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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통제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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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푸벳

#05. 통제 I

* * *

“누가 이걸 다시 들여놨어! 강승재 너지?”

아무래도 고백 디데이는 미뤄져야 할 것 같다. 본의 아니게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니.

“완전 명품 천지던데 그걸 왜 버려 아깝게…. 차라리 갖다 팔든가.”

“묶어놓은 쓰레기는 왜 뒤지는데! 성격 진짜 특이해.”

“내가 미쳤다고 쓰레기를…. 뒤진 게 아니라 애초부터 허술하게 묶여 있었다고! 현관 입구 턱, 막고 있길래 발로 툭, 밀다가 내용물이 쏟아진 걸 어떡하냐 그럼. 본 게 아니라 보인 거다. 보인 거!”

아침엔 나긋나긋 친절한 천사가 따로 없더니, 반나절 만에 또 씩씩 열을 낸다. 아니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다고 저러지.

어제부터 현관 앞을 막고 있는 거대하고 시커먼 비닐봉투가 자꾸만 승재의 눈에 거슬렸더랬다. 대신 버려주고 점수 좀 따야겠다 싶은 마음에 손을 뻗어 쓰레기를 옮기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아무래도 윤채원이 정신이 없어 잘못 버린 듯싶었다.

태그도 떼지 않은 명품백 여러 개와 딱 봐도 번쩍번쩍 비싸 보이는 액세서리, 옷가지들. 심지어 박스째로 뒹굴고 있는 태블릿 PC까지.

혹시 정리하려고 따로 모아둔 건가. 아무리 있는 집 자식이라 해도 명품을 쓰레기통에 처박진 않을 거 아냐. 당연히 뭔가 착오가 생긴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손수 이 물건들을 채원의 방 앞까지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오지랖도 민폐인 거 알지? 관심 좀 적당히 가져 주라 제발. 피곤하니까.”

단단히 실수를 하긴 했나 보다. 허물어진 3m 거리가 순식간에 복구된 것도 모자라 저만치 뒤로 멀어져버렸다.

관심 좀 적당히 가져 달라고? 내가 본인한테 관심 있다는 걸 알고나 하는 소린가.

“미안. 다시 현관 앞에 내다 놓을 테니까 이리 줘.”

“됐어. 팔든 버리든 내가 할 거야. 걱정 마.”

쾅. 채원은 너저분히 담긴 물건들을 질질 끌고 들어간 후 방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영문도 모른 채 튀어 오른 불똥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과민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뭔지 속 시원히 말이나 해주면 좋겠다. 저 대학 애들은 성질이 다 저리도 불같은가. 뭘 배우고 다니길래.

극으로 치우친 두 명의 표본과 한집살이를 하느라 생고생 중인 이 남자. 앞으로 캘리포니아 대학 경영학과 학생들의 뒷담화는 강승재가 도맡아 하고 다니게 생겼다.

* * *

후우.

엉뚱한 녀석한테 화풀이를 해버렸네.

방문을 걸어 잠근 채원이 침대 위로 풀썩 몸을 던졌다. 어제 그어버린 허벅지가 욱신거렸다. 아픔이 느껴지자 널뛰던 가슴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채원은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손으로는 허벅지를 천천히 쓸었다. 또다시 통증이 느껴진다. 아프다. 여전히 아픈데, 그럴수록 마음은 고요해진다. 이 몹쓸 고질병.

지잉.

머리맡 휴대폰이 진동했다. 웬일로 전화가 안 오나 했더니.

“여보세요.”

채원은 목소리를 깔았다. 한국으로부터 걸려온 국제전화. 엄마의 번호였다.

「먼저 연락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 궁금해서 잠 한숨 못 잤잖아.」

“뭐가 궁금한데.”

「모른 척하기는. 회장님은 잘 만났어? 뭐라셔? 예쁘게 입고 있었어? 집 청소는 깨끗이 해놨고?」

항상 이런 식이다. 내 감정을 묻는 대신, 항상 그 사람의 반응이 우선이고 먼저인.

“예쁘게 하고 있었어. 집도 깨끗했고.”

「또 김 비서님이랑 같이 오셨니?」

“응.”

「무슨 얘기 했는지 자세히 좀 말해 봐. 응, 응, 대답만 하지 말고.」

“별거 없었어. 공부 잘하냐, 졸업 후에 뭐 할 거냐, 그런 거 물어보고 10분쯤 있다 가셨….”

「너 설마, 졸업하면 서일그룹 취직할 거다, 이딴 헛소리 내뱉은 건 아니지?」

딸내미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린 수경은 다급한 톤으로 입단속 여부를 묻는다.

“그냥 입 다물고 얌전히 있었어. 그런 얘기 미리 해서 뭐해, 아직 졸업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졸업해도 서일 쪽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 엄마가 몇 번을 말해, 그냥 미국에 눌러앉아 있으라고. 회장님이 돈은 얼마든지 대주신다 했으니까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하게 살아.」

“난 여기 생활 하나도 안 편해. 졸업하면 귀국해서 서일그룹 들어갈 거야.”

「채원아.」

“내가 거기 취직하고 싶다는 게,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이상한 짓 꾸미겠다는 게 아니라 적당한 계열사 공채로 입사해서 그냥 조용히 월급 받….”

「글쎄 안 된다니까! 그러다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어차피 성도 다른데 무슨 소문이 난다고 그래! 내가 무슨 죄지었어? 왜 해외로 못 쫓아내서 안달이야 다들!”

