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리운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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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리운 악몽
* * *
“보시다시피 촬영 중이라 스튜디오가 많이 분주합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안내는 여기 조 실장이 맡아서 해줄 겁니다. 계약과 관련하여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따로 메모 남겨주십시오.”
빠른 속도로 할 말을 끝낸 승재는, 채원을 조 실장에게 넘긴 후 등을 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네가 왜 여기에.
터질 듯 뛰어오르는 맥박의 진동이 턱밑까지 치받았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윤채원을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되다니.
“감독님, 벌써 시작하시게요? 급한 미팅 잡혔다고 조 실장님이….”
“아냐, 해결됐어. 바로 준비해줘.”
“네, 알겠습니다.”
자리를 비운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나타난 승재의 모습에, 막간의 휴식을 취하고 있던 모델들과 스태프의 움직임이 다시금 분주해졌다.
승재는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카메라를 잡았다. 모델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건네던 형식적인 농담도 사라졌다. 작업할 때만큼은 머릿속 모든 잡념을 지우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오늘은 그 기본 수칙마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하필,
하필이면.
이 카메라를 가져와서는….
그의 손에 들린 서브카메라에는 폭 5cm쯤의 빈티지한 가죽끈이 매달려 있었다.
9년 전, 채원이 이별을 고하며 건네었던 카메라 스트랩.
묵직하게 늘어진 브라운 컬러의 낡은 가죽끈이 팔을 간질이며 오늘따라 줄기차게 그의 신경을 긁어댄다. 당장 떼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왜 난 아직까지 이 거지 같은 줄 하나를 버리지 못하고.
채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스트랩을 두어 번 감아 손등에 말아 쥐고 있을 때쯤,
“저기요, 촬영 중엔 여기 서 계시면 안 되거든요?”
“아, 죄송합니다.”
스태프의 짜증 섞인 목소리와 주눅 든 채원의 사과가 차례로 들려왔다. 몇 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였음에도 또렷이 귀에 꽂히는 그녀의 음성.
“…….”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승재의 손가락이 멈칫거렸다.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그녀를 함부로 대하는 직원 때문인지, 아니면 뻔뻔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채원의 시선 때문인지 원인은 분명치 않았지만, 어찌 됐든 울렁이는 현재의 감정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다.
“모델 머플러 좀 벗겨줘. 다음 컷 소품 미리 준비하고.”
승재는 촬영을 멈추고 근처에 있는 스태프 하나를 불러 세웠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해 봐도 딱딱하게 굳은 눈빛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모두가 슬금슬금 그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상황.
쉴 틈 없이 사진을 찍어대고는 있으나 수백 장을 쌓아둔다고 해서 제대로 된 화보컷을 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성이 마비된 상태로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다음 주나 그 언제쯤, 추가 작업을 해야 할 듯싶다.
* * *
“전화 왜 이렇게 안 받아!”
오후 다섯 시가 넘어서야 불통이던 정혁의 전화가 겨우 먹혀들었다.
상대의 ‘여보세요’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치는 이 남자. 웬만해서는 화를 내는 법이 없는 강승재의 괴성이었다.
「소리는 왜 질러? 회의 중이라 못 받았다. 뭔데?」
“뭔데? 너 지금 나랑 장난하냐?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물어?”
「아, 오늘 금요일이구나 벌써.」
느릿느릿 날짜를 확인하는 친구 놈의 태연함에 오장육부가 뒤틀릴 지경이다. 금요일 어쩌구 하는 걸 보면 윤채원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데….
“하아, 정말…. 갑자기 NGO 미팅 잡혔다고 할 때부터 느낌 싸하더니, 이렇게 내 뒤통수를 후려쳐?”
「후려치긴 누가…. 암튼 미안하게 됐다. 채원이가 급하게 부탁을 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그니까 그걸 왜 지금 말하냐고!”
「너 홍콩에 있었잖아.」
“핑계는. 홍콩이 무슨 목성이야? 조 실장이 아니라 나한테 먼저 의논하는 게 순서잖아!”
「너한테 말했음… 단칼에 거절했을 거 아냐.」
차라리 그럴싸하게 거짓말이나 하라고.
정혁의 솔직한 답변은 승재를 더욱 열 받게 할 뿐이었다.
“나보다 윤채원 쪽이라 이거냐?”
「미친놈.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채원이 일이나 잘 도와줘. 걔네 회사 요즘 많이 힘들다더라.」
“왜 그걸 나한테 떠넘기냐고 글쎄. 그렇게 정 안타까우면 네가 도와주든가!”
「내가 설득 안 해봤을 거 같아? 다른 업체는 싫대. 죽어도 스튜디오K 아님 안 된대잖아. 윤채원 고집 누가 말려.」
“…….”
