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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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미친놈
서희는 웅장하게 느껴지는 저택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종종 놀러 오기도 했고, 이곳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살았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스케일이다. 지하 2층과 지상 2층으로 이루어진 이 집에는 호화롭게 꾸며진 정원과 넓은 수영장도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열렸다. 서희는 마당에 난 돌길을 따라 차분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희 왔니?”
아치형의 문으로 들어서자 경진이 서희를 반겨 주었다. 퍽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다정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나 곧 경진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어졌다.
“우리 귀한 아드님, 방에 틀어박혀 계셔.”
경진이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쪽을 한번 날카롭게 흘기며 덧붙였다.
“어제부터 곡기도 끊으셨어.”
철없는 아들에게 이골이 났다는 듯 비아냥거리는 경진을 보며 서희는 멋쩍게 미소를 띠었다.
“무슨 뜻이겠니? 서희 내 앞에 데려다 놔라, 이거지. 강은호, 저 녀석은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원.”
경진은 손가락 끝으로 이마 한쪽을 짚으며 미간을 좁혔다.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어서 말 안 듣는 아들놈들을 셋씩이나 낳았는지.
열일곱 무렵에도 은호가 서희에게 뭐 서운한 게 있었는지, 저렇게 방에 틀어박혀서 밥도 안 먹는다고 고집을 부려 댄 적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경진은 오늘처럼 서희를 집으로 불러들여야 했다.
그때도 서희에게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열일곱 살 먹은 녀석이 떼쟁이 일곱 살처럼 굴어서 미안하다고 연신 사과했었는데, 이제 10년이란 세월이 흘러 스물일곱이 되어서도 저런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서희 앞에서 도무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러나 서희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더라도 막내아들 놈 밥은 먹여야지 싶은 마음에 어쩔 수 없었다.
최근 들어 계속 입맛이 없다며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어제는 아예 한 숟가락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희를 못 만난 지 오래돼서 밥이 목구멍에 안 넘어간단다.
헛소리 말고 먹으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다 죽어 가는 초췌한 얼굴을 보니 얼핏 불쌍해져서 욕도 안 나왔다. 밥이 모래알처럼 안 넘어가는 게 연기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아니까.
은호는 서희를 못 만나는 날이 길어질수록 눈에 보이게 상태가 나빠졌다. 회사 일이 바빠서 못 만나는 상황이면 그나마 나았으련만. 현호에게 대충 들으니 둘이 어떤 일로 좀 다툰 탓에 사이가 틀어진 모양이었다. 서희와 싸우고 계속 못 풀고 있는 상태에서 은호가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서희 너도 주말엔 쉬어야 하니까 웬만하면 안 부르고 싶었는데 저 녀석이 그…… 특유의 침울한 척하는 표정, 사람 마음 약하게 만드는 그 처연한 표정. 알지?”
서희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더 잘 알겠지. 쟤가 너한테 그 표정을 제일 많이 써먹을 테니.”
아주 어릴 때나 주로 써먹던, 그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처량한 표정을 오랜만에 맞닥트렸더니 경진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래, 엄마가 서희 불러 줄게”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내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해서 너까지 고생시키네.”
“아니에요. 절대.”
서희가 그런 말씀 마시라며 손사래를 친다.
대체 어르신은 어떻게 교육하셨기에 애가 저렇게 착하고 예쁠까. 서희와 은호가 지금까지 절친인 게 새삼 신기할 지경이다.
가식과 거짓이라는 걸 모르는 저 순수한 얼굴의 서희와 달리 은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른들을 손바닥에 놓고 골려 먹는 사악하고 맹랑한 녀석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무조건 가져야 직성이 풀릴 만큼 욕심도 많았다.
아이가 갖고 싶다는 걸 전부 사 줘서는 안 된다는 교육 철학을 가진 경진과 성한은 첫째 인우와 둘째 현호까지는 그 철학을 지켜 나갔다. 장난감을 세 개 가지고 싶어 하면 신중하게 하나만을 고르게 했고, 두 아이는 아쉬워하면서도 수긍하며 다른 두 개를 내려놓았다.
반면 은호는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옆에 지나가던 모르는 사람마저 홀려서 대신 사 주고 싶어 할 만큼 별 애교와 아양을 다 떨며 애원했다.
경진과 성한이 끝내 사 주지 않으면 저를 예뻐하는 조부모에게 속살거려서 보란 듯이 원하는 장난감을 전부 손에 넣었다. 그런 식으로 어릴 적 은호의 장난감이 꽉 채워진 방만 두 개가 될 정도였다.
대신 물건에 질리기도 빨리 질려서 일주일 이상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없었다. 이건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호는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이익을 줄 사람과 아닌 사람을 빠르고 철저하게 구분해서 요긴하게 써먹곤 했다. 자그마한 어린애가 사람을 이용 대상으로만 보며 정을 주는 법은 없으니, 부모인 성한과 경진으로서는 쟤가 이다음에 커서는 어떨지 불안이 스멀스멀 등을 타고 올라왔다.
어릴 땐 조숙한 면이 남달라서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철이 안 들어서 이마를 부여잡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은호가 유독 어른스럽게 굴지 못하는 때는 서희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였다. 이런 부작용도 있지만, 그래도 선하디선한 서희와 가깝게 지낸 덕에 악랄한 인간으로는 자라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올라가 봐. 은호랑 좀 놀다가 내려와서 저녁 먹고 가고. 인우 아빠가 오랜만에 서희 본다고 저녁 일정 취소하고 온다니까 거절하면 안 된다?”
“네.”
웃으며 답한 뒤 서희는 천천히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갔다. 1층도 그렇지만 2층 역시 층고가 워낙 높아 사람을 조금 위축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처음 온 사람들은 잠시 헤맬 정도로 넓은 집이었지만 그녀에겐 위치나 구조가 익숙했다.
