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기 전에-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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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친구
콩나물 해장국이 먹음직스럽게 담긴 뚝배기가 앞에 놓였다. 서희는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떠먹었다. 잘게 썬 청양고추가 들어가 있어 칼칼한 맛이 입 안을 맴돈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서희에게 해장으로 딱 알맞은 메뉴였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공깃밥을 한 숟갈 퍼서 입에 넣다가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조용히 들어 올렸다. 테이블을 두고 맞은편에 앉은 은호가 죽을상을 한 채 원망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데.”
목이 턱 막히는 감각에 물을 찾았다. 은호가 플라스틱 컵에 물을 가득 따라 내밀었다.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서희는 최대한 천천히 물을 들이켰다. 은호의 집요한 취조에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답이 없다. 이대로 가다간 주말 내내 시달릴 텐데.
“설명해 봐.”
“말했잖아. 그냥 헛소리한 거야.”
“헛소리를 해도 어떻게!”
그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가 서희의 놀란 눈을 보곤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은호야, 얼른 잊고 밥부터 먹어. 응?”
“어떻게 잊어. 죽어도 못 잊을 거 같아.”
은호는 제 몫으로 나온 뚝배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어제의 여파로 속이 쓰리고 허기가 진 서희가 국에 밥을 말아 몇 숟갈 떠서 삼키는 동안 그는 수저를 들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그만큼 어젯밤에 일어난 일이 심각하고 중요한 사항이라고 그녀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다.
깔깔하게 느껴지는 목 언저리를 쓸며 눈을 떴던 오늘 새벽, 서희는 진한 어둠 속에서도 존재가 묻히지 않는 은호를 발견했다. 책상 의자를 빼고 우두커니 앉아 그녀가 있는 침대 쪽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던 그의 얼굴은 섬뜩할 만큼 서늘했다.
자신이 아는 평소의 강은호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하고, 또 두렵게 느껴질 만큼 집요한 눈빛이었다.
정신이 차츰 맑아지는 동시에 은호가 왜 평창동 집에 가지 않고 이 집에, 그것도 그녀의 방에 있는 건지 의아했다. 더욱이 그에게선 잠을 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제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탁상시계를 확인하자 새벽 5시 50분.
설마 지금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있었던 걸까? 나를 보면서?
서희는 급히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슈트 재킷조차 벗지 않은 불편한 차림의 그와 달리 그녀는 겉옷과 덧신이 벗겨진 상태였고, 손목을 감쌌던 시계도 풀어진 채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서희는 여전히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어두운 분위기의 은호를 마주했다. 혹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그에게 하고 만 걸까.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은호는 그제야 어제 있었던 일을 알려 주었다.
‘이제 여기 오지 마.’
‘……너랑 이렇게 계속 친구 하기 싫어.’
‘은호야, 나 이제…… 너 안 보고 싶어.’
자신이 어제 잠들기 전 울면서 은호에게 했던 말이라고 한다. 그에게 저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오래도록 마음에만 품고 있던 그 말을 입 밖에 꺼낸 건 아니라는 사실에 그나마 안도했다.
서희는 그에게 헛말이라고 얼버무린 후 숨듯이 황망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간단히 씻고 나오자 은호는 낯설었던 아까의 날 선 분위기를 지워 낸 상태였다. 대신 그때부터 끈덕진 추궁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집에서 멀지 않은 단골 음식점에 함께 온 지금까지도.
“내가 지난밤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15년 지기…… 아니지. 일곱 살 때부터 따지면 20년 지기인데, 그렇게 오래된 하나밖에 없는 제일 친한 친구가 갑자기 나랑 친구 하기 싫대. 꼴도 보기 싫으니 집에도 오지 말래.”
“……술 취해서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 한 거야.”
“취중진담은 아니고?”
그의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말해 봐. 얼굴 보기 싫을 정도로, 친구 하기 싫을 정도로 내가 잘못한 게 뭔지 알려 달라고.”
“은호야. 왜 그래.”
“따지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거야. 내가 다 고친다니까. 나 너 안 보고 못 사는 거 알잖아.”
고개를 숙이고 애써 뚝배기에 시선을 두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살며시 흔들렸다.
“너 이러다가 얼마 안 있어서 술 취해서가 아니라 맨정신에 진심으로 나랑 친구 안 한다고 하면 난 그때 어떡해야 하는데.”
“그럴 일…… 없어.”
숟가락을 내려놓은 서희가 혼잣말처럼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너 안 보고 못 살 거 같아.”
그가 무척 놀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취중진담 아니고, 그때 그냥 이상한 꿈이라도 꿨던 걸 거야. 그러니까 이제 진짜 신경 그만 써.”
