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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기 전에-3화

본문

쿵푸벳

02. 부성애

강은호, 김서희 12세

사립 초등학교 교복을 단정히 입고 방에서 내려온 은호는 갖가지 음식들이 차려진 넓은 식탁 앞에 앉았다.

다섯 식구가 사는 집인데 자리를 채운 사람은 아직 두 명뿐이다. 경진이 은호에게 눈길을 주며 말했다.

“오늘 서희네 가는 날이야. 안 잊었지? 서희네 가서 어르신한테 예의 있게 굴고, 서희한테도 못된 말 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오늘이 서희 엄마의 제사라는 건 잊지 않았다. 요 며칠 부모님이 말로도 행동으로도 중요한 날임을 명백하게 강조했는데 어찌 잊겠는가. 일주일 전에는 은호가 입을 정장까지 맞췄다.

“전처럼 교복 입고 가면 되지, 나까지 무슨 정장을 입어. 너무 오버 같은데.”

1년에 한 번 있는 날, 은호는 어떤 할아버지와 그 손녀딸 둘이 사는 조촐한 집에 방문해야 했다. 경진과 성한이 언제부터 그 집에 다녔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은호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일곱 살 때부터 그곳에 함께 갔다.

얼굴을 보기 힘들 만큼 바쁜 두 분이 이날만은 절대 잊지 않았다. 더욱이 은호는 제사에만 참여했지만 부모님은 따로 시간을 만들어 그 집에 종종 찾아가는 것 같았고, 귀한 선물들을 끝없이 보내곤 했다.

그 집 마당에 석유라도 흐르나.

은호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곤 작게 코웃음을 쳤다.

“엄마랑 아빠, 그 집에서 돈 떼먹었어? 우리 집보다 부자 같지도 않던데.”

은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진의 손이 빠르게 날아왔다. 아프다고 신경질 부리기엔 자존심이 상하지만, 안 아프다고 허세 부리기엔 은근히 계속 화끈거리는 수준의 강도였다.

“말로 하면 되지, 왜 폭력을 쓰는데?”

은호는 불만스럽게 입을 비죽거리더니 돌연 심술궂은 눈빛을 빛냈다.

“그럼 김서희 걔, 아빠가 밖에서 낳은 애야?”

이번에도 매를 불렀다. 엄마가 아닌, 막 식당에 들어서던 아빠에게 이마빡을 거하게 가격당한 것이다.

아빠는 평소 엄마보다 훨씬 온화하고 부드러운 편이었고, 여우같이 구는 막내아들을 특히 귀여워했다. 그러나 외도를 의심당한 건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강은호, 아침부터 혼나 볼래?”

엄마와 아빠에게 번갈아 한 대씩 맞은 은호는 입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왔다.

“아빠만 의심한 거 아니야. 객관적으로 따진 거지. 엄마가 나랑 걔를 한 해에 둘 다 낳는 건 불가능하니까 엄마는 어쩔 수 없이 제외했어. 근데 솔직히, 아빠보단 엄마가 바람피울 확률이 더 높은…… 악!”

은호는 결국 양쪽의 찰진 손길로 두 대 더 맞고 학교에 가야 했다.

* * *

서희네 집으로 향하는 차 안. 뒷좌석에 홀로 앉은 은호는 아침에 일어났던 부당한 폭력에 여전히 항의하고 있었다.

“엄마 아빠는 나한테는 서희 좀 보고 배우라고 하면서 왜 서희네 할아버지 보고 배울 생각은 안 하는데? 서희네 할아버지는 서희 절대 안 때리고 키우던데. 꿀밤도 안 때리고 아예 장난스럽게도 손을 안 든다니까?”

은호가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툴툴댔다. 어느새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진 녹색 대문 앞에 다다랐다.

“어르신, 저희 왔어요.”

“바쁜 양반들이 어찌 또 왔소?”

인상이 좋은 서희 할아버지가 부드럽게 타박하곤 허허 웃었다. 그의 뒤에서 수수하지만 단정한 옷을 입은 서희가 조용히 인사했다.

1년 만에 보는 서희였다. 비슷한 키의 은호와 잠시 시선이 마주친 서희는 놀란 얼굴이었다. 원래도 커다란 눈이 은호를 보며 더욱 커진다.

왜 저럴까 의아했다. 그러나 금방 이유를 알아차렸다. 서희는 은호가 차려입은 정장을 쭉 훑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두 뺨도 살짝 발그레해졌다.

은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꼬마 주제에 보는 눈은 제법 있어서 이 근사하고 멋진 모습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나 보다.

‘확실히 애들 티 나는 초딩 교복보다는 이쪽이 훨씬 멋지긴 하지.’

남의 집 제사 때문에 굳이 정장을 맞추는 게 오버스럽다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솔직히 은호도 몸에 흐르듯이 맞는 정장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새삼 반했을 정도였다. 이런 말을 꺼내기 좀 민망하지만, 누가 봐도 참 잘난 외모였다.

‘그래도 나한테 반하면 곤란한데.’

은호는 정말로 살짝 곤란하다는 눈빛으로 서희를 흘깃 보았다. 이미 반했나? 1년에 겨우 한 번 보는 남자애를 짝사랑하면 너만 고생이니 마음 접으라고 직접 충고해 주고 싶지만 관두었다. 말한다고 마음이 쉽게 접어지면 사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이겠는가.

문득 서희와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일곱 살. 부모님과 함께 이 집에 들어서자 서희는 할아버지 뒤에 숨어서 은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수줍은 눈길로 힐끔거리다가 고개를 젖혀 “할부지, 할부지. 누구야?” 하며 은호의 존재에 관심을 보였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며 은호는 부모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제사상은 소박하면서도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고작 열두 살인 서희는 제주로서 쭈뼛거림도 없이 상 앞에 섰다. 아직은 작기만 한 손으로 익숙하게 향을 피우고 술을 올린 뒤 가지런한 몸짓으로 절을 했다.

“강은호. 너도 올해부턴 엄마 아빠랑 같이 절해.”

엄숙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던 경진이 말했다.

“나도?”

어색하다는 듯 입을 비죽이자 경진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장난기 다 빼고 진지하게. 우리 가족한테 무척 감사한 분이야. 어르신하고 서희가 우리도 제사 참석하게 해 주시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데. 너 예 제대로 갖춰.”

엄하게 타이르는 음성에 서희 할아버지가 웃으며 혀를 찼다.

“마, 됐소. 아가 뭘 아노. 은호야, 이리 온나. 이거나 무라.”

상처가 많아 거칠고 자글자글 주름이 진 손에 약과가 들려 있었다. 넉살 좋은 웃음이 퍼진 얼굴은 인자하고 정이 넘쳤다.