똑똑.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오진 않았지만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분명 방으로 들어왔는데도 또 다른 집의 거실 같은 느낌이었다. 거실 같다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게 욕실은 물론 은호가 혼자 쓰는 서재, 그리고 러닝머신과 몇 가지 근력 운동기구를 들여놓은 체력 단련실로 통하는 방문도 보였다. 한쪽에는 미니바와 냉장고가 있고, 가운데에는 대형 사이즈 TV와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서희는 시선을 멀리 뻗었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커다란 침대. 그 위에 장신의 남자가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사람이 안에 들어온 기척을 못 느꼈을 리도 없는데 은호는 벽 쪽으로 휙 돌아누울 뿐이었다.
그의 무시에도 그녀는 뻘쭘한 기색 없이 다가갔다. 침대 끄트머리에 살짝 걸터앉아 그의 뒤통수에 대고 인사했다.
“은호야, 나 왔어.”
“…….”
“아직 화났어?”
자는 것도 아니면서 묵묵부답이다.
“나랑 여전히 말하기 싫은 거야? 그럼 오늘은 일단 돌아갈…….”
서희가 침대에서 엉덩이를 들려는 순간, 벌떡 일어난 커다란 몸이 그녀를 덮쳤다.
그에게 폭 안긴 신세가 된 그녀는 몰래 숨을 들이켰다. 놀라서라기보다는 마음이 두근거려서.
“김서희. 너 왜 이렇게 못됐어?”
은호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꺼냈다.
“응?”
“적당히 좀 달래 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바로 가려고 하는데?”
은호가 서희의 머리칼에 뺨을 살짝 비비적거렸다.
진짜 못된 녀석이 누군데.
네 친밀하면서도 무신경한 애정 표현에 늘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도 모르면서.
“너 그동안 나 보고 싶지도 않았지? 나만 너 보고 싶어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은호의 투정을 잠시 들어 주던 그녀가 제 어깨를 감싼 단단한 팔을 풀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서희가 몸을 떨어트려 앉자마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서희는 그것마저 거부하며 손을 뒤로 숨겼다. 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미안. 선배가 너랑 너무 가깝게 붙어 있는 거 안 좋아할 거 같아서. 앞으로는 자제했으면 좋겠어.”
“뭐?”
그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요즘 들어 은호의 지나친 스킨십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가짜 연애 핑계로 이것 또한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당분간 그가 조금 서운해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친구랑 손도 못 잡아?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안지도 못해? 이런 사소한 것도 이해 못 해 주면 그런 남자는 그냥 버리…….”
“만약 선배가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여자인 친구랑 깍지 껴서 손잡고 포옹하면 난 질투 나고 마음 아플 거 같아.”
서희는 지금의 뜻을 절대 철회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답했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화해하러 온 건데 이러다 또 싸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히 은호가 짧은 한숨을 쉬곤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에 그렇게 화내고 가서 미안해. 너무 놀라고 서운해서 그랬어.”
“나도 바로 말 못 해서 미안해. 너 서운한 것도 이해해.”
순순한 사과를 주고받자 그들을 감싼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잠시 침묵하던 은호는 무언가 꺼려지는 말을 꺼내려는 사람처럼 눈빛이 일그러졌다.
“그 남자, 정말로 좋아하는 거 맞아?”
“……응. 좋아해.”
“뭐 하는 사람인데?”
세게 쥐어지려는 주먹을 풀며 그가 애써 여유로운 어조로 물었다. 그 역시 그녀와 다시 다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사진작가.”
“성격은.”
“쿨하고 유쾌한 사람이야. 친화력도 좋고.”
“왜 좋아하게 됐어?”
“어?”
물어볼 거라고 예상 못 했던 질문이어서 서희는 말문이 탁 막혔다.
“왜 하필 그 선배라는 남자가 네 첫사랑이 된 거냐고. 남자한테 관심 전혀 없었잖아, 너.”
“그게…….”
어떤 모습에 반하게 됐는지는 재우가 알려 준 시나리오에 없는데…….
서희는 조마조마해졌다. 여기서 더 머뭇거리다가는 은호가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의 뇌리에 인상 깊었던 재우의 한마디가 불현듯 떠올랐다.
“나한테 특별하다고 해 줬어.”
“뭐?”
“내 성격 이상하고 특이하지 않냐고 하니까 선배가…… 난 특별한 거라고.”
서희는 왠지 스스로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러워서 뺨이 붉어졌다. 그러나 은호는 그녀가 재우의 말을 곱씹으며 새삼 다시 설레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눈빛이 서늘해졌다.
“나한텐 그거 너무 당연해서 말 안 했던 건데.”
“어?”
“네가 특별한 사람인 거 너무 당연한 거여서 굳이 말 안 했다고.”
서희는 그제야 은호와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이 격렬한 질투로 얼룩져 있었다.
질투라니. 자기한테 반했다고 하면 또 못 알아들은 척할 거면서, 다른 남자한테 반하는 건 싫다는 걸까.
그녀를 향한 은호의 마음이 나 같긴 싫고 남 주긴 아까운 심보라는 재우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런 게 아니라고 확고히 부정했던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도 같다. 은호를 안 보는 동안 조금쯤은 무뎌지지 않았을까 기대했던 가슴이 여지없이 시큰거린다.
“어떤 사람인지 내가 한번 봐야겠어.”
“……선배를? 은호 네가?”
“그럼 나한테 소개도 안 해 주려고 했어?”
은호의 음성이 차갑게 굳었다.
“아, 아니. 근데 일단 선배한테 물어보고…….”
“물어보지 말고 통보해. 김서희랑 사귀고 싶으면 일단 강은호한테 검사 맡고 허락받아야 한다고. 내가 네 하나뿐인 가족이자 친구인데 당연하잖아?”
은호가 입매를 비딱하게 늘어뜨렸다.
억지도 저런 억지가…….
그러나 그녀는 은호가 한번 고집을 부리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만남을 대비해서 재우와 다시 작전 회의를 해야 할 듯싶다.
“……알겠어.”
