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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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침입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서희는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재우가 뱉은 이름 석 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분이 선배 누나셨어요?”
“혹시 친한 사이야?”
“아뇨. 잘 알지는 못하고, 표본관에서 가끔 마주치면 인사하는 정도요.”
재우는 고개를 주억이다가 반듯한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요즘 누나한테 얼마나 시달리는지.”
“왜요?”
“얼른 장가가라고. 완전 노총각 취급 하면서 잔소리한다니까. 말이 돼? 아직 서른인데. 누나 논리는, 나 같은 놈은 지금 느긋하게 굴었다간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을 타입이라 옆에서 어떻게든 닦달하고 밀어붙여야 한다더라.”
적잖이 시달려 왔는지 재우가 지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요 몇 년 동안 연애를 길게 안 했거든. 그래서인지 많이 불안한가 봐. 이젠 마음대로 선까지 잡아 놓을 모양이더라고.”
“결혼 생각이 아직 없으시면, 누나랑 제대로 대화 나누시면서 맞선 자리도 거절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음, 그게…… 우리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나한테는 누나가 어릴 때부터 부모나 마찬가지였거든. 그래서 그런지 좀, 끝까지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는 게 어려워. 결국은 져 주게 된다고 할까. 내 고집대로 하느니 누나 말 들어주는 게 더 마음 편하기도 하고. 이번 맞선 건은 그냥 져 주고 말 사안은 아니지만.”
서희는 살짝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재우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방금 의외라고 생각했지?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난 남의 눈치도 거의 안 보고 거절도 칼같이 잘하는 편인데, 누나한테만 그래. 그런데 사람마다 한 명쯤 있지 않아? 유독 엄청 약해지게 되는 사람.”
자연스럽게 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희가 약해지고 마는 사람은 역시 은호밖에 없었다.
“제가 놀란 건 그것도 있지만 선배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해서……. 전혀 몰랐거든요.”
“아, 그거? 직접 말하지 않는 이상 잘 모르니까. 알고 나면 보통 다들 되게 놀라긴 하더라. 남매끼리 외롭게 컸을 것 같지 않은 이미지라나?”
“저도……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이번엔 재우의 두 눈이 커졌다.
“아, 그렇구나. 아버지는……?”
“아버지는 원래 안 계셨어요.”
재우는 조금 어두워진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부모가 일찍 곁을 떠났다는 말을 웬만해선 사람들 앞에서 잘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는 당연하게 뻗어져 오는 연민의 눈길이 마뜩잖았기 때문이다.
서희가 그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에 놀랐다고 할 때도 부러 더 느긋하고 나른한 어조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동안 숱하게 받아 온 동정을 튕겨 내기 위한 방패가 버릇처럼 얼굴에 씌워졌는데, 그걸 서희는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자신의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을 건넬 때 그녀의 눈빛은 그를 불쌍하게 여기는 게 아니니 안심하라고 다독이는 것 같았다.
‘아, 이래서…….’
이래서 나는 너를 이렇게 오래 못 잊고 있었구나.
네가 이런 사람이어서.
차가운 외모와 달리 마음은 한없이 따뜻하고, 말수가 적은 만큼 상대의 말을 섬세하게 들어 주던 너여서.
서희를 보는 재우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수목원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고, 저녁을 함께 하기로 약속을 잡고, 오늘 이렇게 마주할 때까지도 계속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내내 그리워했던 서희와 단둘이 저녁 식사라니.
은근히 신경 쓰이는 후배, 그러다가 조금씩 마음이 가는 여자로 의식해 가던 중에 싹둑 잘린 인연이었다. 결국 서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졸업하게 되면서 곧 쉽게 마음이 정리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기본적으로 연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냉정하다는 소리를 종종 들을 만큼 쿨한 편이었다. 그동안 꽤 많은 여자들과 연애도 실컷 해 봤는데 고작 첫 짝사랑 상대를 못 잊어서 5년을 고생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물론 5년간 여자를 아예 안 만난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연애 상대들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끌려서 다가갔던 여자들은 모두 얼핏이나마 서희를 연상하게 했던 것이다.
눈매가 위로 치켜 올라간 차가운 인상의 여자. 말수가 적고 차분한 여자. 플로리스트. 지나가다가 거리의 흔한 가로수를 홀로 서서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여자의 뒷모습에 꽂혀서 생전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번호를 따 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다 헛짓거리였구나.
진짜 김서희가 눈앞에 있으니 확연히 알겠다. 세상의 어떤 여자와도 전혀 다른 여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람.
서희를 닮은 여자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더 가슴이 타는 갈증을 느꼈던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다른 가족은…….”
“외할아버지 밑에서 컸어요. 제가 성인 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요.”
어쩌면 자신보다 더 외롭고 힘들었을 서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재우의 얼굴에 안타까운 감정이 스쳤다. 그러나 서희 역시 동정이나 연민을 원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기에 애써 담담하게 표정을 고쳤다.
“근데 넌 내가 지금 무슨 일 하는지 안 궁금해? 약속 시간 잡느라 연락할 때도 안 물어보더니 지금도 전혀 궁금한 기색이 없네.”
“아……, 죄송해요. 무슨 일 하세요?”
