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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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사랑
서희는 연구실에서 신는 실내화에서 튼튼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작업용 팔 토시를 벗고 채집 봉투와 다른 준비물을 챙겨 표본관을 나섰다. 벌써 수목원 폐장 시간이 가까워져서인지 사람들이 드물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재우가 조카와 함께 느지막한 시간대에 온다고 했던 것 같다. 촬영 스케줄이 없는 날에는 바쁜 누나 부부를 대신해서 도율과 놀아 주는 일이 꽤 많다고 했다. 도율이 또 엄마가 일하는 수목원에 가고 싶다고 며칠 전부터 조르는 통에 오늘 늦게라도 잠깐 와서 돌아볼 생각이라고 지난 주말에 말했었다.
서희는 그날 재우의 누나 재희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식사를 하며 재희는 참 재밌는 인연이라며 신기해했다.
차라리 완전히 모르는 타인이라면 좀 더 마음이 편했을까. 안면이 있는 재희를 속이는 게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제법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서희는 이제 더 이상 가짜 연애를 이어 나갈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동안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재우를 끝까지 도와줄 생각이었다.
가짜 연애…….
지금 떠올리면 참 바보 같았다. 어떻게든 은호와의 인연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단념하겠다고 생각하다니. 진심으로 사랑을 끝내고 싶었다면 완전히 끊어 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데.
‘끊어 냈다고.’
서희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겨우 추슬렀던 가슴에 격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은호에게 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그만두자고 선언한 후, 가슴은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지다가도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기도 했고, 싸늘한 바람을 밀어 넣은 듯 시리기도 했다.
은호가 없는 세상. 은호가 없는 삶.
강은호가 곁에 없는 김서희.
벌써부터 이렇게 눈앞이 아득한데 정말 견뎌 낼 수 있을까. 은호를 끊어 내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진심이었지만 역시 자신이 없다.
은호 없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상상하고 또 상상해도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다. 머릿속은 끔찍할 정도로 하얗게 빈 도화지 상태다. 은호가 아니면 어떤 것도 채워 넣을 수 없을 것 같은.
표본관 건물 쪽에서 전나무 숲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서희는 돌연 다급히 울리기 시작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예상했던 대로 재우였다. 아마 지금 그도 수목원에 있는 모양이었다.
“네, 선배.”
― 서희야!
늘 여유가 있던 재우의 음성이 평소와 달랐다. 수화기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선배, 무슨 일이세요?”
― 지금 어디야?
“저 지금 건물 밖으로 나와서 전나무 숲으로 가고 있어요. 왜 그러세요?”
― 도율이를 잃어버렸어.
“네?”
서희가 놀라서 되물었다.
― 업무 전화를 받느라 잠깐 한눈판 사이에……. 어디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전화 받고 오니까 어디에도 없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해가 져 가는데 이 넓은 곳에서 휴대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어린아이를 잃어버린 건 큰일이었다.
재희는 업무로 바빠 휴대폰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지 전화가 안 된다고 했다. 재우가 어느 위치에서 도율을 잃어버렸는지 들은 서희는 당장 아이를 찾아보겠다고 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재우는 침엽수원을 거쳐 전나무 숲길에 들어섰다가 도율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서희는 반대 방향에서 숲 쪽으로 가고 있었으니 도율이 무작정 앞으로 계속 걸어오고 있다면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걸음을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주변을 세밀히 살피며 아이의 모습을 찾았다. 가쁜 숨이 공기 속에 흐트러졌다. 햇살이 반짝거리고 많은 사람들이 걸음 하던 한낮에 비해 묵직한 고요를 되찾아 가고 있는 숲은 길을 잃은 아이에게 공포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어른도 없이 혼자 헤매고 있을 도율이 몹시 걱정되었다.
예민하게 곤두세운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희의 눈동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쏠렸다.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손에 들고 있던 모든 것을 내버린 채 서희는 본능적으로 도율에게 달려갔다.
“……도율아! 서희야!”
반대편 길에서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고 있던 재우가 다급하게 그들을 불렀다.
* * *
다람쥐를 봤다고 했다.
도율은 나무를 빠르게 타고 오르는 다람쥐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푹푹 쌓인 낙엽을 밟으며 비탈면으로 다가간 것이다. 순간 발을 헛디딘 도율이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전에 서희가 그 작은 몸을 낚아챘다.
다행히 도율은 무사했다. 아이를 보호하듯 품으로 감싼 채 넘어졌지만 서희도 팔이 나무에 긁히고 무릎이 좀 까졌을 뿐 멀쩡했다. 그러나 도율은 병원 응급실로 오는 내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놀랐기 때문인지 열까지 나기 시작했다.
엄마의 품에 안겨서 훌쩍거리는 도율을 보다가 서희는 재우와 눈을 맞췄다. 재우는 아까부터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게 분명했다.
“선배.”
“정말 미안하다. 나 때문에…….”
“그러지 마세요. 저 멀쩡하잖아요.”
“내가 도율이 제대로 못 봐서 너 이렇게 다치게 했어.”
치료가 끝난 후 걷었던 옷을 내려 상처가 보이지 않았지만 재우는 자신이 더 쓰라린 얼굴로 스스로를 책망하고 있었다.
“저 진짜 괜찮아요, 선배.”