은호는 자신 때문에 서희와 재우가 만나는 날이 더 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 * *
‘숲속의 정원’이라는 카페는 이름 그대로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얼핏 별장처럼 보이는 근사한 느낌의 통나무집이었다. 도심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도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이 꽤 되었다.
몇 년 전 서희와 은호도 이곳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은호가 이번에 재우와 만날 약속 장소를 이 카페로 지정했다.
외곽이라 먼 데다가 거의 꼭꼭 숨겨 놓은 듯한 위치에 있어서 처음 오는 사람은 헤매기 십상이었다. 처음 사람을 소개하는 자리인데 아무리 봐도 적절치 못한 장소 선정이었다.
그러나 은호의 뜻은 굳건했고, 재우도 길을 찾기 어려울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서희에게 길눈이 밝아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며 시간 맞춰 오겠다고 장담했다.
은호의 차로 그와 함께 카페에 도착한 서희는 먼저 시간을 확인했다. 정했던 약속 시간까지 5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입구에서 테이블을 전체적으로 훑는데 창가 쪽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재우 역시 그들을 발견하고는 서희에게 친근하게 눈짓했다.
서희와 은호가 가까이 다가가자 재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마주하게 된 두 남자가 적당히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주변에 있던 몇몇 손님들이 그들을 흘깃거렸다. 쉽게 이목을 끌 만큼 특출난 미남자들이긴 했다.
게다가 이런 쪽에 둔감한 서희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두 남자는 오늘 머리와 옷차림에 한껏 신경을 쓰되, 그 신경을 쓴 게 들키지 않을 만큼 시크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멋을 내고 왔다.
한쪽은 베스트 프렌드이자 소울 메이트인 김서희에게 꼬인 벌레를 떼어 내기 위해, 다른 한쪽은 첫사랑이자 오랜 짝사랑 상대인 김서희를 어장에 넣고 마음고생시키는 놈 상판대기를 보기 위해 고대했던 자리였다. 스스로 잘생기고 잘났음을 아주 잘 인지하는 사람들답게 완벽한 겉모습으로 초장부터 상대의 기를 죽일 생각이었다.
날 선 스파크가 조용히 튀는 듯한 두 사람 사이를 서희가 끼어들었다.
“제 친구 은호예요. 강은호.”
그녀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은호를 힐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은호야, 여긴 재우 선배.”
재우는 씩 웃으며 은호를 응시했다.
“서희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서희랑 오래된 ‘친구’시라고요.”
친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의뭉한 미소를 짓는 재우로 인해 은호는 심기가 확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그깟 소꿉놀이하던 친구보다는 얼마 안 됐다 해도 애인 사이가 훨씬 가깝다고 경고라도 하는 눈빛이었다.
“선배가 더 일찍 오셨네요. 헤매진 않으셨어요?”
“헤매긴. 찾기 쉽던데?”
재우가 서희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나긋나긋한 어조로 짧은 대화를 주고받는 두 남녀. 편해 보이면서도 어색해 보이는 묘한 분위기. 막 연애를 시작한 남녀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기류에 은호는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정말 저 자식이랑 사귄다고…….’
은호의 냉랭한 눈길이 재우를 관찰하듯 살폈다. 서희의 애인이라는 이유로 얼굴을 보기 전부터 몹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재우를 마주하는 순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더 싫어질 거란 확신이 생겼다.
그래도 생글거리며 웃는 낯과 달리 재우의 속이 그다지 여유롭지 않음은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서희를 향해 무던하게 웃고 있지만 방금 저를 향했던 날것의 눈빛만 봐도 상당히 고집스럽고 자존심이 강할 거라는 추측이 갔다.
사실 이건 첫인상만으로 내린 추측이 아니다. 재우를 만나기 전 성한에게 부탁해서 그에 대해 알아봤다. 물론 서희가 모르게.
떳떳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사귄다는 남자가 어디서 어떻게 굴러먹은 놈인지 그가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쁜 짓을 할 생각은 아직 없고, 일단 상황 파악을 위한 뒷조사다. 이 말을 또 현호의 앞에서 중얼거렸다면 ‘아직’ 없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잔소리를 했을 테지만.
재우가 잘생긴 축에 속한다는 건 은호도 순순히 인정했다. 애초에 어린 시절부터 늘 옆에 자신이 있었는데 서희의 눈이 높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저보다는 당연히 떨어지긴 해도 저 정도면 뭐, 썩 봐 줄 만한 얼굴이었다. 만약 서희가 한참 못생긴 놈을 데려와서 첫사랑이라느니 애인이라느니 했으면 훨씬 열이 치솟았을 것 같으니, 그나마 차라리 잘생긴 편이 나았다.
외모가 준수해서 대학 시절에는 꽤 알아주는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대학 때만큼은 아니어도 몇 번 여자를 사귀긴 했고, 포토그래퍼로 일하는 지금도 모델들이나 연예인들에게 대시가 끊이지 않는다던데. 사귀는 기간이 극히 짧은 것만 봐도 진지하게 사람을 만나는 스타일이 아니다.
지금껏 곁에 달라붙는 여자들로 제 애인한테 마음고생은 시켜 봤어도 본인이 애인 주변의 남자 때문에 마음고생한 경험은 없겠지. 기세등등하고 자존심 강한 남자가 애인 곁에 있는 소꿉친구를 어디까지 참아 줄 수 있을지, 오늘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재우와 얼핏 눈이 마주친 은호는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앉자, 서희야.”
은호는 재우가 끼어들 틈도 없이 자연스럽게 서희를 창가 쪽으로 앉히고 바로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당황한 서희가 아직 서 있는 재우를 힐끔 보았다. 재우는 애써 괜찮다는 듯 웃고는 그들의 맞은편에 앉았다.
“낯선 곳에서 만나자고 해서 놀라셨죠? 서희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던 카페인데, 둘 다 졸업하고 직장 생활 하면서 바쁘다 보니 몇 년 동안 못 와서 오늘 꼭 데려오고 싶었거든요.”