「누가 듣겠다. 목소리 낮춰.」

“엄마…. 제발 그만 좀 해. 평생 그렇게 숨죽이고 사는 거, 지겹지도 않아? 나 생활비 끊겨도 상관없으니까 엄마도 이제 좋은 남자 만나서….”

「엄만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매번!”

「평생 돈 걱정 안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우린 복 받은 모녀지. 더 이상 욕심내는 건, 너무 염치없는 짓이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언쟁.

지겹다 정말.

“끊어요. 나 과제 해야 돼.”

결국 앙금만 남은 상태로 엄마와의 대화가 끊기고 만다. 휴대폰을 침대 위로 내동댕이친 채원은 손톱 끝에 힘을 주어 아까보다 더 강한 세기로 자신의 허벅지를 짓눌렀다.

“읏.”

쓰린 통증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동시에 막힌 숨통이 트인다.

하아,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윤채원.

이 짓도 신물 나긴 마찬가지였다.

* * *

‘엄마, 나는 아빠가 왜 없어? 죽어서 하늘나라 갔어?’

아빠에 대한 부재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입학 무렵부터였다.

‘아니.’

‘그럼 엄마랑 싸워서 이제 같이 안 사는 거야? 혜지네 부모님처럼?’

‘아니.’

‘그럼 어디 갔는데.’

‘원래부터 없었어. 대신 채원이한텐 엄마랑 할머니랑 외삼촌이랑… 많이 있잖아.’

‘그래도 아빠는 없잖아. 난 아빠 갖고 싶어.’

수경은 눈물을 흘렸고, 그때 이후 채원은 아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엄마를 울리기는 싫었다.

채원은 엄마의 성과 같은 윤씨였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아기를 만든다는 사실을 배운 뒤에도, 채원은 그 생물학적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한참 걸렸다. 그래도 하나쯤은 예외가 있지 않을까. 나는 정말로 아빠 같은 건 없었던 게 아닐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하면서.

‘채원아,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실 거야. 학교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 학원 빠져도 되니까.’

‘손님?’

‘응. 엄마가 머리 땋아줄게. 예쁘게 하고 있어야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그분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았다. 서너 달에 한 번 꼴로 집을 찾아와 엄마에게 봉투를 건네고, 엄마가 내준 차 한 잔을 마시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30분도 안 되어 자리를 뜨던 중년의 신사.

뭣도 모르고 채원은 그 ‘손님’의 방문을 기다렸다. 엄마의 허락 아래 학원을 안 가도 되는 날. 예쁜 옷을 입고 예쁜 머리를 하는 날. 그리고 비싼 선물을 한 아름 받는 날. 손님을 태우고 온 검은색 차 안에는 항상 채원을 위한 선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인형, 책가방, 원피스, 학용품….

손님이 직접 선물을 전해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나 젊은 남자 직원을 데리고 다녔는데, 정장 차림의 그 직원은 현관 앞까지 들어와 선물이 든 쇼핑백을 내려놓고, 수경과 채원을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인 후 이내 사라지곤 했다. 잘생기고 훤칠한 그 모습이 왠지 왕자님같이 멋있어, 채원은 잠들기 전 몰래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린 적도 있었다.

선물의 종류가 인형과 학용품에서 컴퓨터와 전자기기, 사춘기 여학생들이 좋아할 법한 화장품 등으로 바뀌게 되었을 때, 그제야 느낌이 왔다.

자신에게 유전자의 절반을 나누어준 생물학적 아버지가 바로 그 ‘손님’이라는 걸.

서일그룹 정창길 회장.

신문과 뉴스에 손님의 얼굴이 심심치 않게 등장할 때마다, 엄마는 보던 신문을 접어 폐지로 묶고,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엄마. 그렇게 숨기지 않아도 돼 이제. 나도 다 안다구요.’

‘뭐?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조그만 게 알긴 뭘 안다고….’

‘윤채원이 아니라, 정채원 될 뻔한 거잖아. 내 이름….’

엄마가 불륜을 저지른 건가. 아니면 그 남자가 엄마를 내친 것일까.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설마, 아니겠지. 불쌍한 우리 엄마…. 결국 내가 엄마의 인생을 망쳐버린 거야. 나만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때부터 채원은 반에서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고, 말썽이나 사고 없이 원만한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언제나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오직 엄마를 위해서였다. 하나뿐인 딸내미가 그 ‘손님’의 눈 밖에 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하루하루 마음 졸이고 있는 가여운 여인.

채원이 제 몸에 상처를 내기 시작한 것도 그쯤부터였다.

묻고 싶은 수많은 질문과 이어지는 자책들을 속으로만 삭여야 했던 열네 살의 소녀.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살갗을 짓이기며 대신 눈물을 삼켜내던 것이 지금과 같은 몹쓸 버릇을 만들어 버렸다.

채원의 주변에는 항상 친구들이 북적였다. 하지만 곪아 터진 그녀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똑똑.

“강승재, 나 들어가도 돼?”

한바탕 소란이 일고 두어 시간쯤 지났으려나. 뜻밖의 목소리가 승재를 불렀다.

“어. 자, 잠깐만.”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한 손으로 폰을 보고 있던 승재는 급히 주변을 둘러본 후 문을 열었다. 다행히 방은 잘 정돈된 편이었다.

“웬일이야?”

성질부리고 홱 들어갈 땐 언제고, 웬일이야? 먼저 노크를 다.

