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14화
본문
13. 햇빛
수목원에서 집 방향으로 운전하는 차 안, 서희는 여러 차례 무의식적인 한숨을 작게 토해 냈다.
‘당분간 네 얼굴 안 보고 싶어.’
‘서희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안 본다는 말만 하지 마. 차라리 화 풀릴 때까지…….’
‘너 보고 있는 동안 화가 안 풀릴 거 같아서 그래. 지금도 너무 비참하고 자존심 상해. 넌 날 위해서였다지만 틀렸어. 채아가 그런 애인 거 알자마자 나한테 전부 알려 줬어야 했어. 난 그 1년 동안 채아한테도 기만당하고 너한테도 기만당했던 거야.’
‘서희야…….’
‘너 말고는 친구 없었던 불쌍한 애가 겨우 친구 사귀어서 좋아하는 모습 보니 딱해서 도무지 사실대로 말이 안 나왔니? 불쌍한 애 위하는 마음으로 채아랑 1년 가까이 연애까지 해 줬던 거야?’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네가 왜 불쌍해. 난 단 한 번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해 놓고 속였으면서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야?’
서희는 힘없는 미소를 떨어트리며 은호에게 말했다.
‘부탁이야. 당분간 연락도 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마. 마음 정리되는 대로 내가 먼저 연락할 테니까.’
그렇게 차갑게 은호를 외면한 지 열흘 정도 흘렀다.
처음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끝도 없이 화가 치밀었다. 은호와 잘해 보기 위한 마음으로 저에게 거짓으로 웃어 줬을 채아가 너무 미웠고, 저를 위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사귀었던 은호도 보기 싫었다.
무척 소중하게 여겼던 두 친구였다. 특히 채아에겐 양 갈래 감정이 남아 있었다. 은호의 유일한 연인이라는 사실에 부러움과 질투를 느끼기도 했고, 짧은 인사도 없이 그녀와 연락을 끊었던 게 미안함으로 남기도 했다.
그랬는데 죄책감을 느낄 필요조차 없었던 거다. 오로지 강은호 때문에 저에게 접근하고 제 곁에 있었을 신채아는 단 한 순간도 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인간일 뿐.
자신이 얼마나 덜떨어진 애처럼 보였으면 그랬을까. 신채아는 적당히 웃어 주며 저를 이용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고, 강은호는 지켜 주고 위해 준다는 명목으로 저를 한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채아와는 인연이 끊긴 지 오래니 그녀를 향한 분노는 금세 사그라졌지만 연인으로 곁에 있게 된 은호를 향한 화는 크게 들끓었다. 며칠 동안 그를 생각하면 속이 답답하게 짓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나고 점차 차분한 감정이 돌아올수록 은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를 유별나게 걱정하고 신경 쓰던 은호였으니까.
그때도 오롯이 그녀를 위한다는 생각에 그랬을 것이다. 잘못된 선택이긴 했지만.
사실 은호에게 화가 난 이유는 자신을 속여서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비록 그녀를 위한 마음이었겠지만 채아와 사귀었던 그 일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는지 은호는 알고 있을까. 서희는 은호와 채아의 관계로 오랫동안 괴로웠던 만큼 지금에서야 드러난 사실에 더욱 화가 치민 거였다.
‘그래도 너무 심하게 말했나.’
은호와 싸운 지 열흘에 가까워진 지금, 서희는 슬금슬금 미안한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평소에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은호는 그녀의 싸늘한 외면에 무척 놀라고 불안했을 것이다. 장난감이었냐는 말을 하면서 화를 냈을 때도 거의 정신을 잃을 것처럼 두려움 가득한 눈동자였으니.
차에서 내린 서희는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열쇠로 문을 열려다가 우편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정신이 없어서 우편함 확인을 계속 못 하고 있었다. 우편함을 열어 안에 든 내용물들을 꺼낸 서희는 깜짝 놀랐다.
고지서만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알록달록 예쁜 색깔의 편지 봉투들이 열 개쯤 되는 것 같았다. 안을 확인하지 않아도 보자마자 누가 보냈을지 예상이 됐다. 앞을 훑어보니 역시나 ‘강은호’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전화도 문자도 하지 말라고 했더니 며칠 동안 내내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고 갔던 모양이다. 요즘 초등학생들도 하지 않을 깜찍한 짓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나왔다.
“뭐야, 강은호…….”
사랑스러운 연인이 놓고 간 편지들을 전부 가지고 집에 들어온 서희는 소파에 앉았다. 외투도 벗지 않고 바로 편지를 하나 뜯었다.