은호가 기억하는 서희 할아버지의 첫인상은 마음이 참 넓고 푸근한 할아버지 같다는 거였다. 늙어서도 여전히 정력 넘치고 탐욕스러운 자신의 친할아버지와는 영 딴판이었다.

여덟 살 때였나, 아홉 살 때였나. 오늘처럼 은호는 부모님을 따라 제사에 참석했었는데, 멀쩡히 있다가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울기 시작하는 경진을 남편보다 먼저 다독여 준 사람도 서희 할아버지였다.

‘미안한 마음은 치아 뿌리고 고마운 마음만 가꼬 오소. 서희 어미도 그걸 바랄 기다.’

서희 할아버지가 흔드는 약과를 한 번 보고 경진에게 눈길을 주자 그녀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아니에요, 어르신. 은호도 이제 다 컸죠.”

결국 올해는 은호도 처음으로 죽은 서희 엄마에게 절을 올렸다.

* * *

제사를 전부 마친 뒤, 두 가족은 함께 식사를 했다.

“어르신, 별일 없으시죠?”

성한의 물음에 세월의 흔적으로 가득한 서희 할아버지의 얼굴이 시름에 잠겼다. 그러자 부부는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하곤 밥을 다 먹은 아이들에게 눈길을 내렸다.

“서희야, 은호한테 서희 방 구경 좀 시켜 줄래? 은호가 궁금하대.”

“네.”

은호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을 나와 서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간 은호는 무척 비좁은 방을 쭉 둘러보았다.

“여긴 공부방이야?”

“응?”

“침대가 없네. 잠은 어느 방에서 자?”

은호의 천진한 질문에 서희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벽 한쪽에 있는 장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들어가서 잔다고?”

은호는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응? 아, 아니. 이불이랑 요 꺼내서 그거 펴서 자는데…….”

“뭐? 침대도 없이 자는 거야? 허리 안 아파?”

서희는 순진한 얼굴로 동그란 이마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문질렀다.

“안 아픈데…….”

“그래? 신기하다. 난 침대 없는 데선 절대 못 자는데.”

다른 의미로 감탄하며 방을 다시 둘러보던 은호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찾았다.

“어디에 뒀지?”

“응? 뭐 찾아?”

“휴대폰.”

“휴대폰?”

“아,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놨다. 거실에 있는데.”

은호는 슬쩍 서희를 보았다.

“넌 휴대폰 없어?”

“응.”

“내 거 구경할래?”

“……정말?”

“너도 갖고 놀게 해 줄게.”

도도하게 대답한 은호가 잠시 서희를 두고 방을 나왔다. 거실에 둔 재킷을 가지러 가는데 부엌에서 어른들의 낮은 말소리가 들렸다.

“서희가 왕따를 당해요?”

놀라면서도 화난 듯한 경진의 말에 재킷을 든 손이 멈칫했다.

“아니, 대체 왜요? 저 착한 애를 왜 괴롭힌대요? 아주 못된 것들이네.”

분통을 터뜨리는 경진의 목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다시 방에 들어오자 그 자리에 서서 은호를 기다리고 있던 서희가 눈을 맑게 빛냈다.

‘왕따?’

기척을 죽인 채 어른들의 대화를 잠시 몰래 들었는데, 꽤 심각한 상황 같았다.

원래도 워낙 얌전하고 조용해서 여러 친구들과 활발하게 놀진 않았지만 그래도 같이 어울리는 애들은 몇 명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떤 아이의 주도로 왕따를 당하면서 반에서 계속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는 모양이었다.

“김서희, 너…….”

“응?”

“아니야.”

정말 왕따를 당하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주변의 긍정적인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해 온 은호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의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냥 추상적으로 외롭고 비참하겠다고 생각하는 정도.

“자, 이거야. 내 폰.”

은호는 최근에 새로 바꾼 최신 휴대폰을 서희에게 내밀었다.

“와…….”

별로 친하지 않은 애인 만큼 할 말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휴대폰을 구경시켜 주며 적당히 시간을 때우던 은호는 방문 너머로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희가 아쉬운 눈으로 은호를 흘끔거렸다.

“왜? 휴대폰 갖고 싶어? 우리 부모님한테 말하면 너도 사 줄걸? 내가 말해 줄까?”

왕따를 당한다는 서희가 살짝 불쌍해서 썩 다정한 말투로 묻자 서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야. 안 갖고 싶어.”

“안 갖고 싶다고?”

그럼 왜 저렇게 아쉬워하는 얼굴이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재킷을 입는 동안에도 새끼 사슴 같은 처연한 눈망울이 은호의 움직임을 좇았다.

은호는 서희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방을 나왔다.

대문 밖까지 나와 배웅하는 서희 할아버지와 서희에게 인사를 하고 세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는 어린 아들을 경진이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지만 은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은호는 소파에 함께 앉은 성한과 경진을 번갈아 보며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강한 눈빛으로 바락바락 대들었다.

“내가 왜 전학을 가야 하는데!”

“아빠가 다 설명했잖아, 은호야.”

“이해가 안 된다고! 김서희가 왕따 당하는데 내가 왜 그 학교에 가야 되는데? 어른들이 고심한 문제 해결 방법치곤 너무 단순하고 무책임한 생각 구조 아니야? 친구 없는 애 옆으로 가서 대신 친구 해 줘라, 이거잖아! 말이 된다고 생각해? 차라리 걔더러 우리 학교로 오라고 해! 내가 적당히 챙길 테니까!”

화가 난 초등학생 특유의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목청에 경진이 귀를 살짝 막았다 떼곤 입을 열었다.

“서희가 전학 안 간다고 했대. 그러지 말고 가서 서희 좀 도와줘. 어차피 학교가 다 똑같은 학굔데…….”

“내가 왜 김서희 때문에 피해를 받아야 하냐고! 나도 내 친구들이 있고 내 생활이 있는데!”

은호는 화가 잔뜩 나서 소리치다가 돌연 2층으로 다다다 올라가 버렸다. 저 정도로 끝내고 말 녀석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경진과 성한은 의아한 듯 마주 보았다.

“우리가 방으로 올라가 봐야 하나?”

성한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곧 다시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은호는 방금보다 더 열이 받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젠 애처럼 막무가내로 떼쓰기보다는 어른이 화를 낼 때처럼 표정부터 목소리까지 어둡고 심각해져 있었다.

“그 학교 검색해 보고 왔는데 진짜 이건 아니야. 학교 건물도 엄청 낡았고, 운동장은 쪼끄만 것도 모자라서 잔디도 안 깔려 있어. 21세기에 존재해도 되는 학교가 아니라구. 화장실도 거지같이 냄새나고 더러울 게 분명해. 내가 그런 구질구질한 곳을 어떻게 다녀?”

