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9화
본문
08. 이유
강은호, 김서희 15세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느라 하교가 늦어진 은호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은호와 서희는 초등학교 졸업 후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여전히 함께 하교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오늘은 많이 기다리게 할 것 같아서 서희를 먼저 보냈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젤라토를 사서 서희네 집으로 향했다. 학교와 멀지 않은 가게여서 서희와 종종 가는 곳이었다.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사귀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학교에 파다하게 돌기도 했다. 게다가 항상 같이 집에 가기까지 하니 거의 기정사실처럼 여기는 아이들이 많았다.
주기적으로 잔뜩 긴장한 여자애들이 찾아와 서희와 사귀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는데, 그럴 때마다 은호는 딱 잘라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럼 그 여자애들은 안심한 얼굴로 돌아가서 헛소문이라고 당사자들 대신 열띠게 항변해 주었다.
사실 이제 은호는 그런 오해를 받아도 초등학교 때처럼 흥분해서 격렬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전에는 서희와 엮이는 게 쑥스럽고 창피한 마음이 들었지만 겨우 몇 살 더 먹었다고 여유가 생겼다.
초등학생 때도 제 또래 애들을 유치하다며 깔보는 성향이긴 했지만 중학생이 되니 그 마음이 더 강해졌달까. 남녀가 함께 있고 친하게 지내면 무조건 애정 관계로 엮으려 드는 아이들이 가소롭고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어느새 초록색 대문이 가까워졌다. 대문은 잠겨 있지 않고 반쯤 열린 상태였다. 은호가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 놓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낮이어도 혼자 있을 땐 대문 잘 잠가 놓으라고 했는데.’
미간을 구긴 은호는 속으로 잔소리를 가득 장전한 채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김서희……?”
서희는 마당에 나와 있었다.
“너 꼴이 왜 그래?”
눈을 끔뻑거리던 은호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물었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서희는 머리카락은 물론 교복까지 쫄딱 젖은 상태였다. 치마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텃밭에 물 주려고 했는데, 호스가 찢어져서…….”
서희가 멋쩍은 얼굴로 찢어진 부분을 가리켰다.
“그래서 이렇게 다 젖은 거야?”
“으응. 할아버지 오시면 고쳐 달라고 해야겠어.”
은호는 한숨을 내쉬고는 서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름이니 다행이지, 겨울이었으면 감기 다 걸렸겠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고 서희의 손목을 잡으려는데 불현듯 은호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은호야?”
은호의 눈동자가 흠칫 떨렸다. 바로 가까이에 보이는 광경에 은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서희가 입은 하복 블라우스는 흰색인 데다 소재가 매우 얇았다. 거기다 물에 젖기까지 하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젖어서 축 늘어진 블라우스가 몸에 착 달라붙어 윤곽을 만들고, 하늘색 브래지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왜 그래?”
물기로 촉촉해진 하얀 얼굴이 불쑥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서희가 걱정 어린 눈으로 저를 보고 있었다.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은호는 서희에게서 휙 등을 돌렸다.
“얼른 씻고 옷 갈아입어, 바보야.”
“바보?”
생소한 놀림에 서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호가 성큼성큼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서희도 그 뒤를 졸졸 쫓았다.
서희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는 동안에도 은호는 열이 오른 몸을 쉽게 식히지 못했다. 더 문제는 가슴 아래 뛰고 있는 심장이었다. 어찌나 크고 빠르게 뛰는지 귀를 꽉 채우며 쿵쿵 울렸다.
“……왜 이러는 거야.”
은호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미쳤나 고민하고 있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며 서희가 나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서희와 함께 젤라토를 먹었다. 서희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을 때마다 너무 맛있다며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반면 은호는 자신이 뭘 먹고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새하얗고 자그마한 얼굴을 연신 훔쳐보다가 이전까지 한 번도 의식한 적 없었던 서희의 가슴 쪽으로 시선이 내려갔다. 봉긋하게 부푼 가슴이 적당히 큰 티셔츠를 입었는데도 숨겨지지 않았다.
