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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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자국
* * *
“이리 줘. 내가 나가는 길에 버리고 갈게.”
“이번 주 내 차례잖아.”
“아는데… 무거워 보여서.”
“됐으니까 본인 순서나 까먹지 마. 달력에 체크하는 법, 정혁이한테 설명 들었지?”
채원이 도리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현관을 나선다.
남자 도움 좀 받으면 어떤가. 아니, 남녀 성별을 떠나서… 같이 사는 친구가 쓰레기 좀 대신 버려주겠다는데 마다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게 웬 떡이냐, 고마워, 자 여기, 하고 넘겨줘야 정상 아니냐고.
아까부터 자신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채원은 허리춤까지 오는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두 손으로 낑낑거리며 힘겹게 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그러지 말고 딱 3분만 기다려 봐. 가방만 챙기면 되는데. 어차피 학교 가는 길이잖아. 내가 쓰레기 같이 버리고 차 태워 줄 테니까….”
“코앞 거린데 차를 뭐 하러 타. 나 먼저 간다!”
쾅.
하아, 들어갈 틈을 안 주는구만. 쿨하다 못해 싸하게 도는 냉기. 승재는 한 방에 닫혀버린 현관문을 헛헛한 눈빛으로 바라본 채 서 있었다.
세 살 차 나이를 맞먹어서일까. 채원은 제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운 난관에 봉착한 순간마저도 지나치게 독립적이고 자주적이었다. 같이 사는 남자 둘이 뻘쭘할 만큼. 이따금씩 서운함마저 느껴질 만큼.
함께 아파트를 나눠 쓴 지 보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녀에 대해서 딱히 아는 게 없다. 류정혁과 같은 경영학과 학생이며, 나이는 스물둘. 일주일에 두 번 한인 학생의 수학 과외를 봐주고 있다는 정도밖엔.
정혁이 일전에 말해준 것처럼, 채원은 남의 일에 딱히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사생활을 굳이 떠벌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쾌활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잠겨 있는, 다가가기 어려운 타입이라고나 할까.
퍽.
“나한텐 안 물어보냐? 차 태워줄지 말지?”
정혁이 승재의 뒤통수를 장난스럽게 갈기며 빈정거렸다.
“어우 씨, 아파…. 아침부터 사람 머리를! 그리고, 학교가 코앞인데 무슨 차를 타! 걸어가 인마.”
“너무 그렇게 편애하지 마라. 소외감 느낀다.”
“뭔 개소리야.”
인상을 구기는 승재를 향해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곤 스니커즈를 꺼내는 정혁.
“얼른 나와. 지금 시간엔 막힌다며.”
“어, 가야지…. 잠깐만, 카메라 안 챙겨서.”
얼얼한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승재가 구시렁구시렁 카메라를 찾았다. 이래저래 의욕 떨어지는 아침이었다.
* * *
{호밀빵으로, 할라피뇨는 빼고 주세요.}
이 정도면 자발적 셔틀이다. 내가 좋아서 하는 봉사. 수고를 자초하는 비효율의 극치.
웨스트우드 이사 이후 나사가 두어 개쯤 툭 빠진 것처럼 살고 있는 본인을 탓하면서도, 또 습관처럼 어반 카페를 찾은 승재였다.
‘강승재, 나 이거 먹어도 돼?’
샌드위치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아침마다 채원이 승재의 동의를 구한다. 이젠 묻지 않고 먹을 때도 됐건만, 그래도 꼭 주인의 의사를 확인하는 그녀.
윤채원의 배를 채워주기 위함인지, 아니면 낭랑한 톤으로 ‘강승재’를 외치는 그 음색을 매일 듣고 싶어서인지, 남자의 까만 흑심을 굳이 드러내진 않았다. 지금은 이 정도의 거리가 딱 좋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천천히, 시간은 아직 충분하니까.
[나 오늘 늦는다. 내일 레포트 마감이라.]
정혁에게서 문자가 왔다.
녀석이 늦게 온다는 의미는 자정 넘어 새벽에나 들어올 거란 뜻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고 주 1회 정도 이런 메시지를 받는 날이 있는데, 그럴 때면 이유 없이 심장이 들뜨곤 한다. 마치 부모님의 여행 소식을 전해 들은 고딩 때처럼.