승재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던 정혁이,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차분히 그를 달랬다.
「벌써 9년이나 지났잖아. 우리가 더 이상 스물다섯도 아니고. 감정 잘 컨트롤해서 웬만하면 좋은 방향으로….」
“그 9년 동안 연락 한번 없었다고.”
「못 한 거겠지, 미안해서.」
“그럼 평생 하지 말았어야지!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나머진 채원이한테 직접 물어봐. 나 일 처리 할 게 좀 밀려서, 이만 끊는다.」
“야! 류….”
누가 책임감 투철한 CEO래. 이미지 메이킹도 정도껏이어야지. 천하의 무책임한 새끼.
다짜고짜 전화를 끊어버리는 정혁의 행동에 꼭지가 돌 듯 화기가 솟구쳤지만, 회사 운영으로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 보이는 친구 놈을 무작정 붙잡고 늘어질 수는 없었다.
“감독님, 아까 그 직원이 놓고 간 기획안, 주말 동안 검토 좀 해보시겠어요? 뭐 좀 성가신 내용이긴 해도 자선 행사 한 번씩 하고 나면 이미지는 좋아지니까요…. 일단 계약서 작성은 다음 주에 하자고 연기하긴 했습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흡을 가다듬는 승재에게 조 실장이 기획안 한 부를 슬며시 내밀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문서 파쇄기에 쑤셔 넣고 싶었으나 보는 눈들이 많아 멋대로 행동하기도 어려웠다.
“수고했어, 조 실장. 자세한 건 월요일에 의논해보자고. 나 먼저 들어갑니다. 스튜디오 마무리 좀 부탁해.”
피곤이 역력한 눈빛으로 인사를 마친 승재는 크로스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유난히도 긴 하루였다.
* * *
[POA X 스튜디오K, 동물복지를 위한 자선 전시회 기획안]
횡단보도 정지선에 차를 정차한 승재는, 채원이 작성한 기획안 표지 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미련이든 죄책감이든 나에 대한 감정이 털끝만큼이라도 남아있었더라면,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기획안을 던져주고 가진 않았을 텐데.
그녀의 행동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다음 페이지를 넘겨 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강승재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POA 이벤트 기획팀, 윤채원이에요.’
어색한 승재의 경어체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던 말투.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보던 또렷하고도 차분한 눈동자.
윤채원의 이름 석 자를 떠올리며 9년 동안 들이부었던 독한 알코올이 무색해질 정도로, 스물두 살 때나 지금이나 참으로 당당한 그녀였다.
빵빵, 뒤차의 경적 소리에 놀란 승재가 서둘러 페달을 밟았다. 신호대기 중 기획안을 잠깐 살펴본다는 것이 그만 상념으로 빠지고 말았나 보다.
분명 다 잊었다 생각했는데, 바드득 이를 갈던 미움조차도 이제 더 이상은 남아있지 않다 자부하였는데.
“자부가 아니라 자만이었나….”
허탈한 숨이 승재의 잇새를 비집었다.
퇴근 시간과 맞물린 혼잡한 도산대로 길. 후두둑, 빗방울이 차창을 때렸다. 예보에도 없던 가을비였다.
‘더는 안 되겠어. 도저히 남자로 느껴지지가 않아. 노력해 봤는데 역시나 무리였나 봐. 미안해.’
승재의 온몸을 푹 적시던 소나기. 비릿한 풀 냄새와 운동화를 뒤덮은 젖은 흙의 습한 기운. 눈물의 짠맛. 갈기갈기 잘게 찢긴 심장의 통증.
그녀가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던 순간, 정지된 모든 감각은 치밀하게 저장되어 아직까지도 승재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더더욱.
오피스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승재는 조수석 시트 위에 놓여 있는 기획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거절하는 게 맞겠지.
언제 적 일을 가지고 여태 이러느냐, 정혁의 따가운 핀잔이 벌써부터 귓가를 쪼는 듯하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깐 얼굴을 마주한 것뿐인데도 종일 감정이 널뛰는데 어떻게 매일같이 붙어서 전시회를 준비한단 말인가. 그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아, 이제 오네. 하도 안 오길래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
우뚝, 승재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15층 복도 끝, 그의 집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 선 그녀.
헤어진 그날처럼 지금도 너는 여전히, 멋대로다.
* * *
“아, 이제 오네. 하도 안 오길래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느린 걸음으로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오는 승재를, 채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겼다.
“…여긴 어떻게 알고.”
“다행히 소중한 정보원이 한 분 계셔서.”
빌어먹을 류정혁.
가방끈을 움켜쥔 승재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너랑 따로 할 얘기 없는데.”
