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13화
본문
12. 꽃말: 사랑의 고백, 영원한 애정
강은호, 김서희 19세
큼지막한 쇼핑백을 손에 든 은호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벗었다.
“김서희, 오빠 왔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부터 어디에 나갔을 리는 없는데 아담한 집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직 자고 있나?’
서희의 방을 확인했지만 침대는 주인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바닥 생활을 오랫동안 한 서희는 침대를 들여놓은 후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침구를 반드시 말끔히 정리하고 방을 나왔다. 지금은 이불이 흐트러져 있는 걸 보니 자다가 잠시 화장실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방을 나오자마자 확인한 화장실도 불이 꺼진 채였다. 은호는 혹시나 하며 서희 할아버지가 쓰시던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안을 들여다본 은호의 눈빛에 따스함이 번졌다. 장롱에서 꺼낸 이불을 꼭 안은 서희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방 안으로 들어간 은호는 그녀의 옆에 툭 걸터앉았다. 서희는 제대로 눕지도 않고, 장롱 문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자고 있었다. 옆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는 조심스럽게 뒤로 쓸어 주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급격하게 야위었던 얼굴은 슬슬 적당히 살이 붙었지만 여전히 은호의 성에는 차지 않는다. 안쓰러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데 서희의 눈꺼풀이 스르륵 벌어졌다.
“……은호?”
“왜 여기서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어.”
몽롱한 눈을 연신 깜빡이던 서희는 코앞에 있는 그를 선명하게 보자마자 어쩐지 얼굴이 붉어져서는 황망히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언제……, 언제 왔어?”
“방금.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 여기에서 잔 거야?”
“새벽에 깨서 화장실 들렀다가 그냥 갑자기…… 할아버지 냄새 맡고 싶어서.”
은호는 등을 돌린 서희의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서희야, 진짜 우리 집으로 가면 안 될까?”
“그 얘긴 이미…….”
“너 이렇게 나 없을 때 이 집에서 혼자 외롭게 울면서 잠들 거 생각하면 마음이 안 놓여서 그래.”
“나, 안 울었어. 그리고 이제 정말 많이 괜찮아졌는걸. 얼마 전만 해도 할아버지 방 들어오면 눈물부터 났는데 지금은 안 그래. 물론 아직도 그립긴 하지만…….”
서희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음을 나타내듯 꽤 단호한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장례식을 마친 후, 은호가 부모님과 함께 어떻게든 설득하려고 해도 통하지 않았었다. 몇 달이 흐른 지금 고개를 끄덕여 줄 리 없다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집에서 반찬 가져왔거든? 그걸로 아침 먹자. 나도 너랑 먹으려고 일부러 밥 안 먹고 왔어.”
“음, 지금 입맛이 별로 안 도는데. 은호 너 먼저 먹어.”
“막 일어나서 안 넘어가려나? 그럼 일단 과일부터 먹자.”
“나 세, 세수 먼저 하고 올게.”
서희가 그의 시선을 피한 채 먼저 방을 나섰다. 일어나자마자 자꾸 얼굴을 숨기려던 이유가 씻지 않은 얼굴을 보이는 게 창피해서였나 보다. 은호는 씩 웃으며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초딩 때도 그렇게 수줍음이 많더니 지금도 그러네, 서희는.”
가져온 반찬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한 은호는 서희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인 딸기가 든 밀폐 용기 뚜껑을 열었다. 꼭지를 전부 자른 새빨간 딸기가 안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이리 와. 딸기 먹어.”
씻고 부엌으로 들어선 서희에게 말하며 은호는 포크 두 개를 챙겼다. 딸기를 물끄러미 보던 서희는 찬장을 열어 설탕을 꺼냈다.
“설탕은 왜?”
“찍어 먹으려고.”
“뭐? 안 돼. 이거 그냥 먹어도 엄청 달아.”
은호가 짐짓 엄하게 타이르자 서희는 살짝 시무룩해져서 다시 설탕 용기를 찬장에 돌려놓았다. 그 아이 같은 얼굴에 마음이 절로 약해진 은호는 작은 그릇을 하나 꺼냈다.