안다. 괜한 설레발이라는 걸.
채원이 일찍 귀가한다는 보장도 없고, 그녀와 단둘이 남아있다 하더라도 어차피 각자 방에서 폰이나 스크롤하며 잠들 게 뻔한데…. 그런데도 자꾸만 홧홧하니 귓불에 열이 오른다.
묘지 사진까지 허둥지둥 인화해가며 오해 푼 지 겨우 보름.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강승재. 야밤에 경찰서로 끌려가고 싶지 않으면.
승재는 긴장한 빛이 역력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핸들을 꺾었다.
샌드위치 말고 나초칩을 사갈 걸 그랬나.
운이 좋으면 그녀와 맥주 한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정신무장을 하는 와중에 헛된 희망이 그새를 못 참고 기어 나오니, 사내의 마음은 이토록 유약한 것이었다.
* * *
“오버했다 또.”
결국 편의점에 들러 나초칩과 치즈 디핑소스 세트를 구매한 승재는, 조수석 시트 위에 놓인 각종 주전부리의 향연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안 되면 내일도 있고 뭐….”
윤채원 아니면 류정혁도 있으니까.
그녀가 맥주를 거절한다고 해도 상처받지 말자, 벌써부터 훅훅 심호흡을 하고 있는 짠하디짠한 이 남자.
메도우즈 파크에서 처음 그녀와 마주한 순간 무섭도록 빠져버렸다. 윤채원이라는 좁고 깊은 늪에.
새침하고 도도한 마스크와 포옥 안아주고 싶을 만큼 여린 어깨선이 평소 그리던 승재의 이상형과 정확히 일치했다. 뾰족하게 가시가 돋친 어투도 솔직히 매력적이었다. 사람 심리가 그렇다. 선을 긋고 벽을 치며 도통 틈을 주지 않으니, 더 애가 탄다.
“나초 먹을래? 소스랑 묶어서 세일을 하더라고.”
이 정도 멘트면 자연스럽지 않나.
승재는 연극 대사를 외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맨션 주차장에 파킹을 했다. 시동을 끄고 짐을 챙기려는데 차창 밖 어스름히 물든 하늘이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오, 나이스 타이밍.
카메라 렌즈 캡을 여는 빠른 손놀림. 차에서 내리자마자 승재는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초 단위로 변하는 미묘한 하늘색이 순간순간 다 아쉬워, 샌드위치와 나초 봉지를 팔에 걸고선 쉬지 않고 찰칵 소리를 냈다. 전공이 지겹네 어쩌네 불만을 늘어놓아도 천생 사진쟁이가 맞긴 맞나 보다. 흘려보내기 아쉬운 장면을 맞닥뜨릴 때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찾곤 하니.
그때였다.
{이거 놔! 너랑은 볼일 끝났다고!}
익숙한 음색이 평소보다 몇 배쯤 앙칼진 고음으로 들려왔다.
채원에게는 습관처럼 밴 특유의 억양이 있었다. 모음 o를 말할 때 ‘아’보단 ‘오’에 가깝게 들리도록 발음에 힘을 주어 악센트를 넣곤 했는데, 영국 스타일을 제멋대로 변형했다며 정혁이 종종 그녀를 놀려댔다.
{당장 꺼지라니까!}
이건 10m 밖에서 들어도,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윤채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고급 맨션이 널려있는 이 안전한 웨스트우드 거리에서 때아닌 해코지라도 당하고 있는 건가 설마.
승재는 고성이 들리는 방향으로 무작정 달렸다. 손에 든 무기라고는 카메라가 전부였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가로운 동네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학교 가까이 붙어 있는 주거지역이었다. 하다못해 경찰에 신고해줄 사람 하나쯤이야 있겠지. 오만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골목을 돌아서는데,
{끝낼지 말지는 내가 정해! 눈 째진 창녀 주제에! 넌 내가 오라면 오고 꺼지라면 꺼지는 거야, 알아들어?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연락 씹으면….}
퉤.