“이젠 존대 안 하네? 아깐 너무 깍듯하게 대하길래 좀 쫄았잖아 나.”
마치 어제 만난 친구라도 되는 양 그녀는 서슴이 없었다.
“넌 어떨지 몰라도 난 니 얼굴 보는 거 상당히 불편하거든. 전시회 관련해서 말하고 싶은 거면 다음 주 미팅 때 이어서 하기로 하고….”
“보고 싶어서….”
“뭐?”
“너 많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
채원의 말을 듣자마자, 꾹꾹 눌러 담았던 가슴 속 화기가 한꺼번에 치밀어 올랐다. 언제나 자신의 감정이 먼저인,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마음에 담아둔 말은 반드시 뱉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지긋지긋한 이기심.
“나는….”
나는 전혀 아니라고, 일분일초도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으니 귀찮게 하지 말고 그만 돌아가라 다그치려는 순간, 뚝, 뚝, 그녀의 머리칼을 따라 흘러내리는 애처로운 물방울들이 승재의 시선을 채갔다.
“꼴이 왜 그래?”
“아, 밖에 비가….”
“차 타고 왔을 거 아냐.”
“걸어왔어.”
“스튜디오부터 여기까지 걸어왔다고?”
“뭘 그렇게 놀라? 간만에 광합성도 할 겸, 나 걷는 거 원래 좋아하잖아. 중간에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망했지만, 하하….”
채원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풍덩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 * *
한 시간 전, 스튜디오K.
“강 감독님은 이제 안 오시나요?”
“오늘 촬영이 조금 바쁘셔서요, 다음 주 미팅 땐 아마 참석 가능하실 겁니다.”
승재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이후 줄곧 조 실장에게 묶여있던 채원은, 결국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다음 미팅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허탈했다. 신경전을 벌이든, 눈물을 짜든, 그와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는데.
이대로 일주일을 더 기다리기엔 하루하루가 너무도 까마득했다. 지난 한 주가 그러하였듯, 또 한 주를 아득바득 버텨낼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채원은 건물을 나서다 말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류 대표. 지금 바빠?”
호기롭게 반짝이는 그녀의 눈빛. 즉흥적으로 일을 벌일 때면 어김없이 드러나는 윤채원의 표정이었다.
「왜 또 전화야? 그 호칭은 또 뭐고.」
“미안한데, 나… 부탁 하나만 더 하자.”
「나야말로 부탁 좀 할게. 당분간 전화하지 마. 너 아니어도 신경 쓸 게 태산이라고.」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정혁을 채근하여 얻어낸 강승재의 집 주소를 휴대폰 지도에 입력한 후, 채원은 무작정 방향을 틀었다.
어디 보자. 예상 시간이… 자동차 8분, 지하철 두 정거장, 도보로는 약 30분.
그의 오피스텔은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버스가 다섯 번 정차하면 닿을 거리.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걷기에 딱 좋은, 그런 거리.
숄더백을 어깨에 단단히 고정시킨 채원은 천천히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하이힐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비록 한가로운 시골 풍경은 아니었어도, 단풍잎이 연하게 물든 초가을의 도심은 생각보단 꽤나 운치가 있었다. 그에 비해 후텁지근한 바람의 냄새.
비가 오려나….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툭, 떨어진 빗방울이 이마를 적셨다. 채원은 손바닥으로 물기를 쓸었다. 예상치 못한 날씨 변화였다. 편의점에서 일회용 우산이라도 사야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지잉, 가방 속 휴대폰이 부르르 진동했다. 엄마의 전화였다.
“응, 웬일이야?”
우산 사기를 포기한 채원은 엄마와의 통화를 이어가며 걸음에 속도를 냈다. 구름 사이를 비집은 쨍한 햇빛을 믿었던 탓도 있었다.
「딸내미 목소리 듣겠다는데 이유 있어? 그냥 생각나서 걸었지. 잘 지내? 밥은?」
“전화만 하면 매일 밥 타령. 잘 먹고, 회사도 잘 다니고, 잘 살고 있으니까 걱정 마. 엄만 별일 없어요?”
「나야 뭐….」
“진상 손님은 없고?”
「시골 찻집이 별일 있겠니, 진상이래 봤자 요 동네 주민이지.」
“청주가 무슨 시골이야, 엄마도 참….”
몇 초간 뜸을 들이던 채원이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는… 잘 계시지?”
「응, 잘 있어. 네가 안부 물어보더라고 꼭 전해줄게. 집엔 언제쯤 내려올 거야?」
“이번 달 말쯤 한번 갈게. 회사가 정신없어 요즘.”
「알아, 너 바쁜 거. 재촉하는 거 아니니까 시간 될 때 아무 때나 와. 엄마가 너 좋아하는 잡채 만들어 줄게.」
“맛있겠다, 잡채….”
