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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첫 만남

본문

쿵푸벳

#03. 첫 만남

* * *

〈9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 클라리타.

주택가 근처에 위치한 아담한 공원.

Valencia Meadows Park.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도저히 무리야. 리포트도 밀렸고 포트폴리오 만드는 것도 아직…. 어차피 주말에 또 모인다며. 그래, 내가 공짜 술 마다할 놈도 아니고.”

한가로운 오후의 빛이 나른하게 손등을 적셨다.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 수업 과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의무감에 카메라를 들고 나오긴 했으나, 사실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잔디밭을 뒹굴고 있는 흔해 빠진 레트리버나 몇 장 찍어 볼 생각으로 공원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것인데,

“…야, 내, 내가 금방 다시 걸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곳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승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성가신 휴대폰을 청바지 뒷주머니에 찔러 넣는 일이었다.

게으름을 이겨내고 산책을 나온 스스로에게 분수에 맞지 않는 비싼 위스키라도 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솔직히, 그녀를 ‘만났다’라기보단 그저 일방적인 관찰에 불과했지만, 일방향이든 쌍방향이든 그딴 의미 파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승재는 홀린 듯 카메라 렌즈 캡을 벗겨내고 신중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일생일대에 다신 없을 소중한 피사체를 행여 놓칠세라, 렌즈를 당기는 손가락엔 점점 더 조바심이 일었다.

찰칵. 고작 몇 미터 거리를 두고 셔터가 울렸다.

그녀는 다행히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혹시 걸린다 해도 그럴싸한 핑곗거리는 차고 넘쳤다. 근사하게 뻗어난 고목나무, 오래된 나무 벤치, 코를 벌름거리는 귀여운 강아지, 하다못해 파란 하늘을 찍는 중이었다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묻혀 조용히 흩어지도록, 승재는 천천히, 신중하게 셔터를 눌렀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상아색 운동화가 듬성듬성 풀이 난 흙바닥에 뒹굴었다.

그녀는 맨발인 상태로 벤치 위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구불구불 눌린 선홍빛 파스트라미와 치즈, 각종 야채가 빼곡히 들어찬 호밀빵 샌드위치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있었다.

특히 가느다란 손가락에 묻은 마요네즈를 붉은 입술 사이로 쏘옥 빨아들이는 모습은-스물다섯 살 남자의 썩은 뇌 기준-꽤나 선정적인 장면이었는데,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셔터를 누르는 속도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빨라져 갔다.

사람이 멈출 때를 알아야 하는데, 욕심이 과하면 분명 화를 부른다 했는데,

“저기요. 한국 분 맞죠? 이 벤치 계속 찍으실 거면, 제가 자리 비켜드릴까요?”

대여섯 번쯤 셔터음이 울렸을 때, 그녀가 눈썹 사이를 찌푸리며 홱 고개를 돌렸다. 차갑게 비틀어진 음색은 꽤나 위협적이었지만, 또 묘하게 사람을 끌었다.

“아, 구도가 맘에 들어서 저도 모르게….”

“구도는 보이고, 식사 중인 사람은 안 보이나 봐요.”

“죄송합니다.”

슬그머니 카메라를 내린 승재가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섣부른 미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단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쉽지 않았다. 일찌감치 찾아온 설레발이 자꾸만 그의 입을 씰룩씰룩 건드렸다.

이렇게 인연이 시작되는 건가, 김칫국 원샷.

자연스럽게 이름과 연락처를 주고받은 다음, 김칫국 리필에,

오늘 밤 맥주나 하자고 스윽 던져보면 되겠네, 김칫국 테이크아웃까지.

북과 장구를 양손에 들고 신나게 풍악을 울릴 때쯤,

“개 길러본 적 없으시죠?”

그녀가 생뚱맞게도 강아지에 대해 언급했다. 동물을 좋아하는지 여부가 궁금한 건가. 개든, 고양이든, 승재의 큰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불필요한 정직함으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근처 사는 친구가 한 마리 기르고 있긴 한데, 뭐 거의 저랑 같이 키운다고 봐야죠. 워낙 자주 만나니까.”

즉흥적으로 지어낸 말도 절반의 팩트는 갖추어야 안전한 법. 오며 가며 눈인사 정도 나누는 동네 주민이 개를 끌고 다니는 건 사실이었으니.

“아하, 그러시구나.”

“저기 저 레트리버만 합니다. 덩치가 꽤 큰 친군데도 저만 보면 꼬리를 살랑살랑….”

“그 집 강아지 밥 먹을 때 한번 건드려보세요. 어찌 되는지.”

“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저 어리숙한 남자에게 결정적인 한 방을 내리꽂는 그녀.

“가랑이 사이를 콱, 물리는 수가 있다구요.”

승재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모았다. 손목에 걸린 스트랩이 흔들리자, 남자의 중심 부위께로 툭 떨구어진 묵직한 카메라가 시계추처럼 따라서 덜렁거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모양새가 영 이상해지고 말았다. 피식 실소를 날리는 그녀의 표정이 예리한 화살이 되어 심장을 후벼팠다.

“그럼 저는 이만 갈 테니, 마음껏 찍으세요.”

“아, 잠깐만요. 샌드위치 아직 다 못 드신 것 같은데….”

“식사도 흐름이란 게 있거든요.”

선이 고운 손가락으로 잠시 묶어둔 머리끈을 덤덤히 잡아당기자, 동그랗게 말려있던 머리칼이 찰랑,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남은 샌드위치를 종이백에 담은 후 냅킨으로 손을 닦았다.

“다음부터 몰카는 피해주세요. 입에 음식 넣고 우물거리는 사람은 특히.”

“모, 몰카라뇨,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여기 구도가 특히 좋아서….”

“구도는 무슨. 저 뒤쪽이 다 묘지인 건 아시죠?”

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찍고 있었습니다.”

강승재 오늘 컨디션은 제법 괜찮았다. 솔직히 재치 있는 대꾸라 생각했다.

“와, 이런 진지한 멍멍이 소린 또 처음이네.”

