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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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잔물결
알록달록 화려한 가을의 색을 입은 광릉숲을 찾는 관람객들의 발길이 늘었다. 가운데에서 엄마와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쫑쫑 걷고 있는 아이를 뒤에서 지켜보며 서희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와, 엄마. 이거 봐.”
자신만의 리듬에 맞춰 흥겹게 걸음을 옮기던 아이가 길옆에 길게 펼쳐진 낙상홍 열매를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꽃이 작고 수수해서 눈에 띄지 않던 낙상홍은 가을이 되면 지나가는 이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붙들어 놓을 만큼 아름답고 화려한 열매를 피운다.
“너무 예쁘다. 먹어 보면 안 돼?”
“안 돼. 얼른 가자.”
작고 동글동글한 붉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혀 있는 낙상홍을 아쉬운 듯 보며 아이는 부모의 재촉에 입을 삐죽였다.
아이를 따라 서희도 서서 낙상홍을 잠시 바라보았다. 건드리면 톡톡 터질 듯한 앙증맞은 열매들이 가지에 탐스럽게 매달린 모습보다 열매 사이사이에 보이는 시들고 갉아 먹힌 초라한 잎들이 서희의 시선을 더 오래 붙잡는다.
서희는 전나무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박새와 딱새의 합창이 맑고 청명하게 숲을 울린다. 시선을 돌리자 나무줄기에 거꾸로 내려앉은 동고비가 날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락사락,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서희의 발자국은 길 위에서 더욱더 느릿느릿 이어졌다.
‘나도 좋아해.’
그러나 어느새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멀리 흩어진 채 은호의 나직한 음성만이 귓가를 깊게 채운다.
‘정말, 좋아해.’
은호가 그렇게 말해 주었던 그 순간, 몸을 무너뜨린 채 아이처럼 울고 싶어졌다. 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이 흔들리며 괴롭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으니까.
‘나한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너.’
은호는 애써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가장 소중한…… 친구야.’
그건 고백에 대한 거절도 아니었다. 은호는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알몸으로 안긴 그녀가 울먹이며 안아 달라고, 좋아한다고 속삭이는데 그는 여전히 친구로서의 애정을 말했다. 그녀의 마음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아차린 게 분명한데도 인정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감정을 덮고자 했다.
‘우리 서희, 열나서 잘 부리지 않는 어리광도 부리고.’
충동적으로 고백하며 감기 열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지만, 그 변명을 그의 입에서 듣고 싶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은호는 그녀가 감기 때문에 너무 열이 올라서 잠시 이상해진 것뿐이라는 듯, 침대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타월을 그녀의 어깨에 덮고는 부드럽게 안아 주었다.
‘서희야, 괜찮아. 너 지금 아파서 그래. 내일이면 다 나아질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다.’
은호는 마치 주문을 거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뇌었다. 서희는 그치지 않고 쏟아지던 눈물이 비로소 멈춰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잔인한 밤이 지난 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은호는 이전과 다름없이 서희를 대했다. 지난 일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평소같이 그녀에게 장난을 치고 여전히 넘치도록 연락을 하고 습관처럼 다정하게 그녀를 챙겼다.
그녀가 한 고백은 농담으로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린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안심해야 할까.
그동안 오래도록 은호에게 고백하지 못한 이유는 거절당하는 두려움보다 더는 친구로서도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될까 겁이 나서였다. 좋아한다는 한 마디에 수많은 추억으로 가득한 관계가 와장창 깨져 돌이킬 수 없게 되면, 그래서 은호를 잃게 되면, 자신은 그 후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마음을 전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 우정을 한순간에 깨트리려 한 그녀를 그는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화를 내며 등 돌리지도 않았다. 변함없이 웃어 주고 다정하게 바라봐 주었다. 은호는 여전히 그녀의 곁에 있었다.
분명 다행이라고 안도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걸까.
마른 웃음을 삼킨 채 전나무 숲길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득할 정도로 높게 뻗은 나무들. 울창하게 우거진 전나무 군락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
늘 그녀의 기분을 북돋아 주던 익숙한 풍경을 보고 있는데도 가슴이 텅 빈 것처럼 아렸다. 다 괜찮아질 거라는 은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시선을 돌린 서희는 길옆에 우뚝 서 있는 한 그루의 구상나무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잿빛이 도는 수피 위에 살며시 손을 맞댔다. 나무의 시원하고 거칠거칠한 감각을 손바닥으로 느끼며 우울했던 기분을 애써 떨쳐 본다.
