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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기 전에-7화

본문

쿵푸벳

06. 폭탄

서희는 연필 스케치를 따라 펜을 움직였다. 또렷한 선이 그어지며 형태가 분명해졌다.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은 식물학자가 덕유산 중턱에서 새로 발견해서 채집해 왔다는 꽃이었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게 파란 꽃잎이 보자마자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아직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신종이었다. 논문에 함께 게재될 식물 도해도를 그리는 만큼 펜 끝이 더욱 신중해졌다.

구과 식물 도감 작업도 밀려 있었다. 신종 도해도는 오늘 안에 끝내겠다고 계획해 뒀던 터라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때쯤 고개를 든 서희는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는 뻣뻣해진 어깨를 한쪽 손으로 매만졌다.

문득 아까 6시쯤에 은호에게서 왔던 연락이 떠올랐다. 언제 퇴근하냐는 물음에 오늘은 좀 늦어질 거라는 답을 끝으로 아예 무음 모드로 돌려놓고 작업에 열중했다.

가방을 챙겨 연구실을 나서며 휴대폰 화면을 열었다. 당연히 은호의 메시지가 여러 개 쌓여 있을 거란 추측은 했지만 은호가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 내용에 서희는 깜짝 놀랐다.

[전에 같이 왔던 풀과 나무라는 카페에 와 있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일 끝나면 여기로 와.]

‘풀과 나무’는 수목원 근처에 있는 카페들 중 하나였다. 은호는 지금보다 시간 여유가 있던 대학생 때 이곳에 몇 번 놀러 와서 그녀에게 가이드를 받기도 했고, 수목원 근처 카페에서 함께 차를 마신 적도 있었다.

느긋했던 서희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는 서둘러 차를 끌고 ‘풀과 나무’로 향했다. 주차 구역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가자 은호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은호야.”

“왔어? 얼른 여기 앉아.”

은호가 활짝 웃더니 맞은편 자리가 아닌 자신이 앉은 2인용 크기의 넉넉한 소파에 그녀를 앉혔다.

“오늘 힘들었지? 어깨 주물러 줄까?”

“응? 아, 아니. 괜찮…….”

그는 서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어깨 뭉쳤다.”

적당히 힘을 줘서 주무르는 손길을 받으며 서희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여긴 갑자기 왜 온 거야?”

“왜가 어디 있어. 너 보고 싶으면 오는 거지. 무슨 이유가 있어서 와야 돼?”

은호가 투정을 부리듯 투덜댔다.

“차는?”

“집에 두고 택시 타고 왔어.”

“택시 타고 여기까지?”

“오늘 내가 네 운전기사 하려고. 너 요즘 피곤하잖아.”

“아…….”

“나 착하지? 잘했지?”

그가 대뜸 서희 쪽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얼른 칭찬해 줘.”

서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은호가 눈꼬리를 휘며 소년처럼 무구한 미소를 지었다. 이 커다란 몸으로 애교스럽게 구는 모습이 징그럽긴커녕 사랑스럽기만 해서 서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목마르겠다. 카푸치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은호가 단숨에 주문대로 향했다.

서희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훤칠한 키의 그가 다가가자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얼굴을 붉히며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내일쯤 만나서 말할 생각이었는데 오늘 얼굴을 보게 됐으니 지금 털어놓는 게 나을까. 어쩐지 초조함이 가슴에 번지기 시작했다.

제대로 거짓말할 수 있을까. 은호는 그다지 둔한 편이 아닌데.

하지만 그녀가 고백하기 전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걸 봐선 연애 쪽으론 썩 날카로운 편이 아닐지도 모른다.

15년 동안 친구로 지내 온 그를 작정하고 속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잘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재우가 꽤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만들어 준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 시나리오대로만 말하면 앞뒤가 안 맞아서 말이 꼬이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마셔.”

카푸치노를 가져온 은호가 테이블에 컵을 놓고 다시 그녀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응, 고마워.”

서희가 차를 홀짝이고 내려놓는 동시에 다시 은호의 손이 다가왔다. 목 주변과 어깨를 주무르는 손길이 이번에는 조금 약하고 느리다. 아까는 순수하고 담백하게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왠지 좀…… 야릇하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다.

“으, 은호야.”

“왜? 너 어깨랑 목 진짜 많이 뭉쳤어. 등도 마사지해야 할 거 같은데. 내가 집에 가서 제대로 풀어 줄까?”

그녀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구어졌다. 재우에 대해 말하기가…… 너무 거북하다. 이렇게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은호에게 대뜸 폭탄을 던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될 테니까.

게다가 그는 어쩐지 오늘따라 더 엉기고 살랑거리는 느낌이었다. 원래도 애교는 많은 편이었지만 요즘 들어 그녀가 멀어질까 봐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어서인지 그는 도가 지나칠 만큼 달라붙었다.

이전까지는 묘하긴 하지만 딱 꼬집긴 어렵게, 친한 친구라면 그래도 할 수 있다고 납득할 만한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했던 은호였다. 옆을 위협적으로 지나가는 오토바이 때문에 살짝 손을 잡거나, 우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안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건 꽤 자주 있었지만.

그러나 요즘은 아무 때나 백 허그나 손깍지 끼기 같은 연인들이 할 법한 스킨십을 불쑥 해 놓고도, 서희가 움찔하며 꺼리는 기색을 보이면 잔뜩 상처받은 척을 해서 절대 거부도 못 하게 했다.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그녀를 위한 배려는 전혀 없어서 서희는 은근히 마음이 상할 정도였다. 그에겐 별 의미 없는 스킨십이 그녀에겐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커다란 접촉인데.