서희는 말갛게 웃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때 누군가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은 재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서희 씨, 지금 휴대폰 없지?”
“네? 아, 네. 아까 짐을 다 떨어트렸는데 경황이 없어서 챙기질 못했어요.”
“그러잖아도 직원이 서희 씨 짐 다 챙겨 놨대. 같이 떨어트렸던 휴대폰도 다행히 멀쩡한 거 같아. 그 직원이 서희 씨 휴대폰으로 온 전화를 받았는데, 아까 상황을 대충 설명했나 봐. 어디 병원이냐고 다급하게 물어봐서 알려 줬대. 곧 이쪽으로 도착할 것 같다더라. 휴대폰에 뜬 이름이 은호라는데.”
“아……, 친구예요.”
“그래? 엄청 놀라고 걱정하는 것 같더래. 내가 진짜 오늘 여러 사람한테 미안하다. 오늘 정말 고맙고 미안해. 이 은혜 꼭 갚을게.”
서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재희의 입에서 은호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그녀는 오랜 습관처럼 가슴이 뛰고 있었다.
전화…… 했었구나.
은호에게 이 비정상적인 친구 관계를 끝내자고 했지만 그의 성격상 쉽게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얼굴을 보다 보면 결심이 흐려지고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은호를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은호 없이는 역시 버틸 수 없을지 모른다는 나약한 생각에 빠지고 있는 그녀였다. 그가 다가와 잘못했다든가 오해라든가,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부드러운 말을 속삭이면 결국 그를 놓지 못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저를 걱정하며 여기까지 급하게 오고 있을 은호를 무시할 순 없었다. 크게 다친 곳 없이 멀쩡하다는 것 정도는 알려 줘야 했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재희에게 인사를 한 서희와 재우가 함께 응급실 밖으로 나왔다.
“강은호 씨하고 만나도 괜찮겠어? 이제 친구 그만하자고 했다며.”
흔들리지 않을 자신 있냐고 묻는 듯한 그에게 서희는 후련하게 괜찮다는 말을 꺼내 놓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은호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마는 자신이 한심할 뿐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재우는 쓴웃음을 삼켰다. 짧은 인사를 전한 그가 아쉬운 발걸음으로 다시 응급실로 들어갔다.
‘정말 자신 있니?’
서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로 평생 은호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느냐고. 그날 은호에게서 냉정하게 등 돌렸던 것처럼 완벽하게 끊어 낼 수 있느냐고.
몇 번이고 질문해도 그렇다는 대답이 차마 나오지 않는다. 거짓말이라는 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에.
그때, 익숙한 차가 급박하게 병원에 들어섰다. 응급실 문 옆에 서 있던 서희는 차에서 내려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는 은호를 마주했다. 어느새 하늘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김서희!”
그가 단숨에 달려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의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너 괜찮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가 다급히 물었다. 멀쩡히 서 있는 서희를 보고 있으면서도 아직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서려 있다.
“괜찮아.”
“정말,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다친 데는!”
“다친 데 없어. 나 멀쩡해, 은호야.”
은호는 서희를 덥석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 잘못됐으면 절대 용서 안 했어. 너 조금이라도 다쳤으면 그 꼬마도, 그 꼬마 부모도 절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죽어도 용서 못 해.”
“강은호, 너 그런 말…….”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데 무슨 자격으로 너를 사랑해!”
서희의 동공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은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몸을 떨어트린 그녀가 그와 눈을 마주한 채 물었다.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빛 역시 처참하게 흔들렸다. 또다. 저보다 훨씬 크고 강한 그가 여리고 연약한 아이처럼 느껴지는 묘한 기분.
장난감으로 여긴 게 아니냐고 묻던 그녀에게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젓던 그때의 그는 깨질 것 같은 표정을 하면서도 끝내 제대로 된 변명을 내놓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마음은 깊은 곳으로 추락했다. 그의 감정이 집착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누구보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는 그녀를 설득할 만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부엌을 나와 방에 틀어박혔다. 혼자가 되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은호가 저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사랑해.”
절대 들을 수 없을 거라고 포기하고 있었던 말을 지금 이 순간 그가 하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지금 이렇게 널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알아. 네 어머니가 날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는 것도.”
“그게…… 무슨 말이야?”
제 귓가에 닿은 말이 정말 사랑한다는 고백이 맞는지조차 아직 의심스러운데, 은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감에 잠식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힘겹게 말을 쏟아 냈다.
“서희야, 내가, 나 때문에…… 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날 구하시다가 어머니가, 어린 너 두고 가신 거야. 전부 나 때문에…….”
그녀가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미안해, 서희야.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나도 알아. 나 너 욕심내면 안 되는 놈인 거. 나 계속 네 곁에 이렇게 있는 것도 욕심인 거 아는데…… 알면서도 네가 너무 좋아서, 너 없이 사는 게 너무 무서워서 말할 수가 없었어. 네 어머니한테도 항상 내가 너 지켜 주겠다고, 딱 거기까지만 욕심내게 해 달라고 빌었어. 너무 염치없는 거 아는데도 너를 놓을 수가 없었어. 이 사실 알면 네가 다시는 나한테 안 웃어 줄 거 같아서 계속 숨겼어. 나 진짜 나쁜 놈이지? 미안해. 근데 서희야, 나 미워하지 마. 제발…….”
