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11화
본문
10. 확신
재우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 서희는 함께 따라나서는 은호를 영 미덥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데려다주기만 할게. 어?”
은호가 아무도 해치지 않을 듯한 선한 눈빛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서희로서는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동안 내 고민 진지하게 들어 주고 여러 가지로 도와줘서 감사했다고 짧게 인사만 하고 올 거라니까.”
“감사는 무슨. 그 남자가 너 어떻게든 꼬셔 보려고 수작질했던 건데.”
서희의 곁에서 틈만 나면 파고들 기회를 엿보았을 재우를 떠올리며 시니컬하게 코웃음 치던 은호는 금세 다시 가면처럼 무해한 미소를 덮어 썼다.
“절대 대화 방해 안 할게. 아예 너 올 때까지 차에서 얌전히 기다릴 거고. 운전기사 노릇만 하게 해 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싫어? 응?”
은호의 끈질긴 고집에 서희는 결국 속는 셈 치며 그의 차에 올라탔다.
재우와 만나기로 약속했던 카페에 금방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서희는 카페를 향해 걷다가 제 옆에 있는 은호를 지그시 응시했다. 차에서 기다린다더니 역시나. 그 시선을 인지했는지 그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열심히 운전했더니 목이 마르네. 뭐 좀 마셔야겠어.”
카페에 들어서자 바로 앞에 재우의 등이 보였다.
“선배.”
“어, 비슷하게 도착한 모양이네. 나도 지금 왔거든.”
뒤를 돌아본 재우가 서희를 향해 웃더니 그 옆에 선 은호와 눈을 맞췄다. 여전히 살벌하고 적나라한 대화를 눈빛으로 나누던 두 남자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서로에게 인사했다.
“같이 오셨네요?”
“네. 차재우 씨하고 약속 끝나는 대로 데이트할 거라서요.”
은호가 서희의 어깨를 팔로 다정하게 감싸며 말했다.
“아, 그래요? 최대한 늦게까지 시간 끌어 봐야겠네.”
재우가 담담히 중얼거리더니 그녀에게 눈짓했다.
“뭐 마실래?”
“아, 저는…….”
“서희 건 제가 사야죠. 차재우 씨 것도 제가 살까요?”
“지금 서희랑 약속한 건 저니까 제가 사야죠. 그리고 제가 거지도 아니고, 강은호 씨한테 왜 얻어 마시겠어요?”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여유가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험악한 분위기는 감추기 어려웠다. 그들의 실랑이는 서희가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는 계산대 앞으로 가까이 간 순간 멎었다.
“밀크티 한 잔 주세요.”
“밀크티, 한 잔요. 드시고 가세요?”
“네.”
야무진 손길로 체크 카드와 적립 카드를 꺼내서 내미는 서희의 뒷모습을 머쓱하게 지켜보던 두 남자는 결국 자신들의 음료를 각자 계산했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서희는 은호에게 더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 눈짓했다. 은호는 불만스러움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난 저쪽 멀리에 앉아 있을 테니까 편히 대화 나눠.”
저쪽 멀리, 라고 분명 말해 놓고 은호는 서희와 재우가 앉은 테이블과 두 테이블 떨어진 자리에 음료 잔을 내려놓았다.
자리를 많이 만들기 위해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붙은 카페였다. 시간대가 어중간해서인지 사람도 거의 없었고 음악도 틀지 않아 이 정도 거리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은호의 심술에 서희는 재우를 향해 미안한 얼굴을 했고, 그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웃었다.
“일단 축하부터 해야겠지?”
재우가 씁쓸해진 얼굴로 말했다.
은호와 마음을 솔직하게 나눈 뒤, 재우에게도 그와 사귀게 되었다고 전화로 이야기했었다. 그는 그때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을 지키다가 어렵게 꺼내 놓은 그의 말에 그녀는 제법 놀랐다.
‘사실 알고 있었어. 강은호 씨가 너 좋아한다는 거. 모를 수가 없더라.’
셋이 만났던 날, 은호가 재우의 마음이 진심임을 바로 알아차렸던 것처럼 재우 역시 그가 서희를 단순한 친구로 보고 있지 않음을 느꼈다고 했다.
“다친 데는 괜찮아?”
“네. 심하게 난 상처도 아니었는데요. 도율이가 그때 많이 놀랐던데, 지금은 괜찮아진 거죠?”
“엄청 쌩쌩해. 그리고 자기 구해 준 누나 보고 싶다고 가끔 떼쓰더라.”
“저를요?”
“응. 너한테 반했대. 커서 장가갈 거라던데?”
“아…….”
서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날 일을 떠올린 재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말 미안했어. 내가 도율이 잘 챙겼어야 했는데…….”
“왜 자꾸 사과하세요. 그러지 마세요.”
“마음에 자꾸 걸리더라고. 내 잘못 때문에 좋아하는 여자한테까지 피해 준 꼴이니까.”
“…….”