은호가 저를 가지고 어장 관리를 하는 거라고 화를 내던 재우의 말에 그런 게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는데, 생각해 보면 어장 관리보다 더 질이 나쁜지도 모르겠다. 어장 속에 집어넣고 희망 고문을 한다는 건, 그 상대를 가능성은 희박해도 사귈 만한 이성으로 인정은 한다는 거니까.

하지만 서희는 은호에게 연애를 할 수 있는 여자조차 되지 못했다. 하룻밤 잠자리 상대조차 그녀는 절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헐벗은 몸으로 그에게 다가갔을 때, 죄악감으로 물든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던 걸 기억한다. 은호는 그녀를 진짜 피 안 섞인 가족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녀를 받아 줄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면서 그녀가 친구 관계에서 멀어지려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거리를 두고 싶다고 말한다고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재우의 말대로 가짜 연인이라도 들먹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있지.”

“응? 맞다. 우리 주말에 영화 보자.”

“영화?”

“연겨울 새로 찍은 영화 이번에 개봉했어. 너 작년에 연겨울 나오는 영화 보고 팸플릿 찾아보면서 관심 가지고 그랬잖아.”

서희는 지금이 말할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은호가 바로 납득하며 그녀의 첫 연애를 열띠게 축하해 줄 리 없다는 건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 은호를 잊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재우에게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은호가 계속 곁에 있으면 절대 그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접기 위해선 일단 조금이라도 거리를 둬야 한다. 서희도 더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미안. 그날 약속 있어.”

“약속? 무슨 약속?”

거짓말을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단 한 번의 거짓말이 아니다. 앞으로 해야 할 여러 거짓말의 시작이 될 첫 거짓말.

“은호야, 나 만나는 사람 생겼어.”

“그러니까 그날 누구를 만난다는, 뭐?”

은호의 눈빛이 굳어졌다.

“……만나는 사람이라니?”

방금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속살거리던 말투가 빠르게 뒤바뀌었다. 흠칫 놀랄 만큼 딱딱하게 느껴지는 음성.

“그게 무슨 뜻인데?”

무슨 뜻이냐고 묻고 있었지만 그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게 분명했다.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 * *

라디오도 켜지 않은 차 안은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운전대를 잡은 은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차를 몰고 있었다.

평소라면 오늘 아침에 가족들이 했던 사소한 말부터 회사에서 있었던 일까지 조잘조잘 떠들어 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먼저 입을 열기는커녕 서희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조차 차단하고 압박하는 분위기였다.

‘화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무릎 위에 둔 손을 불안하게 꼼지락거렸다. 좌불안석이긴 했지만 은호의 성격을 아는 만큼 지금 그의 반응이 놀랍거나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은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모두의 이목을 끄는 왕자님이었고 주인공이었다.

반에서 무언가 결정할 일이 생기면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은호를 찾았다. 남자애들은 비굴할 정도로 은호에게 설설 기면서도 무척 동경했고, 여자애들은 부모님을 졸라 은호에게 주기 위한 선물을 사고 정성스럽게 편지를 썼다. 초등학교 학예 발표회 때도 반 애들의 만장일치로 은호는 연극의 남주인공을 맡아야 했다.

왕자님 역할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정말로 동화 속 주인공처럼 빛나는 아이.

떠받들어지는 게 당연한 삶이었던 만큼 은호는 자의식이 꽤 강했고, 또 묘한 독점욕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친구 관계에서도 은근하게 드러나곤 했다.

6학년 무렵, 은호와 함께 학교 뒤 숲을 걷던 때였다.

‘은호야, 너 머리에…….’

걸음을 멈춘 서희가 손가락으로 은호의 머리 쪽을 가리키며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뭐야. 벌레 붙었어?’

은호는 께름칙한 눈으로 물었다.

‘응. 벌레 무서워?’

서희의 천진한 물음에 은호는 퍽 자존심이 상했는지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딴 걸 왜 무서워하겠어?’

‘그렇구나.’

그러나 서희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은호의 머리 위만 빤히 응시하고 있자 은호의 얼굴이 살짝 우그러졌다.

‘너 식물이나 벌레, 이런 거 좋아하니까 내 머리에 붙은 벌레 특별히 너 줄게. 가져가.’

‘어? 정말? 고마워.’

‘그러니까 얼른 좀 떼 봐. 난 더러워서 만지기 싫어.’

서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은호의 머리에서 작은 생명체를 떼어 냈다. 서희의 손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작은 무당벌레를 본 순간 은호는 허탈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무당벌레였어? 난 또…….’

‘너무 귀여워.’

서희는 은호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제 손바닥에 있는 무당벌레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은호의 눈초리가 사납게 씰룩거렸다.

‘서희야.’

‘응?’

‘네가 벌레 떼느라 내 머리 좀 흐트러졌지?’

‘어? 아, 조금.’

‘얼른 제대로 돌려놔. 나 흐트러진 꼴로 밖에 돌아다니는 거 싫어해.’

‘아, 응.’

서희는 무당벌레가 노니는 왼쪽 손바닥을 그대로 펼쳐 둔 채 다른 손으로 은호의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정리했다.

그 순간 은호는 서희의 손바닥에 놓인 무당벌레를 손가락 끝으로 얄밉게 툭 튕겨 냈다.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무당벌레를 보곤 아쉬움에 서희의 눈이 축 처졌다.

‘어? 날아갔다. 쟨 우리랑 놀기 싫은가 보네. 가자, 김서희.’