은호는 그녀의 표정을 보는 게 두려운 듯 다시 그녀를 안았다. 서희가 뿌리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는 흐트러진 숨을 깊게 내쉴 수 있었다.
서희는 잠시 가만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가 자신의 짧은 침묵에도 형용하기 힘든 공포를 느끼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녀에게도 아주 잠시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였구나.’
그의 마음을 도무지 해석할 수 없어 결국은 그가 순수한 애정이 아닌 독점욕과 집착만으로 저를 곁에 두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그가 왜 오랜 세월 동안 저에게 모든 마음을 쏟았는지. 왜 제 고백을 못 들은 척했는지. 왜 제게 연인이 생기자 그토록 심술을 부리고, 초조해하고, 끝내 이성을 잃었는지.
“은호야.”
생각을 마친 서희가 그의 몸을 살짝 밀어내자 그가 놀라서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할 말이 있어. 여기서 계속하는 건 좀 그러니까.”
조용하고 차분히 대화를 나누며 모든 것을 풀어낼 시간이었다. 서희는 은호가 주차해 둔 차가 있는 방향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자마자 서희는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엄마, 원래도 몸 약한 분이셨어. 너 때문에 돌아가신 거 아니야.”
고개를 돌려 은호와 눈을 마주하며 살며시 미소를 띠었다.
“대체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한 거야? 엄마가 널 용서하지 않을 거라니.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셨는데, 우리 엄마 너 구한 거 마지막까지 절대 후회 안 하셨대.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엄마가 슬퍼하실 거야.”
운전석으로 팔을 뻗은 그녀가 그의 손등에 손바닥을 올렸다. 긴장한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은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전부 알고 있었어?”
서희는 은호의 손등을 장난스럽게 살짝 꼬집었다.
“너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엄마 돌아가신 해부터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찾아오기 시작하셨고, 제사 때마다 너까지 함께 오는데. 어떻게 몰라?”
어느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사실만 알려 주셨지만, 그 사고가 은호와 관련된 것이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짐작만 하고 있다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쯤 할아버지한테 여쭤봤어. 내 생각이 맞는지. 그때 할아버지한테 자세한 얘기 들었고.”
“근데 왜 나한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어째서 화를 내지도 피하지도 않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스럽게 볼 수 있었어?
은호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꿈 같아서 불안한 사람처럼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눈으로 물었다.
“내가 너를 원망해? 어떻게 그런 바보 같은 상상을 해? 내가 할아버지한테 그 얘기 듣자마자 했던 말이 뭔지 알아?”
서희 역시 이 순간이 꿈처럼 달콤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손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너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그랬어.”
“……뭐?”
“네가 죄책감으로 내 곁에 있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은호한테는 절대 말하시면 안 된다고 부탁했어.”
몸은 한참 컸는데도 은호는 눈물을 참을 때 그 어린 시절의 소년 같은 얼굴이 된다. 눈가는 이미 발긋해졌는데 울지 않겠다고 고집스럽게 이를 악문 표정.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삼키는 은호를 보며 서희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나도 할아버지한테 빌었어. 서희는 모르게 해 달라고. 서희가 나 원망하고 미워하면 살 수 없다고…….”
결국 서희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바보 같아, 정말.”
그녀가 속상함을 감추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오랫동안 서로 같은 마음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서로만을 봤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헤매기 바빴다.
그가 저와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쁘지만 지난 세월의 안타까움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오래 엇갈렸어야 했을까.
“다시 생각하니까 무서워.”
“어떤 게?”
“내가 너한테 친구 그만하자고 하고, 너도 나한테 미움받는 게 두려워서 결국 끝까지 서로 솔직한 말을 나누지 못했다면, 그렇게 다 끝나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게.”
서희의 말에 은호는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바보 맞네.”
“응?”
“그렇게 끝날 리가 없잖아.”
그는 그녀의 손등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살을 간지럽혔다.
“나는 너 없으면 못 산다니까. 내가 널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놔줄 거 같아? 아무리 마음이 엇갈렸어도, 설령 네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해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곁에 있을 건데.”
집요하게 느껴지는 말이 부담스럽기보다는 안심이 된다. 서희는 그를 완전히 포기하려고 했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그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죄책감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녀의 곁을 지켰으니 말이다.
“서희야.”
“응?”
“다시 말해 줘.”
“뭘?”
그가 크게 내쉰 숨 속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정말 내가…….”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 한 그는 눈을 또렷이 맞춘 채 물었다.
“널 사랑해도 돼?”
그의 눈동자에 담긴 열렬함과 애틋함을 확인하자 불쑥 앙큼한 용기가 치솟았다.
서희는 대답 대신 은호에게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말보다 더 확고하게 확인시켜 주겠다는 듯.
* * *
집으로 향하는 차 안, 은호는 연신 서희가 앉은 옆을 흘깃거리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김서희 진짜 대담하다.”
“자꾸 놀릴 거야?”
“어떻게 그 자리에서 바로 키스를 하지?”
감탄하는 은호의 말과 달리 정말 애들이나 할 법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을 살짝 맞부딪치고 떨어졌을 뿐인데 저렇게 과장을 하고 있다.