채원이 말끝을 흐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잡채 소리에 갑자기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왜 이렇게 요란해? 지금 거기 비 오니?」
“어. 갑자기 쏟아지네.”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제법 굵어져 갔다. 폰 너머로까지 세찬 비바람이 느껴질 만큼.
「너 설마, 비 맞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외근 나갔다가 회사 들어가는 길이야. 엄마, 나중에 내가 다시 전화할게요. 이제 들어가야 돼서.”
「그래. 항상 몸조심하고.」
흐르는 빗줄기와 줄줄 새어 나오는 눈물을 막아낼 길이 없어, 채원은 엄마와의 통화를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감성의 빗장은 언제나 단단히 걸어놓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자칫 틈이라도 벌어지는 날엔 순식간에 불어나는 강물처럼 통제 불능 상태가 되고 마니.
젖은 구두에 뒤꿈치 살갗이 자꾸만 쓸렸다.
청승을 자발적으로 떨고 있구나.
왜 우냐 물어보면 발이 아파 그런 거라고 둘러대야지. 핑곗거리 하나를 찾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채원은 추적추적 젖은 몸을 억지로 가누었다. 그 흔한 택시조차 보이지 않아 지쳐갈 때쯤.
‘P&P 청담’
정혁이 알려준 오피스텔 건물이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친구가 15층 8호 사는데요,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연락이 와서….”
쫄딱 비를 맞은 아가씨가 파르르 입술을 떨며 사정을 설명하는데, 어느 누가 입구 문을 막고 그녀를 내치겠는가.
“우산이 없었나 보네. 자, 이걸로 대충이라도 닦아요.”
친절한 경비원이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말아 채원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때, 승재는 정체가 막 시작된 도산대로를 서행하는 중이었다.
* * *
“나 잠깐 몸 좀 녹이고 가도 돼? 비 맞았더니 추워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인지, 유리창을 뒤흔드는 장대비는 쉬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승재는 채원의 말을 무시한 채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있었지만, 비에 젖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녀를 마냥 복도에 세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감해하고 있을 무렵, 열린 현관문 틈으로 뽀르르 강아지 한 마리가 눈치도 없이 튀어나왔다.
“어머, 설마….”
울컥 목이 멘 채원이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자그마한 강아지를 담쏙 품에 안았다.
“보리야, 보리 맞지? 여기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누나 기억해? 이젠 누나도 아니겠다. 벌써 열 살 가까이 됐으니 할아버지네. 그동안 잘 지냈어? 아픈 덴 없고?”
“손대지 마.”
승재가 나지막한 경고와 함께 그녀의 품에서 강아지를 채갔다. 복슬복슬 솜뭉치처럼 굴러다니는 초코색 푸들이 채원을 향해 낑낑 울며 버둥댔다.
배은망덕한 녀석. 여태껏 유기농 사료만 먹이며 키워줬더니….
9년 만에 나타난 채원의 앞에서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는 보리가 오늘따라 얄밉게만 느껴진다.
“왜 그렇게 정색이야? 보리랑 인사 좀 하겠다는데.”
깜짝 놀라 손을 뗀 채원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승재를 쏘아보았다.
“멋대로 버릴 땐 언제고. 뭔데? 이제 와서….”
“강승재.”
“내 이름….”
보리를 케이지 안으로 들여놓은 승재가 채원의 말을 잘라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부르지도 말고. 우리 편하게 말 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 아니잖아 이제. 공적으로 얽히게 된 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의 선은 지켜줬으면 한다.”
승재는 분명 채원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무채색으로 가라앉은 눈동자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미안해.”
또렷이 울리는 세 글자가 또박또박 승재의 귀에 박힌다. 잔잔하던 가슴이 심히 일렁거렸다.
“이 말 하려고 온 거야.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늦었단 거 아는데, 오늘보다 더 늦으면 안 될 거 같아서…. 9년 전 일, 지금 다시 들먹이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내내 맘에 걸렸어. 진짜야. 단 하루도 편히 지낸 적 없….”
승재의 억센 입술이 채원에게로 겹쳐졌다.
그녀의 꼴 같지 않은 사과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을 뿐, 미련이 담긴 키스는 아니었다.
* * *
우악스럽게 혀를 들이미는 중에도 절대로 치아가 닿지 않는 노련함.
“으음….”
9년이란 시간 동안 과연 몇 명의 여자가 이 남자 입술을 맛보았을까.
치졸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의 키스는 더 이상 스물다섯 풋내기의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천천히….”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어른이 된 강승재를, 성난 짐승의 뜨거운 열기를, 조금만 더 천천히, 그리고 깊이….