은호는 심상하게 내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서희는 은호의 등을 살짝 원망스럽게 보았지만 무당벌레보단 은호가 훨씬 좋았기에 불만을 삼켰다.

그렇게 작은 미물에조차 그녀의 시선이 가는 것을 못 견디는 은호의 성향이 가끔 의아하긴 했어도 별 의미를 두진 않았다. 주인공처럼 늘 주변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해 온 아이이니, 제일 친한 친구인 그녀를 독점하려는 마음 역시 좀 유별나지만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무당벌레한테 관심을 뺏기는 것도 심술이 치솟는 강은호인데,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처음에 얼마나 경계심이 짙어질지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래서 재우와 연애하는 척을 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어떻게 은호에게 그 말을 전해야 할지 밤새 끙끙 걱정했다.

“은호야.”

“…….”

“평창동으로 가자. 너 집 앞에서 내리고, 거기부터는 내가 운전해서 갈게.”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또다시 깊어진 침묵 속에서 어느새 그녀의 집 앞에 다다랐다.

서희는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은호는 차를 세운 상태로 정면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말을 걸 용기조차 사라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였다.

“김서희.”

한참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응?”

“거짓말하지 마.”

넘실거리는 격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는 듯 낮게 깔린 음성이었다.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어.”

“당연히 거짓말이지.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언제 남자를 만났는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너!”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린 은호가 거칠게 흐트러진 숨을 깊게 내뱉었다. 말로는 거짓말이라며 단정 짓고 있었지만 분위기를 보니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게 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잔뜩 날이 선 반응이 나올 리 없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 대학 선배야.”

그가 그녀의 말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자 손끝이 차가워질 만큼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차츰 안정되었다. 서희는 침착하게 재우가 머릿속에 넣어 준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2학년 때 사진 동아리 들었는데 그때 사진 가르쳐 준…….”

“동아리? 그게 무슨 말이야? 너 동아리 활동 했었어? 2학년이면 나 군대에 있을 때?”

그녀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은호의 눈동자 속에 깊은 충격이 떠올랐다. 그가 그녀를 원망하듯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너…… 나한테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너 제대하기 전에 활동 관두기도 했고, 네가 나 동아리 가입한 거 알면 별로 안 좋아할 거 같아서 그냥…….”

“내가 안 좋아할 걸 알면서도 가입한 거야? 게다가 심지어 지금까지 말도 안 하고?”

그가 싸늘한 목소리를 뚝뚝 끊어 가며 물었다. 외도한 아내를 추궁하는 것도 이보단 덜할 것 같았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분노로 파랗게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서운할 순 있어도, 저렇게 격렬한 배신감에 휩싸인 분노를 내보일 줄은 몰랐다.

그의 말투는 그녀가 지금껏 엄청 중요하고 커다란 일을 숨겨 왔다는 뉘앙스였다.

물론 되도록 서로에게 뭐든 숨기지 않고 말하는 게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완벽하게 지켜지는 것도 아니었다.

은호는 채아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 눈에 띄게 싫어했고, 서희는 오랫동안 그에게 품은 마음을 감춰 왔다. 동아리 활동을 숨긴 건 사소한 축에 속하는 비밀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훨씬 더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유는 아마도 서희가 그곳에서 남자 친구가 된 인물을 만났음을 알게 되어서일 것이다.

“대체 왜 나를 속였어?”

“미안해.”

“그럼 지금까지 계속 나 모르게 그 남자하고 연락하고 만났던 거야?”

“그건, 아니야.”

서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연락 끊겼었는데 최근에 우연히 다시 만났어. 수목원에 조카랑 왔더라고. 그때 번호 주고받아서 연락하고 종종 만나다가 선배가 고백해서 사귀기로 한 거야.”

재우가 짜 준 시나리오에는 어느 정도 진실도 섞여 있어서 거의 해 본 적 없는 거짓말을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서희의 차분한 설명에 은호는 다시 입을 굳건히 다물었다. 운전대를 딱딱 두드리는 손길이 자못 사나웠다.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그가 이내 낮게 뇌까렸다.

“……말도 안 돼.”

그는 외면하고 있던 그녀와 다시 눈을 맞췄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될 만큼 매서웠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래, 그렇게 우연히 다시 만나서 자연스럽게 연인이 될 법하네, 생각할 수 있어. 근데 넌 아니야. 네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가 번호 딴다고 주고, 연락한다고 받아 주고, 만나자고 하니까 만나고……. 거기다 고백까지 받아 줬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거짓말이야, 다.”

차갑게 식은 목소리는 20대 후반에 들어선 남자답게 충분히 어른스러웠지만, 그녀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퍼부어 대는 말들은 아이처럼 집요하고 고집스럽기 그지없었다.

만일 그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 때문일 거라고 미리 예상했었다. 그녀가 평범하게 사랑에 빠질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낯을 가리고 타인과의 관계에 소극적인 것.

그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 대비해 놓은 말도 있었다. 서희는 재우가 준비해 준 마지막 폭탄을 조심스레 던졌다.

“그 선배, 내 첫사랑이야.”

“……뭐?”

비틀려 있던 은호의 눈동자가 일순 풀어졌다. 잠시 분노가 사그라질 만큼 크게 놀란 것 같았다. 그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너 지금 무슨…….”

“대학 때 그 선배 좋아했었어. 흐지부지 끝나 버렸지만. 근데 다시 선배랑 만나니까 알겠더라. 너한테 느꼈던 감정이 전부 착각이란 것도 깨달았어. 너랑 너무 가깝게 지내서 내가 잠깐 우정이랑 사랑을 혼동했는데, 첫사랑이었던 선배를 다시 만나면서 그 감정들이 어떻게 다른지 확실히 알게 됐어.”