새초롬한 입술 새로 그녀의 거친 문장이 흘러나오기 전까진.

“머, 멍멍이라니. 이봐요,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심한 꼴을 아직 못 당해봤나…. 경찰 안 부른 걸 다행으로 여겨요. 같은 한국 사람이라 봐준 거라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 그녀가 운동화를 구겨 신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미안하면 이 쓰레기나 대신 버려주든지.”

* * *

칠리스 그릴 앤 바.

Chili’s Grill & Bar.

“어? 웬일이냐. 못 온다더니.”

예상치 못한 승재의 등장에, 감자튀김을 집어 먹던 친구 두어 놈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반겼다.

“그렇게 됐어. 나도 맥주 한 잔.”

승재가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의자에 털썩 등을 붙였다.

“뭐 마실래?”

“같은 걸로. 그리고 나 돈 없다. 미리 말하지만.”

“맥주 몇 푼이나 한다고 만날 때마다 궁상이야. 거기 붙은 니 카메라 부품 하나만 팔아도 몇 달은 먹고 살겠다, 인마.”

“야, 건드리지 마. 카메라 어원도 모르는 놈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치는 승재의 시니컬한 대꾸에 테이블 분위기가 일순간 머쓱해졌다.

“왜 삐딱한데? 뭔 일 있어?”

“후우, 그냥 좀 스트레스 때문에. 과제도 그렇고, 집 문제도.”

맞는 말이긴 했다. 중간고사 대신 제출해야 하는 포트폴리오는 20%도 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여자 친구와 방을 합치기로 했다는 룸메이트의 통보에 이달 말까진 어떻게든 짐을 빼줘야 했으니까.

“그 종이봉투나 좀 놓고 말해라. 너덜너덜 걸레짝이 됐구만, 먹을 거냐? 안줏감이면 꺼내 보든가.”

“어? 아, 별거 아냐. 쓰레긴데 마땅히 버릴 데가 없어서.”

별게 아닌 건 아니지.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급격히 치솟은 강승재 스트레스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쓰레기 하나를 길바닥에 못 버려서 여태 들고 다닌 거? 은근 모범적인 놈이야. 안 그렇게 생겨서는.”

“딱히 그렇다기보단.”

우연히 어떤 여자를 만났는데 그녀와의 연결고리가 이 누런 종이봉지뿐이라 차마 버리고 올 수 없었다고, 비웃음 살 게 뻔한 진실은 꾹 삼켜내는 게 현명했다. 폰 번호 대신 쓰레기를 받아 온 거냐, 환경미화원이냐 등등, 정해진 레퍼토리 굳이 들어서 뭐에 쓰겠나. 혈압만 오를 뿐.

“지금 쓰레기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승재 너야말로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며?”

“어. 룸메가 여친이랑 합친대서.”

“내 말 귓등으로 흘리더니 꼴좋다. 카페 알바 때려치우고 연애나 하라니까. 유학 온 여학생들 웬만하면 잘 사는 집 딸내미인 거 몰라? 오빠 믿지 하다가 여친 집으로 기어들어 가면, 집세 굳어, 식비 굳어, 건강한 성생활 보장까지, 일석삼조, 얼마나 좋아.”

“그래. 이참에 한인 교회라도 나가보든가. 거기가 또 만남의 장 아니겠냐.”

친구 놈 둘이 맥주를 들이켜며 낄낄거렸다. 경박한 언행이 꼴 보기 싫었지만 자존심을 내세우며 반박을 하기엔 처지가 썩 좋지 못했다.

다른 유학생들에 비해 부모님의 경제 사정이 크게 넉넉하지 않던 승재는, 1년에 몇천만 원씩 나가는 학비와 허름한 중고차 한 대를 지원받은 것만으로 이미 마음의 빚을 충분히 지고 있었다.

스물다섯이면 먹을 만큼 먹었으니 적어도 의식주는 알아서 해결하겠다며 집에다 큰소리를 쳐 놓긴 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그게 또 계획처럼 쉽지가 않다. 몇 시간짜리 아르바이트 시급으로는 삼시 세끼 챙겨 먹기도 빠듯한 상황.

그나마 같은 과 동기가 소액의 월세만 받고 원룸 한구석을 내어준 덕에 지금까진 어찌어찌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나, 드디어 진정한 사랑을 만난 것 같다. 트루러브.’

며칠 전, 승재의 눈치를 살피던 룸메이트가 어렵사리 꺼냈던 첫마디를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덩치는 산만 한 놈이 몽롱히 풀린 눈으로, 이제부턴 사랑스러운 여친님과 함께하고 싶다 구구절절 설명을 하는데, 뭐 어쩌겠는가. 당장 내쫓지 않고 2주의 여유를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인상 좀 펴라. 내가 인마, 니 여친은 못 구해줘도 쓸만한 룸메이트 하나 딱 물어왔으니까.”

기세등등한 친구 목소리에 승재의 귀가 솔깃해졌다.

“무슨 소리야 그게.”

“교수 땜에 끌려갔던 저번 주 학술회 있잖아 왜.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된 친군데, 이런저런 얘기 하다 보니까 서울 세운고 출신이라는 거야. 너랑 동창.”

“뭐? 누구?”

“강승재 아냐고 물어봤더니 같은 반도 한번 했었다면서 반가워하길래, 내가 덥석, 오늘 맥주 한잔하러 오라 그랬지.”

“글쎄 누구냐니까.”

“저기 오네!”

멀끔한 동양인 한 명이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승재가 앉은 테이블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승재 오랜만이다.”

“어? 니가 어떻게 여길.”

승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류정혁. 머리도 좋고 돈도 많은 고등학교 동창 놈. 적정한 시기에 참 잘도 나타났네.

2주 뒤 산타 클라리타의 노숙자 강 씨로 지역신문 첫 페이지를 장식할 일은 최소한 없을 듯했다.

* * *

맥주 몇 잔을 비워내자 어색한 시간의 공백은 금세 메워졌다.