승재는 하고 싶은 말을 대폭 줄여 4글자로 물었다. 속마음 그대로 내뱉었다간 될 일도 안 될 듯하여.

“이거, 그냥 너 가질래?”

채원은 주섬주섬 가지고 들어갔던 쓰레기봉투를 그대로 다시 승재의 앞에 내려놓는다. 연애 경험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참 알 수 없는 여자의 심리.

“관심 끄라며.”

“막상 처리하려니 귀찮아졌어. 버리든 팔든 알아서 해줘.”

선심 쓰듯 말하는 윤채원의 말투에 기가 찼지만, 솔직히 받아서 나쁠 것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럼 태블릿 PC는 나 써도 되나?”

자존심이고 뭐고, 물욕 앞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현상 아니겠나. 승재는 처음 봤을 때부터 눈독을 들였던 태블릿 PC 박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스티커도 떼지 않은 완벽한 새 제품이었다.

“응. 너 써. 난 랩톱이 편해서.”

“공짜로 받긴 좀 그런데.”

“그동안 밀린 샌드위치 값이라고 생각해.”

“넌 진짜 필요 없어?”

“응.”

“이거 다 헤어진 남친이 준 거냐 혹시?”

승재가 채원을 은근슬쩍 떠보았다. 전 남친이 준 선물이라 여기는 것이 그나마 가장 논리적인 추측이었다. 보통 사람의 상식선으로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려 드는 것은 무리였다.

“뭐 비슷해.”

“비슷한 건 뭔데?”

“선물 준 사람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버리는 거니까. 비슷하잖아. 전 남친이든 뭐든.”

겨우 하나 알아냈다. 어제 온 손님은 윤채원과 사이가 좋지 않군. 어느 세월에 퍼즐을 완성할지, 단서가 이렇게 더디게 모여서야.

“이건 다시 가져가도 돼?”

채원이 승재의 책상 위에 놓인 커터칼을 만지작거렸다.

“안 돼.”

“쓸 데가 있어서 그래. 택배 온 거 뜯어야 하는데.”

“여기 가져와서 해 그럼.”

“택배 올 때마다 네 방 와서 뜯으라고?”

“어.”

“말이 되냐 그게. 커터칼 하나 더 사고 말지.”

승재는 웃지 않았다. 차라리 칼을 추가로 구매하는 게 낫겠다는 그녀의 장난스러운 대꾸가 전혀 우습게 들리지 않았다.

“비밀 보장해주는 대신, 내 요구사항도 지켜줘.”

“택배 박스 여기서 뜯는 거 말고 지킬 게 또 있어?”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

낮고 묵직한 목소리. 채원의 입가에 희미하게 걸린 미소가 곧 사라졌다.

“윤채원. 대답해.”

“못 해, 그건.”

“왜 못 하는데! 무슨 사연인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위험한 짓은 하지 말아야지!”

“극단적인 생각으로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말했잖아. 그냥 아주 살짝….”

“아주 살짝,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만 그었다고? 그게 너 스스로 조절 가능하다 믿는 거냐? 네가 의사야? 본인 살에 칼 대는 짓이 일반적으로 하는 행동이냐고 그게!”

“내 사생활이야. 너한테 일일이 허락받을 이유 없어.”

채원이 망설이던 문장을 마저 이었다.

“숨이 안 쉬어져서.”

“뭐?”

“죽을 것 같아서, 숨이라도 편히 뱉어보려고 그런 거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혼란으로 가득 찬 승재의 눈빛이 채원을 마주했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깨끗하고 진중한 남자의 눈동자에, 채원은 덜컥 겁이 났다.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충동과, 멋대로 입이 열리기 전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동시에 밀려든다.

“나 이제 과외 하러 가봐야 돼. 늦었어.”

채원은 결국 승재로부터 등을 돌렸다. 하마터면 주절주절 마음을 열 뻔했다. 겨우 한 달 남짓 알고 지낸 스물다섯 애송이 앞에서.

“과외 위치가 어딘데.”

“여기서 별로 안 멀어.”

“몇 시쯤 끝나는데?”

“아 진짜. 뭐가 그렇게 관심이 많아? 너 나 좋아해?”

“어. 좋아해.”

당황시킬 작정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가 이렇게나 확고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다.

“뭐야 갑자기. 너무 진지하니까 식은땀 나네.”

그녀가 던진 두 번째 농담에도 역시 승재는 웃지 않았다.

“대충 눈치채고 있었잖아. 처음 봤을 때부터, 내가 너 좋아했단 거.”

승재는 미사여구 없이,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비교적 담담히 읊조렸다. 채원은 입을 꼭 다문 채 승재를 바라보았다. 단번에 거절을 해야 맞는 건데, 이상하게도 그를 밀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안 말해줄 거야? 과외 몇 시에 끝나는지?”

승재가 화제를 돌려 그녀의 아르바이트 시간에 대해 재차 물었다.

“아… 밤 10시쯤 끝날 거야.”

“위치가 어딘데?”

“가까워. 윌킨스가.”

“윌킨스가 어디? 자세히 말해 봐.”

“아이스크림집 맞은편 빨간 지붕….”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채원은 승재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답했다.

분명 날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저 녀석.

고백 이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과외 장소를 묻는 남자의 태연함이 어리둥절하면서도 또 묘하게 가슴이 뛰니, 이 흩어진 감정들을 어찌 정리하면 좋을까.

채원의 눈동자에도 혼란이 서린다.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서있는 저 남자의 눈빛처럼.