본격적으로 루페(확대경)를 대고 가지에 매달린 새끼손가락 반도 채 안 되는 길이의 잎을 관찰했다. 근처에 있는 전나무들에 비해 잎의 길이도 짧고, 잎 끝이 뾰족하지도 않다.
몇 장의 연필 스케치가 완성되었으니 이제 잉크 펜을 들어 그림을 완성시킬 차례였지만 그 전에 마지막으로 살아 숨 쉬는 나무를 다시 눈에 새기고 싶었다.
“누나 뭐 해?”
갑자기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서희는 멈칫했다. 시선을 내리자 눈이 커다란 남자아이가 그녀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보고 있다.
“……어?”
“그건 뭐야?”
서희의 손에 들린 루페를 보는 눈길이 새로운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 들떠 있다. 서희는 당황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아이를 응시했다. 일곱 살 때 처음 만났던 은호보다 작은 듯한 아이. 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
서희는 입술 끝을 무의식적으로 살짝 물었다. 안면도 없는 생판 남이 돌연 말을 걸어 올 때만큼 당황스러운 순간도 없었다. 그 상대가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듯한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말주변이 워낙 없어서 서희에게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기란 나무 꼭대기에 발가락 하나만으로 올라서기와 비슷한 레벨의 과제였다. 대학 동기들이나 수목원 동료들은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한 공통의 주제가 있으니 그나마 나은 정도였다.
지난번 술집에서 서희가 은호의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겠다고 했을 때 그가 깜짝 놀라던 것도 당연했다.
낯선 사람들이 있는 낯선 공간은 사회인이 되어서도 영 불편하고 꺼려진다. 은호를 통해 워낙 서로에 대해 줄줄 꿰고 있던 사이여서 그때는 은호의 친구들과 생각보다 잘 어울리긴 했지만, 애초에 그 술자리에 굳이 끼고자 했던 건 곰팡이가 필 만큼 낡아 빠진 질투와 오기 때문이었다.
은호의 첫 여자 친구가 낯선 이들과도 친근하게 웃을 수 있는 밝고 활발한 성격이었으니까.
그때부터 제 성격에 묘한 콤플렉스가 생기고 말았다.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상처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10년이 되도록 고등학교 절친들을 소개해 주지 않는 은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과 달라진 자신을.
그래서 처음 보는 남자들 사이에서 편안한 척 웃었다. 어쩌면 은호가 좋아할 만한 여자가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바보같이. 어떤 짓을 해도 그는 저를 여자로 봐 줄 리 없는데.
“뭐 하냐니까.”
아이가 끈질기게 묻는다. 서희는 깜빡깜빡 나무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보고 있었어.”
“왜 보고 있는데?”
대답과 동시에 다시 연이은 물음.
왜 보고 있냐고? 아이의 해말간 질문에 돌연 쓸데없이 생각이 깊어진다.
그러게, 왜 보고 있을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 나무인데. 표본도 한참을 살펴봤고 연필 스케치 역시 마무리 지었으면서 왜일까.
다시 자세히 보면서 분비나무와의 차이점을 세밀하게 찾고 싶었고, 또…….
그런데 이대로 설명한다고 해도 이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서희가 난감한 듯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살짝 매만졌다.
“최도율, 거기서 뭐 해? 얼른 이리……, 김서희?”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타고 울리는 자신의 이름. 서희는 아이가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보다 더 놀라서 몸을 돌렸다.
“진짜 김서희네.”
서희만큼 놀란 표정의 키가 훤칠한 남자가 도율이라는 아이를 향해 뻗었던 팔을 그대로 멈춘 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선배……?”
그녀가 작게 목소리를 내는 순간,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퍼졌다.
“이름은?”
“네?”
“내 이름은 기억 안 나?”
“아…… 재우, 차재우 선배님요.”
입가에 미소가 더욱 깊어진 재우가 그녀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서희는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선 자신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거의 확신에 가까운 음성으로 ‘김서희’라는 이름을 불렀을까.
“얼른 엄마 보러 가자.”
반응이 굼뜬 서희에게 이미 싫증이 난 건지 도율이 재우에게 폭 달려가 안기며 말했다. 서희는 재우에게 매달린 도율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시선을 올려 재우의 얼굴을 살폈다. 아……, 닮았다. 그럼 저 애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이가 어리려나.
