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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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실수
늦은 퇴근 후, 대문에 들어선 서희는 불이 켜진 집을 보고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있던 은호가 현관까지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하느라 힘들었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데리러 갈 걸 그랬나?”
“뭐 하러 그래. 퇴근하고 바로 여기로 온 거야?”
서희를 꽉 안았다가 풀어 준 은호가 고개를 저었다.
“잠깐 평창동 들러서 반찬 가져왔어. 너 기다리면서 내가 거실이랑 방 청소도 싹 해 놨고.”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런 말 말고 칭찬을 해 줘야지.”
은호의 투정에 서희는 웃으며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매가 불만스럽게 가늘어졌다.
“김서희. 우리가 아직도 친구야? 아니잖아.”
“응?”
“우리 이제 연인이니까 칭찬 방법도 바꿔야지.”
은호는 고개를 살짝 낮추며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서희는 민망해하면서도 살며시 입을 맞댔다.
“됐지?”
“그리고 네가 아침에 남기고 간 설거지도 다 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버렸어.”
은호가 다시 입술을 가리킨다.
“……칭찬 따로따로 받는 거야?”
“당연하지.”
서희는 웃으며 쪽, 입을 맞췄다.
“그리고 서희야.”
“또 뭐?”
서희가 그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사랑해.”
달콤한 고백과 함께 이번에는 은호의 입술이 먼저 다가왔다. 짧고 가벼운 키스가 아닌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상상해 봤어?”
그가 살짝 잠긴 야릇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뭘?”
“네가 퇴근할 때마다 내가 이렇게 널 기다리고 있다가 맞이해 주는 일상.”
또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할 모양이다. 서희는 은호를 밉지 않게 흘겼다.
“오늘은 나보다 일찍 끝났어도 평소엔 나보다 네 퇴근이 더 늦잖아.”
그러자 은호는 잠시 끙 앓는 소리를 낸다.
“회사 때려치울까 봐.”
“뭐?”
“어차피 회사는 형이 물려받을 텐데. 난 그냥 건물 괜찮은 거 몇 개 받아서 적당히 그거 관리나 하면서 너 따라다닐까? 네 전용 운전기사 하면서.”
결혼하자고 꼬드기기 위해 즉흥적으로 뱉어 낸 말이었지만 은호는 그 말에 스스로 솔깃하고 말았다. 서희만 쫓아다닐 수 있는 삶이라니, 엄청 괜찮은 인생 아닌가. 그러나 서희의 손길에 헛된 망상을 바로 멈춰야 했다.
“안 돼. 그런 철없는 말 하지 마.”
서희가 제법 엄격하게 그를 타일렀다. 행복한 상상을 가로막는 그녀에게 은호는 입을 비죽였다.
“이리 와. 내가 마사지해 줄게.”
은호는 서희를 거실로 끌고 와 소파에 앉혔다. 겉옷을 벗긴 후 어깨를 정성스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나랑 같이 살면 이렇게 마사지도 매일매일 받을 수 있는데.”
“같이 안 살아도 이렇게 늘 해 주면서.”
절대 결혼해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서희가 얄미운지 은호는 그녀의 귓불을 살며시 깨물었다.
“아……, 뭐야.”
서희가 빠져나오려던 웃음을 삼켰다. 은호의 혀가 귓바퀴를 살살 쓸어 올리고 있었다.
“이제 여기도 마사지해야겠다.”
은호가 뒤에서 서희를 안은 상태로 그녀의 가슴을 손에 담았다. 정말 마사지라도 하듯 자분자분 주무르는 손길에 그녀는 점차 몸이 달아올랐다.
“은…… 호야.”
“참고로 나 청소 다 하고 마지막에 샤워까지 마쳤어.”
“나, 나도 씻어야 되는데…….”
은호는 서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그녀의 옷을 벗겼다. 팬티만 남겨 두고 그녀를 알몸으로 만든 그가 그녀의 하얀 젖가슴을 쓰다듬었다. 어느새 뾰족해진 젖꼭지를 그의 손가락이 희롱했다.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끼우고 살살 쓸자 서희는 은호의 가슴에 완전히 등을 기댄 채 깊게 호흡했다.
“하아…….”
첫 경험 이후 은호는 만나는 날마다 그녀의 몸을 탐하려 들었다.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들어섰다 싶으면 당연하게 뻗어지는 야릇한 손길에 서희도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였다.
“아래도 마사지해 줄까?”
귓가에 흘러드는 달콤한 음성에 서희는 달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가 손길을 아래로 내렸다. 하나 남은 얇은 속옷은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적응이 된 걸 넘어서 이젠 은호의 손이 닿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아래가 젖어 들곤 했다.