* * *

윌킨스 애비뉴, 주택가.

“밀리지 말고 매일 조금씩 복습하는 게 중요해. 과외 시간 전에 몰아서 숙제하지 말고. 알겠어?”

채원은 교재를 정리하며 늘 반복하는 잔소리를 되풀이했다.

“네에. 이제 수업 끝난 거죠? 저 휴대폰 봐도 돼요?”

“그래. 두 시간 동안 폰 안 보느라 차암 고생 많았다.”

몸을 아주 배배 꼬는구나.

채원의 비아냥을 알아듣기에 학생의 나이는 아직 어렸다. 한국 나이로 열한 살. 심지어 이민 온 지 얼마 안 된 한인 부부의 자녀라 아직은 영어보단 한국어가 더 익숙한 상태였다.

“우리 민후가 곧잘 따라가는 편인가요? 학교에서 무시 안 당하려면 수학이라도 잘해야 할 텐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아주.”

“아, 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집중력이 조금 부족하긴 합니다만….”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나요? 얼마나요? 거 큰일이네. 폰 게임을 많이 해서 그런 걸까요?”

“여보, 그만 좀 해요. 남자가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민후 과외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아이한테 관심이 지나쳐서, 호호.”

참 신기한 광경.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관심이야 당연한 것인데도 채원이 느끼기엔 생소하기만 하다. 아버지의 참견은 더더욱.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민후가 워낙 이해력이 뛰어나서. 초등학교 남자아이들 산만한 건 다들 비슷비슷하구요.”

채원은 학부모를 안심시킬 만한 적당한 단어들을 버무려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벌써 10시 15분.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예고했던 강승재 때문에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진다.

“선생님, 고생 많으셨어요. 다음 주에 뵐게요. 민후야! 얘가 또 어디 갔어 그새. 얼른 와서 인사해야지! 선생님 가시는데!”

“아니에요, 그냥 두세요. 아까 민후 방에서 인사 나눴으니 괜찮습니다. 그럼 쉬세요, 어머님.”

스니커즈를 구겨 신고 서둘러 현관을 나서는 그녀. 과외 선생 입장이라 해서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더디 흐르던 1분 1초. 괜스레 발랑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채원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윤채원! 여기.”

어둑어둑한 길모퉁이에 서있던 승재가 불쑥, 얼굴을 내민다. 생각해보니 이 한밤중에 빨간 지붕인지 파란 지붕인지 분간도 제대로 안 갔을 텐데, 용케도 잘 찾아왔다.

“안 헤맸어?”

“찾기 쉽던데? 이 가게 몇 번 왔었어. 라벤더 아이스크림 유명하다길래.”

승재는 채원이 가르쳐준 아이스크림 숍을 가리키며 웃었다. 깁스를 한 오른손이 새삼 눈에 띈다. 왠지 쑥스러워 고맙단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는데.

“막상 와보니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 저기 케밥집 간판 밝아서 길도 환하고….”

“데리러 올게 그래도.”

“왜 오버야 갑자기. 네가 나 좋아한다고 한 거지, 나도 같은 마음이라고 한 적 없잖아.”

“알아. 너한테 고백했다고 이러는 거 아냐. 이건 어디까지나 같이 사는 하우스메이트 신변에 관한 문제니까.”

핑계 한번 거창하다.

“그거 혹시 내 얘기야?”

알면서도 모른 척, 채원이 되물었다.

“당연히 너지. 설마 류정혁이겠어?”

“내 신변 걱정 안 해도 돼. 그 미국 놈은 어쩌다 보니 재수 없어서 걸린 케이스고….”

“내가 오는 게 부담스러워?”

“조금…. 그리고 너 싸움 잘 못 하잖아.”

“맷집은 좋아.”

“자랑이다.”

채원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강승재의 커다란 운동화와 나란히 발을 맞추어 걸었다.

맨션까진 도보로 십 분. 선선히 부는 바람을 맞으며 걷기에 딱 적당한 거리였다. 다행히 달은 밝지 않았다. 용기를 내는 것은 아무래도 밤이 편했다. 긴장 속에 굳은 광대라든가 붉어지는 얼굴색이 무뎌지는 조도.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이미 봤잖아.”

새초롬한 입술이 파르르 움직였다. 물론 그 미세한 떨림은 어둠에 가려 전해지지 않았다.

“그게 뭐.”

“그래도… 좋아?”

“무슨 질문이 그러냐. 오히려 더 좋아졌어. 얼떨결에 윤채원 비밀 하나 공유하게 돼서.”

승재는 일부러 덤덤히 대꾸했다. 그녀가 가진 버릇이, 손톱을 물어뜯거나 다리를 떠는 것과 별반 차이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루아침에 바뀌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고, 그러니 스스로를 너무 괴물 취급하지 말라고.

“난… 평범한 연애는 못 해.”

“어디까지가 평범한 건데?”

“…….”

“사람은 누구나 다 특이해. 그런 기준을 정해놓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야.”

“그래도 난 다르다고.”

채원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스라한 가로등 불빛마저 사라져버린 길목, 완벽히 깔린 어둠이 드디어 그녀의 얼굴을 덮는다.

“강승재, 나는… 날 통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해.”

이해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거절하기엔 너의 눈이 지나치게 맑아서, 그런 탓에.

“해줄게 내가.”

“뭘 해준단 거야 멍청아. 내가 한 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게 뭐든.”