은호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자 서희는 시선을 들었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않은 채 그녀를 보고 있던 그가 이내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너 나 안 보면 못 살아?”
“…….”
“뭐야. 너 내가 그렇게 좋아?”
그녀를 안 보면 못 산다는 말을 처음 꺼낸 건 자기면서 그걸 싹 잊은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뻔뻔하게 묻는다. 별로 기가 막히지는 않는다. 수차례 겪어 온 일이기에.
어릴 적부터 워낙 애정 표현이 많은 은호였다. 여러 친구들 중에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녀가 가장 특별하다거나, 피가 섞인 친가족보다도 소꿉친구 김서희가 더 중요하다거나 하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술술 내뱉곤 했다.
반면 서희는 과묵한 성격인 만큼 표현이 극히 적었다. 어릴 때는 수줍음이 워낙 많았고, 크고 나서는 은호를 남자로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를 향한 마음이 새어 나갈까 봐 더 주의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가 그에게 직접 강은호가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 말하는 일은 손에 꼽았다. 그런 만큼 그는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들을 때 들뜨고 기뻐서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지금처럼.
“요즘 나 바빠서 얼굴도 자주 못 보고 엄청 힘들겠네. 그치? 나 없으면 못 사는 김서희, 요즘 내 얼굴 보고 싶어서 어떡해? 큰일이다.”
은호는 단번에 어젯밤 느꼈던 근심을 뒤로 밀어 버린 듯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서희가 방금 한 말은 다른 때보다 위력이 훨씬 강했을 것이다. 이전까지 말로 표현한다고 해 봤자 나도 은호 네가 소중하다, 가장 친한 친구다 정도였으니까.
“그만하고 얼른 밥 먹어. 다 식었겠다.”
“알겠어. 내가 밥 굶으면 우리 서희가 또 얼마나 걱정하겠어. 서희는 나 없으면 못 사니까. 얼른 싹 비워야겠다.”
그가 씩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밥을 뚝배기에 말아 훌훌 떠먹기 시작했다.
“콩나물국밥이 원래 이렇게 달았나? 엄청 맛있네.”
저런 능글맞은 소리까지 한다.
“왜 나랑 똑같은 거 시켰어. 매운 거 잘 못 먹으면서.”
“맵긴, 달다니까?”
“청양고추라도 좀 건져 낸 다음에 말지.”
칼칼한 해장국이 달다는 우스운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청양고추를 씹었는지 은호가 길게 ‘하아’ 숨을 뱉고는 얼른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몸은 저렇게 컸으면서 이럴 땐 여전히 옛날 어린 시절처럼 가리는 거 많은 귀한 도련님 같다.
원래도 붉은 기가 도는 그의 입술이 매운 걸 먹은 탓에 더 빨갛게 부은 듯했다. 그게 귀엽게 느껴지면서도 어쩐지 야릇하고 섹시해 보이기도 해서,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나 매운 거 먹는 것도 걱정돼서 못 참겠어? 넌 대체 내가 얼마나 좋은 거야?”
컵에 담긴 물을 전부 비운 은호의 입술 끝이 한껏 위로 올라갔다. 서희의 말에 완벽하게 안심했는지 어젯밤 일에 대한 건 이제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된 표정이었다.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어쩐지 속으로는 비딱한 마음이 떠오른다.
어제, 만약 내가 널 좋아해서 더는 너와 친구로 있고 싶지 않은 거라고 전부 털어놨다면, 그럼 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지금처럼 기쁘게 웃고 있을까. 아니면 친구로서의 깊은 인연을 망가트린 내게 다시는 웃어 주지 않으려고 할까.
* * *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봤다.
서희는 카트에 이것저것 담고 보는 은호를 타이르며 필요 없는 것을 되돌려 놓길 반복했다. 하지만 마트를 나왔을 땐 혼자 사는 여자의 일주일 치 식재료치곤 지나치게 빵빵한 봉투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너무 많이 샀어. 내가 집에서 세 끼 다 챙겨 먹는 것도 아닌데. 반도 다 못 먹고 썩어서 버리게 될 거야.”
나름대로 말린다고 말렸는데도 은호가 이건 무조건 필요하다, 저건 꼭 사야 한다, 고집을 부려 대는 통에 봉투 안이 이렇게 가득 채워지고 말았다.
“괜찮아. 내가 같이 먹는다니까.”
“회사 바빠서 이제 잘 오지도 못하잖아.”
“그래도 주말에는 어떻게든 올 거야.”
요즘 계속 회사에 매여 있는 그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을 모조리 자신에게 바친다는 게 좋으면서도 슬프다. 강은호를 짝사랑하는 만큼 그가 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기쁘고, 이토록 다정하게 굴수록 은호를 더 포기할 수 없음을 알기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은호야. 너…….”