은호는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하는 몸을 식히기 위해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퍼먹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은호는 서희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은호는 밤에 꾸었던 꿈과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인지하곤 험악한 기세로 인상을 구겼다. 씨발. 같은 반 사내 녀석들은 모두 버릇처럼 쓰지만 상스러워서 저는 결코 입에 담지 않던 욕설까지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불을 젖힌 은호는 얇은 잠옷 바지 가운데 부분이 축축하게 젖어 진한 색을 띠는 것을 내려다보고는 턱에 힘을 주었다. 차라리 오줌을 지린 쪽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자괴감과 수치심이 밀려오고 있었다.
방에 딸린 욕실에서 급히 씻고 나와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었다. 허물처럼 벗어 놓은 어젯밤의 부끄러운 흔적을 노려보던 은호는 주위를 살펴 저것을 담을 만한 봉투를 찾았다. 빨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싹 내다 버려서 아예 없던 일로 깨끗이 지워 내고 싶었다.
쇼핑백을 겨우 하나 찾아서 그 안에 속옷과 잠옷 바지를 거칠게 쑤셔 넣었다. 집에 있는 휴지통에 버리는 것도 찜찜해서 아침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서둘러 밖에 나가 버리고 올 계획이었다.
방문을 닫고 복도로 나오는데, 마침 방에서 나오던 현호와 딱 마주치고 말았다.
“강은호, 너 어디 가?”
은호는 잠시 눈을 감으며 다시 속으로 험한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 너 왜 위아래 옷이 달라? 너 성격 이상해서 잠옷은 무조건 세트로 안 입으면 못 견디는 놈이잖아. 그 쇼핑백은 뭔데. 뭐가 들었어? 엄청 수상한데.”
하여간 재수 없게 눈치는 또 더럽게 빠르다.
무시하고 계단 쪽으로 향하려는 은호의 앞을 현호가 날쌔게 막아섰다. 은호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비딱한 눈초리로 현호를 노려보았다.
“비켜라.”
“오늘따라 내 동생이 더 예민해 보이는데, 왜 그럴까?”
“비키라고 했다.”
현호는 쇼핑백을 흘깃 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너 혹시 몽정이라도 했냐? 그래서 아침부터 이렇게 예민해?”
“…….”
“헐, 진짜였나 보네. 혹시 이번이 처음이냐?”
“…….”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냐? 나도 다 알아, 인마. 아직 몸만 덜 큰 악마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네가 평범한 애긴 애였구나. 이런 걸로 당황하는 거 보니까.”
은호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필이면 현호에게 상황을 들킨 게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제대로 건수를 잡은 듯한 현호의 의뭉스러운 미소를 보자 족히 1년은 넘게 이걸로 놀릴 거라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너희들 밥 먹으러 내려와라. 인우는 진즉 내려왔어.”
2층으로 올라온 성한이 대치 중인 두 아들을 의아한 눈길로 보았다.
“무슨 얘기 나누는 중이야?”
현호가 성한을 보며 즐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빠, 얘 오늘 처음으로 몽정했대요. 그래서 지금 엄청 예민 폭발이야. 오늘 다들 은호한테 신경 좀 써야 해요.”
저 자식을 진짜.
은호는 얄미운 현호를 후려치고 싶은 욕망이 거세게 치밀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현실을 파악하며 꾹 참았다. 은호는 아직 네 살 많은 현호보다 몸도 작고 힘도 약해서 몸싸움으로는 질 확률이 높았다. 아니, 솔직히 무조건 진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강현호가 여자 친구 혜령을 두고 최근에 학원에서 만나 친해진 후배랑 둘이 몰래 놀았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혜령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꽤 재밌어지겠지.