“네. 괜찮습니다. 저도 여기 들어오자마자 서희의 취향이란 생각이 들면서 기분 좋아지던데요. 나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김서희가 조용히 차 마시면서 창가 너머로 나무들도 실컷 볼 수 있으니 당연히 좋아할 만하죠.”
재우는 그렇게 말하곤 서희와 눈을 맞춘 채 빙긋 웃었다. 은호의 눈썹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감히 제 앞에서 서희에 대해 아주 잘 안다는 듯이 주름을 잡는 말투가 몹시 거슬렸다. 김서희가 한 숟가락 뜬 밥을 평균 몇 번 정도 씹고 삼키는지까지 속속들이 다 아는 이 강은호 앞에서 말이다.
곧 주문했던 차가 세 사람 앞에 놓였다. 둥글고 낮은 컵을 들어 카푸치노를 한 모금 홀짝이는 서희를 본 은호가 싱긋 웃었다.
“묻었잖아.”
그가 냉큼 거품이 묻은 서희의 입술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닦아 냈다. 그러고는 검지 옆 부분에 묻은 거품을 혀로 쓸어 없앴다.
그 모습이 왠지 무척 야했다. 눈을 살짝 내리깐 채 손가락을 혀로 느릿하게 핥았을 뿐인데 색기가 흘러넘쳤다.
서희와 재우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곧 서희의 얼굴은 살짝 붉어졌고, 재우의 꽉 다물린 입술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참, 너 오늘 아침에 자는 동안 내가 집 청소 싹 하고 빨래 마른 것도 다 걷어서 갰는데, 현관 나설 때까지 모르더라?”
은호는 둔한 서희가 귀엽다는 듯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희는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은호는 뭐가 문제인지 전혀 모른다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재우에게 말했다.
“서희는 집안일 체질이 전혀 아니에요. 게으른 건 절대 아닌데 혼자 사는 데다가 일하느라 바쁘니까 결국 몰아서 하게 되는 거죠. 사람 불러 준다고 해도 워낙 말을 안 들어서 주말엔 보통 제가 와서 많이 하거든요.”
자신의 방 청소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서희 집 청소는 너끈하게 해내는 은호였다.
재우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은호는 그를 향해 ‘범상치 않은 관계라는 걸 슬슬 깨달았으면 적당히 떨어져 나가라’는 시선을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보냈다.
“서희 손은 그림 그리는 손이라서 궂은 집안일은 절대 못 하게 하고 싶어요. 물 한 방울 묻히면 안 되는 귀한 손이니까요.”
“아, 하긴. 그렇죠.”
재우는 얼핏 짓궂은 눈빛으로 서희를 보았다.
“나랑 결혼하면 진짜 진심으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할 자신 있는데. 나한테 시집올래?”
“네……?”
서희가 놀라서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순진한 반응에 크게 웃은 재우는 테이블 쪽으로 팔을 뻗더니 서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톡 건드렸다.
“농담한 거야. 왜 이렇게 귀여워, 너?”
“아…….”
서희는 그제야 재우가 은호의 은근한 도발에 응하기 시작했음을 눈치채곤 멋쩍게 제 이마를 감쌌다.
재우의 결혼 발언과 친근하게 서희의 이마를 건드리는 모습에 은호는 그 옆에서 석고처럼 굳은 지 오래였다.
‘결혼?’
은호는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정도로 더러워졌다. 감히 누구를 넘보는 거야, 저 자식이.
농담이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웃기지도 않았다. 서희가 잠깐 만나 준다고 들떠서 벌써 결혼까지 생각하며 김칫국을 마시는 게 눈에 훤하다.
“서희는 끼 부리는 남자 안 좋아하는데…….”
가까스로 험한 욕을 삼킨 은호가 애써 웃으며 말을 흘렸다.
결혼 어쩌고 한 것도 열받지만 서희의 이마를 건드린 것도 몹시 짜증스러웠다. 날리는 바람둥이였다더니 여자를 설레게 하려고 행동 하나하나까지 계산해서 여우 짓을 하는 모습이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아…….”
재우는 의미 모를 감탄을 흘리더니 은호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강은호 씨하고 서희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계속 그냥 친구인 거군요.”
‘끼는 네가 더 부린다, 이 새끼야’라고 내뱉는 듯한 재우의 눈빛을 읽은 은호는 입매를 비틀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말로 나누는 대화보다 서희 모르게 눈빛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더 많은 두 남자였다.
서희 앞에서는 늘 저절로 눈웃음을 살살 치게 되고, 서희가 귀여울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방금 거품이 묻은 입술도 다정하게 닦아 주긴 했지만, 그런 건 끼를 부리는 게 아니라 그냥 습관이고 일상이었다.
친구 사이에 무슨 끼를 부린다고. 서희가 그런 다정함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서 자꾸 본능적으로 하게 될 뿐이다.
“서희를 대학 때부터 좋아하셨다고 들었는데.”
“네. 졸업하고도 계속 못 잊을 정도로 좋아했죠.”
“아, 그럼 졸업하고 지금까지 연애는 전혀 안 하셨겠네요? 서희를 못 잊고 있었으니까.”
천연덕스러운 은호의 물음에 재우의 낯이 일순 굳어졌다. 그가 대답을 못 하자 은호는 어쩐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물었다.
“설마…… 지금 침묵은 서희를 마음에 두고도 다른 여자들을 만나셨다는 뜻일까요?”
물론 은호는 재우의 연애 이력을 이미 자세히 파악한 상태였다. 타격을 줄 만한 사실을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그였다.
“만나긴…… 했지만.”
은호는 재우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어두워진 얼굴로 서희를 보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희야, 괜찮아?”