풍성한 속눈썹을 파르르 내린 채원이 한가로운 단꿈에 젖어 들 때쯤.
“헤어진 사람 다시 찾는 이유는 하나뿐이라던데.”
산통을 깨는 남자의 빈정거림이 냉랭하게 깔렸다.
“너도 역시 그런 건가?”
“하아…. 뭐?”
“욕구불만, 뭐 그런 거냐고. 오랜만에 내 얼굴 보니까 갑자기 꼴렸어? 그래서 집까지 찾아온 거야?”
가시 돋친 말과 함께 여린 목선을 감정 없이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냐 그런 거.”
탁, 채원이 정색하며 승재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럼 뭔데.”
“아까 말했잖아. 더 늦기 전에 사과하고 싶어서….”
“거짓말도 참 성의 없이 하네. 너 그 정도로 남 배려하고 사는 애 아니잖아.”
열띤 입술과는 달리, 승재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사람 진심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9년 만에 생뚱맞게 나타나서는 태연하게 콜라보 제안이라니, 그러면서 뭐? 하루도 편히 지낸 적이 없어? 나더러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못 믿을 건 또 뭔데! 그리고 나 아까 스튜디오에서… 절대로 태연하지 않았어. 태연한 척했던 거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누구더러 함부로 지껄인다는 거야…. 아쉬워서, 급해서 찾아온 거 맞잖아. 이용해 먹기 딱 좋은 물러터진 강승재가 스튜디오 차렸단 소식에, 아 잘됐다, 이놈 등에 빨대 한번 꽂으면 되겠네. 뻔뻔하게 머리 굴려 가면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위태로운 정적이 둘 사이의 공기를 갈랐다.
“…….”
채원은 승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승재는 그런 그녀를 의도적으로 응시하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었다.
케케묵은 옛날 감정 따윈 털어내 버린 지 오래라고.
서로의 입술이 닿을 때도, 이렇게 한 뼘 거리에서 너의 숨결이 느껴질 때에도,
난 아무렇지 않아. 그 어떤 떨림도 이제 더는 없으니까….
“윤채원.”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승재가 별안간 채원의 손목을 낚아챘다.
“앗, 왜 이래? 아파….”
“너, 아직도 이 버릇 못 고쳤어?”
차갑던 그의 눈동자가 이번에는 매섭게 변해갔다.
있는 힘을 다해 버둥거려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자의 강한 악력을 뿌리쳐보겠다는 생각은, 낑낑거리며 케이지를 탈출하려는 보리의 야망만큼이나 헛된 짓거리였다.
“아프다니까…. 이 손 놓으라고!”
막무가내로 채원의 팔을 젖힌 승재는, 그녀의 새하얀 손목에 너덜거리고 있는 드레싱 밴드를 거칠게 떼어냈다.
“읏.”
여린 피부 위에 새겨진 울긋불긋한 생채기와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자국들.
“도대체 9년 동안….”
그 상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승재의 음색이,
“얼마나 막살았던 거야 너.”
먹먹하게 가라앉았다.
“…….”
채원은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아프지 않은 척하는 것보다, 슬프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이 훨씬 더 버거웠다.
“…고쳐준다며.”
상처를 숨길 수 없었기에 오히려 당당해져야만 했다.
“9년 전에 약속했잖아. 내 버릇… 고쳐주겠다고.”
그녀가 꼿꼿이 얼굴을 들어 승재를 바라보았을 때, 남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처음으로 알아챘다.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약속 지켜줘. 그땐 결국 실패했지만, 지금은 감정 섞인 상태도 아니니 수월할 거 아냐.”
“뭐?”
“내 몸에, 상처 내달라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정신 안 차릴래?”
버럭 내지르는 승재의 고성에도 채원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방법보단 그를 자극하는 편이 차라리 쉬워 보였다.
그녀는 승재의 속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단어, 어떤 문장들을 못 견뎌 하는지,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이 남자의 이성을 끊어낼 수 있는지, 예를 들면 그런 것들.
“왜, 여전히 못 해주겠어?”
“그만하자, 이런 얘기.”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신경 쓰고 걱정하는 건데!”
“누가 걱정을 했다고…. 그냥 상처가 보이길래 물어본 것뿐이야. 나이 서른 넘도록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렸나 갑갑하고 한심해서!”
“일종의 미련이야 그거.”
“멋대로 판단하지 마라. 너한테 미련 같은 거 없으니까.”
승재의 목소리가 짙게 깔렸을 때,
“그럼 해줘, 나 대신.”
채원이 했던 말을 반복하며 한 번 더 그를 보챘다.
“내가 강승재 찾아온 이유, 사실 이것 때문이었어.”
“완전히 미쳤구나.”