비참한 기분이 다시 왈칵 차올랐다. 다른 거짓말들은 들킬까 조마조마했다면 지금 하는 거짓말은 가슴을 잔인하게 파헤쳤다.

그날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너에게 고백했는데. 네가 잔인하게 내 마음을 외면하는 순간에도 내 사랑은 절대 모르는 척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데.

진심으로 가득 차서 결국 와르르 쏟아지고 만 간절한 고백이었다. 오랫동안 담아 두었던 소중한 감정을 가까스로 말했던 것인데, 그 마음이 전부 다 착각이었다고 스스로 조각내고 있었다.

술에 취해 전화했던 은호는 그날 서희와 나눴던 대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희는 그가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거짓말이었다.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은호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몰랐는데 선배도 날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좋아했었대. 선배한테 고백받고, 나 정말 기뻤어.”

그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핸들을 꽉 움켜쥔 손등에 터질 듯한 힘줄이 불거졌다.

“나 이번이 첫 연애인 거, 너도 알지?”

서희는 차마 은호의 눈을 마주칠 용기가 들지 않아 제 손가락 끝만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부탁이야. 내 연애 응원해 줘.”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숨이 제대로 안 쉬어지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차 문을 박차고 나갔다.

* * *

충남 아산시 배방읍 맹씨 행단(杏壇).

주차한 차에서 내려 서희와 함께 고택으로 향하며 재우는 어쩐지 계속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서희와 첫 데이트를 하게 된 게 물론 기쁘기도 했지만, 젊은이들의 첫 데이트 장소치고 너무 고즈넉하고 고결한 장소가 아닌가 싶어 입꼬리가 자꾸 씰룩거렸다. 장소 선정마저 김서희답다고 해야 하나.

며칠 전에 서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재회 후 함께 첫 식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를 빚이 있는 고마운 선배 정도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펑펑 우는 모습을 들키고 고민을 술술 털어놓은 뒤부터는 그가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 긴 시간 동안 지독한 짝사랑을 이어 오면서 누구에게도 고민 상담을 해 본 적 없었던 탓에 자신의 조언이 한 줄기의 빛처럼 귀하게 여겨질 뿐이겠지만.

드디어 친구에게 재우와 사귄다고 선언했는데 그 친구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며 그녀는 전화로 조금 울먹거렸다. 처음 있는 일이라며 이러다가 사이가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되면 어쩌나 불안해하는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역시 거짓말은…… 안 하는 게 나았을까요?’

‘연애한다는 거짓말을? 안 하면 계속 그대로 제자리걸음일 텐데? 그래도 괜찮아?’

‘그건…….’

‘근데 그 친구 반응이 좀 너무 오버스러운 거 아니야?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애인 생겼다는 말에 그런 반응은…….’

재우는 의심스럽다는 듯 말해 놓고 아차 싶었다.

만약 그 친구가 자각을 못 했을 뿐 서희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거라면 재우에게는 무척 불리했다. 그 친구의 마음이 아리송하지 않냐고, 이렇게 친절하게 알려 줄 필요는 전혀 없는데.

자신의 바보 같은 헛발질에 속으로 짜증을 내는데 서희의 목소리는 제법 단호했다.

‘절 좋아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래?’

‘네. 은호는 저 여자로 안 봐요. 확실해요. 지금까지도 주변에서 착각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고, 저도 한때는 은호가 절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그냥 친구로서 아끼는 마음이 워낙 크고, 또…….’

서희는 그 뒤에 하려던 말을 끝내 잇지 못했다. 재우는 그녀가 확신하는 두 번째 이유를 듣고 싶었지만 입을 완전히 다문 그녀를 채근할 순 없었다.

‘참, 그 친구한테 데이트한다고 말했다는 거지? 주말에.’

‘네.’

‘어디 가고 싶어?’

‘네? 정말로 데이트하는 거예요?’

‘해야지. 들어 보니까 그 친구 꽤 의심 많아서 이번 기회에 증거 제대로 보여 줘야 할 거 같은데. 그리고 우리 누나한테도 보여 줄 데이트 사진이 필요하니까.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어디 가고 싶어? 어디든 다 좋으니까.’

‘……아산 쪽에 가고 싶은 곳이 있긴 한데.’

‘아산?’

‘보고 싶었던 은행나무가 거기 있거든요.’

‘혹시 곡교천? 거기 맞지? 은행나무 길. 거기 유명하잖아.’

‘아, 거기도 좋긴 한데……. 제가 가고 싶은 곳은 맹사성 고택이에요.’

재우는 잠시 당황했다.

‘……맹사성? 고, 고택?’

‘거기에 보호수로 지정된 6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거든요. 아직 사진으로만 봤는데도 너무 멋져서, 꼭 실물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관심이 있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미세하게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는 서희였다. 그녀가 들떠 있음을 얼굴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심스럽고 배려심 많은 성격답게 서희는 곧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근데 거긴 데이트 장소로 재미없으실 거예요. 역시 그냥 다른 곳…….’

‘아니야. 거기 가자. 꼭 가자. 나랑.’

그렇게 서희와 단둘이 오게 된 곳이었다. 그녀는 재우의 누나와 제 오랜 친구에게 교제 증거 제출용으로 보여 줄 데이트 사진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는 여러모로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첫 데이트네.’

두 사람은 오래된 돌계단을 올라 대문채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쌍행수(雙杏樹)를 맞닥트린 순간, 재우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차에서 조곤조곤 설명하기로 하나는 40미터, 다른 하나는 45미터 정도 되는 높이라던데 과연 절로 기품이 느껴지는 거목이었다.