공부는 전교권이었으나 차갑고 내성적인 이미지. 승재의 머릿속에 박힌 과거의 잔상과는 달리, 이십 대 중반이 된 정혁은 긍정적인 자신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여전히 까칠한 느낌이 남아있긴 했지만.

“그동안 쭉 캘리포니아에서 공부 중이었던 거야?”

“어.”

“바로 옆 동넨데 왜 몰랐지. 어디 살아, 기숙사?”

“아니, 웨스트우드 쪽. 걸어서 학교 다닐 정도로 가까워.”

웨스트우드, 나쁘지 않다. 대중교통으로는 한 시간이 넘게 걸려도, 차만 있으면 학교가 속해있는 발렌시아 지역까지 30분 내로 주파 가능한 거리. 덜덜거리는 고물차의 존재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군.

“야, 혹시 남는 방 있음 나 좀 재워줘라.”

콜록, 콜록. 맥주를 들이켜던 정혁이 사레들린 기침을 내뱉었다.

“오늘 당장?”

아, 너무 앞뒤 설명이 없었나.

“오늘 당장은 아니고….”

“이놈이 이렇게 말주변이 없어요. 새끼가 무턱대고 재워달래 사람 부담스럽게.”

버벅거리고 있는 승재의 꼴을 보다 못한 친구 하나가 뒤늦은 지원사격에 나섰다.

“사실 승재 이놈 곧 길바닥에 이불 깔아야 할 판이거든. 요즘 불쌍해서 못 봐주겠다 진짜. 친구들 만날 때마다 방 있냐, 어디 사냐, 아주 호구 조사를 하는데….”

자존심과 체면이 드르륵 갈려 납작한 만두가 된다 한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루 네댓 시간 알바 시급으로 감당 가능한 집을 찾아보려면, 차로 한 시간 이상의 거리를 알아보든지, 카메라 장비를 팔든지, 그것도 아님 차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감당해야 할지도 모른다.

“실은 룸메가 여친이랑 합친다고 갑자기 통보를 해왔거든.”

몇 년 만에 얼굴을 본 친구에게 무리한 부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승재는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저기 알아보고는 있는데 당장 갈 곳이 있어야지. 친구들은 대부분 원룸 사니까 내가 빌붙기 좀 그렇고, 혼자 방 구하기엔 돈이 부족해서…그냥 생각난 김에 한번 물어본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방 세 개야. 쓰리룸 구조.”

“뭐? 방이 세 개나 있어?”

승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뭘 그렇게 놀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웨스트우드에 그 정도 집이면 진짜 비쌀 텐데!”

오늘 아침 재미로 읽고 지나쳤던 별자리 운세가 승재의 머릿속을 스쳤다.

오랜 인연을 이어갈 인생의 동반자를 만난다기에 공원 벤치의 그녀인 줄 알았더니만, 한참 잘못 짚고 있었구나.

이런 신통한 놈! 공부도 잘하고 돈도 많고 방도 많고, 완벽해도 너무 완벽한 놈! 정혁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이 새삼 가치롭게 느껴졌다.

“혼자 감당하긴 아무래도 버겁지. 하우스메이트 한 명 있어. 남은 방은 사이즈가 좀 작긴 한데 상관없음 들어오든가. 부엌, 거실, 욕실은 공용 공간이라서 눈치껏 사용하면 크게 부딪칠 일은 없….”

“내가 할게. 그 방.”

승재가 빛의 속도로 답했다.

고등학교 당시 승재와 정혁은 딱히 친한 것도 안 친한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숭늉 같은 관계였다. 오랜만에 마주친 애매한 동창에게 무턱대고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솔직히 민폐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작정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이사 날짜 정해지면 연락 줘. 주소는 문자로 보내줄게.”

“어. 고맙다.”

딱히 친절할 건 없어도 쪼잔한 성격은 최소한 아닌 듯했다. 정혁은 더 이상 사정을 묻지 않고 승재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사실 짐이라고 해봤자 카메라와 전공 서적들, 옷가지가 쑤셔 박혀 있는 트렁크 몇 개가 전부였다. 날짜를 정할 필요도 없이, 승재는 언제든 웨스트우드 쓰리룸 맨션으로 옮겨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필요는 있었다.

무엇보다 그 집 구성원의 의견도 반영을 해야 하는 거고.

“근데 나 들어가 살아도 괜찮은지 안 물어봐도 되나? 하우스메이트 있다며.”

“아, 오늘 가서 말하면 돼. 어차피 크게 개의치 않을 타입이라서. 월세 줄어든다고 좋아할 걸 오히려.”

“한국 사람이야?”

“응. 같은 학교 친구.”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던 정혁이 덤덤하게 말을 덧붙였다.

“여자긴 한데, 괜찮지?”

“…여자?”

예상치 못한 변수에 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왜, 좀 부담돼?”

부담… 이야 당연히 되는 것 아닌가.

유학생들끼리 아파트를 나눠 쓰는 데에 남녀 구분이 없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본인이 직접 경험을 해본 게 아니기 때문에 살짝 망설여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설마 니 여친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지? 또 쫓겨나긴 싫어서.”

“그냥 친구야. 만나보면 알겠지만 남자보다 더 무심하다고 해야 하나…. 남 일에 크게 관심 없는, 암튼 같이 살긴 편할 거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어, 그래 뭐… 그쪽이 상관 안 한다면야.”

들어보니 딱히 나쁠 것도 없었다. 공동생활에서의 가장 큰 행운은, 남녀불문, 무심한 하우스메이트를 만나는 것. 살아보면 안다. 상대의 지나친 관심이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승재는 들뜬 마음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몇 시간 전 공원에서 당했던 K.O.패의 쓰린 기억은 웨스트우드 쓰리룸 맨션을 거머쥐기 위한 액때움이었나 보다.

어둠 뒤에 빛이 있고, 고통 끝에 희열이 오고, 인생 뭐 다 그런 것 아니겠나.

“너도 어반 카페 자주 가냐? 이걸 여기서 또 보네.”