은호가 그녀의 속옷 끝을 잡아당기며 천이 음부에 쓸리도록 비비기 시작했다. 간지럽히는 것 같기도 하고, 얄궂게 긁어 대는 것 같기도 한 저릿한 자극에 서희가 몸을 바동거리며 신음을 터뜨렸다.
“으, 은호야…….”
안 그래도 예민하게 부푼 돌기와 물기로 질퍽질퍽해진 구멍이 함께 야릇한 자극을 받고 있었다. 서희는 발끝이 찌릿해지는 감각에 엉덩이를 들썩이면서도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듯한 부족함을 느꼈다.
“으응, 벗겨, 줘…….”
은호는 군말 없이 속옷을 끌어내려 벗겨 주었다. 알몸이 된 서희가 등을 돌려 은호를 마주했다.
“이제 또 어떻게 해 줄까?”
흥분을 이기지 못해 속옷을 벗겨 달라고 요구한 마당에 더 뺄 것도 없었다. 그녀가 부끄러워하면서도 속삭이듯 말했다.
“……만져 줘, 은호야.”
은호가 고개를 젖히며 진한 한숨을 흘렸다.
“너 정말…….”
은호가 터질 듯한 음욕을 억누른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사타구니 아래로 들어갔다.
“여기? 이렇게 만져 줘?”
“흣, 응…….”
은호가 빨갛게 달아오른 돌기를 찾아 조몰락거렸다. 부드러운 소파에 무릎을 꿇은 채 허벅지를 들고 그의 손길이 깊어질수록 허리를 야하게 달싹거리는 서희의 모습을 보며 그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짧은 욕설을 흘렸다.
“서희야, 자꾸 나 미치게 할래?”
은호가 몸을 숙여 이미 잔뜩 곤두선 음핵을 빨았다.
“아, 읏, 안 돼. 입으로…… 하지 마. 안 씻었단 말이야.”
“네가 이렇게 야하게 구는데 내가 어떻게 참아, 바보야.”
은호가 혼이라도 내듯 서희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었다. 서희는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한 자극에 허리가 쭈뼛쭈뼛 세워졌다. 허벅지 사이에 위험할 정도로 열이 번졌다. 그가 음핵을 혀로 뭉그러뜨리자 경련이라도 난 듯 두 다리가 벌벌 떨렸다.
“은호야…….”
애원하듯 늘어뜨린 목소리에 은호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그녀를 엎드리게 한 그가 콘돔을 씌우자마자 뒤에서 성기를 맞추었다. 그리고 서서히 허리를 밀자 귀두가 그녀의 안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아읏…….”
수차례 관계를 맺었지만 아직 처음의 삽입은 어쩔 수 없이 늘 버거웠다. 이제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아무리 정성스럽게 애무를 하고 여성을 풀어 놔도 그랬다. 그녀의 동굴은 너무 비좁았고, 그가 가진 거대한 물건의 첫인사는 늘 흉악스러웠다.
“착하지, 서희야.”
“흐으읏…….”
“우리 서희, 오물오물 잘 삼키네.”
은호가 기둥을 반쯤 삽입한 채 칭찬하듯 그녀의 하얀 엉덩이를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그의 페니스는 참을성 있게 느릿느릿 진입했다. 마치 길을 만들어 나가듯.
“조금만 더 먹자. 응?”
이제 서희는 은호의 ‘조금만’이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물건을 밀고 들어왔다. 그녀가 이젠 다 들어왔겠지, 하고 바람에 가까운 확신을 가진 순간에도 다시 몸을 꾹 누르며 성기를 밀어 넣었다.
서희는 소파에 엎드린 상태로 달뜬 숨을 뱉었다. 은호의 손아귀에 붙들려 엉덩이가 천장 쪽으로 들린 채 그의 물건을 그득 삼켜 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자 새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잘했어, 서희야.”
은호가 서희의 엉덩이에 몸을 문지르며 속삭였다.
“이제 더 맛있게 먹여 줄게.”
빠듯하게 페니스를 감싸고 있던 내벽이 그가 몸을 빼는 순간 허전해졌다. 그러나 안타까움을 다 느낄 새도 없이 그가 다시 푹, 몸을 찔렀다.
“아!”
그의 물건이 가득 들어차는 동시에 눈앞이 뿌옇게 번졌다. 은호가 허리를 들썩이는 속도를 높일수록 등줄기에 짜릿한 쾌감이 일어섰다. 방향을 살짝 바꿔 가며 여러 곳을 쿡쿡 찌르고 쑤셔 대는 움직임에 애가 타기도 하고, 당장 죽을 것처럼 자지러지기도 했다.