서희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여자 만날 생각은 없어?”
“여자?”
“주말에 나랑만 놀면, 연애도 못 하잖아.”
은호는 음, 하고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그의 답을 기다리며 초조하게 빈주먹을 꽉 그러쥔다. 스스로 폭탄 버튼을 눌러 놓고 그 옆에서 벌벌 떠는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대체 왜 요즘 다들 나한테 연애하라는 말을 인사처럼 하는지 모르겠네.”
은호가 옆에서 걷는 그녀와 눈을 맞추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여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럼…… 시간 여유 생기면 만날 거야?”
“음, 사실 좀 귀찮아.”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 왜 그렇게 남들한테 연애해라, 결혼해라 추천하다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어. 그 사람들 자세히 보잖아? 진짜 좋고 중요한 건 절대 추천 안 하고 자기만 알고 있는다니까? 근데 연애랑 결혼은 꼭 하래. 무슨 뜻이겠어? 사랑? 그거 그냥 호르몬 작용일 뿐이야. 끽해야 3년. 우리 회사 마케팅 팀만 해도 바람피우는 인간들이 몇인 줄 알아? 가장 웃길 때는, 그 인간들이 나더러 얼른 괜찮은 여자 잡아서 연애하고 결혼하라고 할 때야.”
그가 코미디가 따로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사람들을 비웃고 경멸하던 은호였다.
“한창 청춘일 때 연애 안 하면 시간 낭비하는 거라고 난리 떨어 대는데, 그래서 선배님들은 그 나이에 한창 청춘 되찾고 싶어서 배우자도 있으면서 여기저기 빌빌거리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간신히 참았어.”
전에는 은호가 연애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사랑이나 연애에 지나치게 염세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취해도 그가 다시 연애를 시작하고 여자를 만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가 첫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마음이 무너져 내렸었으니까.
그랬는데 이젠 그것조차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연애를 하든 하지 않든, 자신은 그에게 절대 여자가 될 수 없을 테니까.
“난 그런 인간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인생 즐기고 있는데. 난 너만 있으면 돼. 앞으로도 별로 여자 필요 없어.”
서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저런 생각을 하는 그에게 ‘난 너에게 친구가 아니라 여자이고 싶다’는 말을 꺼내 볼 수나 있을까.
“서희야, 우리 요즘 평일에 거의 못 만나니까 대신 내가 주말에 와서 자고 갈까 봐.”
서희의 걸음이 멈칫했다. 은호는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얼굴로 심상하게 말하며 걷고 있었다.
“어때?”
서희는 조용히 침을 삼키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 말이 안 되는데?”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하려고 그래?”
“서희네서 자고 온다고.”
은호가 뭐가 문제냐며 툭 내뱉는다.
“……허락하실 리가 없잖아.”
“김서희는 우리 부모님을 아직도 모르네. 그렇게 오래 봤으면서. 서희가 요즘 내 얼굴 못 봐서 힘들어하니까 주말이라도 같이 보내겠다고 하면 끝이야. 바로 오케이 떨어질걸?”
서희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경진과 성한이 저를 친딸처럼 아껴 주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열두 살짜리 꼬마가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온다는 것도 아니고, 다 큰 아들이 성별이 여자인 친구가 홀로 사는 집에서 주말을 보낸다고 해도 서희가 그러고 싶어 했다면 고개를 끄덕일 분들이었다. 그녀에 대한 애정도 있지만, 오래 지켜본 만큼 그들이 여자와 남자의 관계가 전혀 아님을 확신하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안 돼.”
단호한 대답에 은호의 눈매가 탐탁지 않은 듯 가늘어진다.
“왜 안 되는데?”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뭘 이상하게 생각해?”
“일단 너랑 나…… 친구긴 해도 남자랑 여자야. 나이도 있는 성인들인데 그렇게…….”
“무슨, 말도 안 돼.”
은호가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의 무신경한 반응에 목구멍이 시큰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너하고 난 친구를 넘어서 피만 안 섞인 가족인데.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부터 내가 네 가족 하기로 했잖아. 오빠가 동생 집에서 자는 건데, 그게 왜 이상해? 이상하게 보는 인간들이 더 이상해.”
“…….”
“뭐, 그렇다고 우리 일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으니까, 말 같지도 않은 상상 하면서 수군거리든 말든 쓸데없는 시선들은 신경 쓰지 마.”
아, 역시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 걸 그랬나.
영원한 친구라는 말까진 어떻게든 참아 보겠지만 그의 입에서 가족이라는 수식어까지 등장하기 시작하면 심장이 바닥 끝까지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정말 어떤 발버둥을 쳐도 그에게 자신은 안 된다고 낙인찍히는 것 같았으니까.