테이블 구석에 널브러진 누런 종이백을 문득 쳐다본 정혁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구깃구깃 구겨진 종이백 겉면에는 붉은색의 ‘Urban Cafe’ 로고가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다.

“아, 어반 카페였구나…. 어쩐지 익숙하다 했더니.”

승재가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그가 다니는 학교 근처 길목에 위치한 카페였다.

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게 옆을 지나쳤으면서 그거 하나 생각을 못 하고….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차라리 샌드위치 이야기로 시작을 했더라면 대화가 훨씬 더 수월하게 풀렸을지 모른다. 뒤늦은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지만, 이미 놓친 타이밍은 어쩔 수 없는 것. 이제부터라도 줄기차게 커피를 사 먹으며, 그녀와의 두 번째 우연을 기대해보는 수밖에.

“근데 넌 어떻게 알았어? 어반 카페.”

“아까 말한 하우스메이트. 걔가 여기 단골이야. 덕분에 몇 번 얻어먹었지.”

“거리도 꽤 먼데 왜 굳이 여기까지. 웨스트우드에도 이 정도 샌드위치집은 많을 거 아냐.”

“몰라. 취향이지 뭐. 여길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빵 맛이 다르다나….”

승재는 정혁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확실히 촉이 좋은 타입은 아니었다.

* * *

일주일 후,

L.A. 웨스트우드.

한가득 짐을 실은 승재의 차가 덜컹덜컹 느린 속도로 웨스트우드 골목 사이사이를 빙빙 돌고 있었다.

몇 분 더 시간을 번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정혁에게는 5시쯤 도착할 예정이라고 말해놓긴 했으나, 이래저래 들뜬 나머지 너무 서둘러버렸다.

[내가 예상보다 좀 빨리 도착할 것 같은데, 혹시 집이야?]

[아니, 지금 수업 중. 아무도 없으니까 먼저 올라가서 짐 풀고 있어. 1층 관리인한텐 미리 말해놨다. 내 이름 말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도어록 비밀번호는 90024*]

오케이. 비번도 받았고, 주차공간은 따로 있다고 했지 아마.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방 세 개짜리 너른 집에서 매일 학교를 오가는 기분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 가진 것이 없으면 가진 자를 옆에 두기라도 하라더니, 졸업 5년 만에 옛 친구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승재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503호 이사 왔는데요, 류정혁 이름으로 계약된 집인데.}

{아, Mr. 류! 메모 받았습니다. 주차는 이쪽에 하시면 됩니다.}

친절한 관리인이 승재의 차를 수신호로 안내해 주었다. 이게 얼마 만에 받아보는 대우란 말인가. 발레 서비스라도 해줬더라면 줄줄 감동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서러운 타국 생활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을 느끼며, 승재는 여유롭게 차를 세웠다.

파랗고 쨍한 하늘. 살랑살랑 바람이 부는 것이, 이사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 * *

삐빅.

“실례하겠습니다.”

아무도 없이 빈 집이라곤 해도 그냥 발을 들이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던 승재는, 괜스레 인사를 건네며 현관문을 열었다. 낡은 캐리어를 도어 스토퍼 대신 받쳐놓고 가장 중요한 짐부터 차례로 옮기려 몸을 푸는데,

“누구세요?”

“…….”

별안간 튀어나온 여자의 음성. 들리지 말아야 할 소리가 거실 쪽에서 울렸다.

뭐지 대체. 분명 아무도 없다고….

큰 박스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상태로 뻣뻣한 목석이 되어버린 한 남자. 예상치 못한 대꾸에 등줄기에선 삐질삐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류정혁, 벌써 왔어? 오늘 수업 늦게 끝난다며.”

청량한 음색과 함께 타박타박, 슬리퍼를 디디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집에 살고 있다는 하우스메이트 같았다. 그녀는 승재를 정혁이라 착각하였는지 큰 의심 없이 다가왔다.

조바심이 났다. 뻐금뻐금 입을 움직여보려 애썼지만, 이상하게도 말문이 쉽사리 터지지 않는다.

상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긴장을 할 위인이었나 내가. 최소한 ‘안녕하세요’ 정도는 건넬 수 있는 거잖아.

“야, 왜 대답이 없….”

“안녕하세요, 저는 강….”

“어? 당신!”

낭랑한 하이톤의 탄성이 승재의 이름 석 자를 가볍게 눌러버렸다.

‘당신’이 쓰이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연인을 사랑스럽게 칭할 때,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파르르 쏘아붙일 때.

“당신이 왜 여길 들어와!”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들어도 후자 쪽이지만.

놀라긴 승재도 마찬가지였다.

“와…. 메도우즈 파크, 샌드위치… 맞죠?”

이렇게 세상이 좁을 수도 있나? 류정혁 이놈이 귀인은 귀인인 모양이다. 하우스메이트가 어반 카페 단골이라더니, 그 하메가… 공원 벤치 샌드위치, 상아색 캔버스, 바로 그녀일 줄이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우연 같은 소리 하네. 언제부터 미행했어요?”

“저, 그, 그게 아니구요….”

“와, 뭐 이런 미친 변태 새끼가 다 있어! 생각할수록 소름 끼치네. 당장 안 나가? 이번엔 진짜로 경찰 부를 거야!”

“자, 잠깐, 잠깐만 제 말 좀….”

“얼른 나가라고 미친놈아!”

“밀면 안 돼, 박스가 무거워서… 밀지 말라구요! 어어….”

남자와 별반 차이가 없다더니, 힘의 세기를 말한 거였나.

우당탕.

쏟아지는 박스 속 물품들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고 만 승재. 육중한 현관문이 거센 굉음을 내며 닫힌 지 오래였지만, 승재는 여전히 정신줄을 놓은 채로 맨션 복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어반 카페… 나도 거기 자주 간다고, 그 얘길 또 못 했네.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맥박이 펄떡거렸다.

말도 안 되는 두 번의 우연.

이 정도면 인연.

아니, 의심의 여지없는 운명이다.

* * *

“이쪽은 강승재, 그리고 여긴….”

