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나루토카지노 쿵푸벳 아크 볼트카지노 코어카지노 네임드 보스 라바카지노 업카지노 히어로 소닉카지노 텐카지노 판도라

06. 통제 II

본문

쿵푸벳

#06. 통제 II

* * *

채원의 사정을 알 리 없는 승재는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맨션 5층 복도를 가볍게 걸어가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상태가 좋아서 깁스 일찍 풀어도 되겠네요. 근육이 많이 빠진 상태니까 당분간 조심하시고, 심한 운동은 삼가주세요. 일상생활 불편함이 없다면 병원은 안 오셔도 됩니다.’

한국어가 능숙한 교포 의사에게 ‘감사합니다’와 ‘Thank you’ 소리를 몇 번이나 번갈아 반복했는지 모른다. 양손이 자유로워지는 날짜가 일주일이나 앞당겨졌으니 한껏 신이 날 만했다.

핸들을 돌릴 때도, 가방을 둘러멜 때도, 손을 씻을 때도, 매 순간 감동이다. 몇 주 빛을 못 봤다고 손등 색깔이 왼쪽에 비해 벌써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주인 잘못 만나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이제 쨍한 태양도 실컷 쪼이게 해주고, 카메라 셔터도 마음껏 누르게 해줄게. 다짐하며 기분 좋게 현관을 들어서는데.

“왔어?”

소파에 등을 푹 기댄 채원이 힐끔 승재 쪽을 바라본다.

“응. 나 깁스 풀었다.”

“아 정말이네. 축하해.”

건조한 어투. 그새 무슨 일이 있었나. 그녀의 반응이 어쩐지 뚱했다.

“왜 그래?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자랑스럽게 치켜든 손을 멋쩍게 내린 승재는 채원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냥… 별거 아냐.”

“뭔데 그래? 말해 봐. 아침하곤 너무 달라 보여서 걱정되잖아.”

“말 못 해.”

“왜.”

“말할 수 없다는데 이유가 어딨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니까 더 이상 묻지 마.”

비밀도 많고, 사연도 많고, 게다가 입은 한없이 무겁고….

한 발자국 가까워졌나 싶으면 그새 또 물러나 있다.

참 어려운 사람.

“알겠다. 난 그럼 씻고 쉴게.”

“응.”

“아, 류정혁은 좀 늦을 거래. 술 약속 잡혔다고.”

“응. 나도 들었어. 아침에.”

창백하게 굳은 밀랍 인형을 보는 것 같다. 웃을 때가 특히 예쁜 얼굴인데. 누가 자꾸 그녀를 무표정하게 만드는 걸까.

갈아입을 티를 챙겨 욕실로 향하는 승재의 등 뒤에서.

“강승재.”

여인의 자그마한 음색이 언뜻 들려왔다.

“나 부른 거야 방금?”

“응.”

“네 방에 미리 가있어도 돼?”

“어? 내 방엔 왜….”

“너… 필요해서, 오늘. 학교에서부터 내내 참고 왔어. 필통에… 마땅히 쓸 만한 게 없더라고.”

채원이 띄엄띄엄 버겁게 문장을 이어갔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 목소리에 심장이 저릿해진다.

“그래…. 들어가 있어. 금방 씻고 갈 테니까.”

벼랑 끝에 선 그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용기가 필요했다.

* * *

쏴아.

샤워는 끝난 지 오래였지만, 승재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에 들어가 있으라 무작정 말해놓긴 했는데, 그다음부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미치겠네.”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막연히 도와주겠다고 큰소리를 쳤을 뿐, 사실 이런 특이한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보드라운 손을 잡는 것도 마냥 조심스럽기만 한 상대였다. 그런 소중한 사람을 향해 다짜고짜 커터칼을 집어 들 수는 없다. 아무렇지 않게 칼을 쥐고 새하얀 허벅지를 그을 만큼 마음이 굳은 것도 아니었고, 안전하게 상처를 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으니.

‘사연 많은 여자는 친구로만 옆에 둬.’

정혁의 조언이 문득 머릿속을 스친다. 채원이 조금 특별한 상대인 건 맞지만, 이토록 혼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내공이 부족한 나의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군대 가기 전 몇 개월 소개팅으로 여자를 사귀어본 게 25년 강승재 연애 경험의 전부였다. 남중, 남고를 나온 탓은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남녀 관계에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시시한 상대에게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찬란한 목표를 먼저 이루겠다고. 지금까진 그게 멋인 줄 알았지.

하지만 인물 사진은 관심 밖이라던 그가 홀린 듯 자신의 카메라에 윤채원을 담았을 때, 이미 시작되고 만 것이다. 돌이킬 수도, 물릴 수도 없는 매우 사적인 역사. 그녀와의 이야기가.

탁.

승재는 샤워기 레버를 힘 있게 내렸다. 타일 바닥으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물이 일순간 뚝 그쳤다.

가자 그만. 윤채원이 기다리잖아.

시간을 끈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지금은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아픔인지 슬픔인지 외로움인지 모를 것들을 최선을 다해 나누어 갖는 수밖엔.

승재는 선반 위에 올려놓은 라운드 티를 단숨에 입었다. 채 마르지 않은 머리칼의 물기가 목선을 눅눅히 적셨다. 괜찮다. 어차피 금세 사라질 자국이었다.

* * *

달칵.

방문을 열자마자 채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지.”

“아냐. 음악 듣고 있었어.”

이어폰 줄을 돌돌 마는 손가락.

“무슨 음악?”

“아… 뭐였더라. 그냥 생각 없이 들어서.”

채원이 엷게 웃었다. 다분히 굳어있는 그녀의 모습에 비로소 안도의 숨이 내쉬어진 승재였다. 혼자서만 긴장한 게 아닌가 위축되어 있었는데.

채원은 후드가 달린 원피스형 트레이닝복과 차콜색 레깅스를 신고 있었다. 승재의 침대 끄트머리에 살짝 엉덩이를 걸치고 두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는 여인. 평소 흔히 보던 편안한 차림이었는데도 어쩐지 오늘의 그녀는 낯설게만 느껴진다.