서희는 씁쓸해진 입가를 갈무리했다.
요즘 왜 이러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그녀에게 은호를 좋아하는 건 습관처럼 당연한 거였다. 그랬는데 요즘 들어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날카롭게 가슴을 할퀸다. 차라리 은호를 안 보고 있을 때가 더 나을 만큼 그와 있는 순간순간이 아팠다.
“서희야.”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제 옆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배달 오토바이가 빠르게 인도를 휙 지나갔다.
“뭐야, 저건.”
은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낮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오토바이 타고 인도에서 사람보다 더 안쪽으로 가는 새끼는 처음 보네.”
그의 눈빛이 바로 그녀에게로 향했다.
“서희야, 괜찮아? 안 놀랐어?”
“응? 응…….”
작게 대답하며 아직도 그에게 잡혀 있는 손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크고 단단한 손은 오토바이가 저 멀리 사라졌는데도 그녀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슴이 쿵쿵 빠른 박자로 뛰기 시작한다. 맞닿은 손에서 자신의 떨림이 그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웠다.
시선을 들어 은호의 얼굴을 응시하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담담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를 여자로 보지 않는 은호가 오랜 친구의 손을 잡아 봤자 설렘이나 두근거림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주 당연한 건데도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은호야.”
“응? 왜?”
“……아니야. 아무것도.”
그런데도 손을 놔 달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은호와 닿은 이 순간이 소중해서. 은호가, 너무 좋아서.
어떤 방법을 써도 은호를 도무지 놓을 수 없을 것만 같다.
* * *
국립 수목원 산림 생물 표본관.
서희는 겉씨식물과 양치식물 등이 있는 제1표본실에서 구상나무 표본을 가지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 표본을 현미경 재물대 위에 내려놓고 렌즈를 돌리며 관찰하기 시작했다.
현미경으로 확대한 표본의 미세한 모양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면서 어떻게 그려 나갈지 머릿속에서 스케치했다. 대표적인 특징을 잘 잡아내기 위해 개체를 바꿔 가며 이미 여러 번 보고 또 보았음에도 이번에도 한참을 들여다보게 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식물 세밀화가는 사진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식물의 정밀한 형태와 종의 보편적 특성을 파악해서 기록하는 일을 한다.
따라서 식물학 그림(식물 세밀화)에는 그 식물의 모든 모습을 담아야 한다. 뿌리, 줄기, 잎, 꽃, 열매, 겨울눈 등 계절마다 변화하는 식물의 기관들을 전부 기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년 동안 관찰이 필요하다.
서희는 수목원에서 준비 중인 구과 식물 도감에 들어갈 식물학 그림을 차례차례 그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구과 식물은 40여 종. 구과 식물은 잎이 침처럼 뾰족하고 방울 모양의 열매가 달리는 특징이 있다.
지금 스케치를 앞두고 관찰 중인 구상나무는 전나무, 분비나무와 무척 흡사한 생김새를 가졌다. 소나무과에 속하는 구상나무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고유종인 데다가 기상 이변으로 인한 멸종 위기종인 만큼 우리나라에서 식물 관찰 연구를 하는 이들에게 중요할 수밖에 없는 나무였다.
지리산과 한라산 등 고산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직접 눈으로 봤던 한라산에서 자라는 구상나무는 내륙에 있는 것과는 형태에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한라산에선 크리스마스 장식용 트리로 유명한 구상나무를 보기 위해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때 함께 제주도에 갔던 은호는 김서희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며 신기해했었다.
잎의 앞면이 진한 녹색을 띠면서 뒷면에는 기공조선이라고 하는 잎이 숨 쉬는 하얀 줄이 있어, 멀리서 바라본 구상나무는 동화 속에 나오는 나무처럼 신비로운 은녹색으로 반짝거린다. 열매가 하늘을 향해 곧게 선 모습 또한 고고하면서도 굳센 인상을 준다. 보고 있을수록 아름다운 나무였다.
서희는 모든 나무를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힘든 일이 있으면 나무에게 위로받곤 했다. 집 근처에 있는 친근한 나무들, 거리를 지나며 쉽게 볼 수 있는 가로수, 숲에 우거진 나무 군락. 사람들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서희는 나무와 더 가까워졌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식물과 관련된 직업을 얻고 싶다고 꿈꾸곤 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수목원에서 식물 세밀화가로 일하게 된 건 편안하고 묵묵한 친구였던 나무들보다 조금 잔망스러우면서도 몹시 사랑스러웠던 동갑내기 남자아이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나무에게 말을 건넬 정도로 외로웠던 서희에게 다가와 준 은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린 가슴에 깊은 울림을 줄 만큼 커다란 힘을 지니고 있었다.
‘너 되게 잘 그린다, 그림.’