졸업 후 지금까지 못 잊었다면서 연애는 꾸준히 했다는 저 모순적인 바람둥이 자식이 그럴듯하게 지어낸 달콤한 말에 속았을 서희가 안쓰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 은호의 모습을 보며 재우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처음만 해도 세 살이나 어린 녀석이 속 보일 정도로 저를 도발하는 듯한 유치한 행태에 픽 웃어 줄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녀석이 사람을 제대로 열받게 하는 재주가 특출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고난 본질 자체가 재수 없달까.
자신이 그동안 연애를 했든 안 했든 서희야 신경도 안 쓰겠지만 재우는 은호의 말에 조금 마음이 찔리긴 했다. 서희를 얼핏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 그 여자들을 이용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데 두 남자의 조용한 신경전이 계속되는 와중에도 서희는 아까부터 창가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지금도 어두운 눈동자로 카페 밖을 바라보며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녀의 심각한 분위기에 은호와 재우는 눈치를 살폈다. 자신들 때문에 혹시 서희가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어서.
마침 그들의 테이블을 카페의 주인인 중년 여성이 지날 때였다. 서희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저, 사장님.”
“네. 뭐 필요하세요?”
“저기에 큰 상수리나무가 있었는데 보이지가 않네요. 혹시…… 지난 태풍으로 쓰러졌나요?”
서희가 창가로 비치는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며 물었다. 서희의 말대로 어딘가 허전한 느낌으로 비어 있는 자리가 보인다. 이전까지 나무가 서 있었음이 쉽게 짐작이 갔다.
“네. 저번에 태풍하고 폭우가 정말 심했잖아요. 그때 좀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쓰러진 거 있죠. 저희 가게 상징이나 다름없는 나무였는데.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저도…… 좋아하는 나무였어요.”
가게 주인과 서희가 나무를 향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은호와 재우는 왠지 숙연해진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는 자신들과 죽은 나무를 깊은 마음으로 애도하는 서희의 수준 차이를 실감한 것이었다.
* * *
식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은호는 재우를 떠올리며 턱에 불끈 힘을 주고 있었다.
재우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그는 도무지 나가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서희한테 강은호 씨 같은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녁을 먹기 위해 간 레스토랑에서 서희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재우가 한 말이었다. 그동안 서희 모르게 눈빛으로 험악한 대화를 함께 나눴던 주제에 저런 가식적인 말을 뱉으니 은호는 어이가 없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네. 어릴 적 가장 친한 친구가 나무였던 서희가 은호 씨 덕분에 외롭지 않게 자랐을 테니까요.’
재우가 한 말에 은호는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서희가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해 힘들었던 이야기를 재우에게 털어놨음을 알 수 있었으니까.
지금껏 서희는 꽁꽁 싸맨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은호 외에 다른 이에게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저 남자에게 전부 말한 거다. 서희가 저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나며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앞으로는 친구인 은호 씨 대신 연인인 제가 서희를 외롭지 않게 할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차재우가 서희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진지하고 빈틈없는 눈빛. 은호가 어떤 짓을 해도 서희를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확고하게 빛났다.
그때부터 입 안이 바싹 마를 만큼 초조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서희와 집으로 향하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남자, 너무 바람둥이야.”
은호는 차를 몰며 조수석에 앉은 서희에게 말했다.
“너랑 안 맞아.”
“나랑 만나기 전에 여자들 사귄 건 상관없어.”
그녀가 창문 밖을 응시한 채 덤덤하게 대꾸하자 은호는 더욱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네가 남자를 몰라서 그래. 여자 밝히는 놈들은 그 버릇 끝까지 못 고쳐. 그 남자도 지금은 너한테 빠져 있어도, 여자 갖고 노는 버릇 못 고치고 금방 다른…….”
“재우 선배 모욕하지 마. 듣기 불편해.”
서희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화를 잘 내는 법이 없던 김서희가 애인 욕 좀 했다고 서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은호는 기분이 확 상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싸웠다가 화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고작 그딴 남자 때문에 서희와 자신의 견고한 관계가 자꾸 벌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내가 이유도 없이 이런 말 하겠어? 너 걱정해서 하는 말인 거 알잖아.”
그가 다정하게 속삭이듯 말하자 그녀의 말투도 조금 누그러졌다.
“알겠는데…… 지금 그런 말은 좀 지나친 것 같아. 선배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게 절대적인 믿음을 갖는 게 위험하다는 거야. 그런 사람 아니라고? 사람 믿었다가 뒤통수 맞는 인간들 천지에 널렸어. 나 네가 또 사람 때문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
서희는 대답이 없다.
“너 두고도 한눈팔 거라는 말은 비약이더라도 그 남자가 여자에 능숙한 사람인 건 맞잖아. 넌 연애가 처음이라 아무것도 모르는데, 만약 그 남자가 너 이상한 쪽으로 구슬리면…….”
“이상한 쪽으로 구슬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데? 잠자리 얘기하는 거야?”
은호는 조금 놀랐다. 어릴 때부터 워낙 수줍음 많던 성격이어서 서희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그의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그녀가 마른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안 입은 채로 너한테 안아 달라고 한 적도 있는데 이런 대화 부끄러워하는 게 더 우습잖아.”
“……김서희.”
“나 초등학생 아니고 스물일곱, 성인이야. 누가 구슬린다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결정할 나이잖아. 선배랑 자고 싶으면 잘 거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니까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은호가 돌연 핸들을 거칠게 돌리더니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매섭게 응시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 남자랑 잔다고?”
“은호야.”
“그 자식이 벌써 너한테 수작질 부렸지? 자기하고 안 자면 오래 못 사귈 거라고 협박해? 그래서 너 이러는 거지?”
“말이 되는 소리를…….”
“네가 한 말이 훨씬 말 안 되는 소리잖아! 지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식하고 잠자리하겠다는 말이 네 입에서 나오는 게 말이 돼? 그 자식이 너한테 세뇌했지? 섹스 같은 거 별 의미 없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고 그딴 개소리라도 지껄였어? 너 그래서 이래?”
화가 치밀어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뇌가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서희가 연애한다는 말을 했던 순간부터 차곡차곡 쌓였던 분노가 전부 모여서 지금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 새끼한테 전해. 김서희한테 손끝 하나 대는 순간 죽여 버린다고.”