“아니야!”
“네?”
“이 녀석, 내 아들 아니라고. 조카야, 조카. 누나 아들.”
아들이겠거니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던 서희의 고요한 눈빛을 바로 읽었는지 재우가 목소리를 높여 열띠게 부정했다.
“아……, 네.”
그녀가 무심하게 느껴질 만큼 평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재우를 다시 보는 건 거의 5년 만이다. 그는 대학 사진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했던 세 살 위의 선배였다. 동아리 시절에도 여자 후배들에게 인기가 무척 많았을 만큼 반듯하고 잘생긴 얼굴이었는데 5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시선을 끄는 외모였다.
“누나가 여기 수목원에서 일하거든. 서희 넌…….”
재우는 나무와 붙어 서 있는 서희를 살피더니 물었다.
“너도 여기서 일해?”
“네.”
너무 짧고 성의 없는 대답인가 싶어 덧붙였다.
“수목원에서 식물 세밀화 그리는 일 하고 있어요.”
그 말에 재우는 어쩐지 밝게 미소를 지었다.
“너 되게 행복하겠다.”
“네?”
“나무나 꽃 하염없이 보고 관찰하는 거 좋아했잖아. 동아리 출사 때도 식물만 찍었던 것 같은데. 서희 네 성격에 동아리를 들어서까지 사진 배우려고 했던 이유도 식물을 제대로 찍고 싶어서였지, 아마?”
꽤 오래전 일인데 단번에 떠올리는 걸 보면 그는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가 보다.
“제일 좋아하는 일 하게 된 거지?”
왠지 모를 다정함이 깃든 물음에 서희는 다른 사람들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서희는 남들 앞에서 거의 웃지 않았다. 어색한 마음에 짓는 연한 미소는 간혹 사람을 비웃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녀의 날카롭고 서늘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시켰다. 활짝 웃으면 그나마 오해는 풀리겠지만 은호가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도무지 자연스러운 웃음이 지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체로 늘 무표정인데, 재우는 그녀의 입가에 서린 희미한 미소를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왜인지 그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한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냐고 묻기 어려울 만큼 집중한 눈으로. 다른 이들처럼 비웃는다고 오해하진 않은 듯해서 다행이었지만 빤히 보는 그의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웠다.
계속 옆에서 재우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말을 걸던 도율이 어린 인내심이 닳은 듯 그를 툭 버려둔 채 짧은 다리로 숲길을 종종 뛰기 시작했다.
“얼른 따라가셔야겠어요. 여기 어린아이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해서…….”
재우는 원망 가득한 눈길을 도율의 뒷모습에 던졌다.
“그러게. 가 볼게. 만나서…… 반가웠다.”
“네.”
등을 돌렸던 재우가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다시 서희를 돌아보았다.
“김서희.”
“네?”
“밥 사 줘도 돼?”
너무도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기울이다가 과거의 기억을 하나 끄집어냈다.
‘나는 이제 너한테 선배님 아니고 선배니까, 다음에 학교에서나 어디서나 마주치면 내가 밥 사 줘도 되지?’
그때 재우의 말에 살짝 고민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무척 즐거운 눈빛을 빛냈었다. 그러나 그 후로 그에게서 밥은 얻어먹지 못했다. 급작스럽게 동아리를 그만두게 되면서 그와의 유일한 접점도 사라졌으니까.
‘서희야, 너 그날 이후로 동아리 활동 아예 접어서 모르겠지만, 재우 선배가 그 쓰레기 엄청 패 줬어.’
뒤이어 떠오르는 다른 목소리에 재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 사 주세요, 선배.”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서희가 천천히 긍정의 답을 내놓자, 재우는 애써 입꼬리를 굳히며 다가왔다.
“번호.”
“네?”
“번호 알려 줘야 연락하고 밥 사 주지.”
“아…….”
서희는 힘이 빠졌는지 이젠 뛰지 않고 걷고 있는 도율의 뒷모습을 흘깃 보고는 조금 빠른 손길로 자신의 연락처를 그의 휴대폰 화면에 남겼다.
“여기요. 조카한테 얼른 가 보세요.”
“그래. 연락할게. 이번에는 밥 꼭 사 줄게!”
재우는 손을 휘휘 흔들며 도율이 간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최도율! 혼자 좀 가지 말랬지?”
단숨에 도율을 따라잡은 재우가 작은 머리통 위에 차분히 내려진 머리칼을 마구잡이로 흐트러트렸다.