청백리의 표상 맹사성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였다. 잎이 전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두 그루는 가지들을 우아하게 늘어뜨린 채 시야를 온화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샛노란 숲의 입구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포토그래퍼로서의 직업병 때문인지 느낌 있는 풍경을 보면 사진을 찍듯이 눈에 새기는 버릇이 있는데, 바로 눈앞에서 보면서도 저 두 나무는 사진보다는 한 폭의 수채화처럼 느껴졌다.

먼발치에서 감탄하며 지켜보고 있던 재우와 달리 서희는 은행나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푹 빠져서 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녀의 뒷모습. 그의 눈빛이 더없이 부드러워졌다.

서희가 처음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주변에서 말들이 꽤 자자했다. 그녀는 화려한 생김새의 미인이었지만 그만큼 도도하고 차가운 느낌이 강했다. 그런 분위기를 더욱 견고히 하듯 말수까지 적으니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같은 학번이지만 상종하기도 싫은 질 나쁜 녀석들에게 지나친 관심을 받는 모습을 목격하고 몇 번 도와주긴 했지만 재우는 사실 서희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서희뿐만 아니라 은근하게 유혹하듯 다가오는 후배들과도 적당히 선을 그었다. 밖에서도 저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차고 넘치게 많은데 굳이 동아리 안에서까지 복잡한 관계를 만들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후배들 중 서희가 유독 신경이 쓰이긴 했다. 이성적인 관심이라기보다는 그녀의 특이한 성격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날카롭고 예민한 분위기와 달리 온순한 성격 같았는데, 시비를 거는 복학생들에게 주는 눈길은 서늘하고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서희는 그들이 아무리 짓궂게 놀리고 괴롭혀도 풀이 죽거나 곤란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평소에도 무표정일 때가 대부분인 그녀였지만 뭔가가 좀 더 다른 얼굴이었다.

재우는 그녀가 그들에게 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 아무리 괴롭히고 건드려도 꺾이지 않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서희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식물을 유별나게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출사를 나갔을 때, 꼭 나무나 꽃 앞에서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곤 했다. 지루하지도 않은가 싶을 만큼 오랫동안. 나무를 한참 보는 그 차분한 뒷모습이 조금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기도의 한 숲으로 출사를 나갔던 날, 늘 서희의 뒷모습만 봤던 재우는 처음으로 나무를 보는 그녀의 얼굴을 목격했다.

그저 멍하니 응시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서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동아리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지어 주지 않았던 미소였다.

그날 재우는 조금 신경이 쓰이고 호기심이 일었던 후배에게 말 그대로 반해 버렸다.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 서희의 미소가 예쁘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제게도 웃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열망하게 되었으니까.

그 후부터 재우의 시선은 항상 서희에게 향했다. 무표정한 그녀에 대해 장난처럼 짓궂게 오가던 말들이 귀에 거슬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서희 표정 봐. 무서워. 나 싫어하나 봐.’

‘소문으론 서희 과에서는 말 엄청 많이 한다던데? 여기서만 조용한 거래.’

‘우리 같은 애들이랑은 수준 떨어져서 말하기 싫은가.’

농담 같으면서도 뼈가 느껴지는 말을 들으며 서희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그저 가만히 있는데도 저렇게 오해받으면서 얼마나 견디기 힘들까. 묵묵히 들어 주고 보듬어 주는 나무를 사랑하는 저 애가, 저렇게 표정 하나하나에 오해하고 곡해하며 비꼬고 조롱하는 녀석들 사이에서.

서희를 볼수록, 서희를 알아 갈수록 그녀가 안쓰럽고 애틋하고…… 더없이 사랑스러워졌다.

재우는 서희가 경계하지 않게 서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카메라를 어설프게 만지고 있을 때 슬쩍 도와주고, 지나가듯 가볍게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적당히 유쾌한 농담을 던져 보기도 했다.

호의가 느껴지되 절대 부담이 가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접근에 서희는 감질날 만큼 아주 천천히 그에게 마음을 열어 갔다.

사실, 마음을 열었다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선배님이 선배가 되고, 우연히 만나면 밥을 사 주기로 약속까지 했건만 바로 그 후에 인연이 끊어졌으니까. 마음이 열리기 직전에 모든 게 깨져 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서희와 있다는 사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이 딱 절정인 시기에 왔다고 생각하며 감탄하는 그와 달리 서희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겨울에 다시 또 와야겠다고.

“이게 600년 된 나무란 말이지. 이 정도 수명은 흔치 않은 거야?”

“음, 은행나무는 노거수가 많긴 해요. 용문사에 있는 은행나무는 추정 수령이 천백 년이나 되고요.”

“천 살이 넘는다고? 진짜 오래 살았네.”

그가 놀라서 입을 벌렸다.

“그 나무는 나라에 큰일이나 재앙이 있을 때 가지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조선 세종 때 벼슬도 받은 명목이에요.”

조용히 설명하는 서희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재우는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은행나무 자체가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불리기도 해요. 공룡들이 살던 쥐라기 이전부터 있었으니까요.”

가만히 듣던 그가 불쑥 물었다.

“넌 나무를 진짜 좋아하는 거 같아.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네.”

나무는 늘 서희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지난한 세월을 견디며 고고하고 단단하게 버티고 있는 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느끼던 우울함도 슬픔도 전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다고, 나무가 말없이 도닥여 주는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물어도 돼?”

서희는 나지막하게 답했다.

“어릴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였어요.”