참고로 혜령은 대회마다 1위를 거머쥐는 복싱 선수다. 현호는 자신이 다니던 체육관에서 남자와 스파링 경기를 하는 혜령을 보고 반해서 줄기차게 쫓아다녀 사귀게 되었는데, 그녀가 장난삼아 펀치를 날릴 때마다 뼈가 부러진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혜령은 저번에 집에 놀러 왔을 때도 현호가 은호를 짓궂게 놀리는 걸 보더니 동생을 왜 괴롭히냐며 남자 친구의 등을 박살 낼 것처럼 때렸었다.
처음 반했던 그 주먹으로 죽사발이 되도록 맞는 현호를 상상하며 은호는 빠른 시일 내에 이 빚을 톡톡히 갚아 주겠다고 이를 갈았다.
“몽정? 은호가?”
성한은 잠시 은호를 빤히 보더니 이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두 번 끄덕여 주었다. 그러곤 왠지 아스라한 눈빛과 인자한 미소를 건넸다. 혼자 멋대로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아빠를 보자 은호는 왠지 더 짜증이 치솟았다.
“아빠, 이대로 넘어갈 게 아니라 조촐하게 파티라도 해야 하지 않아요? 축하 파티. 우리 막내가 드디어 진정한 남자가 됐는데. 뭐, 하다못해 케이크라도 잘라야지. 야, 네 친구들 싹 불러. 파티하게. 아, 서희. 서희도 꼭 부르고. 네 제일 절친이잖아. 서희한테 축하해 달라고 해.”
은호는 현호를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서희한테 말하기만 해. 진짜 죽여 버린다.”
“죽여? 네가 나를?”
현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 뭐 오늘은 넘어가 준다. 첫 몽정 땐 나도 꽤 예민했지. 엄청 당황스럽고 기분 이상했거든. 막 죄지은 것 같고.”
아침부터 신이 나서 깐족거리는 현호를 버려두고, 어쩐지 아까부터 계속 저를 흐뭇하게 보는 아빠도 무시하고, 은호는 성난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손에 든 쇼핑백을 당장 저 멀리 내다 버려야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 * *
수업이 전부 끝나고 은호는 서희의 반으로 찾아갔다. 서희는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김서희, 가자.”
교과서를 가방에 차곡차곡 담고 있는 서희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서희의 동그란 눈이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응. 근데 은호야, 그거 뭐야?”
“이거?”
은호는 손에 쥔 큼지막한 쇼핑백을 내려다보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선물이래. 어떤 애가 방금 주고 가던데.”
“와……. 저번 주에도 받았지? 은호 너 진짜 인기 많다.”
“근데 난 모르는 사람이 주는 선물 찝찝해서 안 써. 성의를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받긴 하지만. 안 받는다고 하면 보통 울거든. 다른 녀석들은 부럽다고 하지만 그거 진짜 피곤해. 인기 없는 쪽이 편하다는 걸 걔네는 절대 모르더라.”
남들이 들으면 혀를 찰 만한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잘난 척하느라 허세를 떠는 게 아니라 은호는 정말 나름대로 힘들고 피곤했다.
“아, 우리 반 여자애들도 다 네 얘기 하고 그래.”
“뭐라고 하는데?”
“너 잘생겼다고.”
은호는 어쩐지 목을 가다듬더니 의자에 앉은 서희를 힐끗 쳐다보았다.
“서희 넌.”
“응?”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 생긴 거.”
서희는 눈을 깜빡이더니 말갛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잘생겼어.”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은호는 마음에 없는 겸손을 떨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막을 수 없어 고개를 살짝 돌려야 했다.
“근데 너한테 잘생긴 기준이 있긴 해? TV 안 봐서 연예인 아무도 모르면서.”
“아.”
“나 말고 또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야?”
당연히 은호 너밖에 잘생긴 사람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 싶어서 던진 말이었다.