“대체 날 얼마나 사랑하면 부끄럼쟁이 김서희가 그런 대담한 행동을 할까? 키스도 먼저 막 해 버리고, 전에는 아무것도 안 입고 나한테 안아 달라고 하고.”
은호는 치솟는 입술 끝을 감추지 못했지만 서희는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신 안 해.”
“응? 서희야, 뭐라고?”
“다신 키스도 안 하고, 내 몸도 절대 안 보여 줄 거야.”
“너,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방금까지만 해도 천국에 소풍 온 사람처럼 들떠 있던 은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왜 그래, 서희야. 응?”
“그러니까 놀리지 마. 나 진짜 부끄러운데……. 그때도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는데 용기 냈던 거야. 근데 네가 자꾸 웃고 놀리면…….”
“놀린 거 아니야! 나 너무 좋아서 그런 건데. 네가 나 진짜 사랑하는구나 싶어서 너무 기뻐서……. 내가 너를 왜 놀리겠어?”
차가 잠시 신호에 걸리자 서희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은호를 힐끔 보았다. 경진도 인정하던 그 처연하고 침울한 눈망울이 서희에게 향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차고 넘치도록 가진 게 많은 그인데 세상을 다 잃고 혼자 남은 듯한 저 표정은 대체 어떻게 짓게 되었을까.
갖은 용기를 쥐어짜서 했던 고백을 우습게 여기는 줄 알고 은호가 야속했는데 저 처량한 눈망울에 금세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나도 그날 너 얼마나 안고 싶었는지 알아? 네가 그렇게 유혹하는데 뿌리치고 나오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 그때 제정신도 아니었어. 내가 이렇게 인내심 넘치고 절제력 강한 인간이 아니었으면 너 나한테 진짜 홀라당 잡아먹혔어. 그때 네가 얼마나 예뻤는데.”
은호 역시 저를 안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는 말에 그녀는 스스로 참 단순하다 싶을 만큼 마음이 풀렸다.
우리 이제 정말 친구가 아니구나. 온전히 남자와 여자가 되었구나.
은호가 아까 사랑한다는 고백을 했을 때보다 더 제대로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스스로 인내심 넘치고 절제력 강하다고 자부하는 모습은 조금 우스웠지만.
“이제 화 풀렸어?”
“화난 거까진…… 아니야.”
서희의 누그러진 말투에 은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앞으로도 또 키스해 줄 거지?”
“……응.”
“몸은? 몸도 또 보여 줄 거지?”
애초에 몸 얘기를 먼저 꺼낸 건 자신이었지만, 몸을 또 보여 달라는 말을 그의 목소리로 듣자 왠지 뉘앙스가 이상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응? 서희야, 보여 줄 거지?”
그러나 은호가 하도 절박하게 물어서 결국 눈을 내리깐 채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호는 그제야 안도하는 얼굴이었다. 걱정을 떨치고 입가에 웃음을 가득 매단 그가 다시 차를 움직였다.
빠르게 도로를 달리던 차는 얼마 후 서희의 집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손을 꼭 잡고 대문에 들어섰다.
은호는 최근 금지당했던 서희와의 스킨십을 다시 하게 된 게 무척 기쁜 듯했다. 깍지를 낀 손을 가볍게 흔들기도 하고, 팔을 번쩍 들어 서희의 손등에 제 뺨을 비비기도 했다.
새끼 동물이 애교를 피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저 덩치를 보니 양심적으로 ‘새끼’라는 단어는 생각에서 지워야 하나 싶었다. 물론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의 눈에 그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지만 말이다.
“김서희, 진짜 좋다.”
못 견디겠다는 듯 그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미소가 흐르려는 입술을 꽉 물었다.
방에 들어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거실에서 서희를 기다리고 있던 은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그거.”
은호가 소파에 앉은 서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반팔 티셔츠를 입은 탓에 아까 응급실에서 상처를 치료한 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다친 데 없다고 했잖아! 여기 다쳤으면서 왜 거짓말했어? 또 어디어디 다쳤어?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검사, 검사는 다 받았어? 내일 나랑 같이 병원 가서 제대로 검사받자. 어?”
아까 병원 앞에서 가까스로 진정시켰던 그의 불안과 걱정이 다시 거세게 일어서려 했다. 서희는 서둘러 그를 달랬다.
“은호야, 나 진짜 괜찮아. 이거 살짝 긁힌 상처야. 피도 거의 안 났고.”
“여기 말고 또 다친 데 있어? 숨기지 말고 솔직히 다 말해.”
“무릎도 좀 까지긴 했는데……, 그거 말곤 정말 없어.”
“차재우, 그 개자식 가만 안 둬.”
은호가 턱에 힘을 준 채 낮게 짓씹었다. 집으로 오는 길, 무심코 은호에게 아까 자신이 구한 꼬마 아이가 재우의 조카라고 말했는데 그 사실이 그의 분노를 더욱 크게 키운 모양이었다.
“재우 선배 잘못 없는데 왜 그래, 자꾸.”
“너 내 앞에서 왜 그 자식 편들어?”
단숨에 그의 눈초리에 날이 섰다.
“그리고 잘못한 게 왜 없어? 애를 부모 대신 맡았으면 제대로 봤어야지. 자기 조카 천방지축인 거 뻔히 알았을 텐데 전화받느라 한눈팔다가 애 놓치는 게 말이 돼? 그 자식이 그 꼬마만 잘 데리고 다녔어도 너 이렇게 다치는 일 없었어.”