“오늘만이다?”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설탕을 가져왔다. 그릇에 던 하얀 설탕에 딸기를 푹 찍어서 깨문 서희는 무척 맛있는지 눈을 반짝거렸다.
“입맛 안 돈다더니 그렇게 달게 먹는다고? 갑자기 웬 설탕을 찍어 먹어?”
은호는 설탕을 찍지 않은 딸기를 입에 넣었다. 역시 그냥 먹어도 단맛이 진하다.
서희가 기분 좋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어제 채아네 놀러 가서 보니까 이렇게 먹더라고. 설탕 찍어서 먹으니까 너무 맛있었어.”
은호의 눈썹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딸기를 자근자근 씹던 턱도 굳어졌다.
“채아네 어머니 엄청 다정하고 좋은 분 같았어. 채아 남동생은 지금 열 살밖에 안 됐는데 되게 착하고 귀여워.”
서희는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채아의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것도 몹시 설레고 행복한 얼굴로.
기분이 상한 은호는 시큰둥하게 듣다가 서희가 딸기에 다시 설탕을 묻히려 하자 그릇을 뺏어 갔다.
“어?”
“안 돼. 역시 이건 너무 달게 먹는 거야. 건강에 안 좋다고.”
“아…….”
“달게 먹는 버릇 들면 안 돼.”
서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맨딸기를 깨물어 먹었다. 은호의 반응이 좀 쌀쌀맞게 느껴졌는지 흘금흘금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나직한 한숨을 흘렸다. 요즘 채아의 이야기만 달고 사는 서희에게 본의 아니게 자꾸 신경질을 내게 되었다.
서희가 친구를 사귄 게 싫은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겨울에 할아버지를 잃어 쓸쓸한 서희이니 이번 학년에는 괜찮은 친구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러나 막상 서희가 친구를 만들자 조금씩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서희는 자신처럼 적당히 애들과 관계를 맺는 성향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쉽게 열지 않지만, 누군가에게 마음을 한번 열기 시작하면 확 빠져드는 타입. 열두 살의 은호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 만난 채아에게도 빠른 속도로 푹 빠지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입만 열었다 하면 채아 얘기였고, 어제는 늦게까지 채아와 노느라 그의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대화에 열중하느라 전화가 오는지도 몰랐다는 말에 은호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요즘 서희에겐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채아라는 애가 저보다 더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채아와 친해질수록 자신에게 소홀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친구를 사귀는 건 괜찮지만 저보다 더 친한 친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제가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학교에서 적당히 함께 어울리다가 졸업 후 흐지부지 멀어질 정도의 사이면 족했다.
그런데 이렇게 그의 존재마저 밀어낼 만큼 급속도로 친밀해지는 친구가 생기다니. 개학 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러면 졸업할 때쯤엔 어떻게 될까.
은호의 표정이 별안간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약속한 영화관 건물로 향하며 은호는 서희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나 거의 다 도착했어.”
― 정말? 은호야, 나 좀 늦을 것 같은데.
오늘은 은호와 서희, 채아까지 셋이 영화를 보고 밥을 먹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약속 장소는 영화관 매표소 앞이었다.
서희가 미안함이 깃든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어제 놓고 온 물건을 찾기 위해 학교 교실에 들렀다가 우연히 마주친 선생님에게 잡일을 잠깐 도와 달라며 붙들렸다고 한다.
“얼마나 걸리는데?”
―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을 거 같아. 미안해.
“어차피 미리 영화 예매도 안 해 놔서 상관없어. 괜찮으니까 조심해서 천천히 와. 알겠지?”
― 응. 채아 만나면 얘기 전해 줘.
서희와 전화를 끊는 동시에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매표소가 있는 4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가 옆으로 크게 입을 벌렸다. 내리려던 은호는 엘리베이터 앞을 휙 스쳐 지나가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김서희? 어, 완전 답답해 죽겠다, 진짜.”