{미친 변태 자식.}
목에 핏대를 세우며 험한 욕을 퍼붓고 있던 백인 남성에게 겁도 없이 침을 뱉는 윤채원이 보였다. 고작 카메라 따위로 맞설 상황이 아니었다. 사태가 심각했다.
“채원아!”
승재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지만,
{내 손에 죽고 싶구나 너. 말라비틀어진 동양년이!}
이미 그녀는 우악스러운 남자의 손아귀에 멱살을 잡힌 뒤였다.
퍼억!
뭐라 외칠 틈도 없이 승재가 몸을 날려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채원을 순식간에 밀쳐낸 승재는 백인 남성의 몸을 껴안고 그대로 엎어졌다. 논개가 따로 없었다.
“강승재!”
아스팔트에 얼굴을 갈고 나서부턴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철들고 나서 처음 해본 몸싸움이었다. 영어로 할 수 있는 갖은 욕설을 몽땅 쏟아내며 무자비한 백인 놈에게 되는 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 인생은 영화 같지 않았다. 때린 횟수보다 세 배쯤 더 맞은 듯했다. 2대 1로 붙었더라면 좀 나았으려나. 류정혁 이 새끼는 하필 이럴 때 옆에 없어 왜. 엉뚱한 녀석에게까지 불똥이 튄다.
{이 미친놈아! 그만해! 그러다 죽겠어! 도와주세요! 누가 제발 경찰 좀! 사람이 죽는다고!}
급속도로 얼굴이 부어오르고 시야가 흐려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헬스를 할 게 아니라 복싱을 배워두는 건데. 소리를 지르며 도와달라 울부짖는 그녀의 젖은 음색이 귓가에서 점점 멀어질 무렵,
저 멀리서부터 휘슬이 들렸다. 마치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심판의 신호처럼.
경찰인지, 맨션을 지키는 관리인인지, 알 수 없는 남자 무리가 와다닥 고함을 치며 달려왔다. 지은 죄가 있긴 한 건지,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던 거구의 미국 놈은 빛의 속도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야…. 괜찮아? 눈 좀 떠 봐. 승재야….”
여린 손의 감촉이 얼굴을 매만졌다. 좋은 냄새… 아, 샴푸가 아니라 로션이었구나.
“강승재….”
“윤채원, 너….”
승재가 퉁퉁 부은 눈꺼풀을 겨우 올려 채원을 바라보았다. 분명 얼음 같던 눈동자였는데, 어쩐지 조금 온기가 배인 것 같기도, 물기가 서린 것 같기도….
“앰뷸런스 곧 올 거야. 불편해도 조금만 누워 있어. 뼈 다쳤을 수도 있으니….”
“너… 말이야.”
“말하지 말라니까….”
“눈… 커.”
“뭐?”
“윤채원 눈… 안 째졌어. 엄청 크다고.”
아까 전 그 사이코 새끼가 내뱉었던 욕지거리가 마음에 걸린 승재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딴 식으로 짓밟다니, 피투성이가 된 주먹에 다시금 부르르 힘이 들어간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입술은 왕창 터져서는… 움직이지 말라고, 멍청아.”
채원이 손바닥을 들어 승재의 입을 막았다. 짭조름한 방울이 승재의 볼에 툭 떨구어졌다.
비가 오나.
설마 윤채원의 눈물일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때는… 정말 그랬다.
* * *
“많이 다쳤어? 누구랑 싸운 건데?”
채원의 메시지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들어 온 정혁이, 답지 않게 흥분하며 승재의 상태를 살폈다.
“별거 아냐.”
“손은 또 왜 그래? 일방적으로 맞은 게 아니라 너도 같이 휘둘렀어?”
“당연하지 인마! 내가 그 백인 놈 아주 반쯤 죽여 놨다고.”
“윤채원, 니가 상황 설명해 봐. 이 자식 말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혁은 채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뜯어봐도 강승재의 상태는 이긴 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게 사람을 대놓고 무시….”
“넌 닥쳐 좀. 얼굴 크기 두 배 된 건 아냐? 얼마나 얻어터졌으면…. 그 새끼 잡긴 잡았어?”