차례차례 남은 편지들을 읽어 나가는 서희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편지지마다 말린 꽃과 잎이 조심스럽게 붙어 있었다. 갸륵한 정성을 헤아려서 어서 마음을 풀어 달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마지막 편지까지 전부 읽은 서희는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를 보고 싶은 감정이 울컥울컥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더 생각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애틋한 마음을 굳이 참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 *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평창동에 도착한 서희는 은호의 집 앞에 차를 댔다.
[집 앞인데, 잠깐 나와 줄 수 있어?]
문자를 전송한 후 운전석에서 내렸다. 답장은 바로 오지 않았다.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급한 발걸음이 대문에 가까워졌다.
“김서희!”
겉옷도 입지 않고 얇은 홈웨어 차림으로 달려 나온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저를 찾아온 그녀가 믿기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제야 온 그녀를 살짝 원망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이렇게 나오면 어떡해. 춥겠다.”
서희의 다정한 목소리에 은호는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덥석 그녀를 끌어안았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마음 풀릴 때까지 때리지. 어떻게 안 본다는 벌을 줘. 나 너 못 보면 진짜 힘들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안 넘어가는 거 알잖아.”
“이번에도 그랬어?”
“당연하지. 집에 들어가서 물어봐. 증명해 줄 사람 많아.”
그녀가 그의 팔을 풀고 한 걸음 떨어져 안색을 확인했다. 확실히 마지막으로 봤던 날에 비해 얼굴이 여윈 것도 같았다. 그녀의 눈망울이 떨리자 그는 더욱 처연한 분위기를 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이제 아무리 화나도 나 안 본다는 말은 하지 마.”
안 그래도 그녀는 그에게 한없이 약한데, 작정하고 동정심과 미안함을 끌어내고자 저렇게 촉촉하고 가련한 눈빛을 쏘아 대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애초에 잠시 만나지 말자고 한 것도 그가 곁에 딱 붙어서 살랑거리며 사과하고 애원하면 제대로 화도 낼 수 없을 스스로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럴게. 미안해.”
서희는 어쩐지 자신이 사과하고 있는 상황이 의문스러웠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편지 방금 다 읽고 오는 길이야. 계속 모르고 있다가 오늘 봤거든.”
“편지 보고 화 풀린 거야?”
“사실 며칠 전부터 화해하고 싶었는데, 내가 그날 너무 화냈던 거 생각하니까 조금 어색해서 망설여졌어.”
서희는 은호의 뺨을 살며시 매만졌다.
“네가 날 속여서 화난 것도 있는데, 그동안 너랑 채아 둘이 사귀었던 것 때문에 마음고생 되게 많이 했거든. 그래서 더…… 그 고생했던 마음이 뭔가 억울하고, 어이없고, 그러다가 더 화가 나고 그랬어.”
“지금은 다 용서해 준 거지?”
“잘못했다고 생각하긴 해?”
“사실…… 그동안은 별로 잘못했다는 생각 없었는데 네가 그날 그랬잖아. 입장 바꿔서 네가 나를 위한다는 이유로 내 친구와 사귀었으면 어땠을 거 같냐고. 그 말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어. 나는 어떤 이유든 네가 다른 남자 만나는 거 끔찍하게 싫어.”
서희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어떤 이유든, 설령 나를 위한 거였다고 해도, 네가 나 아닌 다른 여자 만나는 거 못 견디게 싫어, 은호야.”
그 말을 끝으로 그가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며 입술을 겹쳤다.
* * *
부엌에서 나는 자잘한 소음을 들으며 서희는 잠에서 깼다.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부지런한 은호가 벌써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서희는 벽시계를 확인하고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아…….”
희미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밤새 은호에게 혹사당한 몸이 찌뿌둥했다. 서희는 새 속옷과 옷을 꺼내 입고는 방을 나왔다.
“일어났어?”
“응. 넌 언제…….”
부엌에 들어선 서희는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섰다. 조리대 앞에 서 있는 은호의 뒷모습이 그녀의 동공에 가득 박혔다.
“아침 간단하게 만들고 있어.”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린 그녀와 달리 여상한 말투였다.
“너, 너, 그거…… 뭐야?”
“응? 뭐가?”
“옷을 왜…… 안 입고…….”
‘알몸으로 앞치마만 걸치고 있는 건데?’라는 단순 명료한 질문을 깔끔하게 말할 수 없었다. 너무 당황한 탓에.
“아. 옷 입는 걸 깜빡했어.”
은호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서희는 말문이 턱 막혔다. 깜빡할 게 따로 있지. 아니, 정말 깜빡했을 리가 없다.
