이라 다행입니다. 채원이가 남자 친구 생겼다고 해서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사실. 이 친구가 빈틈없어 보여도 허술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황당한 눈빛으로 지운을 쳐다보는 채원.

“내가 너 한두 해 겪어? 상처도 잘 받고 소심하고, 상대한테 은근 휘둘리는 타입이잖아.”

승재에게 보란 듯이 삐딱한 음색을 흘리는 남자.

다툰 게 아니라 아무래도 더 난감한 대화가 오간 모양이다.

“한지운. 일절만 하고 얼른 가. 누가 들으면 무슨 보호잔 줄.”

“만난 지 얼마 안 됐다며. 남친분한테 이것저것 알려드리면 좋지 뭘 그래?”

“그럼요. 조언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제가 아직 채원이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아서….”

채원보다 반걸음 앞에 선 승재가 그녀 대신 말을 이어받았다. 동시에 채원의 손가락을 티 나지 않게 잡아끌었다. 나는 괜찮으니 일을 크게 벌이지 말라는 의미였다.

“추가 조언은 기회 되면 해드릴게요. 지금은 윤채원 무서워서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아까부터 한 대 칠 기세로 째려보네요, 하하.”

“다음에는 셋이 술 한잔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승재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지운을 배웅했다.

“한지운! 여기 택시 온다!”

길 한복판에 선 채원은 빈 택시를 향해 양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을 한시라도 빨리 제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간다 가. 너무 그러지 마라. 서운하다.”

“더 늦으면 택시 없을까 봐 그러지.”

“둘러대기는. 연락할게.”

“응. 남은 여행 잘하고.”

채원과 인사를 나눈 지운이 승재를 향해 까딱 고개를 숙였다.

“또 뵙죠.”

“네. 조심히 가세요.”

진심이 1도 섞이지 않은 짤막한 문장을 주고받은 후, 드디어 눈엣가시가 사라졌다, 채원의 손을 꼭 붙잡고 시원히 발을 떼려는데.

“참, 채원아.”

지운이 차창을 내리고 그녀를 불렀다.

“손목 어떤지 물어본다는 걸 깜박해서.”

“…어?”

“요즘은, 괜찮지? 또 혼자 넘어지고 부딪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새하얗게 얼어붙은 채원의 낯빛. 의미심장한 물음에 승재의 걸음 또한 멈추어졌다.

* * *

“요즘은, 괜찮지? 또 혼자 넘어지고 부딪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너나 몸조심해. 잘 가라.”

벌떡이는 목의 맥박을 잠재우며 침착하게 대꾸한 채원은 서둘러 지운의 택시를 보냈다.

치사한 자식.

그동안 한지운에 대해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 아무리 배알이 뒤틀려도 선은 넘지 말았어야지.

지운을 보내놓고도 화를 삭이지 못한 채원은 얼마간 말없이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로 옆에 승재가 있었지만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한다. 배려 차원의 침묵일까, 아니면 기분이 나빠져 그런 것일까.

“강승재….”

결국 채원이 먼저 입을 뗐다.

“응.”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어.”

“한지운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서….”

“시간 늦었다. 가면서 얘기하자.”

승재는 엷게 웃으며 채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다행히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으나, 마주한 눈동자는 어쩐지 어두웠다.

건널목을 나란히 건너, 불이 꺼진 타코 가게를 지나, 사람이 휑한 골목길로 접어들 때쯤.

“혼자 상처 냈던 거, 아까 그 친구한테 들킨 거야?”

승재가 우뚝 발을 멈추었다. 깍지 낀 손이 빠듯이 잡아당겨진 탓에 채원의 걸음 또한 멈추어졌다.

“아, 응…. 어떻게 알았어?”

“하필 손목을 묻길래. 것도 택시 타다 말고 갑자기.”

강승재에 대해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겨줄 뿐이지, 사실은 눈치가 상당히 빠른 남자라는 걸.

“언제 그런 건데.”

“중3 때, 교실에서.”

“교실? 겁도 없이.”

“체육 시간이라 아무도 안 들어올 줄 알고.”

파르르 떨리는 공기. 불안정한 여인의 날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승재의 주먹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 새끼 생각할수록 열 받네.”