신채아는 통화 상대에게 푸념하듯 대꾸하면서 엘리베이터 옆쪽 비상계단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은호는 싸늘해진 얼굴로 채아가 간 방향으로 향했다. 비상계단 문이 살짝 열려 있어 채아의 통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애는 착하긴 해. 생긴 거랑 다르게. 근데 진짜 너무 재미없고 답답해. 그동안 왜 친구를 제대로 못 사귀고 있었는지 이해가 간다니까? 뭐, TV도 안 보고, 아는 연예인도 없고, 게임 같은 것도 전혀 안 하고. 말이 하나도 안 통해. 심지어 엄마 아빠도 없고 최근엔 할아버지도 돌아가셔서 걔 앞에서 말조심해야 하니까 또 피곤하고.”
상대의 말을 잠시 듣는 듯하던 채아가 쾌활하게 웃었다.
“당연하지. 강은호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왜 놀아 주겠니?”
문 옆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은호가 냉소를 삼켰다.
“김서희가 친구가 없긴 해도 강은호랑 친한 거로 우리 학교에서 유명하긴 했어. 1, 2학년 때도 은호가 정문에서 걔 기다리고 그랬거든. 애들 다 그 둘이 사귀는 줄 알았을걸? 나도 그런 줄 알았고. 그래도 같은 반 된 김에 혹시나 해서 슬쩍 찔러봤더니 그냥 완전 친구더라. 집안끼리도 교류 있고 소꿉친구여서 그런지 되게 친한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둘이 남녀 관계 아닌 건 확인했어.”
채아는 야릇하게 입술 끝을 늘어뜨렸다.
“재밌는 거 하나 더 알려 줄까? 오민준하고 은호하고 이번에 같은 반 됐대. 오민준 그 새끼, 바람 피워서 나 버리더니 내가 천하의 강은호랑 사귀게 되면 완전 후회하겠지? 생각만 해도 고소해. 뭐? 김칫국 마시지 말라고? 아니야, 은호도 나한테 은근 마음 있어 보이거든? 몰라. 고백해 보고 차이면 재미없는 김서희랑 놀아 주는 것도 이제 끝이지, 뭐.”
서희의 칭찬과 달리 눈빛과 속이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분수도 모르고 더러운 욕심으로 가득 찬 애였다. 애초에 그와 엮이기 위해 서희에게 접근한 거였다니. 괘씸함에 혀를 내둘렀지만 이내 은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서희에게 이 사실을 알려도 될까. 신채아가 서희에게 지나치게 치근거리는 건 여전히 거슬렸지만, 오랜만에 사귄 친구에게 다시 상처를 받게 될 서희를 떠올리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게다가 서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슬픔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서희가 자신에게 불순한 목적으로 접근한 친구로 인해 더 절망에 빠지지는 않을까. 이미 채아에게 마음을 활짝 연 듯한 서희인데. 서희에 대한 걱정이 깊어지는 동시에 채아를 향한 분노도 강해졌다.
수험생이니 앞으로 1년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 학교에 매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서희와 그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더욱 돈독해질 채아를 지금껏 질투했지만, 서희가 외톨이처럼 홀로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으로 전부 참고 있었다.
그랬는데.
‘몰라. 고백해 보고 차이면 재미없는 김서희랑 놀아 주는 것도 이제 끝이지, 뭐.’
한쪽 눈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은호는 채아가 통화 상대와 끝맺음 인사를 하는 소리를 듣고는 벽에서 등을 뗐다. 매표소 방향으로 성큼성큼 움직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채아가 그를 불렀다.
“어? 은호야!”
은호는 뒤를 돌아 채아와 눈을 맞추고는 싱긋 웃었다.
“채아도 일찍 왔네?”
그 미소만으로 채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응. 난 적어도 약속 시간 10분 전에는 도착해야 마음이 놓여서. 약속 상대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잖아. 근데 서희는 언제 오려나.”
“방금 서희랑 통화했는데 일이 생겨서 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던데?”
“정말?”
채아는 들뜬 마음을 감추려는 듯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은호는 싸늘한 비웃음을 억눌렀다.