“옷 입는 건 까먹고 앞치마 하는 건 안 까먹었어?”
그의 모순을 지적하는 물음에도 뻔뻔한 강은호는 끄떡없다.
“기름 쓰다가 피부에 튀면 위험하잖아.”
“…….”
“앉아 있어. 거의 다 됐어.”
서희는 식탁 앞에 앉아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맨몸에 남색 앞치마만 두른 탓에 넓은 등이 훤히 보였다.
물론 그녀의 눈길은 근육이 박힌 날갯죽지 쪽보다 아래에 가 있었다. 탄탄하게 솟은 엉덩이가 그녀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은호의 맨엉덩이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사랑을 나누며 두 다리로 그의 엉덩이를 감싼 적도 많았고, 말랑한 제 것과 달리 딱딱한 엉덩이가 신기해서 손가락으로 찔러 보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쓸어 보기도 했다.
이미 그녀에겐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그의 몸 일부분인데 왜 이렇게 야릇한 마음이 들까. 완전한 알몸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의뭉하게 유혹하듯 앞치마만 두르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시각적으로 상당히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그것도 다른 평범한 남자가 아닌 강은호다. 헐벗은 몸에 앞치마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긴커녕 화보에 나오는 모델처럼 섹시하고 근사했다.
그가 요리하며 팔을 쓸 때마다 너른 어깨와 단단한 팔뚝을 세심히 바라보고, 그가 냉장고로 걸어갔다가 다시 조리대로 돌아오면서 함께 움직이는 갈라진 허벅지와 엉덩이를 홀린 듯 응시했다. 스스로 변태가 된 기분을 느꼈지만 그가 작정하고 벌이는 유혹에 아침부터 음심이 치솟았다.
“다 됐다. 배고프지? 얼른 먹어.”
은호가 다가와서 샌드위치를 담은 큰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서희가 좋아하는 재료가 듬뿍 들어가 있었다. 접시 옆에는 토마토와 다른 야채들을 함께 갈아 넣은 시원한 주스가 놓였다.
음식을 전부 나른 은호는 맞은편이 아닌 서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공복에 배가 꽤 고픈 데다가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바로 앞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옆에 앉은 그가 훨씬 커다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며 그를 연신 힐끔댔다.
“왜 자꾸 훔쳐봐?”
그는 뻔히 다 알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표정을 짓는다.
“이상하게…… 입고 있으니까.”
아니, 이상하게 안 입고 있다고 해야 하나.
“이상하긴. 하나도 안 이상한데?”
“그렇게 입으면…… 이제 내가 그 앞치마를 어떻게 써.”
“왜 못 쓰는데?”
은호가 시치미를 뚝 떼며 묻는다. 그런 그가 얄궂어서 서희는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을 반대편으로 살짝 돌린 채 샌드위치를 크게 물었다.
“응? 이 앞치마를 왜 못 써?”
“…….”
“내 거가 여기 이렇게 닿아서 그래?”
눈길을 다시 돌리자 은호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는 앞치마 위로 윤곽이 드러난 물건을 손으로 쥐었다. 페니스를 앞치마 천으로 감싼 채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서희의 얼굴이 식탁에 놓인 토마토 주스 색깔과 비슷해졌다.
“앞치마에 내 거가 이렇게 문질러져서, 그래서 이거 입으면 막 야한 기분 들 것 같아? 응?”
“으, 은호야.”
“이 앞치마 입고 내가 이렇게 비벼 놓은 거 떠올릴 때마다 서희도 젖겠지?”
은호가 자위하듯 눈을 야하게 내리뜬 채 성기를 길게 쓸었다. 그녀의 앞치마 천을 이용해서.
서희는 아침부터 야해 빠진 은호에게서 가까스로 시선을 돌린 뒤 황급히 주스를 마셨다. 목이 탔다.
“다 먹었어?”
눈빛이 변한 은호가 냉큼 앞치마를 벗어 던졌다.
“서희야, 샌드위치 다 먹었으면 이제 아래로 이것도 먹자. 봐, 맛있겠지?”
은호가 서희의 허리를 감싸고는 옆구리 부근을 살살 간지럽히듯 쓸며 물었다. 서희의 불긋한 눈가가 어쩔 도리 없이 다시 그의 하반신으로 내려갔다. 크게 부풀어 오른 페니스가 그녀를 향해 우뚝 솟은 채 힘차게 꺼떡거렸다.
“어때? 샌드위치보다 더 먹음직스럽지?”
“강은호, 너 진짜…….”
“내 거 아직 안 먹을 거야? 그럼 내가 먼저 먹어야겠다.”