“친구?”

재우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서렸다.

“제가…….”

서희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했었거든요.”

그가 놀란 듯 보자 그녀는 엷게 웃었다.

“학교에 가면 아무도 저랑 말을 안 해 줬어요. 아침에 등교하면 교실 구석에 있는 제 자리에 앉아서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마음 졸이면서 버티는 게 일상이었어요. 가장 심하게 괴롭히던 그 아이가 오늘은 제발 나한테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완전히 투명인간이 되어서 아무도 날 볼 수 없었으면 좋겠다. 부질없이 빌면서요.”

당사자는 무심하다 싶을 만큼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재우의 안색은 한없이 어두웠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겨웠을지 느껴졌다.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할아버지도 일하러 가셔서 또 혼자였거든요. 그때부터 나무에 관심을 가졌어요.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있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들어 주니까요. 도피처, 였던 것 같기도 해요.”

문득 서희의 눈빛에 그리운 감정이 스몄다.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은호가 같은 반에 전학을 왔어요. 반짝반짝 빛나던 그 애가 저랑 친구 해 주겠다고 웃었을 때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요.”

“정말 기뻤겠네.”

“네. 근데 다시 친구가 생기면 늘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어요. 전 은호밖에 친구가 없는데, 은호는 인기가 정말 많았거든요. 나 말고도, 내가 아니어도 대체할 수 있는 아이들이 옆에 얼마든지 있었어요.”

서희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은 은호랑 꽤 크게 다퉜는데, 왜 싸웠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요. 싸운 다음 날 학교에 왔더니, 은호가 다른 애들한테 둘러싸여서 웃고 있는 거예요. 내가 없어도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요. 난 이제 저 애가 전부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저 아이는 아니구나 깨닫게 되니까…….”

“서운했어?”

“아뇨.”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두려웠어요.”

“…….”

“저 애가 어느 날 갑자기 싫증이 나서 날 완전히 놓아 버리면, 그때 난 어떻게 할까. 많이 무서웠던 것 같아요.”

착하고 약해서 언제까지고 곁에서 지켜 줘야 하는 친구로 계속 남는다면 은호는 저를 떠나지 않을까. 온전한 친구의 마음일 때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또 고민이 생기면 나무 곁으로 가는 거예요. 은호한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을 나무한테는 다 할 수 있으니까, 제일 친한 친구는 역시 나무 같아요.”

말을 마친 서희는 재우와 눈을 맞추더니 무안해진 얼굴로 웃었다.

“역시 좀 이상하고 특이하죠?”

“아니. 이상하고 특이한 게 아니라…….”

재우는 부드럽게 그녀를 응시했다.

“넌 특별한 거야.”

그 순간 서희의 눈빛이 멍해졌다.

아무런 말도 없는 그녀를 보고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을 되새긴 재우는 잠시 당황한 듯 헛기침을 했다. 본능처럼 튀어나온 애정과 찬미가 담긴 말 속에서 그녀가 자신의 진심을 엿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그는 급히 말을 돌렸다.

“참, 이거 찍었어.”

그의 휴대폰 화면에는 거대한 은행나무와 그 앞에 선 그녀의 작은 뒷모습이 찍혀 있었다.

“휴대폰으로도 되게 잘 찍으시네요. 역시.”

서희가 미소를 띠었다. 자신이 살며시 끼어 있긴 해도 사진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나무였다. 그녀의 취향을 딱 맞춘 사진 구도였다.

“사진 보내 줄까?”

“네.”

서희는 재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닌 재우와 이곳에 함께 와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조금 얼떨떨했다.

그러나 걱정한 것처럼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의 기분을 편안하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 뛰어났다.

맹사성과 황희, 권진, 세 정승이 아홉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하는 구괴정(九槐亭)까지 천천히 돌아보고 고택을 나왔다.

은행나무뿐만 아니라 맹씨 행단 입구에 딱 버티고 선 커다란 회화나무부터 수묵화에 나올 듯한 유려한 자태의 소나무들, 쇠잔하게 등이 굽은 느티나무까지 하나하나 눈에 새긴 서희는 재우의 차에 올라타면서도 또 오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거 봐.”

운전석에 자리한 그가 다시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번엔 사진이 아니라 메신저 창이었다.

“방금 네 뒷모습 사진 누나한테 전송했거든.”

재우가 보낸 사진 밑으로 흥분한 듯한 내용의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너 뭐야? 뻥 아니고 진짜였어?]

[진짜 여자 생겼다고? 선 안 보려고 사기 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내 동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꼴 안 봐도 되는 거야?]

메시지를 읽은 서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재우 누나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나무 보는 여자 뒷모습이면…… 설마 너 술 취해서 그렇게 찾아 대던 그 첫사랑 결국 다시 만난 거야?]

서희는 의아한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녀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재우는 조수석 쪽에 뻗었던 팔을 다시 접어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아, 미친…….”

그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선배?”

“그게……, 우리 누나가 헛소리를 잘해서. 참,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얼른 출발할게.”

고개를 갸웃거린 서희는 어쩐지 어수선한 분위기의 재우를 따라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 * *

강남의 한 클럽.

음악 소리로 떠들썩한 밖과 달리 은호가 있는 룸 안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넓은 테이블 위에는 고가의 양주병들이 즐비해 있었다.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독한 술만 목구멍에 부어 대는 은호를 보며 그 맞은편에 앉은 현호는 혀를 끌끌 찼다.