어쭙잖게 비밀을 들먹이며 그녀를 불안에 떨게 하려는 수작이었나. 불뚝 열이 치받아 더 이상 존칭을 써주고 싶지도 않았다.

“뭔데 갑자기 손목 조심하라는 둥, 그딴 소릴 지껄여?”

“네가 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줄 알았나 봐.”

“아니 그니까, 내가 윤채원을 알든 모르든, 제삼자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게.”

“남자 친구 있다고 얘기하라며.”

채원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랬더니 저러잖아….”

눈꼬리를 추욱 내린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워, 한껏 차오르던 분노가 푸스스 꺼지고 만다.

“질투도 치졸하게 하네. 둘이 술이라도 마셨음 어쩔 뻔했어?”

“에이, 별일 없었을 거야.”

“남자를 이렇게 몰라요.”

가만 보면 참 안일하다. 얼마 전 미국 놈이랑 치고받은 기억은 벌써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건가.

“어쨌든 아이스크림 먹고 무사히 헤어졌잖아. 그럼 된 거지 뭐.”

“뭐 하는 놈인데? 한지운인지 뭔지.”

“그냥 대학생.”

“전공은?”

“꼬치꼬치 캐묻긴. 과는 뭐였더라… 갑자기 생각이 잘, 인문 계열인데, 암튼 로스쿨 준비한대.”

“어쩐지 거만하다 했어. 로스쿨 준비하는 놈들은 본인이 벌써 판검사 된 줄 안다니까? 웃겨 암튼.”

답지 않게 뒷담화를 빼곡히 해대는 승재를 보며, 채원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뭘 잘했다고 웃어. 야밤에 남자랑 단둘이 아이스크림 먹은 주제에.”

“치이, 그래서 미리 허락받았잖아. 셋이 먹자니까 본인이 늦게 와 놓곤.”

“잔말 말고 따라와. 윤채원 오늘 오빠한테 혼 좀 나야겠어.”

채원의 자그마한 어깨가 남자의 커다란 손에 단단히 잡혔다.

“어우, 무서워라.”

벌벌 떠는 시늉을 하며 못 이기는 척 끌려갔지만, 그 와중에도 두근두근 심장이 울렸다.

홧홧한 손바닥의 열기, 어깨를 그러쥔 악력이 싫지만은 않았다. 더 솔직히는, 짜릿하고 설렜다. 세상 만만하던 강승재가 새삼 남자로 느껴진 탓에.

어떻게 혼내주겠다는 거냐 물어본다면, 그건 너무 속 보이는 질문이겠지.

뜨듯이 달아오른 양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던 채원이 문득 고개를 돌려 우측 화단을 바라보았다.

“어? 강승재, 잠깐만… 저기….”

희미한 조명 아래 미세하게 흔들리는 꽃과 풀. 바람결 때문은 아닌 듯하다. 움직임이 제법 컸다. 길고양인가. 아니면….

“강아지다, 강아지!”

채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곳에는 털이 꼬불꼬불 뭉쳐진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눈도 뜨지 못한 채 낑낑대고 있었다.

“허… 진짜네. 산책하다 누가 잃어버렸나?”

“산책시킬 만큼 커 보이지 않는데…. 목줄 채울 수도 없겠어. 주먹만 해서.”

“그럼 뭐지….”

“버려졌나 봐.”

“설마. 저렇게 작은 애를?”

무시하기엔 너무나 작고 여린 강아지였다. 기껏 해봤자 태어난 지 3, 4개월. 오들오들 떨며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모양새가 딱했다. 벌써 기운이 많이 빠져 보인다.

“안 되겠다. 데려갈래.”

채원이 비장한 결심을 한 듯 말했다.

“뭐? 맨션으로?”

“응.”

물론 저 힘없는 미물의 앞날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덜컥 강아지를 데려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류정혁한텐 뭐라고 할 건데?”

“설마 저 귀여운 애를 내쫓기야 하겠어?”

“집주인이 알기라도 하면….”

“걱정 참 많아. 모르게 키우면 되지.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빨리 쟤 좀 어떻게 해 봐. 응? 탈수 오면 금방 죽을지도 모른단 말야.”