“은호야, 그럼 나랑 잠깐 아래 카페에서 차 마시고 있을래? 나 사실 할 말도 있는데.”
은호는 순순히 고개를 주억거리곤 채아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 * *
책상에 걸터앉아 친구들과 떠들고 있는 민준을 흘깃 본 은호는 ‘신채아’라고 입력된 번호를 눌렀다.
“수업 잘 듣고 있어? 오늘 만날 수 있는 거 맞지? 보고 싶어, 채아야.”
살짝 놀란 듯 은호 쪽을 힐끔거리던 민준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비굴하게 느껴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이 없는 복도로 나갔다.
“밖으로 나왔어?”
― 지금 복도로 나왔어. 은호 너도?
“어. 오민준이 통화 내용 듣는 거 확인했어.”
― 정말? 표정 어땠어?
“씁쓸해하는 것 같던데?”
― 아, 그래?
채아가 흘러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말하는 게 느껴졌다.
― 이런 부탁 해서 미안해. 내가 걔한테 당한 게 너무 많아서…….
“미안하긴. 저 녀석이 너랑 사귀면서 다른 여자랑 바람도 피우고 상처 많이 줬다며.”
― 진짜 고마워, 은호야.
“왜 자꾸 그런 인사야. 내가 이제 네 남자 친구인데, 이 정도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수 있지.”
은호의 목소리가 몹시 다정하게 들렸는지 채아는 콧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 진짜 날마다 더 좋아져, 네가. 공부도 집중 안 될 정도야. 어떡해?
처음에 채아는 오민준에게 복수할 작정으로 그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남자를 만나서 전 남자 친구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은호가 적당히 다정한 미소로 말을 건네면 푹 빠져든 얼굴로 그를 보곤 했다.
“수험생이 공부에 집중 안 하면 어떡해? 열심히 해야지. 근데 서희는 지금 뭐 해?”
― 치, 또 서희만 궁금하지?
“서희는 휴대폰 교무실에 내서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잖아.”
착실한 모범생 김서희는 다들 꼼수를 부리며 어떻게든 내지 않으려는 휴대폰을 제일 먼저 수거함에 꽂아 넣는 애였다.
아침은 잘 챙겨 먹었는지, 공부는 잘되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궁금한 게 산더미처럼 쌓일 때까지 하루 내내 연락을 할 수 없으니 답답했는데, 그래도 신채아와 사귀면서 그나마 이점이 있다면 이것이었다.
― 그냥 문제집 풀고 있지, 뭐.
“서희 요즘 목 건조하다던데 물 많이 마시라고 옆에서 잔소리 좀 해 줘. 안 그럼 식사할 때 아니면 안 마시거든.”
채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잠시 침묵했다.
― 있지, 은호야. 이번 주말에는 우리 단둘이 데이트하면 안 돼?
“단둘이?”
은호의 음성이 서늘해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아가 속살거리듯 말했다.
― 그래도 우리 사귀는 사이인데, 서희 때문에 둘이 만나는 시간도 너무…….
“신채아.”
― 어?
“너 지금 서희 때문이라고 했어?”
― 어, 어? 그게…….
“안 그래도 우리 둘이 사귀어서 서희가 얼마나 소외감 느끼고 있을지는 전혀 생각 안 하고 있지, 너? 너랑 내 눈치 보면서 틈만 나면 약속 빠지려고 하는 게 김서희인데, 너 어떻게 그렇게 생각 없이 말을 해?”
― 은호야, 나, 나는…… 서희 때문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니라…….
변명하려는 채아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늘 친절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한 은호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화를 내고 있으니 겁이 났을 것이다.