자신을 걱정해서 살짝 신경이 예민해진 정도인 줄 알았는데 재우에 대한 증오심이 생각보다 더 강한 것 같았다. 자신과 엮인 일로 안 그래도 이미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인간이었을 텐데 이번 일까지 더해졌으니 저런 격렬한 반응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김서희.”
“응?”
“이건 내가 너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당연히 그럴 거라 믿지만, 그래도 일단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묻는 건데.”
“뭔데?”
“차재우랑은 바로 헤어질 거지?”
서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내가 네 고백 모른 척하고 계속 못나게 굴어서, 그래서 나한테 화나서 홧김에 그 자식하고 사귄 거잖아. 맞지? 원래 그놈한테 마음도 전혀 없었던 거잖아. 그렇지? 첫사랑이라고 했던 것도 다 거짓말이고, 그 자식 좋아한다는 것도 그냥 나 미워서 한 말이지? 우리 서희가 좋아하는 건 나니까. 그치?”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더니, 은호는 질문을 시작하자 혹시 모를 불안감이 밀려오는지 절박한 눈동자로 서희를 재촉했다. 얼른 그렇다고 대답해 달라는 듯한 눈빛에도 서희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짜 연애에 대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아서였다.
“따로 만날 필요도 없어. 전화, 아니 문자 한 통으로 끝내고 차단하자. 이별에도 예의가 있다? 그딴 거 다 헛소리야. 만나기 싫어서 헤어지겠다는데 굳이 헤어짐을 위한 자리를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어? 정 마음에 걸리면 음, 내가 만나고 올까?”
은호는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 위한 자리라고 해도 서희가 재우와 다시 단둘이 만나는 게 몹시 싫은 얼굴이었다.
그가 이제 다시는 재우와 만나지 말라고 살살 어르는데도 서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설마 하는 얼굴로 그녀를 을렀다.
“너 왜 헤어지겠다는 말 안 해?”
“그게, 있지. 헤어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
“……뭐?”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너, 나 만나면서 그놈도 계속 만날 거야?”
그의 얼굴이 핏기를 잃어 가자 서희는 더 뜸들이지 않고 진실을 고했다.
“진짜로 사귄 게 아니었거든. 그러니까 굳이 헤어질 필요도 없지.”
“뭐?”
“선배랑 나, 가짜로 사귀었던 거야.”
서희가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하자 은호는 놀랐다가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가 마지막엔 결국 안도의 한숨을 크게 뱉었다.
“그런 중요한 말은 제일 먼저 해 줬어야지.”
그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하여간 김서희한테 절대 눈 떼면 안 된다니까. 차재우처럼 수작 부리면서 채 가려는 놈들 주변에 깔려 있을 게 분명해.”
“수작?”
“뻔하잖아. 가짜 연애는 무슨. 너랑 가까워지려고 별 잔머리를 다 굴려서는. 애초에 너 좋아하는 거 전혀 숨기지도 않던데.”
“날 좋아한다고? 선배가?”
“그걸 계속 몰랐…….”
몰랐냐고 물으려던 은호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서희의 눈빛. 재우와의 일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며 그가 정말 저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가 확인하는 게 분명했다. 이윽고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미안함과 난처함뿐일지라도 은호는 그녀가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김서희.”
은호가 서희의 두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엄하게 그녀를 불렀다.
“다른 남자 생각 그만해. 어떻게 애인을 옆에 두고.”
“애인…….”
서희는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그 단어에 웃었고, 은호는 서희가 웃자 굳혔던 얼굴도 풀고 저절로 따라 웃게 되었다.
이내 은호가 엄지로 서희의 입술을 살살 쓸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촉.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닿았다 떨어졌다. 아까 서희가 했던 그 서툰 입맞춤과 다를 바 없어 긴장을 풀고 미소를 머금으려던 찰나, 그의 입술이 다시 저돌적으로 그녀의 것을 물었다.
그의 혀끝이 그녀의 입술 사이를 핥았다. 그 감촉이 무척 야릇해서 서희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혀가 막을 수도 없이 그녀의 혀를 찾아 감쌌다.
“으음.”
그녀의 혀를 간지럽히듯 핥던 그가 발가락 끝이 찌릿거릴 만큼 혀를 거칠게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선정적으로 느껴지는 축축한 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낮게 깔렸다.
눈을 감은 서희는 이 순간이 꿈처럼 몽롱했다. 은호와 입술이 맞닿은 채 그 안에서 타액을 공유하며 서로의 것을 깊게 얽고 있다. 전부, 전혀 알지 못했던 감촉들이다.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늘 곁에 함께였던 은호인데, 전혀 다른 남자를 맞닥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낯설면서도 무척 강렬한.
“하아…….”
끊어질 듯 말 듯 집요하게 키스를 이어 나가던 그가 입술을 완전히 놓아주자 그녀는 드문드문 몰아쉬던 숨을 마음껏 내쉴 수 있었다.
서희는 여전히 은호의 품에 안긴 상태였지만 눈길을 들어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키스하는 순간에는 행위에 몰두해서인지 부끄러움조차 잊을 정도였는데 끝나고 나니 불쑥 어색하고 민망한 마음이 찾아왔다.