은호는 노란빛이 도는 액체가 든 술잔을 비울 때마다 잠잠하기만 한 휴대폰을 확인했다. 계속 기다리고 있는 연락이 전혀 오지 않는 쓸모없는 휴대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몇 차례나 억누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김서희는 나한테 먼저 연락도 잘 안 해.”

은호가 낮게 중얼거린 말에 현호는 기가 차서 웃었다.

“이 미친놈아, 네가 먼저 연락할 틈을 주긴 줬냐? 서희가 한 번 답장하기도 전에 메시지를 열 통 넘게 때려 넣는 놈한테 대체 무슨 재주로 먼저 연락해?”

은호는 현호를 투명인간 취급 한 채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 공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계속했다.

“지금도 봐. 내가 그렇게 화나서 갔는데도…… 어떻게 지금까지 문자 한 통을 안 해?”

보고 싶어 죽겠는데, 또 만나는 사람이라느니 첫사랑이라느니,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서희가 사귀게 된 남자가 서희 첫사랑이라는 거지?”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처럼 심각한 표정의 은호가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됐는지, 현호가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들어 주겠다는 듯 늘어뜨렸던 등을 세웠다.

“서희는 식물에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랑 똑같았구나. 왠지 좀 신기하네. 강은호 뒤만 졸졸 따르던 그 조용한 꼬마가 다 커서 사랑도 하고.”

술잔을 쥔 은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랑은 무슨.

“넌 서희가 그렇게 소중하다면서 처음으로 각 잡고 연애 좀 하겠다고 뛰어든 애한테 축하는 못 해 줄망정 이게 무슨 심술이냐? 하긴, 걔가 왜 너한테 바로 말 못 했겠어? 네가 이렇게 지랄 떨 거 눈에 훤했겠지. 네 단짝인데 네 성격을 모르겠냐.”

은호는 그제야 현호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형이 여기에 왜 있어? 난 큰형 불렀는데.”

“바빠 죽겠는 사람이 여기에 어떻게 오겠냐? 일 있어서 못 간다고 나한테 너 떠넘기더라.”

현호는 기가 막힌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강인우를 대리 기사로 쓰려는 간 큰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더 웃긴 건 차갑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인우가 어릴 적부터 은호에겐 알게 모르게 약하다는 점이었다.

딱히 표현을 하는 건 아니어도 은호를 제법 귀여워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오늘만 해도 자신이 바빠서 은호의 술 상대를 해 줄 수 없으니 현호에게 가 보라고 직접 전화까지 넣었다.

만약 현호가 우울하거나 고민이 있으니 술 좀 같이 마셔 달라 했으면 누굴 따로 불러 주기는커녕 매정하게 무시했을 양반이다.

현호는 어릴 적부터 인우의 미세한 막내 편애에 종종 서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그동안 애꿎은 은호를 괜히 짓궂게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다.

뭐, 인우와는 성격이 워낙 달라서 애초에 남달리 친한 형제도 아니고, 한 살 터울 형에게 징그럽게 귀여움을 받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은근히 막내를 챙기는 인우가 확실히 신기하긴 했다.

가만 보면 강은호는 진중하고 과묵한 성격을 가진 이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뭔가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 성한도 티는 많이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어린 은호의 요망한 여우 짓에 껌뻑 죽는 게 눈에 보였고, 서희도 애답지 않게 차분하고 조용한 성미였는데 은호를 볼 때마다 눈이 반짝거렸다. 은호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듯이.

아무리 봐도 현호의 눈에는 잘난 척 심하고 속이 시꺼먼 잔망스러운 꼬맹이일 뿐이었는데.

성격이 너무 달라서 끌리는 건가. 대체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말수 적은 이들의 강은호 사랑은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한 것 같았다.

물론 가장 여전한 건, 아니, 여전하다 못해 더 심해진 건 단짝 소꿉친구 김서희를 향한 강은호의 집착이겠지만.

“너 계속 그러다가 서희가 절교 선언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뭐?”

“그렇잖아. 어릴 때야 적당히 참아 줬어도 이젠 서희도 한계에 다다랐을걸? 솔직히 너 친구랍시고 사생활 침해 엄청 하잖아. 아무 때나 집에 찾아가고, 틈만 나면 연락해서 오늘 무슨무슨 일 있었는지 하나하나 다 캐묻고. 너 서희가 지금 뭐 하는지 분 단위로 꿰고 있어야 마음 놓이는 놈이잖아.”

“그게 뭐. 궁금하니까 그러지.”

“궁금하다고 네가 다 알 권리가 있어? 고작 친구 주제에. 내가 너 스토커라고 부르는 게 그냥 농담으로만 하는 건 아니라니까? 이번 일로 싸우기 전에도 서희 요즘 네 메시지 엄청 늦게 읽는 눈치던데. 전화도 잘 안 받고. 그것만 봐도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참았을지 느껴지더라. 내가 진지하게 충고하는데, 너 서희 연애하는 거 싫다고 괜히 훼방 놓으려고 하는 순간 진짜 15년 우정 쫑날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해.”

“우리 우정이 쫑이 나? 말 같은 소리를 해.”

은호는 우스운 말을 들었다는 듯 여유롭게 피식거렸다.

“이게 웃네? 넌 사랑 안 해 봐서 첫사랑이 얼마나 위력이 강한 단어인지 모르지? 서희 지금 15년 우정이고 나발이고, 눈에 봬는 거 없을걸? 가슴앓이했던 첫사랑 선배도 자기 좋다고 고백해서 사귀게 됐는데. 이제 엄청 불타오르겠지.”

“사랑? 그깟 호르몬 작용이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호는 턱을 단단하게 굳혔다.

“길어 봤자 3년이면 다 식어 빠지는 하잘것없는 감정이 사랑이야.”