“나 네가 서희 세심히 잘 챙겨 주는 모습 보고 참 괜찮은 애라고 생각해서 사귄 거야. 나랑 가까워지려고 서희한테 접근하는 애들 지금까지 얼마나 많았을 거 같아? 그거 때문에 나도 서희도 불순한 마음으로 접근하는 인간들 치가 떨리게 싫어해. 너는 절대 그런 애 아니라고 믿어서 만나기 시작한 건데…… 지금 그 믿음도 흔들리려고 하네.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서희 빼고 둘이 만나자는 말부터 해? 내가 둘이 만나자고 해도 너는 안 된다고 해야지. 나서서 서희 더 챙기지는 못할망정 이런 말 하니까 되게 실망스럽다. 내가 널 잘못 봤나 보다.”
― 은호야, 그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제발, 화내지 마. 나 무서워. 응? 나는 네가 너무 좋으니까, 그냥 가끔은 너랑 둘이 있고 싶어서……. 서희 소외시키려는 거 절대 아니고!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 미안해.
“우리 둘이 만나는 거 알면 서희가 어떻겠어? 걔 자기가 우리한테 방해된다고 생각해서 그다음부턴 우리 사이에 절대 안 끼려고 할 애야. 넌 서희랑 친한 친구면서 그런 것도 생각을 안 해? 생각이 짧은 게 아니라 서희 생각을 아예 안 한 거잖아.”
― 미안해. 내가 진짜 잘못했어. 서희……, 나 진짜 서희 좋아해, 은호야. 앞으로 서희한테 진짜 잘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응?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은호는 짧은 한숨을 쉬며 싸늘하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야, 신채아. 너 이번 일로 서희한테 화풀이하기만 해. 나 김서희 눈만 봐도 네 태도 어땠는지 파악 가능하니까.”
― 은호야, 내가, 내가 서희한테 화풀이를 왜 해. 그런 말 하지 마. 나 진짜 앞으로 다신 안 그럴 테니까…….
“수업 종 쳤네. 전화 끊는다.”
망설임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꾹 누르는데,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1학년 이후 3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된 찬성이 보였다. 옆 반에서 교과서를 빌려 온 그가 은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네 성격이 워낙 지랄맞아서 여자 사귈 때도 대단할 줄은 알았지만 진짜 차원이 다르다, 너? 갑질 장난 아니네. 갑의 연애가 뭔지 제대로 본 느낌? 아니, 들어 보니까 네 여친이 거의 울먹이면서 잘못했다고 비는 거 같던데 그걸 안 받아 주고 뚝 끊냐? 목소리도 겁나 매정하다 못해 살벌하던데.”
은호는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별다른 대꾸 없이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찬성이 따라붙었다.
“야, 내가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넌 무슨 연애하면서도 서희 타령이냐? 네가 챙기는 걸로도 모자라서 어떻게 여친한테도 서희 챙기라고 그렇게 살벌하게 닦달하고 난리를 피워? 아주 거의 세뇌를 하던데?”
“서희 안 챙길 거면 내가 걔를 뭐 하러 만나는데?”
은호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묻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찬성은 얼빠진 표정으로 은호의 등을 쳐다보았다.
* * *
찬성을 포함한 세 친구들과 함께 교문으로 향하던 은호는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을 보고는 미간을 굳혔다. 채아를 발견하자마자 다급하게 그 주변을 훑었지만 다행히 서희는 보이지 않았다.
“은호야!”
손톱을 물어뜯으며 초조하게 은호를 기다리고 있던 채아가 그를 발견하곤 절박한 눈망울을 빛냈다.
“아, 은호 여친?”
은호의 곁에 있던 친구들이 알은척을 하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과 인사했다.
“난 신채아라고 해.”
채아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은호의 심기를 살피듯 연신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실실거리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찬성만이 그런 채아에게 조용히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너희 먼저 가고 있어.”
은호의 말에 세 사람이 떠나고 둘만이 남았다. 은호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채아가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은호야, 아까 통화 끝나고 계속 전화도 안 받고 문자 답도 안 해서 나 너무 불안해서 찾아왔어. 친구들이랑 약속 있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와서 미안해.”
“아, 그게 미안해?”
은호의 서늘한 빈정거림에 채아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서희한테 진짜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서희 너무 착한 앤데 내가…….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너랑 둘이 만나려고 한 게 서희 소외시키는 일이라는 거 확실히 깨달았어. 내가 진짜 생각이 짧아서……. 다시는, 다신 이런 일 없을 거야. 은호야, 제발 화 좀 풀어 줘.”