‘우리 반에서 제일 잘 그리는 거 같은데? 너 그림에 재능 있구나.’
은호가 친구가 되어 준 순간, 실은 나무보다 사람을 더 좋아하고 싶었던 자신의 숨은 마음을 깨달았다. 하나뿐인 친구인 그를 사랑하게 된 것도 나무가 햇빛을 받아들이듯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징, 울리는 진동에 서희는 현미경에서 눈을 떼고 옆에 놓인 휴대폰을 확인했다. 은호. 두 글자의 이름이 화면에 뜬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을 꺼 버린 후 받지 말자고 생각을 굳히려 했지만,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며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서희는 원래 점심을 함께 하던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결국 휴대폰을 잡았다. 한번 끊어졌던 전화는 발신자의 고집처럼 다시 집요히 울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홀로 연구실을 나서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은호야.”
― 점심시간이야.
“알아.”
― 밥 잘 챙겨 먹어. 알았지?
“너도.”
― 서희야, 나 오늘 좀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거 같거든. 너네 집 가도 되지?
“아니야. 오지 마.”
― 왜 오지 마?
서희의 거절이 아니꼽다는 듯 목소리가 비딱하다.
“오늘은 집에서 쉬어. 그나마 쉴 수 있는 주말에도 계속 나랑 있었잖아.”
― 난 너랑 있는 게 휴식이고 힐링이야.
“가족들이랑 시간도 좀 보내고.”
― 우리 집에서 나보다 더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든 사람들 널렸는데.
“나도 오늘은 좀…… 혼자 쉬고 싶어. 피곤해서.”
― 피곤해? 그러고 보니 너 목소리가…….
그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대뜸 물었다.
― 서희야, 너 오늘 겉옷 뭐 입었어?
“응?”
― 카디건 입었지? 그 갈색, 얇은 거.
서희가 팔에 걸치고 있는 카디건을 내려다보며 그렇다고 답하자 수화기 너머로 짙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잠시 의아해하다가 식사를 하러 간다고 하고 은호와 전화를 끊었다.
* * *
광릉숲에 어둠이 깊숙이 내려앉았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해도 재빠르게 자취를 감춰 퇴근할 시간이 되면 창 너머로 보이는 수목원 풍경은 검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처럼 어두웠다.
“이제 퇴근?”
아직 퇴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생태학자 동료가 물었다.
“네.”
서희는 대답 끝에 작게 기침했다. 입을 막고 콜록거리는 서희를 보며 동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기 걸렸어?”
“그런 것 같아요.”
“아침엔 괜찮지 않았어? 얼른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네. 먼저 가 볼게요.”
동료들과 인사 후 표본관 건물을 나온 서희는 주차 구역에 세워 둔 흰색 승용차에 올라탔다. 수목원에 들어오고 1년 만에 산 차였다.
집과 근무지가 꽤 멀어서 출퇴근을 위해선 차가 꼭 필요했다. 할아버지, 그리고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 엄마와 살았던 지금 집을 옮기고 싶지 않았기에 조금 부담이 되더라도 1년 동안 차곡차곡 월급을 모으자마자 중고차를 구매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물론 그때 은호와 충돌이 있었다. 구매 후 통보만 하면 거의 보름은 골이 나 있을 게 분명해서, 곧 중고차를 살 예정이며 차 모델과 가격은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고 조곤조곤 설명하자 그는 장난감 차를 타고 도로를 누비는 사람을 본 것처럼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돈은 차를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야, 서희야.’
‘살 수 있어. 경차고 중고면 이 정도로 충분해.’
‘그 돈 주고 산 차면 멀쩡할 리가 없잖아. 집으로 가져오는 중에 바로 말썽 피우고 사고 날걸? 네가 그런 차를 위험하게 몰고 다닌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해. 서희야, 그러지 말고 내가…….’
은호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멈췄다. 그녀가 빤히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1년 전에 했던 얘기 또 반복해야 해?’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그러는데.’
‘사 준다는 말 할 거잖아. 아직 졸업도 안 한 대학생한테 내가 차를 어떻게 받아?’
이미 그녀가 수목원 취직이 확정되었을 적에 취업 선물로 차를 주겠다고 했다가 단호하게 거부당했던 그다.
‘내가 그냥 평범한 대학생이야? 알잖아, 나 할아버지 유산 상속받아서 돈 넘치도록 많아.’
‘그걸 왜 나한테 써.’
‘그럼 너한테 쓰지, 누구한테 써?’
‘……아무튼 안 돼.’
그는 마음을 바꾸지 않으려는 그녀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것만은 고집을 꺾을 수 없는 문제였는지 성한과 경진을 지원군으로 데려왔다.