여인이라 하기엔 아직 소녀티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과 여린 몸집. 그런 너를 아프게 해야 한다니.

“학교에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상처를 내고 싶은 충동이.

“응. 강의 끝나고 짐 싸다가.”

“왜 갑자기?”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한동안 밝아 보이길래 안심하고 있었단 말이다.

“말할 수 없다니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널 도우라는 거야?”

“계속 집요하게 굴 거면….”

“알았어. 더 이상 안 물어볼게.”

그러니까 가지 마. 눈앞에서 사라지지 마.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위험한 도구로는… 못 해.”

“사용하기 나름이야. 어떤 도구든, 위험하지 않은 건 없어.”

“그니까 그 기준은, 지금부터 내가 정한다고.”

승재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이해했어?”

“난 통증에 대한 역치가 이미 높아져버린 상태라서….”

“토 달지 마. 윤채원한테 결정 권한 같은 건 없으니까.”

목표는 그녀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돕는 것. 통증을 최소화하면서도 그녀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가장 첫 단계는, 기다리는 거야.”

“…기다리라고?”

“네 멋대로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먼저 배워야지.”

서랍 속에 들어있던 여분의 붕대를 꺼낸 승재가 적당한 길이로 두어 겹 접어 채원의 눈을 가렸다.

“뭐하는데.”

시야가 보이지 않자 채원이 당황한 듯 고개를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

승재의 짤막한 명령에 버둥거리던 채원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한 치 앞도 전혀 예측되지 않는 상황 속, 정신적인 두려움과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그녀의 두 눈을 가린 것이었으나, 우왕좌왕 머뭇거리는 남자의 모습을 숨기기 위함도 있었다.

자그마한 뒤통수 가운데쯤 단단히 붕대를 묶어놓은 승재는, 책상 수납함에 비스듬히 꽂혀있던 30cm 자를 손에 쥐었다. 마른침이 꿀꺽 목젖을 적신다.

윤채원의 결핍된 부분을 제대로 간파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녀가 비웃음을 흘리진 않을까, 그간 그녀를 상대했던 다른 놈들과 혹 나를 비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치졸한 잡념들로 집중력이 흐려질 때쯤.

“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왜.”

“앞이 안 보이니까 무서워서, 조금.”

긴장이 역력한 음색이 새초롬한 입술 새로 파르르 새어 나온다. 승재의 의도가 제법 먹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채원은 실제로 겁을 먹은 듯했다.

“네가 원해서 하는 거다.”

승재가 채원의 옷자락을 무릎 위로 걷어냈다.

“그러니까 참아.”

찰싹!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라스틱 자가 허벅지 위에 내리꽂혔다.

“읏.”

예상치 못한 자극에 채원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승재는 땀이 밴 손바닥을 자신의 옷자락에 문지르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눈이 가려져 확실히 알 수는 없어도, 덧입혀진 레깅스 덕분인지 크게 아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장난처럼 하는 건 싫은데….”

허리를 꼿꼿이 세워 자세를 고쳐 앉은 채원이 작게 중얼거렸다. 혼잣말처럼 들렸으나, 사실 승재의 신경을 살살 건드리는 발언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다. 그를 자극하여 더 센 고통을 얻으려는 수작. 승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그래. 장난이라고.”

짜악!

자를 움켜쥔 남자의 손아귀에 훨씬 더 거센 힘이 들어갔다. 유치한 기 싸움에 말려들고 말았다.

어떤 식으로 스물다섯 남자의 자존심을 건드려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의 이성을 툭 끊어버릴 수 있는지. 눈을 가린 채 고분고분 강승재를 따르는 듯 보여도, 리드하는 쪽은 사실상 채원이었다. 만만히 여길 상대가 아니었다.

열 대 가까이 매가 떨어지자 올곧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플라스틱 재질이라곤 해도 남자가 휘두르는 강도를 무한정 감당해낼 순 없는 것이었다.

“흐으….”

그녀의 신음을 듣고서야, 불끈 핏줄이 솟아난 승재의 손등이 아래로 툭 떨어진다.

급격히 자괴감이 몰려든다. 절대로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잠시 다른 인격을 지닌 사람처럼 자신도 모르게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괜찮아?”

승재가 참담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채원의 상태를 물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침묵을 지키는 그녀가 걱정되었는지, 승재는 매듭진 붕대를 풀어주기 위해 황급히 손을 뻗었다.

“풀지 마.”

채원이 승재의 손길을 제지했다.

“그건 그대로 두고, 네가 직접 확인해 줘.”

그리고 차분하게 부탁했다.

“뭘… 확인해?”

“내 허벅지 말야. 상태가 어떤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승재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머뭇거렸다.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 달라 함은, 그러니까….

“내가, 직접?”

“응.”

“불가능할 거 같은데. 레깅스 색이 불투명해서….”

“하아, 답답해.”

“아, 내가 너무 꽉 묶었지. 눈 먼저 풀어줄게. 잠깐만….”

“너 말이야, 너. 강승재 답답해 죽겠다고.”

채원이 직접 손을 올려 눈에 가려진 붕대를 스르륵 끌어 내렸다. 마주친 눈동자에는 묘한 원망이 서려 있다.

그렇게 많이 아팠나? 나름 힘 조절 한다고 신경 쓴 건데.

“처음이라 많이 투박했지? 내가 다음엔 좀 더 강약 컨트롤을….”

“됐어. 나 가볼게. 민폐 끼쳐서 미안.”

“민폐라니, 갑자기 왜 그래.”

“쉬어.”

“야, 윤채….”

그녀의 이름 마지막 글자가 채워지기도 전에, 쾅, 거칠게 방문이 닫혔다.

뭐야, 저 녀석. 볼일 다 끝났다 이건가. 갑자기 싸해져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네. 감정 기복도 정도껏이어야지.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가버리면….

“아….”

그녀가 왜 하필 나에게 허벅지의 상태를 봐 달라 하였는지. 왜 그런 눈초리로 나를 한참 쳐다보곤 돌아섰는지.