경진과 성한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막내아들을 빤히 보기만 했다. 대체 저 애를 어디서부터 잘못 키웠나 상심에 잠긴 눈빛이었다.

* * *

며칠 뒤, 은호는 멀리 유배라도 온 선비처럼 기력 없는 얼굴로 그 낡고 구질구질한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오늘부터 우리 반에서 같이 공부할 친구예요. 이름은 강은호.”

선생님의 소개에 반 아이들이 또랑또랑 빛나는 눈동자로 새로 온 전학생을 살폈다.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과 어린아이조차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옷차림의 남자애에게 다들 호감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은호는 예상한 대로 낡은 티가 나는 교실을 쓱 둘러보다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맨 구석, 청소 도구함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서희가 은호를 보곤 깜짝 놀라서 연신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부모님은 서희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모양이었다.

은호에게 자리를 지정해 준 담임 선생님은 아침 회의가 있다며 교무실로 향했다. 선생님이 사라지고 은호가 자리에 앉자마자 호기심 넘치는 아이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은호야, 너 진짜 잘생겼다. 아역 모델 같아.”

“그래? 고마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솔직하게 말하는 여자애에게 은호가 상냥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이 홀린 것처럼 그 미소에 빠져들었다.

“어? 이 옷 진짜 비싼 옷이잖아. 우리 반 지욱이도 이 옷 브랜드 가끔 입고 와.”

“지욱이?”

“지욱이네 집 부자야. 아빠가 NC전자 과장님이래.”

“아, 정말?”

은호의 바로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지욱이라는 남자애가 뒤를 돌아보더니 살짝 거만해진 얼굴로 우쭐거렸다.

“우리 아빠 연봉 엄청 높아. 얼마 버는지 알려 줄까?”

은호는 순수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어? 우리 아빠도 NC전자에서 일하시는데.”

“정말? 와, 신기하다! 그럼 은호네도 부자겠다.”

지욱은 특별한 위치를 잃을 것 같은 위기감 때문인지 불퉁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직급이 뭔데?”

“직급?”

은호는 또렷한 눈망울로 말했다.

“우리 친할아버지가 NC그룹 총수야. 회장님이라고 해야 쉽게 알려나?”

“회장님……?”

“우리 아빠는 곧 NC전자 사장직 달 거고. 연봉이 얼마인지는…… 음, 그런 건 난 잘 몰라. 우리 집은 자식들 앞에서 돈 얘기 같은 거 안 하거든.”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얼떨떨한 눈으로 은호를 바라보았다. 촌스럽게 침을 꼴깍 삼키는 애도 있었다. 엄청난 거물을 맞닥트린 것 같은 표정은 하나같이 다들 똑같았다. 은호는 왜 그러냐는 듯 티 없이 맑게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치는 중이었다.

초등학생들도 알 건 다 안다. 가령 쟤네 집안 되게 부자래, 부모님이 엄청 힘 있대 같은 정보가 돌면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나겠다는 계산이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걸 아는 만큼, 좀 유치하지만 초장부터 그냥 평범한 전학생이 아니라는 걸 친히 알려 주었다.

예상대로 아이들은 은호의 반짝거리는 미모에 홀렸던 처음보다 더 은호에게 잘 보이려는 기색이 다분해졌다. 경외감과 약간의 긴장감을 품고 은호를 대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주인공의 위치에 서는 게 당연한 은호는 짧은 시간 만에 아주 자연스럽게 반 아이들을 휘어잡았다.

“얘들아, 쟤는 누구야?”

은호가 창가에 불량하게 기대어 선 통통한 남자애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 옆에는 졸개 같은 두 아이가 그 남자애의 비위를 열심히 맞추고 있었다.

“아, 통훈이?”

“통훈? 특이한 이름이네.”

“응. 심통훈이라는 앤데, 우리 반에서 제일 힘이 세.”

대부분의 아이들은 은호의 자리에 몰려 은호와 한 마디라도 나누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심통훈 무리와 망부석처럼 혼자 자리에 앉아 있는 서희는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쌍꺼풀 없이 눈이 가느스름한 통훈은 이따금 은호 쪽을 의식하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살피곤 했다.

여러 아이들의 질문에 능숙하게 대답을 해 주고 있는데 어느새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앞문으로 들어왔다. 1교시, 2교시, 평범하게 시간이 흘렀다. 쉬는 시간마다 은호의 자리에 아이들이 우글우글 몰리는 것도 전에 있던 학교와 비슷했다.

‘친구를 왕따 시키는 반이라더니, 별로 음침한 분위기는 아니네. 다 그럭저럭 평범한 애들 같고.’

그렇게 방심하고 있었는데 3교시에 은호의 신경을 자극하는 일이 생겼다.

“어? 김서희, 저 여자랑 닮지 않았어?”

한 아이가 교실에 설치된 커다란 TV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이 잠시 재미 삼아 틀어 준 최근 개봉한 영화 예고편이었는데, 화장을 진하게 한 날카로운 분위기의 여자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맞아, 닮았어! 완전 못되게 생겼잖아.”

“쟤 커서 막 사람들 괴롭히는 악녀 될 거 같지 않아?”

몇몇 아이들이 공감하며 까르르 웃어 댔다.

은호는 고개를 뒤로 돌려 흘깃 서희를 보았다. 입을 앙다문 채 웃지 않으면 다가가기 힘들 만큼 새침한 외모이긴 했다.

“야, 만화에서도 나쁜 년들은 꼭 저렇게 생겼어!”

나쁜 년?

은호의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담임이 적당히 아이들을 말렸다.

“너희 서희 좀 그만 놀려라.”

“왜요? 놀린 거 아닌데! 예쁘다고 칭찬해 준 건데.”

“맞아요. 악녀들 다 예쁘잖아요.”

“칭찬받아서 기분 좋지, 서희야?”

칭찬은 무슨. 누가 봐도 빈정거리며 놀리는 게 맞았다.

서희는 자신의 이름이 교실에서 계속 거론되고 있는 이 상황이 몹시 부담인 듯 고개를 폭 숙인 채 어깨를 살짝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은호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졌다.

* * *

전학을 오고 일주일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은호는 반의 분위기와 아이들의 성격이나 특징을 면밀히 살폈다. 촉새같이 잘 떠드는 애가 짝꿍이어서 며칠 만에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첫날부터 직감했던 대로 왕따 주동자는 심통훈이라는 녀석이었다.

5학년에 올라오자마자 같은 반이 된 서희에게 반한 통훈은 얼마 후 선물까지 준비해서 고백했다고 한다. 서희는 그 고백을 받아 주지 않았고, 그 다음 날부터 따돌림이 시작된 것이다. 김서희와 말하다가 걸리는 애는 내 손에 죽을 줄 알라는 유치한 협박까지 일삼으면서.