“응. 대충 합의금 받고 보냈어.”
채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합의?”
“치료비랑 이것저것 두둑이 받았으니까 걱정 마.”
“아니 치료비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지금.”
“제일 중요한 게 치료비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있는 놈들은 이렇게 마인드가 달라요. 이거 봐, 하나도 안 아파 이제! 다음 달 월세 내가 벌어온 거나 다름없다 생각하니까, 통증이 싹 가시더라.”
정혁에게 팔을 번쩍번쩍 들어 보이며 괜찮다는 시늉을 하는 승재. 입가에는 미소가 실실 흐르는 것이,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병원에서 우울증약 잘못 지어준 거 아냐? 이놈 왜 이렇게 업됐어?”
“몰라. 비싼 수액 맞더니 기운이 펄펄 나나…. 못 말려 암튼.”
채원은 엉망으로 망가진 승재의 얼굴을 주기적으로 힐끔거렸다. 입원할 필요까진 없다고 하여 일단 집으로 데려오긴 하였으나 웃음이 나올 만큼 가벼운 상처는 아닐 텐데.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백인, 아는 사람이야?”
“…….”
“생판 모르는 놈이 그런 것 같진 않고.”
정혁의 물음에 채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잠깐 만났던 사람. 두 달쯤 사귀다 헤어졌는데 자꾸 엉겨 붙잖아. 또라인 거 알았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올 줄은….”
“순순히 합의해줘도 되는 건가…. 집 주소까지 알 정도면….”
“아마 당분간은 그럴 일 없을 거야. 경찰이 접근금지 원하냐고 묻길래 그렇다 했거든. 명문대가 좋긴 좋아. 학생증 보여줬더니 당장 우리 편 들어주더라고. 학교 주변 치안 엉망이라고 소문나면 지네들도 좋을 거 없으니 뭐.”
“그래도 운이 좋았네.”
“윤채원 완전 럭키데이였지 오늘!”
잠자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승재가 불쑥 끼어들어 정혁의 말을 받았다. 그녀의 처진 얼굴을 보는 게 싫었다. 미안함과 난처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식탁 모서리 끝을 응시하고 있는 것도.
“윤채원 말고, 강승재 니가 운이 좋았다고 인마! 미국 놈들 무서운 줄 모르고 함부로 덤비기는. 총이라도 꺼냈음 어쩔 뻔했어! 하여간 대책 없는 새끼.”
승재를 향한 정혁의 잔소리가 시작될 무렵.
“나 먼저 화장실 써도 되지?”
채원이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 그래. 얼른 씻고 들어가 쉬어. 많이 놀랐을 텐데.”
“응. 고마워.”
그녀가 승재를 짧게 한번 바라보곤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고맙단 말을 전하려던 사람처럼.
쿵. 닫히는 문소리. 쏴아, 떨어지는 샤워호스 물소리까지 확인한 정혁은, 그제야 승재를 향해 속 시원히 입을 연다.
“어쩌려고 그래.”
“뭐가.”
“전공 수업 태반이 카메라 잡는 일이잖아 너.”
타박상이야 차차 낫는다 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두껍게 붕대를 감은 오른손이었다.
“…딱히 그렇지도 않아.”
시큰둥하게 대꾸했지만, 정혁의 잔소리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손등에 금이 간 상태로는 카메라는커녕 칫솔 잡기도 힘들 것이다.
“수강 취소 기간 지난 지 한참일 거고. 학생 사정 일일이 봐주는 친절한 교수님도 당연히, 없을 테고.”
“재수강 하면 돼. 니가 신경 안 써도….”
“학비 한두 푼 해? 아르바이트는 당장 어쩔 건데?”
“어차피 주말만 가잖아 거긴. 깁스하고 서빙하면 팁 몇 배는 더 받을 거다. 아무래도 나, 돈복이 터지려나 봐.”
“뭐? 그걸 지금 말이라고…. 야, 그만 좀 실실거려! 하도 맞아서 머리 어떻게 된 거 아냐?”
정혁이 갑갑한 듯 인상을 구겼다.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 정말로 괜찮은 건지. 초지일관 웃고 있는 강승재의 속내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피가 묻어서, 셔츠 갈아입어야 하는데….”