“그럼 우정은 뭐 3년이나 불타오를 힘이 있디?”

잔에 술을 따르던 은호가 양주병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으며 현호를 응시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힘이 빠져 있던 눈빛이 오만하게 빛났다.

“나랑 서희는 영혼으로 이어진 사이야. 다른 인간들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 틈이 있을 것 같아?”

현호는 순간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지르며 그가 진저리를 쳤다.

“아, 제발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개소리 좀 하지 마. 제대로 미친놈 같으니까. 너 진짜 왜 그러냐? 피붙이인데도 가끔 소름 끼친다고.”

은호는 딱딱한 테이블을 긴 손가락 끝으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어떻게 떼어 내야 하지…….

술에 취한 탓에 자꾸 머릿속 생각을 혼잣말로 내뱉게 되는 건지, 현호가 “이번엔 어떻게 떼어 내냐니? 그럼 저번도 있다는 소리잖아. 맞아?”라고 경악해서 묻고 있었지만 단칼에 무시한 채 홀로 상념에 잠겼다.

쉽지 않을 거란 판단은 은호 역시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희 몸에 붙은 벌레를 떼어 내지 않고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선배, 내 첫사랑이야.’

서희의 맑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자마자 은호의 눈빛이 사납게 이지러졌다.

첫사랑. 첫사랑이라고.

대체 언제 그딴 걸 한 거야.

이러니 서희의 곁에 없을 때 그가 그토록 불안감을 느꼈던 것이다. 서희를 탐내는 인간들은 그녀 주변에 득실득실할 테고, 그중 누군가에게 그녀가 마음을 열 가능성이 있으니까.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게 된 고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은근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불안감이 계속 이어져 왔었는데 결국 이런 일이 벌어졌다. 불안감을 안고 있으면서도 변함없는 서희를 보며 안심하곤 했는데, 그녀가 자신을 속여 가며 다른 사람을 만났을 줄이야.

‘대학 때 사진 동아리에 가입했었다니.’

낯을 많이 가리는 서희가 동아리에 가입한 건 군대에 간 그의 부재로 인해 마음이 허전해져서였을 것이다.

군대에 있는 동안 매일같이 탈영해서 서희를 만나러 가는 꿈을 꿨던 이유가 있었다. 그 시기에 그녀가 다른 놈과 가까워지고 있었던 거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향해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서희의 모습이 아른거리자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은호는 머리를 차갑게 식히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우수한 뇌를 쓸데없는 일에 가동시키고 있는 동생을 한심하게 지켜보며 현호는 포크로 과일을 찍었다.

“아.”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술기운으로 흐리터분했던 은호의 눈동자가 순간 확 맑아졌다.

“누구한테 전화하냐?”

연락처를 찾은 은호는 현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찬성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강은호, 네가 웬일이냐?

심드렁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네가 저번에 그랬지. 서희와 나는 서로의 지뢰라고. 서로의 존재 때문에 연애를 못 하는 거라고.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귀어도 상대방이 서희의 존재를 못 견딜 거라고. 서희가 연애할 때도 마찬가지고. 맞아?”

― 한 귀로 흘리는 거 같더니 그래도 제대로 들어 주긴 했구나? 그래. 왜, 이제 좀 서희랑 거리 두고 연애 시작할 마음이 생기기라도 했냐?

“정확히 어떤 점이 문제인지 말해 봐. 우리 관계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뭐가 그렇게 이상하고 비상식적인지. 감기 걸려서 밤새워 병간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하는 거 말고 또 뭐가 있어? 대체 뭐 때문에 고민 사이트에 글 올리는 순간 당장 헤어지라는 댓글이 천 개를 돌파할 수 있는데?”

찬성은 음, 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 지금 생각나는 건, 일단 너희 단둘이 여행 가끔 가잖아.

“그게 뭐. 친구끼리 여행 가는 게 이상해?”

― 아무리 친구여도 이렇게 다 컸는데 그건 좀 그렇지. 국내에 당일로 잠깐 가는 것까진 몰라도 멀리 해외로 가고 그러는 건…….

“서희가 외국에 있는 식물원 가고 싶어 해서 내가 따라간 건데? 혼자 가면 위험하잖아. 그게 이상하다고?”

― 뭐, 다 양보해서 너무 친하면 같이 멀리 여행 다닐 수 있다 쳐도 너희 같은 방 쓴다며.

“스위트룸 빌리는 거라 정확히 하면 방은 각자 따로 썼어. 그게 이상해? 왜?”

말끝마다 이상하냐고 묻는 은호의 음성은 어쩐지 밝았지만 찬성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 이상하지! 아무리 방 따로 쓰고 너희는 떳떳하다고 해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 꽤 많을걸? 지금은 둘 다 솔로니까 그러려니 해도, 한쪽이 애인 생겼는데 이성인 친구랑 같이 외국 여행 나가서 같은 객실에 묵는다? 욕 배불리 먹을 거다.

“그래? 나랑 서희는 늘 함께 있는 게 너무 당연해서 그런 거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했는데. 우리 서희도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할걸?”

서희가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알면 좀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라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던 기억이 머리를 스쳤으나 은호는 시치미를 뚝 뗐다.

“또 뭐 있는데?”

― 너 서희네 집 열쇠 가지고 있어서 거기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것도 좀…….

은호는 늘 건성으로 듣던 찬성의 말에 오늘만은 집중해서 귀를 기울였다. 그런 은호를 보면서 현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서희도 참 불쌍하다, 어쩌다 저런 미친놈한테 걸려서,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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