어처구니없다는 듯, 승재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아주 멀쩡해. 머리도 맑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내가 볼 땐 너 제정신 아냐. 상담을 받아보든, 병원을 가보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오늘은 돌아가 그만. 택시 불러줄 테니까.”
승재는 휴대폰을 찾기 위해 재킷 주머니를 뒤적였다. 엉킨 머릿속이 일순간 폭발할 것만 같아 더 이상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었다.
“하나도 안 변했다 정말.”
“뭐?”
“9년 전이나 지금이나, 강승재 겁 많은 건 여전….”
“네 멋대로!”
승재가 버럭 채원의 문장을 끊었다.
“이름 부르지 말라고.”
일촉즉발의 순간.
“됐어, 내키지 않음 하지 마. 너한테 구걸할 정도로 아쉬운 상황 아니니까. 갑자기 센티해져서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뭐, 주변에 남자가 너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채원은 노골적인 비아냥을 날리며, 마지막 남은 승재의 제어 핀을 기어이 뽑아버렸다.
“넌… 내가 그렇게 만만해? 그래?”
읏,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채원의 가벼운 몸이 소파 쪽으로 훌쩍 엎어졌다.
커다란 손바닥에 짓눌린 등.
갑작스러운 남자의 행동에 목 언저리 맥박이 빠르게 뛰어올랐다.
“소원이라면, 들어줄게 내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승재가 손목시계를 거칠게 끌러 테이블 위로 던졌다. 찰캉거리는 메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엔 조금 더 묵직한 쇳소리가 채원의 귀를 울렸다.
“똑바로 엎드려. 제대로 해줄 테니까.”
철커덕, 버클이 풀리는 소리. 팽팽히 당겨진 가죽 벨트의 탄성.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볼 겨를도 없이,
짜악!
“흡….”
채원의 허벅지에 곧 얼얼한 통증이 일었다.
“잠깐만, 승….”
“고개 돌리지 마. 움직이지도 말고, 다친다.”
짝!
“하윽….”
반으로 접힌 투박한 벨트가 인정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콱 깨문 아랫입술에선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아파서가 아니었다. 폐부 깊숙이 스며든 강승재의 체향에, 심장을 감싸는 뜨겁고 시린 무언가 때문에, 자꾸만 목이 메어왔다.
그는 비명을 지를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강줄기처럼 뻗어난 푸른 핏줄이 툭 불거진 손등. 절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았지만 180cm가 넘는 남자가 휘두르는 가죽 스트랩의 강도는, 채원이 감당하기에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다.
“흐윽… 그만….”
다섯 번의 작열감이 엉덩이와 허벅지를 물들일 무렵 채원이 털썩, 두 무릎을 꺾었다.
“일어나.”
“아파….”
“일어나서 자세 잡으라고!”
승재가 주저앉은 채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네가 원해서 시작한 거지만, 끝내는 타이밍은 내가 정해. 자세 잡아 당장.”
승재는 놀라울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었다. 거대한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들쭉날쭉하던 감정선이 통째로 사그라진 느낌이었다.
엉망으로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훔쳐낸 채원이 바들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더 이상의 대꾸나 반항은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내가 먼저 시작한 게임이었고, 강승재에게 이런 모진 역할을 떠넘긴 책임 또한 나에게 있었으니.
“스커트 올려.”
그의 요구에 따른 채원이 느릿한 동작으로 치마를 들어 올렸을 때.
“윤채원 너 정말….”
절망 섞인 중얼거림과 함께 승재의 손에 들려있던 가죽 벨트가 툭, 바닥으로 떨구어졌다.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반창고. 손목에 그어진 상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채원의 새하얀 허벅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어지러운 자국들.
“강승재.”
여전히 허리를 숙인 상태로, 그녀가 승재의 이름을 읊조렸다.
“자꾸 이름 불러서 미안한데….”
그의 얼굴을 보면 또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뒤를 돌아보진 못했다.
“나 너랑 자고 싶어.”
후두둑 창을 치는 세찬 빗소리가, 낑낑대는 보리의 칭얼거림이 고마웠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말들.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너랑….”
읏, 문장 끝에 터진 짧은 탄성.
승재가 채원의 속옷을 거칠게 끌어 내렸다.
탄탄한 가슴이 가녀린 등허리를 짓눌렀고, 탁, 동시에 거실등이 암전되었다.
지저분하게 얼룩진 그녀의 상처들이 캄캄한 암흑 속에 온전히 파묻히자, 비로소 안정이 찾아왔다.
* * *
밤새 내리던 비는 다행히 그쳐 있었다.
“호밀 샌드위치 두 개,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 테이크아웃이요.”
“커피는 캐리어에 담아드릴까요?”