서희가 당황한 어조로 황급히 묻는다. 엎드려 절 받기처럼 되어 버린 게 우스워서 재우는 쿡쿡 웃었다.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해서 던진 말인데 그녀가 너무 진지하게 받은 것이다.
“죄송할 건 또 뭐야.”
“정말 궁금해요. 알려 주세요.”
서희는 그가 민망할까 봐 신경 쓰이는 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별 뜻 없는 배려라는 것을 알면서도 재우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늘 나무와 꽃들만 보던 서희가 이제 조금이라도 저를 궁금해한다는 게.
“사진 찍는 일 해.”
“사진작가요?”
소리 없이 감탄한 서희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전공은 사진 쪽이 아니셨죠?”
“응. 1학년 때 동아리 들어가고 사진에 빠져서 진로도 바꾸게 됐지. 용감하지? 처음 이 길 뛰어들 때, 누나는 무모하다 못해 무식하다고 하더라.”
“그래도…… 동아리에서 실력도 가장 좋으셨잖아요.”
“그랬나?”
사실 알고 있었으나 처음 안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희의 칭찬을 더 듣고 싶었으니까.
“네. 선배한테 사진 배우고 싶어 하는 후배들도 많았고요. 졸업 전에 외부 공모전에서 큰 상도 받으셨죠?”
재우의 입술 끝이 슬금슬금 위로 올라가며 보조개가 드러났다. 오랫동안 좋아해 온 여자가 대단하다는 듯 추켜세워 주자 유치하게도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무슨 사진을 전문으로 찍으세요?”
“다른 것도 찍지만, 지금 주로 찍는 건 유명 연예인들이나 모델들 화보.”
“아…….”
서희의 덤덤하다 못해 심심한 반응에 재우가 그녀를 힐끔거렸다.
“보통 사람들은 내가 연예인들 화보 찍는다는 말 하는 순간 누구누구 찍어 봤냐 묻기 바쁘던데. 연예인 전혀 관심 없어?”
“제가 TV를 안 봐서 그런 사람들 잘 몰라요.”
“나 진짜 유명한 톱스타들도 많이 찍었을 정도로 실력 있는데. 네가 전혀 모를 테니 잘난 척도 불가능하겠네.”
재우가 아쉬움에 탄식하다가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눈매를 단단하게 좁혔다.
“음, 영화도 안 봐? 나 영화배우들하고도 작업 많이 하거든.”
“가끔 보긴 하는데…… 그래도 배우 이름은 거의 몰라요. 그냥 영화만 보고 끝이라서.”
“그래? 요즘 우리나라 여자들이 껌뻑 죽는 지인호도 모르겠네?”
서희가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작년에 여주인공 원톱 영화로 천만 찍은 연겨울도 모르고?”
“아, 그 배우는 알아요.”
연예인 얘기에 전혀 흥미가 돌지 않던 서희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재우도 들뜬 어조로 물었다.
“알아?”
“네. 그 천만 찍은 영화 보고 너무 인상 깊어서 주인공 맡았던 배우가 누구인지 이름 찾아봤었거든요. 처음으로 관심 가는 배우였어요.”
재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녀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배우와 작업을 했다는 사실이 더없는 행운으로 느껴졌다.
“그럼 연겨울하고도 작업하신 거예요?”
“그렇지.”
“어떤 사람이에요?”
“음.”
재우는 설핏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프로페셔널 그 자체.”
“아…….”
“작가가 추구하고 원하는 방향을 소름 끼칠 정도로 제대로 파악해서 그 이상을 보여 준다고 해야 하나. 모델로 카메라 앞에 섰을 때랑 풀어져 있을 때의 간극도 엄청 크고. 무엇보다, 난 사진작가로서 모델의 눈빛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눈빛이…… 되게 묘하고 확실히 남달라. 뭐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데 하여튼 달라.”
어떤 톱스타와의 작업에서도 잘 긴장하지 않는 성격인데, 연겨울의 화보를 찍었을 때는 그녀의 존재감에 일순 압도되는 감각을 느껴야 했다. 단순히 미모가 훌륭하고 끼와 실력이 있는 차원을 넘어선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겨울을 떠올리며 무의식적으로 심각하게 눈을 찌푸리고 생각이 깊어졌던 재우는 얼핏 웃고 있는 서희를 뒤늦게 알아챘다.
“응? 왜 웃어?”
“선배도 제일 좋아하는 일 하고 계시는구나, 해서요.”
‘제일 좋아하는 일 하게 된 거지?’
재우는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곤 부드럽게 웃었다.
“맞아. 나도 그래.”
식사가 다 끝나 갈 무렵, 그는 진지해진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서희야, 너 대학 때 동아리 활동 갑자기 접었던 일 말인데.”
‘그 자식’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서 이마가 얼얼하게 달아오른다. 그 일이 그녀에게 커다란 충격과 상처를 주었을 거란 짐작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주제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타인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그녀가 그때 일로 더욱 마음을 닫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랫동안 걱정했었으니까.
“아무 연락 못 드려서 죄송했어요. 많이 챙겨 주셨는데…….”
서희는 살며시 고개를 떨구었다. 저절로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 * *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은호가 군대에 간 동안 서희는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줄곧 곁에 있던 은호가 사라지자 하루하루가 더디게 흐르다 못해 마음 시린 공허감을 느끼던 차였다.