승재가 꼼꼼히 채워진 자신의 단추와 정혁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짓을 한다.
“어쩌라고.”
“이것 좀 끌러서 쑥 빼 봐. 윤채원한테 부탁할 수는 없잖아.”
“후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정말.”
“이왕 도와주는 거 바지랑 팬….”
“미친 새끼. 한마디만 더 해라. 아예 입원을 시켜 줄 테니까.”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가 부담스러울 때면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물타기를 하는 습관. 피딱지가 얹어진 입술로도 정혁의 신경을 잘도 긁어대는 승재였다.
* * *
‘깁스를 풀 때까지 시험을 연기해줄 수는 없습니다. 손이 그 모양이면 카메라 초점 맞추기도 힘들 텐데, 이번 학기 학점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싶군요.’
교수는 승재의 사정을 단칼에 거절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비벼볼 여지조차 없이 내쳐지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교수가 한국인이었다면 과연 저리 말했을까 싶고. 내 모국어가 영어였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싶고.
“후우, 잊자 잊어.”
어차피 엎어진 물, 손바닥으로 땅을 훑어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힘든 순간마다 발휘되는 강승재 특유의 낙천성은 그가 지닌 큰 장점이기도 했다. 연달아 붙은 실기 수업 덕에 예정에도 없던 조기 귀가를 하게 생겼다.
“좋네 뭐. 해 쨍쨍할 때 집엘 다 가보고. 지금 시간에는 차도 안 막힐 텐데.”
승재는 아쉬운 마음을 덮으려는 듯 콧노래를 애써 흥얼거리며 시동을 걸었다. 덜덜거리는 그의 자동차가 집으로 향하기 전 습관처럼 들르는 곳은 다름 아닌 어반 카페.
눈이 와도, 비가 와도, 한 손에 깁스를 차고 교수한테 문전박대를 당할 때에도, 샌드위치 셔틀은 차질 없이 진행 중이었다.
고소한 냄새를 솔솔 풍기는 호밀 샌드위치를 조수석에 싣고 얼마간 페달을 밟으니 웨스트우드 표지판이 금세 눈에 띄었다. 퇴근 차량만 겹치지 않는다면 30분도 안 걸리는 쾌적한 코스였다.
{오늘은 일찍 왔네요. 몸은 좀 괜찮아요?}
라틴계로 보이는 맨션 관리인이 후진 중인 고물차를 반갑게 맞이한다. 승재가 흠씬 두들겨 맞던 그날 가장 먼저 달려와 주었던 친절한 분. 사례라도 하고 싶어 몇 번을 찾아갔지만 그는 끝까지 승재가 내민 봉투를 거절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이거 드세요. 학교 근처에 맛있는 샌드위치 가게가 있거든요.}
승재는 구입한 샌드위치 두 개 중 하나를 꺼내어 관리인에게 건넸다. 가끔 드리는 간식까지 거절하진 말아 달라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인지, 다행히 그는 유쾌하게 웃으며 승재의 호의를 받았다.
{오늘 저녁은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 조금 전에도 어떤 한국인이 좋은 술 한 병을 선물로 주고 갔거든.}
{술이요?}
{외부인 주차는 금지되어 있다 했더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면서 비싼 위스키를 내주더라고. 혹시 한국에서 가족이 오기로 되어 있었나? 503호 방문한다고 하던데.}
관리인의 말에 승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가 온단 얘긴 들은 적 없는데요. 혹시 방문객이 여성이었나요?}
{남자였어. 두 명. 10분도 안 돼서 나오길래 허탕을 쳤나 보다 했지.}
참 이상한 일이다. 약속된 손님이 정해져 있었다면, 류정혁, 윤채원, 누구든 미리 말을 해줬을 텐데.
[혹시 오늘 누구 오기로 한 사람 있어? 우리 집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고 관리인 아저씨가….]
한 손으로는 메시지 쓰는 것조차 불편했다. 5층 복도를 터벅터벅 걸어가며 정혁에게 보낼 문자를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던 승재는, 더딘 속도에 짜증이 났는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처넣어버렸다. 딱히 급한 용건도 아니었다. 나중에 얼굴 보고 직접 물어보든가 해야지.