‘고백 거절했다고 거의 1년 동안 왕따를 시키다니. 찌질한 수컷의 전형적인 예네.’

유치원 시절부터 주변 여자애들의 관심과 애정을 넘치도록 받아 온 은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따돌림의 양상은 심플했다. 서희를 교실에서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대다수는 서희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서희와 스칠 때 고의로 어깨를 툭 치거나 욕을 하기도 했다.

따돌림에 가장 적극적인 심통훈 무리는 서희의 책상에 놓인 필통을 몇 번이고 툭툭 떨어트려 펜을 일일이 줍게 하거나, 서희가 자리를 비운 틈에 책상에 낙서를 하고 교과서를 찢었다.

‘김서희는 대체 그동안 어떻게 버틴 거야? 전학도 안 간다고 한다더니.’

급식실에 간 은호는 평소와 다름없이 전용 요리사가 만든 도시락과 개인 수저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입맛이 워낙 까다로워서 단체 급식은 전에 있던 학교에서도 아예 먹지 않았다.

‘또 혼자 먹네.’

은호의 눈길이 넓은 테이블 한쪽에 앉아 조용히 밥을 먹는 서희에게 향했다.

“헐, 심통훈 저거 너무 심한 거 같은데.”

옆에 앉은 한 친구가 중얼거렸다. 은호 역시 소란이 일어난 테이블을 지켜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리들과 식사를 마치고 일어선 통훈이 애답지 않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서희의 어깨에 먹다 남은 반찬이 있는 식판을 부어 버린 것이었다.

“아, 쏘리.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 실수야.”

통훈의 느물거리는 사과에 옆에 있던 친구들이 실실거렸다. 축축한 시래기 건더기와 빨간 양념의 김치 등이 서희의 목덜미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며 깨끗한 옷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급식실에 있던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서희에게 쏠렸다. 얌전히 식사를 하다가 봉변을 당한 서희는 지금 벌어진 상황을 감당하기 힘든 건지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아 씨, 김서희한테서 김치 냄새 난다. 더러워.”

통훈이 코를 막았다. 그러자 통훈의 친구들도 똑같이 코를 막더니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없게 얜 울지도 않아. 놀릴 맛이 안 난다니까? 독한 년. 역시 악녀야, 악녀.”

통훈이 혀를 차며 친구들과 사라졌다. 서희는 몸에 묻은 음식물 쓰레기를 떼서 식판 한쪽에 담기 시작했다.

은호는 젓가락을 툭 내려놓았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너무 기분 나빠서 식욕이 떨어질 정도였다.

처음엔 열두 살짜리 애송이들이 친구를 괴롭혀 봤자 얼마나 심하겠나 했었다. 그런데 상상한 것 이상으로 악질인 놈이었다. 더는 느긋하게 지켜만 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우선 서희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업을 마친 뒤, 집에서 보낸 차를 타고 정문 쪽에서 멀지 않은 서희네 집으로 향했다. 뒷좌석에 앉아 무심결에 창문 너머를 응시하던 은호는 다급히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아저씨, 세워 주세요. 저 여기서부터 걸어갈게요.”

차문을 열고 내린 은호가 차가 지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희가 보였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 심통훈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야, 울어 보라니까! 이 악녀야. 아니다, 너 혹시 마녀야? 눈물 없어?”

통훈이 서희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게 자꾸 무시하네. 아, 김서희한테 냄새난다. 늙고 지저분한 할배랑 둘이 살아서 나는 냄새 같은데. 그치, 얘들아?”

저를 툭툭 치는 남자애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걷던 서희가 순간 우뚝 멈추었다. 서희는 뒤를 돌아 통훈과 눈을 마주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서희의 눈매에 통훈이 잠시 움찔했다.

“뭐, 뭐! 네가 꼬나보면 어쩔 건데? 친구도 없는 게.”

“우리 할아버지, 욕하지 마.”

“뭐야? 너 지금 나한테 개기는 거냐? 이게 진짜 미쳤나.”

화가 치민 통훈이 서희의 몸을 힘껏 밀어트렸다. 서희는 거칠고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얼굴 쪽이 부딪치지 않도록 간신히 손으로 땅을 짚으며 넘어진 서희의 손바닥이 까져 핏방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피가 나는 걸 본 졸개 중 한 명이 살짝 겁을 먹은 목소리로 통훈에게 말했다.

“토, 통훈아. 쟤 피 나. 어떡해?”

“뭘 어떡해? 고작 이딴 걸로 쫄고 있어? 쪽팔리게.”

“그치만 쟤가 담임 쌤한테 꼰지르면 어떡해?”

통훈은 재밌는 유머라도 들은 것처럼 킬킬거렸다.

“너네 쟤 할배랑 둘이 사는 거 잊었어? 아빠도 없이 태어난 애래. 쟤네 엄마는 미혼모로 쟤 키우다가 일찍 죽었고. 부모 없는 애 말을 누가 들어 주냐? 쌤도 무시할걸?”

통훈의 말에 양옆에 있던 두 아이가 안심한 듯 표정을 풀었다.

“하여간, 빌빌거리는 늙은 할배랑 구질구질하게 사는 주제에 잘난 척은 혼자 다 해. 퉤!”

통훈은 힘겹게 일어서고 있는 서희의 발 옆에 침을 뱉었다.

“야, 심통훈.”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에 통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사뭇 추워진 날씨에 고급스러운 코트를 입은 은호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너네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가?”

통훈은 기가 살짝 죽은 눈빛을 숨기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이미 반에서 자신보다 은호의 영향력이 더 커졌다는 것을 통훈 역시 알고 있었다.

“나 친구 괴롭히는 유치한 짓 하는 놈, 진짜 싫어하고 혐오하는데.”

“괴롭힌 거…… 아니야.”

통훈은 자존심이 팍 상한 얼굴을 하면서도 고분고분 답했다.

부모님에게 NC그룹의 친손자가 우리 반에 전학 왔다는 말을 했다가 요즘 아침마다 은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라는 닦달을 듣는 터였다. 폼 안 나게 굽신거리고 싶지는 않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는 녀석이었다.

“심통훈이랑 너희 둘, 한 번만 더 김서희 괴롭히다가 나한테 걸리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알겠어?”

심약한 졸개 둘은 오줌을 지릴 것 같은 눈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통훈은 예쁘장하게만 생겼지 주먹도 못 쓸 거 같은 은호가 저를 깔보듯이 말하는 게 무척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었다. 통훈은 은호의 뒤에 선 애꿎은 서희를 악랄하게 노려보고는 등을 돌렸다.