2학년도 가입이 가능하다는 말을 우연히 전해 듣고, 그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사진 동아리에 뒤늦게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서희의 붙임성 없는 성격은 그대로여서 동아리 내에서 겉도는 건 그녀 스스로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애초에 인맥이나 친목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동기나 후배들은 그녀를 보며 단순히 친화력이 좀 떨어지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구나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듯했다.
하지만 여자 후배란 자고로 무조건 아양을 떨고 사근사근하게 굴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굳게 믿는 몇 명의 남자 복학생들은 서희를 볼 때마다 ‘콧대 높고 도도한 서희 공주님’ 같은 비아냥조의 별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애교를 부리지 않았을 뿐 선배들에게 늘 예의를 갖추었는데도 그랬다.
서희는 그들의 짓궂은 놀림에 대응하지 않았다. 발끈해서 화를 내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그런 약한 감정을 드러낸다면 그것 역시 괴롭히는 자들의 먹잇감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 전체에게 왕따를 당했던 5학년. 악의를 담은 조롱과 괴롭힘에도 꿋꿋하게 무표정을 유지했더니, 통훈과 다른 아이들은 그녀더러 독하다고 욕을 하고 화를 냈었다. 그때와 다르지 않게 복학생 무리 역시 무기질을 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콧숨을 크게 내뿜곤 했다.
서희의 무반응에 그들은 건방지다고 중얼대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는 그들의 악질적인 괴롭힘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그건 후배들한테 진상 떠는 녀석들을 못 참는 재우가 대놓고 그들에게 망신을 주었던 게 한몫했을 것이다.
동아리에 가입한 지 1년이 훌쩍 흐른 어느 날, 서희는 신입생 환영 MT를 겸해서 경기도 외곽 지역으로 1박 2일 일정의 출사를 나갔다.
출사라고 해서 참여한 거였지만 신입생들을 데리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일정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건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이왕 온 게 아까워서 몇 장이라도 건지려는 몇몇 사람들과 펜션 근처의 숲으로 간 서희는 남들은 보지 못하고 지나칠 작은 풀꽃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해가 내려앉을 무렵, 서희는 홀로 숲을 나왔다. 별일이 있지 않으면 저녁 시간대에 은호에게 전화가 와서, 6시도 되기 전부터 휴대폰을 꼭 붙들고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나 오늘은 깜빡하고 펜션 안에 있는 방에 휴대폰을 두고 나왔다. 시간상 아직 전화가 오진 않았겠지만 혹시 모르니 얼른 가지러 가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펜션에 도착하니 밖에 여자 동기와 후배들 몇 명이 나와 있었다. 아직 날이 풀리지 않은 데다가 해가 져서 제법 추울 텐데도 밖에 모여 있는 게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들어가는 게 좋을걸?”
한 여자 동기가 펜션 문을 열려는 서희에게 충고했다.
“……어?”
“지금 박상재 선배 완전 맛 갔어. 술을 낮부터 처먹었으니 뭐. 지금 들어가는 순간 바로 너 폭탄 맞는 거야.”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졌다.
“야, 걔 그냥 취한 척하는 거야. 어휴, 그 새낀 진짜 동아리에서 내쫓아야 하는 거 아니야? 개소리 엄청 하던데.”
“나한테 남친이랑 4년 사귀었으니까 넌 다른 남자한테 시집가면 안 된다고 하는 거 다들 들었지?”
“그 옆에서 비위 맞추는 놈들이랑 하하 호호 웃는 년들도 어지간하지. 아, 빨리 재우 선배가 와야 되는데.”
“술 안 마시고 방에 들어가서 쉰다고 하면 또 왜 벌써 들어가냐고 건방지다고 지랄 떨어 대서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겠고.”
“그 오물 같은 놈.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서희는 비로소 그들이 밖에 나와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은호의 전화만을 기다리던 서희에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상재와 맞닥트리면 그가 시비를 걸어 올 것은 확실했다. 그는 그녀를 꼿꼿한 공주님이라고 비꼬던 복학생 무리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서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떼고는 조용히 펜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여자 좀 많이 만나 봐서 아는데, 김서희처럼 도도하고 새침한 애들이 또 침대에선 전혀 다르다니까?”
그러나 서희는 자신이 이미 그들의 안줏거리가 되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년들이 꼬실 때는 확실히 어렵긴 하지. 잘난 맛에 콧대만 높아서 이것저것 갖다 바치면서 열심히 공을 들여야 하니까. 그래도 그런 애들이 결국 마음 열잖아? 몸도 제대로 열어 준다니까? 침대에서 하라는 대로 다 해요. 빨라면 빨고, 안에도 싸게 해 주고.”
상재는 주변의 피식거리는 동기들과 남자 신입생들에게 낄낄거리며 말했다.
신발장 옆에 멈춰 선 서희는 안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 지저분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머리가 일순 멍해졌다가 눈앞이 하얘졌다.
상재가 정신을 놓을 정도로 거나하게 취한 상태조차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말아 쥔 주먹이 파들파들 떨렸다. 충격과 분노로 온몸에 열이 솟구쳤다.