걸음을 멈춘 은호가 흘깃 시선을 내려 채아를 응시했다.
“서희는?”
“서희? 하, 학교에. 절대 서희 떼어 놓으려는 그런 거 아니야.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는 서희가 알면 안 될 거 같아서. 그리고 어차피 같이 가자고 해도 서희 야자 빼는 거 안 내켜 해서 안 올 거 같았고, 그래서…….”
전교생이 야간 자율 학습 의무인 서희의 학교와 달리 은호의 학교는 사교육을 받는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아 말 그대로 자율적 선택이었다.
“당연하잖아. 서희가 너처럼 땡땡이 같은 거 치는 애인 줄 알아?”
은호가 설핏 웃으며 던진 말에 채아는 서운한 듯 우물거렸다.
“나도…… 땡땡이 같은 거 안 쳐. 이번이 처음인데.”
눈길을 들어 은호의 눈치를 살피려던 채아는 그가 전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아까는 너무 심했지?”
“아니야. 내가 잘못했으니까…….”
“아까 말했다시피 나 때문에 서희한테 수작 부리고 접근하는 애들이 그동안 꽤 많았어. 난 그거 때문에 서희한테 항상 미안했고. 그러다 보니 내가 이 문제에 어쩔 수 없이 예민해져. 그런 낌새라도 보이는 순간 의심이 피어난다고 해야 하나. 얘도 걔네들이랑 똑같은 애인가, 하고.”
은호가 채아와 눈을 똑바로 맞춘 채 경고하듯 말했다. 채아의 눈동자가 움찔 떨리는 게 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동요를 감추곤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너그러운 얼굴을 만들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너는 그런 애가 아닐 거 같더라. 내가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지, 채아야?”
“응……. 나 절대 그런 나쁜 마음 안 품었어. 나한테 서희가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친구인데.”
“그래, 다행이다.”
은호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서희 할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은 척해도 아직 많이 힘들어. 부모처럼 키워 주신 분이 떠나신 거니까. 친구인 너랑 내가 힘들어하는 서희 옆에서 지지해 줘야지. 서희가 편하게 의지할 수 있도록. 지금은 조금 참았다가 졸업한 후에 둘이 많이 만나면 되잖아. 안 그래?”
채아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 후 학생이 아닌 성인의 데이트를 상상하며 설레는지 그녀의 뺨이 불그스름해졌다.
“서희랑 여기 같이 안 온 건 잘했어. 앞으로 또 땡땡이치는 건 안 되지만, 만약에 꼭 우리 학교 와야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서희는 데려오지 마.”
“어? 왜, 왜?”
“서희 공부 방해하는 건 안 되니까. 그리고…….”
은호는 채아가 무슨 말을 기대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처럼 묘한 미소를 품은 채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도 너랑 둘이 만나는 거, 꽤 좋으니까.”
채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었다. 은호는 짜증이 치솟는 걸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 채아가 서희까지 끌고 오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 친구 녀석들은 물론 학교 사내놈들에게 서희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다들 지나가며 호기심 섞인 눈길을 보내게 될 테니까. 거기다가 서희는 시선을 확 끄는 예쁜 얼굴을 가졌으니 짓궂고 비릿한 시선이 더욱 오래 머물 터였다.
아니, 사실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납득 가능하게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냥 아무한테도 서희를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본능처럼 깔려 있었다.
* * *
서희의 학교 졸업식 날, 꽃다발을 들고 교실을 찾은 은호는 안에 혼자 남아 있는 채아를 발견했다. 그녀가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은호에게 다가왔다.
“은호야, 왔어?”
“서희는?”
“미술 쌤이 부르셔서 미술실 잠깐 갔어. 내가 너 교실 도착하면 같이 미술실 쪽으로 가겠다고 서희한테 말해 뒀어.”
채아는 은호가 들고 있는 예쁜 꽃을 힐끔거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럼 여기서 말해야겠네.”