겉보기엔 찬기가 도는 듯해도 사실 윤채원은 정이 너무 넘쳐 걱정이었다. 특히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버려진 동물들을 접할 때면 더욱 그랬다. TV의 짠한 장면에 맘이 약해져 충동적으로 후원금을 보낼 때가 부지기수였으며, 마트에서 울고 있던 어린애를 한참 달래느라 지갑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집에 온 적도 있었다.

“일단 그럼, 잠시만 데리고 있자. 주인이 찾을지도 모르니까 내일 전단지 만들어서 붙이든지 하고….”

화단 풀숲 쪽으로 발을 들인 승재는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안아 들었다.

끼잉, 끼이잉.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랐던지, 한 줌도 안 되는 초코색 꼬물이가 바르작거리며 울었다.

“조그만 게 엄청 버둥거리네. 가만히 좀 있어. 형이 너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잖아.”

“형?”

“이 녀석, 수컷이야.”

승재가 강아지의 다리 사이를 확인시켜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진짜? 귀여워라. 우리 집 막내네. 내가 남자 셋이랑 동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직 동거 확정 아니래도. 주인 나타나면 보내줘야 하니까 너무 정 주지 마.”

“알겠어. 내일 수업 전에 마트 잠깐 들러야겠다. 샴푸랑 사료랑 푹신한 방석도 사야 하고… 아! 그 전에 일단 병원부터! 영양 상태 체크할 겸, 검사 먼저 받아 보는 게 낫겠지? 혹시 시간 되면 같이 갈래?”

정 주지 말라니까, 벌써 본인 강아지인 양 푸욱 빠져버렸다. 큰일이다 정말.

“차근차근해. 병원비도 다 우리 돈으로 내야 할 텐데 난 그게 제일 걱정이다. 근데 새끼 강아지 함부로 목욕시켜도 되나? 강아지 길러 본 적 있어?”

“아니. 엄마가 질색해서 엄두도 못 냈어.”

채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초등학교 때 길가에서 박스에 담아놓고 파는 병아리 있잖아 왜. 두 마리 몰래 사 왔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엄마가 그 병아리 파는 아저씨한테 가서, 애한테 이런 걸 팔면 어떡하냐, 당장 환불해 달라 막 싸우는데, 병아리들은 한쪽에서 막 삑삑거리지, 나도 울지, 아주 가관…. 그날 새벽에 옆집 아주머니 찾아오고 난리도 아니었어. 큰일 난 줄 알았대. 밤새 애가 통곡을 해서.”

“그런 병아리들은 대부분 약해서 금방 죽더라. 아마 어린 딸한테 동물 죽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그러셨을 거야. 너 상처받을까 봐.”

엄마 얘기를 꺼낼 때면 어깨가 처지는 그녀가 안쓰러워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지만, 양손이 모두 강아지에게 묶여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번 안아 볼래?”

승재가 품에 있던 강아지를 채원에게로 건넸다.

“왠지 자신 없는데….”

“어반 카페 샌드위치라고 생각해. 너 그건 절대 안 떨어트리잖아.”

아무리 그래도 먹는 거랑 비교를 하냐며 한차례 눈을 흘긴 채원이,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들어 꼬물이를 안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말랑거리고 보드랍고 따뜻했다.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아 정말… 너무 작다.”

“그러게.”

“이름은 뭘로 지을까?”

“주인부터 찾아보고.”

“그때까진 그럼 뭐라고 부를 건데. 임시 이름이라도 있어야지.”

애초부터 주인을 찾아 줄 생각 따윈 없는 듯했다. 류정혁의 거센 반대가 예상되어 승재는 마음 한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성은 류씨로 할까….”

승재가 꽤나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응? 류?”

“그렇게라도 류정혁 비위를 맞춰야 하나 싶어서….”

“와, 아이디어 완전 좋다!”

채원은 폴짝폴짝 뛰며 맞장구를 쳤다. 딱히 효과적인 방법 같진 않았으나, 강아지를 집에 데려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신이 나 있었다.

“그럼 보리 어때? 류보리! 초코 할까, 보리로 할까 고민 중이었는데, 한국 성 붙인 김에 아예 작명도 토종 느낌 나게!”