“야, 잠깐만! 내 이름 아무한테나 막 함부로 알려주기 싫다고!”

근본 없는 침입자에겐 자신의 이름 석 자마저 알려주기 싫다는 듯, 채원이 정혁의 말허리를 뚝 끊었다.

“아무한테나, 막, 함부로, 가 아니구요, 정혁이가 방금 소개했듯이 제 이름은 강승….”

“됐구요, 지금 내가 그쪽이랑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쾌하거든요? 류정혁 가운데 끼고 얘기할 게 아니라, 경찰을 부르는 게 여러모로 깔끔할 것 같은데.”

통성명부터 이런 예상치 못한 난관이라니.

정혁이 부랴부랴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5시. 단둘이 붙어 있던 시간이라고 해봤자 고작 30분 남짓이었다. 대체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채원아, 이놈 내 고등학교 동창 맞다니까. 같은 반도 한번 했었어, 고3 때.”

“확실해? 얼굴 자세히 뜯어 봐봐. 니가 착각했을 수도 있잖아. 저런 인상이 또 은근 흔해서.”

졸지에 막, 함부로, 저런 흔한 인상을 가진 아무개가 되어버린 승재는 눈썹 사이를 잔뜩 좁힌 채 그녀를 쏘아보았다.

“뭐, 불만 있어요? 노려보면 어쩔 건데?”

“초면부터 너무 막 말을 하시니까 당황해서 그럽니다.”

“하, 방금 초면이라고 하셨나요? 정혁아, 이 남자 확실히 수상하다니까! 학생증이랑 여권 꺼내 봐요. 일단 신원 확인부터 하는 게….”

“후우….”

정혁이 깊은 한숨과 함께 푸욱 고개를 숙였다. 아침부터 스트레이트로 들어찬 영어 강의를 소화해내느라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지경인데,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또다시 알아먹기 힘든 말들이 줄줄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한국어인데, 어째 학교 수업 때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지.

“싸우지들 말고, 한 사람씩 차례로 말해봐. 일단 채원이 너부터.”

“스토커야 저 남자.”

“이봐요!”

“강승재, 넌 일단 좀 닥치고 있어. 아직 순서 아니다.”

“하아, 미치겠네 진짜.”

승재가 답답한 듯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곱슬기가 섞인 그의 갈색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스토커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얘기했잖아 왜. 저번 주에 샌드위치 사러 어반 갔을 때, 나 따라다니면서 사진 찍었다는 그놈!”

“공원 벤치에서 당했다던?”

“그래! 니 친구라는 저 남자가 바로 그 스토커라고! 무섭다 무서워. 설마 집까지 쳐들어올 줄이야.”

정혁이 묘한 표정으로 승재를 바라보았다. 어째 눈빛이 아리송한 게 불안한데 이거. 신속한 해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쳐들어온 게 아니라 정혁이 동의하에 정식으로 입주한 거라구요. 그쪽한테도 미리 허락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스토커인 줄 알았음 당연히 허락 안 했죠!”

“거 참 말끝마다 스토커, 스토커! 정혁아, 말 좀 해줘 오해라고. 넌 나 그런 놈 아닌 거 알잖아.”

“솔직히 판단이 잘 안 서네. 내가 널 너무 오랜만에 봐서.”

“아 진짜 너까지 왜 그래! 그날 전공 과제 때문에 출사 나갔던 거라고! 사진 찍고 있는데 저분이 우연히 거기 앉아 있었던 거고!”

물론 어쩌다 보니 도촬을 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스토커 취급까지 당하는 건 억울했다.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목청만 높아진다. 5년 만에 만난 동창 놈에게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마디 정도는 보태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고딩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융통성 없는 류정혁.

“전공 과제? 전공이 뭐길래?”

“승재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의 약칭) 다녀. 사진학 전공, 맞지?”

승재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밥 한술 떠먹여 주네. 갑갑하게 막혀오던 가슴이 밤톨만큼 뚫린 기분이다.

“칼아츠 학생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복싱선수 주먹만 한 렌즈를… 난 또 몰카용인 줄 알았지.”

“거 말조심 좀 합시다. 몰카라뇨!”

“사진 전공생 스토커로 몰아서 미안하긴 한데, 그날 나 안 찍은 건 확실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승재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쪽 카메라 렌즈랑 나랑 눈 마주친 기억이 생생하거든요.”

“그때도 말씀드렸다시피 벤치 뒤편 묘지를 찍느라.”

“가져와 봐요, 증거.”

“증거요?”

“생과 사를 담았다는 그 묘지 사진, 보여 달라구요.”

승재의 손바닥에서 진땀이 배어 나왔다.

“과, 과제로 제출한 상태입니다. 돌려받으면 그때 보여드리죠.”

“저장된 원본 파일은요?”

“전공생이다 보니 하루 동안 찍는 사진의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인화 작업 완료된 파일은 그때그때 삭제하는 습관이 있어서.”

2테라바이트의 컴퓨터 대용량 메모리를 보유한 자의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표정을 보니 반쯤은 믿는 눈치였다. 사진 전공생 사정을 어찌 알겠나, 그런가 보다 하겠지. 류정혁 저놈이 경영학 전공이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자, 그럼 서로 오해는 풀린 거지?”

“잠깐, 그래도 난 일단 보류야. 묘지 사진 가져오기 전까진 3m 이상 거리 유지해달라고 당부 좀 해줘. 혹시 할 말 있으면 너 통해서 해달란 것도.”

코앞에 앉혀놓고 아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다 들립니다.”

“엿듣는 취미까지 있으신 건가.”

“야, 윤채원.”

정혁이 채원의 비아냥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 성이 윤씨였구나.

하얀 얼굴, 긴 생머리, 쌍꺼풀 진 커다란 눈과 사르륵 물결치듯 올라간 눈매, 도톰한 입술로 톡 쏘아붙이는 음색은, 마치 고고하고 새침한 페르시안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윤채원. 그녀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리는 성과 이름을 가졌다고, 그 와중에도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 승재였다.