“응? 뭘?”
“신채아, 우리 헤어지자.”
“어?”
채아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보다가 애써 입꼬리를 당겼다.
“너……, 장난치는 거지?”
“장난하는 거 같아 보여?”
은호는 문틀에 어깨를 살짝 기댄 채 조롱하듯 물었다.
“으, 은호야.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채아의 눈동자에는 벌써 눈물이 어룽어룽 차오르고 있었다.
“불순한 의도로 서희한테 접근하는 인간들 치가 떨린다고 내가 예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은호야, 나 절대…….”
“네가 나한테 사귀자고 했던 날, 너 네 친구랑 통화하면서 서희 욕했지? 재미없고 답답한 애라고 그랬나?”
“그, 그건…….”
은호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채아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은호는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서희랑 놀아 줘? 우스운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너같이 뻔뻔하고 주제도 모르는 애는 또 너무 오랜만이라 신선하기까지 하더라.”
은호는 잔인한 말을 건네고 있다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희 옆에 두곤 있었지만, 졸업하자마자 바로 치워 내고 싶었거든.”
“은호야…….”
뜨거운 눈물이 채아의 볼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숨을 헐떡일 만큼 울음을 토해 내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무감했다.
“나 그래도…… 너 진심으로, 진심으로 좋아했단 말이야. 나 진짜 너 좋아해.”
은호는 더 들을 필요 없다는 얼굴로 등을 돌렸다.
“날……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은 거야?”
간절하게 묻는 목소리에 은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채아와 눈을 맞춘 채 은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널 어떻게 좋아해?”
피식, 잔인할 만치 가벼운 비소를 짤막하게 흘렸다.
“서희가 처음에 온통 네 얘기만 할 때부터 이미 끔찍하게 싫었는데.”
제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는 채아를 외면하며 교실을 빠져나온 은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미술실로 향했다. 서희가 미술실이 3층에 있다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미술실에 가까워졌을 무렵,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한 여학생이 안에서 나왔다. 은호는 성큼성큼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졸업 축하해.”
서희는 눈을 크게 깜빡이며 은호를 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튤립이네?”
붉은색 튤립과 보라색 튤립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예쁜 꽃다발이었다.
“고마워, 은호야.”
서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채아는 어디 있어? 너랑 같이 이쪽으로 오겠다고 했는데.”
“서희야.”
“응?”
“나 신채아랑 헤어졌어.”
서희는 생각보다 많이 놀랐는지 잠시 말을 잃었다.
“……정말?”
“너는 걔보다 날 훨씬 오래전부터 알았고, 걔보다 나랑 추억도 더 많고, 걔보다 내가 훨씬 더 소중한 친구인 거 맞지?”
유치하게 느껴지는 물음이었지만 은호는 꽤 심각한 얼굴이었다. 채아에게 미안한 듯 우물쭈물하던 서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 신채아랑 별로 안 좋게 헤어졌거든. 그러니까 서희 너도 걔랑 인연 끊었으면 좋겠어.”
“아…….”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야?”
은호가 쓸쓸하면서도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희가 그 대신 채아를 택하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를 떠안게 될 것 같은 눈빛이었다. 물론 그는 서희의 입에서 나올 대답이 하나뿐임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연락…… 안 할게.”
서희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은호가 씩 웃었다.
“우리 밖에 나가서 번호부터 바꾸자. 걔가 너한테 전화하고 그러면 너 마음 약해서 받아 줄 거잖아.”
“아…… 응. 알겠어.”
“번호 바꾸면서 이참에 휴대폰도 바꾸면 되겠다. 우리 성인 된 기념으로 똑같은 휴대폰으로 맞추자. 좋지?”
은호는 서희의 손목을 잡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은호야.”
“응? 왜?”
“튤립 꽃말, 뭔지 알고 산 거야?”
“아니? 모르는데. 꽃말이 뭔데?”
서희는 살며시 달아오른 뺨을 감추듯 고개를 숙인 채 아무것도 아니라고 조용히 중얼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