차를 마시고 컵을 내려놓던 서희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은호에게 들어서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지난 통화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러나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이 자리에서 저렇게 툭 내뱉을 줄은 몰랐다. 만약 그가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저도 모르는 척할 생각이었다.
“죄송해요. 전혀 몰랐어요.”
“죄송할 게 뭐 있어. 내가 고백도 안 했는데 모르는 게 당연하지.”
결과를 이미 알면서도 마음을 고백한 재우는 어딘가 후련한 표정이었다.
“꽤 오랫동안 좋아했어. 네가 강은호 씨 좋아해 온 시간이나 강은호 씨가 널 좋아해 온 세월보다야 짧겠지만.”
재우는 여전히 따스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서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문득 혼잣말처럼 되뇌었다.
“넌 식물 같아.”
“네?”
서희가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동시에 재우 역시 놀라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식물 같다는 말을 나쁘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식물인간 등 식물 같은 사람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생명력이 없고, 죽어 있는 느낌을 주니까.
“식물 같다는 말……, 처음 들어 봐요.”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네 곁에 있으면 숲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재우가 다급히 설명을 쏟아 냈다.
“보면 볼수록 질리지도 않고, 오히려 더 오래 보고 싶고 그런 뜻으로……. 내가 너 좋아한 이후로 식물 사진 많이 찍었는데, 늘 가만히 있고 정적으로 보여도 더 생명력이 넘친다고 생각하게 됐거든. 사람들도 못 버틸 폭우에도 끝까지 굳세게 버텨 내니까. 절대 나쁜 뜻 아니고! 따지자면 칭찬인데. 이상하게 들리려나?”
난감해하던 재우는 서희의 눈빛이 맑게 반짝거리는 것을 확인하곤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볼이 발갛게 물든 서희가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재우는 넋을 잃고 말았다. 그녀를 처음 마음에 담았던 순간 꿈꿨던, 오롯이 저만을 위한 환한 미소를 드디어 보게 되었다. 이번이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그 사실을 전부 잊을 만큼 달콤하고 아름다웠다.
“당연히 칭찬이죠. 식물 같다는 말. 그게 어떻게 나쁜 뜻이 돼요? 너무……, 너무 기분 좋은 말인데.”
재우는 안도하며 웃었다. 하긴. 어릴 때부터 식물에 빠져 살던 서희에게 식물 같다는 말이 어찌 칭찬이 아닐 수 있을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으니, 서희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계산했던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저토록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괜스레 가슴이 벅찼다. 강은호를 만나기 전에 먼저 날 만났다면, 혹시 날 좋아해 줬을까. 그런 부질없는 상상마저 들었다.
고백도 하기 전에 차였음에도 이런 상태라니.
당분간은 계속 재희에게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거냐는 잔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겠다는 각오가 선다. 식물 같은 서희를 쉽게 잊기 힘들 테니.
그녀와 몇 마디를 더 나눈 재우는 뒤통수가 너무 따가우니 이쯤에서 일어나야겠다는 농담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와 인사를 마치고 뒤를 돌자 두 테이블 뒤에 떨어져 앉은 남자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또 사람 속을 뒤집는 말을 던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했다. 아니,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그의 분위기가 상당히 어둡고 서늘했다. 왜 저렇게 열받은 건지 의아해하다가 대충 이유를 짐작한 재우는 그를 약 올리듯 휘파람을 불며 카페를 빠져나갔다.
“은호야?”
반 정도 남은 밀크티 잔을 가지고 은호의 앞자리로 옮겨 앉은 서희가 그를 불렀다. 잠시 반응이 없던 은호가 이내 눈길을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서늘하게 식은 눈동자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어떻게 그래.”
“어? 뭐가?”
“그 남자 앞에서 왜 그렇게 활짝 웃었어? 얼굴은 왜 빨개졌어? 너 그 자식한테 설렌 거야?”
그가 매섭게 그녀를 추궁했다.
“아, 아니야.”
재우와 앉았었던 테이블을 정리하러 온 아르바이트생이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늘 있는 일처럼 그의 잘생긴 얼굴에 홀딱 반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경계하는 듯한 눈초리.
서희는 그가 방금 한 말이 아르바이트생의 귀에 들어갔음을 알아차렸다. 확실히 건강한 연인 관계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대화는 아니었다. 게다가 가벼운 질투라기엔 그에게서 지나치게 심각하고 무거운 분위기까지 느껴지니 오해할 만도 했다.
“그게…….”
서희는 난처한 듯 이마를 매만졌다.
“식물 같다는 말 들으니까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나 기분 좋으면 얼굴 잘 빨개지는 거 너도 알잖아.”
“지금까지 내 앞에서만 그랬잖아. 다른 사람들 앞에선 절대 안 그랬어, 너.”
은호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말도 나한테만 했잖아.”
“그 말?”
“……처음이라는 말.”
‘재능 있다는 말, 처음 들어 봐.’
‘식물 같다는 말……, 처음 들어 봐요.’