심통훈에게 괴롭힘을 당한 트라우마가 남아서인지 서희는 은호를 제외하고 남자애들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서희가 지금껏 만난 사람들 중 제가 제일 잘생겼을 거라는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
‘없다’는 대답이 바로 나오길 기대했는데 서희는 잠시 고민하듯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알맞은 답을 찾은 학생처럼 제법 자신 있게 말했다.
“인우 오빠.”
“……뭐? 인우 형?”
“응. 인우 오빠도 진짜진짜 잘생겼어.”
나는 진짜 잘생겼는데, 인우 형은 ‘진짜진짜’ 잘생겼다고? 김서희 너한테는 나보다 강인우가 더 잘생겼다는 소리야?
바로 따지고 싶었지만 이 생각을 말로 내뱉는 순간 얼마나 더 유치하게 들릴지 알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은호는 배신감과 서운함에 교실 바닥에 떨어진 조그마한 지우개를 발로 툭 찼다.
“아, 현호 오빠도 잘생겼어.”
삼형제 중 두 명만 잘생겼다고 한 게 마음에 걸렸는지 착한 서희는 굳이 강현호까지 끼워 넣었다.
“일어나. 얼른 가게.”
은호는 평소보다 퉁명하게 내뱉고는 휙 등을 돌렸다.
* * *
서희네 집에 도착해서 은호는 책을 읽었고, 서희는 오늘 받은 숙제를 하기 위해 교과서를 펼쳤다. 거실에 상을 펴고 앉아 교과서의 빈 부분을 채워 나가던 서희는 연신 은호 쪽을 힐끔거렸다.
은호는 소파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오늘따라 제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서희는 먼저 말을 걸까 하다가도 괜히 귀찮아할까 봐 꾹 참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희가 부엌으로 쪼르르 들어가는 동시에 책에만 고정되어 있던 은호의 시선이 서희가 간 방향으로 슬쩍 움직였다.
치, 내가 말 안 거니까 한 마디도 안 하는 것 봐. 강인우가 더 잘생겨서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나 보지? 김서희, 진짜 못됐다.
그렇게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생각에 휩싸인 상태였다.
부엌에서 서희가 무언가를 들고 나오자 은호는 잽싸게 다시 책을 집중해서 읽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서희는 쟁반을 상 위에 내려놓고 은호를 조심스레 불렀다.
“은호야.”
“왜.”
“수박 먹자. 할아버지가 학교 끝나고 와서 너랑 먹으라고 아침에 잘라 주셨어.”
은호는 새침하게 눈길을 움직여 쟁반에 놓인 수박을 보았다. 세모 모양으로 죽 늘어진 수박이 탐스러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맛있겠네.”
“그치?”
은호는 책을 덮고 내려와 서희 앞에 앉았다. 어른이 먹으라고 챙겨 주신 걸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사실, 자꾸 눈치를 살피는 서희를 보자 불퉁했던 마음이 저절로 풀리고 말았다.
서희가 딱히 잘못한 것도 없긴 했다. 거짓말 못하는 저 애가 잘생긴 걸 잘생겼다고 솔직히 말하는 걸 어쩌겠는가. 미적 기준이 까다로운 은호도 친형 인우의 외모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우리 집은 수박 네모나게 자르는데. 깍둑썰기로.”
“아, 정말?”
“응. 그래서 손 안 대고 포크로 찍어 먹어.”
서희는 수박을 집으려던 손을 멈칫했다.
“네모나게 다시 잘라 올까?”
“아니야. 잘라 오라는 말 아니었어. 그냥 우리 집에선 그렇게 자른다는 거였지.”
은호는 수박 껍질 쪽을 집어 과육을 크게 베어 물었다.
“진짜 달고 맛있다.”
“정말?”
“응. 너도 얼른 먹어.”
서희는 안심한 얼굴로 웃으며 수박을 집어 들었다. 하나를 다 먹고 껍질을 내려놓은 서희는 손을 닦고 일어섰다.
“은호야, 나 마당에 나갔다 올게.”
“화분 물 주러?”
“응.”
“나도 가.”