“김서희 걔도 내 타입은 아니지만 꽤 색기 있게 생겨서 한번 좀 꼬셔 보려고 했더니, 더럽게 비싸게 굴더라.”
“너 정도면 완전 괜찮은데. 걔는 진짜 자기가 공주인 줄 아나 봐.”
“공주는 무슨, 꼴값 떠네. 재수 없는 년. 근데 뭐, 내가 싫어서라기보다는 이미 남자가 있어서 그런 것 같더라. 말했지? 김서희처럼 생긴 애들이 걸레 같아 보여도 은근히 순정파라서 남자가 시키는 대로 다 한다고. 아마 지금 사귀는 놈한테도 별별 서비스 다 해 줄걸? 에이, 그 부러운 새끼.”
서희는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제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서희가 들어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찰나의 당황. 그 뒤에 피어나는 것은…… 긴장. 흥미. 호기심. 조롱. 조소.
그들의 눈은 약간의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조차 없이 당당하게 서희의 표정과 움직임을 좇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당장에 상재 뺨이라도 때리려나?
김서희 곁에서는 어째 잡음이 끊이질 않네.
쟤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정말로…… 침대에선 남자가 시키는 대로 다 할까?
눈동자에 비치는 감정만이 아니라 그들 머릿속의 생각까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때도 그랬다. 왕따를 당하던 그때도……, 서희는 분명한 피해자였지만 괴롭히던 그 애들은 늘 조금의 머뭇거림조차 없이 당당했다. 그 애들의 눈은 네가 잘못한 거라고 낙인찍고 있었다. 그 눈에 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때때로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정말로 잘못한 게 있을까?
“어, 김서희. 들어왔으면 앉아. 공주님이라 이런 자리는 안 끼나?”
“그래, 서희야. 선배들이 좀 어울리자고 하면 와서 사근사근 굴자.”
“상재가 방금 했던 말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취하기도 했고, 너한테 좀 서운해서 그러는 거니까.”
“네가 좀만 선배들한테 잘 다가와서 예쁘게 굴었으면 우리랑도 벌써 친해졌을 텐데.”
지나치게 뻔뻔한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서희는 굳어 있던 다리를 움직여 당장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짐을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펜션을 박차고 나왔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동기들의 목소리조차 떨치고 아무것도 없는 시골길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서늘하게 식은 바람이 몸을 감쌌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아 헛웃음이 지어질 때, 내내 기다렸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김서희.
은호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 때 투정처럼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있었다. 오늘은 서희가 그 말을 가로챘다.
“보고 싶어, 은호야.”
보고 싶다는 말에 한껏 들뜬 은호의 음성을 들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얼음처럼 굳었던 마음이 은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녹아내렸다.
이것 봐. 은호가 없으면 역시 넌 안 되잖아.
길옆에 아름드리나무를 발견한 서희가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뿌리가 단단히 박힌 듯한 나무는 두 팔로 가득 껴안아도 한참 남을 커다란 느티나무였다. 가지에 잎과 함께 매달린 자그마한 연녹색 꽃이 봄이 왔음을 속삭이고 있었다.
마치 비늘처럼 수피가 갈라지고 벗겨진 늙은 나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까. 서희는 그 옆에 살포시 기대어 뻣뻣한 눈을 잠시나마 감았다.
자신의 성격에 결함이 있다는 건 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겪을 만큼 잘못된 것일까.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이상, 모욕을 듣고도 너 역시 잘못했다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받아야 할까.
― 서희 너 밖이야?
“……응.”
― 추워. 얼른 들어가. 어? 날도 어두워졌잖아.
하지만 왜 변해야 할까. 그녀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좋아해 주는 은호가 이미 곁에 있는데. 어차피 다른 사람들 따위는 한 번도 필요한 적 없었는데.
그 자리에서 묵묵히 도닥여 주는 나무와 늘 곁에서 저를 지켜 주는 은호. 어렸을 때부터 서희에겐 그것만이 전부였다. 그 외에 다른 건 없어도, 아니, 없어야만 비로소 완벽한 세상이었다.
* * *
그 이후로 동아리에는 아예 나가지 않고 학과 생활에만 전념했다. 1학기가 지나고 2학기도 거의 끝나 갈 무렵, 같은 사진 동아리였던 한 동기를 학생 식당 앞에서 우연히 만났다.
“서희야, 너 그날 이후로 동아리 활동 아예 접어서 모르겠지만, 재우 선배가 그 쓰레기 엄청 패 줬어.”
5학년 때 따돌림을 당한 이후부터 서희에게 사람들은 개개인이 아닌 하나의 유기체,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다. 직접적으로 조롱하고 시시덕거리는 이들과, 그 주변에서 수군거리고 즐거워하고 언뜻 가여워하는 이들까지 모두 합쳐진 하나의 덩어리.
왕따를 방관했던 담임 선생님과 5학년 3반 아이들도, 대학에 들어와 가입한 사진 동아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덩어리에 어울리지 않고 떨어져 나오는 존재가 있었다. 옛날에 은호가 그랬듯이 재우 역시 그 혐오스러운 덩어리에 섞이지 않는 묘한 존재였다.
저 대신 화를 내 주었을 그에게 서희는 뒤늦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근데 또 열받는 소식 하나 알려 줘? 박상재, NC그룹 들어간대.”