“왜 이렇게 꽉꽉 물어.”
그가 밀려올 때마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질벽이 쫀득하게 남성에 달라붙었다.
“윽, 바로 쌀 거 같잖아.”
“으응!”
나름대로 최대한 참고 있었던 신음은 이제 그의 허리 짓을 보채듯 쉴 새 없이 교태스럽게 쏟아졌다. 앙앙거리는 교성이 커지자 페니스를 밀어 넣는 그의 몸짓은 더욱더 거칠고 사나워졌다.
귀두가 예민한 지점을 꾸욱 뭉근하게 찔렀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쾌감에 발가락이 절로 오므라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벌벌거리는 서희의 목덜미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초점이 나간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시야에 무언가가 계속 담기고는 있었지만 본다는 감각을 잠시 잃은 상태였다. 아랫도리는 물론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쾌락에 빠져 다른 감각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배 속을 휘젓는 듯한 페니스의 사나운 움직임과 그것이 제 몸에 전해 주는 쾌감만이 지금의 그녀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가 허리를 세게 밀어 올 때마다 그녀 역시 엉덩이를 뒤로 빼며 그의 뿌리 끝까지 집어삼키기 위해 애를 썼다. 본능을 찾아가는 동물처럼 그녀가 이성과 부끄러움을 잊고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인다는 것은 쾌락의 정점에 다가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끝없이 성기가 비벼지며 퍽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마찰했다.
그렇게 얼마 버티지 못하고, 눈앞에 하얀 빛이 쏟아지는 감각과 함께 서희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숨조차 참은 채 아득한 절정을 만끽했다.
곧이어 은호의 격렬한 몸짓도 멎었지만 아랫도리는 여전히 끓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욱신거렸다. 애액으로 질척한 음부를 닦아 주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서희는 반쯤 뜬 눈으로 멀거니 허공을 응시했다.
“서희야.”
은호가 서희의 몸을 돌려 어깨를 끌어안더니 달콤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사지 어땠어?”
“……마사지?”
“응. 내가 지금 아래 마사지 열심히 해 줬잖아.”
“또…… 이상한 소리.”
“이상한 소리는. 여기는 손가락으로 다 닿지가 않으니까 내 거 넣어서 열심히 마사지해 준 건데?”
은호가 여전히 촉촉한 서희의 아래를 문지르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면 내가 이렇게 어깨도 풀어 주고 아래도 매일매일 마사지해 줄 건데. 진짜 안 끌려?”
“치…….”
“지금 바로 하자는 거 아니고. 내년 안으로만 하자.”
“인우 오빠랑 현호 오빠 먼저 간 다음에 해야지.”
“그 둘 평생 혼자 늙어 죽을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 알고 하는 소리야? 몇 년 일찍 태어났다고 먼저 가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그거 진짜 고루한 사상이야.”
벌컥 쏟아 내던 은호가 불현듯 눈동자를 키웠다.
“어? 나랑 하긴 할 거야? 결혼?”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은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죽지 않고 여전히 꼿꼿하게 발기된 페니스를 그녀의 허벅지에 문지르며 그가 속살거렸다.
“언제 할까? 내년 봄? 가을?”
“내년은 너무 이르고, 우리 서른 되는 해에 하면 딱 좋을 거 같아.”
“……뭐? 너 우리 나이 까먹었어? 우리 지금 스물일곱이야.”
충격을 받은 은호가 동작을 멈췄다.
“나 아직은 결혼보다 연애를 오래 하고 싶어, 은호야.”
서희는 그런 그의 품을 파고들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게 미소 지었다.
“결혼 안 해도, 지금 이미 너무 행복하단 말이야.”
결국 밤이 깊어지도록, 그녀는 강씨 집안 공인 여우 강은호에게 진짜 여우는 따로 있다는 소리를 질리도록 들어야 했다.
* * *
휴대폰 화면이 번쩍 빛났다. 충전 케이블을 뽑아낸 서희는 방금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찬성에게 온 문자였다.
[은호한테 소식 들었어. 둘이 만난다며? 너무 축하하고, 괜찮으면 저번처럼 모여서 또 놀자. 근데 강은호가 너 꽁꽁 싸매고 안 보여 주려고 하더라. 그 자식 혼 좀 내 줘.]
문자를 읽은 서희의 표정이 어쩐지 살짝 가라앉았다. 그때 욕실에서 나온 은호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뭐 해?”
“문자가 와서.”
“누구한테?”
“찬성이.”
“고찬성?”
은호의 음성이 단번에 비딱해졌다. 그가 안고 있던 팔을 풀며 그녀와 마주했다.