은호는 두 개째인 수박을 손에 든 채 서희를 따라갔다. 서희가 정성스럽게 키우는 화분에 물을 주는 모습을 구경하던 은호는 고개를 돌려 텃밭을 가리켰다.
“저기에 상추 키운다고 했나?”
“응! 그리고 이제 고추도 키워.”
“……고추?”
고개를 끄덕인 서희가 대뜸 해맑게 묻는다.
“은호 너 고추 좋아해?”
“아, 아니. 전혀.”
“난 고추 진짜 좋아해. 얼른 직접 키운 거 먹어 보고 싶어.”
매운 걸 좋아하는 서희의 고추 예찬이 펼쳐지자 은호의 미간이 깊게 굳어졌다.
은호는 서희의 입에서 고추라는 단어가 나오자 저절로 이상한 연상을 하는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신경질적으로 수박을 연신 베어 먹던 은호는 입 안에 남은 씨들을 한쪽 볼에 몰아넣고 서희에게 물었다.
“여기 밖에 씨 뱉을 데 어디 있어? 들어가서 뱉어야 하나?”
“씨? 아……, 여기 뱉어.”
서희가 대뜸 손바닥을 내밀었다. 두 눈을 끔뻑거리던 은호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내, 내가 네 손에 씨를 왜 뱉어? 내 침 묻은 걸 더럽게 네 손에 뱉으라고 하는 게 말이 돼? 너는, 애가!”
왠지 모르겠지만 은호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가득해져서 서희에게 버럭버럭 언성을 높였다. 깜짝 놀란 서희가 은호의 기에 눌려 우물거렸다.
“그게…… 우리 할아버지는 어릴 때 내가 과일 씨 뱉을 데 없으면 손에 뱉으라고 이렇게 내미셔서 나도 모르게……. 미안해.”
은호가 열이 오른 얼굴로 숨을 크게 뱉었다. 은호는 요즘 가족들 모두가 이상하게 볼 만큼 지나치게 예민한 상태였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히자 서희가 옆에서 눈치를 살금살금 살피고 있는 걸 뒤늦게 발견했다.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비죽 솟았다.
“갑자기 소리 질러서 놀랐지? 화내서 미안해, 서희야.”
“아니야, 은호야. 나 하나도 안 놀랐어. 진짜 괜찮아.”
착해 빠진 서희가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그 순진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더욱더 죄책감과 자괴감이 밀려왔다. 방금 화를 낸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 * *
밤에 이상한 꿈을 꾸는 것으로도 모자라 은호는 요즘 아주 나쁜 습관이 생겼다.
서희와 놀다가 집에 들어와 잠자리에 누우면, 불을 꺼서 깜깜한데도 서희의 얼굴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렇게 서희를 생각하고 있으면 또 이상하게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하고, 아랫도리가 점점 뜨거워졌다. 생각을 비우려고 해도 도무지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어느새 은호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제 물건을 잡고 문지르며 본능적인 쾌락을 찾아 나갔다. 가장 소중한 친구를 머릿속에 둥둥 떠올리면서.
이성을 단숨에 이길 만큼 중독성이 강한,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이 지나가면 은호는 그때부터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경이 되어 괴로운 얼굴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다음 날 또 이 몹쓸 짓거리를 하면 당장 나가 죽기로 매번 결심해 놓고도 매번 실패했다.
주변 친구 녀석들에게 고민을 숨긴 채 슬쩍 물어보니, 이제 막 성에 눈을 뜬 은호와 달리 다들 이미 자위의 대가들 같았다. 사귀는 여자애가 딱히 없는 녀석들은 가까운 옆집 누나나 친한 친구, 멀게는 동경하는 연예인을 떠올리며 그 짓을 한다고들 했다.
은호는 그제야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제 주변에 친한 여자애는 서희뿐이었다. 현호가 툭하면 거론하는 그 죽일 놈의 ‘진정한 남자’가 될 시기인 지금, 곁에 있는 친한 친구 서희가 제 더러운 욕망의 제물이 된 것이었다.