“누구야?”
“어?”
“누군데 나는 찬밥 신세였어?”
찬밥 신세라는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어서는 똘망똘망 잘도 써먹는다. 재우는 씩 웃으며 답했다.
“삼촌 첫사랑.”
어떻게 이런 사랑스러운 우연이 있을까. 이 광활한 숲보다 훨씬 좁은 대학 캠퍼스에서도 졸업 전까지 숨바꼭질을 하듯 내내 얼굴을 볼 수 없었는데.
도율의 손을 잡으며 걷던 재우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서희의 뒷모습이 작게 보인다. 5년 만에 만났는데도 바로 알아볼 만큼 각인된 뒷모습. 나무를 올려다보던 그 곧고 단정한 뒷모습에 서서히 마음속에 담게 되었던 후배.
하지만 이젠 앞에서 마주 보고 싶다는 욕심이 조금 당황스러울 만큼 빠른 기세로 마음속에 피어난다.
* * *
부모나 다름없었던 할아버지는 서희가 열아홉이 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마친 뒤 서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느 때보다 춥고 힘겨운 겨울이었다.
그래도 은호가 곁에 있어 준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고3을 앞둔 겨울이니 수험생으로서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는데도 은호는 방학 동안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오롯이 그녀에게 쏟았다.
서희는 이제 자신이 그녀의 가족이라고 진심으로 말해 주는 은호를 보며 할아버지를 잃은 아픔을 서서히 떨쳐 냈다. 그리고 봄이 오고 있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풍년화가 피기도 전에 자신이 은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학교까지는 은호와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서로 다른 학교로 가게 되었다. 서희는 집에서 가까운 여고에 진학했고, 은호는 명문이라고 소문난 남녀공학에 들어갔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은호가 늘 외로울 틈 없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에 다른 친구의 필요성은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꽤 긴장했다. 더 이상 은호가 없는 환경 속에서 버텨 나가야 한다니. 어미 새의 둥지를 나온 아기 새의 심정처럼 스스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역시라고 해야 할지, 서희는 주변 친구들과 평범하게 잘 어울리지 못했다. 우선 쉽게 다가가기 힘든 새침한 외모가 첫 번째 장벽이었고, 지나치게 말수가 적은 게 두 번째 장벽이었다.
얼굴이 어떻게 생겼든 친구들에게 밝고 활발하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온 친구에게 사근사근하게 대꾸해 주며 가까워지면 해결될 일이겠지만 서희에게 그건 지독히 어려운 과제였다. 예민하고 싸늘할 것 같은 분위기의 애가 말까지 너무 없으니, 초등학교 때처럼 왕따는 아니어도 다들 그녀에게 다가오기 어려워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새로운 교실로 첫 등교를 했던 날, 마음에 맞는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당연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연히 첫날 짝이 된 아이는 서희에게 무척 적극적으로 굴며 친해지고자 노력했다.
‘어? 네가 못되게 생겼다고? 아닌데, 서희 넌 그냥 예쁜 거지.’
말갛게 웃는 그 아이의 말에 은호를 떠올렸다. 서희가 스스로 못되게 생겼다고 인정했을 때 은호도 단호한 어투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넌 못되게 생긴 게 아니라 예쁘게 생긴 거야, 라고.
은호와 비슷한 말을 하는 그녀에게 서희 역시 호감이 갔다.
‘나는 신채아야.’
은호를 제외하고 친구, 그것도 같은 성별의 친구를 사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서희는 채아가 무척 좋았다. 할아버지의 빈자리를 문득 사무치게 느낄 때마다 은호와 같이 위로가 되어 주었던 소중한 친구였다. 채아와 막 친해질 무렵에는 은호가 신경질을 낼 정도로 그와 만날 때마다 채아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반대로 채아와 있을 땐 주로 은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채아는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의 얘기가 지루하지도 않은지 늘 기분 좋게 웃으며 집중해서 그녀의 말을 들어 주었다. 은호에 대해 호기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따금 서희의 학교로 찾아오던 은호를 채아에게 소개해 주며 시간이 날 때면 셋이 어울려 놀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채아와 은호가 사귄다는 말을 들었다.
은호를 향한 제 마음을 자각한 상태에서 두 사람의 연애 소식을 들었을 때, 서희는 간신히 땅을 디디고 서 있었을 만큼 충격에 휩싸였었다. 심장을 정확히 반으로 깊숙이 가르는 듯한 통증이 그녀를 덮쳤다.