구시렁거리며 머리칼을 흩트리던 승재가 일시정지 모드로 허공을 응시했다. 류정혁이 있었다면 뒤통수를 한 대 갈겼을지도 모른다. 병신아, 당장 쫓아가지 않고 뭐하냐 거기서. 아마 걸쭉한 욕지거리는 덤으로 날아왔겠지.

승재는 닫힌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곧장 채원의 방을 향해 갔다. 몇 걸음 디뎌 당도한 목적지 앞.

“윤채원.”

그가 못다 부른 이름을 정확히 소리 내어 외쳤다. 노크는 따로 하지 않았다.

한 뼘 열린 문틈을 그대로 밀고 들어갔을 때, 거울 앞에서 로션을 바르고 있던 채원이 눈을 크게 뜨고 승재를 바라보았다.

“뭔데….”

“내가 확인해 줄게.”

붉어진 피부색도, 살갗의 붓기도.

“어?”

“그 전에 일단, 키스부터.”

아무리 급해도 지켜야 할 순서란 게 있는 거니까.

승재가 그대로 채원에게 입을 맞추었다. 보들보들한 양 볼이 남자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담쏙 갇혀버렸다. 금세 번져오는 향긋한 로션 냄새. 승재는 거친 숨결과 함께 채원의 도톰한 입술을 한껏 빨아들였다.

“으음….”

아릿하고 짜릿한 통증이 여린 점막을 건드린다. 허벅지의 얼얼함 못지않게 제법 효과가 좋은 자극제였다.

* * *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하얀 그녀는 남들에 비해 여린 살성을 갖고 있었다.

“엄청 빨개졌어. 자국 남으면 안 될 텐데….”

얇은 레깅스를 무릎까지 끌어 내린 남자의 손. 발갛게 피가 쏠린 채원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승재가 중얼거렸다. 마치 작은 생물을 관찰하듯 조심스러운 눈동자에 얼굴이 뜨끈해진다.

“그만 좀 봐….”

채원이 민망하였는지 승재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밀었다.

“봐 달라며.”

“이제 충분해.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승재가 허벅지 안쪽을 조금 더 벌렸다. 빠듯하게 열리는 다리의 틈새.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으나 완강히 버티는 느낌은 아니다.

“상처 봐 달라고 한 거, 다른 시그널로 이해했는데 나는.”

달뜬 음색이 건조한 방 공기를 잔잔히 적신다.

“먼저 어필한 건 맞는데… 생각해보니 우리 하우스메이트잖아. 너무 섣부른 게 아닌가 하고….”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아니…. 혹시라도 관계가 안 좋아지면….”

“그땐, 내가 나갈게.”

승재가 허리를 숙여 하얀 발갛게 부어오른 허벅지 위에 입술을 맞댔다. 따뜻한 온기가 뭉근히 번져온다.

“너 난처하게 하지도 않을 거고, 윤채원 비밀… 죽을 때까지 혼자 묻고 갈 거니까.”

“…….”

“미리부터 겁먹지 마.”

“응….”

“그리고 지금은 일단… 내 걱정부터 해야 돼.”

“왜?”

의아한 듯 되묻는 채원을 향해.

“너무 오랜만이라 머릿속이 새하얗거든.”

어리숙한 고백과 함께 화르륵 달아오른 승재의 귓불. 채원은 그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음악이라도 틀까?”

“현관문 소리 못 들을까 봐….”

“류정혁 늦게 온댔잖아. 그리고… 내 방 잠그면 돼.”

휴대폰 음악 앱을 켠 채원이 인기순으로 정렬한 팝송들을 눈치껏 선곡했다. 적당히 감미롭고 적당히 끈적한 플레이리스트. 이제야 좀 어색함이 가신다.

“조명은….”

“그건 내가 할게.”

침대에서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승재가 스위치를 내려 메인 전등을 끄고, 은은한 램프의 조도를 한층 더 낮게 돌렸다.

어스름해진 방, 레깅스를 반쯤 내린 채 무릎을 세우고 웅크린 채원의 실루엣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단전 아래가 뻐근히 부풀어온다. 자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정신 나간 욕구가 치솟을 정도였다.

“나 레깅스… 다시 입어?”

채원이 새초롬하게 물었다. 왜 빨리 속행하지 않느냐 돌려 말하는 것이었다.

“겨우 내렸는데, 그걸 왜 다시 입어.”

벽스위치 옆에 서서 물끄러미 채원을 바라보고 있던 승재가, 손을 뻗어 가느다란 발목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으앗, 뭐야….”

가벼운 탄성과 함께, 침대 머리맡에 있던 그녀의 몸이 주르륵 미끄러져 매트리스 끄트머리로 옮겨졌다.

“쪼그리고 앉아 있길래 불편해 보여서.”

느슨히 늘여진 강승재의 입술. 위치 선정은 나름대로 중요했다. 움직임을 방해할 법한 벽이나 기둥, 모서리 따위는 애초부터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이것도 마저 벗자.”

커다란 손이 채원의 레깅스를 천천히 끌어 내렸다. 어린아이를 어르는 말투가 듣기 싫진 않았다. 발목 아래로 툭, 얇은 옷감이 떨어져 나가자, 매끄럽게 쭉 뻗은 다리가 선명히 드러났다. 하얀 피부색은 어둑해진 방 안에서도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당분간 짧은 치마는 못 입겠다.”

마치 제 몸인 양 침울해하는 남자.

“허벅지가, 아직도 많이 빨개.”

허벅지 주변보다 채원의 얼굴이 훨씬 더 붉게 타올랐다. 사진학 전공이라 그런지 자꾸만 여기저기를 관찰하려 든다.

“어두워도 색이 잘 보여?”

“응.”

“괜찮아. 며칠 지나면 없어져.”

“다음부턴 더 안전한 곳에 해줄게.”

“…어디?”

“미니스커트 입어도 안 보이는….”

동그란 무릎께를 배회하던 승재의 손이 조금씩 위로 방향을 틀었다.

“이를테면 여기라든가….”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을 건드리는 섬세한 손가락.

“아니면 더 깊숙한 곳.”

면이 덧대어진 속옷 부위를 옆으로 밀쳐내자 까슬한 체모가 제법 드러났다.