“얘 근데 푸들 아냐? 푸들 고향은 프랑스 아닌가….”

“뭐 어때? 한국 주인 만났으니 귀화한 셈 치는 거지. 아마 타코 가게 사장님이 먼저 발견했다면 멕시코 이름 붙여줬을 거야. 카를로스, 페르난도, 알렉산드로….”

느끼해서 별로라고, 보리가 백만 배쯤 더 잘 어울린다며, 승재가 채원의 작명에 사심 가득한 한 표를 던져주었다. 실없는 웃음소리가 조용한 골목 가에 잔잔히 퍼졌다.

당장 십 분 뒤 상황이 염려되었지만 지금은 행복하니 된 거라고, 승재는 복잡한 머릿속을 잠시 제쳐두었다. 날이 갈수록 회피 기술이 고도화되어 문제였다.

* * *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어쩐 일인지 정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류정혁 안 보이는데?”

꼬물거리는 보리를 제 방으로 안전하게 피신시킨 채원은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정혁의 행방을 찾았다.

“아, 메시지 와 있었네.”

강아지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잠시 잊고 있던 휴대 전화를 꺼내든 승재는 정혁에게서 온 문자를 뒤늦게 확인했다.

“뭐래?”

“내일 전공 시험 있대. 도서관에서 공부 좀 하다가 새벽 2시 넘어 온다고.”

“휴. 다행이다.”

보리가 내쫓길 운명은 아닌 것 같다며 채원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봤자 금방 들킬 텐데. 낑낑대는 소리라도 들리면….”

“내일 아침까진 시간 벌 수 있으니까.”

마냥 해맑은 건지, 아님 그럴싸한 묘안이 있기라도 한 건지. 채원은 폭신한 담요와 물을 담을 만한 그릇을 태평하게 뒤적거리며 보리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신났네. 그렇게 좋아?”

“응. 나 씻고 올 동안 보리 좀 봐줄래?”

“그러지 뭐.”

소꿉놀이라도 하듯 방 한구석에 포근한 보금자리를 꾸며준 채원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출입이 자연스러워진 그녀의 방. 네모반듯하게 접힌 초록색 체크무늬 담요 위에서 갈색 강아지 한 마리가 꼼틀거렸다. 은은한 램프의 조명이 제법 따듯했는지 오들오들 떨던 꼬물이가 조금씩 제 호흡을 찾아간다.

참 아늑하게도 만들어줬네.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붙인 승재는 물끄러미 보리를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좋겠다, 인마. 누나랑 계속 한방 써서. 차가운 흙바닥보단 담요가 훨씬 낫지?”

끼잉.

승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리 없는 보리는 몸을 웅크린 상태로 색색 숨을 내쉴 뿐이었다.

‘안 되겠다. 데려갈래.’

앞뒤 분간 없이 강아지를 데리고 가겠다 떼를 쓰는 채원이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무리수를 두는 그녀를 무턱대고 막아내기가 힘들었다.

주인이 얼른 나타나야 할 텐데.

저 조그만 미물의 숨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갑자기 심란함이 밀려왔다. 또다시 버림받게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순간적인 연민보다 몇 배쯤 더 무거운 책임감이 승재의 어깨를 짓눌렀다.

대학 졸업 후 각자의 길이 갈리게 되면 이 녀석은 누구와 함께 비행기를 타야 할까. 그때에도 나는 여전히 윤채원과 함께일까. 한국으로 돌아가든, 다른 나라에서 일자리를 구하든, 그녀와 같은 곳을 향해 나란히 걷고 있기를, 제발.

우연히 뻗어 나간 생각이 간절한 바람으로 바뀔 때쯤.

달칵.

“나 다 씻었어. 화장실 쓸래?”

머리카락이 촉촉이 젖은 그녀가 수줍은 미소와 함께 방문을 열었다.

* * *

승재의 욕실 사용 시간은 정확히 딱 5분이 걸렸다. 오랜만에 군대에서처럼 샤워와 양치를 했다. 날쌔고 빠르게.