“너 피도 나잖아.”

서희의 까진 손바닥을 본 은호가 미간을 구겼다.

“사실 성질 같아선 똑같이 넘어트리고 몇 대 패 주고 싶었는데…….”

은호는 멀어진 심통훈 무리를 한 번 노려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친구 때리면 이유 불문하고 집에서 바로 쫓겨나거든. 저 녀석은 친구도 아니지만, 어쨌든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친구로 묶일 거야. 우리 집 이런 거에 좀 민감해서.”

“아니야. 고마워.”

서희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너 감기 걸렸어?”

은호는 금세 원인을 찾았다.

급식실에서 음식물을 뒤집어썼던 서희는 점심시간이 끝나고 조금 늦게 교실로 돌아왔다. 이 추운 날에 옷이 반쯤 젖어 있었다. 양념 있는 음식이 묻은 탓에 화장실에서 찬물로 열심히 세탁하고 온 모양이었다.

“은호야.”

겨우 기침을 멈춘 서희가 입을 열었다.

“오늘 일……, 아주머니한테는 말하지 마.”

“오늘 일? 급식실에서 있었던 일이랑 방금 저 자식들이 너 괴롭힌 거?”

“응.”

“왜?”

“아주머니가 아시면, 그럼 우리 할아버지도 알게 되니까. 할아버지가 아시면…… 속상해하셔.”

서희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만 왠지 조금 답답했다.

“어른들도 알 건 알아야지. 너 1학기 때부터 왕따 당했다며. 네가 그동안 계속 꽁꽁 숨겨서 할아버지도 최근에 겨우 아신 거고. 왜 바보같이 이 상황을 너 혼자만 계속 견디고 참는데?”

“상황을 아셔도 나한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니까 더 힘들고 슬퍼하실 거야. 어른들이 끼어들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서희는 지친 안색임에도 희미한 미소를 덧그렸다.

“그래두 나…… 당하기만 한 거 아니야. 이긴 적은 없어도 진 적도 없으니까.”

“진 적이 없다고?”

“애들이 놀리고 괴롭혀도 나 그 애들 앞에서 한 번도 운 적 없어. 앞으로도 전학 가거나 피하지 않을 거야. 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은호는 놀란 눈동자로 서희를 응시했다. 일주일 동안 애들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당하는 모습만 봐서 유약하게 여겼는데 생각보다 어른스럽고 단단한 마음가짐이다.

“마음에 들어.”

의미 모를 말에 서희가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난 비겁하고 구질구질한 애들 진짜 싫어해. 천박하고 꼴사납거든. 난 너처럼 심지도 굳고 자존심 있는 애가 좋아.”

은호는 서둘러 덧붙였다.

“아,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착각하진 말고.”

멍한 얼굴의 서희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내가 너랑 친구 해 주겠다는 뜻이니까.”

* * *

미술 시간은 다른 수업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야외에 나가도 좋으니 그리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스케치북과 그림 도구를 꺼냈다.

은호는 조용히 그림 도구를 챙겨 뒷문을 빠져나가는 서희를 발견했다. 궁금해져서 촉새 짝꿍에게 묻자 모르는 게 없는 녀석이 술술 알려 주었다.

“추워 죽겠는데 김서희 또 뒤쪽 숲에 가나 보네. 쟨 나무나 풀때기, 그딴 거 그리는 거 좋아해. 고리타분하게.”

은호는 하얀 도화지를 보다가 그릴 게 마땅히 생각나지 않아 일어났다. 문득 떠오른 서희를 찾으러 건물 뒤편의 나무가 우거진 공간으로 향했다. 한쪽에 놓인 벤치에 앉아 스케치북 위로 손을 움직이는 서희가 보였다.

“김서희.”

“어? 은호야.”

은호는 서희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뭐 그려? 어, 진짜 나무 그리고 있네.”

서희의 무릎에 놓인 스케치북을 휙 가져가서 구경했다. 서희는 은호가 자신이 그린 그림을 꼼꼼히 보고 있자 왠지 부끄러운 표정으로 손을 옴찔거렸다.

“너 되게 잘 그린다, 그림.”

“으응?”

“우리 반에서 제일 잘 그리는 거 같은데? 너 그림에 재능 있구나.”

“……재능?”

“응, 재능. 난 예체능 쪽으로는 전혀 재능이 없어서 공부만 파야 돼.”

아무런 말도 돌아오지 않자 은호는 스케치북에서 눈길을 들어 옆에 앉은 서희를 보았다. 서희의 커다란 두 눈동자가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왜 그래?”

“나…… 그런 말 처음 들어.”

“어?”

“재능 있다는 말, 처음 들어 봐.”

속삭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수줍으면서도 무척 기쁜 눈빛. 발그레 달아오른 두 뺨.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은호는 심장이 살짝 아프게 지끈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찡- 하고 울린다고 해야 할까.

뭐지, 이게.

너무 연약한데 또 너무 선한 생물 같아서 옆에서 챙겨 주고 보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올라오고 있었다. 모성애, 아니 자신은 남자니까 이건 부성애다. 부성애가 샘솟는 기분을 느꼈다.

“흠, 흠.”

은호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서희가 가져온 색연필을 들었다.

“근데 왜 갈색하고 검은색만 쓰고 있어? 다른 색도 칠하면 훨씬 멋질 거 같은데.”

그러나 색연필 케이스 뚜껑을 열어 본 은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24색짜리 색연필인데 일단 반쯤 비어 있는 데다가, 남은 대부분의 색연필들은 반으로 부러져서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설마 이것도 심통훈이 그랬어?”

“……응.”

가슴 한구석이 화로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비뚤어지고 못된 녀석이 다 있나 싶다.

“얼른 새 거 사.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는 거 같은데.”

서희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안 사? 왜?”

“산 지 얼마 안 된 건데…… 할아버지한테 미안해서.”

서희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서희의 말에 은호는 인상을 찡그렸다.

얜 정말…… 부성애 자극이 장난이 아니다.

오늘 집에 가면 엄마한테 당장 100색짜리 최고급 색연필을 사서 서희에게 주라고 해야겠다. 전문가들이나 쓸 법한 제일 좋고 비싼 녀석으로.

* * *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데 익숙한 무리가 보였다. 심통훈과 그 옆을 졸개처럼 따르는 두 남자애.

“김서희, 그 재수 없는 년. 내가 고백할 때는 싫다고 하더니 강은호한테는 아주 헤벌쭉거리는 거 봐. 얼굴이랑 돈만 보는 속물이야, 그 계집애는.”

“그, 근데 통훈아, 은호가 또 서희 괴롭히면 가만 안 둔다고 했잖아. 그림 그렇게 찢으면 안 되지 않아? 그것도 김서희 앞에서……. 김서희가 은호한테 이르면 어떡해?”