“……뭐?”
서희는 은호가 한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나 오늘 네가 선배한테 무례하게 굴었던 것도 다 참았어. 너도 나 때문에 서운한 마음 들어서 그러는 거라고 이해했으니까. 근데…… 너 이러는 거 이제 정말 이해 못 하겠어.”
서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후 안전벨트를 풀었다.
“너 뭐 하는 거야.”
“거의 다 왔으니까 여기서부터 혼자 갈게. 부탁이야. 혼자 가게 해 줘.”
서희는 은호를 외면한 채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렸다.
* * *
결국 또 은호와 싸우고 말았다.
마당에 나온 서희는 제 마음처럼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은호가 요즘 저 때문에 날카로워져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날 자신까지 그를 몰아붙였는지 후회가 든다.
‘아무것도 안 입은 채로 너한테 안아 달라고 한 적도 있는데 이런 대화 부끄러워하는 게 더 우습잖아.’
‘나 초등학생 아니고 스물일곱, 성인이야. 누가 구슬린다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결정할 나이잖아. 선배랑 자고 싶으면 잘 거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거니까 네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하고 말았던 건 은호가 야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은호는 그녀가 그를 좋아한다고 했을 땐 뻔히 나와 있는 답을 모르는 척하며 그 감정을 완전히 거부했다. 그래 놓고 그녀가 재우를 좋아한다고 한 말은 의심 없이 바로 믿어 버린 것이다.
은호에게 느꼈던 감정이 우정을 사랑으로 착각했던 것뿐이었다는 터무니없는 변명도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서희가 재우와 만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면서도 그녀가 저를 좋아하는 것보단 재우를 좋아하는 것을 더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 같았다.
‘그 새끼한테 전해. 김서희한테 손끝 하나 대는 순간 죽여 버린다고.’
단순히 친구를 걱정한다고 여기기엔 너무 지나친 말이었다. 누가 봐도 그가 보이는 반응은 비정상적이었다.
그러나 은호는 그녀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오래된 우정만으로 그런 격한 반응을 보일까?
서희는 이제 그가 저를 친구로 아낀다는 마지막 믿음조차 손에서 놔 버리게 될 것 같았다. 그가 저에게 가진 감정은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저…….
서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음을 아프게 짓누르는 생각을 애써 떨치고 집 한쪽 벽 앞에 옹기종기 놓인 화분들에 물을 주었다.
다시 현관 안으로 들어와 욕실로 향하려는 순간, 밖에서 울린 초인종 소리가 집 안까지 선명하게 들어왔다.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며 복잡해지던 서희의 얼굴에 결국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지난번에 그렇게 싸운 데다 아직 은호에게 서운한 것도 한가득인데 거의 일주일 만에 다시 얼굴을 보니 역시 그저 좋을 뿐이다.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강은호가 늘 그렇듯 그녀에게만은 그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이렇게 찾아와 줬다는 게 무서울 만큼 안도가 된다. 이제 정말 그를 놓겠다고 다짐까지 했으면서.
스스로 중증의 짝사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서희는 새삼 고개를 내저었다.
대문으로 직접 나가 문을 열자 은호는 어딘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직도 그녀에게 안 풀렸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지난 싸움 이후 처음 만나는 만큼 살짝 머쓱해서 나오는 표정.
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결국 개구쟁이 소년처럼 씩 웃으며 무언가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응? 뭐야?”
“떡볶이.”
“떡볶이?”
“회사 근처에 생긴 떡볶잇집인데 엄청 인기야. 맛있다고 요즘 유명세 타고 있어.”
서희가 아직도 떡볶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믿는 은호만의 화해 신청이었다.
여전히 떡볶이를 좋아하긴 해도 떡볶이만 보면 마음이 다 풀릴 정도는 아닌데. 어릴 적부터 어쩌다 사소한 일로 사이가 서먹해지면 은호가 눈치를 보며 귀엽게 “떡볶이 먹으러 갈까?”라고 묻는 게 좋아서 속상했던 마음이 사그라졌을 뿐인데. 은호는 떡볶이 때문에 그녀의 토라진 마음이 풀렸던 거라고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진짜 맛있대?”
그녀의 물음에 은호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이번에도 그는 그녀의 마음이 풀리는 이유를 떡볶이 덕분이라고 오해하겠지만 상관없었다.
“진짜 맛있다더라. 우리 팀에 미슐랭이라는 별명 붙은 대리 있다고 했지?”
“그 엄청 미식가 대리님?”
“응. 그 사람이 극찬했어. 원래 입 고급인 척하느라 길거리 가게는 평 되도록 짜게 주거든.”
“밀떡이야, 쌀떡이야?”
서희의 질문에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약간의 어색함마저 완전히 풀렸다.
“당연히 밀떡이지. 내가 김서희 떡볶이 심부름이 몇 년인데 그런 기본적인 취향도 모르겠어?”
“심부름시킨 적…… 없는데.”
“그래, 다 내가 좋아서 한 거지. 우리 서희는 착해서 심부름 같은 거 안 시켰어. 됐지?”
은호도 서희도 결국 서로를 보며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먹어 보고 맛있으면 다음에 가게 같이 가서 제대로 먹자.”
“응.”
“추워. 얼른 들어가자.”
초인종까지 누르며 처음 오는 손님인 척 얌전히 기다릴 땐 언제고 화해하자마자 다시 제집처럼 서희를 이끌고 뻔뻔하게 대문에 들어선다. 서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은호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포장해 온 떡볶이를 커다란 그릇에 담아 식탁 가운데에 내려놓고, 그녀는 앞 접시와 수저, 컵을 준비했다.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내던 서희는 너무 가벼운 무게의 우유팩을 살며시 흔들었다.
“우유 떨어졌어?”
서희는 떡볶이를 먹을 때 물이나 다른 음료수보다 흰 우유를 마시는 걸 좋아했다.