평소와 같이 볼일을 보며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고, 머리를 감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여유 따윈 없었다. 새벽 2시를 넘긴다던 류정혁이 계획을 바꾸어 일찍 귀가할 수도 있는 거고, 윤채원이 머리를 말리다 스르르 잠이 들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변수가 많을 땐 뭐든 신속해야 했다.

“뭐야, 엄청 빨리도 왔네. 샤워 너무 대충한 거 아냐?”

구부정하게 새우등을 하고 보리를 바라보던 채원이 승재의 스피디한 재등장에 쿡쿡 웃음을 흘렸다.

“너 잠들어 버릴까 봐.”

“자야지. 열두 시 넘었는데.”

“누구 맘대로 잠을 자.”

“왜, 나랑 아직 볼일 남았어?”

눈꼬리를 여우처럼 사르륵 올리자 도톰한 애교 살이 볼록 귀엽게 잡힌다. 남은 볼일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앙큼하게 시치미를 떼고 있는 윤채원.

아주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정말.

“언제까지 보리만 보고 있을 거야.”

“귀엽잖아. 잘도 자네. 쌔근쌔근.”

“내 눈엔 저 녀석보다 윤채원이 더 귀여워.”

슬금슬금 채원의 곁으로 다가온 승재가 그녀의 어깨에 넌지시 입술을 내렸다.

“간지럽게, 왜 이래.”

“한지운이랑 아이스크림 먹은 대가는 치러야지.”

“아까부터 계속 그 얘기. 몰래 먹은 것도 아니잖아.”

“어쨌거나 빈정 상했어. 내 기분 풀릴 때까지 윤채원 오늘 졸려도 못 자.”

“치, 심술은….”

채원은 풍성한 레이스가 달린 하얀 원피스 잠옷을 입고 있었다.

승재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평소처럼 후드티와 파자마 바지를 꺼내던 그녀는, 잠시 고민한 후 다른 서랍장을 열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손에 잡힌다. 그 언젠가 혹해서 사놓고는 줄곧 보관만 했었는데, 드디어 오늘 빛을 발하는 건가.

하지만 막상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으니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결국 카디건 하나를 더 걸친 그녀.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 티 좀 나면 어때서. 스스로 생각해도 참 한숨 나오는 성격이다.

“추워?”

“아니….”

“근데 왜 카디건 입었어.”

“그냥….”

“예쁜 옷 가려지게.”

“아….”

“일부러 입은 거 맞지? 나 보여주려고.”

차라리 정곡을 찔러주어 시원했다.

몇 번 느끼는 거지만 강승재는 눈치가 참 빨랐다. 그리고 그 눈치를 적시 적소에 활용할 줄 알았다.

알고도 모른 척 넘겨줄 때와, 그녀의 속내를 대신 끄집어내 줄 때.

매사에 솔직하지 못한 채원은 승재의 배려와 무배려가 모두 고마웠다.

“잘 어울린다. 피부도 하얗고 옷도 새하얀 게 천사 같아.”

감미로운 문장에 비해, 남자의 손길은 짓궂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천사라니… 비유가 너무 순수한 거 아냐?”

“그럼, 타락한 천사로 하지 뭐.”

카디건을 내려 동그란 어깨에 살포시 입을 맞춘 승재가 손을 뻗어 채원의 앞가슴을 지그시 움켜잡았다.

“읏….”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맨가슴은 그 감촉이 매우 적나라했다. 손바닥에 조금만 힘을 가해도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고 어깨가 자꾸만 앞으로 말린다.

“옷 위로 만지는데도 벌써 느끼는 거야?”

“아니 그게, 흣…. 잠옷이 이렇게 얇을 줄… 몰라서….”

얼굴이 금세 붉어지는 게 마음에 든다.

워낙 표현을 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승재는 몸의 반응을 살피며 그녀의 생각을 대신 읽어내리곤 했다. 움찔거리는 허리,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 그녀가 남들보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것이 다행이라 여겼다.

“가슴 보여줘.”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승재의 요구는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채원을 짜릿하게 했다.

“싫은데.”

그녀는 당연히 남자의 말을 거절했다. 그를 더욱 조바심 나게 할 셈이었다.

친절한 섹스는 재미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 배웠는지 모르겠으나, 한껏 몸이 단 남자가 투박한 손길을 뻗칠 때 채원은 비로소 흥분을 느꼈다.