“읏, 안 돼. 거긴….”

채원은 부끄러운 듯 손바닥으로 다리 사이를 가렸다. 아랫도리의 서늘한 기운에 오금이 자꾸만 오므려진다.

“알아 나도. 이쪽은 피부가 연해서 잘못 다뤘다간 큰일 나지. 이렇게 조심히 만져야….”

승재가 손가락을 세워 갈라진 틈새를 지그시 눌렀다.

“흐읍….”

아랫입술을 깨문 채 신음을 참았지만, 자꾸만 새어 나오고 만다.

“나, 여기 먹어도 돼?”

“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레깅스가 걸쳐있던 무릎의 위치에 이제는 살굿빛 팬티가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승재는 채원의 두 다리를 벌리고 속살 틈으로 곧장 입술을 내렸다.

“하아….”

눈앞이 아찔해졌다. 열띤 입술과 뜨거운 혀가 톡 불거진 클리토리스를 녹일 듯 핥고 빨았다. 말랑거리던 열매가 점점 더 발갛게 달아오른다. 허벅지의 색보다 훨씬 붉고 진한 원색으로.

채원은 눈을 감고 중심의 자극을 온전히 느꼈다. 이토록 정성스러운 손길을 느껴본 것도, 자신의 상처를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상대를 만난 것도, 모든 게 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찌릿찌릿 울리는 전율이 아랫배를 조이게 만들 때쯤.

톡.

어느샌가 옷 속을 비집고 들어온 승재의 손이 채원의 브래지어 후크를 단숨에 끌러냈다. 압박감이 사라져 허전하던 앞가슴이 더 강력한 자극에 의해 옥죄어진다. 몸집에 비해 작은 가슴은 아니었는데도 남자의 커다란 손바닥 안에 물컹, 맥을 못 추고 잡혀버렸다.

읏. 채원이 허리를 강하게 비틀었다. 억센 손가락 사이에 끼인 젖꼭지와 입술 사이에 눌린 음핵이 번갈아 짓이겨지며 파르르 온몸을 경련케 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불규칙하게 터지는 숨결.

“들어와, 강승재.”

허락인지 애원인지 모를, 묘한 뉘앙스의 문장이 조급하게 들려왔다. 상대의 손길이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전희 시간과 흥분의 정도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반응을 찬찬히 살피며 위치와 강약을 조절하는 남자의 섬세함에, 카메라를 다루는 전공이 별로라던 얼마 전 생각이 금세 바뀌어지는 순간.

금방이라도 절정에 오를 것처럼 그녀의 미간이 야릇하게 일그러졌다.

“이제 그만… 흐읏, 얼른….”

“응.”

짧게 답한 승재가 바지와 드로어즈를 한꺼번에 내리고 채원의 중심에 몸을 맞붙였다. 잔뜩 열 오른 뭉툭한 선단이 촉촉이 젖은 음부 사이 제 위치를 찾아가려 버둥거리는데.

“아, 맞다. 잠깐만….”

갑작스레 정지된 움직임. 승재가 난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왜?”

“하아, 정말….”

콘돔 순서를 깜박하고 말았다. 방에서 나오기 전, 바지 주머니에 허겁지겁 쑤셔 넣었던 은색 포장지가 뒤늦게 떠오른다. 이전 집에서 같이 살던 룸메가 승재의 이삿짐에 선물이랍시고 넣어준 콘돔 한 줄. 이 물건이 이렇게 또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며 혼자 들떠 있던 30분 전의 기억을 그새 까먹어 버리다니.

“미안…. 진작 꺼낸다는 걸….”

“아냐.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채원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지만, 승재의 입매는 일자로 굳어졌다. 한껏 고조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장본인께서는 당연히 마음 편할 리 없었다. 모양새가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완전 미숙함의 극치.

콱 혀를 깨물고 싶었다. 윤채원이 나를 등지기 전에, 차라리 내가 세상을 등지는 편이 더 낫겠다 여기며.

바닥에 내팽개쳐진 바지를 주섬주섬 뒤진 승재는, 손에 잡힌 네모반듯한 겉면을 허탈하게 찢었다.

다행히 눈치 제로인 주니어는 여전히 하늘 높이 고개를 쳐든 상태였다. 이놈마저 픽 쓰러졌더라면 콘돔을 손에 쥔 채 그녀에게 더 난감한 말을 건넸을지 모를 일. 그러니 기운 내자. 오늘의 대참사는 다음에 만회하면 되는 거고. 다음… 과연 다음이 있긴 한 걸까.

“강승재.”

“어?”

“나 키스해줘.”

채원이 팔을 뻗어 풀 죽어있는 남자의 뒷목을 보드랍게 끌어안았다. 비스듬히 꺾인 턱선. 승재가 가만히 입술을 건넸다. 푹 식은 방 안의 온도를 자연스레 올려주는 그녀의 능숙함이 한없이 고마웠지만, 그럴수록 스스로에 대한 자책은 커져 갔다. 아, 멍청한 놈. 하필 그 타이밍에 콘돔을….

“방금 딴생각했지?”

“아, 아니.”

“아니긴. 다 느껴지거든? 입술이 건성건성.”

“미안….”

“미안 소리 그만하고…. 응? 나 벌써 엄청 젖었단 말야.”

작게 새어 나오는 한마디에 승재의 본능이 단단히 치솟는다. 붉은색으로 뭉쳐진 가슴 꼭지를 한입 가득 빨아들인 그는 하체를 조금씩 움직여 길을 찾았다.

승재의 것은 그의 진심처럼 우람하게 컸다. 슬쩍 시선을 내린 채원이 새삼 치솟는 두려움에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읏. 아파.”

“너무 좁아서….”

“조금만 천천히….”

“응.”

비좁은 입구에 질척해진 귀두 끝을 억지로 욱여넣자, 채원이 미간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아파 보였지만 이건 강도를 조절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차라리 단숨에 길을 트는 것이 현명했다. 승재는 힘 있게 허리를 쳐올렸다.

“하읏!”