은호는 서희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그녀에게 시선을 내렸다.
“서희야, 우리 이제 매일매일 이렇게 키스하자. 알겠지? 우리 사귀는 사이니까.”
좋아서 죽을 것 같은 은호의 얼굴을 보고 있자 서희도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너 저번에 나한테 안아 달라고 했던 거 있잖아.”
은호가 쑥스러운 척을 하면서도 또렷한 음성으로 운을 뗐다.
“그건 그때 끝난 건데…….”
서희는 기대감이 부푼 은호의 마음을 단숨에 꺼트렸다.
“어? 끝나다니?”
“네가 거절했으니까.”
여전히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그 일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그가 야속해서 그녀는 말투가 살짝 무뚝뚝해졌다.
“아까 몸도 또 보여 준다고…….”
“지금 말고. 나, 나중에.”
서희는 은호를 살짝 흘겼다.
“이제 막 사귀기로 했는데 벌써 그런 얘기부터 하고. 너무 빠른 거 같아.”
“빠르다니, 늦었다면 모를까. 우리가 그냥 보통 사이야?”
은호는 적반하장으로 더욱 세게 나왔다.
“우리 15년 동안 함께한 사이잖아. 그냥 대충 썸 타다가 연애하는 사람들하고 출발선부터 다르지.”
“친구 관계였잖아.”
“결혼만 안 했지 같이 살면서 부부나 다름없는 사이를 사실혼 관계라고 하지? 우리도 비슷한 거야. 사실연애 관계인 거라고.”
급기야 이상한 말까지 지어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떤 사람들이 우리를 그냥 친구로 생각하겠어? 연애하자고 말만 안 했지 거의 연인 사이나 다름없었는데.”
참고로 강은호는 아까 집에 들어서며 서희에게 “그거 알아? 우리 연애 시작한 지 두 시간 십 분 지났어”라고 속삭이며 사르르 녹을 듯한 애교를 부렸다. 그래 놓고 이젠 그녀를 설득하겠다고 그동안 그들이 사실연애 관계였다는 우스운 논리를 세우는 중이다.
“아무리 친구여도 여자랑 남잔데, 집 열쇠랑 비밀번호 다 알아서 마음대로 찾아오고 어쩔 땐 자고 갈 때도 있고, 단둘이 해외여행 가서 호텔에서도 같이 묵고, 전화랑 문자도 제일 많이 하고, 그리고 우리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 휴대폰도 항상 똑같은 걸로 같이 맞춰서 샀잖아. 대체 어떤 친구가 그래?”
지난 15년 동안에는 곧 죽어도 친구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굴더니, 이제 저런 말을 뻔뻔하게 잘도 하고 있다.
“우리의 깊은 관계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해도 이상할 게 없어.”
“……알겠어. 그럼 지금 하고 싶은 거지?”
서희는 침울한 척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그의 고집을 꺾는 방법은 쉽고 간단했다.
“어?”
“하자, 은호야. 내 몸, 지금 보여 줄게.”
힘 빠진 목소리로 처량하게 중얼거리며 서희가 자신의 티셔츠 끝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려 하자 은호가 당황한 듯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지금 하자는 거 아니고! 네가 말한 ‘나중에’가 한참 나중에 같아서 그거 쪼끔만 줄여 달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 나는.”
그가 화가 난 선생님 앞에 선 아이처럼 사근사근 애교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서희가 잡고 있던 티셔츠를 놓으며 조용히 웃었다. 그는 그녀가 장난을 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김서희 진짜 못된 거 알아줘야 해. 장난도 잘 안 치다가 꼭 이럴 때 짓궂게 굴어서 사람 간 떨어트리고.”
은호가 서희를 안으며 투덜거렸다.
“은호야, 근데 있지.”
“응. 말해.”
“그 박상재 선배 일은…… 아저씨께 부탁드린 거야?”
“다니던 회사 해고시킨 거?”
은호는 서희가 이 문제로 또 전처럼 화낼까 걱정되었는지 팔을 풀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가 평온한 눈동자로 저를 보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순순히 답했다.
“응. 네 일이라고 하면 두 번 물어보지도 않으셔. 사람 죽여 달라는 부탁 빼곤 다 도와주실걸?”
은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나 그렇게 키웠어. 내가 당하는 건 참아도 네가 당하는 건 절대 참지 말고 갚아 주라고.”
“아주머니하고 아저씨도 나랑 엄마한테 죄책감이…….”
은호는 서희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두 분도 너 두고 먼저 떠나신 어머니를 대신해서 너 지켜 주고 싶어 하시는 거야. 죄책감 아니고.”
서희는 마음이 따스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은호의 말이 맞다. 은호와 그의 가족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한결같이 그녀를 보듬어 주었다. 그게 그저 그녀의 어머니에게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과 미안함 때문일 리가 없었다.
“은호야, 우리 할아버지도 나한테 엄마 돌아가신 얘기 다 해 주신 다음에 그러셨어. 엄마가 떠나시면서 은호라는 좋은 친구를 보내 준 거라고.”
은호는 아직 이 얘기에 마음이 많이 격해지는지 벌써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래도 서희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가지고 있었던 무거운 죄책감은 어느 정도 해소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너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신 게 아니라, 엄마가 나한테 너를 보내 주신 거야.”