손에 든 어반 카페 봉투를 깁스한 반대쪽 팔에 잠시 걸쳐놓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어? 이게 왜….”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더 정확히는, 비죽 튀어나온 커다란 쓰레기봉투가 빠듯이 끼여 문 틈새를 막아버린 그런 모양새.
엊그제 쓰레기 비웠잖아 분명. 그새 집 안 대청소라도 한 건가.
쌓여가는 의문들로 인해 뒷골이 서늘해질 무렵, 이번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들썩임이 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읏, 흐윽….”
신음이라 하기엔 억세고, 흐느낌이라 하기엔 야릇한.
숨을 죽인 승재는 소리의 방향으로 귀를 기울이며 천천히 발을 뗐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는 윤채원의 방을 향해 가고 있었다.
“채원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탁한 호흡이 지척에서 느껴지자 덜컥 겁이 났다.
똑똑.
“나 들어간다.”
형식적인 노크와 짤막한 통보 후, 승재는 망설임 없이 벌컥 채원의 방문을 열었다.
“…윤채원.”
승재의 손에 들려 있던 어반 카페 봉투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선 채 그대로 얼어 붙어버린 남자는, 시선을 겨우 올려 일그러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차마 고개를 내릴 수가 없었다.
무릎께 걸쳐진 청바지. 새하얀 허벅지 위로 어지러이 그어진 빨간 줄. 작고 여린 손에 꼬옥 움켜쥔 커터칼.
“야! 미쳤어? 뭐 하는 건데 지금!”
승재가 반사적으로 채원이 움켜쥔 커터를 빼앗아 들었을 때, 그녀의 입술이 힘없이 움직거렸다.
“걱정 마.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칼등으로 그냥 조금… 자국만 낸 거야. 죽을 마음은 아직 없다고.”
* * *
식탁 위에는 토스트 두 쪽과 승재가 즐겨 먹는 시리얼, 그리고 찬 우유가 담긴 빈 볼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진 없는데.”
“깁스 한 달은 간다며. 이 정도는 해줘야 내 맘이 편할 거 같아서.”
“고맙다.”
“운전은 괜찮아?”
“응. 남자가 한 손으로 핸들 좀 돌려줘야 멋이지.”
승재의 실없는 소리에 채원이 피식,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이유가 뭐든, 그녀가 웃을 때면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다.
채원이 승재 대신 시리얼과 이것저것을 차려준 것 말고는, 여느 때와 똑같은 아침이었다.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농담을 건네는 중에도, 승재와 채원은 마치 짠 것처럼 어제 일에 대해 말이 없었다.
‘칼등으로 그냥 조금… 자국만 낸 거야. 죽을 마음은 아직 없다고.’
‘칼등으로 그냥 조금? 장난해? 그리고, 죽긴 왜 죽어 네가!’
덤덤히 입을 여는 채원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승재였다. 그녀는 꾹 입을 다물어버렸다. 승재의 격한 반응에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항상 실없이 웃고만 다니던 놈이 목에 핏대를 세웠으니 그럴 만도 하지.
‘잠깐만 기다려. 바지 올리지 말고.’
승재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서랍을 열고 밴드와 연고를 뒤적거렸다. 며칠 전 흠씬 얻어터진 덕에 각종 구급약을 한가득 보유 중이었다.
‘괜찮아. 깊은 상처 아니야.’
‘깊은지 안 깊은지 니가 어떻게 알아. 잘못하면 흉 진다고. 피부도 하얘 가지곤.’
한 손에 약과 밴드를 허겁지겁 쓸어 담아 온 승재는 발갛게 그어진 몇 가닥의 줄 위로 조심스럽게 연고를 짰다.
읏. 미간을 찡그리는 채원의 반응에 무심코 손가락을 뻗던 승재가 멈칫거렸다. 바지를 무릎까지 내린 채 얌전히 주저앉아 있는 윤채원의 모습이 문득 눈앞에 보였다. 정신이 하도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이건 누가 봐도 오해하기 딱 좋은 그런 장면이었다.