은호는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주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장난으로 부리는 투정이 아니었다. 서희가 멍한 얼굴로 재우에게 그 말을 했을 때 진심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서희가 그 말을 할 때는, 그녀의 견고한 마음에 그 사람의 존재가 크게 부풀 때라는 것을 은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계속 헛발질을 하며 시간을 더 낭비했다면 서희가 정말로 차재우에게 마음이 기울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등줄기가 스산해졌다.
“나는 그냥 너무 과분한 칭찬 들어서 기분 좋아서 그런 거야. 정말 그거 말곤 다른 뜻 없어.”
그녀가 나긋나긋하게 말했으나 그의 가슴에 찬 불안감은 잠재울 수 없었다.
* * *
은호는 하루가 저물어 갈 때까지 내내 저기압이었다. 하지만 성난 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면서도 서희의 집에 계속 있는 걸 보면 저를 얼른 풀어 주고 불안함을 해소시켜 달라는 뜻 같기도 했다.
“은호야, 아직도 화났어?”
서희가 은호의 등 뒤로 다가서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그녀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원목 책상 위에는 서희가 그림을 그리다가 놔둔 종이가 보였다.
“이거 또 그리고 있네.”
“아, 응.”
집 앞에 있는 버드나무를 그리고 있었다. 나무를 친구로 삼던 어린 서희의 첫 번째 나무 친구이기도 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은 버릇처럼 이 가로수를 그리곤 했다. 어릴 때 서투르게 그린 그림부터 지금은 제법 정교하게 그리게 된 세밀화까지 다 모으면 열 장도 넘는다.
“서희 너, 이 나무 진짜 좋아하잖아. 누가 이 나무 앞에 쓰레기 무단 투기하고 갈 때마다 너 되게 화나고 속상한 얼굴 했었는데.”
은호는 책상에 팔을 기대며 그 위로 턱을 묻었다. 그의 가라앉은 눈길이 여전히 버드나무에 향해 있었다.
“나무는 좋겠다. 김서희가 평생 질리지 않고 좋아해 줄 테니까. 불안할 필요도 전혀 없을 거고.”
“왜 그래, 은호야.”
그녀가 민망한 듯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근데 버드나무는 이별의 상징 아니야? 이 나무 그만 그리면 안 돼?”
“아, 맞아. 연인이 헤어질 때 이별의 증표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서 준다고도 하니까.”
서희는 은호와의 이 서먹한 분위기를 풀고 싶어서 급히 말을 이었다.
“혹시 그것도 알아? 제주도에서는 버드나무 가지가 가벼워서 바람에 잘 흔들리니까 변하기 쉬운 사람 마음 같다고 생각했는지, 집 안에는 절대 안 심는대. 바람피워서 부부 사이 나빠진다고.”
서희 딴에는 재밌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말이 끝나자마자 은호의 등이 굳어졌다. 그가 허리를 똑바로 세우더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김서희 진짜 무신경하다.”
“어?”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예민해졌는지 모르는 거야? 근데 내 앞에서 버드나무 바람 어쩌고 하면 나더러 더 불안에 떨라는 소리야?”
눈을 크게 깜빡거리던 서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예민해진 게…… 내가 바람피울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
“재우 선배한테 웃은 거 때문에 거기까지 간 거야?”
재우에게 활짝 웃고 얼굴이 좀 붉어진 것 때문에 토라져서 질투하는 정도인 줄 알았는데, 이미 은호의 머릿속에선 그녀가 바람을 피울 가능성까지 떠오른 모양이었다.
“나, 바람 안 피울 거야.”
“어떻게 확신해? 나에 대한 네 마음, 끽해야 3년이면 어떡할 건데.”
“그건 너도 그렇잖아.”
“내 마음이 끽해야 3년일 거 같아?”
은호가 세상에서 제일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실소하며 묻는 말에 서희는 찬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안 불안하지?”
이번엔 느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호의 감정을 몰랐을 때야 마음고생을 험하게 했지만 사랑을 확인한 뒤부턴 그의 마음에 먼지만 한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불안마저 싹 가실 만큼 은호는 그녀를 사랑했고, 넘치도록 애정을 표현해 줬으니까.
“서희야.”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긴 그가 그녀를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키스해 줘.”
서희는 살짝 당황했다.
그가 고백했던 날, 먼저 첫 키스를 시도한 적도 있었건만 키스해 달라며 저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그의 눈길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몰렸다.
그땐 첫 키스라고 부르기도 애매할 만큼 살짝 입술을 맞췄다 뗀 수준이었고, 그 후로는 늘 그가 먼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나이에 맞는 무척 깊고 농밀한 키스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은호의 눈빛은 애들이나 할 법한 유치한 입맞춤이 아니라 몸이 달아오를 것 같은 뜨거운 키스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가까워졌는데도 주저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를 리드하는 건 자신에겐 아직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얼른.”
부탁보다는 명령이나 강요에 가까운 말투였다. 그가 평소답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그에게 어떤 식으로 키스를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때 은호가 눈을 감았다. 남자치고 긴 속눈썹이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희는 잠시 그의 매끈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교한 이목구비와 남자다운 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오랫동안 질리도록 본 얼굴인데도 새삼 감탄하게 될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먼저 키스해 줄 때까지 그대로 있겠다는 듯 약간의 미동도 없었다. 망설이던 그녀는 천천히 그의 반듯한 입술에 제 것을 내렸다.