“저기 왼쪽 작은 방 쓰면 돼. 좁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짐이 얼마 없네?”

“어. 카메라, 컴퓨터가 전부야. 나머진 옷이랑 뭐 그런 것들.”

“야, 류! 이 남자랑 나랑 방 마주하고 쓰라는 거야 지금?”

그녀는 정혁을 이따금씩 ‘류’라고 칭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다른 국적의 친구들이 정혁을 부를 때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대신 ‘류’라는 별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미 둘은 제법 친해 보였다. 괜한 소외감이 느껴질 만큼.

“정 불편하시면 거실 소파에서 자겠습니다.”

“됐어요. 휑 뚫린 공간보단 문짝 하나라도 더 달려 있는 게 안전하지.”

“아까부터 자꾸 치한 취급하시는데… 저 채원 씨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그건 본인 생각이시구요. 치한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제 몫이죠.”

“그만 좀 해라. 관리비랑 월세 줄어서 좋다 할 땐 언제고. 이놈 일단 짐이라도 풀게 해줘야지, 언제까지 실랑이할 거야? 아침부터 이사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보다 못한 정혁이 한 소리를 내자, 채원은 눈썹 사이를 한껏 찡그리면서도 곧 입을 다물었다. 이 집안의 실세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저녁은 근처 나가서 셋이 먹자.”

“난 됐….”

“전원 필참이야. 대신 밥은 내가 살 테니까.”

“후아, 월세 좀 많이 낸다고 정말,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네.”

채원은 고집부리기를 포기한 듯 몸을 일으켰다.

류정혁이 실세인 이유가 있었던 거다. 하우스 렌탈비의 불균등 부담. 이런 호화판 웨스트우드 맨션에 오래도록 붙어 있으려면 쓸데없는 분란은 피하는 것이 현명하지.

“정혁아, 혹시 너 야구 좋아하냐? 우연히 받은 사인볼 소장 중인데, 가질래? 난 딱히 필요 없어서.”

짐을 풀던 승재가 정혁에게 LA 다저스 유명 선수의 사인볼을 내밀었다. 어렵게 구한 물건이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풋풋한 시절 순수하게 맺어진 우정! 이 집안 실세의 고딩 친구가 바로 나라고 나. 2인자 자릿값으로 이 정도쯤이면 꽤나 합리적인 거래 아니겠는가.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채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승재가 티 안 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곳에서 살아남는 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회심의 미소였다.

* * *

“뭐? 스물둘? 동갑이 아니었단 거야?”

새우 필래프를 한입 크게 뜨던 승재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벅거렸다.

“제가 스물다섯으로 보였나 봐요? 이래 봬도 꽤 동안 소리 듣는 편인데.”

“아니, 그야 당연히… 정혁이랑 서로 이름을 부르길래….”

“한국인들 종특이죠. 이름 부르면 동갑일 거라는 꼰대 마인드,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되는지.”

초지일관 잘나셨다 아주.

콧방귀를 픽 뀌는 채원의 앞에서 졸지에 꼰대가 되어버린 승재는 할 말도 시원하게 뱉지 못한 채 부들부들 주먹을 떨어야 했다. 누가 오빠 소리 듣고 싶댔냐고. 동갑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네, 했을 뿐인데 어디서 융통성 말아먹은 고리타분한 사람 취급을.

“정혁아, 강승재 씨한테 존칭 듣고 싶으신 건지 물어봐. 어차피 몇 번 부를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의사 존중은 해드려야 하니까.”

“승재야, 채원이가….”

“장난하냐? 다 들었다고 나도.”

의도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저 여자보다,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류정혁의 행동이 몇 배는 더 짜증 났다. 입가에 1도 웃음기가 없는 걸 보면 저놈 저거 진지하다는 건데, 농담인지 비아냥인지 구분도 못 하는 꽉 막힌 꼰대는 내가 아니라 류정혁 아닌가!

“이름 불러도 돼요. 몇 살 아래랑 친구 먹든 난 전혀 상관없으니까.”

승재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오빠 소리에 환장을 하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세 살 어린 동생이 대놓고 야, 자, 트겠다 선언을 하는 것도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말발에 눌려 그녀가 전혀 동생처럼 느껴지지 않는단 것도 문제였지만. 그런데.

“무덤 인증 사진 가져오면, 그때 말 놓을게요. 아직은 좀 꺼려져서.”

나 참 어이가 없다. 선심 쓰듯 쿨하게 반말 해라 했더니, 그것도 거절당한 거야 설마?

너 하는 거 봐서. 이런 느낌.

친구 할지 말지는 내가 정해. 어디서 주제넘게 말을 놓으라 마라야? 딱 요런 뉘앙스.

“잘됐네. 윤채원도 강승재 환영해주고. 보기 좋다. 한잔 쭉 마셔 다들.”

뭐가, 어디가 잘돼 보이는데 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진창이구만.

세상만사에 무심한 성격은 윤채원뿐만이 아니었다. 멤버 셋 중에 둘이 저 모양이면, 앞으로 내 포지션은 어찌 되는 것인가. 눈썹 사이 주름이 깊어질 때쯤.

“강승재 씨.”

새침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칼아츠 다니면 어반 카페 잘 알겠네요?”

“네. 자주 갑니다. 커피 마시러.”

그리고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나는.

“그거 하난 맘에 드네요. 앞으로 샌드위치 종종 부탁할게요. 호밀빵으로, 할라피뇨는 빼고.”

그녀에게로 가 셔틀이 되었다.

* * *

“누군데 그렇게 공을 들이나. 설마 여친?”

“아우 씨, 깜짝이야!”

학교 컴퓨터실에서 사진 보정 작업을 하고 있던 승재가 화들짝 놀라 인터넷 창을 띄웠다.

“뭘 그렇게 숨겨? 죄지은 놈처럼.”

“숨기긴 뭘. 넌 뭔데 갑자기.”

승재의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무심코 던진 친구의 말이 쿡, 그의 정곡을 찔렀나 보다.