은호는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그녀의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쭉 내려 벗겼다. 순식간에 아래가 다 드러난 서희가 다리를 모으려 했으나 그의 손힘에 저지되었다. 그녀의 다리를 양옆으로 벌린 그가 예민해진 클리토리스를 바로 찾아 손가락으로 짓궂게 꾸욱 눌러 댔다.
“으응…….”
뭉근한 자극에 그녀는 식탁을 손으로 붙잡은 채 무너지려는 몸을 버텼다.
“벌써 많이 젖었네.”
그는 흠뻑 젖은 구멍에 손가락을 쑥 넣어 빙글빙글 돌렸다. 질퍽질퍽 젖은 소리가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커졌다.
“……은호야.”
애원하는 듯한 그녀의 음성에 그가 손가락을 빼고 이번엔 입술을 음부에 눌렀다. 음핵을 빨아 당기는 감각에 등줄기가 찌릿하고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아, 읏…….”
“서희 너, 아침에 싸는 게 밤에 싼 거보다 더 단 거 같아. 아닌가? 밤에 쌀 때가 더 단가?”
“그런 말……, 하지 마.”
“맛있어서 그래. 너무 달고 맛있어서.”
성에 찰 때까지 그녀를 맛보던 그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한계 직전에 다다른 성기가 그의 움직임과 함께 묵직하게 흔들거렸다.
“이제 내 것도 먹을까? 먹여 달라고 자꾸 질질 흘리잖아.”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음탕한 말을 속삭인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식탁 끝을 잡고 선 그녀의 엉덩이로 그의 페니스가 가까워졌다. 촉촉한 질구에 귀두가 질척하게 문질러졌다.
“흐읏!”
사정없이 뚫고 들어오기 시작한 그의 성기는 존재감이 무시무시했다. 그녀는 허물어지려는 다리에 바짝 힘을 주었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버거운 이물감에 눈앞이 어찔했다.
끝없이 밀고 들어오던 페니스가 이윽고 벽에 가로막혔다. 그녀는 담뿍 물고 있는 그의 것을 본능처럼 쥐어짰다. 좁고 촘촘한 질벽에 갇힌 채 힘껏 눌리기까지 하자 그는 사나운 신음을 토해 냈다.
“하, 서희야. 왜 그래. 나 죽이려고 그래?”
“은호야…….”
가슴을 부드럽게 쥐고 어루만지는 손길에 그녀는 서서히 힘이 풀렸다. 그가 그녀의 귓가에 뜨겁고 진한 한숨을 쉬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 먹네, 우리 서희. 그렇게 맛있어?”
그녀는 그의 물건을 힘겹게 받아들이기가 무섭게 곧바로 적응했다. 빠르게 왕복하는 그의 것이 들어설 때마다 그를 꽉 조였다. 알몸에 앞치마만 두르고 유혹했던 것의 효과가 꽤 대단하다는 것을 그도 그녀도 전신으로 느끼고 있었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그가 허리를 쳐 댔다. 그녀가 기대고 있는 식탁이 부서질 듯 덜컹거렸다.
“응? 서희야. 내 거 맛있어, 안 맛있어?”
그가 허리를 느긋하게 빼며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감질나는 움직임에 서희는 숨을 할딱이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마, 맛있어.”
“얼마나?”
“세상에서…… 제일.”
그녀의 대답에 만족한 그가 귀두만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자세에서 허리를 쑥 밀었다.
“으응!”
“세상에서 제일 맛있으면, 평생 내 것만 먹을 거지?”
귀두가 깊은 곳을 쿡쿡 쑤셔 대자 그녀가 끊어질 듯한 교성을 내질렀다. 등을 찌르는 전율감에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가 더욱 격렬하고 빠르게 드나들수록 그를 받아들이는 속살이 욱신욱신 경련했다. 그녀는 얼마 더 버티지 못하고 결국 먼저 정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 * *
아침부터 진을 다 빼고 집을 나선 탓에 서희는 거의 매일같이 걷는 전나무 숲 초입에 들어섰을 뿐인데도 기운이 벌써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마음만은 들뜨고 즐거웠다. 옆에 은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이 같이 여기 걷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은호가 회사에 취직한 이후로 그녀가 일하는 수목원에서 같이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주말 외엔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바빠졌고, 그녀도 주중 내내 출근하는 곳에 굳이 주말까지 투자해서 그를 데려올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문득 함께 오고 싶었다. 어느새 혼란했던 가을과 친구에서 연인이 되어 한층 따스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들뜨기 시작한 숲길을 그와 함께 거닐고 싶었다.
“참, 은호야.”