이건 안전이 달린 문제라며 차분하고 다감하게 설득하는 성한과 차 선물도 안 받아 주면 섭섭할 것 같다며 서희에게 압박을 가하는 방법을 잘 아는 경진이 합세하니 이길 도리가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초고가의 외제차 중에서만 고르려는 그들 가족에게 최대한 튀지 않는 평범한 차를 원한다고 간곡히 설득해야 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간택을 받은 것이 지금 서희가 타고 가는 차였다.
한 시간 넘게 달려 집 앞에 도착했다. 서희는 주차를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를 쐬는 동시에 잔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운전하는 사이 아까보다 열이 더 오른 것 같다.
옮기는 걸음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 축 처졌다. 가벼운 감기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조짐이 좋지 않았다.
땀이 맺힌 이마 끝을 손등으로 힘없이 닦으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집 창문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본 그녀는 마당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도둑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도둑이 자신의 존재를 광고하듯 불을 켤 리가 없기도 하고.
서희는 안에 은호가 있다는 걸 알지만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도어록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현관문 잠금장치도 예전에는 열쇠였는데 눈이 침침한 데다 간단한 기계도 어려워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은호는 이게 편할 거라며 도어록으로 바꿔 버렸다.
현관문 잠금장치 하나뿐이겠는가. 낡고 오래된 이 집에는 은호가 새로 바꿔 놓은 것이 정말 많았다.
할아버지는 사람 좋기로 유명하셨지만 은근히 고집이 강한 분이었다.
경진과 성한이 이따금 조심스럽게 집을 더 좋은 곳으로 옮기거나 이 주택을 재건축하자는 제안을 밀어 넣으면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젓곤 하셨다. 아직 튼튼하고 살 만한데 뭐 하러 그리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고 가벼운 면박을 주면서.
대신 당신이 죽고 손녀만 남으면 그때 서희만 좀 챙겨 달라고 넌지시 부탁하셨다.
방문을 몰래 열었다가 그 이야기를 들은 서희는 할아버지의 생각을 이어받기로 작정한 것처럼 어디도 가지 않고 이 집을 고집했다.
할아버지 생전에 이미 부탁을 받았던 경진과 성한이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서희에게 함께 살자며 끊임없이 설득하기도 했고, 그게 정 불편할 것 같으면 보안 좋은 아파트로 옮겨 주겠다는 말도 수차례 했었다.
하지만 서희는 할아버지와 엄마와 살았던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은호와의 추억이 가득한 집을 사람 없이 먼지가 쌓이도록 버려두고 싶지도 않았다. 서희의 마음은 대나무처럼 꺾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은호는 제집보다 서희의 집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그리고 그녀를 살살 구슬려서 낡아 빠진 여기저기를 야금야금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급진적인 제안이 실패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은호는 서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녀의 방에 침대를 들여놓고, 낡았다 싶은 가구들도 하나하나 새것으로 바꿨다. 허술한 창문들을 전부 고쳤고, 낮았던 담장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확 높여 놨다.
겨울이 되면 실내인데도 살 떨리게 추운 화장실 공사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은호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다시 집에 돌아왔던 날, 허름했던 화장실을 고급 호텔 욕실 못지않게 뜯어고친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히면서도 조금 웃음이 나왔었다.
“왔어?”
문을 여는 소리를 들었는지 부엌 안쪽에서 나온 은호가 현관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말투나 행동이나 누가 이 집에 사는 사람인지 헷갈린다.
“오늘 오지 말라고 했…….”
서희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를 감쌌기 때문이다.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에 순간 눈이 감겼다.
“이거 봐. 열 있을 줄 알았어.”
“…….”
“옷 든든히 입으라고 했지, 내가.”
서희는 살며시 눈을 떴다. 고개를 낮춰 그녀의 안색을 꼼꼼히 살피는 은호의 얼굴에 걱정이 스며 있었다.
“평창동 집에서 죽 만들어 달라고 했어. 그거 먹고 약 먹어. 열 더 심해지기 전에 오늘 밤 안에 어떻게든 떼어 내 버리자.”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으니 은호는 그녀의 가방을 제 손으로 가져왔다.
“욕실에서 손만 씻고 와.”
은호가 시키는 대로 욕실로 가서 손을 씻었다. 세면대 앞의 거울을 보자 두 뺨이 다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얼굴을 바로 가까이에서 은호에게 보인 건가. 감기에 걸려서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변명거리라도 있으니까.
지칠 만큼 오래된 짝사랑인데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니, 익숙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을 감추는 게 더 서툴러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좋아한다고 직접 말로 전하지 않더라도 그가 전부 알게 되고 말 거다.
젖은 손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은호가 죽을 예쁘게 담은 그릇을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너무 뜨겁지 않게 데웠어. 바로 먹으면 돼.”