서희의 눈동자가 그대로 굳었다.
“……뭐?”
“진짜 인생 뭐 같지? 그딴 놈이 그런 대기업에 취직하다니. 걔 합격 통보 문자 받고 좋아서 엉엉 울었단다. 맏아들이 이름난 대기업 들어갔다고 부모님도 좋아 죽고. 요즘 집에서 매일같이 파티래.”
길게 한숨을 쉰 동기가 짧게 작별 인사를 건네곤 서희에게서 돌아섰다.
서희는 상재에게 모욕을 당했던 그날처럼 손톱이 살에 박힐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순간 어린 은호의 해맑으면서도 선뜩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위선만 떨어 대는 어른들은 참 웃겨. 괴롭힌 놈들한테 왜 갚아 주면 안 되는데? 그냥 넘어가면 걔들이 피해자한테 고마워할까? 더 우스워할걸. 죽어라 참아 봤자 나중에 걔네 머리에 어떻게 남는지 알아? 우리도 철없긴 했는데 걔도 잘못한 게 있긴 했지. 어차피 그럴 거면 제대로 돌려주는 거야. 그리고 똑같이 머릿속으로 생각하면 돼. 너무 심하게 굴었나? 그래도 걔네가 다 잘못한 거니까. 딱 그 정도로만 가볍게 스치듯 생각하고 끝내는 거야.’
묵은 분노로 떨리는 주먹과 달리 그녀의 입술은 떨어질 듯 말 듯 머뭇거렸다. 서희는 뒤늦게 멀어지는 동기를 붙잡았다.
“응, 왜?”
“박상재 선배님한테 말 좀 전해 줄 수 있을까?”
“무슨 말?”
“……3일.”
“어?”
“정확히 3일 후에 NC그룹 합격 취소 연락이 갈 거라고.”
놀라서 벙찐 동기를 두고 서희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학교를 나서자마자 성한을 찾아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에게 부탁했다.
자신의 부탁이 거절당할 리 없다는 건 동기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가진 부채감을 이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뇌가 얼얼할 만큼 솟구친 분노와 증오는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예상대로 성한은 이유를 궁금해하지도, 아니, 이유 같은 건 아예 상관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외에 더 처리해 줄 일이 있는지 자상하게 묻기까지 했다.
성한과 인사한 후 밖으로 나오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미친년으로 시작하는 그 문자는 온갖 과격한 욕설이 난무했다. 네까짓 게 NC그룹에서 날 떨어트리는 저주라도 내릴 거냐고 비웃는 내용. 동기에게 서희의 말을 전해 들었을 상재가 열이 받아서 쏟아 낸 문자였다.
그리고 정확히 3일 후, 그에게서 사과 문자가 도착했다. 한 문장도 읽지 않고 그대로 번호를 차단했다.
저녁쯤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상재의 음성은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 서희야, 미안하다. 내가 정말 너한테 몹쓸 짓을 했어. 사실 너한테 관심이 있었는데 네가 날 전혀 안 봐 주니까…… 아, 그래서 네 잘못이라는 건 절대 아니고. 이유가 어찌 됐든 동아리 활동 하면서 너 상처 준 것도 너무 미안하고, 그날 MT 때 진짜…… 내가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어. 나 진짜 많이 후회하고 있고, 너한테 따로 사과하는 것조차 미안해서 그동안 연락을 못 했어. 부탁이야. 얼굴 보고 제대로 사과하게 해 줘.
서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상재의 목소리는 더욱 바들바들 떨렸다.
― 서희 네가…… NC그룹 사람인 거…… 나 진짜 몰랐어.
그가 이상한 착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됐지만 사실을 바로잡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아마도 성한이 부러 합격 취소 통보가 전해질 때 그렇게 말이 흘려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정말 미안한데…… 나 제발 용서해 주라.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 수 있음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간절해진 사과였다. 진정성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정말 진심으로 뉘우쳤다 해도 이제 와서 너그럽게 용서해 줄 마음도 없었지만.
― 그러지 말고 일단 만나자. 제대로, 제대로 용서 구하고 싶…….
“용서 구한다는 게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고 끝내신다는 건가요?”
― 서, 서희야.
“회사 합격 취소 안 됐어도 저한테 사과할 마음 있으셨어요?”
― 그건…… 그건, 내가 진짜 올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어린 시절 느꼈던 인간에 대한 환멸감이 다시 폐부에 깊숙이 꽂혔다.
“변명 안 듣고 싶어요. 정말 잘못했다고 생각하시면 지금 일어난 일 군말 없이 받아들이세요. 그럼 사과받을게요.”
― 나 정말 어렵게 들어간 회사야. 한 번만 봐줘, 서희야. 내가 아직 사람이 덜돼서 그랬어. 불쌍하게 생각해서…….
“제가 받은 상처만큼 갚아 줘야 괜찮아질 거 같아요. 선배님이 안 갚으시면 누가 갚아야 할까요? 선배님 어머니? 아버지? 동생?”
연신 말을 쏟아 내던 상재가 놀란 듯 숨을 삼켰다.
“그걸 원하세요? 선배님이 잘못하신 거니까 본인이 갚으셔야죠.”