“응?”
“나 며칠 전에 어머니하고 식사한다고 했잖아.”
서희의 손을 잡은 은호가 왠지 모르게 실실 웃었다.
“왜 웃어?”
“되게 자연스러워서. 어머니라는 호칭.”
“아…….”
서희가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였다.
은호와 사귀게 된 후 그의 집에 몇 번 초대되어 가기도 했고, 특히 경진과는 따로 만나 식사 자리를 자주 가졌다. 어머니라고 불러 달라는 경진의 말에, 처음에는 살짝 적응이 안 되었지만 이제는 그 호칭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맛있는 거 사 주셨어?”
“어머니 말고 인우 오빠가 사 주셨어.”
“큰형?”
갑자기 인우가 거론되자 내내 부드러웠던 그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서렸다.
“우연히 만났거든. 근데 마침 어머니가 되게 급한 일이 생기셔서, 인우 오빠한테 대신 나 저녁 사 주라고 하고 가셨어.”
“뭐? 그럼 단둘이 밥 먹은 거야? 그걸 왜 이제 말해? 며칠 전 일인데.”
“며칠 동안 너 계속 일 때문에 바빠서 우리 어젯밤에나 겨우 만났잖아.”
그렇게 며칠 만에 만나자마자 잠깐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그가 그녀의 옷을 찢어발기며 짐승처럼 달려들었으니 그때도 말할 여유가 없었다.
“문자나 전화로도 할 수 있었잖아. 그리고 애초에 굳이 식사를 같이 할 필요가 있었어? 너 안 친한 사람하고 같이 밥 먹는 거 불편하잖아.”
은호는 서희를 위하는 척 말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이 일로 불편한 쪽은 그녀보다는 그 같았다.
“어머니가 인우 오빠한테 단단히 일러두고 가셨거든. 꼭 사 주라고.”
그는 경진을 향해 터져 나올 것 같은 불만을 꾹꾹 누르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나도 처음엔 너무 어색할 거 같아서 걱정이었는데…….”
걱정이었으나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지금에서야 알아챈 서희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순간 그가 단단히 토라질 듯한 예감이 들었다.
“지, 진짜 어색하긴 어색했어.”
결국 앞뒤가 안 맞는 말이 되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안부 몇 마디 주고받으니까 할 말이 뚝 끊겼어. 인우 오빠 정말 과묵하더라. 나도 말주변이 없어서 별로 제대로 대화 못 나눴고.”
“그럼 딱 밥만 먹고 헤어졌겠네?”
“아, 중간에 잠깐 네 얘기는 했어.”
“무슨 얘기?”
서희는 살짝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너 얼른 데려가라고 하시던데, 오빠가.”
그 말에 은호는 순식간에 경계 어렸던 눈빛을 지웠다.
“우리 큰형이 참 진중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하다니까. 주변에선 차갑고 무뚝뚝하다고들 그러는데 다 모르고 하는 소리야. 얼마나 사람이 좋은데. 한 살 터울인 둘째 형하고는 천지 차이야.”
그녀는 걸음마저 멈춘 채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강은호…….”
속내를 빤히 드러내는데도 왜 저렇게 귀여운지 모르겠다.
“여기서 차재우랑 만났다고 그랬나?”
상쾌한 숲길을 걸으면서 은호가 불쑥 물었다.
“아, 응. 진짜 신기한 우연이지? 이 넓은 데서 그렇게 딱 만나다니. 깜짝 놀랐어.”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먼저 했는데.”
“응? 뭐라고?”
“엄청 어릴 때부터 김서희는 나무 같다고 항상 생각했는데 말 안 했던 것뿐이야.”
그가 분해서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서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이유를 찾아냈다.
‘넌 식물 같아.’
재우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그녀에게 했던 말 때문일 것이다. 그 말에 무척 기뻐하며 활짝 웃던 그녀의 모습이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마음에 남은 모양이었다.
“지금 안 믿지? 진짜야. 내가 먼저…….”
“내가 나무면.”
서희는 문득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보았다.
“넌 나한테 햇빛 같아.”
그녀는 무심결에 중얼거리고는 그와 눈을 맞췄다. 담담히 털어놓는 말에 그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네가 나한테 친구 하자고 말해 줬던 열두 살 때부터 줄곧 그랬어.”
울창하게 자란 나무 위로 따스하고 보드라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에필로그
작업실 안은 펜촉이 종이에 부드럽게 긁히는 소리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국제 비엔날레 전시에 필요한 세밀화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최근 석 달 동안 70여 종의 생물을 전부 그려 내야 했다.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다행히 마감을 며칠 앞둔 오늘 작업을 전부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뒤 드디어 서희가 굽혔던 등을 폈다. 습관적으로 머그잔을 들어 입에 댄 그녀는 바닥이 드러난 걸 그제야 확인했다.