* * *
출근 전, 정장을 갖춰 입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나온 경진은 식탁 앞에 제일 먼저 앉아 식구들을 기다리고 있는 막내아들의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왜 또 혼자 실실 웃고 있어? 정신 빠진 놈처럼.”
“어머니.”
은호가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며 뱉은 말에 자리에 앉던 경진이 움찔했다.
어머니?
“너 갑자기 징그럽게 왜 이래?”
“저도 벌써 결혼해도 충분할 만큼 나이가 찼는데 언제까지 애처럼 엄마라고 부르겠어요?”
“결혼?”
“우리 집은 꼭 순서대로 가야 한다거나 그런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 없잖아요. 첫째 형은 여자보단 일을 더 좋아하니 늦을 거 같고, 둘째 형은 워낙 문란해서 아직 결혼 생각 없어 보이니 제가 먼저 장가가서 형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것도 좋겠죠.”
경진은 언뜻 심각해진 눈으로 물었다.
“서희랑 사귄 지 며칠 됐다고 했지?”
“일주일요.”
저 미친 녀석.
장난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저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더욱 기가 막힌다. 서희가 저 녀석에게 코가 꿰이게 생겼다는 게 안쓰러울 따름이다.
“아침부터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물 잔을 들던 경진이 무심결에 말했다.
“너희 그런 사이 될 줄 모르고, 서희한테 인우 어떠냐고 찔러보려고 했는데.”
그러나 말을 끝까지 내뱉는 순간 후회했다.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저를 찌를 듯 매섭게 응시하는 은호로 인해 아무래도 아침밥을 편히 먹긴 이미 그르친 것 같았다.
“인우 형? 인우 형을 서희한테 왜 찔러? 설마 둘을 엮을 생각이었어? 엄마 무슨 막장 드라마 집필해요?”
잠깐 쓰던 어머니 소리도 바로 치워 버렸다.
“너희 그런 사이인 거 몰랐다고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옆에 떡하니 있는데 어떻게!”
“서희한테 소개해 줄 만한 남자 슬슬 살펴보는데 아무리 봐도 눈에 차는 놈이 있어야 말이지. 그러다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내가 키운 놈 중에 쓸 만한 놈이 딱 눈에 들어오더라?”
“그게 인우 형이라고요? 나는! 왜 서희랑 15년 붙어 다닌 난 거기에 안 넣었는데?”
“넌 곧 죽어도 친구라며! 15년을 바락바락 우기니까 우리도 당연히 그런가 보다 하게 된 거지!”
경진도 짜증이 났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건……!”
이 부분에서만은 은호도 할 말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인우 형을 우리 서희한테 붙이려고 해요?”
“강인우가 뭐 어때서. 내가 본 놈들 중에 서희 짝으로 제일 나은데.”
은호의 불길처럼 타는 시선에 경진은 혀를 차며 말을 이어 붙였다.
“그래, 강은호 빼고 그중에서 제일.”
은호는 여전히 불만스럽게 입술을 꽉 다물었다. 경진은 이 피곤한 논쟁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나 싶어 기대했으나 이윽고 은호의 닫혔던 입이 열렸다.
“큰형은 나이가 너무 많잖아.”
“다섯 살 차이야.”
“다섯 살 차이가 얼마나 큰지 알아? 큰형 고등학교 들어갔을 때, 우리 서희 아직 실내화 가방 들고 리코더 불면서 학교 다녔어. 그런 둘을 엮으려고 하면서 양심의 가책이 안 느껴지셨어요?”
“네가 생각해도 나이 말곤 딱히 흠잡을 게 없지?”
경진은 열이 바싹 오른 듯한 막내아들의 얼굴을 보며 놀리듯 말했다. 어릴 때부터 서희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유난스럽게 굴던 녀석이 저 정도 반응밖에 안 보인다는 건 그래도 인우가 주변에 널린 남자들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서희 짝으로 둘째 현호를 입에라도 올렸다간 은호는 감히 누구를 들이대냐며 집을 쑥대밭으로 뒤집어 놨을 게 분명했다. 둘이 오랜 앙숙인 걸 떠나서 현호는 은호 말대로 여자‘들’을 너무 좋아해서 결혼이 늦어질 녀석이니까. 사실 경진도 제가 낳은 아들이지만 현호는 서희 짝으로 탐탁지 않아 진즉 치워 놓았다.
“큰형은 일중독에 성격도 너무 차갑고 딱딱하고 전체적으로 사람이 좀 재미없는 스타일이죠. 내가 형을 욕하려는 건 아니고, 이건 형이 주변에서 자주 듣는 평을 취합한 거야. 서희는 그런 스타일 진짜 안 좋아해.”
“서희도 인우도 둘 다 조용하고 차분하니 같이 있으면 잘 맞을 거 같던데?”
“서희를 아직도 인우 형 짝으로 욕심내고 있는 거야?”
농담이어도 그렇다고 했다간 당장 서희를 데리고 외국으로 도망이라도 칠 것 같은 경계심 짙은 눈빛이다.