물론 상황을 납득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서희에게 더욱더 미안하기만 했다.
김서희는 왜 하필 나 같은 쓰레기랑 친구를 해서 이런 수모를 겪는 건지.
평소에는 절대 하지 않을 자기 비하가 늘어 갔다.
함께 집으로 향하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또래들보다 훨씬 순수하고 물정 모르는 서희가 해사하게 웃고 있자 죄책감에 절로 한숨이 빠져 나왔다. 최근 이 문제로 고민이 깊었던 은호는 결국 한 가지 해결책을 찾아냈다.
“서희야.”
“응?”
“나 오늘부터 같이 못 놀아.”
“……어?”
서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은호는 정면을 응시한 채 말했다.
“너 집에만 데려다주고 다른 곳에 가 봐야 해.”
“어, 어디?”
“운동 다시 하기로 했어.”
이 더러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기 전까지 주중에는 서희와 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로 결정했다. 서희와 얼른 다시 순수한 마음으로 놀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못된 버릇을 뜯어고칠 것이다.
“전에 배우던 합기도?”
“응. 그거랑 앞으로는 일찍 일어나서 등교 전에 수영하고 가려고. 수영도 원래 초딩 땐 대회도 나갈 정도로 꽤 했거든.”
“그렇구나…….”
“그래도 주말엔 놀 수 있으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알았지?”
은호는 농담처럼 웃고는 서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다 왔다. 얼른 들어가.”
은호가 대문 앞에 서서 말했다.
“은호 너…… 먼저 가.”
“알겠어. 할아버지 오실 때까지 아무한테도 문 열어 주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내 폰으로 연락해.”
동갑내기 열다섯 친구를 어린 동생 다루듯 한 은호가 손을 크게 흔들며 대문에서 멀어져 갔다.
“내일 봐!”
은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서희는 쓸쓸한 눈빛을 아래로 축 떨구었다.
* * *
서희 어머니의 기일, 은호와 부모님을 태운 차는 서희네 집에 다다르기 전에 멈추어졌다. 성한이 운전기사에게 세워 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왜 여기서 내려? 서희네 가려면 한참 걸어야 하잖아.”
은호는 의아해하며 오늘따라 말수가 적은 부모님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해가 내려앉은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꽤 매서워진 바람을 맞으며 은호는 성한과 경진 사이에서 걸음을 옮겼다.
“은호야.”
“응?”
“은호도 이제 열다섯 살이지.”
“그렇지, 뭐. 새삼스럽게.”
“오늘 어른들이 제사 전에 서희랑 은호한테 해 줄 말이 있는데, 아무래도 네가 많이 놀랄 것 같아서 일단 아빠 엄마랑 먼저 얘기하는 게 좋을 거 같아.”
무슨 얘기지.
서희와 같이 들어야 할 얘기가 대체 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은호는 문득 나중에 커서 우리 둘을 결혼시킬 거라는 말이라도 꺼내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부모님이 워낙 서희를 예뻐하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아, 혹시 서희를 며느리로 점찍어 놔서 계속 서희네 집에 정성을 쏟았던 걸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운동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단련하겠다고 다짐하고 최근 그 계획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었지만, 은호의 신경은 여전히 서희에게 쏠려 있었다. 이런 엉뚱한 상상을 무심코 하게 될 정도로.
은호는 정말 그런 말을 들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심했다. 솔직히 저는 상관없는데, 아니, 생각만 해도 좀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서희는 역시 놀라려나.
그때 성한이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음성으로 은호를 일깨웠다.
“은호야, 서희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있니?”
“사고로 돌아가신 거 아니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던 은호는 부모님이 침착하게 풀어 나가는 이야기를 듣고는 점차 얼굴이 굳어졌다. 발걸음마저 우뚝 멈추었다. 이내 핏기가 싹 가셔 창백해진 안색으로 은호가 입술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럼 나…… 나…… 구하다가 돌아가신 거야?”