부엌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휴대폰을 들었다. 작업이 끝나면 연락 달라는 은호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최근 바쁜 작업 때문에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이 미안하면서도 가슴이 따스하게 차오르는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보냈다.
수목원을 관두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건 결혼을 준비하던 때였다. 그와의 결혼도 퇴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좀 더 다양하고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은 열망이 원래부터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프리랜서에 적합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차츰 깨달았다. 너무 게을러서가 아니라 너무 욕심이 많아서였다. 스스로 흥미가 가는 업무 의뢰는 불가능한 일정이 아닌 한 모조리 받았던 것이다.
조금 타이트하긴 해도 충분히 할 만하겠다고 예상하고 작업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는데, 중간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거나 하면 마감 시일이 촉박해지기 마련이었다. 안 그래도 쉴 틈 없이 일을 잡아 놨으니 일정이 꼬이는 순간 다른 건 생각할 틈도 없이 바빠졌다.
은호가 마련해 준 이 안락하고 쾌적한 작업실에서 밤샘 작업을 하느라 이따금 외박을 하기도 했다.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신혼집에 머무는 시간보다 더 많아지자 그는 결국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그게 결혼 후 두 사람의 첫 다툼이었다.
서희는 잘못을 인정하고 일을 줄였다. 지금도 가끔 마감에 쫓길 때는 있었지만 도미노처럼 하나가 무너지면 줄줄이 영향을 받는 아슬아슬하고 빡빡한 스케줄에서는 완전히 벗어났다.
부엌에 들어가 커피를 내린 서희는 다음에 들어갈 작업을 생각했다. 최근에 의뢰를 받은 것은 식물 세밀화로 키즈 컬러링 북을 만들자는 모 출판사의 제안이었다.
그녀로서는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연습 삼아 그린 그림에 색칠하는 것을 즐기는 다섯 살 된 어린 아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엄마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천사처럼 배시시 웃곤 하는 현을 떠올리며 서희는 가슴이 찡해졌다. 어떻게 그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을까, 기분 좋게 고개를 내젓는데 밖에서 희미한 차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서희는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현관 밑 계단을 소리 나는 신발로 쫑쫑 올라온 현이 그녀에게 폭 안겼다.
“엄마,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현이 고개를 빼꼼 들어 서희를 올려다본다. 현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엄마도 우리 현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현의 뒤로 은호가 쇼핑백을 들고 다가왔다. 현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입을 맞췄다.
“들어가자.”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자 은호가 현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현아, 엄마한테 선물 주자.”
몹시 다정한 말투였지만 아빠의 말이 머리 위에서 울리자마자 현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서희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이었으나 은호는 아들의 표정을 목격하고는 웃음을 꾹 참았다.
서희가 마감 작업 때문에 바빴던 이번 주말, 은호는 현과 하루 종일 단둘이 붙어 있었다. 오늘은 도자기 공예 체험을 하고 왔는데, 예민하기 이를 데 없는 아들의 심기가 틀어진 건 기념품관에 들렀을 때부터였다.
‘현아, 우리 이제 엄마 선물 사러 갈까?’
기념품관에 들어서서 찬찬히 둘러보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컵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시큰둥하게 보고 말았겠지만 은호는 그 컵을 보는 순간 이거다, 라고 확신했다.
나무를 형상화한 컵이었다.
컵 본체는 갈색이었고, 진짜 나무처럼 세밀하게 울퉁불퉁한 결이 살아 있었다. 뚜껑은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나뭇잎이 하나하나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서희의 취향에 딱 맞는 디자인이었다.
은호는 그 컵을 맞닥트리자마자 기뻐할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든 선물을 고맙게 받아 주는 그녀지만 진짜 마음에 드는 것일 때의 표정은 미세하게 달랐다. 그 표정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제법 들떴다.
그런 그와 동시에 그 컵을 발견한 존재가 있었다. 그의 아들, 현이었다.
위치적으로는 현이 좀 더 나무 컵에 가까웠지만 아들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그는 단숨에 긴 다리를 뻗어 먼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 뒤를 돌아보자 현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빠는 이걸로 해야겠다. 현이도 얼른 엄마 선물 골라야지.’