그가 자신에게 하던 것처럼 촉촉한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상상 이상으로 감촉이 좋았다.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혀를 안으로 밀었다. 그는 짓궂게 굴지 않고 순순히 입술을 열어 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의 혀를 제 혀끝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서투른 키스 실력을 그가 비웃을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괜히 창피했다.
다행히 은호는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길게 괴롭히지 않았다. 어쩌면 더는 참기 어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서희의 허리를 옥죄듯 감싼 그가 지금껏 가만히 있던 혀를 미끄러트렸다.
축축한 것이 그녀의 혀를 잡아채더니 깊게 옭아맸다. 정신이 흐릿해질 만큼 빨고 당겨 댔다. 그의 하체와 맞닿아 있는 아랫도리가 뜨거워졌다. 더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그녀의 몸이 어느새 침대로 옮겨진 뒤였다.
“은호야…….”
욕망에 잠식된 눈빛을 확인한 그녀가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응?”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멈춰 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녀가 입은 셔츠 단추가 그의 손길에 빠르게 풀어졌다.
“아직 너무…… 빠른 거 같아.”
“어차피 우리 결혼할 거니까 언제 하든 상관없어.”
서희의 하얀 목덜미를 물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빠른데? 너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너한테 나뿐이잖아. 근데 왜 자꾸 미뤄? 딴생각하는 거야? 너 앞으로 평생 나랑만 섹스해야 돼, 서희야. 내가 너 딴 놈한테 뺏길 거 같아?”
그의 송곳 같은 말투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그가 마치 낯선 남자처럼 느껴졌다. 버드나무 얘기를 하는 그녀의 무신경함을 탓할 때만 해도 말로 잘 풀어 주면 될 줄 알았지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일 줄은 몰랐다.
“네가 이 방에서 나한테 안아 달라고 했었지?”
그가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물었다.
“이 방 들어올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돌아 버릴 것 같아. 네 눈빛, 떨렸던 몸, 그 몸을 안았던 감촉까지 너무 생생해. 그걸 떠올릴 때마다 여기가 이렇게 돼.”
은호는 서희의 손을 끌어당겨 제 중심을 만지게 했다. 그의 허벅지에 앉았을 때도 그녀를 놀라게 했던 물건이 더 강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바지를 뚫고 나올 듯 곤두서 있었다.
딱딱하고 뜨거웠다. 옷 위를 만지고 있는데도 너무도 야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는 그녀의 몸을 만지는 대신 그녀의 손으로 제 것을 느릿하게 쓸었다. 그녀가 거북해하거나 싫어하기보다 부끄러운 표정을 짓자, 그녀를 두 다리 사이에 가두고 앉아 바지 안에서 성기를 꺼냈다.
바로 앞에서 그의 검붉은 성기가 위협적으로 끄떡거렸다. 그녀의 손을 다시 끌어온 그는 위로 치솟은 페니스를 감싸게 했다. 그의 힘에 의해 그녀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페니스를 훑었다. 신음에 가까운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귀를 어지럽혔다.
서희는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왜 갑자기 이렇게 문란한 행위를 하게 된 걸까. 그녀로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게, 이전까지 그들은 아직 포옹과 입맞춤이 고작인 풋풋한 연인이었다.
물론 그 속도는 오로지 서희만이 원한 결과였다. 그와의 스킨십에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너무 빨리 관계를 갖는 게 염려되었다.
은호를 믿지 못한다거나 감정에 확신이 없는 건 아니었고, 그저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 보수적이고 원체 조심스러운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동안 제 마음을 시꺼멓게 타게 한 은호에게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하고 싶었던 마음도 아예 없다고 부정하진 못하겠다.
은호는 가끔 그녀에게 투정을 부리긴 했어도 그녀의 뜻을 존중했다. 입맞춤을 나눌 때면 허리를 야릇하게 쓸며 어떻게든 그녀의 호응을 이끌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거기까지였다. 가슴을 만지거나 허벅지 안쪽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진 상황은 차곡차곡 밟아 가던 순서를 확 뛰어넘었다. 서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남자의 성기를 애무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감당이 안 될 만큼 부끄럽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핏줄이 불거진 그의 물건은 한 손으로 다 감싸기도 어려울 정도로 크게 부풀어 있었다. 페니스를 위아래로 쓸어내릴 때마다 더욱 단단하게 굳어지는 듯했다. 귀두 끝에는 맑은 물이 맺혔다.
서희의 눈이 힐긋 그에게로 향했다. 상체를 단정하게 감싼 셔츠 아래 바지와 속옷을 내려 은밀한 부위만을 드러낸 그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음란하고 관능적이었다.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를 응시한 채 갈라진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한층 탁해진 그의 눈빛은 그녀마저 몽롱한 기분에 휩싸이게 했다.