곧이어 터지는 야릇한 비명이 천장을 찔렀다. 승재는 다독이듯 채원의 가슴골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혀를 세워 살살 유두를 굴렸다. 바짝 얼어있던 질구가 서서히 풀려간다. 두꺼운 성기가 벌써 반 이상 들어갔는데도 축축이 젖어 든 내부 때문인지 크게 아프지 않았다. 생살이 쓸리는 느낌은 곧 찌르르한 전율이 되어 여인의 전신을 녹였다.

페니스가 자궁 끝을 거세게 치고 나갈 때마다 발가락이 자꾸만 오므라져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채원은 승재의 너른 등을 꽉 끌어안고 가르릉 신음했다. 그것은 작은 동물이 내는 본능적 소리에 가까웠다.

“괜찮아? 안 아파?”

“응…. 넌?”

“난… 미칠 것 같아.”

저속한 표현이나 강압적인 행위는 전혀 없었다. 강승재의 섹스는 평소 온화한 그의 성격처럼, 젠틀하고 정직하고 따뜻했다.

채원은 승재가 휘두르던 플라스틱 자의 알싸한 통증을 기억하려 애썼다. 불끈 치솟은 팔뚝의 핏줄. 거칠어진 호흡. 그녀를 거세게 다그치던 성난 음성.

“하으읏….”

오르가슴이 일순간 높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간드러진 신음이 귓가를 적시자, 승재 역시 참고 있던 본능을 그녀의 내부에 쏟아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절정을 맞이한 것은 아니다. 단지 한 시간 전쯤의 강승재를 떠올렸을 뿐. 그에게 굳이 이 얘길 할 필요는 없겠지.

“고마워….”

채원이 입을 작게 오물거렸다.

“하아, 뭐가….”

“아니 그냥. 이것저것 다….”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들어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무엇이 고마운 것인지 채원 역시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몇 번씩 되뇌었다. 고마워, 고맙다고.

* * *

“강승재….”

승재의 품에 안긴 채원이 맨살을 비비며 옴짝거린다.

“자?”

“아니….”

“자는 거 같은데?”

“그냥 눈만 감고 있는 거야.”

오랜만에 격한 운동을 마치고 나니 천근만근 눈꺼풀이 감겼지만, 웬일인지 그녀는 더욱 쌩쌩해진 듯했다.

“기분이 별로인가 봐.”

혼잣말처럼 오물거리는 음색이 방울새처럼 귀엽다.

“그럴 리가.”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그녀 역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나 보다. 내가 윤채원 때문에 매 순간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처럼.

“쓸데없이 걱정은. 난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좋았어. 물론 넌 아니겠지만….”

“뭐?”

채원은 당황한 듯 눈을 껌벅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난 아니겠지만, 이라니.”

나른한 콧소리가 사라진 음색.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승재를 응시하고 있는 그 표정은 어쩐지 조금 기분이 상한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내가 아까 어리버리하게 굴었잖아. 분위기 다 깨고….”

“그럴 수도 있지. 난 좋았는데 왜.”

“정말… 좋았어?”

“왜, 내가 거짓말하는 거 같아?”

“아니, 꼭 그렇다기보단….”

승재는 자신 없는 투로 말끝을 흐렸다.

섹스 후 상대에게 솔직한 후 토크를 들려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는 어떤 것에든 능숙해 보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주눅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무거운 카메라 짊어지고 폼 잡을 시간에, 클럽이든 어디든 기웃거리며 경험치라도 톡톡히 올려놓을 것을.

“기분 나빠.”

채원이 시트를 가슴까지 끌어 올리고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경험이 많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그래서 자꾸 눈치 보고 이상한 소리나 하고….”

“많든 적든 무슨 상관이야 그게….”

별 뜻 없이 꺼냈던 말이 그녀를 거슬리게 했나 보다. 그런 의도로 한 게 아니었는데. 미숙한 나 때문에 그녀가 만족하지 못했음 어쩌나, 오히려 난 그게 더 신경 쓰여서.

“암튼 난 오늘 좋았어. 진심이야.”

“알겠어. 알겠으니까 열 내지 마. 앞으론 말조심할게. 응?”

그는 천성이 선하고 착했다. 상대의 감정 변화를 파악하는 것에도 제법 능했다. 갈등이 오래 지속되는 것을 싫어했으며, 웬만하면 본인이 먼저 손을 내밀고 허리를 굽히는 편이었다.

서글서글한 레트리버 눈빛으로 사람을 끈질기게 어르고 달래니, 아무리 고약한 성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의 앞에서는 분노 게이지가 푸스스 가라앉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현명한 평화주의자. 강승재는 그런 남자였다.

“…성향이 좀 독특하단 거, 그게 전부야. ‘상과 벌’의 마무리가 항상 섹스로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이쪽 세계에 심취한 부류들은 그래. 섹스 자체엔 관심 없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아. 못 믿겠지만.”

“그 부류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건데? 전에 얘기했던 사디즘 마조히즘… 뭐, 그런 성향을 말하는 거야?”

“응, 비슷해…. 흔히들 말하는 도미넌트나 서브미시브는 또 다른 영역인 거고… 시작 전에 서로의 욕구를 어느 선까지 수용할 수 있는지 조율하긴 해도, 사실 딱 들어맞는 파트너를 만나는 건 생각처럼 쉬운 게 아냐. 난 주인의 발밑에서 흥분을 느끼는 쪽은 아니거든.”

승재로부터 슬쩍 시선을 피한 채원은, 이불 밖으로 쏘옥 내밀어진 발가락 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티 없이 맑은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기에는 주제가 너무 탁했다.

“그럼 넌, 정확히 어떤 부륜데?”

“아, 그게….”

채원은 난감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얕은 호기심이 깔린 질문이었다면 분명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진지한 음색은 대답을 도저히 회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플라스틱 자든, 커터칼이든, 당연히 고통스럽지. 근데 아프고 쓰린 느낌이 들 때마다 이상하게 정신이 맑아져. 왜 그런진 모르겠지만 두통도 사라지는 거 같고, 응어리가 확 풀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하나…. 근데 그 상황이 상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면 이상하게도 짜릿함이 훨씬 커져서…. 말하다 보니 이건 또 서브 성향 같기도 하고…. 하하, 나 너무 변태 같지? 미안, 내가 너한테 평범한 사람이었음 더 좋았을 텐데….”