그동안 이성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던 은호였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은 후에는 그런 그를 보며 안심하고 조금 기대하기도 했었다.
강은호에게 김서희가 무척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알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인기가 많은 은호가 지금껏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지 않은 건 그도 저를 좋아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하며 홀로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전부 덧없는 착각이었다. 창피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망상이었다.
은호는 정말로 그녀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늘 말했던 대로 단지 친구일 뿐이었다. 소중하고 특별한, ‘친구’.
열두 살 때부터 붙어 다녔던 서희는 열아홉이 될 때까지도 은호에게 여자가 될 수 없었는데, 채아는 그와 만난 지 한 달 만에 연인이 되었다. 그 잔인한 현실이 얼마나 가슴에 아프게 박혀 들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죄 없는 은호나 채아를 원망할 수조차 없었다.
‘보고 싶어, 채아야.’
점심시간, 옆자리에서 통화를 나누던 채아의 휴대폰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던 남자의 낮은 음성. 그건 의심할 수도 없이 분명한 은호의 목소리였다.
서희는 문제집을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정한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속삭이는 은호의 말에 채아는 환한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나도 보고 싶어, 은호야.’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었다. 은호도 채아도 진심으로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자신만 그를 포기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의 학교 졸업식 날 꽃다발을 들고 찾아온 은호가 심상한 어조로 방금 채아와 헤어졌다고 말했던 순간,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이 조금도 마음 정리를 못 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가 그때 느꼈던 감정은 강한 안도감이었으니까.
― 보고 싶어, 서희야.
수화기를 타고 흐르는 은호의 부드러운 음성에 서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보고 싶어, 채아야.’
어째서 한참 오래전, 그것도 직접 들은 것도 아닌 음성이었는데 이토록 선명하게 귓가에 떠오르는 걸까.
은호가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연애를 하지 않은 건 귀찮거나 관심이 가는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채아를 잊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로 그녀가 어쩌다 채아의 이름을 꺼내면 그는 불편한 얼굴로 말을 돌리곤 했다.
그녀가 아는 강은호라면,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이상 헤어진 여자 친구를 거론하는 것조차 꺼리는 기색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더욱이 그녀에게는 뭐든 숨기는 법이 없는 은호가 채아에 관해선 늘 입을 다물고 감추곤 해서 단단한 벽을 느끼게 만들었다.
채아의 존재는 7년 넘는 시간 동안 서희의 가슴을 서걱서걱 베고 있었다. 은호가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 은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 서희는 여전히 그녀가 몹시 부러웠다.
― 서희야? 김서희? 듣고 있어? 보고 싶다니까.
보고 싶다는 말은 그동안 지겨울 만큼 은호에게 들었다. 그런데 역시 모르겠다. 대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채아에게 했던 ‘보고 싶다’와 저에게 들려주던 ‘보고 싶다’는 얼마나 다를까.
그가 정한 친구와 여자라는 카테고리 사이에는 얼마나 크고 두꺼운 벽이 있기에 자신은 그것을 오래도록 넘보지 못하고, 채아는 은호와 만난 지 한 달 만에 그토록 쉽게 그의 옆에 설 수 있었을까.
마음이 끝없이 침잠한다. 이내 헛웃음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정말 못났다, 김서희.’
은호에게 고백을 거부당한 후 마음을 덮지는 못할망정 계속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나는 왜 안 될까. 나는 어째서 너에게 여자가 아닐까.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대체 왜 너는 나를 봐 주지 않는 걸까. 나는 왜, 너는 어째서…….
최근 계속 그런 응어리진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점점 그를 원망하게 될 것 같은 이 이기적인 마음이 밉다.
“회사는 끝난 거야?”
서희가 상념을 떨쳐 내며 물었다.
― 응. 오랜만에 일찍 끝났으니까 바로 갈 수 있어. 얼른 가서 제사 준비 도울게. 힘든 거 다 남겨 놔. 알겠지?
“……알겠어.”
은호는 서둘러 그녀의 집으로 출발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서희 엄마의 제삿날이었다.
차가 막히지 않았는지 은호는 예상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 매년 늘 그렇듯 은호는 익숙하게 서희를 돕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진과 성한 역시 도착했다. 세 사람 모두 엄숙하게 갖추어진 정장 차림.