“싫어?”

“응.”

“이래도?”

승재가 손가락을 세워 얇은 천 위로 볼록 솟아난 젖꼭지를 진하게 문질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짓눌린 유두가 아릿한 통증과 함께 단단해졌다.

“흐으….”

상체를 바르르 떨던 채원이 남자의 어깨에 투욱 이마를 떨구었다. 꼿꼿이 허리를 세워 버틸 만한 자극이 아니었다.

“가슴 보여 줘.”

“싫….”

“됐어. 내가 해.”

승재가 톡, 톡, 원피스 단추를 풀었다. 백 번 물으면 백 번 모두 싫다, 도리질을 칠 여자였다.

앞가슴께에 일렬로 붙은 단추 서너 개를 끌러내자, 아름다운 가슴의 굴곡이 아스라이 드러났다. 생각 같아서는 램프 대신 쨍한 메인 전등 스위치를 올리고 싶었지만, 숙면 중인 보리를 위해 일말의 이성을 잡고 있어야 했다.

“꼭 힘을 쓰게 만들어, 윤채원.”

풀어 헤쳐진 앞가슴 새로 뽀얗고 탐스러운 유방이 출렁 튀어나왔다.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보드라운 살이 잡히자, 움켜쥔 손가락 모양대로 피가 쏠려 새빨간 인장이 새겨졌다.

채원은 시선을 슬쩍 내려 제 가슴이 짓이겨진 모양새를 훔쳐보았다. 곧 다리 사이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그가 조금 더 억세게 다루어 주길 바랐다. 내일 아침까지 커다란 손자국이 찍혀 있었으면 했다. 참 돼먹지 못한 성적 취향이었다.

하지만 강승재는 채원의 여린 살갗에 깊은 상처를 남길 만큼 모진 성격이 아니었다. 그의 손길은 금세 부드러워졌다. 말캉거리는 젖가슴을 정성껏 어루만지는 남자. 사소한 동작 하나에도 절절함이 묻어났다.

“사랑해, 채원아.”

분위기에 휩쓸린 승재의 고백이 달뜬 공기를 타고 전해졌다.

“하아… 강승재. 얼른 들어와. 오래 못 버티겠어….”

채원은 대답 대신 탁한 신음을 뱉어냈다. 오금이 자꾸 모아지긴 해도 당장 무너질 만큼 어지러운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승재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해.’

확실히 그 한마디를 들은 다음부터다. 심장이 쿵쿵 요동치기 시작한 건.

살면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들어봤던가.

채원은 사랑이란 두 글자에 딱히 환상이 없었다. ‘귀엽다’보다 더 듣기 힘든, 엄마의 목소리로는 당연히 아니었고, 아주 어릴 적, 그나마 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이따금씩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학창시절, 친구들이 피자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줄 때면, ‘사랑하는 채원이’ 구절에서 어찌나 얼굴이 뜨끈해지는지. 그 부분이 듣기 싫어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훅 촛불을 불어버리기 일쑤였다.

강승재가 나를 사랑한다 했다.

고작 두어 달 전만 해도 모르던 사이끼리 정이 들면 얼마나 들었겠나. 그가 말하는 사랑이 어느 정도의 심오함인지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가장 얄팍하고 변덕이 심한 것이 바로 남녀의 사랑이니까. 게다가 섹스 중 문득 새어 나온 사랑 타령이라니.

손톱만큼의 가치를 둘 필요조차 없는 고백이다. 알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그런데 왜.

“윤채원, 괜찮아?”

“아, 으응.”

“울어?”

“아니.”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너무 아프게 했나? 미안. 너무 좋아서 그만 주체를 못 하고.”

“그런 거 아냐. 보리 때문에… 갑자기 보리가 너무 짠해서, 그래서….”

눈물이 자꾸만 샘솟았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얀 볼을 따라 흐르는 방울방울.

그날 밤, 강승재는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 말했고, 나는 그의 앞에서 젖가슴을 훌렁 내놓은 채로 울었다. 애꿎은 보리의 핑계를 대느라 바빴지만, 아마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왜 울었는지.

그 순간 나 역시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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