“평범한 건, 재미없어.”

승재는 여전히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미소만큼은 거두어들인 상태였다.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대충 던진 말은 아니라는 걸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기에.

“여자를… 아니, 사람에게 매를 휘둘러 본 것도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계속 널 아프게 해야 한단 게 여전히 가장 괴롭지만…그렇다고 그 역할을 넘기고 싶진 않아. 그건 절대로 싫어. 다른 새끼가 너한테 그런 몹쓸 짓을 한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다고.”

움켜쥔 주먹에 부르르 힘이 들어간다. 정말로 그랬다. 윤채원의 하얗고 여린 살갗에 상처를 낼 수 있는 사람은 평생 나 하나뿐이길, 승재가 바라는 건 오직 그 하나였다.

“넌 얻어가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만족감이라든가, 희열이라든가….”

“벌써부터 속단하진 마. 취향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거니까.”

“에이, 강승재는 딱 봐도 선비형이라고. 곱게 비단옷 차려입은 도련님한테 확 흙탕물 끼얹은 기분이랄까. 암튼 오늘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닌… 으앗!”

서늘하게 드리워진 그림자. 채원의 몸이 순식간에 승재의 두 팔 안에 갇혀버렸다.

“선비들 속이 얼마나 음험한지, 니가 잘 모르는구나?”

“아, 미처 몰랐다. 미국 생활을 오래 해서 하, 한국사에 약하거든 내가.”

“그래? 그럼 지금부터 배워 가면 되겠네. 이 오빠가 또 야사에 박식한 타입이라.”

“자, 잠깐… 나 그럴 만한 체력은 없….”

“윤채원은 가만히 숨만 쉬면 돼. 체력 담당은 여기, 따로 있으니까.”

남자의 손이 하얀 시트를 홱 끌어 내리자, 뽀얀 젖가슴이 무방비로 드러났다. 채원이 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승재가 양 가슴을 가득 움켜쥐고 입술을 내렸다. 가운데로 몰린 유두가 갑작스러운 힘에 눌려 검붉어졌다.

“흐읏….”

승재가 혀를 꼿꼿이 세워 할짝, 젖꼭지 끝을 맛보자, 여인의 신음이 반사적으로 새어 나온다. 조금씩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혀가 이번엔 유륜 주위를 진하게 핥아갔다. 선홍빛 원을 따라 질척한 타액이 번지고, 채원은 한층 짙어진 숨결로 사내의 음험함에 불씨를 지핀다.

“읏, 이상해….”

“뭐가….”

“아까보다 훨씬 더, 민감해졌어….”

유두를 빨던 혀가 잠시 멈추어졌다.

“말해 봐. 어디가 민감해졌는지.”

“알면서 왜 물어 그걸….”

“선비들은 원래 구체적이고 명확한 답을 좋아한다고.”

“언제까지 그럴 건데? 말 한번 실수한 걸로 정말, 읏….”

한 뼘 물러나 있던 혀끝이 느른히 움직여 가슴의 정점을 훑었다. 눅진하고 차진 혀 표면이 젖꼭지를 스칠 때마다 아랫배가 찌르르 조여들어 미칠 것 같았다.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터라 몸 전체가 심히 곤두선 상태였다.

“제대로 답할 때까지 먹을 거야. 윤채원 젖꼭지 탱탱 불어서 밤새 아파해도 책임 못 진다 난.”

“흐응…. 못됐어 정말.”

너무 착하게만 여기니 반항심 생긴다고.

승재는 좌우로 비틀거리는 채원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집요하게 가슴을 빨았다. 하지만 채원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사디즘, 마조히즘 이야기를 꺼낼 때보다 몇 배는 더 부끄러움이 몰려온 탓이다.

“아직 참을 만한 모양이네.”

오기가 생겼는지, 승재의 손길이 배로 거칠어졌다. 손가락 두 개로 갈라진 속살을 넓게 벌린 그는 옹골차게 단단해진 음핵을 짓이기듯 눌렀다.

“하으읏! 말할게, 말한다고 지금…. 젖꼭지도 민감해졌고… 그 아래도….”

조급한 음색이 두서없이 흘렀다.

“아래가 어딘데.”

“니가 지금… 읏, 만지고 있는… 그곳.”

“정확한 명칭을 말해야지. 설마 모르는 건 아닐 테고.”

클리토리스를 못살게 굴던 남자의 손가락이 겹겹이 싸인 여린 살을 벌려 뻐끔거리는 입구를 찾았을 때.

“흐읏, 강승재… 잘못했어. 한 번만 봐줘…. 나 너무 쓸려서 아프단 말야. 제발….”

끝내 답을 말하지 못한 채원이 승재의 목을 끌어안은 채 애원했다.

얼룩덜룩 붉어진 젖가슴, 한껏 울상이 된 그녀를 보니 생뚱맞게도 페니스가 빠듯하게 기립해버렸다.

“맘 약해지게 코맹맹이 소리는.”

이대로 허리를 쳐올리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괜한 엄살은 아닌 듯했다. 그녀의 속살은 팽팽히 부어있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조차 집어넣기 힘들 정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방문을 열고 나가 두 번째 콘돔을 챙겨와야 한다는 것. 스스로의 능력을 너무 우습게 본 모양이다. 달랑 한 개 챙겨올 건 뭐냐.

“귀여워서 봐준다 내가.”

선심 쓰는 척 채원의 쇄골 부분까지 얌전히 시트를 덮어준 승재는, 새초롬한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고맙습니다. 선비님.”

채원이 장난스럽게 인사하며 초옥, 승재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 호칭 말고.”

“응?”

“다른 걸로 불러 봐.”

“무슨….”

“주인님이라든가.”

승재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치이, 뭣도 모르는 게.”

멋모를 때가 가장 무서운 법이라며 눈썹에 힘을 주었지만, 그녀는 별다른 의미부여 없이 승재의 말을 웃어넘겼다.