그런 현을 천연덕스럽게 약 올리기까지 했으니 화가 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현의 반응은 평범한 아이들과는 사뭇 달랐다. 억울하다고 울먹이거나 자기가 먼저 봤다며 떼를 쓰는 대신, 현은 분노를 삭이는 어른들처럼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은, 제 아들이긴 하지만 정말, 아이답지 않게 표독스러웠다. 순수성이 결여되어 있던 자신의 어린 시절까지 새삼 돌아보게 될 정도였다.
“여보,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
은호가 자신 있게 포장한 선물을 꺼내서 서희에게 건넸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녀는 역시 예상대로 맑고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너무 예쁘다. 어떻게 이런 걸 찾았어?”
서희는 은호의 뺨에 짧은 입맞춤까지 해 주었다.
“고마워. 진짜 잘 쓸게.”
서희가 선물을 마음에 쏙 들어 할수록 은호의 입가는 웃음이 더욱 짙어졌고, 반대로 현의 눈초리는 가늘어졌다.
“이건 현이가 준비한 선물.”
은호가 다른 쇼핑백에서 인형을 대신 꺼내 주었다. 귀여운 곰 인형을 살펴보던 서희가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현을 보았다.
“현아, 정말 고마워.”
“……으웅.”
자그맣게 대답한 현이 불현듯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현아, 왜 그래?”
“그 컵 내가…… 아빠 말구 내가 먼저…… 봤는데에.”
서럽게 눈물을 떨구는 현을 서희가 폭 안아 주었다. 그녀가 다정하게 달래자 현은 대놓고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은호는 기가 막힌 눈으로 그 모습을 관람했다. 진심으로 억울해서 나오는 눈물이라면 기념품관에서 바로 터졌어야 할 텐데, 늘 서희 앞에서만 아이처럼 울고 마는 현이다.
컵을 보고 기뻐하는 서희로 인해 순간 서러움이 밀려왔을 수도 있겠지만, 현은 아이가 마땅히 울 만한 순간에도 서희가 없으면 울지 않았다. 즉, 서희 앞에서 보이는 눈물도 연기인 셈이다.
설마 다섯 살짜리가 그렇게까지 계산을 해서 감정을 조절하겠냐며 황당해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다섯 살의 은호 역시 저랬다. 그러니 아들의 시꺼먼 속내를 설마 아이가 그러겠냐는 편견 없이 바로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나 오늘…… 엄마랑 같이 잘래요.”
울음을 가까스로 멈춘 현이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자 여유롭던 은호의 눈빛에 초조함이 번뜩였다. 그녀를 마음껏 안을 수 있는 오늘 밤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은호는 서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급히 다가가 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안 돼, 현아.”
“왜 안 되는데요?”
아빠에게 안긴 현은 불퉁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엄마랑 아빠 오늘 동생 만들어야 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은호는 이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물론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서희가 현을 출산할 때, 그는 끔찍한 지옥을 맞닥트려야 했다. 그녀는 정말 힘겹게 아이를 낳았고, 출혈이 심해서 출산 후에도 한동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그는 아이를 가진 것을 뼛속 깊이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정관 수술을 받고 온 그를 경진은 어떻게 아내랑 상의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결정했냐며 등을 때렸고, 서희 역시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며 난감해했다. 그러나 첫애를 임신시켰던 것도 후회하고 있는 마당에 그가 앞으로 둘째를 원할 리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은호는 한동안 아들에게 정을 주지 못했다. 아이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알지만 현을 볼 때마다 생사를 오갔던 서희가 떠올라서 분노나 증오까진 아니더라도, 조금 냉랭한 감정이 들었다.
현의 외모는 지금도 그렇지만 아기 때도 은호와 판박이였다. 나이에 맞춰 사진을 비교해 보면 정말 똑같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서희를 닮은 아이를 원했던 은호로서는 더욱 시큰둥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아들에게서 서희를 닮은 흔적을 찾았을 때부터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빠를 쏙 빼닮았다는 말을 할 정도였고, 서희도 자신과 닮은 곳은 못 찾겠다고 갸우뚱했다.
그러나 은호에겐 현이 서희를 닮은 구석만 더 선명히 보였다. 눈동자 색깔, 방긋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의 각도, 손톱과 발톱 모양 등이 얼마나 그녀와 똑같이 생겼는데 왜 다들 모르는 건지 은호야말로 의아했다.
“……동생?”
“그래, 동생. 엄마 아빠는 밤마다 현이 동생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현이도 도와줘야 돼.”
부모들이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흔히 써먹는 말을 하자, 서희는 민망한 듯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고 현은 왠지 모르게 안색이 창백해졌다.
* * *
매일 쓰는 일기를 오늘도 빼곡히 채운 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욕실에서 씻고 나온 은호가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
“일기 썼어?”