사납게 꺼떡이는 기둥은 두 사람의 손이 함께 움직일 때마다 거센 욕망을 쌓아 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이게 제 몸 안에 들어온다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그 순간, 예고도 없이 페니스에서 하얀 정액이 터져 나왔다. 성기를 훑던 움직임을 멈춘 그가 그녀의 몸을 조준해 정액을 토해 낸 것이다. 질척한 액체가 그녀의 옷을 적셨다.
“아…….”
서희가 멍한 얼굴로 정액이 묻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수컷의 향이 코끝을 찔렀다. 이제 끝난 걸까.
그가 이쯤에서 마음을 풀지도 모른다고 예상했으나 그건 그녀의 헛된 착각이었다. 꽤 많은 양의 정액을 배설했음에도 그의 눈엔 사정 전보다 더욱 검고 짙어진 열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서희는 그가 지금 진심으로 끝까지 가기로 작정했음을 알았다. 그녀는 난처한 듯 입술을 살짝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 밀어내야 할까, 아니면 모르는 척 응해야 할까.
그러나 어느새 그녀의 몸도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저 부끄럽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남자의 은밀한 곳을 애무하면서 저도 모르게 흥분해 버린 것이다.
적극적으로 굴 용기는 여전히 없었지만 제 몸 역시 이토록 뜨거워졌는데 밀어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서희는 제 옷을 거칠게 벗겨 내는 그를 제대로 막지 않았다.
평소와 전혀 다른 그의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낄 만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감정은 일지 않았다.
할아버지마저 떠난 뒤 그녀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가 저를 함부로 다루거나 상처를 줄 리 없다는 믿음이 뿌리 박혀 있었다. 다른 의심이 파고들 여지 따윈 없었다.
은호의 손길에 의해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변했다. 그녀가 이불을 끌어와 제 몸을 어떻게든 가리려는 동안, 그는 자신의 옷마저 완전히 벗어 던졌다.
은호의 헐벗은 상체를 동공에 담은 그녀가 숨을 삼켰다. 수줍음조차 잊을 만큼 감탄이 나오는 근사한 몸이었다.
물론 은호의 몸이 좋다는 건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옷으로 감싸고 있어도 훤히 드러나는 넓은 어깨와 단단한 팔뚝이 그녀를 늘 설레게 하곤 했으니.
자기 관리가 철저한 은호가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수영과 헬스 등의 체력 단련을 빼먹지 않는다는 걸 서희는 알고 있었다. 날 때부터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난 몸을 매일같이 운동으로 단련한 성과를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근육이 적당하게 붙은 날렵하고 아름다운 몸매였다. 성난 것처럼 세밀하게 쪼개진 등 근육도 멋지지만 역시 앞쪽이 더 눈길을 끌었다. 직각으로 된 넓은 어깨 아래 탄탄하게 짜인 가슴 근육을 보고 있자 말랐던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여유 있게 그의 몸을 감상할 시간은 부족했다. 이불을 휙 치워 내며 그가 그녀의 몸 위에 올라탄 것이다.
“네가 안아 달라고 했던 날, 친구고 뭐고 다 잊고 당장 네 안에 내 걸 쑤셔 박고 싶었어.”
은호가 서희의 아랫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말했다.
서희의 입술 사이로 흐트러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깨문 입술이 아파서가 아니라 어느새 젖가슴을 붙든 커다란 손아귀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의 보드라운 가슴을 쥐고 느리게 주무르고 있었다.
“남자 앞에서 이렇게 야한 몸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보여 줬어? 겁도 없이.”
“아, 안…… 쉬웠어.”
“나 말고 다른 남자 앞에서 그랬으면, 그 새끼 눈 뽑아 버렸을 거야.”
내뱉고 있는 말의 험악한 내용과 상반되게 그는 그녀의 입술 위에 제 것을 달콤하게 문질렀다.
“……다른 남자 앞에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서희가 원망스럽다는 듯 그를 흘기며 속삭였다. 그 대답이 그는 꽤 만족스러웠는지 드디어 엷게나마 미소를 보여 주었다.
“우리 서희, 왼쪽 젖꼭지 옆에 점이 있네.”
“……점?”
“응. 작은 까만색 점. 친구일 때는 열 개밖에 몰랐는데.”
“열 개나 알아? 어디?”
서희가 의아한 듯 묻자 은호가 친절히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시작했다.
“우선 여기, 눈꼬리 아래쪽.”
이걸 얼마나 핥아 보고 싶었는데.
나른하게 중얼댄 그가 정말로 그 작은 점을 혀끝으로 매끈하게 핥아 올렸다.
“그리고 여기, 쇄골 위에 갈색 점. 또…….”
은호는 어디였더라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콕콕 찌르며 알려 주었다. 마지막으로 왼쪽 발목에 있는 미세한 점까지 찾아내자 서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몸의 주인인 저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걸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해?”
“말했잖아. 너에 대해서는 잊고 싶어도 못 잊는다고.”