“그만 까불고 얼른 자. 이러다 우리 정말 들키겠다.”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란 눈꺼풀이 졸린 듯 느리게 깜박인다. 채원의 이마에 지그시 입술의 온기를 남긴 승재는, 램프를 끄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후우….”

채원의 방문이 완벽히 닫히자, 그제야 긴 숨이 푸욱 새어나왔다.

정신없이 흘러간 몇 시간의 기억을 되짚으려 할수록 혼란만이 가중될 뿐이었다. 여인의 탐스러운 가슴보다, 촉촉이 액이 흐르던 은밀한 속살보다, 새하얀 허벅지에 새겨진 붉은 매질의 자국. 그 선명한 색의 대비가 왜 이리도 머릿속을 어지르는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전염이라도 된 건가….”

선비의 비단옷에 묻은 질펀한 진흙은 쉬이 잊힐 것 같지 않았다. 콕콕 찌르는 관자놀이 부근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천천히 돌아서는데.

“야, 네가 왜 윤채원 방에서 나와?”

정혁이 황당한 눈초리로 승재를 쳐다보았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터져버렸다.

* * *

“언제 왔냐? 늦는다더니….”

정혁을 본 승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말을 둘러대려 해도 류정혁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상 채원의 방에서 나온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뭔데?”

“뭐가.”

뭘 묻는지 알면서도 태연한 척 되묻는 승재. 이미 들켜버린 것 같지만, 제 입으로 순순히 털어놓기가 어쩐지 쑥스러워 괜한 능청을 떨어본다.

“깁스 풀었냐?”

“아, 응….”

“그래서, 풀자마자 직행한 거야? 윤채원 방으로?”

“그, 그런 거 아냐 인마. 누굴 짐승으로 아나.”

짐승이 절대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반인반수 정도?

승재는 둘러대기를 이내 포기했다. 모든 걸 간파했다는 저 의미심장한 눈빛 앞에서 어쭙잖은 거짓말은 오히려 사람을 우습게 만들 뿐이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 관계 안정되면 얘기하려고 했었는데….”

“아냐. 이미 넋 나가 있는 놈한테 내가 괜한 오지랖 부렸지.”

그녀를 너무 가까이하지 말라 조언했던 것이 뒤늦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방 뺄 거면 2주 전에는 미리 통보해 줘. 너 나가면 그 방에 트레이드밀 들여놓을까 생각 중이거든.”

“뭔 헛소리야. 나 졸업할 때까지 이사 갈 마음 없다고.”

“사귀다 헤어지면 둘 중 하나는 나가야 할 거 아냐. 윤채원은 보증금 일부 부담하고 있으니까 네가 방 빼는 게 아무래도 간편할 듯싶어서.”

“야!”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독설 퍼붓는 데에는 도가 튼 놈이다. 승재의 버럭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피식 입꼬리를 올리는 정혁.

“열 내긴. 농담이다, 농담.”

당연히 진담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놀리는 재미라도 있어야지.

물론 축하할 일이었으나, 셋 중 두 놈이 껌딱지처럼 붙어 연애를 한다 하니 삐딱한 심술이 자꾸만 돋아나려 한다.

“후우, 나한텐 전혀 농담같이 안 들린다고. 안 그래도 자신감 완전 바닥이구만.”

“무슨 일 있었어?”

“윤채원이 너무 완벽하니까, 상대적으로 내가 너무 모자란 놈 같아서.”

“허… 난 또 뭐라고. 강승재 아주 제대로 씌었네. 그다음 줄부터는 일기장에 써라. 듣기 피곤하다.”

정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술기운이 얼큰히 올라온다. 이제 그만 씻어야겠다며 욕실로 걸어가려는데.

“암튼… 잘 좀 봐줘.”

넌지시 정혁을 가로막은 승재가 머뭇머뭇 한마디를 덧붙였다. 조바심이 역력히 드러난 얼굴을 하고선.

“봐주긴 누굴 봐줘. 나 살기도 바쁜데.”

말은 그렇게 해도 류정혁의 속내는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진심으로 윤채원과 나를 염려해주는 눈빛.

“내가 믿는 구석이 너 말고 또 누가 있겠어.”

그래서 더 든든한 녀석.

“술 생각나면 얘기해라. 너무 무리하진 말고.”

정혁의 손이 승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체력이든, 정신이든. 과하게 쓰면 좋지 않다는 말도 덧붙여주었다. 류정혁다운 응원이었다.

* * *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없이 곯아떨어진 승재는 시끄러운 기척에 스르르 눈을 떴다.

“왜 또 잔소린데? 그냥 물고만 있는 거라고. 연기 안 나잖아 아직.”

멀리서 들려오는 류정혁의 짜증 섞인 음성.

“그래도 싫단 말야! 라이터 손에 쥔 거 누가 모를 줄 아나. 아침부터 밥맛 떨어지게 진짜….”

그보다 몇 배는 더 짜증이 들어찬 윤채원의 낭랑한 목소리. 또 새로운 아침이 밝았나 보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문밖의 잡음을 흔한 모닝콜처럼 넘겨보려 하였으나.

“어떤 여자가 너 데려갈지 한숨 나온다. 내가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연애 못 하게 말릴 테니까 두고 봐.”

“네가 지금 나한테 큰소리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뭐야?”

류정혁의 일발 장전 낌새를 눈치챈 승재는 침대 밖으로 후다닥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영문도 모르는 불쌍한 어린양이 코너로 몰리기 전에 구원 투수가 등판할 차례였으니.

“왜들 그래, 아침부터.”

벌컥 문을 열고 나간 승재가 서둘러 대화의 맥을 끊었다. 그를 향한 엇갈린 시선. 떨떠름한 류정혁의 눈동자를 슬쩍 지나친 승재는 채원의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에 섰다.

“류정혁 또 담배 피웠어? 여기 맨션 전체 금연이라고 몇 번씩 공지 내려오던데.”

미안하다 친구야. 너도 여자 생기면 내 맘 이해해주겠지.

너무나도 당연하게 채원의 편을 들고 있는 승재의 모습에 정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자아냈다.