커다란 손바닥이 가느다란 손목을 바로 쥐었다.

“내가 해주겠다고.”

남자의 열띤 체온이 고스란히 번져온다. 억센 악력은 아니었지만, 수월히 뿌리칠 만큼 느슨한 힘도 아니었다.

* * *

[통제(統制): 일정한 방침이나 목적에 따라 행위를 제한하거나 제약함.]

승재는 심각한 얼굴로 국어사전이 띄워진 휴대폰 화면을 천천히 스크롤했다.

“일정한 방침이나 목적에 따라 행위를 제한….”

후우. 뭐하냐, 아까부터.

“지금 뜻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

곱슬기 섞인 갈색 머리칼을 투박하게 헝클어뜨리며 폰 한번 쳐다보고, 다시 천장 한번 쳐다보고 뒤척이기를 벌써 한 시간째. 스스로 생각해도 갑갑하여 절로 욕이 튀어나온다.

‘강승재, 나는…. 날 통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원해.’

그녀의 음색은 비교적 차분했지만, 쉽게 꺼낸 말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호흡 한번을 길게 마시고는 멈칫거리기를 여러 번. 겨우 털어놓았던 거야. 아무나 만날 수 없다, 알려주려고.

하지만 승재는 무턱대고 그녀를 잡았다. 채원이 무슨 생각으로 ‘통제’라는 단어를 흘린 것인지, 솔직히 그 의미가 정확히 와닿진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그 가늘고 하얀 손목을 붙드는 것이 먼저였다. 그녀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맞춰줄 자신도 있었다. 성인이라곤 해도 그래 봤자 스물둘 여학생이다. 세 살이나 많은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나.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뭘 어떻게 해달라는 거야….”

모르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모르겠다. 그녀를 통제해줄 수 있는 사람. 그게 대체 어떤 존재인지.

“일정한 방침이나 목적에 따라….”

이제는 암기할 지경이 되어버린 ‘통제’의 사전적 의미를, 승재는 한 번 더 되짚으며 찬찬히 읊조렸다.

일정한 방침이라면… 지켜야 할 규칙 따위를 세워주길 바라는 건가. 내 생활도 관리가 안 되어 이렇게 매일 허덕이는데, 내가 윤채원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겉보기에 그녀의 일상은 매우 정확하고 엇나감이 없었다. 몇 시에 잠이 들든 언제나 일정한 기상 시간, 단 한 번도 지각하거나 미룬 적 없는 과외 아르바이트, 일주일에 네 번 이상 조깅을 하는 습관까지.

빈틈없는 윤채원과 빈틈투성이인 강승재.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규칙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은 후자 쪽이었다.

* * *

“저, 내가 밤새 고민해봤는데 말야….”

토요일 오전, 정혁이 운동하러 나간 것을 확인한 승재는, 채원이 앉아 있는 거실 소파로 슬금슬금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를?”

소파에 양반 다리를 하고선 한가롭게 TV 채널을 돌리고 있던 그녀가 슬쩍, 고개를 들어 승재를 쳐다본다.

피부가 너무 하얗고 투명해서 파란 실핏줄이 어렴풋이 비치는 것 같다. 화장을 해도 예쁘고 안 해도 예쁜 얼굴. 색이 붉어도 예쁘고 창백해도 예쁜 입술. 머리를 질끈 올려 묶어도 예쁘고, 찰랑찰랑 풀어도 예쁜….

“강승재! 왜 말을 하다 말아?”

“어….”

“무슨 고민을 그렇게 밤새도록 했는데? 사람 궁금하게 운 띄워놓고 딴생각은.”

딴생각이 아니라 니 생각 중이었다,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해 오늘도 역시 갑갑한 남자.

“그, 어제 네가 했던 말… 생각해 봤거든. 어떻게 널 도와줄 수 있을까 하고….”

“아, 그 얘기구나. 난 또….”

승재를 올려다보던 채원이 TV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치 않는 불편한 주제를 애써 돌리려는 듯.

“잠깐 TV 꺼 봐. 딱히 보는 프로 없잖아.”

“그런데도 TV를 계속 보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일 거 같은데?”

냉랭한 대꾸가 이어졌다. 7시간 수면과 함께 어제의 감정이 깡그리 증발해버렸는지, 채원은 온몸으로 철벽을 치며 승재를 밀어내는 중이었다.

“왜 갑자기 방어태세야? 어제는 분명 좋다고….”

“난 좋다 말한 적 없는데. 기억하고 싶은 대로 왜곡하는 경향이 있나 보네.”

“손, 잡았잖아.”

“…손 한번 잡은 게 뭐? 입이라도 맞췄음 아주 책임지라고 했겠다 너.”

“나한텐 그래.”

승재가 채원의 곁에 풀썩 허리를 낮추고 앉았다.

“나한텐, 손잡은 게 키스보다 더 큰 의미였다고.”

남자의 무게가 옆자리를 차지하자 3인용 패브릭 소파가 금세 빠듯해진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우린 이미 시작한 거야 어제.”

채원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TV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왼편에서 울리는 승재의 목소리는 한 글자도 남김없이 그녀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어와 박혔다.

“윤채원.”

삑.

남자의 기다란 손가락이 툭, 리모컨을 눌러 TV 전원을 껐다.

“피하지 말고 나 좀 봐. 응?”