“네. 아, 그리고 커피 한 잔은 샷 추가해주세요.”
승재의 오피스텔 근처에서 아담한 베이커리집을 발견한 채원은 간단한 아침거리를 포장해가는 중이었다.
그가 깨어나기 전 가방을 챙겨 나오는 것이 여러모로 깔끔할 듯하였으나,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식탁에 앉아 함께 아침을 먹으며 밋밋한 대화라도 몇 마디 더 나누고 싶다는 욕심. 벌어진 틈을 메꾸려면 단 몇 분의 찰나라도 절실했다.
9년 만의 섹스. 이렇다 할 전희조차 없던 건조한 행위였지만, 채원은 예상치 못한 오르가슴을 느꼈다. 참 황당한 일이었다.
허벅지와 엉덩이에 남은 통증과는 별개로 머릿속이 묘하게 맑아진 기분이다. 겨우 몇 대 맞은 것이 전부였으나 승재가 휘두른 매서운 손길은 묵직한 통증으로 남아 그녀의 불안을 대체해주고 있었다.
정말 변태라도 되어버린 건가.
서른넷의 강승재는 채원에게 9년 전과는 전혀 다른 떨림을 안겨주었다. 쓰라린 이별 후유증, 십 년 넘게 버텨온 고된 미국 생활, 오랜 노력 끝에 얻은 유명세, 그리고 부. 승재의 성장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를 볼 때면 언제나 질투가 났다.
경제적으로 크게 넉넉지는 않아도, 화목한 가정에서 바른 교육을 받고 자란 남자. 그래서인지 긍정적인 에너지가 항상 넘쳐났던 것도. 북적이는 친구들, 확고한 목표, 모나지 않은 성격, 은근한 승부 근성까지.
채원이 비탄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을 때마다 승재는 진심을 다해 그녀를 위로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욱 배배 꼬이고 비뚤어지기 일쑤였다.
스물두 살의 치기 어린 질투. 아무리 연인 사이라 해도 그는 내가 될 수 없었으니까.
‘대체 왜 그러는데? 말을 해줘야 알지. 그렇게 입 꾹 닫고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잖아. 응? 채원아 제발….’
답답했겠지 너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나도 갑갑하고 숨 막혔어.
알록달록 칠해진 물감을 시커먼 먹물로 망쳐놓을 것 같아서. 많은 부분이 결핍된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때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을 너를 발견하게 될까 봐, 두렵고 무서워서 나는….
“주문하신 샌드위치와 커피 나왔습니다. 음료 뜨거우니 조심히 들고 가세요.”
채원을 부르는 카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포장백과 커피가 담긴 캐리어를 양손에 들고 조심조심 걸음을 걸었다.
언제쯤 그가 다시 마음을 열어줄지 알 길이 없었지만 더 이상 과한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그냥 니 얼굴 보면서 따뜻한 커피 한 잔만 마시고 갈게. 그 정도는 봐 줄 수 있잖아. 대신 쓸데없는 말로 니 신경 긁는 짓은 피해 볼 테니.
아침 햇살이 좋았다. 폭 팬 보도블록 사이 고인 빗물도. 머리칼을 흩트리는 선선한 바람도.
* * *
“일어났어?”
“…….”
부스스한 차림으로 침실 문을 열고 나온 승재는 뜻밖의 아침 인사에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식탁 앞에 앉은 채원이 보였다. 분명 가버린 줄 알았는데.
“오피스텔 건너편에 꽤 괜찮은 베이커리숍 발견했거든. 알고 있었어? 기대 안 하고 사 왔는데 맛있네. 너도 먹어 봐. 여기, 샌드위치랑 커피…. 아메리카노 샷 추가 맞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승재의 표정을 못 본 척 넘긴 채원은, 포장해 온 요깃거리를 식탁 위에 펼쳐 놓고 재잘재잘 입을 놀렸다.
“가.”
“…응?”
“아침이잖아. 가라고 이제.”
허스키한 남자의 음성이 느릿하게 공기를 갈랐다. 반기지 않을 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벌레 보듯 대놓고 인상을 구기는 상대 앞에서 태연함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채원은 해맑게 꼬리를 흔들고 있는 보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형이 자꾸 누나 내쫓는다, 보리야. 식사 중엔 원래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그치?”
“시간 끌지 말고, 얼른 가라고.”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샌드위치와 커피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승재는 다시 한번 채원을 재촉했다.
빈정거리는 어투도, 분노에 찬 음색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피로해 보였다. 모든 게 귀찮다는 표정. 해묵은 논쟁을 재차 시작하는 것도 이젠 지겹다는 얼굴빛.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나았다. 무관심이 깔린 승재의 눈동자는 더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알았어, 간다 가.”