향을 피우기 전 서희는 웃고 있는 엄마의 사진을 잠시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반에서 왕따를 당하던 열두 살 때 은호와 친구가 되게 해 달라고 엄마에게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이 꿈처럼 이루어져서 어린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번에는 은호가 저를 사랑하게 해 달라고 빌면 혹시 이루어질까.
속으로 저를 비웃으며 사진에 닿았던 눈길을 거두었다. 어른이 된 서희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아는 소원을 부질없이 소망하지 않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행된 제사를 마치고, 서희는 마무리 정리를 돕겠다는 경진과 성한을 밀어내다시피 배웅했다. 은호 역시 거들며 부모님의 등을 떠밀었다.
“바쁘신데 늘 참석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정리하는 것까지 도와준다고 하시면 너무 죄송해서…….”
“서희 넌 뭐가 그렇게 늘 죄송해? 우리 늙었다고 무시하지 말고, 어? 같이 하면 더 빨리 끝날 텐데.”
“서희 좀 곤란하게 하지 마시고, 대문까지 나오셨으면 그냥 좀 가세요. 제가 알아서 마무리까지 잘 도울 거니까요. 두 분은 얼른 집에 가셔서 푹 쉬세요.”
“강은호. 너는 우리랑 같은 집 살면서 왜 우리를 네가 배웅해?”
경진은 기가 막힌다는 듯 짧게 웃으면서도 더 면박을 주거나 하진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유독 마음이 헛헛할 서희에게 은호의 존재가 꼭 필요할 것임을 알기에 부부는 실랑이를 멈추고 순순히 기사가 문을 열어 주는 차에 올라탔다.
“춥다. 우리도 들어가자.”
은호가 등 뒤에서 서희의 몸을 자연스럽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서희야, 왜 그래?”
제 어깨를 감싼 은호의 팔을 뿌리치고 싶은 충동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올라섰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네가 아무리 내 마음을 인정하기 싫어도 난 너한테 여자로 보이고 싶어서 부끄러운 것조차 잊고 헐벗은 몸으로 안겼던 애라고. 좋아한다는 말까지 했는데 넌 어떻게…… 정말로 다 지워 버린 얼굴로 웃을 수 있냐고. 아무렇지 않게 내 몸을 끌어안을 수 있는 거냐고.
터져 나올 것 같은 마음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아무것도 아니야.”
서희는 자신이 예민한 정도를 넘어 위험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직감했다.
“은호야, 놔줘. 걷기 불편해.”
“어? 아……, 응.”
놔 달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유달리 차갑거나 퉁명한 것도 아니었는데 은호는 어쩐지 시무룩해져서 머뭇머뭇 팔을 풀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눈동자를 아래로 떨구며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불쌍한 얼굴에 그녀가 무척 약하다는 걸 아니까.
마치 서희의 마음을 전부 읽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그녀가 감정을 접기 위해 천천히 거리를 두거나 조금 밀어낼 마음만 가져도 그 미세한 반응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듯 평소보다 더욱 치근대는 그였다.
아무리 잊은 것처럼 보여도 기억상실에 걸리지 않은 이상 그날의 고백을 잊었을 리는 없으니, 은호는 그녀의 표정이나 상태를 전보다 더 꼼꼼하고 세심하게 살피는 듯했다. 그 일 때문에 그녀가 위축되어 지금의 관계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뒤로 멀어지려 하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게 분명했다.
“김서희.”
어딘가 아득한 시선의 그녀를 부르는 그의 음성이 조급했다.
“응.”
“너 지금, 무슨 생각 해?”
“…….”
이제 정말 너를 놓아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
항상 함께였던 우리 사이의 거리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된다. 네 곁에 있는 한, 나는 널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늘 은호를 포기하겠다고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건 사실 전부 거짓이었다. 진심으로 은호를 포기할 마음 같은 건 없었다. 가능할 리 없다고 믿었으니까.
잘라 낼 마음조차 없이 무럭무럭 키워 온 사랑을 이젠 정말로 놓을 때가 왔음을 알겠다.
자꾸 은호를 욕심내고, 저를 받아 주지 않는 그를 원망하려는 추잡한 이 마음을 이제 거두어야 한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시 데려올 언젠가, 그와 그의 연인에게 진심으로 웃어 주기 위해서는.
“……그냥.”
서희는 얼버무리며 시선을 피했다. 은호가 불안한 눈동자로 저를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