명령이나 요구보단 오히려 부탁에 가까운 어조였다. 거절해도 그만, 무시해도 그만인…. 그의 손에 들린 리모컨을 휙 채간 후 TV를 켜면 그걸로 게임 끝. 강승재를 떼어내는 것은 그만큼 별게 아닌 일이었다. 몇 주 전 행패를 부린 또라이처럼 그녀에게 해를 가할 가능성도 제로였고.

“나랑 만나는 거 힘들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역시나 또, 강승재의 눈동자로 시선을 옮기고 만다. 왜일까. 왜 나는 번번이 이 남자를 밀어내지 못하고.

“얼마든지 내가 감당할 수 있다니까? 어제 네가 말한 통제… 그게 뭔지 자세히 가르쳐주면.”

“완전 감도 못 잡고 있으면서. 그럼 넌 이미 대상이 아닌 거야.”

“뭐?”

“그건…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지니고 있어야 하는 거라고.”

답답함과 씁쓸함이 뒤섞인 채원의 표정을 승재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또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빙빙 에두르며 흘리고 있었다. 방어기제가 어찌나 탄탄하고 강한지, 눈치껏 파고들 만한 아주 작은 틈마저도 주지 않는 여자였다.

“그 백인 놈은… 원래부터 있었어? 그래서 만난 거야?”

승재가 몇 번이고 눌러 삼켰던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여자 멱살이나 잡는 그런 파렴치한보다야 내가 한 천만 배쯤은 더 낫지 않나? 그런데 왜! 그 새끼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거야. 나는 감조차 못 잡고 있다는 그게 대체 뭐길래.

“그놈도… 알고 보니 아니었어. 그냥 하드코어에 환장한 변태 새끼더라고.”

“하드코어?”

“강승재.”

큰 한숨과 함께 결심한 듯 채원이 입을 열었다.

“마조히즘이 뭔지 알아?”

“…알지, 당연히.”

승재는 태연하게 답했다. 비록 말아 쥔 손바닥에선 삐질삐질 땀이 배어 나오고 뒷목은 담이 결린 것처럼 뻣뻣해졌지만, 절대로 긴장한 티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힘도 못 써보고 얻어터진 후에 깁스까지 했잖아. 이제 그쯤이면 충분하다. 그녀에게 또다시 어리숙한 모습을 보였다가는, 이젠 정말 저 끝으로 밀려나게 생겼으니까.

“직접 봤으니 알 거 아냐. 내가 스스로 뭘 하고 있었는지.”

“…….”

“울면 안 되는데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걸 어떡해. 허벅지를 꼬집거나 손등을 짓이기면서 참았지. 생각보다 효과가 꽤 좋더라고. 다른 곳이 아프니 신기하게 눈물은 쏙 들어가더라.”

그녀는 가슴 깊숙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엔 손톱으로 누르던 게 다였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구를 찾게 되는 거야. 좀 더 강한 자극이 가해질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가쁘던 숨도 탁 트이고, 불면증도 왠지 나아지는 것 같고…. 어쩌다 한 번씩 상처를 내던 습관이 십 년 가까이 쌓이다 보니 이젠… 성향이 되어버렸어. 지긋지긋해서 버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스스로를 막아내는 게 너무 힘들고 버거워서….”

“그래서, 남자를 찾는 거야?”

승재가 나지막이 물었다.

“널 완벽히 통제해줄 수 있는?”

참담하게 짙어진 음색으로.

“응….”

“그 남자는 그럼 뭘 해주는데 너한테.”

“내 못된 버릇을 막아주는….”

“그러니까, 윤채원 못된 습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막아주냐고.”

“나 대신, 상처를 내줘.”

채원의 말을 끝으로 오랜 정적이 흘렀다.

토요일 오전, 쨍한 햇빛이 거실 창 너머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 근처까지 새어들었다. 채원은 환한 볕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지 않도록 소파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승재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푸르고 올곧아 보이는 이 남자는, 쏟아지는 햇살 가까이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스스로 하는 거랑 다를 게 뭔데. 남자 손에 당하면, 뭐가 좀 더 나아져?”

“그 사람은 나한테 벌도 주고, 상도 주거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봐.”

“정해진 건 없어. 상대방 성향 역시 조금씩 다들 다르니까. 공통된 점은, 나에게 일정한 룰을 정해준다는 거야. 커터칼 사용은 절대로 안 돼, 일주일 동안은 몸에 손대지 마, 이를테면 이런 규칙들.”

“만약 네가 그 룰을 거스르면….”

“그럼 벌을 받게 되겠지. 내가 직접 해왔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아프고 쓰린 고통이 따르는…. 자해란 것이 참 모순인 게, 보통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상처를 내거든. 나를 해하는 중에도, 동시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본능이 생겨나는 거지. 어느 정도의 아픔일지 예측도 가능하고. 하지만 상대에게 그 결정권이 넘어가게 되면… 그땐 정말로 공포, 그 자체가 되는 거야. 대부분 남자들은 나보단 힘이 세니까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태연한 연기도 더 이상은 무리였다. 승재는 심각하게 굳은 표정으로 채원의 이야기를 듣고 되새기고 또 들었다.

“너… 그동안 네가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해왔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야?”

“방금 말했잖아. 생각보다 위험하지 않….”

“네 몸 스스로 긋는 거 말고 인마!”

얼마나 황망하고 정신이 없었던지, 승재는 정혁에게 큰소리를 낼 때처럼 그녀를 대했다.