그는 서희의 옆에 앉더니 김치를 담은 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
“물 먼저 마실래?”
고개를 젓고는 말없이 숟가락을 들어 죽을 떠먹었다. 잘게 썬 야채와 소고기가 들어간 죽은 따뜻하고 맛있었다.
뜨끈한 죽을 입 안으로 밀어 넣을수록 가슴 한구석이 뭉근하게 아려 왔다. 그러면서도 묵혀 둔 감정이 터질 듯 세차게 일렁이는 감각. 옆에서 은호가 평소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는데도 웃어 줄 수 없었다.
서희는 목 아래로 죽을 다 삼키기도 전에 숟가락을 계속 움직였다. 아무 말도 해선 안 된다. 안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해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상태가 아주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감지였다.
“서희야?”
그가 놀란 듯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돌연 숟가락을 멈춘 서희가 식탁에 동그란 눈물방울을 톡톡 떨구고 있었다.
“왜 그래. 많이 아픈 거야? 얼른 응급실 갈까?”
은호가 심각해진 얼굴로 묻더니 서희의 답을 듣기도 전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병원 가자. 응?”
서희는 목구멍이 뜨거워져 입을 열지 못한 채로 고개만 크게 가로저었다.
“아픈 거 아니야?”
“……응.”
은호는 그제야 조금 안심하는 기색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희 쪽으로 몸을 돌려 앉은 채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서희의 몸을 끌어안자 그녀는 거부하는 기색도 없이 은호의 가슴에 안겼다.
“혹시 감동했어?”
은호는 서희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뭐 이런 걸로 감동을 해? 누가 보면 내가 맨날 무심하다가 이번에 처음 챙겨 주는 줄 알겠네.”
“……어떻게, 알았어? 전화밖에 안 했는데.”
코를 훌쩍이며 겨우 물었다. 그녀의 반응이 애 같았는지 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쳤다.
“너 감기 온 거? 김서희가 아픈데 내가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목소리부터 다른데.”
“…….”
“이 세상에서 너랑 제일 가까운 사람이 난데, 내가 그런 것도 못 알아차리면 안 되잖아.”
제일 중요한 건 모르면서.
뺨이 마를 새도 없이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서희는 은호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셔츠 자락을 꼭 쥐었다.
밉다. 좋아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고 망설임 없이 친구라고 말하는 은호가.
무섭다. 빈틈없이 은호로 꽉 찬 자신의 마음이.
지금은 여자나 연애는 관심 없다고 말하지만 그도 조금 더 나이가 차면 언젠간 결국 마음을 움직이는 여자를 만날 테고, 그 여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걱정이 자꾸 선뜩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지켜볼 수 있을까. 은호가 다른 여자에게 웃어 주는 모습을 보면서도 오롯이 축하를 건넬 수 있을까.
은호를 빼앗기고 싶지 않다.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이 부드러운 웃음도, 마음을 어루만지는 다정한 눈빛도, 전부 언제까지고 자신만이 독점하고 싶었다. 그런 욕심이 치밀 때면 오랫동안 참아 왔던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은호가 저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사력을 다해 억눌렀지만 너무 늦기 전에,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기 전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솔직한 마음을 전하는 대가로 그를 완전히 잃게 될지도 모르지만.
“은호야.”
“응?”
“나…….”
그 다음 말을 잇지 않고 뜸을 들이자 은호가 안고 있던 몸을 풀고 눈을 맞췄다.
“너, 뭐?”
“나…… 있지.”
“응.”
그는 답답한 기색도 없이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녀의 입이 열리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입술을 잘근 깨문 서희는 이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 씻고 싶어.”
“아, 땀나서 찝찝하겠다.”
은호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물 받아 놓을게. 약 먹고 있어.”
“……응.”
그러나 서희는 은호가 식탁에 둔 감기약을 바라보기만 할 뿐 건드리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욕실에서 나온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제 욕조 들어가. 어지러울 수 있으니까 너무 오래 있지는 말고. 알겠지?”
서희는 은호의 눈길을 피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은 후 그가 알맞게 물 온도를 맞춰 놨을 욕조에 몸을 담갔다. 나른해진 눈이 천천히 감겨 왔다. 눈꺼풀을 내린 채 소리 없는 실소를 머금었다.
‘너 방금 고백하려고 했어?’
감은 눈이 어쩐지 뜨거워지는 듯했다.
‘좋아한다고…… 은호한테 말할 생각이었어?’
취하지도 않은 주제에.
서희는 젖은 손바닥을 펴서 얼굴을 감쌌다.
대체 왜 그동안 잘 묻어 둔 감정이 이토록 불안하게 넘실거리는 걸까. 욕조 위까지 아슬아슬하게 찬 물이 조금이라도 몸을 들썩이는 순간 욕실 바닥으로 와르르 넘쳐흐를 것처럼.