“뭐야. 그 녀석이 네 번호를 어떻게 알아?”
“그때 술자리에서 만났던 날, 네 친구들이 번호 알려 달라 해서 교환했었어.”
“언제!”
“너 잠깐 화장실 갔을 때.”
은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 자식들이 진짜…….”
그런 은호의 반응을 보며 서희는 아까보다 더 안색이 흐려졌다.
“뭐야, 그럼.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녀석들하고 연락했었어?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녀는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었다.
“은호야, 너…… 혹시 내가 창피해? 그래서 네 친구들한테 나 보여 주기 싫은 거야?”
“뭐?”
“내가 말주변도 부족하고,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는 편도 아니니까. 혹시 그래서…….”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은호는 서희의 말이 황당하다 못해 답답함이 치미는 듯한 얼굴이었다.
“네가 창피하냐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인간들이 나한테서 너 훔쳐 가면 어떡하나 걱정하고 그러는데…….”
흥분해서 설명하던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장난감 이런 거 절대 아니고! 그냥…… 겁난단 말이야. 네가 너무 특별하고 귀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여전히 서희의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은호는 애가 타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네가 제일 소중한데 어떻게 널 창피해하겠어? 애초에 고찬성 걔네들이랑 계속 어울리는 것도 네가 그러라고 해서 열심히 네 말 들은 건데.”
“어? 내가?”
“기억 안 나? 고등학교 때, 내가 그 녀석들 얘기 하니까 네가 그랬잖아. 착하고 좋은 애들 같으니까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서희는 희미한 기억을 되살렸다.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있긴 했다.
집안 배경이 평범하지 않은 만큼 은호는 아주 어릴 적부터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속물 같은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은호는 그런 일에 익숙하다는 듯 코웃음도 안 쳤지만, 이미 예전에 환멸을 느끼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주는 것을 포기한 듯 보이기도 했다.
찬성을 포함한 친구들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난 적은 없지만 배경이나 돈 때문에 은호에게 접근하던 애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부터 집안까지 모든 게 특출난 은호를 떠받들거나 비굴하게 굴지도 않고, 주변의 평범한 친구를 대하듯 편한 분위기라고 했다.
그런 녀석들은 꽤 오랜만이라며 제법 신선해하던 은호에게 좋은 친구들이 되어 줄 것 같으니 앞으로 싸우지 말고 오래오래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확실히 있었다. 초등학교 때야 저 말고도 친구가 많은 은호를 보며 불안함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그 많은 친구들에게 마음 없이 겉으로만 웃는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니까.
자신은 이 유별나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친구를 잘 못 사귀어도, 착한 친구들이 곁에 다가온 듯한 은호는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좋은 관계로 이어 나가기를 바랐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게…….”
서희는 입술을 세게 물었다가 뗐다.
“고등학교 때 채아가 너 다니는 학교 앞에 찾아갔었던 거 기억해? 그때 네가 채아한테 나는 절대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면서. 그래서 내가 창피해서 그런 건가 싶었어.”
“그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열아홉 때부터 지금까지 해 온 거야?”
은호는 서희가 찬성 무리와 처음 만났던 저번 술자리에서, 그녀가 왜 저에게 조금 차갑게 구는 것 같다고 느꼈는지 비로소 깨달은 얼굴이었다.
“진짜 속상해 죽겠다. 나한테 바로 물어봤어야지.”
“넌 채아 얘기 나오면 표정부터 굳어지잖아.”
“그건.”
은호는 짙은 한숨을 쏟아 냈다.
“서희야, 나 걔랑 진짜 아무것도 없어. 무슨 감정 같은 거 남아서 숨긴 거 아니라고.”
서희가 조심스럽게 그를 응시했다.
“근데도 채아 얘기는 계속 나한테 다 비밀이야?”
은호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잠시 그녀의 눈길을 피한 채 망설이는 듯하던 은호는 그녀가 손을 더 굳세게 잡아 오자 다시 눈을 맞췄다.
“……다 얘기해도 나한테 화 안 낸다고 약속해.”
서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가 몇 번을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가 예전의 일을 풀어낼수록 그녀의 안색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말을 마친 은호는 잡고 있던 손을 놓는 서희로 인해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화 안 내기로 약속…….”
“만약에 똑같은 상황에서 내가 너랑 똑같은 선택을 했으면, 너도 나한테 화 안 낼 자신 있어? 어떻게 그걸 지금까지 숨겨?”
“……내가 다 잘못했어, 서희야.”
안타까움이 번질 만큼 은호가 처연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지만 서희는 차갑게 외면했다. 너무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지금 당장은 이 감정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