― …….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있으시면 다시는 연락하지 마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다행히 상재에게서는 그 뒤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대신 모르는 번호들로 사과 문자가 수차례 오기 시작했다. 지난 잘못을 줄줄 읊는 내용을 보건대 동아리에서 상재와 함께 그녀를 괴롭혔던 이들 같았다.
동아리에서 그녀가 NC그룹의 귀한 손녀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는 사실을 서희는 조금 나중에 듣게 되었다.
* * *
서희는 비스듬히 숙였던 고개를 들고 재우와 눈을 마주쳤다.
“제 편 들어 주셔서 감사했어요. 얘기를 너무 늦게 전해 들어서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어요.”
“됐어.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내가 분에 못 이겨서……. 내 성격 지랄 같은 거 알잖아. 짜증 나는 인간한테는 뒤통수라도 한 대 갈겨야 밤에 발 뻗고 자는 몹쓸 성격. 게다가 한참 지난 옛날 일인데 그런 말 들으니까 좀 간지럽다. 그나저나 넌 정말 괜찮은 거지? 그때 일.”
“네. 저도…… 복수했거든요.”
“복수?”
그가 아리송한 눈으로 묻자 서희는 모호한 미소를 설핏 지었다.
“속마음이나 감정 같은 걸 되게 담아 두고 사는 성격이에요, 저.”
“음, 그런 거 같긴 해. 웬만하면 혼자 참고 인내하는 게 낫다 주의지?”
“네. 별로 좋은 성격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아요. 그런데 쉽게 고쳐지지 않더라고요.”
서희는 지난 일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가끔 부러워요.”
“뭐가?”
“참지 않고 전부 시원하게 터뜨리는 사람이요. 제 오래된 친구가 그런 성격이에요. 선배도 그렇고요.”
“그 친구도 나만큼 꽤 지랄맞은 성격인가 보네?”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녀는 다시 미소를 띠었다.
“박상재 선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친구한테 배운 대로 복수했거든요. 전 사실 그러고 나면 제가 후회할 줄 알았어요. 누군가가 불행해지는 일에 앞장서 봤자 내 곪은 상처가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왜 그랬을까, 하고 마음이 찝찝할 줄 알았는데. 근데 아니었어요. 그냥…… 후련했어요. 그 선배도 지금 내가 받은 것 이상으로 힘들겠지 생각하니까 억울했던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제가 되게 못됐다는 거. 그리고…….”
“그리고?”
“제 친구랑 선배 같은 사람들은 늘 이렇게 아무런 무게감도 없는 산뜻하고 상쾌한 마음으로 살고 있겠구나, 알게 됐어요.”
“무게감이 없어?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재우가 입꼬리에 힘을 준 채 서희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다급히 변명했다.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선배 같은 성격은 마음속으로 누구를 계속 증오하고 원망하거나 우울해하지 않고 빨리 털어 내는…….”
“하하, 너한테는 농담도 못 하겠다. 왜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해?”
재우의 웃음소리에 서희도 안심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 삼킨 그는 들뜬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네가 이렇게 길게 말할 수 있는 녀석인 거 오늘 처음 알았어.”
“사실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어요.”
“그 오랜 친구한테도 얘기 안 했어?”
“네.”
“왜?”
“제가 별로 안 착한 거 알면…… 실망할 거 같아서요.”
서희의 눈동자가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재우는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었다. 이 이상은 건드리기를 바라지 않는 분위기였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위해 앞서가는 재우를 서희가 급히 따라잡았다.
“선배.”
“어?”
“저 대신 화내 주셨던 일 감사해서 오늘 식사는 제가…….”
“안 돼. 싫어.”
“……네?”
틈도 없는 단호한 거절에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사실 함께 식사하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뒤늦게나마 그에게 감사 표시를 할 계획이었다.
“5년 만에 겨우 너한테 밥 사 줄 기회 얻었는데 뺏어 가지 마.”
“하지만…….”
“그럼 다음에는 네가 사. 그럼 됐지?”
“다음…… 요?”
“왜, 싫어?”
“아, 아뇨.”
“그럼 됐네.”
순식간에 다시 잡힌 약속에 어리둥절해하는 서희를 모르는 척하며 재우가 능청스럽게 그녀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너 전화 오는 거 같은데? 계산하고 나갈 테니까 전화 끊기기 전에 어서 받아.”
서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자 은호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떠 있다. 서희는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서희야? 김서희?
평소와 다르게 나른하고 느릿느릿한 말투.
“술 마셨어?”
그러고 보니 오늘 회식이 있다고 했던 것 같다.
― 응. 마셨어.
“얼마나 마신 거야? 많이 취한 거 같은데…….”
결코 술이 약하지 않은 은호인데, 잔뜩 흐트러진 음성에 마음이 쓰였다.
― 나 걱정돼?
“……걱정되지.”
기분이 좋은 건지 은호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어디야? 집 도착했어?”
― 응. 지금 방 들어와서 침대 누웠어. 침대 누우니까 서희 생각 나서 바로 전화한 거야.
“얼른 씻고 자.”
― 왜 자라고 해? 나랑 통화하기 싫어? 김서희, 너 왜 이렇게 변했어? 너 처음 휴대폰 생겼을 땐 나랑 밤새도록 통화해도 좋다고 그랬잖아.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는데 금세 말투가 퉁명해졌다. 술에 취해선지 일곱 살 어린애보다 감정 기복이 심하다.