통훈은 코웃음을 치며 찢어진 도화지를 한 손으로 꽉 구겼다.

“이르라고 해. 그 계집애, 이번엔 진짜 가만 안 둬.”

공처럼 뭉쳐진 종이를 툭 내던지자, 뒤에 서 있던 은호가 그것을 주웠다. 표정이 사라진 은호는 구겨진 것을 천천히 펼쳤다. 반으로 쭉 찢어진 도화지였다. 그것을 이어 붙이자 아까 서희가 열심히 그렸던 큼지막한 단풍나무가 드러났다.

‘나…… 그런 말 처음 들어.’

‘어?’

‘재능 있다는 말, 처음 들어 봐.’

머리에 피가 확 몰리는 것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통제되지 않는 강렬한 분노였다.

“야, 심통훈.”

낮게 부른 음성이 은호라는 것을 알아차린 통훈이 뒤를 도는 순간이었다. 은호는 단숨에 다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통훈의 얼굴에 꽉 쥔 주먹을 내리꽂았다.

* * *

병원 복도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은 은호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쫓겨나게 생겼네.”

끝 간 데 없이 화가 치미는 느낌과 함께 인정사정없이 통훈을 후려갈기고 짓밟았다. 은호의 기세에 졸개 둘은 말릴 생각도 못 하고 주변에서 벌벌 떨기만 했다.

물론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통훈의 주먹에 일부러 몇 대 맞아 주기도 했다. 그래야 일방적으로 때린 게 아니라 애들끼리 서로 치고받고 싸운 거라고 주장할 수 있으니.

복도를 지나가던 옆 반 선생님의 호통으로 정신을 차렸을 땐 얼굴이 코피로 범벅이 된 통훈이 복도에 축 쓰러져 있었다.

은호는 여섯 살 때부터 합기도를 배웠다. 또래 아이들 중에선 힘도 센 편이었다. 종합 격투기 경기를 즐겨 보는 둘째 형이 틈만 나면 은호를 인형 삼아 기술을 걸어 대는 탓에 맷집도 강했다. 그 악마 덕분에 어려서부터 싸움의 기술과 악바리 같은 근성은 저절로 터득 가능했다.

은호는 붕대를 감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통훈을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손을 다칠 정도였다.

“강은호!”

선생님들이 화를 낼 때도 평온하던 은호의 얼굴이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졌다. 이제 막 병원에 도착한 경진과 성한이 숨이 찰 만큼 급하게 뛰어오고 있었다. 경진은 물론 온화한 성한까지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친구를 때려? 강은호, 엄마가 친구 때리는 것만은 절대 용납 안 한다고 누누이 경고했지. 어떤 일이 있어도, 친구가 먼저 시비를 걸고 잘못을 하더라도 말로 풀어야지 폭력은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너 이렇게 제멋대로 살 거면 집에서 내쫓…….”

“서희 괴롭힌 놈이 그 새끼야.”

“……뭐?”

엉망으로 찢기고 구겨진 도화지를 떠올리자 은호는 화를 참을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서희 괴롭히고, 서희한테 부모 없다고 욕하고, 서희 밀쳐서 다치게 하고, 서희 그림도 찢고 따돌린 게 다 그 새끼라고!”

여기서 등짝을 맞을 포인트는 두 군데에 있었다. 일단 친구를 때리는 중죄를 저질러 놓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잘못 없다는 듯이 군 것, 두 번째는 감히 어른 앞에서 새끼라는 상스러운 표현을 입에 담은 것.

등짝에서 불이 날 것을 어느 정도 예감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경진과 성한은 약속한 것처럼 그대로 서서 잠시 침묵했다. 의문스러운 눈길을 들자 경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때려 줬어?”

“……어?”

“잘했어. 우리 아들, 기특해.”

성한까지 합세해서 은호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희 괴롭힌 놈도 혼내 주고, 우리 은호 멋지네.”

은호는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반응에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강은호.”

경진은 아직은 여리고 작은 은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 괴롭히는 건 참아도 서희 괴롭히는 건 절대 참지 마. 서희 괴롭히는 놈 찾아서 혼내 주고, 말 안 들으면 말 들을 때까지 두들겨 패 줘. 그건 폭력이 아니라 정의야. 그러라고 너 합기도 시킨 거야. 앞으로도 서희 네가 지켜 줘야 돼. 알았어?”

변호사 입에서 폭력이 정의라는 말까지 나온다. 기가 막혀서.

혼나지 않고 내쫓기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하기도 잠시, 슬며시 빈정이 상했다. 나 괴롭히는 건 참아도 서희 괴롭히는 건 참지 말라고? 이 사람들, 누구 부모야?

“오늘 우리 은호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겠다. 형들은 빼고 셋만 오붓하게 식사하자. 좋지?”

은호가 형들을 떼어 놓고 엄마 아빠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을 훤히 알기에 건네는 말이었다.

“진지하게 하나만 물을게.”

은호는 어두워진 눈동자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진짜 이 집 친아들 맞아?”

허무맹랑한 말에도 경진과 성한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뭐야.’

은호는 어쩐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진짜 이 집 친자식이 아닌 건가. 신생아 때 산부인과에서 김서희와 바뀌었는데, 키운 정으로 계속 말 못 하고 있을 뿐인가.

‘하지만 걔랑 난 앞에 달린 것도 다른데. 헷갈릴 건덕지가 있나?’

은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이마를 긁적였다.

* * *

은호는 반에서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모두가 싫어하면서도 무서워하는 통훈을 흠씬 두들겨 패서 혼쭐을 내 주었으니 아이들에게 은호는 마치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한 분위기였다.

“너희들한테 정말 실망했어.”

늘 생글거리며 웃던 은호가 표정을 굳힌 채 아이들을 훑었다.

“왕따 같은 건, 진짜 못 배우고 상스러운 학교에나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 전에 있던 학교보다 너희가 있는 이 학교가 훨씬 좋아지려고 했는데 어떻게 다 같이 친구를 따돌릴 생각을 해? 너무 소름 끼치고 끔찍하다.”

은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아이들은 풀이 죽어 입술을 움찔 떨었다.

“나 서희랑 친구 하기로 했는데, 서희가 거의 1학기 초부터 내내 왕따 당했다는 거 알고 얼마나 화났는지 알아? 난 내 친구가 누구한테 당하는 거 절대로 못 봐. 내 친구 건드리는 인간은 어떻게든 쫓아가서 벌주고 끝까지 짓밟을 거야.”

“으, 은호야. 우리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도 서희 왕따 시키는 거 싫었는데…… 심통훈 그 자식이 계속 협박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우리도 진짜 반성하고 있어.”