은호는 유륜 바로 옆에 난 까만 점을 혀로 할짝거렸다.
“서희는 점도 이렇게 야하네.”
혼잣말처럼 되뇌는 말에 서희는 창피해졌다.
점을 콕콕 찌르던 혀가 이내 단단하게 굳은 젖꼭지로 향했다. 가슴을 손안 가득 쥔 채 유륜을 혀로 날름거리다가 열매처럼 부푼 유두를 입술 사이로 머금는다. 이미 예민해진 정점을 그가 힘을 주어 빨아 댔다.
“으응…….”
서희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기 어려웠다. 은호가 그녀의 한쪽 가슴을 손으로 쉴 새 없이 주무르며 다른 한쪽 위에 얼굴을 박고 세차게 빨고 있었다.
양쪽 가슴이 그의 입술과 손으로 무자비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이를 세워 젖꼭지를 살며시 깨물 때면 서희의 얼굴은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감정으로 이지러졌다. 그가 그녀의 부드러운 살덩이를 잡고 혀로 핥고 쪽쪽 빠는 질척한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 배꼽 위에도 있네.”
또 연인만이 알 수 있는 위치의 점을 찾은 모양이었다. 지금 그의 혀끝에 뭉개지는 부분이 찾았다는 점의 위치일 것이다.
“여기에도 있을까?”
은호가 까맣게 자란 음모를 쓸며 말했다. 그의 은밀한 손은 그 아래쪽을 파고들 것처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거, 거긴 없어.”
“어떻게 알아? 봤어?”
은호가 서희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젖히며 다물어져 있던 속살을 벌렸다. 이미 대음순까지 미끌미끌하게 젖어 있었다.
“엄청 젖었어. 알아?”
“……아니야.”
“아니라고? 여기 이 작은 구멍에 물이 꽉 차 있는데?”
은호가 입구 쪽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말했다. 닿을 때마다 찰박거리는 그 소리만 들어도 구멍에 물이 꽉 차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은 명확했다. 서희는 고개를 옆으로 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은호는 애액이 샘솟는 구멍에 손가락을 느릿하게 찔렀다. 서희는 그런 그의 행동을 막지 못하면서도 긴장한 듯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서희야, 힘 빼.”
은호가 속살거리듯 말하곤 손가락을 쿡 밀어 넣었다. 이미 많이 젖어서인지 손가락 한 개 정도는 수월하게 환영을 받았다.
안을 휘휘 젓다가 질벽을 꾹꾹 눌러 대는 손길에 서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은밀한 곳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감각이 생경했다. 비좁은 안 여기저기를 찌르고 긁을 때마다 투명한 액체가 더욱더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서희 안은 되게 좁고, 뜨겁고, 부드럽네.”
은호의 음성이 한층 더 낮아졌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왕복 운동을 할수록 그녀만큼 그도 흥분감이 몰아닥치는 것 같았다.
은호는 내부를 휘젓던 손가락을 뺐다. 그의 손은 이제 표적을 바꿔 붉게 충혈된 돌기로 향했다.
“아읏!”
그 예민한 돌기를 살며시 누르기만 했는데도 서희의 허리가 침대 위에서 튕기듯 들어 올려졌다.
“여기가 좋아?”
은호가 단단해진 음핵을 손가락으로 살살 굴렸다. 서희의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랫배가 아리고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상해……, 은호야.”
침대 시트를 강하게 틀어쥔 그녀는 발가락 끝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며 강도가 높아지는 쾌감에 숨을 죽였다. 돌기를 살짝 꼬집히자 전류가 통한 듯 온몸이 찌릿거렸다.
그녀의 반응에 그는 더 집요하게 음핵을 만지작거렸다. 질구에서는 이제 둑이라도 터진 것처럼 애액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물이 계속 나오네. 이러다가 시트 다 젖겠는데?”
은호의 목소리가 짓궂기보다 제법 진지하고 심각해서 서희는 괜스레 불안해졌다.
“그렇게…… 많이?”
“응. 여기까지 흐른 거 느껴지지?”
은호가 어느 위치를 쓸며 물었다. 은호의 말대로 질구를 타고 흐른 애액이 엉덩이 쪽으로 향하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거지. 원래 다들 이런 걸까.
그녀는 발긋해진 얼굴로 부끄러움에 눈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직접 보고 있는 은호의 눈에는 무척 음란해 보이겠지…….
“계속 나오는데. 큰일이네. 얼른 닦아 줄까?”
“……응.”
서희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티슈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은호가 음부에 입술을 묻는 순간 동작이 멎었다.
“은호야, 너……!”
“얼른 닦아 줄게.”
은호가 질퍽질퍽 젖은 곳을 혀로 할짝거리며 중얼댔다.
“그, 그걸 왜 입으로…….”
“손으로 닦기엔 너무 많이 흘렸어, 너.”
“티슈…… 로 닦아야지.”
“이걸 왜 아깝게 티슈로 닦아?”
은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옅게 웃었다. 그의 혀가 촉촉하게 젖은 구멍을 푹 찔렀다.