“응. 생각해 보니 산다는 걸 깜빡했네.”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오면서 우유도 사 왔어.”
은호가 봉투에서 우유팩을 꺼내며 말했다.
“아.”
그녀는 잠시 아득해졌던 표정을 풀고 미소를 띠었다.
“고마워, 은호야.”
유리컵에 우유를 따르던 은호는 식탁 위에 놓인 그녀의 휴대폰을 무심코 보았다. 알림이 온 건지 갑자기 화면이 켜졌기 때문이었다.
휴대폰 잠금 화면은 커다란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그 앞에 선 작은 형체의 여자가 같이 담긴 사진이었다.
부드러웠던 그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눈빛이 고요하고 싸늘하게 일렁거렸다.
“은호야, 이제 앉아서 먹자.”
우두커니 서 있는 은호를 서희가 깨웠다. 의아해하는 서희와 눈이 마주친 그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응, 얼른 먹어 봐.”
은호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서희는 붉게 물든 떡을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떡을 물어 살짝 볼록해진 그녀의 한쪽 뺨을 그가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녀는 떡을 씹던 것도 멈춘 채 놀란 눈동자로 그를 응시했다.
“아, 이런 것도 이제 안 되는 건가? 그 남자 기분 나쁠 수 있으니까?”
은호가 그녀를 만지던 손을 툭 내려놓았다.
“서희야, 우리 내일 거기 가자.”
“어?”
“맹씨 행단. 나랑 이번 가을에 같이 가기로 예전부터 약속했잖아. 요즘 바빠서 까먹고 있었어?”
눈동자가 멈칫 떨린 서희는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왜? 싫어?”
“미안. 나 내일, 약속 있어.”
“약속? 무슨 약속인데?”
“재우 선배랑 만나기로 했어.”
“아.”
은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남자 친구 때문에 이제 저와는 놀 시간도 없냐며 신경질을 부릴 거라 예상했는데 지극히 담담한 반응이었다.
“어디서 만나는데? 내가 약속 장소까지 태워다 줄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서희는 머뭇거리다가 무겁게 쌓이기 시작한 침묵 속에 목소리를 밀어 넣었다.
“재우 선배 누나분이랑, 셋이 같이 식사하기로 했어.”
재우가 며칠 전에 누나와 함께 만나 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해 왔다. 의심 많은 누나가 사귄다는 말을 그녀 입에서 직접 들어야 믿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고 한다.
서희는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재우도 그녀를 위해 은호를 만나 주었는데 신세 진 빚을 갚아야 했다.
“그 남자 누나랑…… 셋이 만난다고?”
은호의 음성이 소름 끼칠 만큼 낮았다.
그와 눈을 마주친 서희는 숨을 삼켰다. 형형하게 날이 선 눈빛은 그녀가 15년 동안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낸 강은호의 것이 아니었다.
“……누나분이 선배가 오랜만에 연애한다고 궁금해하셔서 그냥 가볍게 소개받는 자리야.”
“가볍게 소개받아?”
그가 냉소를 흘렸다.
“그 남자한테 부모나 다름없는 유일한 가족을 만나는 자리가? 너 뭐야. 설마 진짜 그 남자랑 결혼이라도 생각하는 거야? 아니지?”
서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재우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은호에게 한 적이 없었다.
“너 그걸 어떻게……. 설마 선배 뒷조사한 거야?”
“뭐 하는 놈인지, 어디 뒤가 구린 구석은 없는지 내가 알아야 하잖아. 네가 만나는 남자인데.”
은호는 문제조차 되지 않는 일이라는 듯 여상한 말투였다.
“그래, 나도 그 남자한테 어느 정도는 고맙게 생각해. 빚이 있으니까. 나 없는 동안 너 건드린 쓰레기 새끼 그 남자가 죽도록 팼던데. 네가 왜 그 남자한테 끌렸는지도 그거 알고 나니까 더 명확해졌어. 옛날처럼, 내가 너 지켜 줬던 것처럼 그 남자가 똑같이 해 줘서, 너 그래서 끌렸던 거야. 그땐 곁에 내가 없었으니까.”
서희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그가 지금 내뱉고 있는 말을 들을수록 그녀의 마음은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네가 그 남자한테 느끼는 감정도 착각일 수 있어. 도와줬던 거에 대한 고마움을 호감으로 착각한 걸 거야. 그 남자가 너한테 진짜 필요한 사람인지 다시 생각해 봐. 이젠 내가 네 곁에 계속 있으니까 그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어디까지 알아본 거야? 선배만이 아니라 내 뒷조사까지 했어? 그때 일을 네가 어떻게 아는데. 설마 너 박상재, 그 선배한테…….”
“꽤 탄탄한 중견 기업에서 대리 달았더라. 일주일 전에 해고당하긴 했지만.”
건조한 음성으로 내뱉는 은호의 말에 그녀는 숨을 멈추었다.
“왜, 왜 그랬어? 네가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내가 그때 그 사람한테…….”
“벌줬다고? NC 취직 막았던 거? 그게 뭐.”
저를 보는 서희의 눈동자가 연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는지 은호의 눈빛도 더욱 매서워졌다.