부모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믿고 싶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다섯 살 무렵, 육아 도우미가 한눈을 판 사이 은호는 실수로 떨어트린 장난감을 줍기 위해 차가 빠르게 오가는 차도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작디작은 몸이 차체에 깔리기 직전 서희 어머니가 은호를 가까스로 구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주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환한 빛이 눈앞에 시리게 번쩍였던 순간. 동시에 제 몸을 다급히 감싸 안았던 누군가의 따뜻한 체온.
원래 지병이 있었던 서희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할 만큼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었으나 결국 사고의 여파로 몸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고작 3분이면 전부 설명이 될 만큼 단순한 이야기였지만, 은호는 눈앞에 보이는 온 세상이 어지러웠다.
서희 어머니가 나 때문에 죽었다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에 순간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은호야, 강은호! 정신 차려. 너 죄책감 가지라고 하는 말 아니야. 어르신이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서희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 말고 감사한 마음 가지고 살라는…….”
“서희가 엄마 없다고 놀림받고 괴롭힘당했던 거, 그거 다 나 때문인 거잖아!”
“은호야.”
“내가 서희 어머니 죽게 했는데 왜 그랬어? 어떻게 나를 서희 옆에 둘 생각을 해! 서희가 알면…… 서희가 알면 날 분명…….”
은호의 눈동자에 초점이 나갔다. 은호는 성한의 코트 자락을 움켜쥐며 다급하게 물었다.
“아빠, 서희도 이거 알아? 나 때문에 어머니 돌아가신 거 알고 있어? 어?”
“오늘 너희 데리고 와서 얘기해 보자고 어르신한테 미리 상의드렸어. 아직은 모르겠지만 이제 곧…….”
“안 돼. 안 돼. 싫어……. 말하면 안 돼.”
은호는 정신이 나간 것처럼 고개를 휘휘 젓더니 서희네 집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숨이 찰 정도로 달려가는데 대문 앞에 나온 서희가 보였다.
“은호야.”
“김서희, 들어오지 마.”
“어?”
“내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마. 알겠지?”
“은호야?”
은호는 서희를 놔두고 현관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를 반겨 주는 노인의 허리를 껴안고 얼굴을 묻었다.
“할아버지, 말하지 마세요. 서희한테…… 말하지 마세요. 제발요. 말하면 안 돼요. 서희가 저 다시는 안 볼 거예요.”
자상한 손길이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소년의 등을 느릿느릿 토닥여 주었다. 은호 네가 스스로 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 서희에게 말하라는 할아버지의 따스한 음성에 은호는 북받치는 안도감과 씻을 수 없는 죄악감을 동시에 느꼈다.
평생……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용서받을 수 있을 리 없다. 당연히 착한 서희는 괜찮다고 말해 주겠지만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더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은 서희를 지켜 주는 수호천사가 아니라, 서희의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서희의 인생을 망가트린 장본인이었으니까.
사람인데 어떻게 원망이 자라나지 않을까. 어떻게 미운 감정이 들지 않을까. 저조차 저를 용서할 수 없는데, 서희가 저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은호는 그날 서희 어머니 사진을 보며 빌었다.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 테니 서희 곁에 있게만 해 달라고.
서희를 향해 차오르던 알 듯 말 듯 했던 감정도 절대 찾을 수 없도록 마음 깊숙한 곳으로 묻었다.
* * *
서희가 벗은 몸으로 안겨 왔던 그날, 은호는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자신이 서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희의 몸을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욕망을 겨우 참아 내는 것만으로 버거웠으니까.