“아……!”
서희는 신음을 터뜨리며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은호의 혀끝이 살짝이긴 하지만 제 몸 안으로 들어온 게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여성에 말 그대로 얼굴을 전부 처박은 상태였다. 혀를 더 깊숙이 넣으려고 할 때마다 그의 코 역시 음부에 짓눌러졌다.
“으, 읏. 은호야…….”
“난 닦아 주려는 건데 더 흘리면 어떡해. 응?”
은호가 서희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액이 연신 흐르는 구멍을 대놓고 쪽쪽 빨기 시작했다. 그녀가 흘린 물로 목이라도 축일 것처럼.
“나 생각하면서 이렇게 질질 흘린 적 있어?”
“어, 없……. 흣…….”
“난 되게 많은데.”
은호가 입술을 옮기며 속삭였다. 손가락으로 많이 괴롭혀 놨던 클리토리스를 담뿍 입술로 감쌌다.
“아읏! 은호야, 거기…….”
“손으로 만져 줄 때도 좋았지? 서희 여기 빨아 주면 또 엄청 많이 쌀 텐데.”
“그런 말, 하아……, 하지 마.”
은호가 예민한 돌기를 혀로 짓누르자 서희는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흐느꼈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귀가 멀어지는 기분. 처음 느껴 보는 말도 안 될 만큼 강렬하고 거센 감각이었다.
할짝할짝. 입으로 머금은 채 혀끝으로 지분거리는 그로 인해 그녀는 등줄기가 저릿저릿한 쾌감에 휩싸였다. 은호의 예상대로 서희는 더욱 많은 물을 흠뻑 쏟아 냈다.
“나는 네가 ‘은호야’ 하고 불러 주는 것만 떠올려도 여기가 이렇게 돼.”
은호가 서희의 다리에 곤두선 성기를 문지르며 말했다. 서희는 밭은 숨을 토해 내며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것을 겨우 닦았다.
상체를 세운 은호는 서희의 다리를 활짝 벌리고 그녀가 오므리지 못하도록 허벅지로 고정했다. 근육으로 이루어진 그의 허벅지는 사람의 살덩이라기보다는 나무 기둥처럼 단단했다. 발기한 성기도 무척 딱딱했는데……. 서희는 곧 그가 들어올 거란 생각에 긴장감으로 침을 삼켰다.
은호가 기둥을 잡고 녹녹하게 풀어진 질구에 맞췄다. 흠칫 몸을 떠는 서희를 안으며 그가 귀두를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그의 의지와 행동은 분명 부드러웠지만, 그의 물건은 그 부드러움에 동참해 줄 수 없는 크기였기에 밀어 넣는다기보다는 쑤셔 넣는 것에 가까웠다. 입구가 이미 끈적끈적하게 젖어 있는데도 서희는 귀두가 푹 들어온 것만으로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 아파. 은호야…….”
“응. 미안해.”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서린 은호의 음성은 진심이었지만 절대 이대로 멈추지 않을 거라는 집념도 함께 느껴졌다.
페니스 끄트머리가 살짝 들어온 것만으로도 이토록 아픈데 아까 만졌을 때 손으로도 다 안 잡히던 저걸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을까. 서희는 지금까지 느껴 온 쾌감조차 싹 잊은 채 두려움에 어깨가 뻣뻣해졌다.
“서희야, 힘 빼야 돼. 응?”
은호가 서희의 엉덩이를 살살 주물럭거리다가 제 것을 좀 더 깊게 묻었다. 서희는 살이 찢겨 나가는 통증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호는 허리를 계속 밀어 댔다. 푹. 은호의 것으로 안이 꽉 찬 듯한 감각에 서희는 그의 목을 껴안았다.
“다 넣었어? 은호야, 다…… 된 거지?”
“응. 다 됐어.”
서희는 안도하듯 숨을 크게 뱉었다. 그러나 은호가 은근슬쩍 몸을 더 찔러 넣자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그의 등을 때렸다. 안심한 상태에서 그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되자 배신감이 확 밀려왔다.
“강은호, 너…… 뭐야. 진짜 나빠.”
“다 넣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은호의 거짓말은 계속 이어졌다. 다 넣었다고 말할 때마다 굵고 긴 페니스가 더욱 깊이 쑤셔졌다.
서희는 끊어질 듯한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아랫도리가 통증으로 저릿저릿했다. 여전히 흥분감이 잔재하긴 했지만 그의 물건을 들이는 고통에 비하면 미미했다.
서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난폭한 정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장 몸을 거칠게 움직이고 싶은 본능을 안간힘을 다해 누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서희는 은호의 어깨를 다시 껴안았다. 그도 그녀를 바싹 안은 채 천천히 허리를 뺐다. 서희는 앓는 듯한 신음을 참기 위해 애썼으나 그가 밖으로 뺀 몸을 다시 안으로 깊게 밀어 넣는 순간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서희야, 사랑해.”
은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고백을 들려주며 허리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퍽퍽, 끈적하면서도 야릇한 마찰음이 두 사람의 아래가 깊이 맞닿을 때마다 더욱 커졌다.