순간 열이 오른 채원은 샌드위치를 먹다 말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어젯밤 이후, 그가 조금은 달라져 있을 줄 알았다. 겨우 섹스 한 번에 9년 치의 분노가 푸시시 사라질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도, 최소한 모닝커피 정도는 내어주겠거니 했는데….
“왜 이렇게 냉정해. 류정혁이랑 너무 오래 붙어 있어서 그런가, 까칠한 성격까지 옮았나 봐.”
슬쩍 시비를 걸어 봐도 묵묵부답 대꾸조차 없는 강승재. 그에게 이토록 차가운 구석이 있었던가. 샐쭉거리며 구두를 신었지만, 현관까지의 거리는 또 왜 이리 까마득한지. 채원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고 망설였다.
“나… 다시 와도 돼?”
보리가 채원의 발목에 엉기며 끙끙거렸다.
“안 돼.”
“마음 없단 거 알아 나한테.”
“…….”
“사과 받아줄 생각 없단 것도….”
“…….”
“또 올게.”
“안 된다고 내가 분명….”
“헤어진 연인이 다시 찾아오는 이유, 하나뿐이라며.”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어제, 간만에 개운하게 잤거든. 너무 오래 참았었나 봐.”
영영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던진 무리수.
“그러니까….”
하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을 더해갈수록 절망적으로 일그러지는 승재의 표정을 보았을 때.
“새로운 사람 만날 때까지 부탁 좀 할게.”
그녀의 선택은 차악이 아닌 최악이었음을 깨달았다.
“내 성향 숨길 필요 없으니 편하고, 무엇보다 안전하기도 하고…. 승재 씨도 요즘 만나는 여자 없잖아. 나에 대해 쌓인 감정, 이렇게라도 풀면서 털어 내. 서로 마음의 짐도 덜고, 피차 좋을 거 같은데.”
“윤채원!”
이제 앞으로는 너를 절대 강승재라 부를 수 없겠지.
“나 간다.”
채원이 빠른 속도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아, 그리고… 콜라보 건은 수락해 줄 거라 믿을게. 지금 엎어지면 회사에서 내 입장이 매우 곤란해지거든. 승재 씨 입장에서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재능기부나 자선 행사 몇 번 진행하면 브랜드 이미지 확 올라가니까. 암튼 긍정적으로 검토 좀 해줘.”
분명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작스레 목이 메었다.
“그럼 쉬어.”
황급히 인사를 마친 채원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쾅, 현관문을 닫았다.
3층에 멈춰 서있는 엘리베이터가 15층까지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을 자신이 없어, 그녀는 무작정 비상구 계단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래도 침착하게, 차분하게, 할 말 다 하고 나왔잖아. 나쁘지 않았어, 윤채원. 아주 쪽팔릴 정도는 아니었다고.
참고 참았던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 * *
승재는 채원이 나간 현관 쪽을 멍하니 응시한 채 서 있었다.
아주 그리운 악몽을 꾼 듯했다.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나는 날이 오더라도 절대로 흔들리지 말자 다짐하였던 지난 9년간의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어제오늘 승재의 심장은 제 것이 아닌 것처럼 펄떡거렸다.
생채기로 지저분하게 장식된 채원의 팔과 허벅지를 보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녀에게 고통을 가하고, 그녀를 우악스럽게 안았다.
하지만 작고 약한 짐승과 같이 신음하는 중에도 그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왜 상처를 낸 것인지, 왜 또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었는지.
‘그럼 쉬어.’
짧게 인사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는 윤채원은 짜증 날 정도로 유약해 보였다. 그녀는 언제나 강한 듯 굴었지만, 스물두 살 때나 지금이나 위태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살갗이 벗겨진 뒤꿈치가 내내 거슬렸다. 아물어 가는 다른 상처들과 달리, 발갛게 피가 맺힌 그 자국은 고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뻣뻣한 구두 재질과 어제 내린 소나기 탓이겠지.
신경 끄자.
‘일종의 미련이야 그거.’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녀의 목소리가 주기적으로 승재를 괴롭히고 있었다.
“씨발, 그만 좀!”
탁, 승재가 거칠게 휘두른 손에 채원이 남기고 간 샌드위치와 커피가 테이블 아래로 떨어졌다.
진한 커피색의 아메리카노가 새하얀 대리석을 적셨다. 참깨가 박힌 호밀빵, 붉은 토마토, 치즈, 로메인, 햄 등이 힘없이 널브러진 채 바닥 위를 뒹굴었다.
일순간 선명해지는 9년 전의 기억.
갑갑한 체증이 승재의 가슴 한가운데를 무지근히 짓눌렀다. 그 어떤 약을 써도 차도가 없는, 지긋지긋한 만성 위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