“왜 그렇게 봐? 내가 죄 없는 인간 앞길이라도 막은 것처럼? 그 새끼, 그 회사에서도 후배 직원 성추행했어. 그런데도 위에서 덮어서 그 새끼는 회사 잘만 다니고 피해 직원만 관뒀던데? 내가 그래서 말했잖아. 그런 쓰레기는 불쌍하다고 느끼지 말고 죽을 때까지 밟아 줘야 한다고. 애들이 심통훈 괴롭혀도 절대 동정할 필요 없다고 했던 말 기억해? 그런 쓰레기 새끼들은 자기가 밟히면서도 자기가 밟았던 사람들한테 절대 죄스러워하지 않으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서희에게 은호는 차가운 미소를 건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솔직히 정의 따지자고 한 일 아닌 거 맞아. 그래도 내가 선량한 사람 건드린 건 아니잖아. 내가 잘못한 게 어디 있어? 앞으로도 그 새끼 절대 안 잊고 아등바등 기어오르려고 할 때마다 짓밟아 줄 거야. 나 없는 동안 너 괴롭히고 상처 입힌 놈인데,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서희가 눈물이 차오른 눈동자로 은호를 응시했다. 그녀의 붉게 물든 눈을 보며 은호의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대체 왜 그렇게 보는데. 옛날에 너 나한테 그랬잖아. 수호천사라고. 나 너 지키려고, 너 당한 거 돌려주려고 한 것뿐인데, 왜 날 그런 눈으로 봐? 이제 와서 나 하는 짓이 이해 안 돼? 너무 지나친 거 같아? 15년 지나서야? 왜! 이제 차재우 그 새끼가 지켜 줄 거니까 난 필요 없어져서 그래?”
은호는 눈에 띄게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가 서희의 휴대폰을 으스러뜨릴 듯 쥐었다. 서희가 자신과 가기로 약속한 곳에 차재우와 함께 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분노였다.
“그 남자가 나한테서 널 뺏어 가고 있는 게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데, 대체 나더러 어디까지 참으라는 거야!”
서희는 쏟아지는 눈물을 막기 위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너 옛날에 나한테 소원 들어주기로 했지. 뭐든 꼭 들어주겠다고 분명 약속했었지? 그거 지금 쓸 테니까 그 새끼랑 헤어져. 다시는 만나지 마.”
이성이 완전히 흐려진 눈빛으로 은호가 뇌까렸다. 그녀는 넋을 놓고 고개를 휘휘 젓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토해 낸 그는 자신의 사나운 말투를 가까스로 잠재우며 평소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달래듯 말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 너한테 필요 없어, 서희야. 응? 나만, 너한테 나만 있으면 되잖아. 그 남자 때문에 우리도 계속 싸우고 문제 생기는 거 봐. 그 남자만 사라지면 다 괜찮아질 거야. 예전의 우리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서희는 울음이 찬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왜 동아리 가입한 거 숨겼냐고 전에 그랬지. 나도 생각할수록 이상하더라. 왜 너한테 숨겼을까. 네가 싫어할 테니까. 네가 싫어하는 걸 난 당당하게 못 하니까. 그런 통제를 너무 당연하게 여겨 왔어. 지금까지.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설령 연인이라고 해도 이런 건 비정상적인 관계인데.”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수록 서희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그를 응시했다.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던 진실을 스스로 밝히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네가 나한테 갖는 감정…… 그거 집착이야. 사랑도 우정도 아닌, 그냥 집착. 넌 그저…… 왕따여서 친구가 아무도 없었던 아이의 맹목적인 애정을 받는 게 좋았던 거야. 어릴 때 받은 그 애정을 커서까지 계속 독점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내 뒷조사를 하고, 내 관계마저 통제하려고 드는 거야.”
은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너 지금 무슨 말…….”
“나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어. 근데 이제……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힘조차 없어. 너무 명확하게 보여서. 내가 너한테…… 오래 질리지 않는 장난감이었을 뿐이라는 게.”
“김서희.”
그가 차갑게 식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를 노려보는 그의 눈빛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를 알아 왔으나 처음 맞닥트리는 표정이었다. 흠칫 몸이 떨릴 만큼 강하게 뻗은 눈빛이었는데도 아프게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서희는 그가 제 말에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너 어릴 때부터 가지고 싶은 건 무조건 가져야 하는 애잖아. 네가 가진 건 잠깐 남들 손 타는 것도 질색했었다며. 나도 그랬던 거지? 내가 네 소유의 장난감이니까, 남들 손 타는 게 불쾌하고 화나는 거야.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날 여자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친구로 아껴서 그렇게까지 한다는 건 누가 들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어느새 눈물조차 멎어 있었다. 계속 의심하면서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제 입으로 내뱉으며 가슴을 스스로 깊게 도려내고 있었다.
“내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던 거야. 넌 그냥 계속 너만 바라봐 주고, 좋아해 주고, 숭배해 줄 애면, 그때 괴롭힘당하던 불쌍한 애가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상관없었어.”
제발 그만하라는 듯 은호가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붉게 달아오른 눈자위. 거칠게 오르내리는 숨결. 으스러질 듯 악다문 그의 턱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무겁게 뚝뚝 흐르는 그 눈물을 믿고 싶었지만, 그저 그가 자각만 없었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계속…… 그런 생각을 해 왔어? 내가 널 장난감으로 여긴다고?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아니지? 서희야……. 그러지 마. 어?”
그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부엌을 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손목을 그가 억세게 움켜쥐었다. 약한 신음이 새어 나올 정도의 세기였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절대, 절대 아니야. 서희야. 장난감……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아니야. 제발…… 믿어 줘.”
절박하게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는 그가 연약하고 맹목적인 아이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강은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유였다.
“그럼 설명해 봐. 대체 내가 너한테 뭐야?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이대로 아무도 없이 네 곁에만 있는 걸 원해? 네가 늘 지켜 줄 수 있는 연약한 아이로 영원히 남기를 바라니?”
서희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은호를 정말로 단념하기 위해선 지금의 순간이 필요했노라고. 이미 남자로 품어 버린 강은호를 친구로 다시 돌려놓을 수 있는 방법 따윈 어디에도 없으니까.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손목을 목숨처럼 부여잡고 있는 그를 시야에서 몰아낸 채 힘겹게 내뱉었다.
“은호야, 우리 관계…… 이제 정말 끝내는 게 맞는 거 같아.”
죽을 때까지 그에게 절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말이었다.
제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초점이 나간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믿기 힘들어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스스로 말해 놓고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하는 건 불가능했다.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한 것을 증명하듯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렸다. 울음이 솟구칠 것 같아서 그녀는 그의 손길을 완전히 뿌리치고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