“서희 넌, 나 사랑해?”
그가 거친 숨을 뱉으며 물었다.
“사, 사랑해.”
“네 마음에 나 말고, 다른 자식이 끼어들 틈 같은 거 없는 거지?”
그녀는 지금 강은호라는 남자 외에 그 어떤 것도 머릿속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그는 아직도 아까 일을 집요하게 붙들고 있었다. 애초에 이 갑작스러운 섹스 역시 그의 지나친 불안감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없, 흐읏, 없어.”
그녀가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흘렸다. 그 야릇한 모습에 그가 이마를 구기며 이를 악물었다.
사나운 피스톤질이 이어졌다. 그가 속을 강하게 꿰뚫을 때마다 안이 홧홧하고 얼얼했다.
은호는 거침없이 허리를 쳐 댔다. 그녀가 어릿한 신음을 흘려도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살덩이를 때리는 난잡한 마찰음이 방을 채웠다.
페니스를 좁은 구멍에 연신 박아 대는 그의 눈빛은 욕망에 완전히 잠식되어 초점이 흐릿했다. 처음으로 경험한 섹스로 인해 그녀가 살이 찢기는 고통에 휩싸였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원초적 본능에 이성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녀의 엉덩이를 꽉 쥐어짜며 그는 더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삽입한 순간부터는 고통이 훨씬 강했는데 끝을 향해 갈수록 밑에서부터 서서히 몰아닥치는 쾌감이 느껴졌다. 한계 이상으로 벌어진 여성이 여전히 심각하게 쓰라렸지만 정신적인 흥분이 그것을 완화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은호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 그의 흉악한 성기를 버거워하면서도 열심히 받아 냈다.
얼마 후, 그가 참았던 것을 쏟아 내며 몸을 무너뜨렸다. 두 사람의 흐트러진 호흡이 엇박자로 엉켜 들었다. 방 안에는 끈적하고 뜨거운 공기가 부유했다.
“서희야.”
재우를 경계하며 잔뜩 날이 서 있던 아까의 말투가 이제 다시 평소로 되돌아왔다. 애교를 부리는 듯한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서희는 조금 기가 찼다. 워낙 제멋대로인 성격이란 건 알지만 그의 뻔뻔함에 연인인 그녀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무거워.”
서희의 말에 그가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바로 옆에 누운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치근거렸다.
“많이 아팠어? 내가 너무 거칠었지?”
그가 미안함 섞인 풀 죽은 말투로 묻는다.
“음.”
아니다, 괜찮다, 라는 말이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이 아팠다.
“넌…… 좋았어?”
서희의 물음에 은호는 표정으로 답했다. 그의 얼굴에 형용할 수 없는 격한 감동이 떠올랐다.
“죽을 것 같아. 너무 좋아서.”
다른 때엔 여우같이 상황을 잘 살피던 그는 지금 성기 쪽이 아릿해서 다리 사이가 자꾸 움찔거리는 그녀의 사정을 모르는지, 그저 눈치 없고 해맑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남자인지를 설파했다.
“그럼 이제 화 풀렸어?”
“화?”
“나한테 화났었잖아.”
은호가 서희의 뺨에 입술을 비비적대며 변명했다.
“화난 게 아니라…… 무서워서 그랬어.”
“무서워?”
“네가 언젠간 나한테 마음 식어서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드니까. 나랑 안 자려는 것도 날 언제든 버리려고 그러나 싶고.”
“버린다니. 생각이 너무 극단적이잖아.”
서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아까 낮에 카페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아르바이트생은 아무리 잘생겨도 의처증 성향이 다분해 보이는 남자하고 어떻게 만나냐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봤었다. 남자의 겉가죽에 홀려서 다른 문제에는 눈이 먼 여자로 보인 모양이었다.
서희는 그의 지나친 성미가 남들이 보기에 꽤 위험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그때 새삼 깨달았다. 은호가 누구보다 재우를 유독 경계하는 건 맞지만, 사실 예전부터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때면 대번에 눈초리가 사나워지곤 해서 지금껏 딱히 문제가 있다고 의식한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사귀기 전엔 그의 집착하는 마음이 대체 어떤 감정인지만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부디 사랑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면서.
친구일 때도 워낙 남달랐는데 이제 연인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자 그의 집착과 불안감은 더욱 깊고 짙어진 것 같았다.
이미 오랫동안 이런 그에게 적응이 되어 있어 부담스럽진 않았지만 그가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얻게 돕고 싶었다. 적당한 질투야 괜찮더라도 그녀가 다른 남자를 보고 웃을 때마다 난리가 난다면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안 불안해할 거야?”
서희가 묻는 말에 일순 은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말하면 들어줄 거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오로지 김서희만 들어줄 수 있는 거야.”
“그게 뭔데?”
은호는 그녀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떼고는 낮게 속삭였다.
“나랑 결혼해.”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아직 사귄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엔, 그는 장난기 하나 없이 아주 진지하게 청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