“정말 반성하고 있어?”

“응!”

아이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희, 앞으로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거지?”

“응?”

“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 없거든. 고작 몇 대 맞았다고 그 녀석이 지금까지 김서희 왕따 시킨 게 흐지부지되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서희는 1년 가까이 괴롭힘당했는데. 안 그래?”

“아, 그…… 그렇지.”

“심통훈도 친구를 따돌리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이대로 두면 걘 6학년 올라가서도 누구 괴롭히고 왕따 시켜서 서희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길 게 분명해. 그게 너희가 될지도 모르고. 난 이번 기회에 심통훈의 그 못된 성격을 뜯어고쳐 줄 생각이야. 그러려면 너희도 협조를 해야 해. 너희, 내 편 맞지?”

내 편이 아닌 녀석들은 어떻게든 벌주겠다는 눈으로 싱긋 웃자 모두가 겁을 집어먹은 채 다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하려는 건 통훈이가 한 것 같은 왕따가 아니야. 통훈이에게 깨달음을 주려는 거야. 부모님도 선생님도 통훈이를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으니 친구인 우리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어? 이건 다 통훈이를 위해서이기도 해. 얘들아, 잘할 수 있지?”

아이들이 신이 나서 합창하듯 답했다.

“응!”

그렇게 반에는 다시 왕따가 생겼다.

왕따가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거라는 은호의 조곤조곤한 설득에 아이들은 서희 때보다 더 적극적이고 악랄하게 변해 갔다. 반 아이들 모두가 통훈을 볼 때마다 공식 별명이 된 돼지뿐만 아니라 갖가지 욕을 퍼부었다.

특히 그동안 만만하다는 이유로 통훈의 샌드백이 되었던 몇 명의 남자아이들은 쌓인 게 많았는지 은호의 위세를 업고 쉬는 시간마다 통훈을 괴롭혔다. 엎드려서 자는 척을 하는 통훈의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 딱딱한 지우개를 통훈의 머리통에 맞추며 시시덕거렸다.

자존심이 강한 통훈은 날마다 더욱 강도가 높아지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교문을 나오는 순간 눈물을 쏟곤 했다.

* * *

며칠 뒤 점심시간, 급식실의 한 테이블에 앉아 평소처럼 도시락을 펼친 은호는 맞은편에 앉은 민웅을 보며 친근한 미소를 지었다. 민웅의 어깨가 파르르 들썩거렸다.

“민웅아, 왜 그래?”

민웅은 통훈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던 졸개 중 한 명이었다. 오늘 은호는 원래 함께 점심을 먹던 아이들이 아니라, 민웅과 단둘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내가 무서운 거야?”

“어, 어? 아니, 그게…….”

“나 무서워하지 마. 우리 친구잖아. 너도 저번에 통훈이 버리고 내 편 하겠다고 분명히 대답했잖아. 아니야?”

부드러운 말투에서 뼈가 느껴졌는지 민웅은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친구 하기로 했으면 날 무서워할 이유가 없는데. 날 배신하지 않는 이상.”

“으, 응. 근데 왜 우리 둘이서 밥…….”

더듬더듬 힘겹게 묻는 민웅을 빤히 보던 은호는 살짝 몸을 낮추더니 목소리를 줄였다. 은밀히 속삭이는 말에 민웅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갔다.

“선생님한테 혼날 걱정은 안 해도 돼. 넌 벌레가 떨어진 국을 다시 받으러 가다가 발을 헛디뎌서 실수하는 것뿐이니까. 나랑 애들이 다 그렇게 증언해 줄 거야.”

은호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내 부탁 들어줄 거지?”

“그, 그치만 은호야…….”

“왜. 하기 싫어?”

은호의 다정한 음성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건…… 너무 심한 거 같아. 통훈이 지금도 애들한테 충분히 벌받고 있으니까 그건 그냥 안 하면…….”

“뭐야. 너 심통훈 걱정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죄책감 든다거나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하지 마. 심통훈이 죄 없는 김서희 괴롭힐 때는 옆에서 웃는 걸로도 모자라서 너도 아주 적극적으로 괴롭혀 놓고, 심통훈한테는 왜 못 하는데? 너 나랑 장난해?”

은호가 젓가락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그 작은 소리에도 민웅은 눈동자를 바르르 떨었다.

“죄 없는 친구는 죄의식 없이 잘만 괴롭혀 놓고, 애들한테 다 피해 줬던 놈은 불쌍해서 안 괴롭히는 거면 넌 그냥 쓰레기장에 내버리는 게 나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야. 난 쓸모없는 녀석이랑은 친구 하기 싫은데.”

민웅의 눈이 안타까울 정도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은호는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구민웅, 너도 심통훈처럼 되고 싶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통훈이 혼자 앉아 있는 자리로 저벅저벅 걸어간 민웅은 통훈의 팔에 국이 든 그릇을 부어 버렸다.

“아악!”

받아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이 나는 뜨거운 국물이 닿자마자 통훈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을 들으며 은호는 도시락에 든 고슬고슬하게 지어진 밥을 차분히 떠먹기 시작했다.

* * *

학교가 끝나고 아이들이 모두 떠난 교실, 자리에서 일어난 은호는 제게로 쭈뼛쭈뼛 다가오는 서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저, 그게…….”

통훈을 혼쭐내는 동안, 서희와는 한 번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다가와서 고맙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가끔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나 하는 서희가 안 그래도 요즘 살짝 괘씸하던 차였다.

은호는 자신과 달리 서희의 천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지금 서희가 뭐가 됐든 왕따는 나쁘다는 고리타분한 말이나 늘어놓는다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교실을 나갈 생각이었다.

“……떡볶이 좋아해?”

뜬금없는 물음에 은호가 눈을 크게 껌뻑였다.

떡볶이?

“같이 먹으러 갈래?”

은호와 눈이 마주치자 서희가 뺨을 살짝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그동안 무서워서 피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은호는 어느새 마음이 풀렸다.

“내가…… 사 줄게.”

서희가 눈까지 질끈 감은 채 용기를 한가득 쥐어짠 얼굴로 말했다. 숨까지 꾹 참으며 은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호는 혀를 찼다. 쟤는 진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까지 부성애가 끓어오르게 만든다.

“좋아.”

“……응?”

“학교 앞에 삐삐였나. 거기 떡볶잇집이지? 애들 자주 가는 거 같던데.”

사실 검증되지 않은 식당은 가지 않는 주의지만 김서희가 거절당하면 울 것 같은 얼굴로 저렇게 간절하게 부탁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같이 가 줘야지, 뭐.

“거기 말고…… 골목 조금 들어가면 더 맛있는 곳 있어.”