“너 피곤할 거 같아서 그래.”
― 서희야.
“응.”
― 서희야.
은호가 서희의 이름을 수차례 되뇌기 시작했다.
― ……김서희.
술에 취해서 별 뜻 없이 부르는 거겠지 생각하던 서희는 은호의 목소리가 낯설 만큼 어두워진 순간,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동시에 마침내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 그거 착각이지?
날쌔게 도로를 긁고 지나가는 자동차를 멀거니 응시하던 서희의 두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 나 좋아한다고 했던 말, 그거 다 착각한 거지?
“……은호야.”
― 다시 생각하니까 아니었지? 잠깐 헷갈려서 그런 거지? 나 좋아하는 거, 아니지?
은호가 괴로운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제발 아니길 바라는 듯한 간절한 음성에 서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동안 은호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어서 원망스러웠다. 절대 쉬운 마음으로 한 고백이 아닌데 그걸 깨끗하게 지워 낸 그로 인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역시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은호도.
그날의 고백 이후 그 역시, 아니 어쩌면 저보다 그가 더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소중하게 여긴 오랜 친구가 돌연 사랑을 고백했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던 거다.
그녀로 인해 금이 가며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한 우정에 그는 말 못 할 불안감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을 것이다.
힘겨워하는 그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다. 제 감정에 빠져서, 보답받지 못하는 제 마음만 안쓰러워하느라.
― 그때 네 감정, 잘못된 착각…… 맞지?
서희의 두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눈물이 날카롭고 따갑게 볼을 할퀴었다.
“응. 착각이었어.”
뜨거워진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울음을 간신히 삼킨 채 답했다. 차라리 심장이 멈추기를 바랄 만큼 온 가슴이 고통스럽게 욱신거렸다.
강은호라는 존재가 그녀의 안에 너무도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어쩌면 전부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그로 가득 차 있어서, 도저히 그를 놓을 수 없었다. 아픈 만큼 소중하고 간절해서 지금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마음이었다.
“미안해, 은호야. 다 착각이었어. 내가, 내가 잘못했어. 다신 그런 말 안 할게.”
그 마음이 발끝에 툭, 내동댕이쳐졌다. 쓸모없고 보잘것없다는 듯 버려진 채 엉망으로 일그러져 갔다.
열두 살, 햇살처럼 환하게 그녀를 감싸 줬던 존재가 지금은 그녀를 끝을 알 수 없는 싸늘한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부정당한 사랑이 가슴속에서 빠르게 문드러졌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이고 이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참을 수 없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웠다.
“다시는…… 안 그럴 테니까.”
절대 착각일 수 없는, 아주 오래되고 깊은 이 사랑을 앞으로 두 번 다시 고백할 수 없게 되겠지.
그렇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은호가 힘들어하는 걸 알게 된 이상 제 마음만을 끝까지 몰아붙일 순 없었다.
― 그럼 우리, 이제 변하는 거 없지? 그대로지?
“……응. 그대로야.”
전화를 끊자, 목울음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흐릿해질 만큼 눈앞이 눈물로 뿌옇게 변했다. 끊어질 듯한 격통이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더 선뜩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희야?”
잘게 떨리는 서희의 어깨를 본 재우가 급한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너 왜 그래?”
그녀의 몸을 돌려세운 그는 벌겋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확인하고는 얼굴이 굳었다. 서희는 흐느낌을 막으려는 듯 애써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물기 가득한 두 눈이, 아프게 깨문 입술이, 여린 어깨가 불안하게 떨리는 모습에 재우는 그녀를 끌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억눌러야 했다.
“왜 울어. 무슨 일이야?”
“……선배.”
재우는 눈물로 가득 번진 서희의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듯 눈빛을 일그러뜨렸다.
* * *
벤치에 앉은 서희는 재우가 건넨 따뜻한 커피를 손에 쥐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던 눈물은 잦아들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서희가 털어놓은 말을 곱씹던 재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죽일 놈…… 아니, 그 오랜 친구는 네 고백을 없던 일처럼 모르는 척하고 있다는 거지? 계속 친구 관계 유지하겠다고.”
하도 울어 정신이 살짝 흐리멍덩해 보이는 서희는 다행히 재우의 ‘죽일 놈’ 발언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네.”
“그 친구, 아주 복에 겨웠네. 네가 좋다고 하면 감격해서 무릎 꿇고 달려올 남자만 한 트럭일 텐데.”
서희는 저를 북돋기 위해 과장하는 재우의 말에 설핏 웃었다. 그러나 재우는 진심으로 서희의 그 오랜 친구 녀석이 무척이나 부럽고 얄미웠다.
김서희가 얼마나 특별한 여자인데. 자신은 5년 동안 서희를 잊지 못해서 그녀와 닮은 여자라도 만나 보겠다며 헛짓거리를 하고 다닐 정도였는데.
무려 15년이나 친구였다는 녀석이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진가도 알아보지 못하고 차 버리다니. 얼굴도 본 적 없지만 상당히 멍청하고 덜떨어진 녀석임이 틀림없다.