‘부, 부위가 넓어서 밴드로 안 되겠다. 붕대 가져올게. 약 바르고 있어.’
승재는 채원에게 연고를 쥐여주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그제야 쿵쿵 요동친다. 얼마나 경황이 없었던지 그녀의 다리를 한 뼘 가까이 두고도 야한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강승재, 붕대는 됐어. 오버하지 마.’
약을 대충 바르고 옷을 추스른 채원이 승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톡 치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그녀는 아무런 힘도, 의욕도 없어 보였다.
‘정말 괜찮아?’
‘응.’
‘이 칼은, 당분간 압수야.’
‘응…. 저기, 그… 류정혁한텐….’
‘안 말해. 아무한테도.’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언제부터였는지, 이유가 뭔지, 캐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마주친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많이 아프고 슬퍼 보였기 때문에.
어제 이후 확실히 윤채원은 내게 친절해졌고, 우리 사이에 세워져 있던 높다란 벽도 까치발을 들면 안을 훔쳐볼 수 있을 만큼의 높이로 낮아진 느낌이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그녀를 몰아세우고 싶진 않다. 남의 약점을 잡아 이용해 먹을 만큼 양아치도 아니고.
“나 먼저 간다, 오전 수업이라. 접시는 그냥 개수대에 담가 놔. 내가 저녁에 할 테니까.”
“어, 그래. 잘 다녀와.”
총총 걸음을 걷는 동선을 따라 은은한 로션 냄새를 풍기며, 윤채원 등교 완료.
아무리 그래도 설거지까지 맡기는 건 좀….
승재가 빈 접시를 들고 어기적어기적 개수대로 향했다.
되게 불편하네 이거.
승재는 깁스한 오른손을 어중간히 올린 채 나머지 손으로 스펀지를 집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그릇 두 개, 숟가락 하나 정도야 얼마든지 한 손으로도 닦을 수 있었다. 접시를 깨는 불상사를 만들지 않도록 신중하게 세제를 묻혀 조물조물 거품을 내고 있는데.
“아침마다 시리얼은. 초딩이냐?”
커피를 내리던 정혁이 삽질 중인 승재를 비껴 보고는 끌끌 혀를 찬다.
“너보단 훌륭한 식단이니까 관심 꺼라. 블랙커피에 담배 한 대, 그게 무슨 괴식이야 대체.”
“카페인 니코틴 조합더러 괴식이라니. 예술 한단 놈이 감각하고는.”
부엌을 어슬렁거리며 커피 한 모금에 담배 한 모금을 번갈아 마시고 있는 류정혁. 셋 중 한 명이 나가고 나면 항상 이 모양 이 꼴이다.
“야! 나가서 피워! 윤채원 알면 난리 난다고!”
“환기시키면 돼.”
“아예 커피에 담배 담가서 휘휘 저어 마시지 그러냐? 평소엔 그렇게 깔끔 떠는 새끼가 집 안에서 흡연을. 하여간 상식 없는 놈.”
일장연설을 한바탕 늘어놓은 승재가 개수대 물을 틀었다.
최대한 빨리 치우고 사라져야지. 내 폐는 소중하니까.
“그냥 두고 가.”
“어?”
“내가 할게 설거지. 커피잔도 어차피 씻어야 하고.”
“갑자기 웬 친절이냐, 무섭다.”
“네 꼴 보다 답답해 죽느니 내가 한다고 그냥.”
정혁이 승재를 어깨로 밀쳐내며 피우던 담배를 개수대 싱크볼에 비벼 껐다.
“아 진짜….”
잔소리를 더 해 뭐하겠나. 스물다섯 다 큰 놈한테.
그래도 대신 설거지를 해준다니 고맙긴 하다. 은근 세심한 녀석.
“야.”
차 키를 챙겨 나가려던 승재가 망설임 끝에 정혁을 불렀다.
“전에 나한테 했던 말, 그거 뭐냐?”
“뭐가.”
“윤채원… 가까이하지 말라던…. 무슨 뜻이냐고.”