펄떡펄떡 몸 밖으로 뛰어나가기 직전의 심장을 겨우 붙든 채 방을 나왔을 땐 온전히 제정신으로 서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서희가 아파서, 열에 너무 취해서 그런 거라고 수없이 되뇌며 힘줄이 터질 만큼 주먹을 세게 그러쥐었다. 당장이라도 서희의 방을 향해 돌아설 것 같은 두 다리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집에 돌아와서 뻣뻣하게 굳어진 성기를 손에 쥐고 한참을 흔들었다. 아무리 참아도 끝내 이 지독한 열망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눈을 감은 채 알몸이었던 서희를 떠올리자 거의 바로 찐득한 정액이 손을 타고 울컥 흘렀다. 그녀를 안는 상상을 할 때마다 몇 번이고 뻐근하고 욱신거리는 성기에서 진한 욕망이 줄줄 터져 나왔다. 그 밤을 그렇게 지새웠다.
다시 제대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스스로가 치가 떨리게 혐오스러웠다. 철모르던 사춘기 소년에서 벗어난 지 오래인데 다시 서희를 욕망하려고 하다니.
오래전부터 간신히 억누르고 억지로 묻어 두었던 감정이 그때 일순 얼굴을 내민 것이었으나, 지금껏 늘 그래 왔듯이 은호는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서희의 마음조차 모르는 척하고 말았다.
서희에게 사랑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녀를 욕심낼 자격이 제겐 없으니까.
서희에게 사랑받아서도 안 된다. 자신은 그녀에게 미움받는 게 두려워 지금까지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비겁한 놈이니까.
애초에 서희를 탐내서는 안 된다는 죄책감보다는 그녀에게 원망을 받는 게 더 무서웠는지도 모른다. 서희와 사랑을 시작한다면, 그녀를 평생 기만할 순 없으니 결국 오래도록 숨겨 왔던 그 사실을 제 입으로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게 산산조각으로 부서질 테니까.
그것만은 절대 견딜 수 없기에 스스로 택했던 거다. 영원히 친구로 남는 쪽을.
‘은호야, 우리 관계…… 이제 정말 끝내는 게 맞는 거 같아.’
그런데도 결국 서희는 그와의 인연을 끊어 내고 싶다고 말했다.
대체 왜, 어디서부터 이렇게 잘못되었을까.
예전에 서희에게 사실을 그대로 털어놔야 했을까. 서희의 고백을 모른 척하지 말아야 했을까. 다른 남자를 바라보게 된 서희를……, 웃으면서 지켜봐 줘야 했을까.
서재에 들어서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던 은호는 천천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첫 번째 서랍을 열고, 제일 위에 놓여 있던 빳빳한 재질의 종이 한 장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섬세한 손길과 달리 종이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최대한 반듯하게 펴 보려고 노력했지만 구깃구깃함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데다, 이미 찢어졌던 것을 겨우 이어 붙여 놓은 것이라 한계가 있었다. 낡은 도화지 안에는 검은색과 갈색 외에 다른 색은 쓰지 않아 정갈하고 차분하게 느껴지는 단풍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애들이 놀리고 괴롭혀도 나 그 애들 앞에서 한 번도 운 적 없어. 앞으로도 전학 가거나 피하지 않을 거야.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네가 사실 나 같은 건 필요 없을 만큼 아주 강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르는 척했을 뿐. 네가 날 필요로 해야 내가 계속 네 곁에 있을 수 있으니까.
‘소원이 이루어졌어.’
‘……은호 너랑 친구 되는 거.’
좋아해.
‘은호야, 안아 줘.’
‘좋아해.’
‘네가…… 너무 좋아, 은호야.’
나도 정말 좋아해.
‘나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어. 근데 이제……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힘조차 없어. 너무 명확하게 보여서. 내가 너한테…… 오래 질리지 않는 장난감이었을 뿐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널 잃기 싫어서. 네 곁에 영원히 있고 싶어서.
서희에게 인연을 정리하자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이 수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상상만으로도 생살을 도려내는 고통이었다.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건 삶을 끊어 내는 것과 같았다. 김서희가 없는 강은호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심장이 뜯겨 나갈 것처럼 미치도록 서희가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