“뭘 믿고 그렇게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니냔 말야! 대부분 남자들이 너보다 힘 세단 걸 아는 애가, 겁도 없이 벌을 달라, 상을 달라 요구를 해? 미쳤어? 한국도 아닌 미국 땅에서… 어떤 놈들이 어떤 목적을 갖고 넘어와 사는지 알 게 뭐냐고!”

스물두 살. 아직 한참 어렸다. 본인의 신념이나 주관이 뚜렷하다 믿고 싶겠지만, 한 달만 지나도 30일 전 내 모습이 몹시 부끄러워지는 나이.

고작 세 살 차이가 무슨 어른 행세냐 비웃을지 모르나, 승재는 진심으로 채원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당돌하고 야무지고 자기주장이 넘치는 그녀가, 승재의 눈에는 한없이 여리고 부서지기 쉬운 유리병과 같았기 때문이다.

“왜 화를 내고 그래…. 안 그래도 너 손 다치게 한 이후로는 좀 더 신중히 만나야겠다, 반성하고 있었어.”

채원의 목소리가 한층 잦아들었다.

“신중히, 나랑 만나.”

“지금까지 뭐 들었어. 내가 너….”

“내가 너, 좋아한다고! 넌 어제오늘 대체 뭐 들었는데?”

“강승재….”

“나 싸움은 잘 못 해도, 너보단 힘세.”

그의 음색에는 평소와 다른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

“상도 주고, 벌도… 줄 테니까.”

“…….”

“류정혁이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으니 신원도 확실하잖아.”

그는 남의 고통을 즐기는 부류도, 여자의 몸에 상처를 새길 만한 위인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왜 자꾸 망설여지는지 모르겠다. 투명하고 질긴 올가미에 걸린 듯, 팔다리가 꽁꽁 굳어 한 뼘 뒤로 물릴 수조차 없으니.

“채원아.”

“…알겠어.”

그녀가 작게 답했다.

“해볼게, 너랑.”

* * *

바삭, 토스트 한 입을 베어 무는 소리.

후룹, 우유에 담가진 시리얼을 우물거리는 소리.

아침 식사 테이블의 잡음이라곤 고작 그게 전부였다.

“분위기 왜 이래.”

블랙커피를 내려 마시던 정혁이 조용히 마주 앉아 있는 승재와 채원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뭐가.”

“싸웠어?”

“아니.”

“그럼 둘이 돈거래라도 했나?”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너무 조용하길래. 이런 아침 오랜만이라 적응이 안 돼서.”

정혁이 의아하다는 듯 승재와 채원을 번갈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시답지 않은 농담 하나 없이 웬일인지 고요해도 너무 고요한 두 사람. 어젯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짜 맞추기라도 한 듯 서로 말 한마디가 없다.

“너 오전 수업이라며.”

슬그머니 정혁을 쫓아내려는 승재의 목소리. 뭘까 대체.

“갈 거야 지금. 윤채원, 같이 안 갈래?”

“아, 나는….”

“채원인 짐이 많아서 차 태워주기로 했어 내가. 오늘까지 도서관에 반납할 책이 많다고….”

“흐음, 그러든지.”

윤채원한테 물어본 질문을 왜 저 녀석이 가로채는 거야.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정혁은 더 이상 추가 질문을 하지 않고 가방을 둘러멨다. 조만간 강승재와 술 한잔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오늘은 일단 퇴장. 지각하지 않으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동아리 모임이 있어 늦게 들어올 거란 말을 남기고, 정혁이 먼저 자리를 떴다.

쿵, 닫히는 현관문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리는 아침.

‘해볼게, 너랑.’

채원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난 후에도 둘 관계의 큰 변화는 없었다. 솔직히 어떤 식으로 상대를 리드해야 할지 몰라 ‘상과 벌’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는 회피를 하고 있는 상태. 승재의 마음에 점점 조바심이 일었다. 더 시간을 끌다가는 어렵게 마음을 연 그녀가 또다시 뒷걸음질 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갈까?”

“응.”

“줘. 들어 줄게.”

“아냐. 괜찮….”

채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재는 그녀의 손에 든 묵직한 종이봉투를 채갔다.

“이 정도 도움은 받아도 돼. 손도 잡은 사이끼리.”

어제부터 줄기차게 손 타령을 하고 있는 그의 대꾸가 우스웠던지, 채원이 픽 입꼬리를 올렸다.

“부담스러워서 두 번은 못 잡겠다.”

“안 되지 그건. 이리 줘.”

운동화를 마저 신은 승재가 채원을 향해 넌지시 깁스한 손을 내밀었다.

“뭘 또 줘? 짐도 없는데.”

“윤채원 손.”

“뭐야. 오글거려. 깁스한 환자 팔을 잡고 가라는 거야?”

“응. 얼른 달라고.”

웃음기 사라진 남자의 요구에 새하얀 손이 머뭇머뭇 움직인다.

“거기, 차 키도.”

“아, 응….”

채원이 나머지 한 손으로 신발장 선반 위에 놓인 차 키를 집었다.

“가자. 늦겠다.”

승재가 빙긋 웃으며 한 손에는 대여섯 권의 책이 든 쇼핑백을 쥐고, 또 한 손으로는 채원의 손가락을 어렵사리 움켜잡았다.

깁스 밖으로 삐져나온 새끼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을 겨우 꼼질거릴 뿐인데도, 손바닥을 간질이는 그 자극이 채원은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아침부터 무언가 정신이 하나도 없다.

* * *

“수업 몇 시에 끝나?”