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물었다.
“응.”
“무슨 내용 써?”
“그냥 오늘 있었던 일.”
“작업한 내용?”
“그것도 쓰지만 우리 남편하고 아들 얘기가 좀 더 많지.”
그녀의 말에 그가 입술을 늘이며 웃다가 짧게 키스했다.
“나도 쓸까.”
“일기?”
“응. 기록하면 좋을 거 같아서. 오늘은 김서희가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 해 줬고, 키스는 몇 번 했고, 또 섹스는 몇 번 했…….”
서희가 짓궂은 은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그런 걸 왜 기록해?”
“어제보다 적게 했으면 오늘도 그만큼 더 해 달라고 따지려고.”
다른 의미로 웃던 두 사람이 다시 입을 맞췄다. 농도가 진해질수록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나 오래 참았으니까 상 줘야 되는 거 알지.”
“……응.”
“오늘 안 재워도 돼?”
서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는 온몸이 타들어 갈 듯 열기가 뜨겁게 번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의 잠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속옷을 입지 않은 맨가슴이 그의 손바닥에 감겨들었다.
“읏.”
서희가 눈을 설핏 좁히며 그의 느릿한 손길을 느꼈다. 미치도록 야하고 매혹적인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는 당장 그녀의 깊은 곳에 제 몸을 묻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똑똑.
불쑥 들려온 희미한 노크 소리에 달아오르던 공기가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그대로 굳어 미간을 일그러뜨리는 은호와 달리, 서희는 다급히 그의 손을 밀어내며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응. 들어와.”
그녀의 단정한 목소리에 문이 조용히 열렸다. 토끼 캐릭터가 그려진 깜찍한 잠옷을 입은 현이 커다란 베개를 안고 들어왔다.
“엄마……, 나 무서운 꿈 꿨어요.”
“무서운 꿈?”
“으응. 나 무서워서 혼자 못 자요.”
서희가 이리 오라는 듯 팔을 뻗었다. 현은 쪼르르 침대로 올라가 엄마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엄마아.”
“우리 현이, 많이 무서웠어?”
그녀가 아이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은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현의 머리를 쓸었다.
“현아, 방으로 가자. 아빠가 동화책 다시 읽어 줄게.”
“싫어요. 여기서 잘래.”
“엄마 아빠 오늘 동생 만들어야 한다고 했잖아.”
은호가 짐짓 엄하게 타일렀다. 그러자 현은 고개를 돌려 은호와 눈을 마주쳤다.
“나, 동생, 필요 없어.”
자근자근 끊어 말하는 얼굴에 사나운 고집이 엿보였다. 무드등만을 켜 둔 방이 어두웠기에 서희는 순수함과는 거리가 먼 현의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아빠에게 자신의 뜻을 확고히 밝힌 현은 금방 가련한 눈망울을 만들어 내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현이는 동생 안 갖고 싶어요. 동생 만들지 마세요. 네에?”
방금 또렷이 마주했던 현의 선뜩한 눈동자를 떠올린 은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살짝 문지르며 탄식했다. 서희에게 집착하는 현의 생각 구조와 하는 짓이 저와 너무 흡사했다. 아이가 아빠를 닮은 수준이 아니라 유전자 복제라도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현은 서희의 애정을 나눠야 하는 은호를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래도 공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일단 남편과 아들로 포지션이 전혀 다르니 그다지 경계할 일이 없는 것이다. 아빠가 가끔 짓궂게 놀릴 때 약이 바싹 오르는 것만 빼면.
그러나 동생은 다르다. 동생이 생기는 순간, 자식을 향한 엄마의 애정이 쪼개지는 것을 현은 알고 있었다. 반으로 나뉘는 것을 넘어 막 태어난 아기에게 더 관심이 쏠릴 게 분명하니 현은 어떻게든 동생의 탄생을 막을 작정이었다.
“엄마는 현이만 있으면 되잖아요. 네? 엄마.”
현은 결국 서희에게서 동생을 만들지 않겠다는 답을 듣고서야 마음을 푹 놓았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만 사랑해?”
그녀가 제 가슴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현을 은호의 품에 놓았다.
“응?”
얼른 아빠도 사랑한다고 말해 주라는 엄마의 부드러운 재촉에 현은 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입을 삐죽이며 마지못해 말했다.
“아빠두……, 사랑해요.”
그 귀여운 목소리에 부부가 허공에서 눈을 맞추며 슬쩍 웃었다. 현은 두 사람의 가운데를 꼬물꼬물 파고들더니 기분 좋게 잠을 청했다.
놓치기 전에 ․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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