서로 무관심한 성격이라곤 해도 아파트 나눠쓴 지 1년이 다 되어간다는데, 뭐라도 아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말해봤자 뭐해. 이미 늦은 거 같은데.”
정혁은 그릇과 컵을 깨끗이 닦아 선반 위에 올려놓은 후, 물기 흥건한 스펀지를 손바닥으로 짜냈다. 푸욱 내쉬는 한숨이 담배 연기처럼 새어 나온다.
승재가 채원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쯤은 진작 눈치채고 있었다. 매일같이 사다 나르는 샌드위치에,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몸을 날리는 무모함에, 어찌 모르겠나. 웨스트우드 골목골목에 저리도 티를 내고 다니는데.
웬만하면 잘해봐라 밀어주고 싶었다. 오지랖을 부려 둘 사이를 엮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채원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 아니라고 하면, 맘 접을 수 있어?”
“…윤채원 감당 가능한 놈은 그럼 누군데?”
“몰라. 암튼 넌 아니란 소리야. 쌍욕 하던 미국 놈 면상에 침 뱉는 게 어디 쉬워? 그것만 봐도 일반적인 리액션은 아니잖아.”
“뭐, 여자가 멱살 잡히면, 엉엉 울고, 잘못했어요 빌고, 꼭 그래야 돼? 홧김에 침 뱉을 수도 있지.”
쉽게 끝나지 않을 언쟁이었다. 정작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빼놓은 채, 이렇게 주변만 빙빙…. 상대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섣불리 물어볼 수 없는, 이 애매하고 난감한 상황.
“어제 여기 손님 왔었다는 말, 혹시 들었어?”
정적을 깨고, 승재가 먼저 정혁을 떠보았다.
“손님?”
“한국인 남자 둘. 관리인한테 위스키도 주고 갔다고….”
“아…. 그래서 수업 안 들어왔었구나. 전공 심화라 빠지면 안 되는 강의였거든. 보통은 손님 온다 미리 말해주는데, 불시에 온 건가.”
“누구 얘긴데. 윤채원?”
“어.”
“그럼 어제 온 사람들이 채원이 손님이란 거야?”
“아마도.”
“아마도는 또 뭐냐. 어후 속 터져… 일대일 함수만 배웠나 새끼가! 한 마디 물어보면 두세 마디 답해달라고 좀! 윤채원 손님이 누군데? 가족? 친구? 용건이 뭔데?”
참다못한 승재가 목소리를 높이며 정혁을 닦달했다. 하우스메이트 두 녀석 때문에 평온하던 성격이 불같이 바뀔 지경이다.
“…윤채원 사생활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 주기적으로 손님이 찾아오는데, 두세 달에 한 번쯤, 그럴 때마다 집 비워달라 부탁해서 피해줬던 게 다야. 먼저 안 말해주니 묻기도 좀 그렇고…. 숨기고 싶은 사정이 있나 보다 했지 뭐.”
배려인지, 무관심인지, 정혁은 그녀의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지켜주고 있었다.
“사연 많은 여자는 친구로만 옆에 둬.”
정혁이 승재의 어깨 위에 툭 손을 얹으며 말했다.
“샌드위치 셔틀이면 충분하단 소리야. 더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친구가 행여 상처라도 받을까 신경 써주는 녀석의 속내는 잘 알고 있다.
“진작 얘기해주지 그랬어. 윤채원이랑 말 트기 전에.”
하다못해 그녀 방으로 발을 들이기 전에라도 류정혁의 조언을 새겨들었더라면.
하지만 이미 글렀다. 그녀가 애초에 경고했던 3m의 거리는 허물어진 지 오래였고,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방문마저 벌컥 열어젖히고 말았으니.
“나, 고백할까 봐.”
“뭐?”
후회하는 법은 잘 알지 못한다. 스무 살이 훨씬 넘어서도 깨치고 뉘우치는 시간이 남들보다 유독 늦되었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윤채원한테, 좋아한다고.”
후회를 모르는 내 성격이 그녀를 품기에 아주 안성맞춤이라는 것을.
좋아해.
어이없다 비웃을지 모르지만, 사실 샌드위치 먹는 모습에 반했어.
정말이야.
그러니 부디,
내가 너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