죄지은 놈.

그렇다. 웨스트우드 맨션 멀쩡한 본인 방을 놔두고 학교 컴퓨터실에 앉아 이러는 걸 보면, 죄가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으니.

“왜 왔냐니까. 나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지나가다 우연히. 낯익은 뒤통수가 보이길래.”

여친과 방을 합칠 계획이라며 룸메였던 승재를 길바닥으로 내쫓다시피 밀어낸 희철은, 일말의 앙금이 남아있을 친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요 며칠 부쩍 승재의 주변을 알짱거리고 있었다.

“이사 간 집은 괜찮아?”

“안 괜찮으면, 니 여친 다시 내보내기라도 하게?”

“그건 아니지만…. 왜, 그 고딩 친구, 겪어보니 별로야? 정 힘들면 너 다른 방 구할 때까지 여친이랑 셋이 지내도….”

“미친놈. 내가 사양이다, 인마.”

승재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 거리 먼 것만 빼면 지낼 만하니까.”

더 애 좀 태워볼까 했으나, 남자를 상대로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다시 빌붙을까 봐 조마조마했구만?”

“무슨, 다 친구 위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얼른 꺼져. 나 바쁘다고.”

승재는 훠이훠이 희철을 밀쳐내곤 모니터로 다시 눈을 돌렸다.

“누군지 말해주면 꺼질게. 언뜻 보니 여자 사진 같던데.”

희철이 느물느물 웃으며 승재의 등 뒤에서 발을 뗄 생각을 안 한다.

“누구긴 누구야, 그냥 피사체지.”

“피사체 좋아하시네. 인물 사진 쪽은 흥미 없다며?”

“사실… 나 알바해 요즘.”

“알바?”

“그래. 파파라치 컷 찍는 거 유행이잖아. 실습 겸, 벌이도 은근 쏠쏠하길래.”

“흐음….”

희철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승재를 비껴 보았다.

“미드 좀 그만 봐라 새끼야. 표정이 거의 프로파일러 나셨네.”

“그럼 갑자기 화면은 왜 바꿨는데? 야동보다 들킨 놈처럼.”

“고객 신상 보호 몰라? 아무리 알바여도 지킬 건 지켜야지.”

승재가 괜히 더 목청을 높였다. 도둑이 딱 제 발 저리는 꼴이었다.

“상당히 수상하지만 오늘은 넘어간다 내가. 알바비 받으면 꼭 연락하고.”

고개를 기웃기웃거리며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희철이 드디어 자리를 뜨자, 그제야 숨통이 좀 트였다. 겉보기엔 둔해 보여도 은근 촉이 좋다니까.

주위를 재차 살핀 승재는 화면 하단에 숨겨놓았던 포토샵 프로그램을 조심스럽게 클릭했다.

별안간 가슴이 뛴다. 화면 가득 들어찬 아름다운 피사체.

벤치 위에 걸터앉아 한입 가득 샌드위치를 베어 문, 윤채원의 모습이었다.

* * *

“후아, 사서 고생이다 정말.”

덜덜거리는 고물 자동차를 맨션 주차장에 세워놓은 승재는 피곤이 역력한 기색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서류 사이즈의 봉투와 어반 카페 로고가 찍힌 쇼핑백을 양손에 각각 들고, 배낭을 짊어지고, 묵직한 카메라까지 어깨에 둘러메니, 뒷목에 찌릿 담이 결릴 지경이다.

간만에 빠듯한 하루를 보냈다. 빠듯하면서도 어쩐지 뿌듯한 하루.

“어이, 류! 같이 가!”

매일 보는 얼굴이어도 우연히 만나니 반갑다. 쩌렁쩌렁 울리는 승재의 부름에 5층 복도를 앞서 걷던 정혁이 고개를 돌렸다.

“수업 늦게 끝났나 봐? 근데 류, 는 뭐냐….”

“아니, 어떤 분이 그렇게 부르시길래.”

채원이 하던 대로 따라 해 본 것뿐인데, 막상 불러 보니 입에 착착 감긴다. 정혁은 별 대꾸 없이 웃으며 승재가 들고 있는 잡다한 짐들을 힐끔 살폈다.

“뭐가 그렇게 많아? 좀 들어줘?”

“아냐, 다 왔는데 뭐. 넌 담배 피우고 오는 길이냐?”

“어떻게 알았어?”

“콧구멍 하나여도 알겠다. 냄새가 아주 진동을…. 몇 대나 피운 거야?”

정혁은 상당한 헤비스모커였다. 텁텁하고 싸한 내음이 자욱이 밴 탓에 담배 한 갑이 터벅터벅 복도를 걸어 다니는 줄 알았다.

“안 세 봐서 몰라. 저녁은?”

“대충 때웠지. 들어가서 맥주나 마실래?”

“밥 먹었다며.”

“밥이랑 술이랑 같나 어디. 냉장고에 소시지 있던데.”

“감자칩도 있어.”

“딱이네.”

승재는 비흡연자였지만, 대신 류정혁과의 술 궁합은 제법 잘 맞는 편이었다. 창이 크게 난 식탁 앞에서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차가운 맥주 캔을 따는 맛. 웨스트우드로 넘어온 후 승재가 새로 터득한 즐거움 중 하나였다.

치익.

그래, 바로 이거지.

하얗게 올라온 거품을 입술로 후룩 빨아들이자 알싸한 탄산이 혀끝을 톡 쏜다.

“크으, 시원해. 이제야 좀 피로가 풀린다.”

승재는 사우나에 들어앉은 아재들처럼 걸쭉한 탄성을 자아냈다.

“바빴냐? 눈이 퀭하다.”

“야외 실습이 좀 있었거든.”

“사진학과라 확실히 커리큘럼이 다르구나.”

“응, 뭐…. 이것저것, 워낙 복잡해. 과제도 많고.”

물론 오늘은 단독으로 진행된, 자체 실습이었지만.