“하… 윤채원 쪽으로 붙겠다 이거지?”

“붙긴 뭘 붙어. 강승재가 딱풀이야?”

초등학생 말싸움을 방불케 하는 유치한 그녀의 대꾸가 어찌나 귀여운지, 승재가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티 나게 구겨지는 류정혁의 면상이 느껴진다. 저 녀석이 앙심을 품고 다음 달 월세 부담률을 높이기라도 하면 어쩌나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괜한 우려일 것이다. 성격이 괴팍할지언정 치사한 놈은 아니니까.

“아주 가관이구만. 나 오늘 오전 수업 휴강이라 한숨 더 자고 갈 거다. 조용히 등교들 해. 연애질은 밖에 나가서 하라고.”

한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다시금 입에 문 정혁은, 보란 듯이 라이터로 불을 붙이며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야, 류! 저게 끝까지 담배를….”

“그만해 너도. 정혁이 성격 깔끔한 거 몰라? 환기 다 시켜놓고 나갈 거야. 걱정 마.”

승재는 발끈 쏘아붙이려는 채원의 팔을 슬그머니 잡아끌었다. 괜한 분란을 만들어봤자 득 될 것이 없었다.

“당분간은 저놈 비위 좀 맞춰줘.”

“방에서 담배나 피워대는 몰상식한 인간을 내가 왜!”

“어제 들켰단 말야. 네 방에서 나오다가.”

“진짜?”

채원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언제 왔지. 도어록 소리 못 들었는데….”

“나도 몰랐어. 너무 심취했었나 봐.”

순간 채원의 양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빙 에두른 표현이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제법 직설적으로 들렸다. 당사자가 모를 리 없다. 어젯밤 강승재가 무엇에, 어떻게, 심취해 있었는지.

“얼굴 빨개졌다 너.”

“그런 건 일일이 지적 안 해도 되거든?”

“귀여워.”

“그, 그런 것도 그냥 속으로만 삼키라고.”

몰랐는데, 그녀는 의외로 칭찬이나 간지러운 멘트를 견디는 것에 취약했다.

“혹시 오빠나 남동생 있어?”

“아니.”

“근데 영 면역이 없어 보인다?”

“무슨 면역?”

“오글 바이러스 면역. 귀엽단 말 처음 듣는 것도 아닐 테고.”

“처음 들어.”

덤덤히 입을 여는 채원의 대답에 오히려 더 놀란 쪽은 승재였다.

“설마.”

“진짜야. 연애를 길게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봐.”

“아니, 남친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부모님이나….”

“우리 엄만 그런 타입 절대 아냐. 외동딸 버릇 나빠진다면서 얼마나 막 굴렸는지, 7살 땐가 8살 땐가, 내가 길에서 대자로 넘어졌는데 멀뚱멀뚱 보고만 있더라니까? 울지 말고 얼른 일어나라고 어찌나 다그치던지, 그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아. 난 나중에 아기 낳으면 흙 묻은 옷도 털어주고 까진 무릎도 호 불어주면서 그렇게 키울 거야. 어리광 좀 부리면 어때. 어차피 크면 부리고 싶어도 못 부릴 텐데.”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채원이 갑작스럽게 목청을 돋우었다. 조금 생뚱맞은 감이 있었지만 얼떨결에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좋았다.

그녀는 외동딸이고, 어머니가 많이 엄하셨구나.

이런 기본적인 가족 관계조차 생소하기만 하니, 윤채원에 대해 알아가려면 아직 한참 먼 듯싶다.

“나한테는 어리광부려도 돼.”

“이젠 하고 싶어도 못해. 어떻게 하는지 까먹어서.”

씁쓸하게 번진 미소가 승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방법이 뭐가 필요 있어. 오늘은 이게 힘들었다, 저게 슬펐다 무작정 종알거리며 몸을 기대면 그만인 것을.

“보통은 역할을 하나씩 맡으시던데. 우리 집은 주로 아버지가 군기 잡으셨거든. 그래 봤자 혼나는 건 항상 나였지만. 여동생이랑 세 살 차인데 요게 성격이 완전 여우라서 이리저리 잘도 피해 다니는 바람에.”

“그렇구나. 왠지 여동생 있을 것 같았는데, 신기하네.”

“그래?”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이 안 간다. 남성호르몬이 부족해 보였나? 왠지 오빠보단 언니 쪽 느낌에 더 가까워 그런 것 아니냐고, 실없는 소리를 던져보려던 찰나.

“우리 엄만 어쩔 수 없었을 거야. 역할 분담이 불가능했으니까….”

채원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아빠가 안 계셔서.”

“아, 미, 미안…. 그런 줄도 모르고….”

나불거리던 입술을 스스로 쥐어뜯고 싶었다. 누구나 다 가정사가 있는 건데, 그거 하나를 신경 쓰지 못 하고 입을 놀렸으니.

“괜찮아. 어리광이 뭔지 모르는 거랑 똑같다고 보면 돼. 원래부터 없었거든. 그래서 잘 못 느껴. 빈자리 같은 건.”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 느꼈다. 세 살 위 남자에게 오빠 소리 대신 이름을 부른다 하여 좁혀진 격차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서로의 나이를 알기 전부터도 그랬다. 왠지 모를 의연함과 담대함.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낯빛. 스물두 살의 옷이라 하기엔 살짝 겉도는 감이 있는.

“진작 말하지 그랬어.”

“해서 뭐해.”

“그래도 혼자 삭이는 것보단 낫지.”

“정말 괜찮대두.”

“많이 힘들었겠다.”

정말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울컥 목이 메었다. 그의 음색이 필요 이상으로 감미로워 그런 듯했다. 그래. 강승재 목소리가 문제였다.

“아버지 얼굴… 기억은 나?”

“아니.”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나는 왜 거짓말을 했을까.

“…돌아가신 거야?”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우리 토스트 얼른 먹고….”

“나 태어나기 전에… 사라져버렸어. 아빠, 죽었어….”

그때 내가 진실로 답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우린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

붐플러스

관련자료

널 버릴 자격 06. 통제 II
  
그누보드5



Copyright © FUNB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