채원의 학교 주변에 차를 세운 승재가 그녀의 하루 일정을 물었다.

“4시.”

“난 집에 오면 한 6시쯤 될 거야. 학교는 일찍 끝나는데 오늘 병원 가는 날이라.”

“응.”

“저녁은?”

“아직 별 계획 없는데.”

“같이 먹을래?”

“그러든지.”

다분히 수동적이긴 해도 승재의 제안을 거절하진 않는다. 드디어 윤채원의 뉘앙스를 파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그녀도 좋다는 뜻이다.

“책 혼자 들고 갈 수 있겠어?”

“손잡은 티 어지간히 내라. 겨우 이것도 못 들고 갈까 봐…. 나 갈게. 운전이나 조심해.”

“잠깐만, 하나 더.”

앞 좌석 문손잡이를 달칵 잡아당기던 채원이 멈칫, 고개를 돌렸다.

“응?”

“참기 힘들면, 내 방으로 와.”

“뭐를….”

“내가 같이 견뎌준다고 했잖아. 밤이든 아침이든, 힘들면 나 찾아오라고. 대신….”

채원을 향한 남자의 눈동자 색이 한층 더 깊어진다.

“절대로 혼자선 안 돼. 네 몸에 상처 내는 짓, 오늘부턴 금지야.”

짙은 바다처럼 일렁이는 강승재의 눈빛은 언제나 진지하고 진중했다. 한없이 기대고 싶을 만큼, 모든 것을 툭 털어놓고 싶을 만큼.

“…알겠어.”

채원은 바르르 떨리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덤덤히 답했다. 목을 옥죄던 사슬이 그로 인해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 * *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어쩐지 요즘 내내 컨디션이 좋았다.

괜스레 노래가 흥얼거려지고, 매일 보던 LA의 파란 하늘도 새삼 예뻐 보이고, 불시에 치른 전공과목 퀴즈와 리포트 모두 만족스러운 점수를 받은 데다가 과외 학생 부모님은 알아서 페이를 올려주시니. 이 기세를 몰아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쓸데없는 고민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고.

“서일그룹… 2세 경영 본격화….”

운수 좋은 날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마지막에 서프라이즈 빅엿을 먹이려고 그렇게 나를 하늘 높이 붕붕 띄웠었나 보다.

빌어먹을 스마트폰. 어느 대륙에 발을 붙이고 있든 대한민국 뉴스는 실시간이구나 정말.

〈서일그룹, 2세 경영 본격화. 형제의 난 없이 투명 경영 이어갈까.〉

[서일그룹이 지난주 정창길 회장(68)의 두 자녀를 주요 계열사 요직에 배치하며 2세 경영에 시동을 걸고 있다. 정 회장은 장남 정윤호(40, 前 서일전자 부사장)를 서일전자 사장으로, 최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차녀 정윤진(34)을 서일바이오 전무로 승진시킨다고 밝혔다. 경영진을 둘러싼 도덕적 논란 없이 올바른 경영 승계 과정을 거친 서일그룹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통해 새로운 도약의 기틀을 다지는 중이며….]

수업이 끝난 빈 강의실. 한쪽 어깨에 멘 배낭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르륵, 손목 아래까지 흘러내린다. 하지만 채원은 바닥에 끌리는 가방끈을 올릴 겨를도 없이 손에 쥔 폰 화면을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정윤진, 서른네 살….”

띠동갑이다. 나의 배다른 언니. 하지만 평생 얼굴을 마주할 리 없겠지. 나도 똑같이 유학 중인데 왜 난 열외냐고. 뭔 차이야 대체. 돈 몇 푼으로 사람 쥐락펴락하면서 숨소리도 내지 마라, 그림자처럼 조용히 있어라, 그깟 정씨가 뭐 대단한 거라고. 나한텐 애비 성조차 물려주지 않고선 사사건건 간섭이라니. 도덕적 논란이 없다고? 메스꺼워.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아. 역겹다고 다들.

채원의 가슴 가운데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읏….”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채원은 두 무릎을 굽히고 새우처럼 등을 구부렸다. 손바닥을 들어 목부터 가슴께까지를 쓸어내리듯 마사지하기를 수십 번.

“하아, 하아….”

피가 통하지 않던 손끝, 발끝에 찌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불안정한 호흡이 참을 만해지자, 채원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강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쾅.

강의실 문을 빠르게 닫은 채원은 배낭 지퍼를 열고 황급히 필통을 꺼냈다. 덜덜 손이 떨렸다. 승재에게 빼앗긴 탓에 커터칼은 보이지 않는다. 뭉툭한 볼펜은 소용없고, 샤프심은 금세 부러지고 말 텐데, 그나마 보이는 것이 10cm 철제 자….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후우…. 그만 좀 하자. 제발.”

새하얀 손바닥에 한 움큼 쥐어진 필기구들이 투루룩,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채원은 문에 등을 기댄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힘들면 언제든 나 찾아오라고. 대신… 절대로 혼자선 안 돼. 니 몸에 상처 내는 짓, 오늘부턴 금지야.’

이렇게 괴물같이 망가진 나를, 아무것도 모르는 너에게 무작정 데려가도 되는 걸까.

그가 무너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하지만 이미 강승재의 손을 잡아버렸고, 무거운 짐을 홀로 버텨내기엔 그녀의 어깨는 형편없이 좁았다.

채원은 땅에 떨어진 소지품들을 하나하나 주워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마지막 수업이었지 참.”

오후 4시.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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