어휴, 경진은 한숨을 푹 쉬다가 결국 웃음이 나왔다. 얄밉고 사악한 구석이 많긴 해도 세 형제 중 막내 강은호가 부모에게 가장 키우는 재미를 주던 녀석이긴 했다.
십몇 년 전엔가, 서희한테 괜히 자존심 부리고 뻗대다가 절교당할 위기에 처해서야 울며불며 잘못했다고 비는 은호를 봤을 때도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저렇게 웃기고 기막힌 애를 낳았나, 스스로 감탄할 정도였다.
“농담한 거지. 참, 올해 가기 전에 서희 맛있는 것 좀 먹이게, 네 아빠까지 해서 넷이 오랜만에 식사나 한 끼 하자.”
그 말에 은호는 가까스로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 * *
서희가 좋아하는 유일한 배우, 연겨울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은호가 개봉 첫 주에 보자고 했던 영화였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상영관에서 거의 다 내려가서 남은 시간대가 많이 없었다. 그나마 영화가 꽤 흥행해서 오래 버텨 준 덕에 아직 영화관 스크린으로 관람이 가능한 거였다.
“재밌었어. 영화관에서 보길 잘한 거 같아. 넓은 화면으로 봐야 장면이 살더라. 그리고 그 숲에서 찍은 장면이 특히 좋았어. 어딘지 찾아봐야겠다.”
“김서희가 딴 남자랑 데이트만 안 하고 다녔어도 진즉에 봤을 텐데.”
은호가 비딱하게 중얼거렸다. 당장 달래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 날, 그녀가 재우와 아산 맹씨 행단에 간 것이 여전히 그렇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네가 그 남자랑 거기 간 거 알고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너한테 이제 진짜 버림받는구나 싶었어. 네가 차재우한테 미쳐서 이제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랑 한 약속도 다 깨 버릴 참이구나…….”
지나친 확대 해석에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서희는 꾹 참고 진지하게 말했다.
“은호 네가 회사 일로 너무 바빠 보여서 귀찮을 거 같아서 그랬어. 그리고 나는 네가 거기 가기로 한 약속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내가 어떻게 기억을 못 해? 나는 너에 관한 건 잊고 싶어도 절대 못 잊는데.”
그가 억울함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같이 가기로 하고 약속 안 지켜서 미안해, 은호야.”
서희의 순순한 사과에 은호는 내친김에 서운한 마음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그리고 네가 그 장난감 어쩌고 했던 거, 그것도 되게 상처받았어. 장난감이었냐는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서 엄청 놀란 상태였는데 계속 네가 몰아붙여서 말이 제대로 안 나오더라. 나 누구 앞에서 말문 막히는 성격 아닌 거 알지? 얼마나 놀라고 억울했으면 그랬겠어?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야.”
“아……. 그것도 미안해.”
서희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땐 자신도 은호만큼 이성을 잃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은호에게 그런 식으로 크게 화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고백조차 거부하는 은호가 저를 사랑할 리는 없다고 믿었고, 우정이라기엔 너무 지나치고 엇나간 애정처럼 보였기에 그런 생각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거 두 개 빼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앞으로 우리 서희한테 평생 다 갚으면서 살게.”
그녀의 귓가에 가볍게 속삭이던 은호가 눈꼬리를 휘며 야살스럽게 웃는다.
“서희야, 우리 떡볶이 먹으러 갈까? 그때 내가 사 왔던 떡볶이, 우리 싸우느라 결국 먹지도 못했잖아. 그래도 어차피 포장해 와서 먹는 거보단 가서 직접 먹는 게 훨씬 맛있을 테니까.”
“나 그 떡볶이 거의 다 먹었는데.”
“언제?”
“너 가고 냉장고에 넣어 뒀다가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어.”
서희의 너무도 현실적인 대처에 은호의 표정이 묘했다.
“내가 그렇게 울다가 갔는데……. 나한테 인연 끊자고 해 놓고 떡볶이가 목에 잘 넘어갔어? 그거 먹으면서 내 생각도 안 났고?”
“음, 아까우니까. 양도 되게 많았는데 하나도 안 먹고 음식물 쓰레기 만드느니 밥 대신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나는 그 며칠 동안 정말 죽을 것처럼 힘들었는데, 서희는 음식물 쓰레기 걱정, 환경 오염 걱정, 세상 걱정 다 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나 보네. 내 걱정만 빼고 다했네.”
은호가 서운한 듯 중얼거렸다.
“너 나 별로 안 사랑하지? 솔직히 말해 봐.”
분명 영화 보러 입장하기 전에는 “김서희는 날 얼마나 사랑하면 내가 고백도 모르는 척하고 그렇게 못난 짓을 했는데도 날 안 미워할까?”라면서 실실거렸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오자 어느새 또 이렇게 바뀌었다.
“나도 힘들었어. 밥도 해 먹거나 사 먹는 것도 안 내켜서 그냥 집에 남아 있던 그 떡볶이로 끼니 때우느라 꾸역꾸역 먹었던 거야. 그래서 맛도 잘 못 느꼈어.”
그녀가 토라진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며칠 동안 끼니를 떡볶이로만 때운 거야? 몸에 안 좋은데. 안 되겠다. 그 떡볶이는 나중에 먹자. 오늘은 건강하고 몸에 좋은 거 먹여야겠어.”
은호는 단단히 결심한 듯 서희를 이끌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