듣자 하니 그 녀석은 서희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도 내가 갖긴 싫고 남 주긴 아깝다는 심보로 계속 그녀를 상처 주고 있었다. 어떻게 그냥 스치는 인연도 아닌 15년 지기한테 그런 짜증 나는 어장 관리를 하는 건지.
사람을 있는 대로 헷갈리게 해 놓고 막상 용기 내어 손을 뻗는 순간 휙 뒤돌아선 게 아닌가. 곱씹을수록 기막히게 재수 없는 놈이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
“그 친구가 원하는 대로 지금의 관계를 유지할 거야?”
“은호하고 인연을 완전히 끊어 내고 싶지는 않아요. 끊을 수도 없을 거고요. 하지만…….”
서희의 두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젠 정말로 은호를 잊고 싶어요. 은호를 위해서라도 진짜 친구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러려면, 은호를 마음에서 지우려면, 우선 조금씩 거리를 둬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 거 같지가 않아서…….”
고개를 주억인 재우는 잠시 입을 닫았다. 서희가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말 털어놓게 돼서. 사실 전 고민 상담할 사람이 은호 말고는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 고민의 주제가 은호가 되었으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고민을 얼떨결에 재우에게 말하게 된 거였다.
재우는 기회가 자신에게 불어오고 있음을 느꼈다. 서희가 다른 녀석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그의 오랜 마음을 꺾을 힘이 전혀 없었다.
그 못된 녀석이 저와 서희가 만나는 오늘 전화를 걸어 줘서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습관처럼 꽁꽁 감추고 홀로 삭이는 마음을 여전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을 테니.
“서희야.”
“네.”
“우리 연애할까?”
“네?”
서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재우는 웃음을 삼켰다.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저를 보는 서희는 무척 귀여웠다.
“정확히는 연애하는 척.”
“척…… 을요?”
“아까 내가 한 말 기억해? 나 요즘 우리 누나한테 계속 시달리고 있다고. 애인 안 생기면 당장 다음 주부터 주말마다 맞선 보러 다녀야 하는데 나 진짜 싫거든. 근데 또 말했듯이 내가 우리 누나한테만은 마음이 약해져서 제대로 거절도 못 하고.”
서희는 여전히 의문이 깃든 눈빛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친구 행세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해. 서희 네가 그걸 해 줬으면 좋겠어.”
“네? 그럼…….”
“대신 나 역시 네 남자 친구 행세를 하는 거지. 그럼 넌 네 생활 반경을 꿰뚫고 있는 그 친구한테 애인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 둘러댈 말이 생기잖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있는 기회야.”
재우는 간단한 일 아니냐며 씩 웃었다.
“보니까 그동안 그 친구를 상대로 긴 짝사랑을 하느라 연애를 전혀 안 했던 거지? 보통 아무리 어릴 때부터 친한 소꿉친구여도 둘 중 한 명한테 애인이 생기는 순간 예전보다는 사이가 멀어지게 되기 마련이거든. 너한테 애인이 생겼다고 하면 그 친구도 네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멀어지려는 게 아니니 조금 서운하긴 해도 납득은 가겠지. 네 고백을 못 들은 척할 정도로 우정을 깨트리기 싫은 것 같은데 네가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하고 안심할 수도 있겠다. 그래, 생각해 보니 효과는 두 개나 있네.”
“그, 그치만…….”
혼란스러운 듯 서희의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렸다.
“왜? 막상 멀어지려고 생각하니 두려워?”
그가 그녀의 망설이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날카롭게 파고들듯 단호히 물었다. 흠칫 놀란 서희가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떨리던 눈빛이 단단히 여물기 시작했다.
“아뇨. 이번엔 진심이에요. 늘 다짐만 하고 진심으로 잊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번엔 정말 은호를 놓아야 해요. 그래야…… 친구로 오래 남을 수 있으니까.”
친구로라도 곁에 있고 싶은 것조차 좋아하는 마음과 미련이 흘러넘쳐서임을 알기에 재우는 퍽 씁쓸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지금은 다른 녀석을 좋아한다 해도 잊게 할 자신이 있었다. 서두르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제게로 돌릴 것이다.
“근데 선배는 정말 괜찮으세요? 제가 너무 민폐 끼치는 거 같아서…….”
서희는 정말 그의 시커먼 사심과 수작질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재우는 입술 끝이 위로 씰룩거리는 것을 겨우 막았다.
너는 왜 아직도 이렇게 순수하고 귀여운 건지.
이딴 말 같지도 않은 수작을 부려서라도 서희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백 번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재우는 가까스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말했다.
“민폐라니. 아까 한 말 잊었어? 너도 나 도와줘야 한다니까. 이건 한쪽의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라 윈윈이야. 게다가 너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더 리스크가 있지. 연구실은 달라도 같은 직장에 다니는 우리 누나한테 알려지게 되니까. 물론 누나가 너랑 스쳐 지나가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는 지을 순 있어도 다가와서 귀찮게 굴거나 널 곤란하게 할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진짜로 연애를 시작했는지만 파악하면 되는 사람이라서.”
“아…….”
“그럼 성립된 거다? 오늘부터 우리 연애하는 거야.”
“연애하는 척…….”
서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고쳤다. 재우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연애하는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