학교 수업을 마치고 메도우즈 파크까지 차를 몰고 달려가 묘지 사진을 대충 찍은 후, 다시 학교 랩실로 컴백. 허겁지겁 인화 작업을 마친 승재는, 그 길로 어반 카페에 들러 샌드위치를 무사히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소중한 삽질이었달까.

“건넛방 분은 집 도착 전이신가?”

“채원이?”

“어.”

“거의 늦게 와.”

“왜, 알바해?”

“도서관에 있을 때도 있고. 모르지 뭐. 그런 것까진 신경 안 쓰고 지내서.”

맥주 한 모금을 천천히 넘긴 정혁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승재를 바라보았다.

“관심 갖지 마라. 다친다.”

“뭐가?”

“윤채원 말야.”

“뭔 소리야 갑자기.”

승재는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맥주 탓인가, 속이 뜨끔뜨끔했지만.

“아님 말고.”

정혁이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감자칩 두어 개를 바삭 씹었다. 워낙 말이 없는 놈이란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바로 입을 다물 필요까진…. 몇 마디라도 더 흘려주든가,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얘길 하다 말아 왜.

“다친다니, 그게 무슨 뜻인데?”

“관심 없다며.”

“궁금하잖아. 갑자기 말 끊으니까.”

“이건 뭐냐?”

정혁이 테이블 위에 놓인 어반 카페 봉투를 넌지시 가리켰다.

“아, 별건 아니고….”

“산타클라리타에서 웨스트우드까지면, 셔틀 값 꽤나 비쌀 텐데.”

“셔, 셔틀은 무슨…. 이건 그냥….”

삐비빅.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던 승재가 별안간 울리는 도어록 소리에 멈칫, 말을 끊었다.

철컥, 곧 현관문이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혼잣말처럼 인사를 중얼거리는 여인의 지친 음색과 함께.

“어? 다들 와 있었네.”

“와서 앉을래? 맥주 줄까?”

“아냐, 오늘은 좀 피곤해서. 나 먼저 들어갈게.”

정혁과 간단한 몇 마디를 나눈 채원은 그대로 다이닝룸을 지나쳐 방으로 갔다. 승재와는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말을 주고받진 않았다.

“정혁아, 나 잠시만….”

승재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서류 봉투와 쇼핑백을 한꺼번에 들고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증거 제출하러. 잠깐이면 돼.”

그녀가 방문을 닫고 들어가기 전에 꺼림칙한 오해를 풀고 싶었다. 뭘 딱히 해보겠다는 마음보다도, 스토커니, 치한이니, 최소한 이런 타이틀이라도 떼버려야 할 것 아닌가. 앞으로 매일 얼굴 보고 지낼 사이끼리. 억울한 걸 원래 잘 못 참는 성격이다. 그래서 그런 거다.

“저기요.”

승재가 용기를 내어 그녀를 불러세웠다. 우측으로 꺾어진 복도 끝, 발을 멈춘 채원이 힐끔 시선을 돌렸다.

“네?”

“저, 이거…. 오늘 과제 돌려받았거든요. 메도우즈 파크, 묘지 사진이요.”

“아….”

하얀 손가락이 건네받은 서류 봉투를 야무지게 열었다. 모노톤으로 인화된 정적인 공원묘지의 광경.

“잘 찍었네요. 점수 잘 받았겠어요.”

“오해는 풀린 거죠?”

“메모리카드 전체를 받은 게 아니니 뭐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이쯤 해둘게요. 산 사람 얼굴은 절대 안 찍었다는데 믿어드려야지, 어쩌겠어요 제가.”

삐딱한 음색도 여러 번 들으니 정이 드나 보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빈정거림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고마워요, 믿어줘서.”

“네, 그럼 저는 이만….”

“아, 잠깐만요. 그리고 이건 샌드위치.”

승재가 손에 들고 있던 어반 카페 쇼핑백을 덥석 채원의 품에 안겨주었다.

“호밀빵, 할라피뇨 빼고. 맞죠?”

“…….”

채원의 커다란 눈동자가 끔벅끔벅 승재를 향했다.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 이 남자 뭐지? 하고 상황 파악을 하려 애쓰는.

“진짜로 사 올 줄은 몰랐네요. 농담 한번 해본 건데.”

“농담이었어요? 너무 진지하길래, 어반 카페 지나갈 때마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아…. 보기보다 진지한 타입이시구나. 암튼 이건 잘 먹을게요. 그럼 쉬세….”

“이제 말 놔도 되죠?”

이 남자, 정말 대체… 뭐지?

어안이 벙벙해 있는 채원에게 승재가 성큼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윤채원.”

불쑥 침범한 남자의 커다란 손. 그녀와의 거리 3m가 허물어지는 순간.

“뭐… 그래 보든지.”

시큰둥한 대꾸와 함께 하얗고 보드라운 손바닥이 남자의 손등을 툭 치고 지나갔다.

쿵, 채원의 방문은 곧 닫혔지만, 승재는 목석처럼 그 자리에 발을 붙인 채 꼼짝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기를 누를 셈으로 내질렀던 반말은 이미 효력을 상실한 지 오래. 역풍을 맞은 쪽은 아무래도 강씨 성을 지닌, 여기 빳빳하게 돌이 되어버린 이 남자 같았다.

악수도 뭣도 아닌 손등의 스침에 허리케인급 전율이라니, 완전히 예상 밖인데 이건.

문이 닫히면서 훅 스친 방 안의 공기가 은은하게 남아 승재의 코끝에 맴돌았다. 보디로션인지, 샴푸인지 모를 향긋한 냄새.

“강승재.”

“…어?”

“뭐해 거기서. 맥주 미지근해지면 맛없다.”

류정혁의 부름이 아니었다면, 분명 손을 뻗어 그녀의 방문을 홱 열어젖혔을지도 모른다. 이미 변명거리도 다 생각해두었다. 샌드위치 봉투 안에 들어있는 커피 쿠폰은 다시 돌려달라고.

당신 냄새가 너무 좋아서요, 할 순 없잖아.

찌질해 보일지언정, 또다시 치한으로 몰리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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