서희가 제법 자신 있게 추천했다. 긴장하고 있던 표정도 살짝 밝아졌다. 떡볶이를 꽤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은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서희와 함께 교실을 나섰다.

“나는 네가 나 무서워서 그동안 피하는 줄 알았어.”

“그런 거…… 아니야.”

“그래도 나 못된 애라고 속으로는 조금 뜨악했잖아. 아니야?”

서희는 억울하다는 듯 급히 입술을 열었다.

“은호 너…… 천사 같아.”

“천사?”

천사라는 칭송을 얻었는데도 은호의 얼굴은 살짝 떨떠름했다. 객관적으로 따져도 자신이 천사처럼 착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누가 봐도 자신은 천사보단 악마 쪽에 가까운데. 얘가 은근히 사람을 비꼬나 싶었다.

“……수호천사.”

서희가 수줍게 떨어트린 그 단어에 어느새 은호의 입꼬리가 뿌듯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거면 이해가 간다.

그래, 내가 괴롭힘당하는 서희를 구해 줬으니까. 수호천사라, 꽤 마음에 드는 수식어였다.

골목 안쪽에 있는 분식집에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은 서희와 은호가 마주 보고 앉았다. 분식집 주인아주머니가 오랜만에 온다며 서희를 무척 반가워했다. 메뉴 주문을 마치자 은호가 서희에게 물었다.

“얼마 만에 오는 건데?”

“음…… 1년?”

“4학년 때 애들이랑 자주 오다가 5학년 때는 안 온 거야? 같이 올 친구 없어서?”

서희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혼자 오면 아주머니가…… 걱정하실 거 같아서.”

그렇게 대답하고는 순하게 웃는다. 은호는 갑자기 표정이 심각해졌다.

“김서희.”

“응?”

“너 새끼 동물들이 왜 다 귀여운지 알아?”

서희는 모른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게 다 생존 전략이야.”

“생존 전략?”

“새끼 때는 무조건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잖아. 안 그러면 생명을 위협당하니까. 연약하고 귀여운 걸 지키고 싶은 보호 본능이라는 게 있어서 새끼가 귀여워야 생존할 확률이 높은 거지. 가끔 보면 어떤 동물이 다른 동물 새끼를 보듬고 키우고 있다는 기사도 나오잖아.”

어디서 대충 읽은 것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뱉은 말에 서희는 집중하듯 눈을 반짝였다.

“은호 너, 정말 똑똑하다. 그런 건 어디서 알게 된 거야?”

“책에서.”

서희가 멋지다는 듯이 바라보는 게 느껴지자 은호는 어깨가 으쓱거렸다.

“난 하루에 책 두 권씩 읽어. 많으면 세 권도 읽고. 서희 넌 하루에 책 몇 권 읽어?”

“나? 나는…… 그렇게 많이는 못 읽어.”

“더 나이 들면 책 읽을 시간도 없대. 시간 많은 초등학생일 때 최대한 읽어 놔야 머리 텅텅 빈 어른이 안 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서희 너도 앞으로 책 많이 읽어. 알겠지?”

“으응.”

“넌 주로 무슨 책 읽어? 난 요즘은 유명 고전들 위주로 읽고 있어.”

원래 잘난 척이 특기인 은호였다. 절로 으스대는 말투가 나왔다.

“나는 도감 좋아해.”

“도감?”

“응. 나무 도감이랑 풀 도감 같은 거.”

서희가 해사하게 웃는다. 은호는 순간 자신이 원래 하려던 말을 뒤늦게 떠올렸다.

“너 개들이 왜 다 귀여운지는 알아?”

“아, 아니.”

“개의 조상이 늑대거든? 원래 늑대들은 인간과 적대적인 관계였는데, 늑대들 중에서 인간한테 친화적으로 구는 돌연변이 녀석들이 생겨나. 그 녀석들이 인간한테 길들여지기를 선택하면서 협력 관계가 된 거지. 그렇게 인간과 공존하면서 생김새가 바뀌기 시작한 거야. 귀엽게 생길수록 인간들한테 선택받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으니까. 결국 귀여움이 생존력을 높인 거지.”

서희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감탄했다.

“와, 그건 어떻게 안 거야?”

“이건 코스모스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봤어.”

“코스모스? 나도 코스모스 꽃 진짜 좋아하는데. 다른 꽃도 다 좋지만.”

“뭐어? 그 코스모스는 코스모스 꽃이 아니라…….”

은호는 말을 끊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누군가를 비웃을 때 자주 사악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지만 지금은 서희를 비웃는 게 아니었다.

“너…… 생존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

결국 돌고 돌아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왜 저렇게 귀여운 거야.

“응?”

서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이다.

은호는 신기한 눈으로 서희를 응시했다. 자신도 한 귀여움 하지만 김서희에 비할 바는 못 되는 것 같다.

얄미운 짓을 저지르고도 어른들에게 ‘귀여워서 봐준다’는 말을 종종 듣는 은호였다. 저는 어느 정도의 가식으로 귀엽고 순수한 아이를 연기한다면 서희는 거짓 하나 없이 맑은 귀여움을 지니고 있었다.

“은호야.”

“왜?”

“나…… 전에 엄마한테 소원 빌었는데…….”

“전에? 제사 때?”

“응. 근데 소원이 이루어졌어.”

서희가 까만 눈동자에 은호를 담으며 말했다. 은호는 컵에 물을 따르며 무심히 물었다.

“무슨 소원이었는데? 애들한테 왕따 안 당하고 심통훈 벌받는 거?”

“아니.”

눈을 들자 서희가 뺨을 붉히며 수줍게 웃는다.

“……은호 너랑 친구 되는 거.”

은호는 멍한 눈길로 서희를 보았다. 가슴이 다시 찡, 울린다. 열두 살 소년에게 부성애를 느끼게 만드는 애는 세상에 김서희밖에 없을 거다.

“그러니까…… 나도 은호 네 소원 들어주고 싶어. 네가 나랑 친구 해 줬으니까.”

“소원?”

은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중에 말해도 돼?”

“응?”

“지금 네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되게 한정돼 있잖아. 내가 원하는 걸 네가 들어줄 능력이 아직 없다는 뜻이야. 너무 서운하게 듣지는 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거니까.”

“아…… 응. 알겠어.”

서희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중에, 한참 나중에 네가 그래도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능력이 어느 정도 됐을 때 소원 써도 되는 거지?”

서희는 어쩐지 기쁜 얼굴로 물었다.

“그럼…… 한참 나중에도 우리 친구인 거야?”

은호는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물을 쭉 마셨다. 쟤는 정말 너무 귀여워서 큰일이다.

“아마도.”

은호와 서희의 친구로서의 긴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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