저번에는 술에 취해서, 지금은 감기로 열이 올라서?
아니다. 그런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최근 들어 말끔한 정신으로도 그에게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고 싶은 순간은 수시로 찾아왔다. 정신이 흐릿해서 이따금 드는 충동이 아니라 자신은 이제 한계에 다다른 거다. 그의 곁에 더는 친구로 남고 싶지 않다고. 여자가 되고 싶다고.
“서희야, 김서희.”
눈을 감은 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욕실 문을 조급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서희야, 잠들었어? 이제 나와야 돼. 너무 오래 있었어, 너.”
모락모락 김이 솟았던 욕조 물은 어느새 식어 있었다.
“서희야?”
서희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욕조에 있어서일까,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흐릿해진 머리 한쪽을 감싸고 욕조에서 발을 빼는 동시에 더욱 강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비틀거린 서희가 욕조 턱을 잡으려다가 그 위에 올려놓은 보디 워시 통을 쓰러뜨리고 말았다. 플라스틱 통이 바닥에 떨어지자 그 소리가 요란하게 욕실 안을 울렸다.
“김서희!”
은호가 놀란 듯 거세게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희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욕실 바닥 한쪽에 쓰러진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머리끝에 날카롭게 찾아온 통증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계속된 침묵에 그는 더 기다릴 수 없었는지 부서질 듯 두드리던 문을 벌컥 열었다.
“서희야, 무슨 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서희를 본 은호가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어져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망설임을 재빨리 끊어 낸 그는 욕실 수납장에서 목욕 타월을 꺼내 펼치고는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은호야.”
“괜찮아, 서희야.”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음성으로 속삭이며 은호는 커다란 타월로 서희의 몸을 감쌌다. 그녀의 몸을 단숨에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욕실을 빠져나온 그가 서희를 침대에 부드럽게 내려놓고 이불을 덮었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알아? 못 참고 들어가 보니까 그렇게 넘어져 있고. 놀라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결국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조용히 울기 시작하는 서희를 보며 은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자꾸 우는 거야. 속상하게.”
“…….”
“많이 아파? 아니면 방금 일 부끄러워서 그래? 나 아무것도 못 봤어. 진짜야. 응? 그러니까 괜찮아.”
살짝 젖은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며 달래는 손길이 가슴이 아릴 만큼 다정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 여기 있지 말까? 보기 싫어?”
은호는 그녀가 우는 이유를 다르게 오해한 듯 목소리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럼 나 거실에 있을 테니까 필요한 거 있거나 어디 아프면 바로 불러.”
이불을 다시 꼼꼼히 덮어 주고 등을 돌리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은호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본 것도 잠시, 서희가 몸에 덮인 이불을 젖히며 나온 순간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김서희.”
서희의 나신이 박힌 새까만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은호가 두 눈을 질끈 감는 동시에 서희가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가지 마, 은호야.”
“너 지금 뭐 하는……. 얼른, 하, 너 얼른 옷부터…….”
은호의 낮은 음성이 여느 때와 달리 불안정하게 떨렸다. 몹시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그의 반응은 당연했다.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방금 욕실에서 쓰러진 것처럼 피치 못할 상황으로 알몸을 내보이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그의 앞에 서 있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김서희가. 얌전하고 수줍음 많은, 그의 15년 지기 김서희가 말이다.
“서희야, 김서희……. 옷부터, 지금, 일단…….”
“은호야, 안아 줘.”
평소답지 않게 버벅거리던 은호의 말이 멎었다. 몸이 단단하게 굳은 듯한 그에게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서희는 은호의 가슴에 이마를 묻은 채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내가 얼마나 오래전부터 너에게 여자이고 싶었는지 아마 상상도 못 하겠지.
충동적으로 안아 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뱉어 낸 순간, 스스로 음습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를 여자로 보지 않았던 은호가 알몸으로 품에 안겨 온 자신으로 인해 남자로서 본능적인 욕정에 이성이 흐릿해진다면. 그래서 잠시나마 모든 생각을 지우고 자신의 몸을 안아 버린다면.
그럼 그땐 더는 친구가 아닌 여자로서 각인될 수 있지 않을까.
“너 지금…….”
“좋아해.”
평소라면 서희가 안겨 오는 순간 주저 없이 마주 안아 주었을 은호는 그녀의 벗은 등을 만지는 게 꺼려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고백 때문인지, 딱딱해진 자세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네가…… 너무 좋아, 은호야.”
이 무모하고 충동적인 고백은 전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온몸에 퍼진 열 때문이다. 서희는 그렇게 속으로 변명하며 은호의 대답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